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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85. [역경의 열매] 홍덕선 <1-10> “붓글씨로 말씀 전하는 달란트 주심에 늘 감사”
주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하신 덕분… 기독서예단체 10년째 이끄는 보람
기독 서예가 홍덕선 장로가 최근 서울 양천구 자택에 있는 서실(書室)에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지난 6월 30일이었다. 내가 창립 때부터 이끌고 있는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설립 10년째를 기념해 서울 종로구 백악미술관에서 ‘한국기독교서예협회전’을 개최했다. 협회 회원 34명이 출품한 작품을 내건 전시회였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해 2007년 4월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서예로 말씀을 전하는 기독 서예가들의 공동체로 신진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이날 전시회를 앞두고 예배를 드리면서 감정이 복받쳤다. 백악미술관이 있는 서울 인사동은 온갖 미신에 기대 만들어진 우상(偶像) 조각품이 난립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새긴 작품을 내걸었다는 게, 그런 단체를 10년째 이끌었다는 게 나를 감격시켰다. 회원들은 목청껏 주님을 찬양했고, 뜨거운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나는 한평생 붓에 의지해 살아온 서예가다. 거친 인생의 풍파를 이겨내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주님의 사랑 덕분이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는 말씀처럼 내가 내디딘 발걸음마다 주님이 함께했다. 주님은 나보다 한걸음 앞에서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셨다.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코너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뒤 백지를 꺼내 검정색 볼펜으로 내 삶을 써내려갔다. 이 코너로 굴곡진 인생 역정을 전한 분들에 비하면 내 삶은 평탄했던 편이다. 재미나 감동이 덜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용기를 내 내 삶을 전하기로 한 건 말씀을 종이에 새기는 서예가로 살아온 독특한 이력이 많은 이에게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내 고향은 충남 아산 인주면에 있는 금석리라는 마을이다. 금석리는 그 시절 농촌이 대부분 그러하듯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이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자동차를 구경했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소풍을 갔다가 기차를 처음 봤다.
우리집은 이른바 ‘양반 집안’이었다. 사랑채에서는 항상 누군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렸고, 집안 곳곳에 지필묵(紙筆墨)이 있어 어린시절부터 글을 읽고 쓰는 데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삼강오륜을 삶의 철칙으로 여기는 분이었다. 명절 때면 동네 인근에 있는 조상님 묘소를 찾아가야했는데 힘이 들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에 아버지를 따라 기꺼이 성묘에 동참했던 기억이 난다.
6·25를 겪긴 했지만 워낙 어린시절이어서 기억에 남는 일은 별로 없다. 행여나 폭격을 당할까 염려해 어르신들이 한밤중에 등잔불도 못 켜게 단속했던 일, 만약에 있을 공습에 대비해 집 뒤뜰에 방공호를 파던 어른들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훗날 주님의 종으로 거듭났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교회에 나간 적 없는 사람이었다. 유교에 기반을 둔 가풍(家風) 아래에서 자란 탓에 교회에 나가는 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건 집에서 40리(약 16㎞) 거리에 있는 온양중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 [역경의 열매] 홍덕선 <1> “붓글씨로 말씀 전하는 달란트 주심에 늘 감사”
* [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 [역경의 열매] 홍덕선 <5> 내 주변 사람들 잇따라 예수 영접하는 '은혜'
*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 [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 [역경의 열매] 홍덕선 <8> "성경 말씀만 쓰겠다"… 본격 기독서예가의 길로
* [역경의 열매] 홍덕선 <9> 기독교 문화 전파 위해 '예술 선교' 단체 이끌어
* [역경의 열매] 홍덕선 <10·끝> "백지에 성경을 쓸 때마다 말씀의 무게 실감"
◇약력=△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동아미술제 1·3회 입선, 국전 24·27회 입선, 대한민국미술대전 1·3·4·5회 입선 △한기총선교예술대상, 기독교문화대상, 한국기독교미술상 서예부문 수상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회장,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 회장,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심사위원 역임 △현 한국기독교서예협회 회장, 서울 목동중앙교회 원로장로.
***[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유교 집안 부모님 모르게 교회 나가… 붓글씨 소질 발견하고 서예가 결심
홍덕선 장로가 충남 예산농고 2학년에 재학할 때 찍은 증명사진. 홍 장로는 고교 시절에도 붓글씨로 유명한 학생이었다.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문맹(文盲)이 많았다. 주민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아버지도 농사꾼이었다. 다른 집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이어서 마을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주민들은 자식들이 전장에서 편지를 보내오면 편지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께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유년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게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교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붓과 먹, 종이는 내게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붓을 가지고 노는 게 일상이었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저런 글씨를 써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예에 소질이 있다는 걸 실감한 건 금석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붓글씨를 쓰는 시간이었는데, 학급 아이들이 우르르 내 자리로 몰려와 내 글씨를 구경했다. 기분이 좋았고, 붓글씨에 애착을 갖게 됐다.
어느 날인가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 “덕선이는 앞으로 서예가로 대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억도 난다. 어떤 어르신들은 나를 “서예 신동”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있는 온양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독립하면서 처음엔 노느라 바빴다. 한때 성적은 전교생 490명 중 485등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서예였다.
교회에 처음 나간 것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친구 따라 이곳 삼일교회에 다녔다. 부모님은 내가 교회에 나가는지 전혀 몰랐다.
신앙심은 없었지만 친구와 어울려 교회에서 노는 게 마냥 좋았던 것 같다. 만약 그 시절 하나님을 못 만났다면 내 삶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한 학교는 충남 예산에 있는 예산농고였다. 예산농고는 당시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학교였다. 충남 지역 관공서에는 예산농고 출신 공무원이 수두룩했다. 예산농고에 합격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고교 시절에는 예산중앙교회에 출석했다. 친구들이 농담 삼아 나를 ‘홍 장로’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지금 장로가 된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군(郡)이나 도(道)에서 주최한 서예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나는 서예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붓글씨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였다.
고교 시절을 추억하면 1964년 가을 어느 날이 떠오르곤 한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경복궁을 찾았다. 때마침 경복궁에서는 서예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회장 한쪽에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의 작품이 내걸려 있었다. 원곡 선생은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분이었다. 너무 훌륭한 글씨여서 한참동안 작품을 감상했다. 훗날 원곡 선생이 나의 스승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3> ‘취업 알선’ 믿었다가 송아지 판 목돈 사기 당해
펜글씨 학원서 강사로 일하면서 원곡 선생 밑에서 본격 서예 배워
홍덕선 장로(가운데)가 1980년 4월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스승인 원곡 김기승(오른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1965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나의 진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당시 서울에는 6촌 형님이 살고 계셨는데 “서울에서 먹고 살려면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내 특기는 글씨를 잘 쓰는 거였으니 펜글씨를 배워보기로 마음 먹었다.
신문을 보고 찾아간 펜글씨 학원은 서울 을지로3가에 위치한 ‘중앙펜글씨학원’이었다. 한 달쯤 다녔을까. 어느 날 학원 강사가 나를 불렀다. “너는 글씨를 잘 써서 가르칠 게 없다.”
결국 그해 4월 나는 충남 예산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학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사로 학생들에게 펜글씨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이었다. 다시 상경했고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펜글씨만 잘 쓰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던 시대였다. 학원 수강생 중에는 내로라하는 기업 임원도 많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기를 당한 것도 그때였다. 어느 날 학원에서 만난 한 남성이 식사를 하자고 불러 나를 꼬드겼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돈을 주면 한국전력 취업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아버지는 내게 송아지를 판 목돈을 건넸다. 한국전력 취업을 약속받았으니 학원 강사도 그만뒀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약속을 지키라고 윽박 지르니 의약 관련 신문사에 취직시켜주는 것으로 갈음하겠다고 했다. 신문사에 입사했지만 내게 주어진 일은 신문 배달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에 크게 낙심했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결국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광화문에 있는 한 펜글씨학원에 취업해 다시 학생들을 상대로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
서울에 상경해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교회에는 꼬박꼬박 나갔다. 성경 말씀을 외우며 묵상하는 일도 많아졌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한 구절은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펜글씨를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서예가가 되겠다는 꿈을 잊은 적은 없다. 꿈을 현실로 바꾸기 위한 첫 걸음은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을 만나뵙는 일이었다. 이듬해 4월 서울 적선동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찾아갔다. 엄청나게 큰 기와집이었다.
당시 나는 내 글씨 솜씨가 최고라고 자부하던 청년이었다. 원곡 선생 앞에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붓글씨를 썼다. 하지만 원곡 선생은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대번에 그 종이를 던져버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의미였다. 자만에 가득차 있던 나는 선생의 반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나를 제자로 받아줬다. 그때를 생각하면 선생 자택을 방문하던 내로라하는 명사들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1926∼1980), 한국도로공사 사장 등을 역임한 윤필용(1927∼2010) 등이 선생의 서실(書室)을 방문해 글씨를 배우곤 했다.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퇴근 이후 일주일에 한두 차례 선생 자택을 방문해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 서예가로서 내 인생이 시작된 시기였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4> ‘훈련소 유급’ 고난 뒤 선망하던 부대에 배치돼
펜글씨 강사 경력으로 행정병 복무… 하나님의 선물에 거듭해 감사 기도
홍덕선 장로가 육군본부에 복무하던 시절 서예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스무 살쯤 됐을 때다. 나는 내 호(號)를 직접 지었다. 봄 춘(春)에 언덕 파(坡)를 합친 ‘춘파’.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의 언덕처럼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될 리는 만무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고난이 끊이지 않았다.
1967년 7월, 나는 군에 입대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찾아왔다. 사격훈련에서 낙제점을 받는 바람에 그만 유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고동락한 동기들은 자대에 배치되는데 나 혼자 덩그러니 훈련소에 남아 다음 기수 훈련병과 또다시 훈련을 받아야 했다.
당시 느낀 자괴감은 엄청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혹독한 훈련 과정을 다시 밟는 것도 힘들었다. 내 이름 앞에는 이른바 ‘고문관’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렇게 훈련 과정을 다시 밟은 뒤에야 자대 배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배치된 곳은 서울 삼각지에 있던 육군본부. 당시만 해도 육군본부는 많은 훈련병이 선망하던 부대였다. 이른바 힘 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육군본부였다. 하나님이 고난 뒤에 선물을 준비해놓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거듭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육군본부에 가서도 좋은 일은 계속 일어났다. 자대 배치 첫날 내 신상명세서를 보던 상관의 시선은 한곳에서 멈췄다. 입대 전 내가 펜글씨 강사로 일했다는 내용이었다.
군대에서도 글씨 잘 쓰는 사람은 대접받던 시대였다. 나는 본부에서도 많은 장병들이 선호하던 인사행정과에 배치됐다. 일병으로 진급한 뒤에는 인사행정과에서 같이 일한 상관이 육군 참모총장 비서실로 발령이 나면서 나 역시 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군대에서도 내 붓글씨는 유명했다. 상관들이 붓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면 종이와 붓으로 글씨를 써서 전달하곤 했다.
하지만 군 시절 내내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군에 입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홉 살 아래 여동생이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몸이 마비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태가 호전돼 걸을 수 있게 된 건 2∼3년 뒤였다. 하지만 이후 동생은 정신분열증을 앓기 시작했다.
80년의 어느 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동생은 충북 옥천의 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충북 청주의 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 병원에 실려 왔는데 위급하다는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동생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다.
결국 앰뷸런스를 타고 충남 아산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앰뷸런스 안에서 여동생을 내려다보며 찬송가를 부르고 동생이 깨어나길 기도했다. 하지만 동생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도 동생이 어떻게 요양원을 빠져나와 병원까지 실려 왔는지 알지 못한다.
부모님이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건 70년대 초반이었다. 여동생의 병이 낫지 않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가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30여년 전 세상을 떠났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먼저 세상을 뜬 딸의 얼굴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5> 내 주변 사람들 잇따라 예수 영접하는 ‘은혜’
부모님·친척들 하나둘씩 교회 나가… 결혼 후 믿음 가진 아내 나보다 독실
홍덕선 장로(왼쪽)와 아내 안순복 권사가 1971년 4월 19일 결혼식에서 하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내가 지금도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나를 시작으로 차례로 내 주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점이다. 여동생이 아프면서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친척들 대부분이 하나둘씩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됐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를 만난 시기는 군에서 제대한 1970년 6월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서울 신길동에서 자취를 했는데, 아는 누님이 중매를 서겠다고 나섰다.
같은 동네에 있는 아내의 집을 찾아가 소개를 주고받았는데,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아내는 젊은 시절 정말 예뻤다. 처음 본 순간 나의 배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연애를 하다가 이듬해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교회에 다녀본 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건 결혼하고 2년이 흐른 뒤인 73년부터다. 지금 아내는 나보다 더 독실하게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됐다.
군에서 제대한 뒤 얻은 직장은 한국도로공사였다. 군 시절 알고 지낸 상관이 알선한 일자리였다. 비서실에 근무하면서 직장인으로 80년까지 10년간 근무했다. 내가 지금까지 섬기는 교회인 목동중앙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다. 한국도로공사에서 서울 목동에 사택을 지었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목동 일대는 논과 밭밖에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나는 사택에 입주한 뒤 다닐 교회를 물색했다. 사택 근처에는 교회가 2곳밖에 없었다. 그 중 한곳이 지금까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이자 내 신앙생활의 버팀목 역할을 해준 목동중앙교회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때 나는 방탕한 생활에 젖기도 했다. 특히 술을 많이 마셨다. “하나님, 술자리를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술을 끊게 된 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73년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술에 취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갓길에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술에 취한 내 모습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날로 금주를 선언했다. 술을 끊으니 처음엔 힘들었다. 군 시절 알던 사람들과 술을 핑계로 자주 어울렸는데, 그 사람들과의 ‘관계’도 툭 끊어졌다. 술을 끊은 대신 신앙생활에 매진했다. 교회에서 나는 모범생이었다. 겸손한 자세로 교회를 섬겼고 교인들을 대했다.
장로에 피택된 건 80년 11월, 내 나이 겨우 서른네 살 때였다. 장로 자리를 두고 경쟁한 교인들의 ‘스펙’은 쟁쟁했다. 모태신앙으로 집안에 목회자가 있는 사람, 교회 장로를 아버지로 둔 사람 등이었다. 하지만 다 떨어지고 나만 장로 직분을 얻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지만 그만큼 내가 교회를 신실한 마음으로 섬겼다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직장생활을 할 때도 내 붓글씨 실력은 유명했다. 사장이 서예 작품을 부탁해 선물한 적도 있고, 특별한 펜글씨를 써야할 일이 생기면 사내에서는 나를 찾곤 했다. 서예가로서 내 실력이 일취월장한 시기도 바로 이 70년대였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6> 국전 첫 입상 이후 번번이 고배… 오자 시비까지
자괴감에 퇴근 후 밤 새우며 연습… 생애 중 서예에 가장 매진한 시기
홍덕선 장로(왼쪽)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1975년 9월 촬영한 가족사진.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던 시절, 내 서예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면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원들을 상대로 붓글씨를 가르치게 됐다. 회사에서 가장 낮은 직급의 직원이었지만 서예 시간만큼은 달랐다. 사장도, 이사도 수업이 시작되면 나의 제자였다.
1970년대는 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각종 동호회 활동을 장려하던 시기였다. 이런 배경 덕분에 꽃꽂이 바둑 등과 함께 서예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컴퓨터나 타자기가 많이 활용되지 않던 시기여서 당시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걸 엄청난 자산으로 여겼다.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일주일에 한 차례 선생의 집을 방문해 서예를 배웠다. 당시 선생의 명성은 엄청났다. 선생의 글씨체를 일컫는 ‘원곡체’는 강한 힘이 느껴지는 서체였다. 원곡체로 쓴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뭉클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았다.
당시까지 누구의 이름을 딴 서체는 추사(秋史) 김정희(1786∼1865)의 추사체밖에 없었다. 원곡체가 생겼다는 건 그만큼 선생의 업적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74년의 어느 날로 기억한다. 선생이 자신을 따라 한 대기업 서예 수업에 가보자고 제안했다. 선생이 서예 강사로 서던 기업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생은 회사 직원들 앞에서 “앞으로는 나 대신에 여기 서 있는 홍덕선씨가 여러분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선생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서예가로서 입지를 굳히려면 국전에서 입상해야 했다. 나는 국전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고, 75년에 처음으로 국전에서 입상했다. 하지만 이듬해 열린 국전에서는 낙방의 쓴맛을 맛보았다. 나를 포함해 원곡 선생의 제자 15명이 각각 작품을 출품했는데 떨어진 사람은 나 혼자였다.
이듬해 열린 국전에서도 떨어졌다. 번번이 탈락의 아픔을 맛보자 자괴감이 들었다. ‘내 한계는 여기까지인가’라는 생각을 수없이 곱씹었다. 이 시기 국전의 위상은 엄청났다. 국전에 입상하면 가문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졌다. 각종 신문에는 입상자 명단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내 삶에서 가장 서예에 매진한 시기도 이때였다. 퇴근한 뒤에는 서실에 앉아 붓을 잡고 밤을 지새웠다. 서예에 너무 매달리다가 과로로 코피를 쏟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5시간 넘게 서서 글씨만 쓰다가 쓰러진 적도 있다. 아내는 서예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둔 탓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서예라는 건 독특한 세계다.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이 금세 늘지 않는다. 거북이의 걸음처럼 느리게 전진하는 게 붓글씨 실력이다. 글씨를 쓰면서 엄청난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을 맛볼 때가 많았다.
국전에 다시 입상한 해는 78년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문제가 생겼다. 입상한 내 작품에 오자(誤字)가 있다는 시비가 일었고, 국내 유력 일간지에 큼지막하게 기사가 실렸다. 서예가로서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불거진 셈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한학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받았다. 다행히 오자가 아니라는 판정을 이끌어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7> 예술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알리기 14년간 사역
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 총무로 보수도 없이 단체 살림 도맡아
홍덕선 장로가 1980년 4월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건물 입구에 그의 전시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나는 1978년 서예학원을 차렸다. 학원 이름은 내 호(號)를 딴 ‘춘파서예학원’. 서울 청파동 숙명여대 앞 한 상가건물 2층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66.1㎡(약 20평) 남짓한 아담한 학원이었지만 개원하자마자 수강생이 몰렸다. 학원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매달 적을 때는 50∼60명, 많을 때는 100명 넘는 수강생이 등록했다. 매일 저녁이면 학원은 서예를 배우는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퇴근한 뒤 학원을 찾는 직장인이 많았다.
낮에는 한국도로공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수강생을 가르치고, 밤에는 서예가로서 내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날이 이어졌다. 젊었으니까, 에너지가 넘쳤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었다.
80년 4월 15일, 서울 인사동 예총화랑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50점 정도를 내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았다.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한 것도 이때였다. 서예가로서 비로소 첫 발을 내디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장에는 수많은 화환과 화분이 답지했다. 너무 많은 화환, 화분이 들어와 개인전을 끝내고 트럭으로 이것들을 싣고 와 동네 사람들에게 싼값에 팔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전성기가 있다고 하는데, 내 삶의 클라이맥스는 첫 개인전을 열었던 80년의 봄날이었던 것 같다.
개인전을 끝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서예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집사람에게 이 결심을 전하니 아내는 엉엉 울었다.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받는 월급이 생계의 기반이었던 탓에 앞날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예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거듭 전하니 결국에는 남편의 생각을 존중해줬다.
사표를 제출하니 사장도 나를 불러 왜 그만두는지 물었다. “서예가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고 답하자 사장은 “그런 이유라면 말리지 않겠다”고 했다. 대신 일주일에 한 차례 회사를 방문해 직원들을 상대로 계속 서예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10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80년대는 서예에 모든 걸 바친 시기였다. 학원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은 붓글씨를 쓰는 데 매진했다. 나의 글씨가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항상 겸손한 자세로 붓을 잡았다. 더디지만 연습한 만큼 계속 성장하는 것을 느꼈기에 서예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학원도 번창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도 수차례 입선했다. 개인전도 꾸준히 열었다. 70년대가 서예가로서 입지를 다진 시절이었다면 80년대는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간 시기였다.
서예 작업 외에 그나마 내가 한 일이 있다면 회사를 그만두기 전인 78년부터 몸담은 한국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를 통해 벌인 다양한 활동이다. 나는 이 단체에서 92년까지 14년간 일했다.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았다. 특히 총무를 맡아 단체 살림을 도맡다시피 하며 활동한 기간이 길었다. 예술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사역은 정말 값진 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8> “성경 말씀만 쓰겠다”… 본격 기독서예가의 길로
‘술 주(酒)’는 절대 안쓰기로 다짐… 기독교예총 설립 선교 사역 확장
홍덕선 장로(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1984년 5월 ‘제3회 춘파 홍덕선 서예 개인전’을 열고 지인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78년부터 14년간 한국기독교미술인선교협회에 몸담으면서 벌인 갖가지 활동은 정말 보람찬 일이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를 세상을 위해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원이 150명이 넘었는데, 나는 단체에 이름만 걸쳐놓는 수준이 아니었다. 협회가 하는 일이라면 항상 발 벗고 나섰다.
특히 85년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었던 전시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85년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벌이던 해였다. 협회에서도 이를 기념해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국제미술전’을 개최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축복에 감사하며 미술을 통해 복음 전파의 사명을 되새기는 행사였다. 당시 나는 협회 총무를 맡아 실무를 총괄했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명색이 국제미술전인 만큼 전시장에는 6개국 기독 작가들의 작품 30여점이 내걸렸다. 유명 작가의 작품도 많았기에 혹시나 있을 사고에 대비해 보험에도 가입했다. 전시장을 꾸미고, 대외에 행사를 알리는 일 등 모든 것을 도맡아 진행했다.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도 많이 들었다. 이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앞으로 성경 말씀만 붓글씨로 쓰는 기독 서예가로 살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세상의 말을 텍스트로 삼아 붓글씨를 쓴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기독 서예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80년대는 명성이 쌓이면서 서예 작품을 의뢰하는 주문이 잇따랐던 시기다. 개인전을 열면 작품이 순식간에 팔렸다. 주문이 들어올 경우 성경 말씀만 고집할 수는 없을 때도 있었다. 그때 내가 세운 원칙은 하나였다. 써 달라는 글씨에 ‘술 주(酒)’가 들어가면 절대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서예의 경우 이퇴계나 도연명 등이 쓴 문장을 작품의 텍스트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엔 ‘술 주’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크리스천으로서, 교회의 일꾼인 장로로서 이런 글을 써서 돈을 버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여겼다. 이 원칙만큼은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선 뒤에는 미술선교 활동에 더 매진했다. 92년 어느 봄날이었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김흥룡 집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만나서 얘기할 것이 있다는 연락이었다.
김 집사와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크리스천 예술인들끼리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처럼 기독교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기독교 예총’을 설립해 기독교 예술을 세상에 알리고, 이를 통해 복음도 전파하자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그해 6월 22일 서울 종로구 예총회관 2층 회의실에서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건축 국악 무용 문학 미술 등 예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각 분야 기독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서예가를 대표해 이 단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단체 이름은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 선교회는 3개월 뒤인 9월 24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9> 기독교 문화 전파 위해 ‘예술 선교’ 단체 이끌어
미술인선교회 회장 등 최일선 활동, 신이나서 쓰다보니 개인전 26회나
홍덕선 장로(앞줄 왼쪽 네 번째)가 1995년 ‘제8회 기독교문화대상’을 수상한 뒤 촬영한 기념사진.1992년 9월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가 발족하면서 나의 사역도 새롭게 시작됐다. 특히 단체 산하에 있는 한국미술인선교회는 크리스천 서예가로서 본격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든 활동의 새로운 거점이었다. 나는 한국미술인선교회 초대 회장에 선임됐다. 부회장에는 당시 이화여대 미대 학장이던 최병상 교수가 임명됐고 내로라하는 크리스천 작가들이 단체에 가입했다.
우리는 발족 이듬해인 93년 12월 서울 이화여대 미술관에서 ‘제1회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전’을 개최했다.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등 각 부문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을 상대로 공모를 진행해 약 80명에게 상을 수여했다. 이 시상식은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맥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미술인선교회 회장을 내려놓은 뒤에는 94년부터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 회장을 2년간 맡았다. 기독교 문화를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었다. 당시까지 한국교회는 예술 선교에 너무 무관심했다. 하나님 뜻을 좇는 음악가나 화가는 많은데 이들을 한곳에 묶는 조직이 없었다. 한국예술인연합선교회는 예술 선교의 최일선에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단체였다.
서예가로서 일평생 살아오며 언제나 붙든 질문은 ‘좋은 글씨는 어떤 글씨인가’라는 것이었다. 붓글씨는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세계다. 좋은 글씨가 무엇인지 답을 내리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많이 쓰면 글씨에 힘이 생기고, 나름의 서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글씨를 많이 쓰다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글씨를 볼 때 이것이 좋은 글씨인지 단번에 알게 된다.
서예가로 활동하며 내가 받은 상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영예로 여겨지는 상은 95년 수상한 ‘원곡서예상’이다. 나를 진정한 서예가의 길로 이끈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의 업적을 기른 상이었기에 의미가 남달랐다. 좋은 글씨가 무엇인지, 서예가의 삶은 어때야하는지를 가르쳐준 분도 원곡 선생이다. 나는 같은 해 8월에는 ‘기독교문화대상’도 받았다.
90년대는 무슨 일을 하든 술술 풀린 시기였다. 매일 신바람이 나서 글씨를 쓰고 다양한 활동에 가담한 기억이 난다. 서예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작품도 잘 팔렸다. 무슨 일이든 잘 되다보니 수시로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개인전도 수차례 열었다. 최근까지 내 이름을 걸고 연 개인전은 26회다. 원곡 선생의 ‘기록’은 35회다. 내가 이 기록을 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지런히 써서 죽는 날까지 30회 넘는 개인전을 열겠다고 다짐할 때가 많다. 서예가로 근면성실하게 사는 게 내 평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90년대는 내 인생의 황금기였지만 9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씁쓸한 감상에 젖을 때가 많아졌다. 서예의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서예를 돈 주고 배우는 문화도 서서히 사라졌다. 구청 등지에서 공짜로 서예를 가르치는 강좌를 개설하면서 수강생도 서서히 줄었다.
서울 청파동에서 20년 가까이 운영하던 서예학원을 접은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동안 내가 가르친 학생은 몇 명이나 될까. 1000명은 넘는 것 같은데 정확한 숫자를 계산한 적은 없다.
***[역경의 열매] 홍덕선 <10·끝> “백지에 성경을 쓸 때마다 말씀의 무게 실감”
반복해 쓰다 보면 저절로 암송돼… 역경은 나를 훈련시킨 주님의 역사
홍덕선 장로(왼쪽)가 2007년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주최로 열린 ‘2007 한국교회의 밤’에서 한기총 문화예술선교대상 예술선교부문을 수상한 뒤 가족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환갑을 넘기고 나서도 서예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다는 다짐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7년 발족한 한국기독교서예협회는 지금까지 내 사역의 보루가 되고 있는 단체다. 이 단체는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독립한 기구로 기독 서예가 60여명이 가입돼 있다. 한국미술인선교회에서 서예 부문을 따로 독립해 별도의 단체를 만든 건 서예를 통한 선교를 좀 더 치열하게 전개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단체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 협회를 이끌고 있다. 설립 첫 해부터 매년 협회전을 개최했고, 2009년부터는 기독 서예가 발굴을 위해 공모전도 열고 있다. 한국교회가 서예를 통한 선교에 무관심한 상황에서 단체를 이끄는 게 때로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재정이 넉넉지 않아 행사를 열 때면 회원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 경비를 마련했다.
협회를 이끌며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새로운 신진 작가를 발굴했을 때다. 나는 후배 기독 서예가들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고 싶다. 한국교회 교인들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교인들이 기독 서예가의 작품을 많이 구입해주고 전시회도 자주 찾아줬으면 한다.
나는 크리스천들에게 서예를 배울 것을 권한다. 흰 종이를 앞에 두고 붓으로 정성을 다해 말씀을 옮겨 적으면 말씀이 지닌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 반복해서 쓰다 보면 성경을 저절로 암송하는 ‘경지’에 오른다. 내 경우엔 이런 과정을 통해 암송하게 된 말씀이 한두 문장이 아니다.
가장 즐겨 쓴 말씀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이다. 내 신앙고백이 담긴 말씀이다. 구구절절 가슴을 뒤흔드는 말씀이다.
기독 서예가로 올곧게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초반부터 새벽기도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지금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성경을 5∼6장 숙독한 뒤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매년 성경을 수차례 통독하게 된다. 올해는 성경을 3번 통독하는 게 목표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면서 언제나 주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다. 서예가로 한평생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주님. 그런 주님 덕분에 나는 명성을 얻었고, 어디를 가든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하나님은 나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셨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에는 은혜와 평강이 넘쳤다. 내가 만약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가장 고마운 사람은 역시 아내다. 아내는 못난 남편을 위해 일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다.
‘역경의 열매’를 연재하면서 인생의 역경이라는 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주 생각했다. 누가 됐든 사람은 살면서 큰 좌절을 맛보게 된다. 이 고비를 넘으면 아무것도 없을 거라 여기지만 고난은 끝없이 반복된다. 고난의 고개를 하나씩 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하나님은 내가 험한 길을 갈 때도 옆에 계셨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셨다. 모든 역경은 나를 훈련시키기 위한 주님의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