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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경포대의 ‘블루’호텔은 신축된 지 얼마 안 되는 특급 호텔이다. 오후 9시 반, 바닷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윤성일과 정소영은 호텔방으로 돌아와 있다.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 쪽에 탁자를 옮겨놓고 횟집에서 사온 생선회를 안주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스위트룸은 넓고 실내 장식도 고급스럽다. 고급스러운 것은 요즈음 세련되고 품위 있다는 뜻으로 통한다. 잘 꾸며진 비행기 일등석이 천박하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일류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쳤기 때문이다. 돈이 가치와 품위까지 만드는 세상이다.
“선배, 너무 마시는 거 아니에요?”
윤성일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정소영이 물었다. 소주 여섯 병을 사왔는데 한 시간 반 만에 네 병을 마셨다. 그중 윤성일이 세병은 마셨을 것이다.
“아냐, 이건 보통이야.”
정색한 윤성일이 정소영을 보았는데 멀쩡한 얼굴이다. 밖은 바람이 꽤 불고 있었지만 방안은 따스하고 밝다. 음소거를 시킨 TV 화면이 벽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 장식물 같다. 술잔을 든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걱정마라. 오늘밤 섹스는 문제없다.”
“누가 섹스한대?”
정소영이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겼다.
“같은 방 쓴다고 그냥 주는 줄 알아?”
“안 주면 말고.”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윤성일이 이제는 컵에 따라놓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물을 안주로 마시는 것이다.
“섹스란 것이 사랑의 확인, 또는 애정의 표시만이 아냐. 그저 성욕의 분출일 경우가 많단 말씀이야.”
잔에 술을 채우면서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거부할 때 난 얼마든지 억제할 수 있어. 난 한번도 억지로 한 적이 없단 말씀이다.”
“얼굴은 말짱하지만 말이 긴 걸 보면 취한 것 같아.”
“내가 같은 말 또 하디?”
“아니?”
“논리에 맞지 않는 말 했어?”
“논리까지는, 하지만 말의 앞뒤는 맞는 것 같아.”
“그래서 너, 오늘밤 나한테 안 주겠단 말이지?”
“봐서.”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정소영이 다시 눈을 흘겼다.
“별걸 다 묻고 있어, 정말.”
“인연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내가 겪어봐서 안다.”
“그건 또 무슨 말야?”
“인연이....”
한 모금 술을 삼킨 윤성일이 정소영을 물끄러미 보았다.
“운명.”
“....”
“바람.”
“....”
“갈대숲.”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했던 윤성일이 갑자기 어금니를 물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란다의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윤성일이 난간에 기대섰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휘몰려와 머리칼과 가운 자락을 날렸다. 수평선에 붉은 점들이 박혀 흔들리고 있다. 파도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다. 바다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흰 파도 끝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그렇다. 갈대숲, 그곳, 미토의 갈대숲에서 김가영을 만났다. 가영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사라졌는가?
“선배, 들어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선 정소영이 말했다.
“추워.”
머리를 돌린 윤성일이 정소영을 보았다. 정소영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가운 깃을 치켜 올린 정소영이 윤성일을 마주보았다. 이것이 현실이다. 차가운 바람, 흩날리는 머리카락, 정소영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눈을 뜬 김가영이 먼저 눈동자의 초점을 잡고 나서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15분, 이 시간에 잠을 깬 것은 드물
다. 룸살롱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보통 10시가 넘어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이곳은 청평의
별장 안, 어젯밤 장기태와 함께 이곳에 온 것이다.
“어, 일어났니?”
가운 차림으로 창가에 서있던 장기태가 상반신을 일으킨 김가영을 보았다. 웃음 띤 얼굴이다.
“너, 오늘 일산의 아파트 가봐. 여기 키 있다.”
장기태가 눈으로 탁자 위를 가리켰다. 탁자 위에는 작은 손가방이 놓여져 있다.
“가방 안에 아파트 키하고 수표 들었다.”
김가영은 시트로 상반신을 감은 채 시선만 주었고 장기태의 말이 이어졌다.
“약속대로 1억에다 가구 살 돈 5천, 그리고 두 달분 생활비 4천까지 1억9천이 들어있다.”
다가선 장기태가 김가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넌 오늘부터 가게 안 나가고 집에 있는 거다. 알았니?”
김가영이 머리만 끄덕이자 장기태가 가운을 벗었다. 그러자 알몸이 드러났다. 시트를 들치고 침대에 들어온 장기태가 김가영을 안았다.
“널 가게에 매물처럼 내놓기가 싫어서 그런다.”
거칠게 김가영의 다리를 벌린 장기태가 위로 오르면서 말했다. 어느덧 장기태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하체의 닿은 남성은 딱딱해져 있다.
“넌 이제부터 내거야. 알았니?”
“알았어요.”
두 손으로 장기태의 어깨를 움켜쥐면서 김가영이 대답했다.
탁자로 다가간 정소영이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오전 8시 반, 머리가 깨지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정소영은 어금니를 물었다. 햇살이 베란다를 통해 방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윤성일은 보이지 않는다. 어딜 갔는가? 의자에 앉은 정소영이 메모지에 적힌 글을 읽었다.
“나 먼저 간다. 혼자 두고 가서 미안. 어젯밤 너무 취해서 유감이다. 그렇다고 술 깬 아침에 어수선해진 상태에서 널 보기도 그렇고, 다음에 보자.”
다 읽고난 정소영이 메모지를 앞으로 던졌다. 메모지가 팔랑거리며 날더니 꽤 멀리 가서 떨어졌다. 그렇다. 어젯밤 소주 여섯 병을 다 마셨다. 윤성일이 네 병, 정소영은 두 병쯤, 거기에다 룸바에 있던 맥주와 양주로 폭탄주를 만들어서 마셨던 것이다. 정소영은 다섯 잔, 윤성일은 열 잔쯤 마셨을까? 정소영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먼저 쓰러졌기 때문에 윤성일이 어디서 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젯밤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누워 있었으니까.
“아유, 나 몰라.”
다시 머리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진 정소영이 침대로 다가가며 말했다. 다시 한숨 자고 볼 일이다.
“네 형들이 날 찾아왔다.”
대일빌딩의 15층 사무실에서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윤정수가 말했다. 오후 4시 반, 3월초순의 이른 봄이었지만 날씨가 화창했다. 그래서 활짝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맑은 대기가 사무실 공기를 바꿔 놓았다. 윤성일의 시선을 받은 윤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한테 재산이 다 넘어갈까봐 걱정이 되는가보다. 재산 분할을 해달라고 하더구나.”
윤성일은 외면했고 윤정수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아직 예순여섯이야. 앞으로 10년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놈들이 날 고려장 시키려고 드는 것 같다.”
“....”
“만일 한 번만 더 그딴 소리를 했다가는 모두 사회에 기부하고 한 푼도 못 주겠다고 했더니 찍소리 못하고 돌아갔어.”
그때 윤정수가 소파에 등을 붙이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그것이 사흘 전이다.”
“....”
“그런데 어제 두 놈이 만나 이야기 하는 내용을 들어 볼 테냐?”
머리를 든 윤성일의 표정을 본 윤정수가 입술 끝을 비틀고 웃었다.
“이것이 인간이다. 명심해라.”
탁자 밑에서 소형 녹음기를 꺼낸 윤정수가 버튼을 누르더니 소파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얼굴이 10년은 더 늙어 보였으므로 윤성일은 숨을 들이켰다. 그때 녹음기에서 큰형 윤태일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버지가 유언장을 고쳐 놓았을 리는 없어. 아버지 말대로 아직 10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말야.”
그러자 작은형 윤수일이 받는다.
“그건 확실히 모르지. 만일 은밀하게 성일이한테 유리하게 고쳐 놓았다면 우린 새 되는 거요.”
“배변호사는 고친 것 없다고 했다. 내가 물어보았어. 예전 그대로야.”
“그 양반이 거짓말 했을 수도 있어요.”
“그럴 리가 없어. 그건 내가 보장한다.”
“배변호사는 우리 측에 붙은 거 맞지요?”
“맞아.”
“그렇다면 서둘러야 됩니다. 형.”
그러고는 소리가 끊겼으므로 윤성일이 머리를 들었다. 몸을 일으킨 윤정수가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끄더니 윤성일을 보았다. 가라앉은 표정이다.
“네 둘째형이 서둘러야 된다고 한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윤성일이 다시 외면했을 때 윤정수가 다시 물었다.
“뭘 서둘까?”
“아버지, 재산 분배를 하시지요.”
불쑥 윤성일이 말했지만 윤정수는 못들은 척 말을 이었다.
“만일 나한테 사고라도 일어나면 오래 전에 작성한 유산분배 내용대로 너희 네 형제는 장남이 37, 차남이 28, 삼남이 20, 딸이 15의 비율로 배분이 된다.”
“....”
“하지만 네 두 형은 부동산과 종금의 75%를 넘겨달라고 하는구나. 너하고 은지는 25%를 나눠주라는 거야.”
“....”
“내가 녹음테이프 뒷부분은 너한테 들려주지 못했다.”
머리를 든 윤성일은 윤정수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윤정수는 소리 없이 이를 절반쯤 드러내고 웃었는데 두 눈이 흐려져 있다. 윤정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만 인간을 어떤 극한 상황에 닿더라도 인륜을 벗어나면 안 된다. 명심해야 한다. 성일아.”
박상호 전무는 윤성일이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지만 이야기를 두 마디 이상 나눠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매일 붙어 지내는 터라 성격도 파악이 되었다. 6월 중순, 오늘은 15층 사무실에 윤성일과 박상호 둘이 마주보고 앉아있다. 활짝 열려진 창을 통해 밀려 오는 바람은 이제 후텁지근하다. 지난번 윤정수가 앉았던 자리에는 윤성일이, 앞쪽에는 박상호가 앉았다. 윤정수는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박상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서류도 완벽하게 구비되었고 박앤정 법무법인의 확인도 받았습니다. 재산 분배는 다 끝낸 겁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박상호가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두 분 형님은 종금과 부동산의 지분 67%를 갖게 되었으니 만족할 겁니다. 75%를 요구했지만 애초에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윤성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윤태일과 윤수일 앞으로 간 금액은 1조 5천억 정도가 되었다. 그것을 각각 60대 40의 비율로 나눠 갖는다. 그리고 누나 윤은지는 종금 지분의 12%를 상속받게 되었는데 그것의 가치는 2천억이 넘었다. 그리고 윤성일은 종금 지분 15%로 약 2천5백억이다. 윤정수의 전 재산은 계산상 2조, 그중 윤태일, 윤수일이 1조 5천억을 나눠 갖게 되었고 5천억을 윤성일과 윤은지의 몫이 된 것이다. 그러나 두 형은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윤정수의 재산이 10조 가깝게 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직한 국세청 직원들을 고용하여 재산을 추적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동산 탈세가 노출되어서 3백억 가까운 세금이 부과되는 바람에 놀라서 중지시켰던 것이다. 거기에다 그 일로 아버지 윤정수의 진노를 사게 된 두 형은 빌딩 두 동까지 회수 당했다. 4백5십억 가까운 재산이 다시 윤정수에게 돌려진 것이다. 윤정수는 그것을 사회에 기부한다고 했다. 지난 3월 윤정수가 녹음테이프를 들려준 지 석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 박상호가 머리를 들고 윤성일을 보았다. 이제 박상호는 윤정수의 지시로 윤성일을 모신다. 윤성일이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주인,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박상호가 묻자 윤성일이 탁자 밑에서 서류를 꺼내 앞에 놓았다.
“이거 받으세요.”
“뭡니까?”
서류를 편 박상호의 얼굴이 곧 누렇게 굳어졌다. 양도서류다. 윤성일의 앞으로 배분된 3개 빌딩 중 1동이 박상호 앞으로 양도되어 있는 것이다. 7백억 가까운 가치의 건물이다.
“그거, 박전무 생활 기반으로 삼으세요.”
“예?”
되물은 박상호의 시선이 내려졌다.
“아니, 저는, 이렇게....”
박상호의 목소리가 막혀져 있다. 목이 멘 것이다. 윤정수는 구두쇠다. 지금까지 월급 외에는 보너스도 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온갖 비밀 업무는 다 시켰다. 궂은일도 다 시켰기 때문에 박상호는 종과 같은 신세였다. 그러기를 25년, 스물넷에 운전사로 채용되어서 온갖 일을 처리하다 보니까 부동산과 사금융에 도사가 되었지만 모은 재산이 있을 리가 없다. 3년 전에 성남의 30평형 아파트 한 채를 구입했고 늦게 결혼한 터라 15살짜리 딸하고 세 식구가 월급 350만원으로 살아왔다.
“주, 주인...”
서류를 집어든 박상호가 이제는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윤성일을 보았다.
“회, 회장님께 상의를 해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버지의 뜻이나 같아요.”
정색한 윤성일이 박상호를 보았다.
“아버지가 나한테 그러셨거든요. 박전무가 고생 많이 했다. 이제 네가 새 주인이 되었으니 그 보상을 받을 게다. 하구요.”
“....”
“그건 내가 이러실 줄 안다는 말씀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께 감사드리면 돼요.”
마침내 박상호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7백 억짜리 이 건물에서 매월 1억의 임대료가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박상호가 가장 잘 안다.
첫댓글 감사~
늘 수고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굿,,즐감,,,,
늘 감사합니다.
^^
즐감요~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요
감사히 잘봤습니다~
즐감 하고 감니다
성일이가 사람을 대할줄 아는구만...
역시 아버지지 후계자는 잘 선택했네요. ㅎㅎㅎ
잘읽었습니다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