유리 진열장은 세 칸이었다
몸 하나가 겨우 지나갈 틈으로 돌아가면
맞은편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같은 진열장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무릎을 접고 있다가 맞은편의 눈과 마주쳤다
여기요
저 은색 좀 보고 싶어요
백 년도 더 된 그것 맞지요?
반대편의 그것은 쉽게 내 손에 놓였다
여기 은색 속 이 작은 은색 동그라미 지워질까요?
세정제로 닦으면 지워질까요?
무엇으로 닦으면 지워질까요?
안 지워져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아 선물할 거라서요
이미 펴고 있던 무릎 뒤에 힘을 주고
아 알겠어요
돌아 나오는데
당신이 좋아하는 색을 떨어뜨리면
그 백 년도 넘은 작은 동그라미는 가려질 텐데
유리 진열장 안에
모래시계 만년필 연필
가죽 필통
중간중간 크리스마스카드와
사과 새 있었다
검은 사과 있었다
투명한 사과 있었다
초록 사과 있었다
들어찬 것들은 모두 빛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맨 위 칸에 새가 있었다
아주 작은 빛을
아래로 아래로
알처럼 떨어뜨리고 있었다
- 계간〈상상인〉2024년 여름호 -
사진〈Pinterest〉
초겨울 울타리
이 원
한동안 아니 어쩌면 내내
사람에게서 구한 것들이 있었다.
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걸 신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을까.
내가 나를 구할 때만
신은 나타났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나를 구하겠다 마음먹을 때
내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어려울 때
나도 모르는 문장이 떠올랐고 그 문장이 떠오르자
진정되었고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이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이라면
나는 신을 만났을 것이다.
- 시집〈물끄러미〉난다 -
사진〈Pinterest〉
거리에서
이 원
내 몸의 사방에 플러그가
빠져나와 있다
탯줄 같은 그 플러그들을 매단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비린 공기가
플러그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몸 밖에 플러그를 덜렁거리며 걸어간다
세계와의 불화가 에너지인 사람들
사이로 공기를 덧입은 돌들이
둥둥 떠다닌다
오늘은 일요일이야 손과 손을 마주 붙이며 거울을 포기하지 사람들은 거기를 기도라고 불러 내미는 손이 없어 잡을 수 있는 손도 없지 안식일보다 급한 고통은 없는 법이니까
오늘은 일요일이야 거리는 적막하지 사람들은 신들의 거처에 몰려 있거나 침대 가장자리에 숨어 있지 적막하면 얼굴을 뒤집어쓰기 좋지 순식간에 얼굴은 복면이 되지 쫄깃쫄깃한 입술은 씹기 좋지 말은 왜 밖으로 나가게 설계되었을까 마치 고해성사라도 되는 것처럼
오늘은 일요일이야 고층 건물들의 창은 일제히 닫혀 있어 허공의 말이란 말은 다 나타났지 유령들은 그 말속으로 홀러들었지 챙챙 칼날로 스며들었지 거리에는 단맛이 진동했어
세상은 소리 한 톨 없었지 죽은 사람들이 쿵쾅쿵쾅 발소리를 내며 뛰쳐나오기 딱 좋은 날이야
- 계간〈자음과 모음〉2023년 겨울호 -
사진〈Pinterest〉
성냥이 불을 일으키면
이 원
나는 꽃을 선물받은 적이 많아요 타들어가는 불꽃을
내내 보는 심정이었달까요 두 손을 모두 사용해 시든 꽃을 망가뜨렸어요
나는 케이크를 산 적이 많아요 별별 케이크를 다 샀어요
종이 상자를 열면 서랍을 열면 방을 여는 것처럼
자꾸자꾸 번지는 메아리를
숫자 초 1이 꽂히는 장미 한 송이 모양의 케이크를
상상하면
성냥이 메아리에 불을 일으키면 열렬하게 귀가 빨개지면
구름이 덜컥 문을 열고 들어와요
내일은 엽서를 다 쓸 수 있다고 해요
마음을 햇빛에 내 말릴 수 있다고 해요
- 시집〈물끄러미〉난다 -
〈이원 시인〉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세계의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봉지>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사랑은 탄생하라' '나는 나의 다정한 얼룩말', 산문집으로 '산책 안에 담은 것들' '최소의 발견' '시를 위한 사전'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형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에서 시창작 수업을 하고 있다.
Dominic Miller - Cruel But Fair (from the new album 'Vagab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