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도요마을로
대한 이후 찾아온 동장군이 물러갈 기미를 보이는 일월 하순 넷째 주말이다. 경전선 열차로 어디쯤 이동해 근교 산책을 나서려 이른 아침 배낭을 둘러메고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난 정류소에서 창원중앙역으로 가는 215번 시내버스를 탔다. 도청과 역세권 상가를 지난 정류소에 내려 역무원에게 삼랑진행 승차권을 한 장 끊었다. 순천에서 부전으로 가는 무궁화호였다.
주말을 틈타 서울이 아닌 남도 소읍을 거쳐 부산으로 용무를 보려는 이들이 다수였다. 그 가운데 휴가를 나와 가족의 품을 찾으려는 젊은 장병도 보였다. 진례터널을 빠져 진영역을 지나니 안개가 걷히는 화포천 습지가 드러났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앙상한 갯버들은 수액을 펌프질해서 봄을 준비하지 싶다. 한림정역을 지난 들판은 비닐하우스에 특용작물을 촉성으로 키웠다.
모정터널을 빠져나간 열차는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류한 뒷기미에 육중하게 놓인 트러스교를 건넜다. 부전행 열차는 철로 분기점에서 경부선 상행이 아닌 삼랑진 하행으로 들어서서 멈췄다. 내가 가끔 일일 도보 여정의 기점으로 삼는 삼랑진역이다. 거기서 강변 따라 원동역으로 간 경우가 많았지만 만어사나 안태 양수발전소를 거쳐 금오산이나 천태산을 올랐던 적이 있기도 했다.
이번엔 역전에서 읍사무소가 위치한 송지사거리로 갔다. 1일과 6일은 오일장이 서는데 무싯날이라 장터는 한산했다. 초등학교와 이웃한 성당 앞에서 낙동으로 갔다. 삼랑진 성당은 7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부터 진보 계열들과 연이 닿는 이들이 있다. 삼랑진읍에는 개교 연륜이 오래된 초등학교가 두 곳인데 개화기 기차역과 더불어 일본인이 집단으로 살다 떠난 적산 가옥도 있었다.
강변 낙동마을을 거쳐 옛길 철교 앞으로 갔다. 낙동강 천삼백 리 물길에서 ‘낙동’이란 지명이 두 군데 나오는데 밀양 삼랑진과 상주 어디에도 ‘낙동’이 있었다. 예전 구포에서 뱃길로 갈 수 있는 최대치가 상주였다. 그래서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다대포에 이르면 천삼백 리고, 뱃길로 세곡이나 소금을 실어 나른 수운이 가능한 고장이 상주로 거기까지는 칠백 리였다.
내가 젊은 날 삼랑진의 초등학교에 근무하다 중등으로 전직하면서 고성 동해의 학교로 옮겼더랬다. 그때는 삼랑진 낙동에는 경전선 간이역이 있었고 강을 건너는 다리는 두 개로 차량과 철길로 나뉘었다. 그간 흐른 세월에 4차선 교량과 창원에서 서울로 가는 KTX 열차 철교가 놓였고 부산대구간 민자 고속도로 교량까지 놓여 모두 다섯 개다. 경전선 구 철교는 레일바이크로 쓴다.
옛적 자동차가 다녔던 좁은 다리를 걸어 생림 모정으로 건너갔다. 딴섬수변공원에서 배수장으로 갔는데 근래 벼랑으로 창암에서 양지로 레포츠 숲길이 뚫렸다. 지난해 여름 큰비에 일부 유실되어 보수를 해야 하는 듯해도 다니는 데 지장이 없었다. 창암 나루터는 낙동강에 홍수가 나면 모롱이에 물이 부딪혀 나갈 때 우는 소리가 나서 ‘울바우 모롱이’라 불린다고 소개되어 있었다.
강변 벼랑의 산으로 숲길을 개설해 놓아도 그간 다닌 이들은 많지 않은 듯했다. 산마루 전망대로 오르니 밀양강이 본류에 합수한 낙동강 물길과 다섯 개 교량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무척산을 바라보는 쉼터에서 준비한 컵라면에 온수를 부어 점심으로 때웠다. 정자에서 일어나 벼랑 따라 비탈을 내려가니 강을 건너온 부산대구 고속도로가 걸쳐졌고 삼랑진 시가지와 들판이 보였다.
양지마을에서 강변 따라 도요마을로 내려갔다. 강 건너 천태산 아래는 삼랑진 작원으로 깐촌 나루터였다. 도요는 모래흙에 수미 감자 농사로 알려진 고장이다. 벌써 두엄을 뿌려 트랙터로 갈고 있는 농부도 보였다. 설 전후 씨감자를 묻어 비닐 멀칭으로 키우면 수확량도 늘고 일찍 캐서 시장으로 냈다. 김해 슬로시티 문화창작소가 있는 마을 회관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