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조선총독부 신년 예산 중 3만 2000원이 부산자혜의원을 세우기 위해 배정됐다. 1920년부터 6년 연속 사업으로 전국 13곳에 도립병원 격의 자혜의원을 신설하기로 했는데 부산은 이 해에 드디어 예산을 배정받았다. 부산에선 부산부립병원이 있었으나 "자혜의원이 들어서면 의료시설이 더 번듯해지고 좋아지겠어"라는 기대가 일었다.
이는 대단한 눈가림이었다.
역사를 크게 더듬으면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계기로 경상도 중심 도시는 경주·상주에서 대구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896년 지방제도가 8도제에서 13도제로 바뀌면서 경상남도가 탄생하며, 이때 진주는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근대 문물 철도는 '공간'을 또다시 바꾸기 시작했다. 1905년 경부선이 놓이자 차츰 부산과 진주의 도시 위상이 달라져 갔다. '뜸 들이기'는 시나브로 이뤄졌다. 1909년 경남 관찰사 황철이 동래에 와서 "도청을 교통이 불편한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진주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자 그는 "경솔했다"고 사과했다. 1911년 6월 일본인신문 '부산일보', 1916년 5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1920년 4월 동아일보에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옮길 거라는 관련 기사가 나왔다. 그때마다 진주의 일본인·조선인 주민들은 총궐기했고 당국에서는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며 둘러댔다.
1924년 들어 진주 시민들은 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진주에 벌써 들어섰어야 할 시설에 대한 예산 배정이 감감무소식인 것이다. "부산에선 자혜의원도 세우는데…, 뭔가 이상해." 7월 26일 진주에선 시민대회가 열려 수천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진주 시민 대표 6명(조선·일본인 각 3명)이 상경해 항의했고, 총독부는 "우리도 도청 이전은 절대 반대"라며 멀쩡한 오리발을 내밀었다. 연말에 '진주 문제'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12월 8일, "경남도청을 1925년 4월 1일 부산으로 옮기겠다"는 총독부령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오만 방자한 식민지 통치였다. 빨리 옮기려면 청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세상에나! 이미 짓고 있던 부산자혜의원 건물이 경남도청 새 청사(오늘날 동아대석당박물관)라는 것이다. 뒤통수를 맞은 진주는 억울했으며, 성장하던 부산도 그런 과정이 유쾌할 리 없었다.
일제 35년간 도청 소재지가 바뀐 사례는 5건. 그중 2건, 즉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경남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기면서는 일대 파란이 일었던 것이다. 1926년 10월 15일 새벽 1시 30분 진주의 일본인 원로 이시이(石井·68)는 10주년 대제를 치른 진주신사를 찾아 도청 이전에 항의하는 글을 낭독하고 권총 자살했다. 논설위원 the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