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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역사(歪曲歷史)
역사를 엉터리로 조작하다
歪 : 굽을 왜(止/5)
曲 : 굽을 곡(曰/2)
歷 : 두루 다닐 역(止/12)
史 : 역사 사(口/2)
역사왜곡이란 말은 그동안 많이 들어왔다. 일본의 침략행위 부정이나, 중국이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의 역사를 자기 나라 역사로 만든 것이 대표적인 역사왜곡이다.
그런데 거기에 못지않게 중국에서 줄기차게 왜곡하는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전쟁에 대한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한국전쟁 개입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고 일컫는다. ‘미국의 침략에 대항해서 조선을 지원했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중국이 외교관계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지만, 국교를 맺은 지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여전히 항미원조라는 말을 강조해서 쓴다.
2021년 7월 1일은 중국공산당 성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기념식이 있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 자리에서 연설하면서 한국전쟁 개입을 “인류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싸워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작년 2020년 7월 1일에는 조선전쟁 70주년 기념식을, 10월 25일에는 조선전쟁 출전기념식을 대단하게 거행했다. 시진핑의 연설 요지는 언제나 같았다.
중국의 전승기념일은 중국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로서, 1945년 해방을 포함해서 한국전쟁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간다. 중국은 조선전쟁에서 자기들이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사실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양열강에 계속 침략을 당하다가, 한국전쟁에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싸워 무승부로 휴전했으니, 가장 자랑하고 싶은 전쟁이 한국전쟁이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대통령은 그 영문도 모르고 시진핑의 초청을 받아들여 전승기념행사에 참석해서 시진핑 바로 옆에서 박수를 쳤다.
시진핑의 연설 가운데는 중공군이 우리나라 침략한 것을 잘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었으니,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은 정말 정신 나간 일이고, 시진핑이 우리나라를 얕보게 만든 계기를 만들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북경대학(北京大學)에서 강연할 때, “중국과 한국은 근대사의 고난을 함께 극복한 동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여러 번 우리에게 고난을 안겨준 나라이고,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전쟁 개입이었다.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닌 상태였는데, 미국이 점령해서 전쟁을 일으켜 우리 중국을 위협하기 때문에 부득이 참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하고 심지어 ‘항미원조정신’이란 말까지 만들어내어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모택동의 결정으로 중국 인민군이 개입하여 우리의 통일을 방해하고 수많은 동포를 죽게 만든 큰 죄에 대해서, 시진핑 등은 조금도 미안해하는 감정이 없다.
동북역사공정의 왜곡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항의시위가 있었고, 언론 등의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지속적인 왜곡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물론, 정치가 언론인 학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중국은 대한민국을 더욱더 무시하면서 자기들 멋대로 발언하고 행동할 것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
개설
동북공정이란 중국정부의 핵심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에 설치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가 동북지역의 3개 성(省)과 연합하여 시작한 대규모 프로젝트이며,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이다. 우리말로는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이다.
동북공정은 통일적 다민족국가인 중국의 변강을 안정시키고 민족들을 단결시켜 사회주의 중국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추진된 학술연구이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영토와 변경, 주권에 관계되는 정치프로젝트이고,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이지만 전국적인 성격도 갖고 있으며, 중국 내부와 더불어 국제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프로젝트이다.
2000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이 승인하고, 2002년 2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동북공정의 과제영역은 일반 연구과제, 번역과제, 당안(檔案)정리과제, 응용과제, 자료실 구축으로 구분된다. 과제들은 위탁과제와 공모과제로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위탁과제의 비중이 더 높았지만, 과제선정 내용이나 위탁상황에 대해 비공개로 진행하였으며, 응용과제의 내용도 공개하지 않았다.
공개된 과제들의 연구영역을 보면, 중국 강역이론 연구, 중국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중조관계사 연구, 중국 동북변강과 러시아 극동지역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가 있었다.
특히 전통적인 한국의 역사, 또는 현재 및 미래의 한반도와 관련된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도 동북공정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인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부인하는 중국의 연구프로젝트에 한국사회는 강력히 반발하여 외교문제화하였다. 한국정부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하였다.
2001년부터 매년 역사교과서 등을 통해 역사문제를 일으키고 있던 일본의 움직임에도 종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6년 9월 동북아역사재단을 출범시키면서 고구려연구재단을 여기에 흡수통합하였다.
연원 및 변천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중국은 장기적인 국가 전략과 관련하여 국가의 안전을 동북공정의 직접적인 목표로 강조하였다.
동북공정을 추진할 당시 중국은 ‘소강(小康)사회’ 건설에 주력하는 목표를 두고 있어 안정적인 주변 환경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국가의 안전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미국과의 협력에 기초한 대외전략을 추진하고 있으며, 변강문제와 소수민족문제도 현상을 타파하기보다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따라서 중화패권을 구상하는 차원에서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둘째, 중국은 동북지역의 내외적 요인에 대응하여 새로운 정책적 조치가 필요하였다.
중국은 낙후한 동북지역을 개발하여 국토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면서 지역 간 격차를 해소하여 지역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이 해체되면서 중국과의 교류도 시작되었다.
특히 무역과 선교, 역사유적지 탐방 등을 통해 한국인의 동북 진출도 매우 활발해졌다. 그 지역에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유일하게 모국(母國)을 가진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조선족사회에 한국의 영향이 크게 증대해 갔다. 중국 당국으로서는 한반도와 접경한 지역이 민감한 변경지역으로 대두한 것이다.
셋째, 중국은 북한의 핵위기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정세변화가 동북지역의 변경 안정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차원에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1994년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북한 변수를 변경을 안정되게 관리하는 차원에서 주목하였다. 1995년부터 동북변경 문제를 정치문제라는 각도에서 접근하면서 동북지역의 역사와 민족문제를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하였다.
만주를 둘러싼 남북한 사람들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간도영유권문제의 제기도 의식하였다. 남북관계가 화해 협력 분위기로 전환되면서 통일한국의 민족주의 고양과 그것이 조선족에게 끼칠 영향에 대한 예방적 연구의 필요성도 절감하였다.
동북공정을 전담하는 핵심 기구는 1983년에 설립된 중국변강사지연구센터이다. 연구센터에는 동북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동북 3성의 당위원회, 성 사회과학원, 동북지방에 소재한 주요 대학이 동북공정에 참가하였다. 연구센터에서는 동북공정 관련 각종 과제물을 비상설 기구인 전문가위원회를 통해 선정, 발주하고 있다.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던 연구센터는, 1997년 ‘당대중국변강계열조사연구(當代中國邊疆系列調査硏究)’의 제3기 연구과제로 ‘한반도 정세발전과 연변지구의 안정에 관한 조사 연구’를 설정하였다.
중국공산당의 지지 아래 1997년동북사범대학과 공동으로 ‘중국변강지구역사여사회연구동북공작참(中國邊疆地區歷史與社會硏究東北工作站)’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이 동북지역 학술역량을 동원하고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000년 12월 중국공산당 중앙은 동북지역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 이후 연구센터의 관계자들이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논의를 거듭한 결과, 2002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베이징에서 동북공정 전문가 제1차 회의가 열렸다. 동북공정은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연구센터는 2003년 7월 지린성 사회과학원과 연합하여 ‘제2회 동북변강역사와현상및고구려학술연구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열린 최초의 대형 학술회의였다.
특히 토론회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고대 지방민족정권이라는데 합의하는 등 고구려사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토론회는 동북공정 추진자들 사이에 동북지역 역사 서술방향과 체계가 형성되는 계기였으며, 연구자들이 암묵적인 자기 검열을 본격화하는 출발점이었다.
한국사회는 2003년부터 동북공정이 고구려사를 비롯해 한국의 고대사를 빼앗고 백두산과 간도를 영원히 장악하려는 국가 프로젝트라고 비판하였다.
2004년 8월 한국과 중국의 외교 관계자가 만나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을 도모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정치 문제화하는 것을 방지할 것, 중국측은 중앙 및 지방 정부 차원에서의 고구려사 관련 기술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에 이해를 표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감으로써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할 것, 학술교류의 조속한 개최를 통해 해결할 것 등 5개 항목의 양해사항을 구두로 합의하여 한중간의 역사갈등을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중국측은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는데 주춤거렸고,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관련된 문제도 본격적으로 연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북공정이 지향하는 역사인식과 관련된 출판물은 계속 간행되었다. 이에 2006년 국내 언론에서 중국의 동북공정문제를 다시 제기하면서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이 한중간 외교 현안으로 다시 부상하였다.
한국정부는 노무현대통령을 통해 중국의 총리,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국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중국측의 사려 깊은 조치를 요구하였다. 이럴 때마다 중국측은 구두양해사항의 이행을 약속했지만, 동북공정 관련 연구 결과는 계속 출판되었다.
2007년 들어 5년간의 동북공정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2002년 중앙과 지방의 기관이 연합하여 추진한 애초의 프로젝트가 끝났을 뿐이다. 지금은 동북공정을 통해 개발된 왜곡 논리를 구체화작업이 지방의 동북 3성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길림성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동북사지(東北史地)'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동북공정 관련 논문을 집중적으로 게재하고 있다. 백두산을 독점하기 위한 ‘장백산문화론’과 관광자원화의 방향에 관한 여러 주장도 이 잡지에 주로 게재되었다.
또한 2007년연변대학에 ‘동북변강지구국정(國情)조사연구기지’를 설립하여 조선족이 모여 사는 지구의 역사와 사회발전방향을 조사 연구하도록 하고 있다. 이 연구기지는 중국사회과학원이 변강지역에 설립한 최초의 국정 조사 연구 기관이다.
동북공정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현재 동북 3성의 각지에 있는 고구려 관련 유물과 박물관에는 고구려사가 중국사라는 동북공정의 논리를 반영한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고 있다.
내용
중국의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중간 역사갈등은 기본적으로 역사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중국은 국가사의 특징이 강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에 역사가 귀속된다는 영토주권론에 입각하여 동북공정을 추진하였다. 동북공정 가운데 한중간에 가장 마찰이 컸던 고구려사 인식 곧, ‘고구려사 = 중국사’라는 인식도 여기에 기인한다.
한국은 지형적, 문화적 영속성을 근거로 한민족 형성의 한 흐름 속에서 고구려사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기원주의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는 독자의 천하관을 갖고 자주적으로 국가를 운영한 독립된 강대국이었다는 관점에서 역사주권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중국의 여러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였다는 역사관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전통 시대의 중국이란 곳은 공간적, 종족적, 문화적으로 단일한 공간이 아니었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명백히 달랐다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전통 시대의 중국을 동일시하는 역사관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과 영토주권론에 입각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관으로서는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과 전통 시대의 중국을 동일시하는 역사의식을 변경시킬 수 없다. 따라서 동북공정으로 드러난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황
2006년부터 동북공정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와 문화라는 귀속론으로부터 중국 전체의 변강이론을 체계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부로 연구 중점이 바뀌고 있다.
5년간 축적한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동북 3성의 박물관, 대학, 사회과학원을 비롯한 각종 조직에서 이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진 주체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동북공정은 중국이 변경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예방 차원에서 학술연구이자 정치프로젝트였다.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의 반발은 주변으로부터 중국 자신의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적 문제제기를 받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중요한 역사 갈등의 요소로 등장한 것은 1982년의 교과서 파동이었다.
1982년 검정 당시 일본 문부성은 검정 전에는 3.1 운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표현이 없었으나 이를 폭동으로 수정하도록 하고, 강제 동원의 인원 수를 삭제 또는 축소하도록 하였다. 중.일 전쟁에 대하여는 '침략'을 '진출' 또는 '침공'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중국과 한국 정부 및 시민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본 관방장관 미야자와 기이치는 "우리나라로서는 아시아의 이웃 여러 나라들과 우호, 친선을 진행하는 가운데 이들(중국, 한국)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정부의 책임으로 시정한다"라고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어 교과서 제작 기준으로 '근린 제국 조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1981년 보수 우파들이 '일본을 지키는 국민 회의'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자위대법 개정 운동, 교과서 편찬 사업 등에 주력하는 가운데 헌법 개정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여 가고 싶다"라고 하며 교과서 편찬 의도를 밝혔다. 이들은 1986년 고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집하였다.
다시 한국, 중국 등의 반발이 있자 나카소네 수상이 직접 가이후 문부상에게 수정 지시를 하여 합격된 교과서에 대해 이례적으로 30항목, 80개 곳을 수정하도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의 교과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와 관련한 교류도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자 보수 우익의 반발도 점차 강해지게 되었다.
특히,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을 확대하던 후지오카 노부카스(藤岡信勝)는 1996년 검정에 강력히 반발하며 일본군 '위안부'등에 대하여 '정정의 신청을 권고해 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기도 하였다.
후지오카는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등과 함께 새역모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기존의 교과서를 자학사관에 입각한 것이라 공격하며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그 결과 2001년 중학교용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교과서를 둘러 싼 갈등이 분출되었다. 일본 내에서도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자 역사 교과서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크게 바뀌었다. 1982년에는 정부가 나서서 국제적 갈등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무마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2001년 문부과 학성은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등장에 '집필자의 표현의 자유'를 정부가 관여할 수 없고, '근린 제국 조항'에 입각하여 검정하였음을 강변하였다.
2001년 교과서 검정 이후 한국 정부는 물론 시민 단체들이 '일본 역사 교과서 바로잡기 운동 본부'를 만들어 왜곡 반대 및 채택 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새역모의 교과서는 동아시아 각국의 비판에 직면하면서도 2005년, 2008년, 2011년 계속 검정을 통과하여 미미하지만 차츰 점유율을 늘려가고 있다.
새역모의 교과서는 '자학사관의 극복'을 명제로 하여 그러한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교육시키려 하고 있다. 이 교과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자랑하고 그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균형 감각이 결여된 도식적 이항 대립의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하고,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였으며, 중국인의 불법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으로 진출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대동아 전쟁은 자위 전쟁(自衛戰爭)이며, 아시아 해방 전쟁임을 주장한다. 한편, 아시아 멸시 인식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갈등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다.
▶️ 歪(기울 왜, 기울 외)는 회의문자로 不(부)와 正(정)의 합자(合字)이다. 바르지 아니함 곧, 비뚦을 나타낸다. 그래서 歪(왜, 외)는 ①기울다 ②비뚤다 ③바르지 아니하다 그리고 ⓐ기울다 ⓑ비뚤다 ⓒ바르지 아니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仄(기울 측), 傾(기울 경/잠깐 경) 등이다. 용례로는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함을 왜곡(歪曲), 역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거나 거짓으로 지어 쓰는 일을 일컫는 말을 역사왜곡(歷史歪曲) 등에 쓰인다.
▶️ 曲(굽을 곡/잠박 곡, 누룩 국)은 ❶상형문자로 麯(곡)의 간자(簡字)이다. 대나무나 싸리로 만든 바구니 모양의 굽은 모양을 본뜬 글자로 굽다를 뜻한다. 曲(곡)은 ㄴ,ㄷ,∪와 같은 모양을 한 도구나 그릇, 굽히다, 굽다, 작은 변화가 있는 일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曲자는 '굽다'나 '바르지 않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曲자는 曰(가로 왈)자가 부수로 지정되어는 있지만 '말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曲자를 보면 L자 모양에 눈금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길이를 측정하는 '자'를 그린 것이다. 다만 曲자는 굽은 형태에서 연상되는 '굽다'나 '바르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曲(곡)은 (1)일부 명사(名詞) 뒤에 붙어서 곡조(曲調)나 노래 또는 어떤 곡조(曲調)나 노래 이름을 나타냄 (2)곡조나 노래를 세는 단위 (3)곡조, 악곡(樂曲) (4)이곡(理曲) (5)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굽다 ②굽히다 ③도리(道理)에 맞지 않다 ④바르지 않다 ⑤불합리하다 ⑥정직하지 않다 ⑦공정(公正)하지 않다 ⑧그릇되게 하다 ⑨자세하다 ⑩구석 ⑪가락 ⑫악곡(樂曲) ⑬굽이 ⑭누룩(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 ⑮잠박(蠶箔: 누에 기르는 채반) ⑯재미있는 재주 그리고 ⓐ누룩(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굽힐 굴(屈), 굽을 만(彎), 굽을 왕(枉), 굽을 요/뇨(橈), 노래 가(歌), 에돌 우(迂),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곧을 직(直)이다. 용례로는 구부러진 선을 곡선(曲線), 옳고 그름을 곡직(曲直), 타원면 등의 곡선으로 이루어진 면을 곡면(曲面), 구부러져 꺾임을 곡절(曲折), 가사나 음악 등의 가락을 곡조(曲調), 굽이쳐 흘러감을 곡류(曲流), 간곡하게 정성을 다함을 곡진(曲盡), 길을 잘못 든 학문을 곡학(曲學), 곡예의 기술을 곡기(曲技), 구부러지게 쌓은 성을 곡성(曲城), 굽은 형상을 곡형(曲形), 정상이 아닌 방법으로 그린 그림을 곡화(曲畫), 비틀어 곱새김을 왜곡(歪曲), 말이나 행동을 빙둘러서 함을 완곡(婉曲), 간절하고 마음과 정성이 지극함을 간곡(懇曲), 이리저리 꺾이고 굽음을 굴곡(屈曲), 악곡을 창작함 또는 그 악곡을 작곡(作曲), 노래의 곡조를 악곡(樂曲), 간사스럽고 꾀바름을 간곡(奸曲), 악곡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의 총칭을 음곡(音曲), 휘어 구부러짐 또는 휘어 굽힘을 왕곡(枉曲), 학문을 굽히어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으로 정도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 사람에게 아첨함을 이르는 말을 곡학아세(曲學阿世),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근을 미리 방지하라는 말을 곡돌사신(曲突徙薪), 말이나 글의 조리가 분명하고 널리 통함을 이르는 말을 곡창방통(曲暢旁通), 옳고 그름을 묻지 아니한다는 말을 곡직불문(曲直不問), 잘못이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다는 말을 곡재아의(曲在我矣),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는 뜻으로 사람의 재능이 너무 높으면 따르는 무리들이 적어진다는 말을 곡고화과(曲高和寡), 빈한하여 팔을 베고 자는 형편일지라도 도를 행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면 참다운 즐거움을 그 속에서 얻는다는 말로 즉 청빈한 가운데에서도 도를 즐김을 일컫는 말을 곡굉지락(曲肱之樂), 굽음과 곧음을 묻지 않는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일을 처리함 또는 잘잘못을 묻지 않고 함부로 행함을 일컫는 말을 불문곡직(不問曲直), 아홉 번 구부러진 간과 창자라는 뜻으로 굽이 굽이 사무친 마음속 또는 깊은 마음속을 일컫는 말을 구곡간장(九曲肝腸), 서려 있는 계곡과 구불구불한 길이라는 뜻으로 일을 바른 길을 좇아서 순탄하게 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이 아닌 그릇되고 억지스럽게 함을 이르는 말을 반계곡경(盤溪曲徑) 등에 쓰인다.
▶️ 歷(지날 력/역, 책력 력/역)은 ❶형성문자로 历(력/역)은 통자(通字), 历(력/역)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그칠 지(止; 그치다, 발자국)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厤(력)으로 이루어졌다. 厤(력)과 止(지)를 합친 글자체는 차례차례로 걸어가다, 여러 곳을 두루 돌아 다니다, 지나감의 뜻을 지닌다. 시간이 지나는 데는 曆(력)이란 글자가 따로 있지만, 歷(력)은 장소(場所)를 지나간다는 데는 물론 曆(력)의 뜻으로도 쓰여진다. ❷회의문자로 歷자는 지나다'나 '겪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歷자의 갑골문을 보면 나무 두 그루와 止(발 지)자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지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금문에서는 木(나무 목)자가 禾(벼 화)자로 바뀌게 되었고, 厂(기슭 엄)자가 더해지게 되면서 지금은 歷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록 글자의 조합이 바뀌기는 했지만 歷자는 '지나다'나 '겪다', '세월'과 같이 지나온 발자취를 뜻하고 있다. 그래서 歷(력/역)은 ①지나다 ②겪다 ③세월(歲月)을 보내다 ④다니다 ⑤가다 ⑥넘다 ⑦넘치다 ⑧성기다(물건의 사이가 뜨다) ⑨어지럽다 ⑩엇걸다 ⑪분명하다(分明--) ⑫책력(冊曆) ⑬달력 ⑭역법(曆法) ⑮역서(曆書) ⑯두루,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물이 과거로부터 변천하고 발전해 온 과정이나 자취를 역사(歷史), 모든 것이 환히 알 수 있게 똑똑함을 역력(歷歷), 대대로 이어 내려온 그 여러 대 또는 그 동안을 역대(歷代), 거듭하며 여러 직위를 차례로 지냄을 역임(歷任), 거쳐 온 노정이나 지나 온 경로를 역정(歷程), 여러 벼슬을 차례로 지냄을 역관(歷官), 여러 곳을 차례로 방문함을 역방(歷訪), 대대로 섬김으로 여러 대의 임금을 내리 섬김을 역사(歷事), 역사가 변천하여 내려옴을 역강(歷降), 두루 봄을 역관(歷觀), 오랜 세월을 겪어 옴을 역구(歷久), 여러 해를 지냄 또는 그 햇수를 역년(歷年), 지나는 길을 역로(歷路), 여러 곳을 차례로 방문함을 역문(歷問), 여러 벼슬을 차례로 지냄을 역배(歷拜), 지낸 세대를 역세(歷世), 여러 해를 지냄 또는 그 햇수를 역세(歷歲), 차례로 셈을 역수(歷數), 뚜렷함을 역연(歷然),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놂을 역유(歷遊), 대대로 전함을 역전(歷傳), 여러 싸움을 겪음을 역전(歷戰), 현재까지 직업 상의 어떤 일을 해 오거나 어떤 직위나 직책을 맡아 온 경험 또는 그 내용을 경력(經歷), 지금까지 학업이나 직업 따위의 경력을 이력(履歷), 공부한 이력을 학력(學歷), 앞서의 경력을 전력(前歷), 겪어 온 자취를 내력(來歷), 이곳저곳을 돌아다님 또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함을 편력(遍歷), 지금까지 거쳐 온 학업 또는 직업 등의 내력을 부력(簿歷), 환자의 병의 발생과 진행된 경과와 치료 과정을 병력(病歷), 여러 곳을 돌아다님을 천력(踐歷), 겪어 지낸 바나 겪어 지내 온 일을 소력(所歷), 여러 해 쌓은 경력을 연력(年歷), 걸어놓고 보는 일력이나 달력을 괘력(掛歷), 쉬지 않고 계속됨을 면력(綿歷), 간략하게 적은 이력을 약력(略歷), 자격과 경력을 자력(資歷), 물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는 뜻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음을 섭력(涉歷), 분명하게 알 수 있음을 일컫는 말을 역력가수(歷歷可數), 하나하나 들어서 다 풀이함을 일컫는 말을 역거설진(歷擧說盡), 분명하게 알 수 있음을 일컫는 말을 역력가지(歷歷可知),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사물에 관한 유래나 역사 또는 사물이 그런 결과가 된 이유나 경위를 이르는 말을 고사내력(故事來歷), 산 속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자연을 즐기느라고 세월이 가는 줄 모름을 이르는 말을 산중역일(山中歷日), 개천의 연꽃도 아름다우니 향기를 잡아볼 만함을 이르는 말을 거하적력(渠荷的歷), 쑥대강이같이 헙수룩하게 흐트러진 머리털에 성긴 이라는 뜻으로 노인의 용모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봉두역치(蓬頭歷齒) 등에 쓰인다.
▶️ 史(사기 사)는 ❶회의문자로 㕜(사)는 고자(古字)이다. 中(중)과 又(우; 손)의 합자(合字)로, 中(중)은 신을 모실 때 쓴 나뭇가지, 또 천문(天文)을 조사할 때 쓰는 계산용 막대이고, 又(우)는 손, 손에 가지다의 뜻으로, 나중에 천문이나 나랏일을 기록하는 관리라는 말에서, 기록, 역사의 뜻이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史자는 ‘역사’나 ‘사관’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史자는 口(입 구)자가 부수로 지정되어는 있지만 ‘입’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또 史자를 中(가운데 중)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史자는 본래 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관을 뜻했던 글자였다. 사관들은 제를 지내거나 점을 칠 때 사용하던 주술 도구를 지니고 다녔는데, 史자는 그것을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후에 사관이 임금의 언행이나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지금은 ‘역사’나 ‘사관’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史자는 이외에도 다양한 글자로 파생되어 있는데, 좀 더 자세한 내용은 使(부릴 사)자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래서 史(사)는 (1)고려(高麗)의 침원서(寢園署), 제릉서(諸陵署), 사온서(司醞署), 공조서(供造署), 경시서(京市署), 선관서(膳官署), 장야서(掌冶署), 도교서(都校署), 전악서(典樂署)와 기타 마을의 구실아치 (2)신라(新羅)의 執事省, 兵部, 조부(調府), 京城周作典, 봉덕사성전(奉德寺成典), 창부(倉部), 예부(禮部), 승부(乘部), 사정부(司正部), 예작부(例作府), 선부(船府), 영객부(領客부(府), 위화부(位和府),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 따위와 기타 각 마을의 하급(下級)의 벼슬아치. 위계(位階)는 대사(大舍)로 조위(造位)까지, 등의 뜻으로 ①사기(史記) ②역사(歷史), 기록(記錄)된 문서(文書) ③사관(史官: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거나 국가의 공문서 작성을 맡은 사람) ④문인(文人) ⑤문필가(文筆家), 서화가(書畫家) ⑥화사(華奢)하다, 꾸밈이 있어 아름답다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용례로는 역사에 정통한 사람을 사가(史家), 역사를 편수하는 관리를 사관(史官),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사실(史實), 역사로 전하여 내려온 기록을 기초로 하여 쓴 전기를 사전(史傳), 간략하게 기술한 역사을 사략(史略), 역사의 연구 편찬에 필요한 문헌이나 유물을 사료(史料), 사초를 쓰던 신하를 사신(史臣), 사관이 될 만한 재능을 사재(史才),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필법을 사필(史筆), 사서를 쓴 관계로 인하여서 입는 화를 사화(史禍), 역사적 현상을 전적으로 파악하여 이것을 해석하는 입장을 사관(史觀), 역사를 기록한 책을 사기(史記), 역사에 관해 적은 기록을 사록(史錄), 역사에 관한 주장이나 이론을 사론(史論), 역사의 개요 또는 그것을 쓴 책을 사요(史要), 역사 상으로 남아 있는 중대한 사건이나 여러 가지 사실의 자취를 사적(史蹟), 역사 상의 사실과 일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사화(史話),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을 여사(女史), 정확한 사실의 역사를 정사(正史), 민간에서 사사로 지어 엮은 역사를 정사에 맞대어 하는 말을 야사(野史), 역사가 있기 이전을 선사(先史), 거짓으로 꾸민 역사를 위사(僞史),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을 사학가(史學家),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시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사적지(史跡地),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재才 학學 식識의 세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사유삼장(史有三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