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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suVkY8lI4A?si=TJzBgGJY-En2q4Hj
( Stanislav Bunin: Chopin, Debussy & Poulenc 1987)
1960년대 피아니스트
1. Stanislav Bunin (러시아, 1967- )
2. Boris Berezovsky (러시아, 1969- )
3. Jean-Yves Thibaudet (프랑스, 1961- )
4. Melvyn Tan (싱가포르, 1965- )
5. 백혜선 (한국, 1965- )
6. 스티븐 휴버 (영국, 1961- )
1. Stanislav Bunin (러시아, 1967- )
부닌의 이야기는 객석에서 발췌하였습니다.
https://youtu.be/FOPQn17s5hs?si=0nZTYBdUKtn2LaDj
( Stanislav Bunin plays Chopin Piano Concerto no. 1, op. 11 - video 1985)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부닌은 놀랄 만한 악기 적응력을 보여주며 협주곡으로부터 충분한 매력을 뽑아냈다. 피아노가 지닌 독특한 맛과 작품이 지닌 깊이에의 접근이, 음을 유지시키며 감싸안아 나가는 그의 해석과 맞아떨어졌다. 특히 이례적인 따뜻함으로 애정을 불어넣은 2악장은 쇼팽의 사랑의 메시지 바로 그것이었다."
일명 ‘화려한 데뷔’로 일컬어졌던 부닌의 베를린 필 데뷔(96년 6월 24일)에 대한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지의 음악평론가 클라우스 가이텔의 평이다. 사실 부닌은 명성에 비해 음악의 아성인 베를린 입성은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85년 쇼팽 콩쿠르 우승과 함께 부닌 열풍이 세계 음악계를 강타할 때도 베를린은 비켜나 있었다. 그러나 늦 데뷔는 오히려 진가를 발휘했다.
베를린 필 정기 시즌 마지막을 장식한 이날, 청중들은 패기 넘치면서도 시적인 부닌의 쇼팽 연주(지휘, 크리스티안 틸레만)에 압도되어 연신 탄성을 발했다. 오랜만에 베를린 필 홀에 기립박수가 터졌고, 커튼 콜이 계속 이어졌다. 이에 부닌은쇼팽 녹턴 작품 15-1로 이례적인 협연자 앙코르를 선사했다.
"기립박수는 연주자에 대한 최고의 존경이자, 연주자로서는 영원히 잊지 못할 황홀한 순간입니다. 청중들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베를린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것은 분명 하나의 사건입니다. 아주 성공적이고 흥분되는 공연이었지요. 베를린 필의 연주뿐만 아니라 청중들의 수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네이가우스를 잇는 러시아 피아니즘
그가 이러한 황홀한 순간을 처음 맛본 것은 85년 10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1회 쇼팽 콩쿠르 결선에서였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탐미적이고 화려한 음색에 담긴 그의 강렬한 개성은 컬처 쇼크 그 자체였고, 그는 쇼팽 콩쿠르 사상 최연소(19세)로 우승과 함께 콘체르토 상, 폴로네즈 상까지 휩쓸었다. 일본 빅터 레코드사에서 ‘부닌 - 충격 쇼팽 콩쿠르 라이브 I, II, III’이라는 타이틀로 발매된 그의 쇼팽 콩쿠르 실황음반은 발매 6개월 만에 일본에서만 40만 장이 팔려나가는 대 히트를 기록하며 세계 음악계에 ‘부닌 신드롬’에 불을 당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정사를 들여다볼 때 그의 이러한 성공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엔리히 네이가우스는 독일과 폴란드의 피가 섞인 러시아인으로 피아노를 거의 독학하다시피한 자수성가형 예술가인데 에밀 길렐스·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 등을 길러낸 러시아 피아니즘의 원류였고,또 심장마비로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 역시 대가였는데 전성기 당시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독특한 피아니즘의 쇼팽을 들려준 쇼팽 전문 연주가이자 교육자였다. 그의 어머니 루드밀라 부니나 또한 엔리히 네이가우스가 아끼던 피아니스트였다. 부닌은 1966년 9월, 그런 음악가문의 5대째를 잇는 적자로 태어났다(이들 부부는 혼외 관계로 외아들 부닌을 낳았다. 다소 복잡한 가정 환경이었지만, 그것이 부닌의 성장과정에 특별히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것 같다). 부닌은 그가 태어난 집안의 배경으로 보아도 천상 피아니스트로 운명지워졌다 할 만하다.
“저는 온통 음악뿐인 환경에서 태어나 음악과 함께 성장했어요. 제 곁에는 늘 피아노가 있었고, 집에는 내로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들락거렸어요. 저는 그런 조상들이 자랑스러웠어요. 그들은 저를 자연스럽게 음악가의 길로 이끌었지요.”
그의 첫번째 스승은 어머니 루드밀라 부니나였다.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부닌은 어머니를 통해 음악의 기초뿐 아니라 음악에 대한 지적인 감각과 정열을 키워나갔다. 아들의 모스크바 음악원 입학 준비까지 도맡아 했던 루드밀라는 나중에는 아들의 매니저 역할까지 하며 부닌을 보살폈다.
“어머니는 음악세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제가 정작 음악가의 길을 택할 즈음에는 반대 입장을 취했어요. 그러나 저의 뜻을 이해하고 허락할 때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보다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도록 노력해라’ 하시더군요. 그 말씀은 지금의 제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기초를 아주 철저히 가르쳐준 어머니께 늘 감사하고 있어요.”
모스크바 음악원은 그의 음악적인 시야를 넓혀주기에 충분했다. 젊은 천재 발탁의 귀재로 통하는 도렌스키를 비롯해 그에게 콩쿠르의 길을 열어준 엘레나 리히테르 등이 버티고 있었고, 그는 이들 명교수들을 통해 러시아 피아니즘의 진수를 그대로 전수받았다. 특히 엘레나 리히테르의 감각적이고 섬세한 피아니즘은 그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여덟 살부터 열아홉살 때까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엄격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철저하게 교육하는 소비에트식 예술교육을 받으며 장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의 꿈을 키웠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의 공부가 끝나갈 무렵인 83년 엘레나 리히테르 선생이 콩쿠르에 나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어요. 당시 17세였던 저는 아직은 이르다 싶었지만, 과연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롱 티보 콩쿠르에 출전했지요.”
쇼팽 콩쿠르 우승과 함께 찾아온 ‘부닌 신드롬‘
부닌은 롱 티보 콩쿠르에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를 연주해 주목을 끌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콩쿠르는 부닌에게 학생 티를 벗고 연주가로서 ‘자기 확신’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콩쿠르 우승 직후 멜로디아 레이블로 발매한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 ‘꽃의 노래’ ‘토카타 C장조’ 등을 담은 데뷔 음반은 바로 그러한 10대 시절의 부닌의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슈만의 선율은 어느 악기로 연주하든 낭만적인 아름다운 포에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슈만 음악의 매력이다”라는 부닌의 주장처럼, 이 음반에는 이미 로맨틱한 정취 속에 경묘하게 노래하는 부닌의 특징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롱 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일단 자신감을 얻은 부닌은 2년 뒤 쇼팽 콩쿠르에 출전했고, 이 콩쿠르를 통해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덤에 올랐다. 그 선풍의 진원지는 일본이었다. 쇼팽 콩쿠르 라이브 레코딩으로 먼저 선풍을 일으킨 일본에 그가 상륙한 것은 86년. 도쿄·오사카 공연은 티켓 발매 전날부터 음악팬들이 밤을 새워가며 긴 행렬을 이뤘을 만큼 선풍적이었다. 일본 언론들은 ‘부닌 열풍’이란 타이틀로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러한 부닌 열풍은 근 5년 이상 계속 이어졌다. 특히 87년 12월 31일 밤 11시부터 88년 1월 1일 새벽 1시까지 오사카의 ‘더 심포니 홀’에서 열린 부닌 콘서트는 각계각층의 음악팬들로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연주실황이 일본 전 민방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신춘 프로그램으로 소개되어 일본 전역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현상은 곧 유럽으로 이어졌다. 88년 초에 구 소련을 떠나 밀라노를 거쳐 함부르크에 정착한 그는 모스크바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A장조 K.414를 갖고 이탈리아 순회공연을 나섬으로써 이탈리아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마를 시작으로 3개월 이상 계속된 이 순회연주회는 한동안 이탈리아 방송과 신문 문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콜리엘레 델라 세라’지의 음악평론가 마야 타넨바움의 연주 평은 당시 이탈리아에서의 부닌 선풍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부닌의 모차르트 연주는 마치 모차르트의 소년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약동감 넘치는 음악, 경쾌한 리듬, 부드러운 손, 심한 몸짓 등, 그는 마치 작곡가 자신인 양 거침없이 모차르트를 다루었다. 안단테의 눈부신 도입, 로코코 풍의 주관적이라 할 알레그레토 등은 특히 압권이었다. 공연장을 꽉 채운 청중들로부터 압도적인 박수갈채를 받은 그는 현대 피아노계의 새로운 스타임이 분명했다.”
그의 다음 공략지는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이었다. 루돌프 제르킨 대신 출연했던 이 페스티벌에서 시노폴리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K.488을 협연한 그는 자신의 모차르트 해석이 ‘사고의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며 유럽 음악계에 자신의 이미지를 확고히 각인시켰다.
그의 행보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뉴욕 카네기 홀 데뷔·스칼라 극장 데뷔·빈 뮤직 페라인 리사이틀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순간 순간 즉흥성이 돌출하는 그의 개성 강한 연주는 청중들에게는 무한한 찬사를 받았지만, 평론가들에게는 찬·반이 엇갈리는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연주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평론가들에 대해 이렇게 반론했다.
“천재라는 평판이 자자했던 미켈란젤리나 호로비츠가 지금까지 ‘틀’에서 벗어나지 않은 연주를 한 적이 있었던가. 어떤 피아니스트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연주를 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 없는 콘서트가 되고 말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틀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다.”
부닌의 이러한 강한 개성은 89년 내한 공연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을 비롯해 슈베르트·리스트·슈만·쇼팽 등을 선보인 이날 공연에 대해 피아니스트 이귀영은 “그 날렵하고 가벼운 터치로 빠른 패시지를 연주할 때 정확한 터치와 테크닉은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의 테크닉은 아주 내추럴한 것으로, 독특하고 풍부한 음악을 만들어내기에 좋은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었다. (…) 또한 그가 내는 피아니시모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아름다웠고, 몰아치고 큰 소리를 낼 때는 억제할 수 없는 흥분과 긴박감을 이끌어 냈다”라고 평가했다. (백성현 기자)
https://youtu.be/i9QT5TXAi5c?si=yo0gsBN_teoLc4wR
( Stanislav Bunin plays Chopin 4 Ballades)
“일급 피아니스트보다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부닌의 개성있는 해석은 레코드라는 결과물로 세상에 속속 그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긴 모차르트 소나타와 협주곡 (도시바 EMI), 서정시인 같은 천성이 확인된 바흐 소나타(도시바 EMI), 드라마틱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 열정적인 베토벤 소나타(도시바 EMI), 작곡가에 대한 커다란 공감이 ‘음의 시’로 변형된 쇼팽(RCA 빅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중 쇼팽 음반은 87년 일본의 그랑프리 음반상을 수상했으며, 바흐 피아노 독주회 실황음반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음반은 골든 디스크 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닌에게는 쇼팽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쇼팽 콩쿠르는 그에게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명성과 함께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반면, 그를 ‘쇼팽’ 연주가라는 한정된 틀 속에 가둬 버리는 역기능을 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서방으로 이주한 이후 10년은 그런 부닌에게 있어 쇼팽에서 탈출하는 이미지 변신기였다. 그가 “쇼팽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은 즐거움일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쇼팽만을 잘 연주하는 연주가로 몰아가는 것은 분명 부당하다. 실제로 쇼팽뿐만 아니라 바흐·모차르트·슈만·드뷔시 등을 많이 연주하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바르토크·스크랴빈 등에도 흥미를 갖고 있다”라며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변신은 러시아를 떠난 이후 발터기제킹·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슈바츠트코프· 호로비츠·미켈란젤리 같은 옛 대가들의 음반을 들으면서 시작되었고, 러시아 피아니즘의 거장이었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를 만나면서 구체성을 띠기 시작했다.
“기제킹·슈바르츠코프 같은 거장들의 음반은 저에게 하나의 숙제를 던져줬어요. 저는 그들의 다양한 음반을 들으면서 모차르트와 슈만 등의 해석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미켈란젤리·호로비츠·글렌 굴드의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와 번뜩이는 감각’에서 저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리히테르와도 자주 만났는데, 그는 제 연주에 항상 훌륭한 힌트를 제공해 주었어요. 그는 일급의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진정한 예술가였습니다. 그가 제게 연주 요청을 해왔을 때 한번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30대로 접어든 부닌은 나름대로 성숙기로 접어든 듯하다. 그것은 음악 경향뿐만 아니라, 청중들을 대하는 자세에서도 발견된다. “연주자에게 명성은 그리 중요치 않아요. 명성보다는 제가 하는 연주 행위로 세계 여러 곳의 다양한 청중들과 훌륭한 관계를 맺는 것이 더 보람있는 것이지요. 제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보다는 존경받는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아요.”
그가 일본 등지에서 후진 향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꿈은 할아버지인 엔리히 네이가우스나 아버지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 같은 대교육자가 되는 것.
“제 꿈은 재능이 뛰어난 어린애들을 위해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겁니다. 가능하다면 재단 같은 것을 설립할 생각입니다. 연주가로서 최선을 다해 좋은 연주를 들려줘야겠지만, 음악가로서 궁극적인 완성은 과거 저의 스승들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줬듯, 다음 세대를 이어갈 연주가를 키워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은 것은 행운입니다.”
흥’과‘멋’을 아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적자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부닌의 가게를 자꾸만 언급하는 이유는 부닌이야말로 만인이 부러워할 만한, 그러면서도 누구든 인정해야 하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적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겐리흐 네이가우스가 선이 뚜렷하면서도 느긋한 풍모가 있는 스크랴빈 연주의 대가였고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의 주무대는 쇼팽이었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질을 정확히 반반씩 섞어 닮은 듯한 부닌의 모습은 과연 예술가의 천재성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원초적인 물음을 다시금 던지게 한다.
대개의 음악가가 그러하듯 부닌도 극도의 완벽주의자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연습광이어서 다른 취미나 남는 시간 등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피아노 앞에서 살다시피(?) 한다고 한다. 또한 연주 전에는 식사를 잘 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며,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런 예민함은 다분히 부친인 스타니슬라프 네이가우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확실히 두 사람의 쇼팽 연주에는 뭔가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섬약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쇼팽의 피아니즘에서 결코 네가티브적인 요소가 아니며, 부닌의 예술 세계에서 이런 기질들은 오히려 그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바탕 색깔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연약하고 때로는 날카로운 외면적인 모습만이 부닌을 대변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일본에서 발매된 여러 종류의 레이저 디스크나 비디오에 담겨 있는 가볍고 깔끔한 (어떤 때는 너무 새침해 여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무대 매너와는 달리, 레코드에서 만나는 부닌은 의외로 푸근하고 따뜻하며 낙천적이다. 도시바 EMI에서 발매된 ‘바흐 리사이틀’ ‘쇼팽 프렐류드’, 그리고 실황녹음인 모차르트의 협주곡 등에서 들려주는 그의 음악은 우선 자연스러운 템포의 들고 남이 편안함을 주고, 음색 면에서도 자신만의 ‘특별한’ 소리를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내추럴한 악기 자체의 소리를 즐기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앞서 설명한 요소와는 대조적으로 할아버지 네이가우스가 갖고 있던 기질이 분명하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그 감상적인 유혹을 여유만만하게 즐길 줄도 아는 ‘흥’과 ‘멋’이 있는 예술가이다.
2. Boris Berezovsky (러시아, 1969- )
덩치 큰 피아니스트 마치 '마농의 샘'에서 불란서 배우 제랄드 드빠라듀를 닮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보리스 베레초프스키이다.
그는 1990년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를 석권한 베라초프스키는 4년 전 영국 출신의 배리 더글러스에게 빼앗겼던 러시아의 자존심을 되찾았다는 점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착실한 수업을 받은 그는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힌 레퍼토리를 소화해 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완벽한 기교와 투명성을 발하는 맑은 터치를 장기로 하고 있다. 서방 세계에는 1988년, 런던 연주회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1991년 부터 영국과 미국, 일본 등지의 연주회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으며 기술과 감성을 겸비한 차세대 피아니스트로서 각광받고 있다.
그는 90년대 차이코프스키 콩코르의 실황 앨범을 포함하여 Teldec을 통해 여러 장의 음반을 레코딩하고 있는데, 쇼팽의 연습곡집이나 라벨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세밀함과 강약의 적절한 사용을 통한 아름다운 선율의 연주도 뛰어나지만 그의 진면목은 리스트의 협주곡집에서 보이는 것처럼 힘과 기교를 겸비한 작품에서 남김없이 드러나곤 한다.
3. Jean-Yves Thibaudet (프랑스, 1961- )
낭만파 프랑스의 음악은 가벼움과 우아함, 화성의 눈부신 효과 등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과거에도 프랑소와처럼 프랑스 음악만을 잘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있었으나 티보데는 국제화된 프랑스 연주자라고 말한다.
그는 프랑스 리온 출생으로, 독일인과 프랑스인을 부모로 두었다. 5세때 피아노를 시작했으며, 파리 음악원에서 알도 치콜리니에게 사사받으며 정교한 음색을 만들어 나가는 작업을 거친 후, 78년에 열린 비오티 국제 음악 콩쿠르와 79년 로베르 카사스쉬 콩쿠르에서 연거퍼 2위를 하였다.
그 이후 1981년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뉴욕 신예 연주가 연주를 통해 미국에도 알려졌다. 그는 샤를르 뒤트와,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제임스 레바인, 마이클 틴스 토마스 등과 협연을 했다. 그는 라벨과 드뷔시의 음반에서 아름다운 음색의 연주를 들려주는 한편, 리스트의 작품에서도 정통 독일의 피아니스트 음색에 절대 뒤지지 않는 완벽한 연주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티보데는 DECCA/LONDON녹음으로 메시앙의 Turangalila를 녹음하여 1993년에 디아파송상과 폴란드의 에디손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아쉬케나지 지휘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4. Melvyn Tan (싱가포르, 1965- )
피아노에서의 정격음악 흐름은 포르테 피아노로 연결되어지는데, 이 포르테 피아노의 명수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싱가포르 출신으로 영국을 근거지로 활약하는 멜빈 탄이다.
짧게 자른 머리에 신세대임을 짐작케하는 멜빈 탄의 모습은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라기보다는 록그룹의 기타리스트 정도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는데,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그의 연주에 대한 반향은 대단한 것이다. 그다지 풍부하지 않은 음색의 포르테피아노로서 다이내믹한 연주를 선보인 인물이 바로 멜빈 탄이다.
EMI에서 나온 베노벤의 피아노 협주곡집은 멜빈 탄이 얼마나 포르테피아노를 능수 능란하게 연주하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만드는 음반이라고 한다.
특히 그가 연주하는 포르테피아노는 가장 음색이 아름다운 악기로 손꼽히고 있다.
5. 백혜선 (한국, 1965 - )
170㎝ 훤칠한 키, 시원시원한 외모의 백혜선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 예원학교에 다니다 보스톤 뉴잉글랜드음악원에 유학했다. 89년 윌리엄 카펠 콩쿠르 우승, 헬렌 하트 콩쿠르 2위, 90년 리즈콩쿠르 입상, 91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2위, 94년 차이코프스키콩쿠르 3위…. 20대를 통째 콩쿠르속에 보냈다. 카펠콩쿠르 우승후 백혜선이 뉴욕 앨리스 툴리홀서 연주한 리스트와 스크리아빈 소나타를 뉴욕타임스는 [폭풍우같은 다이내믹과 섬세한 감각의 조화]라 호평했다. 89년 한국서 첫 독주회를 하고, 보스톤심포니, 런던심포니, 버밍엄심포니, 모스크바필하모닉, 바르샤바필하모닉, KBS교향악단과 협연하면서 열정과 섬세함을 아우른 피아니즘으로 격찬받았다.
백혜선의 피아노는 이탈리아 [레이 코모 피아노 캠프]에 참가하면서 한층 영글었다는 평가다. 독일 재력가 테오 레빈은 이탈리아 레이 코모에 [인터내셔널 피아노 파운데이션]을 열고, 세계무대서 주목받는 [영 피아니스트] 5인을 96년 초청했다. 활약이 기대되는 젊은 연주자들이 1년간 머물며, 인스트럭터로 참여한 연주명인들과 교유토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백혜선은 95년 서울대음대 조교수직에 임용되자마자 휴직, 레이 코모로 가서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 로잘린 투렉, 마르타 아르헤리치,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거장들과 대화하고 연주했다. 96년 가을, 1년 캠프를 끝낸 젊은 피아니스트 5인은 뮌헨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5곡을 차례로 협연했다. 하이라이트격 [황제 협주곡]을 호연한 백혜선에게 캠프측은 언제고 오라고 문을 열어놓았고, 올해 4년째 캠프에 참가했다.
{연주자개성을 우선하는 미국에 비해 음악전통과 보편적 음악언어를 중시하는 유럽음악계를 원없이 호흡했어요. 고전 레퍼터리에 눈뜨고, 보다 넓어진 표현의 자유를 익힌건 무엇보다 큰 성과였어요. 뭐랄까, 한꺼풀 벗은 느낌이에요.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더이상 힘들게 여기지 않게 됐습니다.}
고전작품을 해석하는 토대에 눈뜨고, 보편적 밑그림 위에 그만의 개성을 얹는 조형방식을 깨친 [레이 코모] 체험은 백혜선의 21세기를 담보하는 힘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가 한국 전통음악을 편곡해 연주해보자고 해요. 국악의 전통가락과 장단을 소재로 제대로 창작곡을 만들고, 이를 세계무대에 적극 소개하고 싶습니다.}
피아니스트 백혜선(서울대교수·34)의 파워풀한 연주는 피아노가 남성적 악기임을 잊게 한다. 정명훈 강동석 안숙선씨와 [천년의 소리]란 주제로 로마-파리-에센에서 공연하고 막 귀국한 백씨는 한국피아니스트로는 처음으로 녹음계약한 영국 EMI 레이블로 2집 CD [사랑의 인사-즉흥과 변주]를 지난 1일 내고, 5일부터 4개도시를 도는 출반기념연주회 준비로 바쁘다. 한국국적 연주자로는 최초로 94년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1위없는 3위입상한 그에게 21세기는 한꺼풀벗는 도전의 무대다
6. 스티븐 휴버 (영국, 1961- )
그의 피아니즘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초절기교를 뽐내다가도 문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수심에 잠기고, 음악에 취해 멜로디를 탐닉하다가도 곧 포효하며 무서울 정도로 몰아 부친다. 완벽한 테크닉을 지녔지만 테크닉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과시적 용모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다 그렇다고? 천만에. 허프처럼 레퍼토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다양한 표현을 일구어내는 피아니스트는 드물다. 달콤한 맛을 내는 고전적인 훔멜에서부터 몽푸의 시큼한 멜로디의 편린까지, 그는 경험 많은 요리사처럼 가지각색의 재료들이 지닌 맛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 음악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성공할 수 있는 요건 가운데 레코딩의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순회 공연이 비교적 용이한 피아니스트들도 예외는 아니다. 들판에 핀 무수한 잡초 중 진정한 화초를 가리기 위해 지구촌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음반 상의 연주를 그 잣대로 삼는다. 특히 신인의 경우에는 유력지들의 평가가 그들의 미래 예보를 '맑음' 혹은 '흐림, 때때로 비'로 결정짓는 중대한 인자이며, 결과적으로 그들이 갖게 될 명성을 좌지우지한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음반의 평가와 그가 얻는 명성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제 얘기할 영국의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가 그런 경우를 잘 설명해준다.
1961년 영국 중부 체셔 지방에서 태어난 허프는 1983년 멘체스터 왕립 음악원 졸업 직후 출전한 나움부르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는 소위 말해 '명반 제조기'이다. 90년대 이후 내놓은 음반들은 하나 같이 '주옥'이었다. 가장 권위 있다고 인정되는 그라모폰 상도 세 번이나 수상했고, 후보에 오른 것도 여러 번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인지도는 어느 정도 확보했지만 영국 밖에서는 그다지 유명세를 타지 못한다. 그보다 조금 나이가 어린 부닌과 비교를 해보자. 부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부닌은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변변한 명연 하나 음반에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인기는 여느 피아니스트를 능가한다.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청소년 팬들까지 몰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겨우 두 번 찾았을 뿐인 우리 나라에서도 평판이 자자한 것을 보면 그는 사람을 끄는 어떤 힘을 지녔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미있는 해석은 청중 몰이의 비결 밑바탕에 그가 쇼팽을 친다는 사실이 깔려있다는 점이다. 인기에는 대중적인 속성이 있다. 그 때문에 연주인의 인기는 그가 가진 레퍼토리와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부닌이 드뷔시나 라벨의 일인자였다고 해도 청중의 우상이 될 수 있었을까?
훔멜 피아노 협주곡의 초석이 된 데뷔반
스티븐 허프를 눈 여겨 보아온 독자라면 그가 남다른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87년 샨도스에서의 첫 레코딩에서 훔멜을 선택했을 때, 많은 이들은 스물여섯 살 젊디젊은 신인의 당돌함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그것은 모리스 앙드레가 작곡가의 트럼펫 협주곡을 세계적인 레퍼토리로 만든 것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훔멜은 창의적인 영감을 받아 정갈하고 섬세한 멜로디를 써놓았고 허프는 '참을 수 없는 기교의 가벼움'으로 그것을 표현하였다. 허프의 데뷔 앨범은 이후 등장한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 녹음의 초석 역할을 했다.
훔멜의 서거 150주년에 때맞춰 녹음한 두 개의 협주곡으로 허프는 같은해 그라모폰 상을 움켜쥐면서 그야말로 기분 좋은 레코딩 데뷔식을 치뤘다. 이후 허프의 연주 인생은 대중 레퍼토리와 숨어있는 명곡들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점철되기 시작했다.
"저는 우리가 한동안 너무 하나의 레퍼토리 권에만 매달려 왔음을 압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우리는 지독하게 심각해졌죠. 하지만 제 생각엔 한 쪽에 집착하게 되면 다른 쪽에 필요한 피아니즘을 개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각 작품들은 그 자체에 필요한 표현력을 개별적으로 담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만약 당신이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람스까지로 식이요법을 조절한다면, 라흐마니노프나 고도프스키, 심지어는 쇼팽과 리스트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피아니즘의 개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첫 음반 직후 버진 클래식과 전속 계약을 맺으며 허프는 '피아노 앨범'이라는 소품집 형식의 음반을 기획했다. 런던과 뉴욕을 오가며 반반씩 녹음한 수록곡은 맥다우얼, 고도프스키, 파데레프스키, 가브릴로비치, 로젠탈, 도흐나니 등 여러 작곡가의 잡다한 소품들이었다. 연주회에서 굵직한 정규 프로그램 뒤에 간단히 이어지는 앙코르용 작품들이다. 이들이 구조적인 조형미나 심오한 내용의 깊이를 담았다고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허프는 빈틈없는 기교와 섬세한 터치, 특유의 본능적인 루바토 감각을 살려 짧은 시간 안에 응축돼 있는 작곡가의 영감을 밀도있게 그려냈다. 도흐나니의 '카프리치오 f단조'에서 들리는 반짝이는 재치는 훔멜의 3악장에서 들려주었던 절묘한 기교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한다. 흔히 연습용으로 치부해 버릴 재료들을 모아 독집 앨범을 꾸민 이유는 앞서 「그라모폰」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다양한 피아니즘의 습득을 위해서이다.
"모차르트는 당신의 라흐마니노프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편식하지 않고 섭취한 음악성이 서로에게 도움된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음반과는 달리 연주회장에서의 활동은 훨씬 폭넓은 레퍼토리 범위를 자랑했다. 90년 초에 잇단 런던 리사이틀의 주제는 모차르트 협주곡이었고,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다수 들어 있다. 위그모어 홀에서 가졌던 쇼팽과 브람스의 발라드 연주회는 일간지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좋은 평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결국 몇 개의 앨범을 통해 사람들은 허프를 '낭만주의 비르투오조'로 인식했다. 그가 녹음한 브람스와 슈만의 진지한 사색보다는 리스트나 브리튼이 보여주는 숨가쁜 테크닉을 더 많이 기억했다. 그에 대해 제한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명 레퍼토리에 너무나 많은 경쟁자가 몰려 있었고, 그 치열한 레이스에서 허프가 반듯하고 모범적인 연주를 빚어냈을지언정 다른 이와 차별되는 독특한 색깔을 연출하지 못했던 요인이 크다. 쇼팽이나 리스트 등 스탠더드 급 비르투오조 레퍼토리에서도 허프는 같은 시기 런던에 출연한 니콜라이 데미덴코의 그늘에 가려졌다.
하이피리언과의 뜻깊은 만남
91년 후반 무렵 허프는 버진과의 전속 계약을 마감했다. 콘서트에 전념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시간은 의외로 꽤 길게 이어졌다. 수십 회의 순회 공연보다 한 장의 음반 출연이 더 큰 홍보 효과를 갖는 세상이다. 3년 동안 앨범을 내지 못한다는 것은 세계를 무대로 뛰는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훔멜로 새겨졌던 허프의 이름은 점점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져 갔다. 그런데 그라모폰 상의 '약발'이 거의 다 끝나가는 95년 11월, 허프는 돌연 하이피리언이라는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음반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이피리언이 기획하는 일련의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11번째 발매분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낭만주의 시대 잊혀졌거나 소외된 피아노 협주곡의 발굴을 목적으로 삼은 이 시리즈에서 허프가 맡은 작곡가는 프란츠 크사비어 샤르벤카와 에밀 폰 자우어. 이들은 낭만주의의 전통을 20세기에 이어준 대가 피아니스트들로서, 스스로 많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 허프가 새로 들려주는 작곡가-피아니스트들의 두 협주곡은 아주 안정되어 있다. 올이 단단하게 여문 굵은 터치가 그 기저를 형성하고 곳곳에 서정적인 프레이징을 심어놓으면서 낭만주의의 양극을 적절히 오고 간다. 작곡가가 피아노의 달인이었다는 점에서 작품에 나타난 외적인 화려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칫 조악한 기교의 장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는 작품에 격조와 무게를 실은 것은 허프의 재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리스트의 애제자였던 자우어의 1번 협주곡을 들으면 나이 서른을 지나면서 허프의 음악성이 얼마나 성숙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외향적인 1악장과 종악장에서 천박하지 않은 기교로 긴장을 조성하고, 내성적인 카바티나 악장에서 쇼팽을 연상시키는 꾸밈없는 시정으로 긴장을 이완시키는 솜씨는 대가의 경지에 성큼 다가선 느낌을 준다. 「그라모폰」은 이 음반에 대해 "초기 그라모폰 수상작인 훔멜을 능가한다"고 평했으며 이듬해 그라모폰 상 '협주곡과 올해의 레코드' 부문을 동시에 수여했다.
이 앨범은 레퍼토리에 대해 허프가 지닌 일관된 생각을 반영한다. '균형있는 피아니즘의 발전'이라는 데뷔 시절 가졌던 음악관은 하이피리언과 함께 맞이한 제2의 전성기에 더욱 빛을 발하며 내실있게 다져졌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튜디오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의 행보가 철학적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신중하다는 점. 과거에는 모차르트나 브람스의 협주곡과 같은 인기 곡이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실내악을 편안하게 녹음했었다. 그러나 하이피리언과 만난 이후 그의 레퍼토리는 더욱 한정되었고, 진정 자신이 최고로 재현할 수 있는 곡에 한해서만 냉정하게 녹음으로 선택되었다. 가장 많은 제의가 들어오는 라흐마니노프를 계속 미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허프는 곧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곡을 녹음할 예정이다.)
그 결과 허프가 소개하는 작곡가들은, 샤르벤카와 자우어의 경우도 그랬지만, 음악사의 음지에 속한 '희귀한' 인물로 이어졌다.
하이피리언에서 잇따라 발표한 음반은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개가를 올렸다. 허프는 자신이 태어나던 해 죽은 영국의 작곡가 요크 보웬(1884-1961)의 피아노 작품들과,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미국의 신예 현대 음악가 로웰 리버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하였다. 특히 많은 찬사를 받은 보웬의 경우 몇 개의 곡이 녹음된 적이 있지만 체계적으로 뛰어난 수준의 연주를 담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최초 레코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웬 역시 세기초 뛰어난 작곡가-피아니스트로서 허프의 입맛에 맞아 맞아떨어진 인물이다. 허프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를 잊혀진 음악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그 사이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려 애써왔다. 보웬의 작품집은 그 맥락이 같다. 허프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담긴 순수한 서정을 잘 살림으로써(특히 13편의 전주곡들), 보웬을 당당히 근대 영국 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무엇보다 허프는 이 앨범으로 때로 자신에게 멍에가 되었던 비르투오조 연주가라는 성격 규정에서 탈피하게 됨으로써, 보다 원숙한 연주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97년 발표한 페데리코 몽푸의 작품집도 보웬과 같은 개념이다. 여기 실린 스페인의 작곡가 몽푸의 '노래와 춤곡'은 어쩌면 기교 면에서 보웬보다 더 쉬울 지 모른다. "몽푸를 위대한 작곡가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결코 2류 작곡가로 등급 매길 수는 없습니다. 그의 보이스는 너무나 개성있고, 음악은 괴팍하기까지 하지만, 그는 그러한 음악적 의도를 완벽하게 달성했습니다. 2류 작곡가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에 도달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허프가 터득한 몽푸는 기교로 말할 수 있는 작곡가가 아니다. 간단한 한 소절의 프레이즈에도 이국적인 색채와 민요적인 색채를 배합시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독특한 어법을 구사하는 미식가들의 작곡가이다. 허프는 과거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능가하는 이상적인 해석으로 몽푸의 몽환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다.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은 많은 평론가, 애호가들의 찬사와 세 번째 그라모폰 상이었다.
감춰진 비경을 들추는 능력
음반으로 살펴본 그의 피아니즘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우리는 보통 브렌델을 독일의 중후한 멋, 아르헤리치를 여성답지 않게 선이 굵은 타건, 쉬프나 페라이어를 명징한 톤, 데미덴코를 폭풍 같은 기교와 연관지어 생각한다. 하지만 허프의 레퍼토리와 연주는 딱히 이와 같은 결정적인 심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초절기교를 뽐내다가도 문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수심에 잠기고, 음악에 취해 멜로디를 탐닉하다가도 곧 포효하며 무서울 정도로 몰아 부친다. 완벽한 테크닉을 지녔지만 테크닉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려는 과시적 용모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다 그렇다고? 천만에. 허프처럼 레퍼토리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다양한 표현을 일구어내는 피아니스트는 드물다. 달콤한 맛을 내는 고전적인 훔멜에서부터 몽푸의 시큼한 멜로디의 편린까지, 그는 경험 많은 요리사처럼 가지각색의 재료들이 지닌 맛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는 무명 작곡가만을 전전하며 호평을 얻지 않았다. 멘델스존의 두 협주곡(Hyperion)이나 브람스의 협주곡, 리스트의 피아노곡집(Virgin)에서 낭만주의 주류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굳이 허프를 추상화하려 한다면,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의 특징을 고루 갖춘 피아니스트 정도가 어울릴 듯하다. 해외 음악지들은 그의 음반을 리뷰하면서 한결같이 'revelation(啓示)'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허프는 어떤 레퍼토리를 맡건 작곡가의 의도와 음악의 비경을 들추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자주 듣던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인상을 전해주는 반면, 꼭꼭 숨겨졌던 음악으로부터는 친근한 요소를 부각시켜 마치 늘 우리 곁에 있었던 것과 같은 친숙함을 전해준다. 그 '계시적인' 능력은 앞서 말했듯이 허프가 음악 세계의 자양분을 고루 섭취했기 때문에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정된 인기를 누리고 소수의 열광적인 팬을 갖는 따위의 문제는 그의 음악 수준과 아무 상관이 없다. 이제 40줄을 바라보는 허프의 앞날에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가능의 시간이 열려있다. "영광은 덧없지만 무명(無名)은 영원하다"란 나폴레옹의 말이 진리라면, 스티븐 허프는 꾸준히 사람들의 머리 속을 지배할 이름이다. <글 이재준>
예음음악의 아리아님 자료입니다
https://youtu.be/o-zwJPY6hOg?si=0TELJ5cIhLEse7_C
( BUNIN plays SCHUMANN Carnival Jest from Vienna Op.26 COMPLETE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