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고깔모자 (외 2편)
김금용
검은 레깅스 귀퉁이를 잘라냈어요 가위질 소리가 침묵을 깨웠죠 귀만 날카롭게 삼각형으로 불어나는 긴 정적
소름 돋았어요 살갗마다 뿔을 달고 오글거리는 실핏줄이 춥고 시린 청보랏빛 꽃잎을 피워냈어요 뺨과 목줄기, 팔다리 사이로 빛무더기가 흘렀어요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무너졌어요 어둠은 빛을 품고, 빛은 어둠을 안고 날개를 폈어요
날개 냄새가 시큼해요 땀으로 번뜩이는 등줄기와 전라로 뛰는 무용수 옷 하나 벗었을 뿐인데 조여드는 무용복을 가위로 잘라냈을 뿐인데 무정한 외투에 묶였던 꽃씨가 나신으로 뛰는 머리칼마다 참제비고깔꽃이 피네요
프랑스 혁명의 고깔모자가 함성을 지르네요 꽃향기가 거친 입김을 따라 쏟아지네요 야생의 살냄새가 진동하네요 겁 없이 피어나네요 고깔모자가 달려나가네요
물의 시간이 온다
숨소리로 온다 빛으로 온다 색으로 온다 푸른 그림자가 길게 데리고 온다
빈 몸으로 헐벗고 섰던 들판 감자밭 긴 고랑마다 빛이 고인다 밟을 적마다 붉은 흙물이 올라온다
태아가 용트림을 시작하는지 까만 봉지를 찢고 기지개를 켠다
아크릴 물감을 꺼낸다 연겨자색 붓을 들어 촉촉한 복숭아빛 향내를 그린다
대청마루 밑 감자알을 꺼내온다 호미와 곡괭이를 굽은 밭고랑에 내건다 바람이 선수를 치며 들썩거린다
오늘은 빛이 길다 물의 시간이 오는 것이다
울음통이 뻑뻑하다
쉰 살 넘은 자식 앞서 보내고 안으로만 눈물탑 세우신 시어머니 길 위에 서면 번번이 방향 잃으시는지 기억도 말소리도 멈춰버린다
어머니, 큰아들 왔네요 몰라, 저 아저씨를 내가 낳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눈시울 뜨거워진 아들의 시선 피해 내 등 뒤로 숨어버리는 어머니
명치 밑에 쟁여둔 울음통 뚜껑 열면 쏟아질까 남편이나 나나 빗장을 걸어버린다 어머니 동굴 속으로 들어앉는다
착한 치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간호사 목소리만 하얀 병실을 떠돈다.
―시집 『물의 시간이 온다』 2023. 7 ----------------------- 김금용 / 1997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각을 끌어안다』 『핏줄은 따스하다, 아프다』 『넘치는 그늘』 『광화문 자콥』 외. 한⸳중 번역시집 『문화혁명이 낳은 중국현대시』 『나의 시에게』 『오늘 그리고 내일』. 현재 《현대시학》 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