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이미지와 글을
원작자와 상의 없이
약간 정정, 보완하였음을 밝힙니다. 식스센스 |
출처: 현아사랑(pianistim) 원문보기 글쓴이: 식스센스
왜 이순신장군은 혁명이 아닌 죽음을 택하였는가?
차분히 읽어 보셨으면 하네요.
주먹을 불끈불끈 쥐게 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꼭 함께 봤으면 해서 글을 올립니다.
적군의 장수였음에도 극찬을 받는 이순신 장군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며
반면에 적군의 장수에게 이렇게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존경심을 표하는 일본과 중국의 식견에 무서움을 느낍니다.
최악의 임금 중 한 명이 선조라고 생각하는데,
왜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죽음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다면
이글을 보고 의문을 좀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국민들의 도리입니다.
중국 학자 5명과 일본 학자 7명 그리고
한국 해군사관학교 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 된 책입니다.
7권으로 나누어 진 책입니다.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 것인데...
일본 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 두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이순신장군의 주요 해전도 /그림자료 출처 : 네이버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이순신 장군 탄생일 때 온다는 거....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차를 좋아했고,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뭐 랄까 그런 묘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약 5~10만명(정확한 설은 없음. 우리 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 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 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한산도 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내가 왜
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읍니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날 몇일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와키자카가 쓴 내용인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입니다.
그 후손들이 이순신 장군의 탄생일 때 오는가 봅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그 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 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 바람 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 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 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10살 의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 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 영감이 별도로 감싸 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저 두 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 사람은 조선장수 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 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는다.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르 지닌 바,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 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 년간 수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또한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 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 수군 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 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 척만이 남았으메,
조선 수군 통제사에게 봉했으나,
10여척의 함대로 수백 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 여기고 있나이다.
통제사 이순신의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 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 하려고 할 것입니다.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 해 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 폐하게 충(忠)을 다 할 것이옵니다.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장수였던 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나의 절친한 동료 학자의 권유로 참석 하였으며 그 해에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 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 것이다.
중일 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 것,
조선이 아닌 이순신 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였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었다.
연구 해 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일본 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 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 뒤 내게 있어서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 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이 모든 것을 흔들어 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 놓은 것이다.
학생들과 토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있냐고 묻자 ,
250명의 학생 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씩 돌아 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 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 수 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면,
청나라를 구할 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한참 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 너머만 바라 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지금 중국이 청나라 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 했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배다.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시작하였고,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30분 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 해 주었다.
이 역시 학생 중 단 한명도 알지 못하였다.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 아닙니까?
정치적 이유도
맞다.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 것이다.
5000명도 안되는 군사와 50척도 안되는 함대를 이끌고
단 한번의 패배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파 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세계에 내놀 만 한 수군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의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 지휘관은
아니다.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 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누가 이 배가 400년 전에 만들어 졌다고 믿겠는가?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 해 주었다.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1년 전만 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 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 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고 강의를 끝마칠 수가 있었다.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는 기립 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쟝웨이린 교수는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 중 한 분이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 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 났다고 한다.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후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 학자란, 두 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그 역사를 감추려 하는 역사 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역사 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전쟁 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케사르도 그러했고, 징키스칸도 그러했으며, 나폴레옹도 그러했다.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분이 떠오른다.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 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했다.
2000년 전의 한 청년이 그러했듯이..
그 처절한 전쟁 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셨다.
이순신 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케다 하야토 교수가 쓴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조선
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의 혁명은 성공과 함께
약 5천여 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 이남, 경상도 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 여명에 이른다.
이 군대에 대응 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가지의 또 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하는 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착각했기에...
자신을 도와 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강력한 이순신 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 것이다.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 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 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 줄 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등등)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 이동 시키자 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의 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
하라.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 것이었다.
아니 고금을 통 틀어서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명나라가 이순신 장군을 끌어 들여서 북의 오랑케(훗날 청나라)을 견제 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 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 것을 다 알았는지도 모른다.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 되고 비밀협약을 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었다.
장군님께 질문을 던져 봅니다.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쓰여 진 책,
우리 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더 알았으면 합니다.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
일부 이미지와 글을
원작자와 상의 없이
약간 정정, 보완하였음을 밝힙니다. 식스센스 |
출처: 현아사랑(pianistim) 원문보기 글쓴이: 식스센스
첫댓글 멋있다.
간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온 세상 사람들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을 내만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네요!
정말 잘 읽었네, 영현아! 반창회때 함 보자... 건강해라
영현아 오랜만이다...잘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