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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할 때 저리던 다리가 러닝을 했더니 나아진 이유를 아시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외대-한예종으로 가을 사냥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컨디션이 별로여서 집 앞 공원에 마르크스를 귀에 꽂고 엉금엉금 걷다가 이를 악물고 러닝을 시작했어요. 개혁이든 민주주의든 핵심은 하부구조로부터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걷기보다 달리기가 더 격한 운동인데 오히려 러닝이 안 아프다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통증의 원인이 단순한 근육 피로가 아니라 허리·골반·신경 쪽이라면 설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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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가능성이 있는 건 자세와 신경 압박의 차이입니다. 걸을 때는 한쪽 다리에 체중이 실리는 시간이 길고 골반의 좌우 움직임도 반복됩니다. 반면 가볍게 러닝 하면 보폭이 달라지고 발이 지면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면서 허리와 골반의 각도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걷는 자세에서 자극되던 좌골신경이나 허리 신경이 러닝 자세에서는 오히려 덜 자극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워밍업 효과입니다. 달리기 시작하면 혈류가 빠르게 증가하고 엉덩이·허벅지 근육이 적극적으로 동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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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불편했던 부위가 몸이 데워지면서 풀려 통증이나 저림이 감소하기도 합니다. 운동 중에는 통증을 억제하는 신경계 반응도 생기기 때문에 실제 문제가 없어졌다기보다 일시적으로 덜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러닝 하면 안 아프니까 다 나았다”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저림은 단순 근육통보다 신경 자극을 생각하게 하는 증상입니다. 걸을 때 어느 다리가 저리는지, 엉덩이→허벅지→종아리→발 중 어디까지 내려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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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숙일 때와 펼 때 어느 쪽이 심해지는지를 관찰하면 원인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만 러닝 후에도 계속 편하고 다음 날 저림이 증가하지 않는다면 가벼운 조깅 자체를 반드시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반대로 저림이 점점 심해지거나 다리에 힘이 빠지고 발목·발가락 힘이 떨어지거나, 대소변 이상 또는 회음부 감각 저하가 생기면 바로 진료가 필요합니다. >> Thank you 쳇 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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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야 할 시간인데 대통령 7차 담화 때문에 잠을 날려버렸습니다. 예상한 내용이지만 대통령의 표정 속에서 느껴지는 진정성을 리스펙트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이 옳다-호르무즈 군대 파견은 없다-연임 생각 없다-부동산 기조(대출 규제 /공급 확대) 끝까지 간다-검찰 개혁 공소 취소 사항 삭제해 달라-중도 실용주의 표방한다-김승원(59) 임용 미정" 여야의 논평이 궁금하긴 하지만 패스. 왜, 법무부장관 김승원 임용은 야당이, 중수청장(김지용 59) 임용은 추미애, 김용민을 비롯한 여당이 결사반대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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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낡은 인생을 반복하기 위함이 아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한' 비타 노바'라고 하더이다. 비타민의 '비타'와 노바 양복점의 '노바'가 떠올랐어요. 바야흐로 '변화' 속으로 다시 발을 구르며 달려나가야 할 때를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비타 노바'(Vita Nova- New Life)는 단테가 젊은 시절 썼던 소설의 제목이자 롤랑 바르트(1945-1980 구조주의 프랑스)가 어머니를 잃고 쓰기 시작한 '애도 일기'에서 가져온 라틴어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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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다'는 수식어는 이제 막 만들어져 한 번도 쓰지 않았다는 의미인 반면, '새 출발'이나 '새 인생'이란 말은 과거의 불행이나 상처와 결별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세계로의 도약, 3대 프로젝트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존재의 절반이 공백이라면, 진정한 사유는 그러한 공백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속도는 그다음이고 방향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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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 베니테스의 아포리즘 '사유가 곧 존재'를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알랭 바디우의 이론은 진정한 사유는 존재의 새로움에 닿을 수 있다'고 하더이다. 뭔가 기대되는 9월! 이재명의 비타노바와 함께 다시 한번 대한민국 가즈아! 모든 것은 셈해졌는가? 모든 것은 알려졌는가? 모든 것은 이미 사유되었는가? 우리 인생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는가? 모든 것이 셈해진 세계에서도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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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데 다리가 저렸다. 그러니 상식대로라면 달리는 것은 더 무모한 일이다. 그런데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하자 오히려 통증이 가라앉았다. 몸은 가끔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다. 걷는 것과 달리는 것은 단순히 속도의 차이가 아니라 몸 전체의 운동 방식이 달라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삶도 그렇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언제나 멈추고 쉬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운동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마르크스를 귀에 꽂고 공원을 달렸다는 장면이 그래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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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의식은 허공에서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삶의 물질적 조건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유물론). 개혁이나 민주주의 역시 거대한 구호보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하부구조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 공허해질 수 있다. 사상도 결국 발바닥이 땅에 닿는 곳에서 시험받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끼는 것과 그 정책과 인사를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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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싸고 야당뿐 아니라 참여연대와 경실련에서도 부적격 의견이 나왔고, 최근 조사에서도 반대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 김지용 초대 중수청장 후보자를 둘러싼 논쟁 역시 새 수사기관을 누가 어떤 철학으로 이끌 것인가라는 제도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표정에 대한 신뢰를 제도의 신뢰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믿더라도 권력은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비타 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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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생이란 과거를 지우고 백지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상처 입은 몸, 실패했던 기억, 이미 살아버린 세월을 그대로 가지고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다. 새로움은 과거의 삭제가 아니라 과거와 맺는 관계의 변화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도 이 지점에서 흥미롭다. 세계는 이미 셈해진 것들로 가득하지만, 기존의 셈법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출현하면서 이전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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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새로움은 기분이 아니라 지속이고, 사건은 충격이 아니라 충실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도 조금 고쳐볼 필요가 있다. 방향만 옳다고 새로운 삶이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방향을 정했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반대로 무작정 속도만 높이면 엉뚱한 곳에 더 빨리 도착할 뿐이다. 방향과 운동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공주야! 오늘 몸이 먼저 철학을 가르쳐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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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금엉금 걸을 때 저리던 다리가 달리기 시작하자 풀렸다. 물론 그것이 치료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삶의 은유로는 제법 근사하다. 삶이 막혔다고 느낄 때 필요한 것이 언제나 정지는 아니다. 지금까지와 다른 리듬, 다른 자세, 다른 운동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셈해졌는가? 모든 것은 알려졌는가? 모든 것은 이미 사유되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존재에는 아직 셈해지지 않은 빈자리가 있고, 사유는 바로 그 빈자리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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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 노바란 새로운 인생이 어디선가 배달되어 오는 것이 아니라, 낡은 삶 한복판에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제까지 걷던 사람이 오늘 달린다. 새로운 삶은 때로 그 정도의 차이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셈해진 세계에서도 새로운 삶은 가능한가?
2026.9.20.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