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 5. 어느 의병장의 진중일기
민족운동총서 제1집 ‘의병들의 항쟁’편이 들어왔기로 몰두해서 읽었습니다. 한말 을미사변(1895)부터 경술국치(1910)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있을 때 떨쳐나섰던 의병들의 활약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본문 후반의 자료 편에는 의병들의 봉기 이유를 기록한 선언문, 성토문, 토적소 등과 함께 고종황제의 밀지와 의병장들의 진중일기까지 여러 문헌이 실려 있어서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아! 내가 죄악이 많아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니 이웃나라가 틈을 엿보고 역신(逆臣)들이 권력을 농간하여 4천년 종사(宗社)와 3천리 강토(疆土)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내 한 목숨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종사와 생령(生靈)을 생각하니 참으로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선전(宣傳)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고 양가(良家)의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소모관(召募官)을 삼은 후 칠도(七道)에 파견하여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바이니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는 스스로 새겨 쓰도록 하라.
만약 이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부터 먼저 참수하거나 파출한 후에 조처할 것이다. 그리고 경기일도(京畿一道)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하게 하라.
이에 새서(璽書)를 비밀히 내리니 모두 자량(自量)하여 거행하게 할지어다.
고종황제가 1907년 정미의병운동 때에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에게 비밀히 내린 칙령입니다. 이강년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재직 중 갑신정변 때에 물러난 분으로 일찍이 동학운동에 투신한 후 을미의병운동 때부터 정미의병운동 때까지 안동, 제천, 강릉, 양주 지역에서 활약하셨습니다. 정미년에는 팔도의병총수 유인석의 문하 유격장으로 국경 건너 요동에 있었는데 고종황제가 특히 그를 지적하여 밀지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탄환이 너무 무정하구나.
발목을 상하니 더 나갈 수가 없구려.
차라리 심장을 맞았더라면
욕보지 않고 갔을 것을.
의병장 이강년은 1908년 7월 2일 청풍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고 적에게 포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셨습니다. 재판 도중 시종 일본인들의 무도함을 꾸짖어 사형 선고를 내린 일본인 재판관이 회고록에‘머리가 숙여졌다’는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위는 그가 적에게 잡히기 전에 남긴 시의 번역문으로 창의일록(倡義日錄)에 있다는데 원문은 구하지 못해 읽지 못했습니다.
양편에서 총소리가 서로 요란하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도주하며 두서를 못차렸다. 이윽고 적이 많이 죽어 넘어지니 순사대 몇 명은 겁을 먹고 멀리 도망갔다. 적의 1부대는 용유에서 총을 쏘고 1부대는 도림에서 포를 쏘고 1부대는 뒷산에서 포를 쏘며 들락날락하는데 그들은 밥을 마음껏 먹었지만 우리 군사는 산마루에 포위되어 두 때에 한술의 밥도 먹지 못하여 군사들이 모두 허기진 상태였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치며 1명의 배반도 없이 한결같이 싸움을 재촉하였다. 이는 나라 일이 몹시 급박하여 의리와 충의로 군사를 일으킨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의병장 전해산(全海山)이 남긴 1908년 9월 29일의 진중일기입니다. 의병장 전해산은 전라도 임실 태생으로 1907년 기삼연(奇參衍)의 전라도의병 연합부대 호남창의맹소에 참여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주장인 기삼연이 분사한 후, 진안·남원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1909년 일본군의 호남대토벌작전 때에 피체되어 1910년 8월 22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셨습니다.
앞서 이강년의 창의일록을 언급했습니다마는, 이 같이 한말의 의병장들은 적과 싸우는 급박한 순간에도 시, 혹은 일기문을 남겨 후인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다음은 위에 언급한 기삼연의 시입니다.
의병을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죽으니
해를 삼킨 옛 꿈은
정녕 헛된 것이었던가.
호남창의맹소의 대장 기삼연은 호남유림의 거두로 일찍이 을미의병운동 때에 기병하여 호남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정부의 선유사(宣諭使) 신기선에 설득되어 의병을 해산했으나, 정미년에 다시 거병한 후 호남 각처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피체되어 1908년 1월 2일 광주에서 총살로 순국하신 분입니다. 위의 시는 그가 죽음에 앞서 남긴 것으로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였다고 합니다.
한말 의병장들 중에는 신돌석(申乭石)처럼 서리 집안 출신도 있었지만 대개 유림의 명망 있는 인사가 거병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앞서 언급한 기삼연도 한 예입니다만, 특히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선생은 그 의기 높은 생애로 후세의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가 많은 분입니다.
다음은 1907년 1월 1일 선생이 대마도의 옥중에서 단식으로 분사하실 때에 남긴 상소문의 일부입니다.
죽음에 임한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삼가 서쪽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
다시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臣)이 이곳에 들어온 이래 한 숟갈의 밥이나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들의 손으로부터 나온 것인즉 설사 적들이 신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하여도 신은 차마 그것을 먹고 입과 배속을 더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먹기를 거부하고 옛 사람들이 자정(自靖)으로써 선왕께 몸 바치던 의(義)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
엎드려 원하옵건대 폐하는 이제 국사를 어찌할 수 없다고 선뜻 포기하지 마시고, 더욱 강건한 힘을 펼치시고 성지(聖志)를 더욱 든든히 세우신 다음 퇴미(頹靡)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참아서 안 될 일은 참지도 마시고 믿어서 안 될 일은 믿지도 마시며, 또 허위를 보시고 지나치게 겁내지 마시고, 아첨하는 소리를 달가와하지 마십시오.
망국을 목전에 둔 나라의 노신으로 죽음을 앞두고 나이 어린 국왕을 타이르는 문장이니 그 간곡한 뜻이 가슴이 칩니다.
선생이 적국의 옥중에서 분사하신 후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전 시가가 철시를 하고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 노제(路祭)가 이어졌고 길을 막고 통곡을 하는 민중들 탓에 새재(鳥嶺)의 관문을 넘을 수 없어 김천으로 다시 내려와 열차로 운구했다고 하였습니다.
선생의 죽음은 조선 유림의 장렬한 산화(散華)에 다름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일찍이 위정척사운동으로 외세의 삿된 간섭을 배제하려 들었던 조선 유림은 을미의병운동과 그에 이은 정미의병운동, 을사의병운동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것입니다.
국론이 친교와 전쟁 양설로 나뉘어 있는데 양적(洋賊)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설이요… 팔도 내에서 각각 인망 있는 사람을 하나씩 뽑아 소사(召使)라 칭하고 그들에게 위권과 존총(尊寵)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충성스럽고 기절(氣節) 있는 사람을 수습하여 의려(義旅)를 만들게 한 다음, 그 의려를 관군과 함께 서로 응원케 하여 적이 오면 절충어모(折衝禦侮)하여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이륜(彛倫)을 수명하여 사교(邪敎)를 종식케 한다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올 것입니다.
을미의병운동 때에 호좌의병대장(湖左義兵大將)으로 경기 강원 충청일대의 의병들을 이끌었고 훗날 경술국치 후 만주로 망명하여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로 일생을 왜적과 싸웠던 유림 출신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스승인 이항로선생이 병인양요가 있던 1866년에 올린 상소입니다. 본문 중의 의려(義旅)는 ‘의로운 군대’ 즉 의병을 의미하고 절충어모(折衝禦侮)는 ‘적의 창끝을 꺾어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는 의미이니 이때에 이미 의병의 의논이 유림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의병운동 초기인 을미의병운동부터 정미의병운동, 을사의병운동까지 시종 지휘를 맡았던 의병장 유인석의 막하에는 김복한(金福漢), 이설(李偰), 김하락(金河洛) 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있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여 분기하던 유림에 봉기의 불을 지른 건 을미개혁의 단발령(斷髮令) 등 일련의 개혁조처였습니다. 상투를 잘라 몸을 청결히 하자는 취지의 단발령과 8도를 없애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어 각부에 관찰사를 두고 행정망을 정비한다 등의 을미개혁은 1년 후 고종황제가 “갑오개혁 이후의 칙령이나 재가 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朕)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하겠다.”하는 갈팡질팡 행보를 보여 일부 취소가 됩니다만, 이미 민심은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유인석 문하의 김하락은 을미의병운동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경기지역 의병들이 남한산성에 운집하여 서울 진공을 준비할 때의 긴박했던 순간을 진중일기로 남긴 분입니다. 당시 의병들이 곤란해 하던 무기와 식량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준 남한산성 점령을 기록한 김하락의 정토일록(征討日錄) 중의 일문을 소개합니다.
한 군사가 한 문을 막으면 1만 군사도 어찌할 수 없는 곳이다. 성중을 둘러보니 양곡이 산처럼 쌓여 있고 소금이 수백 섬이며 그 밖에 군용물자가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다. 대완구(大碗口)가 수십 자루, 불랑기가 수십 자루, 천황지자포(天黃地字砲)가 역시 수십 자루, 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 그밖에 조총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화약과 총알이 산같이 쌓여 있다. 여러 장수들이 군용물이 풍부한 즐거워하고 진지가 견고함을 기뻐하였다.
의병장 김하락은 서울 출신으로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주산성의 별패장(別牌將) 김순삼(金順三)의 부대와 함께 2천명의 병력으로 백현(魄峴) 노루모기 등에서 관군과 일군을 격파하고 남한산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그는 30세의 청년으로 지방 유림의 노장인 박준영(朴準永)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남한산성을 발판으로 서울 진공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박준영이라는 사람이 기회주의자였던 게 불운이었습니다. 존장에 대한 예로 추대된 유학자 박준영은 나이 값을 못하고 수하인 좌익장 김귀성과 함께 적에게 내통을 하였던 것입니다. 광주유수와 수원유수를 주겠다는 감언에 넘어가서 병사들을 술 취하게 한 후 성문을 열어 적을 맞이하였으니, 이로서 의병들의 서울 진공 꿈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21일은 새벽 3시 경에 서·북문을 활짝 열어 놓았는데도 한 진영의 장졸들은 전혀 몰랐었다. 5시가 다 되어 고함 소리가 크게 일어나므로 취해 넘어졌던 군졸들이 놀라 일어나 보니 성중이 모두 적병이었다. 2천여 장졸들은 비로소 박적(朴賊)에게 속은 깨닫고 즉시로 박준영 삼부자(三父子)를 끌어내어 한꺼번에 총살하고 급히 성 밖으로 나가니 적병들이 도리어 호송해 주며 “빨리 달아나라. 일본 놈을 만나면 죽는다.”고 하였다.
이 무리들이 비록 왜적의 세력에 핍박되었지만 양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모양인데 저 박적 놈은 몸이 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1896년 3월 22일 의병장 김하락의 진중일기의 일문입니다. 남한산성 주둔 의병의 유격장을 맡아 여러 차례 왜병을 물리치기도 하였던 젊은 의병장이 배신을 당해 서울 진공의 꿈을 접은 순간을 기록한 글인데, 그 분통해 하는 마음이 가슴을 칩니다.
이후 김하락은 남은 의병들의 대장에 추대되어 관군과의 싸움을 이어갑니다. 그의 진중일기는 1895년 12월 31일부터 1896년 7월 12일까지의 기록이라는데 전문을 구하지 못해 발췌된 일부분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의병장 김하락은 진중일기의 마지막 장이 기록된 7월 12일부터 영덕 강구(江口 )에서 관군과 대치하여 7월 14일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대접전을 벌인 끝에 오십천(五十川) 강물에 뛰어들어 최후를 마쳤다고 합니다. 중상을 입은 후 적에게 사로잡혀 모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장렬히 산화한 것인데, 근처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모셨다고 하였습니다.
김하락의 이야기에는 아픈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십천 전투가 있은 지 10년 후, 김하락의 어린 딸 영규(榮奎)가 20세의 처녀로 자라 남장을 하고 부친의 유해를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 딸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해를 옮겨갔다고 하는데, 이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 '어느 의병장의 진중일기’를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오는 3월 26일은 안중근의사가 순국하신 날입니다. 삼가 선인들의 남기신 뜻을 기려 외람되이 글을 옮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