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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박근혜 대통령이 권좌에서 제거된 영적 이유(2)
저주를 초래하는 반유대주의, 그 살아있는 증거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박정희처럼
아랍의 오일 머니를 획득하기 위해
친아랍, 반이스라엘 노선을 견지했다.
앞서 지적한 바처럼 박대통령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다가
결국 임기를 못 채우고 권좌에서 제거된 까닭은
바로 이 영적인 문제에 진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라는 약속을
전 역사를 통해 충실하게 지켜 오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약속을 이행하고 계신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삼켜서 죽이려는
유대민족의 원수를 사랑하므로서 불운을 자초했다.
여기서는 반유대주의가 어떤 저주를 초래하는 지
그 살아있는 또 하나의 증거를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사례를 통해 재확인해보자.
국교 수립을 먼저 제안한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들 중 한국과 가장 먼저 수교한 나라다.
1961년 UN에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었던 골다 메이어 여사와
최덕신 한국 외무장관 사이에 미팅이 있었고
거기서 양국간 국교 수립의 돌파구가 열렸다.
이때 총체적 외교관계 수립을 먼저 제안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외무장관이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은 1962년 4월 9일 국교수립에 합의했고
마침내 4월 10일 서울과 예루살렘에서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는 성명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이렇게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은 1962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동 국가들 중 대한민국과 가장 먼저 수교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 대사관을 설치하지 않은 박정희
그러나 같은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은
모로코,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등
중동지역 이슬람국가들과 외교 채널을 뚫기 위해
외교력을 집중 가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박정희 정부가 이스라엘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동지역 아랍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을 우려,
예산상의 문제를 핑계 삼아
주 이스라엘 한국대사관 신설을 계속 지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농, 수자원, 교육, 특히 안보 등
여러 산업 분야에 걸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대사관을 설립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64년 8월 서울에 상주대사관 설치했다.
1964년 여름 서울에서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도 안 되어,
박정희는 중동으로 발을 향하고 있었다.
1965년 2월 사우디의 석유개발권을 두개나 확보한
일본인 하야시와 박정희가 최초 만났다.
이때부터 박정희와 하야시 사이에는 이스라엘 모르게,
아랍진영과의 총체적 협력관계 모색에 들어간다.
균형외교를 버린 박정희의 노골적인 친아랍, 반이스라엘 정책
1967년 아랍 리더들은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 모여 세 가지 선언을 하였다.
1. 이스라엘을 불인정
2. 이스라엘과 무평화
3. 이스라엘과 무협상
한국에서는 1972년 10월 이른바 “10월 유신”이 시작되어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이 연장되었다.
한 해 뒤인 1973년 2월 박정희는
태종선 부총리 겸 경제기획 장관에게
사우디아라비아의 안보를 한국이 지원할 테니
대신 원유광구를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4차 중동전쟁 발발(욤 키푸르 전쟁)
1973년 10월6일, 시리아(15만), 이집트(80만),이라크(6만) 연합군이
4500대의 탱크, 1310대의 비행기와 헬기, 125척의 전함으로
이스라엘의 국가적 안식일인 욤 키푸르 명절에 침략한다.
(이 때 이스라엘군 41만, 탱크 1500, 비행기 644)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전쟁자금 지원으로 참전했다.
이 중과부적의 대침략을 역으로 이기며
이스라엘은 34만 명의 포로를 사로잡고
골란고원과 수에즈운하까지 진출했다.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스라엘 국민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아리엘 샤론 장군(중앙)과 모세 다얀 장군(왼쪽). 아리엘 샤론은 이후 수상에 오르게 된다.
박정희, 신중동정책 발표
1973년 12월15일 박정희 정부는 <최규하 특사>를 사우디에 보내
이스라엘을 반대하고
3,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아랍국가의 영토를 반환할 것 등
4개항의 반이스라엘, 친아랍 성명을 발표한다.
1973년 12월17일자 동아일보
(이미지 위를 누르면 크게 보입니다)
이 자리에서 파이잘 사우디 국왕은
공산주의보다 더 악독한 것이 시오니즘 이라며
이스라엘에 극렬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박정희정부의 친아랍성명은
이런 파이잘 왕의 증오심을 지지한 것이나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이스라엘, 친아랍의 ‘신중동정책’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74년 2월 사우디의 나제르 기획상이
중동산유국 각료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바로 그 해 여름에 박정희 가문에 일어난 일…
영부인 육영수 여사 총격 사망!
1974년 8월 15일, 박정희를 암살하려는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격으로
영부인 피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 휩싸인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기념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저격 직후 경호원들이 연대 뒤의 박정희 대통령을 호위하고 있는 가운데
피격당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쓰러져 있다.
1974년 8월 16일자 조선일보
원래 8월19일 세이크 모하메드 아불라 알리레자 주불 사우디 대사가
특사로 서울 방문 양국간 “안보협력”을 조인하도록 확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리레자 대사는 대만을 방문 중이던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을 듣고 방한을 취소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와 함께 한·사우디간 ‘안보경협’은 결실 맺기 일보직전에 좌초된다.
한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한국이슬람중앙성원 개원
육영수 총격 사망 2년 후인 1976년 5월
전세계 이슬람 국가 지도자 51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이슬람중앙성원(한남동) 및 이슬람센터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그 이슬람사원은
박정희가 시유지로 희사한 1,500평 대지에
사우디 왕실 등 중동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건립되었다.
1976년 개원한 한국 최초의 이슬람 사원인 한국이슬람중앙성원(서울 용산구 한남동)
무슬림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돼 있다.
1976년은 아랍에 의한 대형 테러사건이 두 건이나 있었다.
* 6월27일. 엔테베공항 에어프랑스 여객기 납치사건,
* 8월11일. 이스탄불 공항의 PLO와 일본 적군파의 습격사건.
그럼에도 박정희는 친아랍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스라엘, 1978년 2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폐쇄 통보
한국 정부의 냉대 속에 있던 이스라엘은 1978년 2월 10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폐쇄를 외무부에 통고한다.
그리고 4월 1일부로 공식 철수한다.
(이미지 위를 누르면 크게 보입니다)
1978년 2월17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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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17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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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17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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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18일자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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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2월18일자 매일경제신문
1978년 2월18일자 매일경제신문
이스라엘, 1966년에도 대사관 철수 고려
한국과 이스라엘은 1962년 4월에 국교를 수립한 뒤
이스라엘은 64년 8월 서울에 상주 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아랍 국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주 이스라엘 대사를 임명치 않고 “정책적인 보류”를 계속했다.
이스라엘에 상주 공관을 두지 않고 지냈다.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불만을 표시,
1966년 5월에 금년 말까지 한국정부가 이 태도를 계속하면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을 철수시킬 방침이라고 통지한 바 있다.
1966년 5월5일자 경향신문
1966년 5월5일자 경향신문
한국의 조치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상주 공관을 두도록 요청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의 박정희 정부는 계속 불응했다.
1970년에 이르러 주 이탈리아 대사를 겸임 대사로 발령했고,
75년부터는 겸임 대사마저도 중단했다.
박정희는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갖고도 아랍권을 의식해
이스라엘에 상주 공관을 두지 않고 실질적인 교류를 기피해 왔다.
1978년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도록
결정 내린 인물은 모세 다얀 장군이다.
모세 다얀은 박정희 정부가 하는 친아랍 행보가
돌이키기 힘들다고 보았다.
친아랍, 반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한
1978년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철수,
그 1년 후…
1979년 10월27일자 동아일보
1978년 4월 1일 이스라엘 대사관이 철수한 지 1년이 지난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부하 김재규의 총격을 받아 갑자기 사망했다.
육영수와 박정희의 총격 사망, 이것이 우연일까?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기댈 곳 없던 대한민국을
적극 국제사회에서 지원했다.
1950년 남한이 북한의 침략을 받았을 때
신생 독립국이었던 이스라엘은
한국전에 의약품과 식량지원으로 참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이스라엘은 약 17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을 원조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고작 100만 명 미만이었고
국가 경제 또한 빈약했다.
그런 상황에서 땅끝의 한국을 살리기 위해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했다.
미군들 중에는 다수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군이나 영국군 등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유대인은 4천여 명에 달한다.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6·25 전쟁에 참전해 한국을 위해 싸웠다.
대한민국의 제1-3대 이승만 대통령의 아내로,
첫 번째 영부인 되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900년 6월 15일
사업가인 아버지 ‘루돌프 도너’ 공과
어머니 ‘프란체스카 게르바르트’ 여사 사이에서
세 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이 된 오스트리아 태생 유대인 프란체스카
▲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한국의 초대 영부인이 유대인 출신인 덕분에
역시 유대인 장군 맥아더는 이승만과 한국을 힘껏 도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 전쟁 전후 능통한 영어 구사력으로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 전시중 이승만과 맥아더
유대인 맥아더 장군은 유대인을 아내로 둔 이승만 대통령을 힘껏 도왔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하고
한반도의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 작전으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무산시키고
남북통일의 완성을 위해 중공에 원자탄을 투하하려 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유대인이다.
한국전쟁 후 분단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가 되었지만
유대인의 도움으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이다,
유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한국과 관계를 맺고
우리나라 경제개발시기인 1950~1970년대에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원자력발전소,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기간산업을
구축케 한 유대인 거상(巨商)이 있었다.
그 이름은 ‘사울 아이젠버그’(Saul Eisenberg, 1921~1997년)이다.
Saul Eisenberg
그는 1950년대 자유당 시절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약 4반세기 동안
한국의 차관 도입 중개에 깊이 간여한 독일·스위스계 유대인이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의 독립 이후 우리와 인연을 맺은 최초의 유대인으로서
한국이 무척 힘들었던 시기에 수호천사처럼 출현해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디딤돌을 놓았다.
1951년 2월 유엔총회에서 중공을 침략군으로 규정,
대중국 국제지원 여부를 논의할 때,
이스라엘은 남한과 외교관계가 없음에도 남한의 편을 들어 반대했다.
UN에서 UN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것이냐는 토의가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우리 편에 서서 북진을 지지했다.
한편 박정희 정부의 출범에는 이스라엘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 지원의 덕이 컸다.
1961년 7월 이스라엘은 박정희 혁명정부를 국제적으로 공식 인정했다.
이것은 5.16혁명이 일어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이다.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원형은 이스라엘의 키부츠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스라엘을 배신하고
노골적인 친아랍의 길을 걸었다.
많은 한국인들을 근로자로 중동으로 가게 하여,
이슬람문화와 종교를 배워오게 했으며 이슬람과 친화하게 만들었다.
국가에서 이슬람사원과 교육기관 건립을 위한
시유지 -그것도 서울 수도 중심지의- 와 국유지를
무상으로 지원한다는 것은 보통의 특혜가 아니다.
박정희가 반이스라엘, 친아랍으로 돌면서
육영수 여사는 총격을 받고 갑자기 사망했다.
그리고 유신체제, 장기 독재로 가다가
결국 박정희 역시 총격으로 사망했다.
총기 소지가 금지된 나라에서 더욱이 전시 상황도 아닌데
대통령 부부가 5년 간격으로 총탄에 맞아 죽다니,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고 계신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눈동자를 건드리면 하나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릅니다.
예레미야 2:3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아버지 박정희처럼
친아랍(이슬람), 반이스라엘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스라엘을 삼켜서 죽이려는 아랍국가들에게는 우호적이었고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냉담했다.
중동의 여러 이슬람국가들은 순방했지만
이스라엘은 근처에 갔어도 외면하고 방문한 적이 없다.
박대통령이 조롱거리가 되고 모욕을 당하다가
결국 권좌에서 쫒겨나게 된 근본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가 그랬듯이
이스라엘의 원수를 사랑했다.
바로 그것이 저주와 불운을 초래한 것이다.
렘 2: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여호와의 성물이요, 하나님의 눈동자인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선대해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약속하고 있다.
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서야 한다.
이스라엘을 선대하고 축복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첫댓글 보수-진보 시각이 아닙니다
친이스라엘 시각이 있지만 분석 자체는 읽음직해서 공유합니다
놀라운 정보이네요~
하지만 한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의
자리라면 친 이스라엘 정책 못쓰죠
겉으로 볼때 중동연합국 들이 유대인들
다 죽인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평화 협상을 조인 하고
그다음날 우리에게 평화란
유대인을 다 죽이는거라고 ㅠㅠ
그당시 이스라엘은 땅은 황무지였고
중동 연합세력들이 끊임없이
목숨을 노리고 당시 G2인 소련은 무기를
대주고 사실 모든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다 죽이이자고 하는ㅠㅠ(또는침묵)
놀라운 점은 이스라엘은 세번독립전쟁을
치뤄 승리하여 지금의 강대국이 되었는데
월등한 무기와 쪽대가리를 가진
아랍연합이 어떻게 세번이나?
혹자는 하느님의 개입없이는
이전쟁을 이길수 없다~
그리고 또 놀라운점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때가 되면
세계 모든나라에 뿔뿔이~
2000년 동안 나라가없었는데 ㅅㅅ
성경에서 한 예언
또 놀라운 점은 아직 이스라엘도
자리를 잡기전인데도 먼저 우리나라에게
러브콜을 했다는게~
또 많은 선교사들이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물론 이단도 가치ㅡㅡㅋ
한가지 덧붙이자면 한국사람도 매국노와
애국자들이 다르듯이 유대인도~
그리고 절대 언론을 믿지 마세요~
언론을 눈으로 보이잔아 하는 순간
우리는 양치기가 양을 무리안에 ~
반유대주의 절대속지마세요~
역사를 보면 끊임없이 유대인들을
대학살을 하며 씨를 말려버리려고 하는??
또 돈이 많은사람중에 유대인이 만타?
히틀러 왈:유대인들이 세계를 정복하려한다
그래서 다죽이자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