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거 알아?” 포도주 잔을 든 강희나가 윤성일을 보았다. 시청 앞 프린세스 호텔의 양식당 안에서 둘은 저녁을 먹는 중이다. 윤성일은 시선만 주었고 강희나가 말을 이었다. “오빠가 배낭여행 다녀온 후에 말야.” 한 모금 포도주를 삼킨 강희나가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사고도 있었지. 다쳐서 병원에 꽤 오래 들어가 있었고....” “....” “퇴원한 지도 벌써 석 달 되었어.” “근데, 너.” 씹던 스테이크를 삼킨 윤성일이 강희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나하고 한 번도 안 잤단 말야.” 이제는 강희나도 정색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강희나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거 맨날 왜 그래?” “응? 뭐라구?” “아냐.”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은 윤성일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밥 먹고 나이트 가자.” “싫어. 8시밖에 안되었어.” “그럼 영등포가서 삼겹살 먹고 근처 모텔 가자.” “싫어.” “자고 싶다며?” “누가?” 눈을 가늘게 뜬 전세희가 오경석을 보았다. 불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긴장된 표정이다. “확실해요?” 전세희는 자신의 목소리가 건조해져 있는 것을 듣고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때 오경석이 허리를 펴고 전세희를 응시했다. “예, 확실합니다.” 이곳을 장충동의 뉴코리아 호텔 라운지다. 구석자리에 마주앉은 둘 앞에는 손도 대지 않은 커피 잔이 놓여져 있다. 오경석이 말을 이었다. “김가영은 정원에 나갑니다. 제가 정원 앞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가 온 겁니다. 김가영은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 “정원이 강남의 텐 프로 업소 중에서도 최고급입니다. 거긴 회원제로 예약하지 않으면 못 간다는 곳입니다.” 전세희가 듣기만 했더니 오경석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띠었다. “한 달이 넘도록 김가영의 동생 김윤영을 미행했다가 오늘 대박을 터뜨린 것이지요.” 오경석은 용역회사 과장이다. 전세희의 용역을 받아 지난번에도 일을 해본 터라 손이 큰 것도 안다. 호흡을 고른 오경석이 말을 이었다. “정원 위치는 샹그릴라 호텔 후문 건너편 골목 안에 있습니다. 강남에서는 소문난 곳이지만 조그마해요. 요즘 텐 프로 룸살롱은 크지 않습니다.” “여기 사례금.” 오경석이 서둘러 받았을 때 전세희가 의자에 등을 붙이면서 말했다. “5백이예요. 보너스로 2백 더 드린 것이라구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경석이 앉은 채로 머리를 두 번이나 숙였을 때 전세희가 말을 이었다. “이젠 더 화끈한 증거를 찾아줘요.” 긴장한 오경석을 향해 전세희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작품 말예요. 손님하고 호텔에 간다던가, 또는 섹스 하는 장면, 진할수록 좋아요. 상금도 더 많아질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다시 머리를 숙여 보인 오경석이 결연한 표정으로 전세희를 보았다. “이제 아지트를 알았으니까 장비를 더 구입해서라도 아가씨의 주문을 맞춰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더 돈이 들어간다는 예고였지만 전세희는 인정한다는 듯이 머리만 끄덕였다. 그것을 본 오경석의 어깨가 솟아올랐다. 윤성일의 팔을 베고 누운 강희나가 천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알아?” “뭘 알아?” 오전 7시 반, 방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둘의 숨결도 아직 뜨거웠고 방안에는 둘이 발산한 땀과 정액의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마포의 유니언 호텔 방 안이다. 방금 격렬한 정사를 나눈 후여서 둘은 알몸이다. 몸을 돌린 강희나가 얼굴을 윤성일의 가슴에 붙였다. “세희가 오빠 좋아한다는 거.” “흐응.” 코웃음을 친 윤성일의 가슴을 손톱으로 긁으면서 강희나가 말을 잇는다. “여자의 육감이야. 걔가 오빠 좋아하고 있다는 거 오래 전부터 알았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수였는데.” “글쎄, 그것이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이라니까?” “조금 더 좋아했다면 살인 했겠다.” 윤성일이 강희나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하긴 며칠 전에 나한테 같이 여행 가자고 하더라. 둘이서.” “....” “난 윤씨고 저는 전씨라면서.” “정말 미쳤어.” 강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모는 어떻게 하라고?” 오명화가 강희나의 이모인 것이다. 윤성일이 길게 숨을 뱉었다. “걔는 밝아. 감정 표현이 직선적이고, 그래서 뒷맛은 개운해.” “오빠는 몰라서 그래.” 머리를 든 강희나가 윤성일을 보았다. “걔가 얼마나 끈질긴데? 앙큼하고? 그래서 이모가 걔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혔다구? 오빠는 겉만 봐서 몰라.” “너, 남 험담하는 거 처음 듣는다.” “나두 이런 말 하기 싫어.” 머리를 저은 강희나가 상반신을 일으켰다가 젖가슴이 다 드러났으므로 손으로 가렸다. 그러더니 쏟아내듯 말했다. “세상에, 둘이 여행을 가자니? 그게 말이나 돼? 어떻게 그런 말을....” “이리 와.” 강희나의 허리를 감아 당긴 윤성일이 다시 침대위로 눕혔다. 윤성일이 다시 강희나의 몸 위로 오르면서 말했다. “이제 그만.” 윤성일이 강희나의 입을 맞췄고 당연히 말이 끊겼다. 대일종금 강남지점은 테헤란로에 위치한 대일빌딩 1층과 2층을 사용한다. 대일빌딩은 28층짜리 대리석 빌딩으로 테헤란로에서 가장 뛰어난 건물로 선정 되었다. 3,4,5층이 대일종금 본사 6,7층이 대일산업이 입주해 있어서 이곳이 핵심인 것이다. 윤정수는 27층에 30평 규모의 사무실 겸 개인 주거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직원은 수행비서 겸 전무 직책의 박상호, 그리고 20년째 여비서 역할을 하는 40대 중반의 노처녀 양선희, 둘뿐이다. 거기에다 요즘 윤성일이 가담하는 바람에 27층 사무실 직원은 셋이 되었다. 오후 3시 반, 양선희가 인삼차와 커피 두 잔을 내려놓고 나갔을 때 윤정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박전무, 말해봐라.” 회의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헛기침을 해서 목청을 가다듬은 박상호가 말했다. “김봉주는 일을 의뢰받은 지 두 달이 되었고 보고는 지금까지 네 번 했습니다. 그 보고 내용이 여기 있습니다.” 박상호가 탁자위에 서류를 놓았다. 클립으로 박은 서류가 네 묶음이다. 박상호가 말을 이었다. “별거 없습니다. 성일이가 대일빌딩에 오는 시간, 나가는 시간, 나가서 누구 만나는지, 무얼 하는지 조사를 했습니다.” 박상호가 말하는 동안 윤성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윤성일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박상호가 말을 이었다. “건물 안에서 뭘 했는지는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을 아는 거야.” 윤정수가 앞쪽 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앞에 놓인 서류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계속해.” 서류에서 시선을 뗀 박상호가 말했다. “김봉주의 오랑용역에 의뢰한 사람은 윤태일과 윤수일 둘입니다. 김봉주는 둘 앞에서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 “앞으로도 계속하라는 의뢰를 받았다고 합니다. 회장님.” 회장님을 부른 것은 군대에서 무전할 때 ‘오바’의 신호나 같다. 끝났다는 의미다. 그때 윤정수가 윤성일을 보았다. 차분한 표정이다. “너, 지금 무슨 내용인지 알겠느냐?” “예, 아버지.” “네 형들이 네 뒤를 캐고 있어. 나하고 밀착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단 말이다.” “....” “지금쯤 두 놈은 내가 종금을 너한테 관리 시키려는 의도쯤은 짐작하고 있을 거다.” 윤정수의 시선이 박상호에게로 옮겨졌다. “다른 건 눈치 못 챘겠지?” “챌 이유가 없지요.” 정색한 박상호가 말을 이었다.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회장님.” 박상호의 보고가 끝났을 때 윤성일은 심호흡을 했다. 형들이 이렇게까지 경계를 할 줄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아버지는 형들이 의뢰한 용역회사를 다시 매수해서 정보를 빼내었다. 갑자기 온몸에 찬 기운이 느껴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윤성일은 어깨를 폈다. 그때 윤정수가 물었다. “어떠냐? 기분이.” “화가 나요. 아버지.” “당연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정색한 윤정수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혈연이나 의리에 약해진다면 다 무너진다. 그러면 모두에게 불행이야.” “....” “헤치고 나아가서 네 기반이 굳어졌을 때 도와라. 지금은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갈 때다.” 윤정수의 목소리가 점점 단호해졌다. “내가 수년간 심사숙고 한 끝에 결정한 일이야. 네 명 자식 중 네가 적임자다. 나는 내 뒤를 네가 있도록 할 것이고 언젠가 네 기반이 굳어진 후에는 손을 떼겠다. 외국 여행이나 다니겠다.” “....” “내 기대를 배신하지 말아다오.” 윤정수의 시선을 받은 윤성일이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다른 도리가 없다. 박상호가 일 때문에 방을 나갔으므로 안에는 둘이 남았다. 인삼차 잔을 든 윤정수가 창가로 다가가 섰다. “이리 오너라.” 창밖을 내다보면서 윤정수가 부르자 윤성일이 다가가 나란히 섰다. 27층 창에 서면 한강이 내려다보인다. 남산과 강북도 눈앞에 펼쳐진다. 윤정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큰형은 사업 능력이 전혀 없는데도 욕심이 많다. 그런 성품으로 이 사업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 애는 공직에 있다가 퇴직 하는 것이 가장 낫다.” “....” “둘째가 가장 문제다. 시의원을 하면서도 사업에 손을 대고 있는데 벌써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서 2천억 가까운 채무가 있어. 그것을 지금 숨기느라고 급급한데 사채업자에게 시달려 한시라도 빨리 재산 분배를 받아내려고 한다.” 윤정수가 머리를 저었다. “둘째한테 재산 분배가 가면 몇 년 못 간다. 그래서 그대로 둬야 우리 가족이 산다. 그놈은 망하게 내놓아야 해.” “....” “그리고 너.” 머리를 돌린 윤정수가 똑바로 윤성일을 보았다. “너 뒤를 캐고 있는 것이 네 형들뿐만이 아니다. 알고 있느냐?”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윤정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세희가 고용한 용역회사 직원 놈이 너를 미행하고 있다.” “....” “의아해서 생각해 보았더니 그놈이 널 좋아해서 그런 것 같더군. 하긴 이상한 일도 아니지.” “....” “네가 넘어갈 녀석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일은 잘 모르는 법. 뭔가 방도를 찾을 때까지 주의하도록 해라.” “아버지 무슨....” “그건 나한테 맡겨라.” 가볍게 윤성일의 말을 자른 윤정수가 지그시 시선을 주었다. “네 새어머니의 조카, 강 아무개 말이다. 좋아하는 사이냐?” “아버지도 제 뒷조사 하셨어요?” 대뜸 윤성일이 되물었더니 윤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놈아, 보호하려고 그랬다.” “그냥 만나는 사입니다. 아버지.” “삼호해운 강회장이 요즘 자금이 달리지. 그런데 딸내미 때문에 체면상 나한테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어.”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윤정수가 말을 이었다. “아마 너하고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을 게다. 그 집안에서.”
윤성일의 목소리가 컸기 때문인지 강희나는 목까지 움츠렸다. 주위에는 서양인들뿐이다. 잔에 포도주를 채우면서 윤성일은 요즘 자신의 생활이 너무 삭막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강희나는 물론이고 어젯밤 같은 좋은 기회도 매정하게 차버렸다. 어이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순간 윤성일은 숨을 죽였다. 김가영 때문이다. 김가영이 실종 되고나서 성품은 물론 생활 패턴도 바뀌어졌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잊었을 뿐이다. 여자에 대한 충동이 무의식중에 억제되고 매일 바쁘게 일 하는 것도 다 그 영향이다. 잊으려는 것이다. 찾을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잊으려고 다른 일에 몰두했다. 이런 경우는 인생에서 처음이다. 왜 이렇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가? 날 피해서 떠난 대상한테 왜? 그 이유가 궁금해서? 알아서 뭐할 건데? 어쨌든 나를 기피한 것 아닌가? 억지로 잡아서 뭐할 건데? 한 모금 포도주를 삼킨 윤성일이 이제는 제대로 시간을 보았다. 오후 7시45분이다.
“자, 나가서 한잔 하자. 여기 분위기가 비아-그라 먹는 놈들만 오는 곳 같다.”
자리에서 일어선 윤성일이 결심했다. 이제 그럴 것 없다.
첫댓글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감사합니다.
즐감요
^^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즐감 하고 감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