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12
강화인씨(江華印氏) 강화인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6가구 1,2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교동인씨(喬桐印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교동 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中國系統)으로「좌씨전(左氏傳)」과「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中國)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祖父)의 이름인「자인(子印)」의「인(印)」자(字)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壇)의 후손 인 서(印 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297년(신라 유례왕 14)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定着)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후 33세손 빈(邠)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喬樹)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고려 충렬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侯)를 시조(始祖)로하는 「연안 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邠)의 아들 완(完)이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올라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를, 증손(曾孫) 현원(玄元)이 응양위대장군(鷹揚衛大將軍)을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그리고 현손(玄孫) 정(貞)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邠)의 9세손 당(璫)은 공민왕(恭愍王) 때 첨의 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서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파사부(婆娑府) 등 병참기지(兵站基地)를 격퇴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해 (海)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 중보(重寶)가 상장군(上將軍)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折衝將軍) 철관(鐵寬),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이등공신(靖難原從二等功臣)에 오른 발(潑),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參判)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냈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동 인씨(喬桐印氏)는 남한(南韓)에 총 4,139가구, 17,5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慶州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경주 임씨(慶州林氏)는 고려(高麗) 때 평찰품사(評察品事)를 지낸 임몽주(林夢周 : 시호는 충선공)의 17세손 임계정(林繼貞)을 일세조(一世組)로 하고 있다. 「경주임씨세보(慶州林氏世譜)」에 의하면 관조(貫組)인 계정(繼貞)은 1505년(연산군 11)에 생원(生員) 곤(崐)의 셋째 아들로 출생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이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인물을 보면 조선(朝鮮) 때 희지(熙之)가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봉사(奉事)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임씨(慶州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613가구, 2,77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안임씨(高安林氏) 고안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68가구 1,9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공주임씨(公州林氏) 공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33가구 1,0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광주임씨 광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80가구 1,24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나주임씨(羅州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시조(始祖) 임 비(林 庇)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다녀올 때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보좌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그후 시조의 9세손 탁(卓 :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힘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탁의 7세손 붕(鵬 : 중참판 평의 맏아들)이 중종(中宗)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승문원 주서(承文院主書)를 거쳐 예조 및 병조 좌랑(兵曹佐郞)과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五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광주 목사(光州牧師)로 나갔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과에 오르기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화(禍)를 입을 뻔 했고, 또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하자 붓을 그 시관의 얼굴에 던지고 과장(科場)을 뛰쳐나왔다. 붕의 아들 복(復)은 명종(明宗) 즉위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 (朔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무고(誣告)를 입고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우 진(晋)은 무신(武臣)으로 제주 목사(濟州牧師)와 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복(復)의 아들로 선조(宣祖)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던 서(㥠)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폐(積弊 : 오랫 동안 뿌리 박힌 폐단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調練)을 많이 남겨 이념이 있는 정치가로 칭송을 받았으며, 절도사 진(晋)의 맏아들 제(悌)는 당대의 명류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知製敎)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문필(文筆)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豪快)하고 의협(義俠)한 시풍(詩風)으로 호남파(湖南派)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손꼽혔으며,「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백호집(白湖集)」․「계벽류상영록(溪碧樓觴詠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제의 아우로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역임했던 환(懽)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이순신(李舜臣)의 병량을 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대소 전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때의 명 외교관 담(土覃 : 서의 아들)은 기재(奇才)가 있는 정치가로도 이름났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총융종사관(摠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남격대(南格臺) 수비에 공을 세웠다. 특히 담은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나, 청탁을 배제하고 청빈하여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 어느날 그의 형 연(堜 : 우승지)이 담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도 몸 둘 곳이 없구나”하면서 성(城)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주었다. 그러나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사람이 물러가야만 뒤에 온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師)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쳤던 타와 이 괄(李 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게(게), 안산 군수(安山郡守)와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박세채(朴世采)의 고제로「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의 저자(著者)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으며,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구한말에 와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영준(英儁)의 아들 창택(昌澤)이 백운동(白雲洞)에 은퇴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며「숭악집(崧岳集)」을 저술했고, 용상(龍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을 지낸 병직(炳稷)과 함께 나주 임씨의 전통(傳統)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임씨(羅州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62,205가구, 262,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안임씨(務安林氏) 무안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77가구 1,2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밀양임씨(密陽林氏) 밀양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65가구 2,86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보성임씨(寶城林氏) 보성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65가구 1,97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부안 임씨(扶安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부안 임씨(扶安林氏)는 고려(高麗) 초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진 임계미(林季美)의 9세손 임 숙(林 淑)이 고려(高麗) 때 공(功)을 세워 순성보절좌리공신(純誠輔節佐理功臣)에 녹훈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보안백(保安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부안(扶安)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려(高麗) 때 제주 안무사(濟州按撫使)를 역임한 희재(熙載)는 숙의 아들이고, 대선(大先)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랐으며, 손자 창무(昌茂)가 상서(尙書)를, 득귀(得貴)가 판서(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이외에도 효생(孝生)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으며,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오른 유(宥),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한 난수(蘭秀) 등과 함께 덕망 높은 학자(學者)로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암 임씨(扶安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43 가구, 48,0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산임씨(常山林氏) 상산은 진천의 별칭이다. 상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42가구 3,49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선산 임씨(善山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선산 임씨(善山林氏)는 신라 말기(新羅末期)의 인물인 태사공(太師公) 임양저(林良貯)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후손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에서 명성을 떨친 억령(億齡)과 백령(百齡) 형제는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형(遇亨)의 아들인 억령(億齡)은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고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금산 군수(錦山郡守)로서 아우 백경(百齡)이 소윤(少尹)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大尹)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에서 사퇴하였다가, 1552년(명종 7) 동부승지(同副承旨)․병조 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 이등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백령(百齡)은 억령(億齡)의 아우로 1519년(중종 14) 문과(文科)에 올라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주동 인물로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숭선부원군(崇善府院君)으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선산 임씨(善山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714가구, 7,0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산임씨(星山林氏) 성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3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순풍임씨(淳風林氏) 순풍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4가구 1,00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안동임씨(安東林氏) 안동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084가구 6,4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의 임씨(安義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안의 임씨(安義林氏)는 부안 임씨(扶安林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의 6세손 임대량(林大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안의(安義)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안의 임씨의 대표적 인물인 온(馧)은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대직(大樴)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수안(遂安)․포천(抱川)․송화(松禾)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밖에 통덕랑(通德郞)에 오른 해(嶰), 그리고, 영조(英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요(燿) 등은 안의 임씨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의 임씨(安義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64가구, 1,0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천 임씨(醴泉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始祖) 임 춘(林 椿)은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임계미(林季美)의 후손으로 고려 의종(毅宗) 때 진사(進士)를 지내다가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이 일어나자 예천읍(醴泉邑) 천서리(川西里)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貫鄕)을 예천(醴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켰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보면 천봉(天鳳)이 고려(高麗)에서 진사(進士)․판윤(判尹) 등을 역임했으며, 순련(舜連)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자번(自蕃)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으며 문근(文根)이 이조 참판(李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임씨(醴泉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4,321가구, 59,7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야임씨(沃野林氏) 옥야는 전주의 속현이다. 옥야임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숙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역임한 임우진(林遇秦)의 아들 임여순(林汝恂)이 있었다.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22가구 1,2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울진 임씨(蔚珍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울진 임씨(蔚珍林氏)는 고려(高麗)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라 중부상서(中部尙書)를 지냈고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울릉군(蔚陵君)에 봉해진 임 우(林 祐)를 시조(始祖)로 하고 평택 임씨(平澤林氏)에서 분적(分籍), 본관(本貫)을 울진(蔚珍)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朝鮮)에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낸 욱경(旭卿), 기골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에 뛰어난 역사(力士)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중량(仲樑), 그리고 전적(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등을 지냈으며 「대학(大學)」,「근사록(近思錄)」등에 정통한 익빈(益彬)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진 임씨(蔚珍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639가구, 10,5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진 임씨(恩津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은진 임씨(恩津林氏)는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청랑(朝請郞)․태상 박사(太常博士)를 역임한 임성근(林成槿)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은진(恩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후 그의 아들 정(挺)이 봉선대부(奉善大夫)로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역임하였고, 손자식(湜)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증손 천년(千年)이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역임한 훈(薰)과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낸 훈의 동생 운(芸)이 이름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은진 임씨(恩津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1,643가구, 6,8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益山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익산 임씨(益山林氏)는 당(唐) 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신라(新羅)에 들어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후 평택(平澤) 용포리(龍浦里)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한 임팔급(林八及)의 후손 임 완(林 完)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송(宋)나라에서 고려에 귀화하여 1114년(예종 9)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지냈으며, 인종(仁宗) 때 수창궁(壽昌宮) 옆에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자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고문이 되었으며, 이어 국자사업(國子司業)․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그후 후손들이 익산(益山)에 살면서 평택에서 분적(分籍)하여 익산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근세(近世)가 조선에서 한림원 제학(翰林院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을재(乙材)가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철(之哲)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익산 임씨(益山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214가구, 9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천임씨(林川林氏) 임천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33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장흥 임씨(長興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장흥군(長興君)에 봉해진 임 분(林 蕡 : 세은의 아들)을 시조(始祖)로 하고 장흥(長興)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분의 아들 이(頤)가 조선 태조(太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손자 득이(得荑)가 병조 전서(兵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증손 우소(曾孫雨所)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외에도 통덕랑(通德郞)에 이른 언경(彦京)과 수미(秀美), 부호군(副護軍) 중경(重敬), 그리고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성밀(成密) 등이 유명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1,549가구, 6,5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주임씨(全州林氏) 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328가구 4,2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兆陽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언수(彦脩)의 네째 아들인 임세미(林世味)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세미(世味)는 고려말(高麗末)에 광정대부(匡靖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거쳐 대광찬성좌복야(大匡贊成左僕射)를 지내고 조양군(兆陽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평택 임씨(平澤林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조양(兆陽)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 옥산(玉山)은 세미(世味)의 8세손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일찌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많은 일화(逸話)를 남겼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5,546가구, 23,6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임씨(晉州林氏) 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73가구 1,79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진천 임씨(鎭川林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진천 임씨(鎭川林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혜종(惠宗)의 비(妃)인 의화왕후(義化王后)의 아버지로서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평장사(平章事)에 이르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진 임 희(林 曦)이다 그후 고종(高宗)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임 연(林 衍)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진천(鎭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연(衍)의 손자 간(侃)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증손 희정(希正)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우찬성(右贊成)에 올랐고, 현손 지(智)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추충보절동덕찬화보리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輔理功臣)에 녹훈되고 후에 상산군(常山君)에 봉해져서 가문을 빛냈다. 이 외에도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호조 참의(戶曹參議)을 지낸 구(球),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수성(秀成),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낸 각(珏) 등이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천 임씨(鎭川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485가구, 1,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주임씨(忠州林氏) 충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51가구 2,09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평택 임씨(平澤林氏)
시조 빛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임씨(林氏)의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은 당(唐)나라 문종(文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였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가 있자 동래 8학사(東來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에 정착(定着)하였다. 그후 문헌(文獻)의 실정(失傳)으로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고려 말(高麗末)에 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 겸 연희궁 부사(衍禧宮副使)를 지낸 임세춘(林世春)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한 평택(平澤)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세춘(世春)의 아들 재(梓)가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고, 증손 정(整)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라 성종(成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현손(玄孫) 명산(命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평택 임씨(平澤林氏)의 대표적인 인물 조선의 명장(名將) 경업(慶業)은 세춘(世春)의 12세손이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황(篁)의 네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뛰어났던 그는 무과에 급제,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첨지중추 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이 괄(李 适)의 난 때에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겸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도처에서 적군(敵軍)을 무찔러 영웅적(英雄的)이고 전설적(傳說的)인 용명(勇名)을 떨쳤으며 그의 무용담(武勇談)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경업의 형(兄) 형업(亨業)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모친상(母親喪)을 당한 관계로 피난을 못 가 청군(淸軍)에게 붙잡혔으나. 청군(淸軍)이 「효자는 해칠 수 없다(孝 人不可害)」라고 찬탄할 정도로 효성이 뛰어나 효자(孝子)․충신(忠臣)의 정문(旌門)이 고향에 세워졌으며, 숙종(肅宗) 때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어 명망높은 평택 임씨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택 임씨(平澤林氏)는 남한(南韓)에 총 46,670가구, 194,5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주임씨(海州林氏) 해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3가구 1,29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해진임씨(海津林氏) 해진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98가구 1,77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희진임씨 희진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없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505가구 1,6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곡성임씨(谷城任氏) 곡성임씨 시조는 희능직(禧陵直) 임영진(任英進)이다. 이 성본의 연원 등을 접할 수 없고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771가구 5,68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관산임씨(冠山任氏) 관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4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광산임씨(光山任氏) 광산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1가구 1,4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안동임씨(安東任氏) 안동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69가구 1,47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장흥임씨(長興任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장흥 임씨(長興任氏)의 시조(始祖) 임 호(任 顥)는 본래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출신으로 중국 헌원계임씨(軒轅系任氏)의 109세손이자 소흥 임씨(紹興林氏 : 소흥계 임씨에서 분적)의 시조인 임 약(任 鑰)의 손자이다. 「승석가부해동설(乘石舸浮海東說)」에 의하면 송(宋)나라에서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과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던 임 호(林 顥)가 고려(高麗) 정종(靖宗 : 제10대 왕, 재위기간 : 1034~1046)년간에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귀화한 것으로 전하며, 남해안(南海岸)에 있는 정안현(定安縣 : 현 전남 장흥군 관산읍)의 임자도(任子島)에 처음 기착(寄着)하여 예로부터 이름난 명산으로 알려진 천관산(天冠山) 밑의 당동(堂洞)에 터를 잡고 장흥 임씨(長興任氏)의 연원(淵源)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아들 의(懿)가 선종(宣宗) 때 우승선(右承宣)으로 등용되어 숙종조(肅宗朝)에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손자(孫子) 원후(元厚)가 인종(仁宗)의 국구(國舅)로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해짐으로서 임 호(林 顥)를 시조로 받들고 의(懿)를 일세조(一世祖)하여 정안 임씨(定安任氏)로 칭관(稱貫)하다가 정안현(定安縣)이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로 승격됨에 따라 장흥 임씨(長興任氏)로 개칭하게 되었다.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원후(元厚)는 그릇이 넓고 깊으며 풍채가 엄하고 중후했다고 하며,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여 재상에 올랐어도 근검하고 청백하기로 소문났었다고 한다. 특히 원후는, 다른 재상들이 모두 반적 묘청(妙淸)을 흠앙하고 믿었으나 홀로 쫓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밝은 지감에 탄복하였으며, 판이부(判吏部)에 임명되어서는 인사행정이 매우 공정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옛날의 산도(山濤 : 진나라 사람으로 이부 상서가 되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였다.)〉라고 칭했다. 특히 고려조(高麗朝)에서 화려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던 장흥 임씨는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 원후(元厚)의 아들 유(濡)가 5대(代)의 임금을 섬기면서 주요 관직을 역임했고, 성품이 염담(恬淡)하고 인자하여 권세와 지위로써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으며, 비록 노비(奴婢)와, 천예(賤隸)일지라도 욕하고 꾸짖지 않았다. 학문(學文)에 조예가 깊었던 유(濡)는 만년(晩年)에 불교(佛敎)를 독실하게 믿었으며,「대장경(大藏經)을 금서(金書)했고, 희종(熙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한편 기억력이 좋기로 이름났던 익(翊 : 유의 손자, 추밀원사 경겸의 아들)은 비록 지나간 옛일이라도 명칭과 숫자에 대하여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물으면 정확하게 응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일찍이 충렬왕(忠烈王)의 명을 받아「선원록(璿源錄)」을 지었고, 동수국사(同修國史)가 되어 수찬관(修撰官) 김 병(金 賆)과 함께 원(元)나라 세조(世祖)의 사적(事蹟)을 찬(撰)하여 박학(博學)하기로 유명했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개국초기에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던 서종(瑞宗)과 대사헌에 올랐던 헌(獻)이 이름났고, 임진왜란 때 무공(武功)을 세웠던 호남의병장(湖南義兵將) 계영(啓英)과 호성공신(扈聖功臣) 발영(發英), 문장(文章)과 병략(兵略)에 뛰어났던 백영(百英), 해남 의병장 희진(希璡) 등이 장흥 임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적군의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의병장 조 헌(趙 憲)과 고경명(高敬命)이 패하고 없었던 때라 호남을 지켜야 하는 중책을 느꼈던 계영(啓英)은 전현감(前縣監) 박광전(朴光前) 등과 고향인 보성(寶城)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1천 여 명의 군사를 모아 남원에 이르러 최경회(崔慶會)가 이끄는 의병과 합류하여 장수(長水)․거창(居昌)․합천(陜川)․성주(星州)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임란2등공신(壬亂二等功臣)에 책록되었던 발영(發英)은 선조(宣祖) 임금이 어선에다〈천생임발영위아사직신(天生任發英爲我社稷臣)〉이란 글을 써서 하사(下賜)하며 예양군(汭陽君)에 봉하고, 그의 조부(祖父) 광세(光世)는 관산군(冠産君)에, 아버지인 희성(希聖)은 관흥군(冠興君)에 추봉하는 은전(恩典)을 내렸다. 그밖의 인물로는 숙종(肅宗) 때 순천(順天)과 나주(羅州)의 영장(營將)을 거쳐 광양중군(光陽中軍)과 숙천 부사(肅川府使)를 역임했던 만기(萬紀)와 영조(英祖) 때 등과(登科)하여 만경 현령(萬頃縣令)․양산 군수(梁山郡守) 등을 지냈던 제원(濟遠)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삼절(三絶)〉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던 병관(炳琯)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締結)되자 국권(國權) 회복에 의거(義擧)했던 병국(炳國)이 장흥 임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흥 임씨(長興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7,777가구, 34,1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임씨(晉州任氏) 진주임씨는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 등을 접할 수 없다. 다만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93가구 1,5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풍천임씨(豊川任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풍천 임씨(豊川任氏)의 시조(始祖)는 본래 중국(中國) 소흥부(紹興府) 자계현(慈溪縣) 사람으로 고려(高麗) 때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오른 임 온(任 溫)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온(溫)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풍천(豊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온(溫)의 6세손(世孫)인 주(澍)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를 거쳐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올라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역임하였는데, 풍천 임씨는 그의 아들 대(代)에 와서 백파(伯派 : 자송)와 중파(仲派 : 자손)로 크게 나뉘며 두 파(派)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자송(子松)은 백이정(白頤正)의 문인(門人)으로 조 적(趙 頔)의 난(亂)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올라 서하부원군(西下府院君)에 봉해졌고, 자순(子順)은 통헌대부(通憲大夫)로서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내고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역임하였다. 자송(子松)의 6세손인 원준(元濬)은 당대의 명관(名官)으로 경사(經史)에 밝고 시(詩)와 문장(文章)이 뛰어나 명성을 얻었으며,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서하군(西河君)에 봉해진 후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사홍(士洪)은 한어(漢語)에 정통하고 해서(楷書)에 뛰어났으며, 두 아들 광재(光載)와 숭재(崇載)가 각각 조선(朝鮮)에 예종(睿宗)과 성종(成宗)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또한 열(說)은 자송(子松)의 8세손으로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에 이어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자손(子順)의 7세손인 유겸(由謙)은 중종(中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공조 판서(刑曹․工曹判書)를 지냈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 물(人物)들이 배출되어 풍천 임씨(豊川任氏)의 2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유겸(由謙)의 아들 추(樞)․권(權)․병(柄) 삼형제가 모두 뛰어났다. 맏아들 추(樞)는 대사간(大司諫)․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고, 권(權)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관찰사(觀察使) 및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역임한 뒤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막내인 병(柄)도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및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으며 글씨에 탁월한 재질(才質)을 보였다. 추(樞)의 아들로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호신(虎臣)과,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이른 보신(輔臣), 현감(縣監) 주(柱)의 아들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지낸 내신(乃臣), 몽신(夢臣)의 아들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공을 세운 탁(鐸)과 현(鉉) 등이 대(代)를 이어 훌륭한 풍천 임씨(豊川任氏) 가문(家門)을 빛냈다. 또한 풍천 임씨(豊川任氏)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의 몸으로 국가(國家)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승(義僧)을 이끌고 왜병(倭兵)에 대항하여 전공(戰功)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子順)의 6세손으로 본명(本名)은 응규(應奎), 법명(法名)은 유정(惟政)이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이외에도 재사9才士)로 이름난 광(絖)은 감찰(監察) 익신(翊臣)의 아들이며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와 형조 참판(刑曹參判)․관찰사(觀察使)를 거쳐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목동가(牧童歌)」를 지은 유후(有後)도 예조 참판(禮曹參判)․관찰사(觀察使)․도승지(都承旨)등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시문에 뛰어난 8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소현세자(소현세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갈 때 배종(陪從)한 뒤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효종실록(孝宗實錄)」편찬에 참여한 한백(翰伯), 문장과 글씨가 탁월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여 명성을 얻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홍망(弘望)과 대사성(大司成)․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방(埅) 등은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근세(近世)의 명필(名筆)로 형조 참판(刑曹參判)․도승지(都承旨)를 지낸 수적(守迪),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고금의 시가9詩歌)에 통달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던 그의 아들 정(珽), 그리고 조선조(朝鮮朝) 성리학(性理學)의 6대가(大家)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성주(聖周)와 이(理)와 기(氣)의 이원론(二元論)을 배격하고 기를 일원적(一元的) 관념(觀念)으로 통일하여 주기설(主氣說)을 확립한 정주(靖周)는 형제(兄弟)학자로서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 까지 이름을 떨쳐 명문인 풍천 임씨를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임씨(豊川任氏)는 남한(南韓)에 총 24,682가구, 103,1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