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예술의 산실 통영
달과 까마귀
이중섭과 통영
이중섭의 대표작은 거의 통영에서 제작됐다. 황소, 흰소, 달과 까마귀, 부부 등의 역작이 모두 통영 시절에 그려졌다. 평소에 소나 닭, 아이들 같은 배경이 삭제된 그림을 즐겨 그렸던 이중섭이지만, 이례적으로 통영에서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제주도의 몇 점을 제외하고 이중섭의 풍경화는 모두 통영의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집대성한 <이중섭, 백년의 신화>에서는 1953년 10월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의 주임강사를 맡고 있던 유강렬이 이중섭을 초청하여 11월 중순에 통영으로 이주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이듬해 5월까지 약 6개월간 양성소의 강사로 머무르며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영에서는 1952년에 이중섭을 만났다고 하는 증언자들이 많다. 이중섭과 함께 4인전을 열기도 했던 전혁림 화백은 국립예술자료원의 <예술사 구술총서 002-전혁림>(2011)에서 “이중섭이 처자식 일본으로 보내고 통영을 왔다. 유강렬과 3년 가까이 지내면서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중섭과 함께 통영에서 기거했던 양성소 1기생 이성운은 2014년 dtc 사보 인터뷰에서 “이중섭과 2년 동안 같이 살았다”고 말했다. 통영옻칠미술관 김성수 관장은 김순철의 <통영과 이중섭>에서 “1952년에 봄부터 유강렬 선생이 하숙하던 복천여관 건너편에서 같이 살았다”고 증언했다. 이중섭 선생이 뒤에서 지켜보다가 다가와서는 팔꿈치를 들어주던 기억도 있다.
과거의 기억이란 시간과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어렵다. 하지만 김성수 관장의 경우 1953년 3월부터는 부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중섭이 1953년 가을에 왔다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이런 증언을 모아 김순철 작가는 자신의 저서 <이중섭과 통영>에서 “1952년 봄부터 1954년 봄까지 2년 동안” 통영에 머물렀다고 썼다.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의 전은자 학예사는 “특별한 거주지가 없었고 유강렬, 전혁림, 김용주 등 당시 통영에서 활동하던 작가들과 깊이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1952년에도 통영을 오갔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명확한 이주 시기는 이중섭의 편지 등을 기초로 학자들이 정리한 것이므로 1953년이 맞다”고 일축했다.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지만, 오히려 이는 이중섭이 데생 특강을 한 것으로 기억하는 김성수 관장의 증언과 들어맞는다. 이중섭과 함께 기거했던 이성운 선생은 이중섭이 “미술사를 가르쳤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운 선생은 1기생으로 입학하여 2년 동안은 학생으로, 3년차부터는 강사로 근무했기 때문에 김성수 관장의 끊어진 기억을 보충할 만하다. 결론적으로 1952년에는 왕래하며 특강을, 1953년 여름 이후에는 정기적으로 미술사를 가르쳤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이중섭은 미술사 교사였다
미술평론가 최석태 씨는 “이중섭이 미술사를 가르쳤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면서, “통영에 있었던 양성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남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의 실제적인 설계자는 유강렬이다. 최근 이건희 컬렉션에 70점이나 작품이 소장돼 다시 한 번 세간의 이목을 끈 유강렬은, 휴전된 이후에 서울 국립박물관 미술연구소와 홍익대 미술대학의 기본 커리큘럼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상경 직전까지 공을 들여 운영한 것이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니, 그 수준이 ‘기술자 양성’ 이상의 것이었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성수 관장은 자신있게 “한국 최초의 미술대학, 디자인 교육의 발상지”라고까지 그 의미를 정리한다.
최석태 평론가는 “유강렬이 이중섭을 스카웃한 것은 회화보다는 미술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 예술에 누구보다 관심이 깊었던 유강렬이지만, 너무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자란 탓에 자신은 제대로 된 민족 미술을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유강렬의 눈에 일본에서 만난 이중섭은 가장 적합한 미술사 교사였다. 평양에서 보통학교를 나오고 민족사관을 가진 오산학교를 나온 이중섭은 일본에 살 때도 ‘조선의 화공’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은 누구나 마음먹으면 고구려 고분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중섭 그림의 강직한 선이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온 것이라는 평을 내놓은 평론가도 한둘이 아니다.
이중섭과 평양보통학교, 동경문화학원 동창인 김병기 화백은 2017년 한겨레신문과의 대담에서 “이중섭의 반코트 주머니에는 언제나 골동품상에서 모은 듯한 도자(陶瓷)의 파편으로 가득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중섭을 “미친 사람처럼 우리 전통에 열중했다”고 평했다. 6.25 때 행방불명된 이중섭의 형이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였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양성소 시절의 제자인 이성운은 이중섭이 만든 ‘미술사’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최석태 평론가의 손으로 넘어가, 이중섭이 ‘데생’뿐 아니라 미술사를 가르쳤다는 증거로 남았다.
강점기에 일제는 우리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는데, 이중섭은 거꾸로 일본인 아내에게 ‘남덕’이라는 우리 이름을 지어주고, 사모관대와 족도리를 쓴 전통결혼식을 올렸다. 김병기 화백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해프닝 같은 희귀한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명작의 산실 통영, 대표작을 쏟아내다
‘인간 이중섭’을 조명한다면 제주도는 가족과 행복한 시절을 보낸 따뜻한 곳, 부산은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아픈 곳, 통영은 혼자 남아 작품에 전념했던 뜨거운 곳, 대구는 정신병이 발발한 슬픈 곳, 서울은 삶이 스러져간 쓸쓸한 곳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중섭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세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화가 이중섭’이라는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통영은 명작의 산실이다. 이중섭은 전쟁의 상흔이 가득했던 부산이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첨예했던 대구에서는 “소를 보아도 소를 그릴 수 없었다”고 말했단다. 남한에서 그린 소 그림이 대부분 통영에서 완성된 이유다.
또한 좀처럼 풍경화를 그리지 않는 이중섭이 통영에서만 10여 점의 풍경화를 그린 것도 주목할 만하다.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이 화가가 창작의욕을 고취시켰다고 볼 만한 대목이다. 1954년 1월에서 5월 사이 이중섭은 <푸른 언덕>, <충렬사 풍경>,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복사꽃이 핀 마을> 같은 풍경화 그림을 쏟아냈다.
이런 사실은 통영에서 쓴 편지에도 나타나 있다. 이중섭은 통영 시절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제작욕이 왕창 솟아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자랑한다.
1953년 12월 통영 성림다방에서는 <떠받으려는 소>, <황소>, <흰소>, <부부> 등 40여 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1954년 3월에는 유강렬, 장윤성, 전혁림과 함께 통영 호심다방에서 4인전을 열었다. <분노한 소>, <충무 풍경>이 이때 출품된 작품이다,
통영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은 문화예술인과의 교류다. 이중섭이 1953년 10월 열린 김상옥 시인의 출판기념회에 축의금 대신 <복숭아를 문 닭과 게> 그림을 시집 내지에 그려준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상옥 시인은 그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꽃으로 그린 악보>라는 시를 썼다. 이중섭의 그림 <달과 까마귀>를 보고 유치환이 시를 쓰고, 김춘수는 아예 이중섭을 주인공으로 연작시 9편을 지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통영,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현재 통영에는 이중섭의 흔적을 제대로 살려놓은 곳이 없다. 성모의원 유문두 원장이 병원 3층에 ‘이중섭과 통영’이라는 갤러리 공간을 마련한 것, 통영문협 김순효 시인이 항남동에 게스트하우스를 열면서 ‘둥섭과 다락방 친구들’이라는 간판을 걸고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삼고 있는 것 등이 눈에 띈다. 모두 민간에서 팬심으로 한 일이다.
시민들 사이에서 ‘통영이 뭔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마련된 것은 벌써 오래되었지만, 번번이 통영에서 나고자란 예술인들의 기념사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명함도 못 내미는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다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되고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 서귀포로 가는 것을 부럽게 쳐다만 보았다.
이건희가 기증한 이중섭의 작품 중에는 통영과 관련되었거나, 통영에서 그려졌음이 분명한 이중섭의 그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통영이 준비되었더라면 당당히 “그 작품은 통영에 주시오” 할 만한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지금이라도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미술관이라도 하나 있으면,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처럼 천천히 내실을 다져나갈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개인전을 열었다는 성림다방 자리는 강구안 도로 확장으로 사라졌고, 시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는 ‘복자네’ 선술집은 위치가 어딘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4인전을 열었다는 호심다방 자리와 이중섭이 그림을 그린 뷰포인트들은 찾을 수 있다.
더구나 지난해 1월, 이중섭이 기거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은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고, 김상옥 생가를 비롯한 항남1번가 여러 건물이 국가등록문화재 제777호로 등록되었다. 이 건물들의 사용계획 수립에 이중섭과 통영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지난 2020년 6월, 욕지도는 이중섭이 2박3일간 머무르며 스케치한 것을 되살려내 ‘욕지 이중섭 길’을 만들었다. 총사업비 8,894만원으로 전망데크와 이중섭 조형물 포토존을 마련한 것이다. 안내판에는 “이곳은 1953년 봄 이중섭이 <욕지도 풍경>을 그린 곳”이라는 설명과 2박 3일 동안의 이중섭 여정이 담겨 있다. 이 여정을 고증하기 위해 부산의 이성운 장인을 수차례 방문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2박3일 머문 욕지도의 노력에 비하면 2년 머문 통영시는 손을 놓고 있는 듯 보인다. ‘이중섭과 통영’ 갤러리에서 사비를 털어 ‘가족사랑엽서 공모전’을 주최하는 것이 통영시가 하고 있는 이중섭 사업의 전부다. ‘예향’의 이름으로, 통영을 자양분 삼아 대작을 이루어낸 작가를 품고 드러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모병원 3층의 이중섭과 통영 갤러리
욕지도 이중섭 길
울할매코다리 자리에 호심다방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중섭이 미술사를 가르쳤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출처 : 통영신문(http://www.tynewspaper.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