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영혼의 전설적인 현대 무용수 이사도라 던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린 전기 영화로, 이미 1977년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총 5차례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던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사도라 던칸 역을 열연,
그해 각종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엇습니다.
이름 : 이사도라 던컨 (본명 : Isadora Duncan)
출생 : 1878년 5월 26일
사망 : 1927년 9월 14일
출생지 : 미국
경력 :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감
1904년 독일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 설립
1905년 러시아 방문공연
특이사항 : 모던댄스의 선구자
작품 : 작품 '슬라브행진곡', '마르세이즈', '아베마리아'
고대 그리스 무용 으로 부터 영감을 얻은 이사도라는"맨발의 이사도라"
라고 불렸다.
고전무용의 격식을 탈피해 발레의 토슈즈를 벗어던진채
맨발로 춤추기를 좋아 했기 때문이다.
이영화는 롤러코스터 처럼 상승 했다가 곤두박질치는
그녀의 비극적 삶을 담았다.
싱어재봉틀로 유명한 거부 파리스 싱어(제이슨로비즈)러시아시인
세르게이 에센린과의 사랑,사생아인 두자녀의 사고등..
이사도라가"부가티"스포츠카에 올라타 미소를 보내는순간
긴스카프 자락이 자동차 뒷바퀴에 감기면서
화려한 인생을 마감 하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사도라 던컨 – 비상과 추락의 삶을 겪은 ‘맨발의 여신’
Isadora Duncan
Isadora Duncan (이사도라 던컨, 1877.5.26 ~ 1927.9.14)
이사도라 던컨은 자유분망한 자신의 자연주의적 사고에 발레의 정형화된 기계같은 동작을 받아드리긴 힘들었을터.
발끝으로 서는 토 슈즈(신발)와 허리를 꼭 죄는 코르셋의 발레의상은 벗어던지고 그리스 여신의 의상 같은 튜닉을
몸에 두른 채 춤의 형식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춤을 추었다.
1800년대의 보수적 미국정서에 반 하는 그녀의 의상과 과감한 노출의 동작은 인정 받지 못하고 도리어 비난만 받는
선구자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 I Have Discovered The Dance “
Isadora Duncan의 모스코바 공연(1910년) ‘AIR GAI’ 에 대한 Color Engravings
“여성은 자연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구시대의 데카당트에서 새롭고 역동적인 신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활동했던 그녀는
미국 여성들이 여성의 참정권 운동과, 여자에게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무용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인간 본연의 몸짓을 열정으로 꾸밈없이 표현하는 꺼지지 않는 그녀의 예술혼은 오늘날 역사가 되었다.
“비탄의 늪에 빠지다”
미혼으로 낳은 두 아이를 잃고 거침없이 부서져 가는 슬픈 30대의 방탕한 삶을 살았던 이사도라.
비탄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미국으로 남아메리카로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면서 술과 남자를 탐닉하며 지내지만
이미 그녀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
“러시아 – 친애하는 던컨 동무”
자신의 오랜 꿈인 무용학교를 실현하기 위해 레닌의 부름을 받고 볼셰비키 러시아로 달려간
이사도라 던컨은 예술을 위해서라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그녀가 얻은 것은 처절한 좌절이었고, 미친 젊은 시인 예세닌과의 절망적인 사랑의 실패뿐이었다.
“사랑 따위는 없다”
이사도라 던컨의 마지막 10년은 너무도 남루했다. 자식과의 이별, 남편의 자살,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이사도라의 참혹한 최후까지…
누구에 의해서도 말해진 적 없는 이사도라 던컨의 말년의 삶이 당대의 신문과 증언을 통해 책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녀의 피폐한 몰락에서 오히려 더 따뜻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자유를 외치며 간절한 삶을 살았던 이사도라, 잊혀진 존재가 아닌 불멸의 이사도라로 세상에 남았다.
Isadora Duncan (1877.5.26 ~ 1927.9.14)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년 5월 27일 ~ 1927년 9월 14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무용수이다. 현대 무용(모던 댄스)의 어머니(개척자)로 여겨져서 '던커니즘(Duncanism)'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던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현대 무용의 새로운 무용정신은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했다. 그러나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던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더 자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그 결과 던컨이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는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추었다. 그것이 기교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몽환적인 기질을 가진 바람둥이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궁핍에 시달리며 유년 시절을 보내고 이후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질풍과 같은 인기를 누리며 춤의 역사를 바꾸기 까지
그리고 숱한 남자와의 무절제한 로맨스와 죽기 전 10년 동안 최악의 빈곤 속에 살았던 피폐한 추락과
어깨에 두른 숄이 자동차 바퀴에 끼는 바람에 숨졌던 드라마틱한 죽음의 순간까지....
Isadora Duncan on the Lido in Venice, 1903
받아들여지지 않은 시대의 반항아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결혼하면, 나의 미모와 당신의 지성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겠지요.
" 남자가 대답했다고 한다. "나의 외모와 당신의 지성이면 어떻겠소?"
이 때 남자는 물론 미남이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하는 여자도 그리 물려받을 만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우스개의 주인공이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과 극작가 버나드 쇼오라는 설이 있다.
Isadora Duncan, 1923년
독설가에 여성혐오가로 유명했던 버나드 쇼오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이사도라 던컨이 그런 어리석은 자만으로 야유를 당한 장본인이었을까?
정말로 그녀가 스무 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괴퍅한 극작가에게 그런 식으로 구애를 했다가 거절 당했다는 말인가?
사실 여부를 떠나 그런 일화에 그녀의 이름이 들먹여진다는 것은 그녀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을 시사해주는 면이 없지 않다.
자유연애를 구가했던 이사도라, 자기 육체에 대해 부끄럼이 없었던 이사도라, 자신감과 정열로 넘쳤던 이사도라,
그 정도가 지나쳐 깊이가 없고 어리석은 여인으로까지 비쳤던 이사도라...
배고픈 어린 시절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의 출납계원이면서 시를 썼고 어머니는 음악 선생이었다.
그러나 시인 아버지는 노처녀와 사랑에 빠져 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이사도라가 태어난 직후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힘겨운 살림을 꾸려나갔다.
이혼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불가지론자 로버트 그린 잉거솔의 적극적인 추종자가 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종교에 있어서나 인습에 있어서나 반항적인 태도를 심어 주었다.
거기다 타고난 예술가 기질까지 더하여, 아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자라났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춤을 추었다는 Isadora Duncan
첫댓글 마음과몸이 훨얼훨얼 나르는 느낌이듭니다. 좋은작품입니다. 정중히 모셔가겟읍니다.
잘 보았습니다...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인생을 살다간 "이사도라 던컨"이 부러울 뿐``입니다...^^*
지난 날 그리워 한참 머물다 갑니다....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