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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 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것입니다.
✠ 복음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 성인이 알려주시는 ‘적극적 고독의 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을 우리는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를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타인의 죄를 용서할 때 생깁니다.
노아의 벗은 모습을 형제들에게 알린 아들 ‘함’은 의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 덕분으로 살아남은 사실을 잊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셈과 야펫은 아버지의 몸을 보지 않고 뒤로 들어와 아버지의 겉옷을 덮어드렸습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 덕분으로 죄가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 요셉은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모르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을 덮어주려 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여 성모님을 보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모님의 잘못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그러면 아기 예수님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죄를 들추어내지 않기 위해 마리아와 그 가족, 또 자신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의롭게 만들려면 자신은 십자가와 고독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마 사순절에 요셉 성월이나 성인의 축일이 겹친 이유도 이러한 섭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의 고독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로워질 수 없음도 함께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도 의로워지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이 힘은 바로 의로워짐으로써 당연히 거쳐야만 하는 ‘적극적 고독’에서 나옵니다.
적극적 고독은 내가 세상과 나를 사랑했던 이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려지고 미움을 받을 때 머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골방’과 같습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신지, 계시지 않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면 힘들기는 하지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받는 때가 있습니다.
오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런 고독을 느껴보았습니다.
형제는 물론이요, 부모님도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기던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의 친구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있던 고향이 아닌 먼 곳으로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 타지에서 그래도 역시 타지로 다니는 한 친구와 친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소위 일진이라는 아이로부터 그 아이가 구타를 당하고 있을 때 저 혼자 나서서 아이를 구해주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또 수원역에서 그 친구가 깡패들에게 끌려갔을 때도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갔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이미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누군가와 시비가 붙었을 때 누구도 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는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모인 학생들의 집단이지 가족과 같은 끈끈한 우애를 발견하기는 힘든 곳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세상에 혼자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외롭다, 외롭다.’라고 느낄 때 한 개신교 다니는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왜 외로워?”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걸 누가 모르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저는 학교에 가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다녀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때 시원한 바람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느낌과 함께 그분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외로움이라는 것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친구들이 엄청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외로움을 느끼니까 친구가 없었던 것이고, 고독한 나만의 방이 생기니까 친구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요셉 성인이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타지에 갔다가 임신하고 돌아왔을 때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만약 요셉 성인에게 고독의 골방이 없었다면 용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면서도 그녀와 함께 있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미워하면서라도 그 사람을 자기 머리에 잡아놓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 골방이 있다는 이유로 미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습니다.
그 골방 안에서 운이 좋으면 절대자가 보낸 천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무작정 혼자 일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느끼는 소외감 같은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고독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재수가 좋으면 천사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고독을 즐길 줄 알 때 시작되고, 적극적으로 즐길 줄 알게 된다면 굳이 미움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내 안에 잡아놓을 필요까지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의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사순을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 요셉 성인의 선물일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성 요셉>
읍내로 물건을 사러 갔다가 인상 좋으시고 연세 지긋한 사장님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느릿느릿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데,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발소를 들렀는데, 말잔치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대충 들은 것 같았는데, 길고도 긴 대하드라마 같은 인생사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습니다.
집에 들어서면 결코 만만치 않은 분이 또 한 분 기다리고 계십니다. ㅋㅋㅋ
연세 조금 드시면서 갑작스레 말씀이 많아진 영감님들 케어하며 사시는 자매님들, 참 고생이 많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영감님은 어디 안 계실까 생각해봅니다.
입은 꼭 다무는 대신 얼굴엔 언제나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신 영감님,
너무 아무 말 없으면 답답하니 가끔씩 백만번도 더한 아재 개그가 아닌 신선하고 재미있는 아재 개그 구사하는 영감님,
너무 자주는 말고 하루에 세번 정도 뭐 필요하냐? 뭐 도와줄까? 물어봐주는 영감님,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기쁜 얼굴로 척척 해내는 영감님...
아마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 성인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요셉은 과묵한 의인, 침묵의 성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 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헀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없이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믿음 안에 의로운 사람>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 3,5 2코린 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 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 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 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 (신명 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마태 1,19)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가경자 알베리오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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