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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반역 세력
삼하 15:7-12
7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8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9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11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삼하 15:7-12 / 압살롬은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4년을 보낸 후에 왕을 찾아가 이런 청을 드렸다. `제가 여호와께 전에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향 헤브론으로 내려가 그 서원을 이루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8) 제가 아람 족속의 나라 그술에서 살 때에, 여호와께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주신다면 여호와께 아주 성대한 감사제물을 바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9) 다윗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겠다는 아들의 요청을 듣고 오히려 기뻐하며 조금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또 한 번 무서운 결과를 몰고 올 결재를 하였다. `잘 다녀오너라' 이리하여 압살롬이 이번에는 남쪽 헤브론으로 내려가 무서운 일을 또 꾸미게 되었다. 10) 그는 우선 예루살렘에서 극비리에 북쪽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 속으로 부하들을 밀파하여 이렇게 알렸다. `누구든지 신호로 보내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라고 외치되, 온 나라가 떠나가게 큰소리로 외쳐라.' 11)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도 200명의 유지들을 초청하여 대동하고 헤브론으로 내려갔는데, 그들은 압살롬의 거사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따라간 것뿐이었다. 12) 압살롬은 제물을 바치던 도중에도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길로로 사람을 보내어 아히도벨을 데려왔다. 그는 다윗의 훌륭한 참모였으나 다윗과 자기 손녀 밧세바의 사건에 분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참모까지 압살롬의 편이 되고, 그를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지자 압살롬의 반란 세력이 자연적으로 커지게 되었다.
4년여 동안 반역을 준비한 압살롬이 반역을 실행하고자 헤브론으로 내려가 아히도벨을 청합니다.
헤브론으로 가는 압살롬(7-9) 4년의 시간이 흘러 반역을 위한 준비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판단한 압살롬은 하나님께 서원함이 있으므로 헤브론으로 가고자 한다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했던 곳인 그술에 있을 때 하나님께 서원한 일이라고 언급하므로 압살롬을 향한 애틋했던 다윗의 마음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과 서원이라는 종교적인 방법까지 이용하며 반역을 위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압살롬의 치밀한 계산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다윗의 초기 통치기반이 헤브론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곳(2:1-4)이며 압살롬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3:1-3). 압살롬은 마치 다윗처럼 자신을 부각시키므로 왕위 찬탈을 위한 행보를 진행합니다.
압살롬의 반역(10-11) 압살롬의 왕위 찬탈을 위한 반역이 무르익자 미리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정탐을 보내고 나팔을 불면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지역마다 반역의 무리들이 선동하도록 전국적인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반역을 위한 초청인지도 모르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무려 200명의 인사들이 압살롬을 따라 헤브론으로 따라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일반인들이 아닌 다윗 왕의 고위 관료들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이들은 왕자가 헤브론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 가는 길이기에 기꺼이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신료들을 분산시켰다고 보입니다.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상황을 만들 뿐만 아니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자신을 반대한다면 볼모로 잡아둘 계획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을 끌어들임(12) 압살롬이 제사를 드릴 때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길로에서 초청합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모사인데 예루살렘이 아닌 길로에서 불렀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예루살렘 중앙정치권에서 떠나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후에 반역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아히도벨이 기발한 모략을 압살롬에게 제시하며 결정적 도움을 주었음을 볼 때(16:20-23, 17:1-3) 압살롬은 그를 불러 자신의 반역을 위해 자신의 모사로 기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히도벨이 반역에 합류하므로 이 상황을 바라보는 우유부단한 사람들로 하여금 압살롬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전략적 효과를 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적 용 : 악한 자의 교활한 지혜로움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풍요란, 욕심과 필요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나아가는 삶. 그 삶의 끝에 우리가 생각하는 혹은 소망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멋진 내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15:7
사 년만에 - 어떤 사본에는 '40년만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전제 통치 기간도 40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5:4, 5). 따라서 40년이란 기록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대부분의 역본의 기록대로 4년을 따라야 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Vulgate 등). 한편, 혹자들은 본절을 '40일만에'로 보기도 한다(Ussher, Patrick). 그러나 40일은 압살롬이 반란의 준비를 갖출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짧은 기간이므로 이 역시 지지할 수 없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 압살롬이 하나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압살롬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 관게로 보아, 이는 다윗을 속이고서 헤브론으로 가려 한 압살롬의 거짓말 이었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즉 그는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擧事)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이제 하나님까지 팔아 먹고 있다 것이다(9-12절).
헤브론에 가서...이루게 하소서 - 본래 이름이 기럇아르바(Kirjath-arba)인 헤브론(Hebron)은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다(창 13:18).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이나 기브온(대상 16:39)과 같은 종교 중심지가 있긴 하였지만, 압살롬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8절)은 그다지 이상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Matthew Henry).
=====15:8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 암논 살해 사건 후 압살롬이 외조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망쳐 그 곳에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때를 가리킨다(13:37, 38). 서원하기를...여호와를 섬기리라는 압살롬의 말은 그가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이다(7절). 그런데 압살롬이 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헤브론에서 반역의 기치(旗幟)를 들기 위함이었다. 즉 압살롬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며(3:1, 3), 다윗이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것(2:1-4)을 생각하고 자기도 그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려 작정한 것이다(Leon Wood).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긴 탓에 생긴 헤브론 주민들의 섭섭한 감정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Theni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삼은 동안 그곳 거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기득권(旣得權)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자연히 그같은 이권을 상실하였을 터이니, 헤브론 주민들은 점차 다윗에 대하여 불만과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最適地)로서 헤브론을 지목하고서, 어떻게든 반역의 무리를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10-12).
=====15:9
평안히 가라 - 다윗 왕의 이러한 허락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의 움직임에 대하여 다윗 왕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아마 온유한 성품을 지닌 다윗 왕이 압살롬을 단지 사랑스런 한 아들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6:12-19 ; 신 12:4-14)을 놔두고 굳이 헤브론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한 압살롬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고 쾌히 승락했던 것이다.
=====15:10
정탐을...두루 보내어 - 압살롬이 이처럼 반란 전에 정탐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낸것은 아마 각 지파의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Kiel), 자신이 거사(擧事)할 때 반발하지 않도록 미리 정지(整地) 작업을 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나팔 소리를 듣거든 - 여기서 나팔 소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든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당시 압살롬이 나팔 소리 하나만으로 전국에 거사를 알란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혹자의 주장처럼 압살롬이 순전히 나팔 소리로만 거사를 알렸다고 볼 수 없으며(Pulpit Commentary), 나팔 이외에도 다양한 신호 방법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Lange).
=====15:11
이백 명이...저와 함께 갔으며 -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이백 명의 인사(人士)는 단순히 평범한 인물들이 아닌,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즉, 압살롬은 이들이 자기의 거사에 동조(同調)해 줄 경우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린다는 명목(7,8절)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Lange). 그렇다면 이는 이백 명의 인사들은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유인당한 셈이므로, 아마 압살롬은 이들이 반항할 경우 이들을 살해하려고까지 했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15:12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하도벧 - 길로(Giloh)은 유다 남쪽 산지에 있는 한 성이다(수 15:51).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벱 잘라'(Khirbet Jala)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아히도벧(Ahithophel)은 지략이 뛰어나 다윗의 모사(謀士)로 중용(重用)되었던 자로서(31절),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는데, 과연 그의 기대대로 아히도벧은 기발한 모략을 제공하여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16:20-23 ; 17:1-3). 그런데 한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활약했던 아히도벧이 이처럼 쉽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추정해 볼 때, 그 까닭은 아마도 다윗 왕의 악행에 대한 그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1:3과 23:34 또는 대상 3:5 등을 통해서 볼 때 밧세바는 아히도벧의 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히도벧이, 자기의 손녀를 추행하고 또한 손녀 사위인 우리아를 모살(謀殺)한 다윗 왕의 파렴치한 행위(11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가 있자 이렇게 빨리 변심할 수 있었다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11:3 주석 참조.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크게 유리해진 반면,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해졌다. 그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간교한 여론 조성(1-6절)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비추어진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의 죽음(11장), (2) 암논의 범죄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조치(13:21), (3)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윗 왕의 대국민 관심(對國民關心)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백성들은 이제 다윗 왕의 공정성과 윤리성, 그리고 통치력에 의혹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Lange, Leon Wood).
< 설 교 >
백성의 어리석음
삼하 15:7-12
지난 시간에는 반역을 위한 준비 작업에 철저했던 압살롬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압살롬은 반역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압살롬은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부지런함을 보였고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듣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는 말을 함으로써 압살롬이 백성들 편에 있음을 주지케 하였고 자신은 공의로 재판을 하는 사람임을 부각시켰으며 겸손과 사랑의 모습까지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압살롬의 행위를 성경은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한 것으로 평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을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을 뿐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의 것이며, 또한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압살롬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목사나 신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 보면 압살롬이 드디어 반역을 위한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서원을 했으니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거짓된 청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압살롬의 청을 허락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말하고 서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압살롬의 말에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데 오히려 압살롬의 마음을 좋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다윗을 속인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서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두루 보냅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에게 지시하기를 나팔소리를 듣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합니다. 사 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따를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고 실제 압살롬은 반역에서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13절에서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압살롬의 반역이 어떤 면에서 잘못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같은 반역은 이방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왕이 폭군이어서 견디다 못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고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반역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반역은 현대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일들을 다들 기억하지 않습니까? 이 모두의 중심에는 최고 지도자라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실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반역을 사회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 역시 왕이라고 하는 권력을 탐하기 위해 반역을 일으킨 존재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반역은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판단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노려다는 도덕적인 비난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의 반역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일단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종으로 살고 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어린양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구출된 민족들이기에 그들의 바탕에는 ‘희생의 피’라고 하는 은혜가 깔려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은 어린양의 피를 기준으로 하여 판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살아난 경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경험이 있는 자로서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계속 물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피의 은혜를 잊었을 때는 이미 이스라엘다움을 잊어버린 것이고, 이스라엘 내에서 누구라 할지라도 피의 은혜를 잊는다면 그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왕을 선택하시고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고 돕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반역을 합니다. 그가 권력을 탐했든 아버지에 대한 불만으로 반역을 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기억했다면 다윗 역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왕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따라서 다윗에게 반역을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망각하고 있던 압살롬에게는 이미 하나님이라는 존재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은혜를 말하면 ‘내 욕망을 포기한 채 산다면 내 인생은 뭐냐?’라는 반발만 앞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비록 은혜를 언급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주는 차원에서의 은혜일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은혜를 언급하긴 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은혜인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를 잊지 않으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위대한 업적을 남길 것을 말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이미 주어진 은혜를 감사하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이 성사되는 것을 은혜로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완벽한 은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위치를 잊어버림으로서 교회 자체의 욕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마치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위장하여 정당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임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존재하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11-12절을 보면 “그때에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고 말합니다.
압살롬에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른 채 아무 뜻도 없이 압살롬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에게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를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압살롬을 따르게 됩니다. 어쨌든 그도 다윗보다는 압살롬을 더욱 신뢰하게 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들은 압살롬이 하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압살롬을 신뢰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압살롬의 반역에 참여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수준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압살롬이 제사를 드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압살롬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의도로 제사를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압살롬은 제사를 드림으로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임을 의도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을 자신에게 오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로 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백성들은 다윗을 반역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압살롬을 신뢰하였기에 압살롬이 하는 말을 듣고 그를 따랐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은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말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은혜를 말하되 은혜가 아닌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은혜의 의미를 모른 채 은혜라는 말만 강조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결국 그 사기(事機)를 알지 못한 채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을 나와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과 같은 수준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목사라고 해서 그의 말을 무작정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인품이라는 것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착한 일에 대해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품이나 착한 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바른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즉 인품이 좋고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이 복음을 알았다는 증거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품이나 착한 일 등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방인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비난 받을 인품을 가져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누구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있다면 과연 그에게서 보이는 겉모습이나 행위로 인해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 따라올 수 없는 윤리라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윤리입니다. 은혜를 알기에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약자라고 해서 업신여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서 살펴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증거 하고자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큰 예배당을 짓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말하면서 교회를 성장과 예배당 건축 등을 언급한다면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으로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도 모른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복음이 아닌 길로 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살피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그의 모든 것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압살롬이 악한자입니까? 선한자입니까? 분명 악한 자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무런 뜻도 없이 무작정 그를 따르는 것입니까? 그들 눈에는 압살롬은 왕의 자격이 있는 위대한 존재로 부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의 선함과 그 행위로 인해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에 압살롬의 악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수준에 머무를까 염려가 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저를 신뢰해서도 안 됩니다. 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는 일에 도움을 얻고 있을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저에게 허물이 있을 때 그 허물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당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숫자에도 관심이 없으십니다. 교회의 재정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하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교회라고 말할 수 없고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누가 복음을 전하든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에 두게 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가를 살피면 됩니다. 그러면 그의 옳고 그름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께 행함을 강조하고 요구한다면 그의 의도를 의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행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탐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인품이 훌륭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목사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실까요? 바로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제가 은혜를 말할 때마다 어쩌면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이미 잘 알고 있는 은혜다’라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모른 바가 아니니 다음으로 넘어가자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홍해를 건널 때 그들은 살고 애굽의 군사는 죽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확인했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이 살아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주신 덕분임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다음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은혜를 잘 아니까 다른 일을 맡기신 적이 있던가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은혜를 잊지 않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은혜를 잘 안다고 해서 마치 은혜를 완벽히 깨닫고 은혜로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압살롬처럼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은혜는 잘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악한 존재들입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는 고마움도 잊어버린 채 나의 욕망을 드러내기에 바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고 그런 우리를 여전히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앞에 모이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면 그는 압살롬과 같은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뜻도 생각도 없이 그런 말에 동조하고 따르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사람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참된 신자의 위치에 굳건히 서 있기를 바랍니다.
절망 앞에서 흔들리지 말 것은?
삼하 15장 5~14절 / 조영식목사(내 맘이 낙심되며(300장))
다윗은 오늘 배경이 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이 반역은 절망과 무력감과 삶에 되한 회의감이 밀려오는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므이에게 조롱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시므이의 조롱을 힘으로 제압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절망을 넘어서게 하는 힘과 끝까지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길 원합니다.
1.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가?
다윗이 지금의 형편과 처지에 놓이게 된 시작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다윗 자신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여서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1절에 하나님은 나단을 통해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시므이의 앞에서도 이것은 결국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다릅니다. 그는 사울의 친족입니다. 그에게 다윗은 왕권을 빼앗아 간 사람입니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된 이유가 모두 다윗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울 때 사무엘상 13장 14절에“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하셨던 말씀과 아말렉과 싸울 때 사무엘상 15장 23절에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하는 사무엘이 사울에게 들려주었던 하나님의 결단을 말이지요. 사울왕조의 비극적 결말과 몰락은 사울의 불순종 때문에 찾아온 결과입니다. 하지만 시므이는 이 모든 일들이 다윗 때문에 라는 외부의 이유에서 찾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 삶 앞에 놓여있는 결과는 내가 걸어온 삶의 축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 대한 출발을 나로부터 시작하면 반성과 돌이킴을 통해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면 결국 누군가 와서 나를 물이 동할 때 넣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태도로 평생 사는 것입니다. 소망하기는 우리도 외부가 아닌 나에게 출발하여 반성과 성숙의 길이 열리길 소망합니다.
2. 우리 입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시므이는 조롱과 비방을 서슴치 않습니다. 살인자 불한당 같은 놈, 사울의 피값을 하나님이 갚고 계시기에 지금 너는 당연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식의 조롱을 합니다. 심지어 내 자식이 너를 죽이고 싶어하니 그 기분이 어떠냐는 식의 조롱입니다. 그런데 시므이의 조롱이 사실에 근거한 것 입니까?
시므이는 다윗이 사울족속의 모든 이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요나단은 삼상 31장을 2,4절을 보면 요나단을 블레셋에게 사울은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이스보셋도 삼하 4장 6절에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라고 합니다. 반란으로 죽음을 만난 것입니다. 즉, 다윗은 사울가문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조롱과 비난에는 사실이 아닌 그저 감정적이며 내 생각과 판단대로 해석한 해석본에 기초하여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 가운데는 나를 향해 비난하고 조롱하고 시기하는 이들이 말에 크게 동요될 필요가 없습니다. 잠언 26장 2절에도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시므이처럼 누군가를 향해 비난과 조롱이 내가 만든 해석본으로 바라보고 행동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시편 109편 17절의 말씀을 기억하길 소망합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입니다. 내 입술에 축복의 말씀을 담지 않으면 저주가 내게 임하고 복이 떠나가 버립니다. 소망하기는 우리가 사실이 아닌 조롱과 비난에 동요되지 않고 내 입술에도 조롱과 비방이 아닌 축복의 언어와 말들을 담는 입술이 되길 소망합니다.
3.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그러나 다윗이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무너지는 현실은 여전히 눈앞에 있습니다. 다윗은 12절에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라고 합니다. 그 안에는 여전히 원통함이 있습니다. 그때 원통함과 절망의 상황 앞에 흔들리지 않고 이기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말씀을 꺼내어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흥왕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사무엘하 7장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냐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복에 대한 감사를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삼하 7장 28절에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는 사실을 그는 삶의 분명한 진리로 세웁니다. 그렇기에 그는 축복의 순간에도 원통함과 조롱의 순간에도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꺼내어 상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시므이의 조롱과 원통함 앞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하기는 영적 캐비넷에 말씀을 풍성히 채워 모든 상황 속에 말씀으로 승리하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선을 기대함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12절에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내게 선으로 갚아주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저주를 들었는데 여호와의 선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저주를 거부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리어 이 상황 안에서도 선한 유익을 허락하실 하나님의 마음을 확신하며 기대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절망 앞에 “왜 나에게 이런일이”하는 원인을 통한 무너짐과 사라짐으로 향함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처럼 선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소망하기는 우리도 절망의 상황 앞에 선을 기대함으로 이겨내길 소망합니다.
셋째로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확신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마음은 시편 3편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에게도 하나님이 너를 돕지 않는다는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3편 3절에 “주님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리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방이 나를 대적하여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8절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처럼 지금 내 삶의 구원자는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내게 복을 허락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조롱하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사랑으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주님은 항상 그 자리에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4절에 “나의 목소리로 주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르짖을 수 있는 대상,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확신은 절망 앞에서도 결코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지금 절망 앞에 서 계신 여러분들이 계시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이겨낸 다윗을 기억하길 소망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다 흔들릴지라도 사랑으로 여러분을 바라보고 응원하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그 사실만큼은 흔들리지 않길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직 구원은 여호와께 있다는 그 능력의 시간으로 들어가게 되며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믿음이 절망 가운데 소망을 피게 하는 힘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멘.
탁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라
삼하 15장 7~18절 / 서금석목사
누구든지 탁월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 누구도 남에게 뒤쳐지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각자의 분야에서 1등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히 성도들 사이에도 최고가 되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의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일류로 키우기 위해 조기교육을 시키고, 막대한 돈을 써가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모두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로펌(law firm)에 다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서울법대 출신으로 재학 당시 사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1등인지 2등인지로 졸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모교에서 초청을 받아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 공부를 잘해 그 학교의 전설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고3 때 전국 모의고사에서 한 번도 전국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막상 학력고사를 보던 날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제가 당연히 전국 수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날 먹은 저녁이 심하게 체하는 바람에 시험장에 가기 전부터 시작해서 시험 치는 내내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가서 토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시험을 망쳤습니다." 이러면서 그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시험을 거의 포기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어요. 그래도 억지로 억지로 시험을 간신히 다 마치고 나왔답니다. 그래서 고작 전국 6등밖에 못했어요." 학생들이 이야기를 듣자, 대부분이 뭐라고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그럼 난 뭐야! 나는 죽도록 공부해도 학교 수석도 못하는데 그렇다면 난 뭐야!"
그렇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1등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이 일등은 아니어도 탁월한 인생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떠한 인생이 탁월한 인생입니까? 저는 오늘 압살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탁월한 인생은 어떠한 것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른 비전을 바르게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탁월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비전이 있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압살롬에게도 그런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니, 그는 왕이 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첫째 아들 암논은 죽은 상태이고, 둘째 형인 길르압은 성경에서 조차 제대로 거론되지 않는 것을 보아 볼품없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비록 암논을 죽인 살인범으로 낙인찍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벌을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가만히 있어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압살롬이 왕이 되고자 하는 했습니다.
왕이 되고자 하는 압살롬의 꿈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면 옳은 것입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왜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압살롬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적 태도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이스라엘에 왕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대통령을 뽑는 것처럼,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어 왕이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습니다. 사울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은 자기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주심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셔야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외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이러한 압살롬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목적하는 바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내세워가면서 자기 뜻만을 이루고자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코피 떠져가면서 공부해서 법관이 되고, 정치인이 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경제계의 거물이 된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과 계획,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뿐입니까? 살아온 경험들을 의지하고, 배워온 학문을 의지하고, 재물을 의지하고, 때로는 그간 맺어온 인간관계를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열쇠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이러한 것들이 비전을 이루는데 필수조건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비전이야말로 바른 비전입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을 보세요.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왕이 된 것은 아닙니다. 신분상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바뀐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 마음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겼습니다.
비전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 가진 비전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살리는 것-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것-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자 하는 압살롬의 모습을 보세요.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마저 모두 죽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바른 방법으로 이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진실된 방법으로 이루어야 하지 않습니까? 압살롬은 한 순간도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왕이 되고자 하면서도 단 한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계획대로만 움직였습니다. 요압의 밭에 불을 질렀습니다. 자신을 위해 군사를 모았습니다.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왕이 처리해야 할 송사문제 역시 자신이 처리하였습니다. 그뿐입니까? 미리 사람들을 세워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도록 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철저한 계획 속에서 움직여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데도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계획에 진실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지략으로 세상을 운행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을 운행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압살롬과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친구도 없고, 아내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어제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왜 이런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비일비재해지는 것입니까? 오로지 자기만 알기 때문입니다. 극도의 이기주의가 그 원인입니다.
바른 비전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바른 비전은 내가 처한 삶이 어떠한 곳이든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증거하는 것, 믿음으로 주위를 평강과 소망이 넘치게 하는 것-그것이 바로 바른 비전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학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때, 바른 방법으로 비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 탁월한 인생입니다.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ohmyNews) 2001년 3월 14일치에는 태백산맥의 저자인 조정래 씨가 인터뷰를 통해 우리 문단의 두 거목인 서정주와 황순원을 아주 적나라하게 평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한 기자가 조정래 씨에게 물었습니다. "작년 황순원과 서정주가 명을 달리했습니다. 서정주와는 사제지간인 걸로 압니다. 소회(所懷, 안타까운 일에 대한 마음 상태)가 없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자 조정래씨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서정주는 내 스승이자, 내 아내를 등단시킨 사람이고, 우리 결혼식 주례도 섰다. 하지만, 작가적 삶에서 서정주와 황순원은 대조되는 인물이다. 미당이 친일시를 쓸 때 순원은 붓을 꺾었고, 미당이 전두환을 칭송할 때 순원은 전두환이 폐간시킨 잡지의 복간을 위해 싸웠다. 미당은 이광수처럼 수십 년에 걸쳐 비판받아 마땅하다. 미당이 내 아버지라도 그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의 3대 발명품은 종교, 정치, 문학(언어)이다. 그 중 문학은 인간을 위해 옳은 일만 하라고 발명한 것이지, 불의와 타협하라고 발명한 게 아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들으면서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십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래, 일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칭찬받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탁월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일을 해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탁월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칭찬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압살롬이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이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람에게서 왔습니다. 사무엘하 14장 25절로 26절 말씀을 봅니다. "25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그렇습니다. 압살롬에 대한 칭찬은 그의 외모에 대한 칭찬이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받는 이 정도의 칭찬이라면 다윗도 그에 못지않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2절에는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사무엘상 16장 18절에는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고 사무엘상 17장 4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압살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단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압살롬은 사람의 칭찬만 받은 반면, 다윗은 사람의 칭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칭찬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는 존재가 된 것입니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 이유는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습니까? 골리앗을 죽이는 다윗의 모습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하는 말을 해도 모두들 그의 외모에 주눅 들어 아무도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무기라고는 물매와 돌맹이 다섯 개만 가지고 나가 싸워 골리앗을 죽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물매와 돌맹이 다섯 개가 그의 진정한 무기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무기는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왜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까지 골리앗 앞에 나간 것입니까? 이 땅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까? 아직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 땅 이스라엘을 지켜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만백성으로 알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만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오직 구원자 되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탁월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없어서 탁월한 인생을 살 수 없다고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능력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면 됩니다. 예수님의 삶이 탁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대제사장의 무리를 심판하고 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의 마땅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행동 하나 하나를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고아원을 가도, 양로원을 방문해도,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가도 별 것도 아닌 것을 쌓아놓고는 사진을 찍고, 그것을 신문지상에 올려놓는 것을 너무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다른 사람이 좀더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6장 3절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며" 그렇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더라도 나 자신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의 모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선행은 내가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의 선행을 감추세요. 다른 사람이 알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아름다운 일을 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 왕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자신의 세력으로 규합했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본문 1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다윗은 허겁지겁 예루살렘에서 도망갑니다. 얼마나 급히 도망가는지, 그의 후궁들도 내버려 두고 도망갑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다윗의 마음에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일등이 되어야만 영광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비록 일등은 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꼭 다섯 달란트를 벌어들여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재능만큼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내가 일등이 되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내 위치를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주의를 기울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해야겠지만, 하나님의 칭찬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3. '묻는 자'가 탁월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세력을 완전히 전멸시키기 위해서 아히도벨과 후새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조언을 들었습니다. 아히도벨은 그 즉시 다윗을 공격할 것을 제안했고, 후새는 다윗 왕이 비록 지금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긴 했어도, 격노한 상태이며, 다윗 왕을 따르고 있는 군사들 역시 용사인터라 잘못하다가는 낭패를 볼 것이라며 후일에 공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압살롬은 이 두 가지 계획을 가지고 판단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누구의 계획을 따르겠습니까? 만약, 저라면 아히도벨의 계획을 따를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길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상황은 밀고 나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압살롬은 후새의 계획을 따르고자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후새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고자 예비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무엘하 15장 31절입니다.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무엇을 했다구요? 그래요. 기도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인 계략이 물거품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후새라는 인물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지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습니다. 시편 3편 3절과 4절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바로, 여기에 다윗과 압살롬의 차이가 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중대한 계획을 진행시켜 감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아히도벨과 후새가 내어놓은 계책을 놓고 "하나님!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해서 응답해주실 리는 없습니다. 아무튼, 압살롬은 기도하려고 하기보다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판단하는 인생은 결코 탁월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탁월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지 매 순간 하나님께 묻는 사람만이 탁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묻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짤막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의 앞날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묻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물음으로써 탁월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다윗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묻지 않음으로써 실패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온갖 고통가운데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기도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이 기도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게 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교만한 일이겠습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너무 의지하지 마세요. 돈 많다고 의시될 것도 없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지식도 소용없고, 돈도 소용없고, 명예도 소용없고, 학식도 소용없고, 권력도 소용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이 세상에 그 어떠한 것도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 내가 가야 할 길을 묻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일등이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일등이 되지 못해도 바른 비전을 가지고, 바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탁월하게 하십니다. 바른 비전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으십시오. 주님도 당신께서 걸어가야 할 길을 물었습니다. 물어야 돼요. 사람에게 내가 가야할 길을 물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하나님께서 내 길을 지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지도하실 수 있도록 늘 기도하여 탁월한 인생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헤브론에서
삼하 15:7-12 / 푸른교회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7절).
압살롬이 하나님께 어떤 서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지금까지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을 보아 아버지인 다윗 왕을 속이고 헤브론으로 가기 위한 속임수였음이 거의 확실시 됩니다.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윗을 기만한 것입니다.
<헤브론>은 본래 이름은 <기럇아르바>로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그야말로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입니다(창 13:18). 따라서 압살롬이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은 결코 부자연스럽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압살롬이 서원을 이루겠다고 한 것은 성지인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압살롬이 그렇게 거짓말을 한 것은 헤브론으로 가서 반역의 기치를 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압살롬에게 헤브론이야 말로 자신의 고향이자 또 아버지 다윗 왕이 기름 부음을 받은 곳(2:1-4)이기도 했고, 또 다윗이 이스라엘의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기므로 몹시 섭섭했을 헤브론 사람들의 정서도 반란에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9절).
다윗은 아직도 은밀히 벌어지고 있는 반란의 움직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은 여전히 용서하고 사랑하고 더욱 위해줘야 할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6:12-19, 신 12:4-14)을 두고 굳이 헤브론까지 가서 제사하겠다는 압살롬의 말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심없이 흔쾌히 승낙했던 것입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다윗 왕의 모사인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본문은 또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졌다>(12절)고 합니다. 이렇듯 당시 상황은 급속도로 압살롬에게는 유리하게,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이는 당시 다윗 왕의 통치 행위에 대해 일반 백성들의 불만도 적지 않았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적용>
-<사 년 만>(7절)이란 어떤 기간을 뜻할까요?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11절)?
-다윗 왕의 심복이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기도>
주님, 압살롬의 반역과 반란의 의지는 실로 집요하고도 치밀했습니다. 4년간이나 은밀히 준비해서 마침내 헤브론에서 그 기치를 들고자 했습니다. 그가 기대한바 대로 백성들도 많이 호응했고, 무엇보다 다윗 왕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압살롬의 편에 섰다고 했습니다. 이는 성군으로 알려진 다윗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오니 오늘 저희로 하여금 그런 점들도 간과하는 일 없이 제대로 살펴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없는 승리는 곧 실패이다
삼하 15:7-12
연구과 묵상
서원(7절) '하나님 앞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우다.'라는 뜻이다. 자발적으로 선행이나 경건 행위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브론(7절) 해발 약 927m 고지대에 세워진 고대 성읍으로, 유다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으로 7년 반 동안 통치했으며, 압살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내용관찰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니 왕이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 그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 갔으니 그들은 그 꾸민 모든일을 알지 못하니라 제사드릴 때에 다윗의 모사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청하여 온지라
느낀점 / 결단과 적용
압살롬은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는 아버지 다윗에게 앙심을 품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핑계로 헤브론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헤브론에서 자기가 왕이 되었다 알리며 제사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 열두지파 사람들을 초청하였고 그 자리에 다윗의 지략가 이히도벨도 끌어들였다. 압살롬과 같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며 내 뜻을 관철시키는 나의 삶의 모습은 무엇인지 점검하기를 소망한다. 또한 하나님 없는 승리가 있는 영역은 어디인가. 하나님 없는 승리나 성공은 의미 없음을 고백하며 오늘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고 결단한다.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1-12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4년여에 이르는 압살롬의 반역 준비와 헤브론에서의 반란 봉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위병’이란 왕이 행차할 때 앞서 달리며 길을 여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호위병까지 둔 것은, 반역에 필요한 기초적인 병력을 갖춤과 동시에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차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이방의 왕들이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병거를 타고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며 행차하는 관례를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3년간 ‘그술’에 머물면서 외조부인 그술 왕의 화려한 행차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모습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신정국가의 왕위 계승자로서 위엄과 신비감을 더하고자 이방의 관습을 끌어들이며 자신을 포장할 것이 아니라, 인품과 경건을 쌓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품과 경건을 훈련하는 대신 외식하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6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의롭고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사탄에 속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포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선으로 위장된 거짓으로 진리를 파괴하고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타락시킵니다. 오늘 본문의 압살롬의 미혹에 넘어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모두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18:7).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경건한 자처럼 위장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에 있는 위선과 악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마 23:25-28). 그리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마 12:34).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압살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부터 인품과 경건에의 훈련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에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라며 다윗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부추겼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당신 말은 내가 보기에도 옳고 정당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어가기나 할 것 같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4절에 “내가 이 나라의 재판관이 된다면 소송할 일이 있어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앞에 와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오”라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을 직무 유기자로 무고하게 비방함으로써 백성들과 다윗 사이를 이간질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5절에, 누가 앞에 와서 그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하면 손을 내밀어 붙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추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자를 일으켜 붙들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그를 동료나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겸손한 행동은 그것을 본 사람들에 의해 온 이스라엘로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믿고 따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지도자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당시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란의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6절에,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여 성도들을 교회에서 훔쳐가는 악한 마귀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된 사실을 믿게 하여 다윗을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을 훔쳐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시대에도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입니다.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압살롬처럼 우리의 마음을 훔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훔쳐서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간계를 깨닫지도 못한 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어지는 7절 이하에 압살롬은 드디어 반역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서슴없이 도용합니다. 그는 예전에 암논을 살해할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4년 동안 은밀하게 반역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다윗에게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심지어 14절에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까지 포섭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 아마도 압살롬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였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를 반역에 끌어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반역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며 다윗을 속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헤브론으로 간다고 말하면 다윗이 막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실한 신앙을 악용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은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면 형사상 무거운 형벌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압살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의하며 삼가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에 속한 사람들은 압살롬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의롭고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칩니다. 이러한 미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저희에게 분별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의하며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손에 붙들린 도구
삼하 15:7~12 / js9191
샬롬, 오늘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 손에 붙들린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어떤 분이 캠핑을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즐겁게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하려고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담긴 케이스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가스레인지가 아니라 전동드릴이 들어 있었습니다. 케이스의 모양과 색깔이 비슷하다 보니 집에서 잘못 챙겨 온 것입니다. 전동드릴도 분명 값비싸고 유용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당장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도구일지라도 주인의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비로소 그 도구의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와 은사를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압살롬이고, 또 한 사람은 아히도벨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소망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후, 아버지 다윗에게 나아가 말합니다. 7절입니다.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압살롬은 자신이 그술 땅에 머물 때 하나님께 서원을 했다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헤브론에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반역 계획을 숨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헤브론이었을까요? 헤브론은 압살롬의 고향입니다. 동시에 다윗이 처음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수도로 삼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나라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니 다윗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압살롬은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제사와 서원제도까지도 자신의 야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성공을 위해, 내 계획을 위해,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내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손에 붙들린 선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압살롬은 헤브론에서 반역을 시작하며 특별히 한 사람을 초청합니다. 아히도벨입니다. 아비도벨은 다윗 곁에서 오랫동안 나라를 섬기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입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 최고의 지략가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지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사무엘하 16장 23절입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사람들은 그의 조언을 마치 하나님께 직접 들은 말씀처럼 여겼습니다. 그만큼 뛰어난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하나님께 받은 이 은사를 어디에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사람마다 받은 은사는 다르지만 그 목적은 같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은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청지기입니다.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은사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청지기의 직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 경험, 영향력, 직분과 물질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시오. 주님의 손에 붙들려 거룩하게 쓰임 받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 손에 붙들린 선한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맡기신 달란트를 죄의 도구로 삼지 않게 하시고, 청지기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압살롬의 반란
삼하 15:1-12 / 시냇가에 심은 나무
압살롬이 반역을 꾀합니다. 수레와 말을 모으고, 성문 곁에서 왕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 합니다.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친절한 모습을 보인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1-6절). 그렇게 반란을 준비한 지 사 년이 지나고 압살롬은 다윗이 처음 왕이 되었던 헤브론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알리고, 다윗의 뛰어난 부하였던 아히도벨까지 합류하여 세력은 더욱 확장됩니다(7-12절).
압살롬이 성문 곁에서 반란을 준비한 4년의 기간 동안 다윗은 무엇을 한 걸까요?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것을 다윗은 몰랐을까요? 압살롬의 계략이 성공한 배경에는 백성의 마음을 돌보지 않은 다윗의 무책임함이 큽니다. 내가 보살펴야 할 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의 마음이 허탄한 곳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오늘이 되길 기도합시다.
——
정당성이 없는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의 반역 도모는 정당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다윗만해도 블레셋의 거대한 장군 골리앗을 무찌르며,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럼에도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도망자가 되었으며, 사울 측 입장에서는 반역자라고 소문을 내었다.
허나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라고 대우하며 그를 죽이지 않았다.
반역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몇번이나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다윗과 압살롬은 차원이 다른다.
압살롬은 당시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의 활동에 제약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다윗이 그가 하는 행동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4년이나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다윗은 언젠가는 압살롬을 용서하려고 했을 것이다.
기다리면서 압살롬의 죄의 값을 치를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그를 복권시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온 것 자체가 다윗의 이런 장기적 계획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4년 동안 예루살렘 성문에서 백성들을 만나서 하는 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일종의 왕자 수업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왕이 되기 위해 백성들의 삶을 듣고 그들을 위로하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참으로 잘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다윗 같은 전략에 뛰어난 사람이 왕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첩보를 듣지 않았을리 만무하다.
알면서도 허용한 것이리라. 왕 수업을 잘 수행하는 압살롬을 은근히 대견해 하면서 말이다.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지금은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며 충분히 그 죄의 값을 치르고 나면 멋진 왕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압살롬이 헤브론으로 간다고 할 때,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할 때,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헤브론은 다윗의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유다의 왕으로 지냈던 곳이다.
헤브론은 다윗 왕국의 시작점이었다.
그런 헤브론에 그의 아들 압살롬이 예배를 드리러 간다고 할 때, 어찌보면 긍정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는 아들의 다짐을 엿보았던 것 아닐까.
다윗은 사울 왕의 직계 자손도 아니었고, 정권의 미움을 받아 도망자의 삶을 살다가 적국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망명도 했었지만, 반역을 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살롬의 다윗의 친아들이며, 왕의 계승 서열 1위이고, 여전히 예루살렘에 살고 있으며, 점점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과거의 잘못이 더이상 왕위를 계승하는 데에 여러움을 주지 않을 상황이 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반역을 실행한 것이다.
아들의 반역을 눈치 못한 다윗의 과신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아들 압살롬에게 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유지하기 위해 반역을 선택했다.
욕망 덩어리 인간의 모습을 압살롬이 잘 보여준다.
단순히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은 한 나라의 통치자와 권력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관계 문제가 아니라, 욕망의 문제다.
욕망이 선을 넘었다.
압살롬의 간계는 항상 선을 넘는다.
암논을 살해하던 장면, 아버지를 알현하기 위해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는 장면, 그리고 반역을 위해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하는 장면… 이 모든 장면에서 압살롬은 선을 넘는 욕망을 보여준다.
생계형 범죄, 우발적 범죄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욕망이 선을 넘자, 그가 가진 모든 자원을 모아 계획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반역을 꾀한다.
왕의 호의를 자신의 미래권력을 위한 마중물로 쓰고 있다.
기준점
원래 사람이란 이런 존재들이다.
기준점 효과라는 것이 있다.
백신을 맞으면 현금으로 10만원을 준다는 정책이 시행되면, 그것이 기준이 되고 권리가 되어 백신은 돈받고 맞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리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게 된다.
시혜가 권리가 된다.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기 마련이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며, 내 주변의 사람들도 다 그럴 수 있다.
나를 항상 돌아봐야 할 대목이 바로 그 지점이다.
리더는 자기 자신이 선을 넘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자기 맘대로 기준점을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기준점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권위를 가진 존재가 세워야 한다.
바로 하나님이 기준의 기준이다. 그리고 하나님 통치 질서를 대변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그 기준을 제시하여야 한다.
한 개인인 내가 기준점을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정관이 있고, 운영 규칙이 있다.
운영위원회가 있고, 총회가 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기준을 세우는 공동의 프로세스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를 돌아보고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의 세부규칙들이 작성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이 하나님의 기준을 져버리고 선을 넘고 만다.
자신들이 자연만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기준을 어길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며, 이것이 죄의 기원이 된다.
속은 다윗도 참 문제지만, 속인 압살롬이 더 큰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압살롬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자신의 분노를 발전적으로 풀어내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압살롬은 선을 넘어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기를 바랬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
인생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기준이 되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제가 제 인생의 기준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항상 상황을 합리화하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저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주장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다시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기준, 예수님의 기준 앞에 다시 섭니다.
더욱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음이 도둑질 당하지 않아야지
삼하 15:1-12 / 더온누리교회
압살롬이 반역한다. 그는 매우 용의주도하에 반역을 준비한다.그는 왜 반역을 결심 했을까? 짐작하기는 다윗이 자신을 왕위 계승자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였을 것이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한 후 3년 동안 그술 땅에서 망명생활을 하다 귀환하였고 이후 2년만에 다윗의 얼굴을 뵈었지만 매우 형식적인 만남에 그쳤다. 다윗은 압살롬을 다른 왕자들처럼 왕궁 관료 중의 하나로만 복직 시켰을 뿐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압살롬이 개인적으로 노력해도 다윗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을 짐작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즈음 자신보다 20~30세 정도 어린 솔로몬이 왕위 계승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지 않았지만 “여디디야(여호와께 사랑받는 자)”라는 별칭에 속에 다윗의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동생의 이름에서 다윗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모습은 압살롬이 얼마나 권력을 다시 잡으려고 애썼는지 짐작하게 한다.
1.치밀한 준비(1-6절)
압살롬은 더욱 치밀하게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의 목적은 분명했다. 군사를 일으키는 반란보다 백성들의 여론을 기반 삼아 왕위 계승자로 합법적인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밀한 계획을 차근 차근 진행 시킨다. 무엇보다 다윗 왕정의 약점을 파고든다. 민심이 다윗으로부터 떠나도록 만들기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하여 행동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정치역학에 착실하게 반응한다.압살롬은 고대 왕정의 기본 덕목인 “친백성 행동”을 꾸준하게 감당했다. 다윗이 주변국에 대한 군사원정과 예루살렘 성과 같은 건축사업으로 이스라엘의 기강을 세운 반면,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삶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통치 기간이 길어질 수록 왕의 재판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왕이 재판에 소홀히 임하여 피해를 본 것 같은 사례들이 겹치면서 다윗 왕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압살롬은 이를 잘 공략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자기를 위해 준비한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여 오십명의 호위병과 함께(1절)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 가에 서 있었다(2절). 그곳에서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먼저 송사 내용을 듣고 지역 출신과 지파를 물었다(2절). 그리고서 “압살롬은 그에게 “듣고 보니, 다 옳고 정당한 말이지만 그 사정을 대신 말해 줄 사람이 왕에게는 없소”하고 말하였다. 압살롬은 늘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하였다(새번역_3절).”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백성들에게 “누가 나를 이 나라의 재판관으로 세워 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소송 문제가 있을 때에 나를 찾아와서 판결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려 줄 것이오.(새번역_4절)” 이라고 했다.매우 악의적인 여론전 이었다. 그의 이런 말은 다윗 왕이 재판에 소홀하다는 인식을 심어 줄 뿐 아니라 매우 불공정한 재판을 행한다는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 문제는 이런 압살롬의 모습은 왕이 감당하는 재판과 동일하고, 무엇보다 백성들이 자신의 일을 송사하러 들어오는 성문 밖 길가에 병가와 말들, 호위병 50명이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지다 보니 일반 백성들이 보기에 압살롬이 이미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계승자처럼 여겨지게 되는 효과를 불러왔다.그런 압살롬이 만일 백성이 나아오며 엎드려 절하면 손을 펴서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을 맞춤으로(5절) 매우 친근하고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했다. 압살롬은 정치 여론전의 귀재였다. 이런 생활을 무려 4년 동안이나 지속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새번역_6절)”*압살롬은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는 것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을 매일 성문 밖 길가에 행차하여 송사하려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백성들을 먼저 만남으로 차근 차근 확대시켜 나갔다. 동시에 왕의 직무인 재판관의 자리에 세워 주기만 하면 이렇게 변함없이 재판을 감당할 것이라고 감언이설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다윗의 약점을 파고들어 민심이 그에게서 떠나도록 만든 압살롬의 지혜가 도드라진다. 그런데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만들어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시는 자리인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고 모든 지혜를 짜내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준비한다.*당시 다윗왕이 행차할 때 호위 무사들의 규모가 약 30여명이었음을 볼 때 압살롬은 드러내놓고 자신의 호위 무사들의 규모를 50명으로 세워 자신이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처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압살롬이 아무리 이렇게 노력하여도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자리인 것을 여지껏 깨닫지 못한다.
2.드디어 결행된 반역(7-12절)
압살롬은 왕이 되기 위해 동일한 일과를 성실하게 4년동안 반복한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헤브론’에서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스스로 선언하려고 했다. 헤브론은 자신이 출생한 지역이자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되어 7년 6개월동안 다스렸고 이후에 통일왕국의 왕으로 연결된 의미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당시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있어서 많은 제사들이 그곳에서 드려지고 있었다.압살롬은 다윗에게 그술에서 망명생활 하고 있를 때 “서원”한 것을 이제 지키기 위해 헤브론에서 가서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7-8절). 다윗은 평안히 가라고 선선히 보내주었다. *압살롬은 서원제라는 제사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완악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과 상광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도 언제든지 활용하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가감 없이 보인다.다윗에게 헤브론에서의 서원 감사 제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압살롬은 먼저 미리 준비한 정탐꾼들을 이스라엘 각처로 꼼꼼하게 보낸다. 나팔소리가 들리거든 지체하지 말고 “곧”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외치라고 했다. 얼마나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했는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맡기는 치밀함이 나타난다.그리고 자신이 반역하면 함께 동조해 줄 수 있을 듯한 200명의 다윗의 신하들을 헤브론으로 함께 데려 간다. 이들은 대부분 압살롬의 반역계획을 모른 채 “그저” 따라간 사람들이다. 맹목적인 추종자들인 셈이다. 오늘날 정치 집회 자리에 “그저” 보이는 부류들이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여기에 결정적으로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이 합류한다. 그의 존재는 다윗의 최측근 조차 압살롬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지고 백성들이 그에 대한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는 원인중의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아히도벨의 합류는 “반역의 일이 커지게”하고 “백성들의 합류가 많아지게”하는 계기 되게 하였다(12절).나는?
-그럼에도 압살롬의 행동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다고 하여도, 든든한 참모들이 합류하였어도 정치적인 기반이 확실하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왕은 그 미래가 뻔하다. 하지만 압살롬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의 능력을 더 과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거짓으로 얻은 백성들의 마음은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조차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결코 나타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다….-압살롬은 자신의 힘, 배경, 사람들의 평판, 여론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상적으로 표현하자면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너무도 무지했다. 자신의 권모술수로 얻은 권력을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무엇보다 눈에 보이는 행동 몇 가지와 들려주는 몇 마디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서 반역의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 문제다. 압살롬은 사람의 마음을 훔칠 줄 아는 도둑이었다.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회복에 치중하기 보다 아버지의 약점을 이용하여 백성의 마음을 훔쳐 아버지의 자리 곧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반역의 길을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이런 압살롬 주위에 “그저” 따르는 사름들이 모여 든다는 것도 그 시대 오늘날이나 반복되는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압살롬의 이야기는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이야기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갑작스럽게 말 몇 마디와 포장된 이미지로 국민의 마음을 훔친 지도자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이 형국이 묘하게 압살롬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괜한 생각일까? 아~~ 도둑맞은 민심이 다시 되돌려 졌으면 좋겠다…..
+ 기도제목
* 주님, 압살롬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교훈되어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의 결말과 같지 않도록 도와주실 거지요?
* 주님,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약점을 파고드는 데 시간을 들이는 것 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하는데 시간을 사용하도록 도와주십시오.
* 주님, 겉으로 보이는 것, 들려지는 말에 내 마음이 도둑질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다윗이 성군이라 불리는 이유
삼하 12:7~15 / 홍문수 목사
어떤 사람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집에 들어가 살게 되었답니다. 식당 한 귀퉁이에 그림이 하나 걸려있는데,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아예 때가 되어 찌들어버렸습니다. 너무 심해서 형체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조상 적부터 내려온 것이라 마음에 걸려서 때를 벗길 요량으로 화랑에 갖고 갔습니다. 그림에 찌든 때를 벗기던 화랑 주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 그림은 18세기의 유명한 화가의 원본이었던 겁니다. 거액을 호가하는 걸작인데 그동안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걸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찌들어 그 아름다운 가치가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으면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의 축복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下 11장에서 본 것처럼 그는 엄청난 죄를 범했습니다. 유부녀를 범하고, 더 나아가 그 남편까지 살해했습니다. 그는 엄연한 간음자요 살인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죠. 조금도 뉘우치는 빛이 없었습니다. 완전 범죄를 꿈꾸고 죄를 은폐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그토록 사악할 수 있는가? 치가 떨릴 정도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로 읽으니까 그렇지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군(聖君)이라 부릅니다. 여러분, 성군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질고 덕스러운 왕, 위대한 왕, ... 그런 뜻 입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왕이면서 동시에 성자(聖者)라는 겁니다. 아니, 그런 사악한 인간이 성자라니!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분명 그를 성군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를 아브라함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메시아 족보가 나오는데, 이것은 또한 유대인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그 타이들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마1:1)
그러면 과연 악한 죄를 저질렀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됐는가? 한 마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사악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변화됨으로 성군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죄의 먼지를 털어내자 그 진가가 나타난 겁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죄 많은 인간을 위대한 성자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손길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셔서 다윗처럼 거룩한 인생, 위대한 인생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1] 다윗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 : 언약의 사랑
다윗이 그 무지막지한 죄악을 범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벌레 본 듯이 피해 버리고, 절대 가까이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그러므로 조건이 바뀌면 얼마든지 변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한번 선택하셨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경고하고 때려서라도 변화시킬지언정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다윗이 그토록 극악한 죄를 범했어도 그와 맺은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삼하7:14~15 보면 다윗 언약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그 후손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징계해서 변화시킬지언정 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히13: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으로 다윗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거의 1년 이상이나 ... 왜 그랬나요? 그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하여 둔해질 대로 둔해진 그의 영혼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2]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경책 :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래도 하나님은 다윗을 버리지 않고 그에게 선지자 나단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경책하십니다. 나단은 참 담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다윗은 절대 군주입니다. 그가 마음을 악하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다윗을 찾아간 그는 처음에는 지혜롭게 비유로 말씀을 전합니다. 삼하12:1절~4절 보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집에 양과 소가 많이 있습니다. 반면 가난한 자는 암양 한 마리만 갖고 있습니다. 애지중지하면서 온 식구가 함께 먹고 마시고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나그네가 부자의 집에 방문합니다. 자기 것을 아까워한 부자는 가난한 자의 집에 가서 암양 새끼를 강탈해다가 요리를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다윗은 제3자의 위치에서, 또 백성을 다스리고 재판하는 왕의 입장에서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삼하12:5절~6절 보니까, 화를 버럭 냈습니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 ... ! 하며 격노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따라 4배를 보상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같은 것이라도 이중 잣대로 봅니다. 자기는 슬그머니 빠지고 남에게는 엄격합니다. 그때 나단이 호통을 치며 직언합니다. 7절.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것은 나단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범죄하고 곁길로 가면 돌이킬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첫 단계로는 신사적인 방법으로 말씀을 전해 줍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통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여러 가지 고통을 줘서라도 돌이키게 합니다.
[3] 다윗의 철저한 회개 : 통회자복
다행히 다윗은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 말씀이 비수처럼 다윗의 마음을 찔렀고, 마치 써치 라이트처럼 다윗의 어두워진 모습을 벌거벗기듯 비춥니다. 그 앞에 고꾸라지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13절.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눈물 흘리며 통곡합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의 엄청난 능력입니다. 렘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 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 하냐” 그 말씀이 다윗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는지 그가 쓴 참회시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시51:3~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그 이전에 근본적인 원죄에 관해 통회합니다. 자기 속에 악한 죄의 본성이 있기에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정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바로 이게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사실 그가 계속 죄를 은폐하려고 했다면 나단을 그냥 죽이면 끝납니다. 그러나 그는 왕의 지위도 내려놓고 부복합니다. 그리고 눈물로 통회 자복합니다. 사람이 안 그러면 좋지만 대개 지위가 높아지고 이것저것 조건을 갖추게 되면 은근히 교만해집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집니다. 핑계대기 쉽습니다. 다윗도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었습니다. 밧세바가 유혹해서 그렇게 됐다는 둥, 주변 나라 왕들은 더 한데 자기가 한 짓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둥 ... 그러나 다윗은 핑계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록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차별성이 바로 그겁니다. 다윗이 사울보다 인간적으로는 나을 게 없습니다. 사울은 남의 아내를 빼앗거나 그 남편을 죽인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은 버리고 다윗은 끝까지 축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정직성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해 봐도 동일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못지않게 베드로도 야비하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말씀을 생각하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변화 받고 수제자로서 초대 교회 창설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겁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현대인들에게 죄에 대한 정직함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합리화하고 핑계대고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이게 망조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정직히 자신의 모습으로 내놓고 회개할 때 오히려 복된 인생이 열리는 것입니다.
미국 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방탕과 갈등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날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골목을 누비며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던 중 어느 교회당 앞을 지나가게 됐습니다. 그 교회당 벽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이런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순간 그 말씀이 비수처럼 마음을 찔렀고, 그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 날 밤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그는 당당히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바로 그날 한 사형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옛날 내 친구였는데 ... !” 비슷한 두 친구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차이가 두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 사죄와 징계
처절하리만치 통회자복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사죄의 은총과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① 하나님의 사죄 은총 : 나단 선지자가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는 다윗에게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13절(하).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어 당연히 사형감이지만 하나님이 사죄의 은총을 베푼다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은 큰 기쁨을 맛보았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있던 1년 동안 어떤 상태였을까요? 들통나지 않았으니까 마냥 즐겁고 희희낙락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남 모르는 영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후일 그가 회개하고 사죄의 기쁨을 맛본 후 뭐라고 회고합니까? 시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부둥켜 안고 있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년 전 뉴코아 백화점 영업부에 한 우편물이 도착했습니다. 그 안에는 편지 한 통과 더불어 1만5천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에 적힌 사연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16년전 그 곳에서 고급비누를 한 세트를 훔쳐 나왔습니다. 갖고 나올때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행인 줄 알았는데 그후에 나는 도둑이라는 죄의식에 계속 시달렸습니다. 이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용기를 내서 이 편지를 씁니다.” 죄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 중에 가장 큰 것은 사실은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입니다.
다윗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와 기쁨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 기쁨을 놓치지 않고자 하나님께 간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시51:11~12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우리도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며 혹시라도 걸리는 죄악이 있다면 회개하고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사죄의 은총으로 인한 큰 기쁨을 맛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② 사랑의 징계 : 다윗은 이 사건 이후로 계속해서 많은 고난을 당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밧세바와 사이에 태어난 갓난 아이가 죽어버립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단이 이미 예언한 대로 그 집안에 끊임없는 칼부림과 비극이 줄을 잇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다 용서해 주셨다면서 이건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근친상간(암논과 다말), 알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롬의 반란 등 ...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죄값이 아닙니다. 죄값이라면 그 정도로 그치면 안 되고 다윗이 죽어야죠. 그러므로 죄값은 아니고, 단지 그에게 징계를 주셔서 죄를 그토록 철저히 경계함으로 성화되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이런 징계는 다윗으로 하여금 늘 경성하게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것이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 인간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선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히12:8 보면 징계가 없으면 오히려 사생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런 징계들을 통해 비록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갈수록 성화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그런 이치를 알았던 다윗은 고난을 달게 받으며 잘 이겨냈습니다. 롬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 묘한 것은 후일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후계자가 될 솔로몬이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겨우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법적으로만 의인이요 성도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성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성자입니까? 다윗처럼 비록 실수가 많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통회자복함으로 변화 받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성화됨으로 우리는 다윗이 성군 된 것처럼 성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성화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감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 영광스런 성자의 모습으로 주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압살롬의 쿠테타
사무엘하 15:7-12 / 우리교회
이스라엘 나라에 졸지에 왕이 둘이 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아버지 다윗왕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보다 아들 압살롬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현재 사람들의 호응도가 많은 쪽이 왕이라는 인식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꼭 다윗일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다윗만이 갖고 있는 이스라엘의 특수성을 사람들은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점지해주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힘이 모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평소에 백성들이 갖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즉 다윗은 신자인데 다른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다윗은 성경에 준해서 주어진 왕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에 백성들은 전혀 그런 점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러한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얼굴 돌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들이요 우리가 압살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현실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성경 현실을 벗어난 우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게 되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죄의 지배를 받고 동생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러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인은 남에게 지배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만의 현실을 따로 갖고 싶어했습니다. 동생이 자기보다 우위에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가인의 성질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의 성질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짜증날 문제입니다. 내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자들이 주변에 있게 되면 결국 내가 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삼키지 아니하면 삼킴을 당하는 구조라고 사람들은 경험상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는 말들을 하지 않습니다.
고집 센 남편이 아내보고 하는 말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혹은 용서해주세요”라는 말을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남편의 내부에는 권력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작용하는 현실만이 현실로 간주하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런 권력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죄인의 입장에서 왕으로 삼았고, 당연히 죽을 자의 입장에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왕 앞에서 죄인이 되어야 하고 왕 앞에서 죽어 마땅한 자가 될 때만 그 왕이 우리를 살려주고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고 죽을 자라는 조건 하에 참된 현실적 왕과 결합이 됩니다.
다윗은 바로 날때부터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부름받았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 다윗을 달리 생각한 겁니다. 평소에 백성들의 마음 속에 성경 말씀 휘감겨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력으로 휘감겨 있다는 증거가 디는 겁니다. 자기 속에 권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즉 7 귀신으로 가득 차 있다면 누구를 봐도 자기처럼 현실을 그런 식으로 본다고 오해하게 됩니다.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난 간 역사를 그냥 폐기처분하시는 분이 아니라 항상 현장 보전하십니다. 과거의 사건이 그대로 후대에서 연속되고 이어지도록 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동일산 성격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후대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공개하십니다. 그 사건을 그대로 담아서 모든 인류의 몸 안에 작용하는 원리와 능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왕의 시대에서 이러한 원칙이 필히 되풀이 되어 현실 위로 퍼지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지배받는 것보다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죄인으로서, 혹은 죽어야 될 자로서 간주하는 법을 우리는 태어나면서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교회 내부에 이런 권력자들이 설치댑니다. 여기에 비해서 마태복음 20:25-2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압살롬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구실 하에 헤브론에서 자신의 왕됨을 선언하게 됩니다. 권력이란 실상 인간에게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입히시고 키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26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되어 있습니다.
참새나 들풀이 권력에 관심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길러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참된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길러주시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어줍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은 인간이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질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되는 권력을 맛본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한 번 권력의 맛을 보고 다시 권력이 없는 곳으로 곱게 밀리는 일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모멸감을 낳습니다. 하지만 진정 자신이 죄인이며 현재 자신은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함을 아는 자라면 압살롬의 권력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의 마음 속에는 온통 성경 말씀으로 칭칭 감겨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게서 권력욕을 빼어버리게 하옵소서.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