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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을 준비하는 압살롬
삼하 15:1-6
1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2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3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4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삼하 15:1-6 / [반란을 일으키는 압살롬] 압살롬은 그술 왕국에 머무는 동안 외할아버지한테 이방인의 풍속들을 배워 가지고 왔는데, 이제는 스스로 이스라엘에서 그런 풍속을 차용하여 자기가 타고 다닐 전차 한 대와 여러 마리의 마필과 경호원 5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2) 그리고 압살롬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왕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서 백성들한테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하였다. 재판할 일로 왕에게 판결받으려고 오는 사람마다 그 문을 지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곳으로 오면 압살롬이 이렇게 물었다. `어느 지역에서 오시는 분이십니까?' 이때에 그 사람이 북쪽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온다고 대답하면 3) 압살롬이 친절하게 그의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준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문제는 당연히 재판에서 이기게 되어 있으나 저 왕궁 안에는 지금 당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소' 4) 그런 다음에 압살롬은 언제나 자기 선전을 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서 재판관이 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억울한 사정을 다 풀어 줄 수 있을 것이오' 5) 이런 말을 듣고 누가 그의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리려고 하면 그가 그를 일으켜 세워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6)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러 오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친절을 베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 사람들은 유다와 다윗왕에 대하여 거리감이 있었는데, 압살롬이 이렇게 기만과 간교한 수단으로 그들의 마음을 도둑질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다.
아버지 다윗 왕과 형식적으로나마 화해를 얻어낸 압살롬은 왕궁으로 돌아와 반역을 꾀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합니다.
병력을 준비함(1)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과 형식적으로 화해를 했을 뿐 예루살렘 왕궁으로 돌아오자 반역을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고 반역을 위한 치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형제 간에 피의 살육을 벌인 아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은 맹목적일 만큼 지나쳐서 잘못을 했음에도 문제를 삼지 않았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들의 어리석음은 갈등관계를 넘어서서 권력에 대한 야심으로 반역을 꾀하게 됩니다.
이간책을 사용함(2-3) 반역의 계획은 매우 치밀하여 다윗 왕권에 균열을 내기 위해 백성들의 마음을 이간질하기 시작합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왕에게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 왕이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말하며 사람들에게 왕에 대한 불신을 심어 줍니다. 전쟁에서 가장 치명적인 전략 중에 하나가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이간책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에 불신을 조장하여 이간책을 사용하는 압살롬의 행보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훔침(4-6)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백성들에게 압살롬이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대리청정을 하듯 그들의 재판을 직접 하면서 그들의 입장에 서서 선정을 베푸는 양 민심을 얻고자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왕자에게 절하려고 하면 도리어 입을 맞추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겸손을 가장한 행동을 보이는 뱀처럼 지혜로움을 보입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아침 일찍 일어나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 약자를 동정하며 그들에게 애정을 보이는 것이 진심이 아니기에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그의 본심이 반역을 꾀하고자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거짓으로 포장된 사람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20세기 명지휘자 이탈리아 출신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지휘하고 나자 청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 청중들에게 그는 ‘음악은 내 지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는 오로지 베토벤이 시킨대로 한 것뿐입니다.’라고 겸손히 말했다고 합니다. 이 무대에서 연주곡의 주인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지휘자와 연주자들뿐입니다. 연주에 감동한 청중들은 교향악단들에게 박수를 보냈으나, 결국 영광을 작곡가 베토벤에게 돌린 지휘자의 겸손은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많은 은혜와 감사를 겸손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15:1
이 후에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아레이 켄'(* )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모두 3회 등장하는데(3:28 ; 대하 32:23), 이는 유사한 접속사 '아하레이 켄'(* )과 구별된다. 즉, '아하레이 켄'은 (1)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 (2)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이어주는 단순 접속사(2:1 ; 10:1 ; 13:1 ; 15:1 ; 대상 18:1 ; 19:1 ; 대하 20:1)로 사용된 반면, '메아레이 켄'은 오직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로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장에 나오는 사건은 시간적으로 14:33의 사건 이후에 일어난 후속(後續) 사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병거와 말들...전배 오십 명 -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전배들을 갖춘 것은 반역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병기를 구비한 행위일 뿐 아니라, 아도니야의 경우처럼 차기 왕으로서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왕상 1:5). 즉 이러한 병력의 배치는 흔히 이방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강한 권세와 화려한 영화를 나타내기 위해 곧잘 이러한 수행원들을 거느렸던 것이다(삼상 8:11). 따라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1) 이방 왕들의 사치한 풍습을 따른 것이었고, (2)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한 반역적 행위였으며,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는 계략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The Interperter's Bible, Keil, Lange). 한편, 여기서 '전배'(前陪)는 히브리어로 '이쉬 라침'(* )인데, 이는 '달려가는 사람', '경주자'란 뜻이다. 즉 '전배'란 당시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다니며 마차가 지나갈 길을 정비하고 왕을 경호하던 경호부대(警護部隊)를 가리킨다(Jamieson).
=====15:2
일찌기 일어난 성문 길 곁에 서서 - 여기서 성문이란 왕궁의 문을 의미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Pulpit Commentary).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마을의 성문은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하는 장소였다(창 23:10, 18 ; 욥 29:7 ; 잠 24:7 ; 31:23 ; 신 21:19 ; 22:15). 때문에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성문, 곧 궁궐 문에 합법적인 재판관(裁判官)을 세워 재판을 베풀는 풍속이잇었다. 그리고 그때 재판관은 먼저 예루살렘 주민들을 재판하고 다음에 타성읍의 소송 문제들을 재판하였는데, 그 재판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de Vaux). 따라서 압살롬은 성문에서 열리는 왕의 재판을 전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섰던 것이다.
너는 어느 성 사람이냐 - 압살롬의 왕이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다. 백성들에 대한 압살롬의 이러한 친절은 자기를 왕으로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병력을 대치한 오만 불손한 행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절). 그렇지만 이 역시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음흉한 행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없다(6절).
=====15:3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 재판도 하기 이전에 사법적인 결정을 내려주고 있는 압살롬의 독단적 발언이다. 즉, 압살롬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유리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장차 다윗 왕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는 여지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 압살롬이 다윗을, 백성들에 대한 자기의 기본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자로 매도(罵倒)하고 있는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송사 들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 )는 사법적 처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재판관, 또는 사법 관리를 의미 한다. 이는 왕이 직접 임명한 자였기 때문에 왕적 권위로 재판할 수 있었고, 이 사람이 한번 결정하면 더 이상 상소할 수 없었다(de Vaux). 그런데 당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운 것은 아마도 혼자서 모든 소송을 검토하고 재판하기에는 너무 벅찼으며, 또한 재판에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따라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압살롬의 거짓 증거는 다윗이 사법적 의무에 대해 방임하고 있는 양 매돠다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15:4
내가...재판관이 되고 - 이처럼 압살롬이 왕자란 신분을 이용, 스스로 백성의 재판관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관 조직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그 같은 조직이 전문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유다 왕 여호사밧 때의 일이다(대하 19:4-1).
내게로 오는 자에게 - 여기서 '내개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리'(* )는 '내 위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본절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마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피력하고 있다. (1) '내 위로 나오는'이란 표현이 당시 재판 현장의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란 견해이다. 즉, 당시 재판장은 자리에 앉아서 재판하였으며 백성들은 재판장 곁에 서서 재판을 받았다(출 18:13). 따라서 압살롬은 이러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은연 중 백성들에게 재판을 베풀어 주겠다는 자기의 의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Keil). (2) '내 위로 나온다'는 표현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짐을 그에게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Lange). 따라서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이 곤란한 문제를 자기에게 자져올 경우 자기가 맡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는 언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판단키 곤란하다. 그러나 양 견해 모두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을 나타내 주므로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15:5
입을 맞추니 - 본래 입을 맞추는 것은 반가움의 표시이며 진정한 화해의 표시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자기를 선전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14:33 주석 참조.
=====15:6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 여기서 '도적하다'에 해당하는 '가납'(* )은 특히 '남을 속여서 훔치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압살롬은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고(2절), 현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3절), 약자를 동정하고(4절), 그들에게 애정을 보였다(5절). 그런데도 본서 저자가 이 모든 압살롬의 행위를 가리켜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 하였다'고 언급한 까닭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성실한 통치를 베풀어 신망(信望)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은 압살롬과 같이 불의한 방법으로 기존 권세자에 대하여 항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롬 13:1, 2). 그러나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유린하는 정부에 대하여선 스스로를 지키며 또한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불의에 항거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기도 하다(벧전 2:13, 14). 그러므로 오늘날 그 어느 현장, 어느 집단에서든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억압되며 생존권이 침해 당한다면, 그곳에서 크리스챤(Christian)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시 58:1).
< 설 교 >
압살롬의 도적질
삼하 15:1-6
요압을 이용하여 다윗과 거짓으로 화친한 척 한 압살롬은 반역을 위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준비한 것은 군사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은 정치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아무리 반역을 하여 왕이 된들 진정한 왕이 될 수 없음을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그것은 송사가 있어서 다윗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왕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 자신은 백성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마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의 수완은 참으로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3절의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보면 먼저 압살롬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네가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말을 틀렸다고 반박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마치 그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나를 옳다고 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압살롬은 먼저 송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의 행한 것이 옳고 바르다고 함으로써 압살롬이 그의 편이라고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지만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함으로써 현재 다윗의 정치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네가 옳다고 해도 지금의 왕은 너의 옳음을 들어주지를 않을 것이라는 말로써 다윗에 대해 불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또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공의 베풀기를 원하노라”(4절)는 말을 함으로써 마치 자신만이 백성들 편에 서서 모든 송사를 공정하고 바르게 판결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각 시킨 것입니다.
이 같은 압살롬의 수완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자신에게 돌려놓기 위해 그는 백성들 앞에서 지극히 겸손한 자로 행세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라는 말씀처럼 압살롬은 사람들 앞에서 왕자라는 권세를 내세우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절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신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정서는 도덕적이고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겸손한 정치인을 신뢰합니다. 하지만 겸손이라는 것이 압살롬처럼 얼마든지 가장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겸손의 행위에 대해 속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굴복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는 하나님의 뜻에 북종 할 뿐입니다’는 마음이 겸손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죄를 보면서 감히 자신은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만이 자신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 앞에 나올 수 없는 죄를 범한 처지면서도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요압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절을 하는 것을 막으며 그들의 입을 맞추는 것은 백성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겸손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볼 때에는 자신들의 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왕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맞춰 환대하는 압살롬이 지극히 겸손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그것이 압살롬을 신뢰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윗보다는 그러한 압살롬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렇게 겸손한 압살롬이 왕이 되어 자신들을 다스린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압살롬의 겸손과 자신들을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으로 인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압살롬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압살롬이 무엇에서 크게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압살롬이 겸손을 가장한 것보다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한 것보다 더 크게 잘못된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했다고 말하는데, 왜 마음을 도적했다는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도적했다는 것은 남의 것을 훔친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 자신의 것입니까?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의 여부는 결국 나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주인이 내 마음의 주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무작정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살아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입니다. 또한 홍해라고 하는 죽음에서도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 구원을 노래하면서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 까지였나이다”(출 15:16)라는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셨기 때문임을 안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피로써 살려낸 민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고전 7:23절에서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산 하나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든 우리이든 마음은 나도 그 누구도 주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그들을 다스리고 권면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뺏고자 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압살롬이 잘못됨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한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백성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압살롬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지 않고 살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둔 채 하나님을 섬길 뿐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도적하기 위한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백성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것,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모습이 교회 내에서도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압살롬과 같은 수완은 목사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힘있는 목사로 군림하기 위해 교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이 마치 교인들의 편인 것처럼 행세하고, 또한 겸손을 가장하여 행동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지 못하고,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목사의 본분임을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고 자신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 일한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할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신자입니다.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 즉 어떤 사람도 신뢰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를 크게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전혀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신뢰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자신의 마음을 돕는 것이라면 신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은 어린양의 피를 향해야 하는 것처럼, 신자의 마음은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를 향해야 합니다. 이 일을 돕는 자가 곧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왕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에 맞게 행동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왕이 어떤 존재인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무엇이 자신들을 돕는 것인가를 모른 것입니다. 신자라면 나에게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지기를 원해야 할 것이고 그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압살롬
삼하 15장 1~12절 / 배영진목사
오늘은 압살롬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왕자입니다. 대단히 유능하고 탁월하며 잘생겼고 다윗의 아들 중 가장 특출한 왕자였습니다. 압살롬은 인기가 많았고 젊고 패기가 넘치는 왕자였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핵인싸에 해당될 정도의 인물이죠.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때 대단히 멋지고 대단한 능력, 세상적으로 탁월함과 월등함을 가진 인물에 대하여, 그런 특성을 성경은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는 실격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기준으로 보면 압살롬은 전형적으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했다, 라고 할 때 영어성경으로 worldly, 세상적인,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영접하면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많은 경우에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 전형적으로 세상사람과 똑같은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에 속했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 역사를 보면 사울왕이 그래요. 절대로 믿음으로 살지않은 사람, 전형적인 육에 속한 사람, 그가 사울왕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인데 놀랍게도, 아버지 다윗의 길을 가지 않고 대신 사울의 길을 갑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압살롬은 내면속의 가치관이 매우 세상적입니다. 이게 육에 속했다, 세상에 속했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신자라고 말은 하지만 그 내면이 세상적입니다. 압살롬은 하나님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음으로 행한 증거가 그 삶에 없습니다. 압살롬은 온전히 자기 정욕으로 삽니다. 욕심문제가 아직 해결이 안되었어요. 성경에 정욕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성적인 욕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심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과 정반대되는 자기만의 강한 욕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욕으로 사는 사람은 가까운 이웃들과 불화와 갈등과 다툼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왕자 압살롬을 보면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빼앗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입니다. 다윗의 영성, 믿음, 인격, 어떤 것 하나도 배우지 않습니다. 오늘 압살롬에게서 두가지를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압살롬의 인간관계입니다. 둘째는 그가 일하는 방식을 보겠습니다. 이게 너무나도 세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사람의 마음을 훔칩니다. 압살롬이 사람을 내 이익에 맞게 이용합니다. 우리가 오늘 압살롬을 살펴보는 이유는, 내 인간관계, 그리고 내가 일하는 방식, 세상적인가 성경적인가 이것을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우리 각자가 살펴봅니다. 내 안에는 압살롬이 혹 들어있지 않은가 이것입니다.
첫째, 압살롬은 인간관계에서 사람의 마음을 훔칩니다.
오늘 1절부터 6절까지 보면, 압살롬은 아버지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준비합니다. 1절 보세요. 수레와 말을 여러 필 준비합니다. 압살롬은 매우 착실하게 준비하죠. 자기를 위한 호위병을 50명 준비합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면밀하게 뭘 준비해요? 반란입니다. 2절, 압살롬의 모습을 보면 부지런합니다. 성실합니다. 매일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아침마다 성문 입구 길가에 서있습니다. 누가 봐도 멋진 왕자님이 이렇게 성실하고 친절하니! 압살롬의 평판이 날로날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선거철만 되면 이런 모습이 다 나옵니다.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도 친절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겸손할 수가 없어요. 와 이렇게도 겸손한 분이 우리 지역에 계셨구나! 저 분을 찍는다면 우리 지역이 좋아지겠네. 우리나라도 정말 살기 좋겠네! 그런데 선거만 끝나면 그 모습이 다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육에 속한 사람은 본래 그래요. 육에 속했다는 것은 그 삶의 모든 원칙이 인위적이고 세상적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실하게 친절하게 겸손하게 살지만, 거기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성경적인 인생관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2절에 보면, 압살롬은 대단히 친절한 왕자입니다. 그때 성문입구는 재판석입니다. 사람들이 민사상 재판을 받으려고 오는 곳이고 성문앞은 재판소, 곧 법원입니다. 사람들이 판결을 받으려고 성문으로 나오는데 모든 재판은 당시에 왕이 합니다. 왕을 찾아 판결해달라고 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억울한 일 당하면 상소를 하고 왕은 상소를 받아 공의로 판결해주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을 잘 보세요.
억울한 일로 상소를 하고 판결받으러 온 사람이 있을 때 성문에서 그를 불러요. 어느 성읍 어느 지파인가를 물어보고, 좀 이상한 말을 합니다. 3절을 읽어봅니다. 당신 사정이 딱한데, 당신이 정당한데, 우리 왕에게 상소를 해도 안들어줄거다. 이것은 이간질입니다. 다윗왕이 너희들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안들어줄 것이다.
4절 압살롬이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이 나라의 재판관이 된다면 다 잘될텐데! 이런 일 모두를 공정하고 정당하게 재판해줄텐데, 그의 정치철학이 공정입니다. 5절, 그의 친절은 절정에 이릅니다. 백성들이 왕자 압살롬에게 절을 하려고 하면 얼른 손을 내밀어요.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내게 절하고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당신보다 높은 사람 아니다! 엄청 겸손한 왕자님, 사람들의 마음이 한방에 뿅 갑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요. 압살롬 왕자님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춰줍니다. 이렇게 자비로울 수가 없어요. 백성들이 너무나 감동을 받습니다. 너무 친절한 거예요. 온 나라 사람들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집니다. 압살롬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6절을 다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성경은 어떻게 평가했는가? 하나님은 압살롬의 성실과 친절과 겸손에 대하여 뭐라고 평가를 내리셨습니까? 6절,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마음을 사로잡았다, 뭡니까? 각주 ㄱ이라고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사로잡았다! 도적하였다! 개역성경에는 압살롬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니라! 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영어성경에도 stole, 압살롬이 사람마음을 훔쳤다는 것은 뭔가? 그 성실과 그의 친절과 겸손은 모두 위장이었다는 듯입니다. 위선적 내적 장치에서 그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실한데, 정말 친절한데, 정말 겸손한데, 압살롬에게서 나온 것은 인위적입니다. 진실한 내면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압살롬의 모든 인간관계가 자기를 이롭게 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쪽으로 철저하게 세팅되어있었다! 이것이 인위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압살롬의 인간관계를 성경이 콕 찝어서 기록한 구절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은 이후 사무엘하 18장 18절로 한번 가봅니다. 다같이 이 구절 한번 읽어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살아있는 동안 기념비를 세웠어요. 여러분 누가 생각납니까? 사울왕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버림받기 직전에 한 일이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놀랍게도 사울의 길을 가요. 자기 선택입니다. 압살롬은 모든 인간관계를 할 때, 그 최종목표가 자기입니다. 이것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합니다. 그의 성실과 열심과 친절과 겸손이 다 그래요. 압살롬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자기성찰의 눈이 있었을까? 둘 중 하나입니다. 전혀 몰랐거나, 알았지만 내버려뒀거나!
이제 우리 얘기로 와볼까요? 오늘까지 내 인간관계의 패턴과 원칙은 무엇일까? 나는 왜 친절을 베풀까? 누가봐도 친절해서 좋은데, 성실해서 좋은데, 겸손해서 좋은데, 사람들은 좋다고 하지만, 하나님 보실 때 내 인간관계를 뭐라고 하실까? 그것이 압살롬의 그것처럼, 혹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을 해봅시다. 압살롬의 성실 친절 겸손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도적이었다! 하나님의 평가,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내가 사람들 앞에서 보인 미소와 친절과 이런 모습들이 혹 내 쓴뿌리에서 나온 열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과도한 친절과 인위적 겸손은 무엇에서 나온 것일까요?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자! 내가 왕이 되어야한다, 이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압살롬의 인위적 친절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둘째, 압살롬은 일을 할 때 사람을 이용합니다.
7절부터 12절까지 보면 압살롬은 모든 반란계획을 완성하고 그 일을 시행합니다. 일을 할 때 추진력이 대단합니다. 그는 멋진 명분으로 반란계획을 포장합니다. 7절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앞에 나와서 한 말을 보세요. 제가 헤브론에서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헤브론에 있을 때, 저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헤브론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한 적이 있는데, 그 서원을 이루도록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허락을 청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정작 헤브론에서 하려는 일은 쿠데타입니다. 왕즉위를 선포하려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2백명의 귀빈들을 초대했습니다. 2백명에게 초대장을 보냈는데, 그 초대장에는 제목이 압살롬의 헤브론 서원감사예배라고 적혀있었고, 다윗왕의 허락과 축복을 받았다는 점까지 기록이 되었습니다. 누가봐도 아무 문제없는 예배초청장입니다.
여러분 압살롬이 지금 왜 세상적인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인지 명확해지시나요? 압살롬은 자기 일, 자기의 필요에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이걸 조작이라 합니다. 내 목표를 위해 의도를 갖고 사람을 동원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귀빈들이 필요해요. 이 중요한 이들을 내 왕위선포식에 들러리로 장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대세다! 이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질문합니다. 압살롬은 지금 자기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 뭔지 알까요? 이게 거짓이라는 것, 이것이 사람들을 내 유익 때문에 도구화시킨다는 것, 너무나 세상적이라는 것, 이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는 것을 과연 성찰했을까요? 그는 자기성찰이 가능했다, 가능하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요? 가능하지 않아요. 그는 자기성찰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성찰 기능이 훼손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거짓된 일을 계속 추진하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일이 불가능해요. 자기를 매일 성찰하면 거짓된 일을 추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조작을 하는 중에, 이것이 조작이구나, 악한 거야 라고 스스로 깨닫기 매우 어렵습니다. 내가 아버지 다윗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구나! 이것은 악한 일이야, 이걸 깨닫고 돌이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누가 알려줘야만 알 수 있는데 그걸 누가 알려줍니까? 세상적 수단과 방법을 쓰고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 얘기가 신문 사회면 기사가 되기 전에 미리 중단하지 못합니다. 누가 당신 이것은 악한 거야 잘못된 거야 알려줍니까? 그걸 말해줄 사람이 없어요. 그 인생이 완전히 수치스럽게 드러나는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중단이 어렵습니다.
오늘 압살롬은 자기 주변의 모두를 완벽히 속입니다. 압살롬은 측근부하들에게, 내 신호를 받으면 즉시 뭘 해야하는지 알려줍니다. 10절, 나팔소리가 나면 곧바로 압살롬 왕 만세! 외치도록 콘티를 짭니다. 11절, 2백명 귀빈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초대장받고 헤브론으로 갑니다. 왕자가 하나님께 서원예배를 드리는 줄 압니다. 12절 압살롬은 제사장 아히도벨까지 거사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합니다. 아히도벨은 아버지 다윗의 친구, 다윗의 평생 카운슬러였습니다. 모략이 너무나 지혜로워 다윗이 늘 곁에 둔 사람인데 압살롬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압살롬의 반란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헤브론에서 왕위선포식을 거행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다윗성으로 군사들을 모아 진격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 기울어져버렸습니다. 다윗이 맨발로 다윗성을 나갑니다. 신하들도 울면서 갑니다. 다윗과 신하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울음바다가 됩니다. 거사는 완벽하게 성공했고 온세상이 완전 압살롬의 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압살롬의 완벽한 일추진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압살롬의 인생을 그냥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는 하나님나라에 맞지 않아요.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가 정면 무력충돌하여 내전이 일어나는데 하나님이 압살롬의 군사들을 직접 공격하십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 자기의 자랑거리인 머리카락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요압의 창에 살해됩니다. 압살롬이 죽으니 압살롬을 따라다니던 부하들은 그날로 뿔뿔히 흩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맨발로 다윗성에서 도망가던 다윗, 다 망하고 끝난 것 같이 보이던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압살롬은 유능했지만, 결국 인생이 망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얼마나 유능한가? 얼마나 뛰어난가? 이 기준으로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혜롭고 치밀하게 준비해도 결국 그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계획을 무산시키십니다. 왜 압살롬은 하나님께 실격인가? 세상적 가치관으로,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 처음부터 성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두가지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인간관계, 일추진, 이 두가지를 매일 자기성찰을 해야 합니다. 내 인간관계,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일할 때,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 두가지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내 안의 압살롬을 찾아내서 그 압살롬의 모습을 내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 수가 있습니다. 인생에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평강을 주실 것입니다. 희락을 주실 것입니다.
압살롬의 쿠데타
이준원목사 / 삼하 15장 1~18절
요즘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뉴스를 보면 존속살인의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때려서 숨지게 했다든지, 양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해서 죽은 경우가 많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종종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식하거나 폭력적인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아주 고학력 엘리트 중에도 그런 경우가 벌어집니다.
30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40대 아들이 70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서울에서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우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완전범죄를 꾀했다가 들켜서 결국 잡혔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해에는 유학생이 돈 문제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끔찍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계속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는 일이 1년에 2천 건 정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반역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가 강한데, 제사도 유교 문화입니다. 유교 정신의 핵심 중 하나가 ‘효’인데, 제사는 하면서 부모에게 반역도 하니 서로 맞지 않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닮은 사랑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도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산고를 겪으며 자식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때, 부모에게 분노하며 자녀가 부모에게 칼을 들이댈 때,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죽이는 일도 많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낍니다. 이것이 다 인간의 죄성 때문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며 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황금 같은 20대에 장인인 사울 왕이 무서운 질투와 광기로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녔기 때문에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고 힘들었던 도망자 시절이 끝나고 마침내 왕이 되어서 이제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큰 죄를 범했고 이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무서운 반역을 당하게 됩니다.
1. 은밀하게 진행되는 반역 준비 (1~6절)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1절)
오늘 본문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지난 14장 끝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자기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허용한 이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계속되는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마음이 다윗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리어 반역을 위한 음모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먼저 그는 반역에 필요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발 빠른 전령이자 호위병 50명을 준비시켜 이스라엘 전역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왕의 행차를 알릴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한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역대 최고의 훈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압살롬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가고, 50명의 늠름하고 잘생기고 멋진 군인들이 그를 호위하며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게 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압살롬과 그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야, 저분은 장차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다. 왕 감이다.’ 하며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압살롬이 행동하는 게 굉장히 치밀합니다. 뭘 해도 그냥 허투루 하는 게 없고 다 계획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자기의 외모를 잘 사용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일을 합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일에 주도면밀함을 보여 줍니다. 이 길거리의 대화를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문은 재판석이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재판이 성문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길거리에 압살롬이 일찍 나가서 섭니다. 그러면 날마다 그 성문으로 억울한 사람, 원통한 사람, 불만 있는 사람, 시빗거리가 있는 사람이 계속 들어와서 재판을 청구합니다.
그래서 지난 14장에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나아올 수 있는 것도 왕이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왕이 직접 나오거나, 왕이 없을 때는 신하들이 나와 앉아서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들어주며 재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압살롬이 가 있으면서 성문 재판장에 들어가기 전에 문 옆에 서서 사람들에게 “너는 어느 지파 출신이냐?” 하고 묻는 겁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라고 하면 유다 지파에 맞게 해주고, 단 지파라고 하면 단 지파에 맞게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특히 유다 지파 이외의 열한 지파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 유다 지파에게 더 잘해준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다른 지파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니 왕이고 정치인인 다윗을 은근히 헐뜯기 시작합니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 증상이 벌어지는데, 다윗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각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정에 이끌렸기 때문인데, 아버지로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으로서 적당히 신하에게 하는 정도로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불만을 가진 압살롬이 와서 다윗과 백성 사이의 틈을 파고드는 겁니다.
‘이전에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인 공주 다말을 범했다. 그런데 왕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갔다. 나중에 다윗이 압살롬을 데리고 왔는데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년 만에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돌려보냈다.’라는 소문이 다 퍼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 “아유, 우리 다윗 왕도 별수 없네. 아들 보고 싶으니까 슬그머니 예루살렘에 들였다가, 체면이 있으니까 안 보는 거 봐. 우리도 적당히 하면 되겠네” 하는 식의 마음이 사람들 가운데 퍼져 있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 가운데 지난 2015년에 세상을 떠난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싱가포르가 도덕적으로 굉장히 엄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오래 전 미국 청년 하나가 법을 어겨서 태형을 내린다고 했더니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습니다. 안 통했습니다. 그냥 벌을 받았습니다.
그가 싱가포르를 그렇게 도덕성 높은 나라로 만들기까지 아주 혹독한 자정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냥 된 게 아닙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자기 혈연부터 잘못할 때 가차 없었습니다. 봐주는 게 없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해진 원칙에서 벗어나면 아들이고 며느리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친인척부터 무섭게 다루니까 온 국민이 “아이고, 법을 어기면 정말 국물도 없구나. 용서가 안 되는구나.”라고 깨닫고 법을 철저히 지킨 겁니다. 만약 자기 자식들은 봐주었다면 그게 통했겠습니까?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부분에서부터 실패한 겁니다. 자식에게는 슬슬 하니까 백성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자기부터 비슷한 죄를 지었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폭행과 살인이 벌어졌을 때, 자기도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백성들이 그런 부분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압살롬은 지략가로서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압살롬도 혈기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혈기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때나 그 혈기를 부린 게 아닙니다. 긴 시간을 복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참고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간이 4년이나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만이 백성의 어려운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공의로운 재판관인 것처럼 스스로 높인 후, 자신에게 절하려고 하는 백성을 말리며 붙들고 포옹해주며 입 맞추는 위선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압살롬은 ‘내가 정의를 베풀겠다. 다윗 왕께서는 이제 늙었다. 지난번에 정에 끌려서 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을 보았지?’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씩 넘어오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그 자리에 최고로 잘생긴 배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서 포옹해주고 안아주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그 시대 최고의 남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압살롬의 그러한 간계를 알지 못하고 쉽게 다윗보다 압살롬이 더 좋다고 하며 압살롬에게로 마음이 넘어가게 됩니다.
압살롬은 백성을 위하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백성을 이용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겉모습과 외모만을 보았을 뿐, 그의 속마음과 진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속아 넘어갔습니다. 압살롬은 화려한 외모로 추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의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경력을 과장하고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며 지키지 못할 만한 약속을 남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이단에 넘어갑니까? 누가 봐도 이단인데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학력이고 똑똑한 사람들도 많이 넘어갑니다. 멍청해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혹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만져주고, 자기 아픈 것을 위로해주고,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해주니까 넘어가는 겁니다.
이단들을 가만히 보면 보통 교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가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교인들보다 훨씬 낫네.’라고 느끼게 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가 보니까 너무 친절하고 사람들이 좋고 그렇게 인격적인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입니다.
그런 친절함과 사랑으로 혹해서 넘어가는데, 거기에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접근하면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꾸미는 자들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에 속아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가짜들이 많고 속이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지하여 압살롬에게 빠져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보다 사탄이 원하는 길로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 했는데 사실은 사탄이 원하는 길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성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기본을 하는 겁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렇게 예배의 자리를 늘 사모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성도들과의 교제가 부족하면 이단의 속삭임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함께하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결국 압살롬과 같은 유혹자, 위선자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보며 특히 나의 유익과 관계된 부분에서 유혹을 받으면 주님과는 반대로 나아갈 수 있지만, 주님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때는 그런 유혹이 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잘 보십시오. 내가 혹시 무엇과 타협하지는 않는가? 주님과의 교제를 희생하고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교제 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며 방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들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최고로 좋은 건 아닙니다. Good 때문에 Best를 놓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Best인데, Good 정도로 만족하게 하도록 유혹하는 게 요즘 사탄의 전략입니다.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께 가까이하고 함께하는 것을 방해하는 좋은 것이 뭔가를 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영적 분별력을 평소에 길러야 합니다.
2. 성공하는 반역 (7~12절)
4년 만에 압살롬이 다윗 앞에 나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만났으니까 총 6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이루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고향인 그술에 가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는데, 거기 있는 동안 자기가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서원한 것은 즉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년이나 지나서 뭘 지키겠다는 겁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얘가 왜 6년이나 지나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하지?’라고 하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무슨 다른 바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압살롬에게 그리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단지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는 것이 좋게 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죄를 범한 이후로 영적 분별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나이도 더 들었지만, 나중에 압살롬의 반역 세력과 전쟁할 때 보면 아주 지혜롭게 작전을 잘 짭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흐려진 게 아닙니다. 죄 이후에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겁니다. 회개하고 용서는 받았지만, 영적으로 영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사한다니까 ‘좋은 거네. 가서 해라.’ 하고, 서원을 갚겠다고 하니까 ‘좋다, 가서 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진짜 제사하며 예배하기 위해 가는 거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서원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반역을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헤브론입니까? 왜 많은 곳들 중 헤브론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인데, 아버지 다윗이 유다 왕이 되어 7년 반을 다스린 곳입니다. 압살롬 자신도 바로 그때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까지 쫓아와서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통합 왕으로 세우면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헤브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땠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동족인데, 거기 있다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하루아침에 왕의 도시였다고 붕 뜨게 된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도시가 된 겁니다. 자기들이 왕으로 섬겼던 사람이 더 큰 곳으로 가버렸으니까 ‘우리는 뭐지?’ 하는 마음이 인간적으로 들면서 분명히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바로 그 틈을 노린 겁니다. 압살롬이 아주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지역감정을 여전히 건드리면서 편 가르기를 하는데, 많이 약해졌지만 지금도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압살롬이 바로 사람들의 그런 지역감정을 부추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야심을 위해 그런 심리를 이용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제사를 드리겠다. 서원을 갚겠다.’라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사람을 ‘정치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팎에도 예수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라고 불러야겠습니까? ‘종교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역사를 보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다른 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 즉 기도, 말씀, 예배, 교제 외에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9절)
압살롬의 반역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있는 다윗은 제사드리고 서원을 갚겠다는 아들의 말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마음이 이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려나 보다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서운 죄악과 반역의 마음을 온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아주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면, 당장은 잘될지 몰라도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압살롬은 정탐을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게 만듭니다. 또한 다윗 주변에 있던 200명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도록 만듭니다. 굉장히 치밀합니다.
이들은 압살롬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헤브론으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르고 동참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아주 난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압살롬을 반대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공범이 되는 겁니다. 아니면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치러 갈 때 거기서 인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온 200명의 유력한 사람들을 압살롬이 왜 초대했겠습니까? 헤브론 사람들이 보니까 예루살렘에서 귀인들 200명이 오는 겁니다. 딱 봐도 옷을 잘 입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좍 오니까 ‘와, 저렇게 멋지고 유력한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압살롬이 노린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보면서 ‘이 많은 예루살렘 유지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추대할 정도라면 다윗은 이제 끝났다. 그럼 우리도 압살롬 쪽으로 줄을 서자.’라고 생각했을 텐데, 바로 이것을 압살롬이 노리고 알리지 않은 채 그들을 초청한 겁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반역을 아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 반역의 핵심 인물로서 다윗의 지략가였고 <삼국지>의 제갈공명과도 같았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가담시키기까지 합니다. 이전에 보면, 다윗이 간음한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엘리암의 아버지가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그동안은 다윗에게 아주 지혜로운 조언을 하던 상담자였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 편에 선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에서 있어야 할 이 사람이 어디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다윗을 돕고 있어야 하는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생활을 접고 다윗을 떠나서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다윗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압살롬이 그의 고향에서 데리고 옵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거짓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야심을 위해서 계략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하는 건데, 인간 중심의 예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예배는 예배도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 뜻 없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가담한 모든 사람이 다윗과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다윗의 원수들이 아니라 도리어 다윗 곁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던 자들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아들인데 반역하고, 또 모사 아히도벨, 그리고 그를 추종한 백성들 모두 다윗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압살롬이 될 수 있고 아히도벨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굳게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늘 찾으며 살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배신해서 압살롬이 될지, 언제 우리가 아히도벨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진리 위에 터를 닦으며 살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반대편에 설 수 있고 이단으로 빠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3.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하는 다윗 (13~18절)
압살롬의 반역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전혀 저항받지 않고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집니다. 그의 반역 소식을 들으니까 다윗은 뭐라고 반응합니까? “일어나 도망하자. 두렵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항할 아무런 준비도, 힘도 갖추지 못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이렇게 조급하고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겁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붙어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우면 다윗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리 4년 동안 준비했다고 해도 다윗의 용맹한 장수들을 당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최대한 피했습니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아무리 반역했어도 아들이고 그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피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해보자는 마음으로 떠나게 된 겁니다.
사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 편에서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진행되었습니다. 다윗이 늘 자기 곁에서 어려운 일에 대해 지혜를 구했던 아히도벨도 자기 곁을 떠났고, 아들들은 압살롬을 심히 두려워하는 상태였고, 다윗 자신은 예전처럼 힘이 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이도 많아졌습니다. 이제 아무런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결국 다윗이 선택한 것은 일단 궁궐을 떠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도피를 결정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5). 그러므로 지금 다윗이 하려고 하는 것은 압살롬이 반역했으니까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궁궐을 나설 때 후궁 10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나단이 선포한 말씀처럼(12:11), 다윗이 아내들을 이웃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게 됩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아히도벨의 조언에 따라 이 후궁들과 동침하여 자기가 다윗과 적대 관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16:20-22). 이런 악한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것조차 선으로 바꾸어 결국 약속을 이루십니다.
벧메르학은 '먼 궁궐'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던 다윗의 별궁으로 보입니다. 다윗 일행은 이곳에서 피난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한편,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피할 때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떠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신실한 신하들과 용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가족과 같이 지냈던 용사들도 있고, 또 놀랍게도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블레셋 출신의 용병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 편에 섭니다. 원래 적국인데 다윗 편에 선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너무나 잘났던 압살롬의 파멸
압살롬은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 아버지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해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지도자인 것이 보였고, 또 아버지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나라면 더 부드럽게 할 텐데, 나라면 더 평화롭게 할 텐데, 나는 너그럽게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고, 하나님이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하실 때까지 그런 왕을 인간적인 힘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볼 때 아버지가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다윗이 압살롬 나이였을 때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보다 더 백성들의 인기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능력과 기회도 있었지만 계속 피해 다니며 험한 광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같은 악한 자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 전에 인간의 손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에 대한 반역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고 도전인데, 압살롬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잘났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자기 자신이 너무 강한 사람(사실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태도가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모릅니다
압살롬은 인간적으로 아주 뛰어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외모도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최고의 훈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 누이 다말을 범한 암논에게 복수하기까지 2년이나 기다리며 준비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자기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도 아는 심리전의 대가였습니다. 성 곁에 자기 심복들을 두어서 다윗 왕에게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섭하고, 자기가 그들의 대변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처음 왕위에 오른 유다의 헤브론으로 가서 반란을 시작함으로, 자기가 새 시대에 어울리는 왕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겁니다. 반란을 시작함과 동시에 열두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미 왕권이 압살롬에게 넘어간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는데, 요즘 식으로 하면 방송을 이용해서 고도의 선동 심리전을 펼친 겁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과도 같은 지략가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치밀하게 반역 준비를 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은 99%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려는 과정이나 싸움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99%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쿠데타였지만, 1%를 하나님이 건드리실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자기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아버지 다윗과 압살롬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압살롬 주변에는 성공을 원하는 수많은 엘리트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뿐이고, 끝나면 다 흩어질 사람들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과 잘난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사람이 많습니까? 내 주변에는 거룩한 사람이 많은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건을 보고 몰려들 때 그 조건이 없어지면 쉽게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신하들과 가족들뿐 아니라 용사들을 보십시오.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닙니까? ‘맞서 싸웁시다!’라고 해야 될 텐데 ‘왕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충성을 보입니다. 게다가 블레셋 이방인들까지도 충성하겠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리더십 아닙니까? 다윗의 리더십은 인간적 처세술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 리더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압살롬의 세력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아주 강대한 성처럼 보입니다. 아마 이것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압살롬은 자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1%에 하나님이 손을 보시면 전세하 하루아침에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철저히 준비하고 쌓아 올려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그냥 톡 치시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공든 탑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과대평가하다가 하나님을 과소평가했고, 그러다 결국 무너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 나는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존중(respect)하며 두려워하고 있는가? 말씀을 존중하는가? 예배를 존중하는가? 또 교제를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경시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점검하면서 결국 멸망으로 가느냐, 아니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느냐를 물으며, 믿음으로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 지키기에 성공하려면
삼하 15장 1~12절 / 오정호목사
천하장사도 말 한마디 때문에 마음이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이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변질되기 쉬운데서 찾을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자신이 어떤 마음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경제경영, 자녀경영, 가정경영도 잘 해야 되지만 마음이 상해버리면 그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영은 곧 마음의 경영과 직통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증언합니다. 마음과 그 인격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사람의 됨됨이)도 그러한즉"(잠언 23:7a).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잠언 4:23a). 성경 말씀을 통해 압살롬과 다윗,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한 이복형제 암논을 죽였습니다. 형제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본 아버지 다윗은 그를 멀리 떠나 지내게 했습니다. 하지만 신하요압과 드고아여인의 마음 돌리기작전에 의하여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습니다(사무엘하 14장). 그러나 압살롬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향한 증오가 이미 싹터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대결 국면이 벌어졌습니다.
1.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였습니다.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6절). 이스라엘 백성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聖徒)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성도의 마음을 도적질하려고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묘하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인간과 세속의 종이 되도록 만드는 세력들이 너무 많습니다. 뉴에이지(New Age)같은 사상 체계, 돈, 혹은 가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37). 주님보다 자녀를,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다가 나중에 허망하게 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에 도적질 당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전략적으로 도적질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매력적으로 권위적으로 다가갔습니다. 아버지와 형식적으로 화해한 압살롬은 자신의 경호를 위해 백성들이 보면 감탄할 정도로 멋진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였습니다(1절). 압살롬 자신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멋있었습니다(사무엘하14:25). 압살롬은 뜻을 세워 일찍 일어나 성문길 곁에 서서 왕께 송사(訟事)하러 오는 누구에게나 다가가서 그의 편을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2-3절).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 왕에 대한 섭섭함을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4절). 또한 그를 안아주면서 입맞추기까지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했습니다(5-6절). 단순한 백성들이 압살롬의 숨은 뜻을 어떻게 눈치챌 수 있었겠습니까? 이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예루살렘에 사는 200명의 엘리트들을 초청했을 때에도 그들이 한명도 거절하지 아니하고 달려 나왔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이미 빼앗겨 있었기 때문입니다(11절). 몸이 장대하고 힘이 엄청났던 삼손도 유약한 여인 들릴라에게 그 마음이 빼앗겼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사사기16장).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온 물질에 탐욕이 일어 그 중 몇 개를 받는 순간 나병에 걸렸습니다(열왕기하5:20-27). 발람 선지자는 돈과 명예의 탐욕에 마음이 변질되었을 때 거짓선지자로 죽임을 당했습니다(민수기22장, 31:1-8).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교회에 충성하여 인정을 받으려다가 거짓이 그 마음에 들어왔을 때 사도 베드로 앞에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사도행전5:1-11). 우리는 먼저 마음을 지키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이 구멍나고 무너지는 마음의 누수(漏水)현상을 우리는 방치해선 안됩니다. 마음 지킴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성도답게 살 수 있는지, 가정과 자녀를 지킬 수 있는 지가 결정 됩니다.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한 압살롬의 최후는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사무엘하 18:9-18).
2. 어떻게 하면 마음 지키기에 성공할 수 있습니까?
① 일과 사람의 뒤에 숨겨져 있는 동기와 목적을 밝혀내는 영적 통찰력(洞察力)이 있어야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삶의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만약 왕자 압살롬이 백성의 가는 길을 막아섰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도중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권위자인 다윗에게 가려고 했다면 문제가 달라졌을 겁니다. 나에게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해준다고 해서 다 나의 편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바른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나의 편입니다(잠언 27:6,9). 우리가 통찰력과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에 절대 시간을 할애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통찰력을 잃어버립니다. 영적인 근육을 강화하고, 우리의 체질을 분별의 체질, 믿음의 체질, 순종의 체질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성도됨의 유지 발전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기도의 영성에 따라 결정됩니다.
② 예수님께 집중해야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합니다. 백성들은 어리석어서 자신들에게 친절히 대한 압살롬을 지지하고 다윗을 떠났습니다. 왜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목적이 왕궁까지 들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성문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압살롬의 향기로운 입맞춤과 같은 유혹에 무너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가 예수 믿는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회한과 실망과 좌절만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누구를 믿고 따를지를 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생명을 걸고 집중하지 못한다면 '광명의 천사'(고린도후서 11:14)로 다가오는 사탄의 계략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한층 강화시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 교제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22). 또한 좋은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시편119편 1:2, 디모데후서 4:13).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을 교제와 양서(良書)들을 통해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체질이 예수님께 집중하는 체질로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올 한해 동안 우리의 가정과 경제생활이 얼마나 향상될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은혜를 받읍시다.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여 일과 사람의 동기와 목적을 분별하는 영적 통찰력을 배양합시다. 우리의 체질을 분별의 체질, 믿음의 체질, 순종의 체질로 만듭시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신 주 예수님께 집중함으로 마음지키기에 성공자가 됩시다. 그 결과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를 지켜 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새 날의 기도제목 금이 간 마음깨어진 인생을 낳고변질된 마음수치스런 인생을 가져오네은혜받은 마음삶의 향기 가득하고치유받은 마음타인에게 평화 안겨다 주네성도다운 마음정금같은 마음어디다 팽개치고돈에 사로잡히고정욕에 물들고자기 고집에 매여서아직까지 허우적대는가
새해 새날의 기도제목 하나마음 지키는 복을 주소서 주님의날 구한 사랑날 새롭게 한 은혜로내 마음 지키게 하소서 주님마음 품어 살게 하소서.
압살롬의 반란 계획
삼하 15:1-6 / skd1
♠ 권력에 대한 갈망, 화려함으로 시작되다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자기 앞에 달릴 사람 오십 명을 두니라" (삼하 15:1)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왕자로서 이미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더 큰 권력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다윗을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첫 단계로 화려한 외적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병거와 말을 준비하고, 자기 앞에 달릴 사람 50명을 두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외적인 화려함과 위엄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이 왕이 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성공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사람들,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외적인 것에 지나치게 투자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라고 가르칩니다.
♠ 정의의 탈을 쓴 불의한 야망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삼하 15:2-3)
압살롬의 두 번째 전략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재판관으로 자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 앞에 서서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들은 후에는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네 일이 옳고 바르다"라고 말이죠.
압살롬은 자신의 아버지 다윗을 간접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그 책임이 다윗 왕에게 있다고 암시했습니다. 이것은 교묘하게 아버지의 통치에 대한 불만을 조성하고, 자신은 더 나은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지적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는 사람들,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점만을 부각시키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가르치셨습니다.
♠ 민심을 훔치는 교묘한 술책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이스라엘의 마음을 도둑질하니라" (삼하 15:5-6)
압살롬의 세 번째 전략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와 절하려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붙들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문화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왕족이 일반 백성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죠.
압살롬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이 백성과 가까이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는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겸손과 친근함이라는 도구를 사용했지만,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스라엘의 마음을 도둑질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진정성 없는 친근함과 겸손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모습, 대중 앞에서의 행동, 그리고 말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함을 받으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눅 16:15)라고 경고하셨습니다.
♠ 압살롬의 반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사무엘하 15:1-6에 나타난 압살롬의 반란 계획은 인간의 죄성과 권력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교묘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압살롬은 세 가지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외적 화려함: 병거와 말, 그리고 50명의 종을 두어 자신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다른 사람 비난하기: 다윗 왕의 통치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거짓된 친근함: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겸손한 척했지만, 그 의도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때로는 압살롬과 같은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기 위해, 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외적인 것에 치중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진정성 없는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외적인 화려함이나 다른 사람들의 인정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습니다.종교 및 신앙
♠ 현대 사회에서 압살롬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기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압살롬 신드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SNS에서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는 시도, 다른 사람의 단점을 지적하며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는 마음, 진정한 관계보다는 인맥을 쌓기 위한 표면적인 관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외적인 화려함 대신 섬김의 모범을 보이셨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셨으며, 거짓된 친근함 대신 진정한 관계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압살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외적인 성공과 인정보다는 내적인 성숙과 진실된 관계에 가치를 두는 삶,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방향입니다.
♠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사랑하는 하나님, 때로는 우리도 압살롬처럼 외적인 것에 치중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진정성 없는 관계를 맺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시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다른 사람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삶, 겉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압살롬의 쿠데타
삼하 15장 1~18절 / 콜럼버스한인교회
요즘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도 뉴스를 보면 존속살인의 경우가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때려서 숨지게 했다든지, 양아버지가 아이를 학대해서 죽은 경우가 많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종종 자식이 부모를 때려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식하거나 폭력적인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아주 고학력 엘리트 중에도 그런 경우가 벌어집니다.
30년이 거의 다 된 것 같은데,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40대 아들이 70대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서울에서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우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완전범죄를 꾀했다가 들켜서 결국 잡혔습니다.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해에는 유학생이 돈 문제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끔찍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도 계속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살인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에서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는 일이 1년에 2천 건 정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반역의 시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교 문화가 강한데, 제사도 유교 문화입니다. 유교 정신의 핵심 중 하나가 ‘효’인데, 제사는 하면서 부모에게 반역도 하니 서로 맞지 않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장 닮은 사랑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도 아버지의 사랑보다는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산고를 겪으며 자식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때, 부모에게 분노하며 자녀가 부모에게 칼을 들이댈 때, 세상에 그런 비극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죽이는 일도 많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낍니다. 이것이 다 인간의 죄성 때문인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며 늘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황금 같은 20대에 장인인 사울 왕이 무서운 질투와 광기로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녔기 때문에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고 힘들었던 도망자 시절이 끝나고 마침내 왕이 되어서 이제는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큰 죄를 범했고 이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무서운 반역을 당하게 됩니다.
1. 은밀하게 진행되는 반역 준비 (1~6절)
오늘 본문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이 말은 지난 14장 끝에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자기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도록 허용한 이후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계속되는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마음이 다윗을 향한 감사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도리어 반역을 위한 음모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먼저 그는 반역에 필요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발 빠른 전령이자 호위병 50명을 준비시켜 이스라엘 전역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할 뿐 아니라 왕의 행차를 알릴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한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역대 최고의 훈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압살롬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가고, 50명의 늠름하고 잘생기고 멋진 군인들이 그를 호위하며 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그렇게 다닐 때마다 사람들은 압살롬과 그의 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야, 저분은 장차 우리의 왕이 되실 분이다. 왕 감이다.’ 하며 호감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압살롬이 행동하는 게 굉장히 치밀합니다. 뭘 해도 그냥 허투루 하는 게 없고 다 계획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자기의 외모를 잘 사용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일을 합니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일에 주도면밀함을 보여 줍니다. 이 길거리의 대화를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문은 재판석이 있는 자리입니다. 모든 재판이 성문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길거리에 압살롬이 일찍 나가서 섭니다. 그러면 날마다 그 성문으로 억울한 사람, 원통한 사람, 불만 있는 사람, 시빗거리가 있는 사람이 계속 들어와서 재판을 청구합니다.
그래서 지난 14장에서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나아올 수 있는 것도 왕이 그렇게 나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왕이 직접 나오거나, 왕이 없을 때는 신하들이 나와 앉아서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들어주며 재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압살롬이 가 있으면서 성문 재판장에 들어가기 전에 문 옆에 서서 사람들에게 “너는 어느 지파 출신이냐?” 하고 묻는 겁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행동입니다.
예를 들어, 유다 지파라고 하면 유다 지파에 맞게 해주고, 단 지파라고 하면 단 지파에 맞게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특히 유다 지파 이외의 열한 지파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유다 지파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이 유다 지파에게 더 잘해준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다른 지파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니 왕이고 정치인인 다윗을 은근히 헐뜯기 시작합니다. 정권 말기에 레임덕 증상이 벌어지는데, 다윗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상황이기 때문에 이전과 같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부각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정에 이끌렸기 때문인데, 아버지로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왕으로서 적당히 신하에게 하는 정도로 해주었습니다. 거기에 불만을 가진 압살롬이 와서 다윗과 백성 사이의 틈을 파고드는 겁니다.
‘이전에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인 공주 다말을 범했다. 그런데 왕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도망갔다. 나중에 다윗이 압살롬을 데리고 왔는데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년 만에 얼굴을 잠깐 보고 다시 돌려보냈다.’라는 소문이 다 퍼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 “아유, 우리 다윗 왕도 별수 없네. 아들 보고 싶으니까 슬그머니 예루살렘에 들였다가, 체면이 있으니까 안 보는 거 봐. 우리도 적당히 하면 되겠네” 하는 식의 마음이 사람들 가운데 퍼져 있는 겁니다.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 가운데 지난 2015년에 세상을 떠난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 사람들이 진심으로 애도했습니다. 싱가포르가 도덕적으로 굉장히 엄한 나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오래 전 미국 청년 하나가 법을 어겨서 태형을 내린다고 했더니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습니다. 안 통했습니다. 그냥 벌을 받았습니다.
그가 싱가포르를 그렇게 도덕성 높은 나라로 만들기까지 아주 혹독한 자정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냥 된 게 아닙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자기 혈연부터 잘못할 때 가차 없었습니다. 봐주는 게 없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해진 원칙에서 벗어나면 아들이고 며느리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친인척부터 무섭게 다루니까 온 국민이 “아이고, 법을 어기면 정말 국물도 없구나. 용서가 안 되는구나.”라고 깨닫고 법을 철저히 지킨 겁니다. 만약 자기 자식들은 봐주었다면 그게 통했겠습니까?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부분에서부터 실패한 겁니다. 자식에게는 슬슬 하니까 백성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자기부터 비슷한 죄를 지었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폭행과 살인이 벌어졌을 때, 자기도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백성들이 그런 부분에서 흔들리기 시작할 때 압살롬은 지략가로서 그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압살롬도 혈기가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이 왜 혈기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때나 그 혈기를 부린 게 아닙니다. 긴 시간을 복수를 위해서 철저하게 참고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간이 4년이나 되었습니다.
압살롬은 자기만이 백성의 어려운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는 공의로운 재판관인 것처럼 스스로 높인 후, 자신에게 절하려고 하는 백성을 말리며 붙들고 포옹해주며 입 맞추는 위선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넘어갑니다.
압살롬은 ‘내가 정의를 베풀겠다. 다윗 왕께서는 이제 늙었다. 지난번에 정에 끌려서 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을 보았지?’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씩 넘어오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재판을 받으러 왔는데 그 자리에 최고로 잘생긴 배우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면서 포옹해주고 안아주는데 안 넘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그 시대 최고의 남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게도 압살롬의 그러한 간계를 알지 못하고 쉽게 다윗보다 압살롬이 더 좋다고 하며 압살롬에게로 마음이 넘어가게 됩니다.
압살롬은 백성을 위하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백성을 이용해서 자기가 왕이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화려한 겉모습과 외모만을 보았을 뿐, 그의 속마음과 진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게 진짜인 줄 알았습니다. 속아 넘어갔습니다. 압살롬은 화려한 외모로 추한 내면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람의 외적인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의 경력을 과장하고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며 지키지 못할 만한 약속을 남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이단에 넘어갑니까? 누가 봐도 이단인데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학력이고 똑똑한 사람들도 많이 넘어갑니다. 멍청해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거기에 혹하는 겁니다. 자기 마음을 만져주고, 자기 아픈 것을 위로해주고,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해주니까 넘어가는 겁니다.
이단들을 가만히 보면 보통 교회들보다 훨씬 더 친절합니다. 사랑이 넘칩니다. 가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교인들보다 훨씬 낫네.’라고 느끼게 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가 보니까 너무 친절하고 사람들이 좋고 그렇게 인격적인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단입니다.
그런 친절함과 사랑으로 혹해서 넘어가는데, 거기에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접근하면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거짓으로 꾸미는 자들의 화려한 외모와 언변에 속아서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인생을 낭비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금 가짜들이 많고 속이는 것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지하여 압살롬에게 빠져든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보다 사탄이 원하는 길로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겠지.’ 했는데 사실은 사탄이 원하는 길일 수가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적 분별력을 성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기본을 하는 겁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이렇게 예배의 자리를 늘 사모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게 꼭 필요합니다. 성도들과의 교제가 부족하면 이단의 속삭임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함께하는 것이지, 혼자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결국 압살롬과 같은 유혹자, 위선자에게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보며 특히 나의 유익과 관계된 부분에서 유혹을 받으면 주님과는 반대로 나아갈 수 있지만, 주님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때는 그런 유혹이 와도 능히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잘 보십시오. 내가 혹시 무엇과 타협하지는 않는가? 주님과의 교제를 희생하고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과의 교제 쪽으로 가는 것을 막으며 방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나쁜 게 아니라 좋은 것들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최고로 좋은 건 아닙니다. Good 때문에 Best를 놓치는 겁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Best인데, Good 정도로 만족하게 하도록 유혹하는 게 요즘 사탄의 전략입니다. 주님과 친해지고 주님께 가까이하고 함께하는 것을 방해하는 좋은 것이 뭔가를 보고,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영적 분별력을 평소에 길러야 합니다.
2. 성공하는 반역 (7~12절)
4년 만에 압살롬이 다윗 앞에 나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 만에 만났으니까 총 6년이 지난 때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서원을 이루겠다고 말합니다. 어머니 고향인 그술에 가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는데, 거기 있는 동안 자기가 서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서원한 것은 즉시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년이나 지나서 뭘 지키겠다는 겁니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전혀 의심하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얘가 왜 6년이나 지나서 서원을 지키겠다고 하지?’라고 하는 데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무슨 다른 바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압살롬에게 그리 신경을 많이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단지 제사를 드리며 서원을 갚겠다는 것이 좋게 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죄를 범한 이후로 영적 분별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나이도 더 들었지만, 나중에 압살롬의 반역 세력과 전쟁할 때 보면 아주 지혜롭게 작전을 잘 짭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흐려진 게 아닙니다. 죄 이후에 영적 분별력이 흐려진 겁니다. 회개하고 용서는 받았지만, 영적으로 영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제사한다니까 ‘좋은 거네. 가서 해라.’ 하고, 서원을 갚겠다고 하니까 ‘좋다, 가서 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진짜 제사하며 예배하기 위해 가는 거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서원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반역을 위해 하나님까지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헤브론입니까? 왜 많은 곳들 중 헤브론으로 가겠다는 겁니까?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인데, 아버지 다윗이 유다 왕이 되어 7년 반을 다스린 곳입니다. 압살롬 자신도 바로 그때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스라엘 장로들이 헤브론까지 쫓아와서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통합 왕으로 세우면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헤브론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땠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동족인데, 거기 있다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은 하루아침에 왕의 도시였다고 붕 뜨게 된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시골 도시가 된 겁니다. 자기들이 왕으로 섬겼던 사람이 더 큰 곳으로 가버렸으니까 ‘우리는 뭐지?’ 하는 마음이 인간적으로 들면서 분명히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바로 그 틈을 노린 겁니다. 압살롬이 아주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이용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지역감정을 여전히 건드리면서 편 가르기를 하는데, 많이 약해졌지만 지금도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압살롬이 바로 사람들의 그런 지역감정을 부추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야심을 위해 그런 심리를 이용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제사를 드리겠다. 서원을 갚겠다.’라고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사람을 ‘정치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팎에도 예수님 이름을 팔아서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라고 불러야겠습니까? ‘종교꾼’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역사를 보면 옛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하는데, 다른 게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 즉 기도, 말씀, 예배, 교제 외에는 없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있는 다윗은 제사드리고 서원을 갚겠다는 아들의 말을 기쁜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아마 다윗은 압살롬의 마음이 이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려나 보다 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무서운 죄악과 반역의 마음을 온전히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아주 큰일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하면, 당장은 잘될지 몰라도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압살롬은 정탐을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어 나팔 소리가 나면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게 만듭니다. 또한 다윗 주변에 있던 200명의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 역시 압살롬이 왕위에 오르는 것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도록 만듭니다. 굉장히 치밀합니다.
이들은 압살롬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헤브론으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르고 동참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아주 난처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습니다. 공개적으로 압살롬을 반대하면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공범이 되는 겁니다. 아니면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치러 갈 때 거기서 인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굉장히 곤란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온 200명의 유력한 사람들을 압살롬이 왜 초대했겠습니까? 헤브론 사람들이 보니까 예루살렘에서 귀인들 200명이 오는 겁니다. 딱 봐도 옷을 잘 입고 멋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좍 오니까 ‘와, 저렇게 멋지고 유력한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서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압살롬이 노린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보면서 ‘이 많은 예루살렘 유지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추대할 정도라면 다윗은 이제 끝났다. 그럼 우리도 압살롬 쪽으로 줄을 서자.’라고 생각했을 텐데, 바로 이것을 압살롬이 노리고 알리지 않은 채 그들을 초청한 겁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반역을 아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그 반역의 핵심 인물로서 다윗의 지략가였고 <삼국지>의 제갈공명과도 같았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가담시키기까지 합니다. 이전에 보면, 다윗이 간음한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라고 되어 있는데, 엘리암의 아버지가 바로 아히도벨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가 아히도벨의 손녀입니다. 그러니까 밧세바의 할아버지로 그동안은 다윗에게 아주 지혜로운 조언을 하던 상담자였습니다. 그러나 밧세바 사건으로 인하여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 편에 선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에서 있어야 할 이 사람이 어디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다윗을 돕고 있어야 하는데, 밧세바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 생활을 접고 다윗을 떠나서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다윗과 협력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사람을 압살롬이 그의 고향에서 데리고 옵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거짓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게 아니라 자기 야심을 위해서 계략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야 하는 건데, 인간 중심의 예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예배는 예배도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 뜻 없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 가담한 모든 사람이 다윗과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다윗의 원수들이 아니라 도리어 다윗 곁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던 자들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아들인데 반역하고, 또 모사 아히도벨, 그리고 그를 추종한 백성들 모두 다윗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윗의 대적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압살롬이 될 수 있고 아히도벨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날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굳게 서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늘 찾으며 살지 않으면, 언제 우리가 배신해서 압살롬이 될지, 언제 우리가 아히도벨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진리 위에 터를 닦으며 살지 않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의 반대편에 설 수 있고 이단으로 빠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3.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하는 다윗 (13~18절)
압살롬의 반역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전혀 저항받지 않고 아주 성공적으로 이뤄집니다. 그의 반역 소식을 들으니까 다윗은 뭐라고 반응합니까? “일어나 도망하자. 두렵다.”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에 대항할 아무런 준비도, 힘도 갖추지 못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이 이렇게 조급하고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일어났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겁니다. ‘아,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붙어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싸우면 다윗 쪽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아무리 4년 동안 준비했다고 해도 다윗의 용맹한 장수들을 당하기는 힘듭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싸움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내전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최대한 피했습니다.
나중에도 나오지만, 아무리 반역했어도 아들이고 그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피하고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시 해보자는 마음으로 떠나게 된 겁니다.
사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 편에서 그 누구도 눈치챌 수 없도록 진행되었습니다. 다윗이 늘 자기 곁에서 어려운 일에 대해 지혜를 구했던 아히도벨도 자기 곁을 떠났고, 아들들은 압살롬을 심히 두려워하는 상태였고, 다윗 자신은 예전처럼 힘이 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이도 많아졌습니다. 이제 아무런 의지할 곳도 없는 처지에 놓였을 때 결국 다윗이 선택한 것은 일단 궁궐을 떠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무기력하게 도피를 결정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5). 그러므로 지금 다윗이 하려고 하는 것은 압살롬이 반역했으니까 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신하들과 가족들을 이끌고 궁궐을 나설 때 후궁 10명을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남겨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나단이 선포한 말씀처럼(12:11), 다윗이 아내들을 이웃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를 가져오게 됩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아히도벨의 조언에 따라 이 후궁들과 동침하여 자기가 다윗과 적대 관계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게 됩니다(16:20-22). 이런 악한 일들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것조차 선으로 바꾸어 결국 약속을 이루십니다.
벧메르학은 '먼 궁궐'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있던 다윗의 별궁으로 보입니다. 다윗 일행은 이곳에서 피난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한편,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피할 때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떠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의 곁에는 그를 사랑하고 따르는 신실한 신하들과 용사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봅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가족과 같이 지냈던 용사들도 있고, 또 놀랍게도 그렛 사람, 블렛 사람, 가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다 블레셋 출신의 용병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 편에 섭니다. 원래 적국인데 다윗 편에 선 것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너무나 잘났던 압살롬의 파멸
압살롬은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 아버지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을 통해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지도자인 것이 보였고, 또 아버지가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는 것을 보면서 ‘나라면 더 부드럽게 할 텐데, 나라면 더 평화롭게 할 텐데, 나는 너그럽게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고, 하나님이 그만하고 내려오라고 하실 때까지 그런 왕을 인간적인 힘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볼 때 아버지가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다윗이 압살롬 나이였을 때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습니다. 훨씬 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었습니다. 압살롬보다 더 백성들의 인기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을 죽일 능력과 기회도 있었지만 계속 피해 다니며 험한 광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같은 악한 자라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이 되기 전에 인간의 손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다.’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에 대한 반역은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고 도전인데, 압살롬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왜 몰랐을까요? 너무 잘났기 때문에, 그래서 너무 자신만만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자기 자신이 너무 강한 사람(사실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태도가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모릅니다
압살롬은 인간적으로 아주 뛰어난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고, 외모도 최고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역대 최고의 훈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 누이 다말을 범한 암논에게 복수하기까지 2년이나 기다리며 준비할 정도로 젊은 나이에 자기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심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도 아는 심리전의 대가였습니다. 성 곁에 자기 심복들을 두어서 다윗 왕에게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섭하고, 자기가 그들의 대변인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다윗이 처음 왕위에 오른 유다의 헤브론으로 가서 반란을 시작함으로, 자기가 새 시대에 어울리는 왕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겁니다. 반란을 시작함과 동시에 열두 지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미 왕권이 압살롬에게 넘어간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는데, 요즘 식으로 하면 방송을 이용해서 고도의 선동 심리전을 펼친 겁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다윗의 오른팔과도 같은 지략가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보다 더 완벽하고 치밀하게 반역 준비를 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은 99%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려는 과정이나 싸움하는 과정에서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99%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쿠데타였지만, 1%를 하나님이 건드리실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자기로 가득 차서 하나님이 그 안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아버지 다윗과 압살롬의 결정적 차이였습니다.
압살롬 주변에는 성공을 원하는 수많은 엘리트들이 몰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것뿐이고, 끝나면 다 흩어질 사람들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과 잘난 사람이 많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사람이 많습니까? 내 주변에는 거룩한 사람이 많은 것을 기도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건을 보고 몰려들 때 그 조건이 없어지면 쉽게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다윗을 보십시오. 신하들과 가족들뿐 아니라 용사들을 보십시오.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아닙니까? ‘맞서 싸웁시다!’라고 해야 될 텐데 ‘왕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충성을 보입니다. 게다가 블레셋 이방인들까지도 충성하겠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리더십 아닙니까? 다윗의 리더십은 인간적 처세술이 아니라,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 리더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압살롬의 세력은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아주 강대한 성처럼 보입니다. 아마 이것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압살롬은 자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1%에 하나님이 손을 보시면 전세하 하루아침에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철저히 준비하고 쌓아 올려도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그냥 톡 치시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공든 탑임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자기를 과대평가하다가 하나님을 과소평가했고, 그러다 결국 무너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 나는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점검해 보기 원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존중(respect)하며 두려워하고 있는가? 말씀을 존중하는가? 예배를 존중하는가? 또 교제를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경시하고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점검하면서 결국 멸망으로 가느냐, 아니면 진정한 성공으로 가느냐를 물으며, 믿음으로 성공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