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논문은 2012년9월24일 <왕건통일연구소>가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통일정책 전략과 과제”를 주제로 주최한 세미나에서 필자가 발표한 발제 논문이다. 지금 朴槿惠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가 이른바 “통일비전”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어 드렸으면 좋겠다는 衷情에서 이 논문을 아래에 게재한다. 통일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鞭撻을 아울러 바란다.
李東馥
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
15대 국회의원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대변인
1. 통일논의의 始原 - ‘收復統一’과 ‘解放統一’의 對峙
1948년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분단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상반된 통일정책을 추구해 왔다. 건국 초기 남의 대한민국의 통일전략은 ‘수복(收復)’ 통일이었다.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추구한 통일전략은 ‘해방(解放)’ 통일이었다. 남의 ‘수복’ 통일은 그 뿌리를 1948년5월10일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두고 있었다. 반면 북의 ‘해방’ 통일은 그 논거를 이른바 ‘미완성 해방’론에 두고 있었다.
남의 ‘수복’ 통일론의 논거는 다음과 같았다. 1948년5월10일 38선 이남에서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는 1947년11월14일자 유엔총회 결의(총회결의 112-II호)에 의거하여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선거였다. 그러나, 이 총선거는 북한 땅을 점령한 소련 군정당국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출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1948년2월26일 파리에서 있었던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에 의한 선거감시가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실시되었다.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하여 1948년8월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수립이 공포되자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은 같은 해 9월9일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여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유엔총회는 1948년12월12일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상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결의(총회결의 제193-III호)를 채택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합법국가’가 되었지만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비합법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건국 초기 대한민국이 추구했던 ‘수복’ 통일은 북한이 5.10 총선거를 거부한 것이 불법이고 9월9일 북한 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도 불법이었기 때문에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던 북한 땅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유엔감시 하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 총선거의 당선자들을 이미 5.10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회에 합류시킴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온 1948년5월10일의 제헌국회의원 총선거는 뒤에 있을 북한지역에서의 선거용으로 100석을 공석(空席)으로 비워두고 198명의 의원들을 당선시켰었다.
반면, 북한의 ‘해방’ 통일론은 다음과 같은 논거에 근거하고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8월15일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에서는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반미(반제)ㆍ반봉건ㆍ반일(민족해방)ㆍ공산주의(인민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같은 ‘혁명’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북한 땅에서는 소련군의 지원과 협력으로 완수되었으나 남한에서는 주한미군의 방해로 수행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미제’의 ‘식민통치’로 바뀌는 데 그쳤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남한에서의 ‘혁명’의 ‘미완수’로 인하여 1945년의 ‘해방’은 북한에서만 이루어진 ‘미완성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통일전략은 2단계로 단계화되어 있었다. 분단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서는 1단계로 먼저 남한에서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내용으로 하는 ‘남조선혁명’을 수행하여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주장한다. 2단계로는 이를 통해 새로이 ‘해방’되는 ‘남조선’과 이미 ‘해방’되어 있는 ‘북조선’이 ‘합작’을 통해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 같은 ‘남조선 혁명’을 위한 방법론으로 ‘민주기지론’에 입각하여 ‘3대 혁명 역량’의 강화를 추구해 왔다. ① 북한의 혁명기지를 강화하고, ② 남한의 혁명역량을 강화하며, ③ 국제적 혁명역량과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 같이 이루어지는 통일이 북한이 말하는 ‘평화통일’이다. ‘남조선혁명’이 수행되지 않을 때는 ';평화통일‘은 불가능하다. 이때는 ‘비평화적 통일’이 있을 뿐이다. ‘무력통일’인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김정일(金正日)•김정은(金正恩) 정권이 3대에 걸쳐서 ‘남조선혁명’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동원하고 있는 전략이 ‘통일전선’ 전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1917년10월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를 장악한 뒤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통일전선’ 전략을 개발하여 구사(驅使)해 왔다. ‘통일전선’ 전략은 우세(優勢)한 적(敵)을 상대로 전개하는 혁명투쟁에서 승리를 전취하는 방안으로 적의 주변세력과 제휴함으로써 적의 핵심세력을 고립시켜 포위하는 전략으로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전술적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제휴의 상대방인 적의 주변세력의 입장과 주장을 적극 수용하는 기만술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있었던 ‘미-소 공동위원회’를 포함하여, 1945년 해방부터 1948년의 국가분단까지의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1948년의 국가분단 이후 1950년의 6.25 전쟁 도발까지의 기간 중 일관되게 전개한 ‘통일전선’ 차원의 위장 평화통일 공세의 단골 메뉴는 ‘남북정치협상회의’ 또는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주장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남북 정치협상회의’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항상, 그들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정한 일방적 기준을 근거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와 개별인사들을 ‘통일지지자’와 ‘통일반대자’로 양분하고 이 같은 분류에 입각하여 그들이 말하는 ‘통일반대자’들의 참가는 배제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통일반대자’들은 곧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쳐야만 했다. 그들의 ‘통일전선’ 전략은 대한민국의 반체제•반정부 세력과의 제휴 및 연대를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체제세력을 소외시키고 고립시키겠다는 것이었지만 특히 6.25 전쟁을 통하여 한-미 동맹이라는 철갑옷과 국가보안법 및 중앙정보부(당시) 등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법령과 제도로 중무장한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는 북한이 대한민국의 반체제•반정부 세력과 제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통일전선’의 2원화(元化)로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층 통일전선’과 ‘상층 통일전선’으로의 2원화였다.
물론 ‘통일전선’의 기본은 ‘하층 통일전선’이었다. 이에 입각한다면, 북한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정부와 체제세력은 오직 전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지 대화의 상대방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 전략은 1970년대부터 전술적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래의 ‘남한 당국 배제’ 입장을 바꾸어 남북한 ‘당국간 대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에 이어 체육회담, 경제회담, 국회회담에 이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 개최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그 뒤에는 ‘장관급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접촉과 대좌 및 대화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북한이 호응한 이 같은 남북 접촉과 대화들은 여전히 ‘통일전선’ 전략의 전술적 변형(變形)에 불과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수용한 ‘당국간 대화’는 ‘통일전선’의 원형(原型)인 ‘하층 통일전선’과 구별되는 ‘상층 통일전선’이었다.
북한판 ‘상층 통일전선’의 기능은 ‘하층 통일전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즉, 북한이 ‘당국간 대화’를 수용하는 것은 이를 통해 남북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북대화의 ‘전제조건’을 제기함으로써, 남한 당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북한이 추진하는 ‘하층 통일전선’의 구축을 차단•방해하는 남한 사회의 법률과 제도를 제거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와 아울러 남한 사회 내에서의 ‘반미(反美)’ 정서의 자극과 증폭을 통해 남한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분열을 선동, 조장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하여 한-미 안보동맹의 파탄(破綻)을 선동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북한은 이를 가리켜 ‘법률적 조건’ 조성과 ‘사회적 환경’ 조성이라고 일컫는다. 요컨대, ‘상층 통일전선’ 차원의 남북대화를 이용하여 남한의 자발적인 무장해제(武裝解除)를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통일전선’ 전략에 입각하여 ‘남조선혁명’을 추구하면서도 이와 병행하여 ‘비평화적 방도’, 즉 무력에 의한 공산화 통일 기도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김일성의 북한은 1950년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원 하에 6.25 전쟁을 도발했다. 1953년 6.25 전쟁이 ‘휴전(休戰)’의 형태로 봉합된 뒤에도 북한은 ‘4대 군사노선’(전인민 무장화, 전국토 요새화, 전군 간부화, 전군 현대화)을 고수하고 이른바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이름의 군사동원체제를 상시적으로 유지하는 가운데 국제사회와의 마찰을 무릅쓰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강행함으로써 화생방(化生放) 무기체계에 의존한 ‘비대칭전력(非對稱戰力•Asymmetric Military Capability)’ 강화를 통한 전쟁도발 능력 확대에 계속 집착하고 있다.
북한에 비해 훨씬 열악한 경제적 여건을 안고 출발하여 6.25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 복구에 전념하는 동안 이승만(李承晩)의 자유당 정권과 장면(張勉)의 민주당 정권을 거쳐 박정희(朴正熙)의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들의 통일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수세적ㆍ방어적이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이 제시했던 ‘통일방안’은 이승만 정권 때의 ‘북한지역 선거’론이 1953년의 휴전협정에 따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 19개국 정치회담을 계기로 ‘남북한 총선거’론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일관되게 ‘유엔 감시 하의 인구 비례 선거’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용암처럼 분출된 분방(奔放)한 통일논의는 1961년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5.16 군사 정변(政變)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朴正熙)가 이끈 5.16 군사정권과 이를 계승한 공화당 정권의 국정 최대 과제는 ‘산업화’에 의한 ‘조국 근대화’였다. 공화당 정권은 ‘선 건설•후 통일’ 구호 하에, 일체의 ‘통일논의’를 금기시(禁忌視)하는 가운데, 국가의 모든 역량을 경제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의 국내외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월남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난 여파(餘波)로 아시아에서는 리차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괌 선언’과 중국 방문에 이어 미ㆍ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유럽에서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등 ‘데탕트(긴장완화)’라는 이름의 ‘유화정책(宥和政策)’이 추진되기 시작하여 그 동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특징지었던 동ㆍ서 양극(兩極) 구조의 냉전체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두 개의 분단국 해결 사례가 생겨났다. 1970년 분단독일의 동ㆍ서독 간에 있었던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1972년에 이루어진 양독 기본조약의 체결을 통해 이루어진 ‘2개의 독일’ 모델 등장이 그 하나였고 1975년 남베트남의 패망으로 끝난 베트남전의 결과로 이루어진 베트남의 통일 실현이 다른 하나였다.
2. 남북관계의 변화 -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한반도에서는 남쪽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산업화’ 정책의 성공으로 남북한의 경제가 북한 우위에서 남한 우위로 역전(逆轉)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국내외 상황의 변화를 업고 1970년대 초부터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이 종래의 수세로부터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1970년8월15일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을 전환점으로 하여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통하여 박정희 정권의 대북정책은 ‘적대적(敵對的) 공존’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슬로건은 ‘선 건설ㆍ후 통일’이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 평화ㆍ후 통일’로 바뀌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이 벤치마킹한 것은 1972년의 양독(兩獨) 기본조약 체제였다. 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은 통일논의는 시기상조(時機尙早)였다. 대한민국이 이 시기에 추구한 대북정책 목표는 ‘평화적(平和的) 공존’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위하여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1973.6.23)과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1974.8.15)을 발표했다.
북한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71년8월6일 평양에서 있었던 캄보디아 노르돔 시아누크 친왕 환영 대회에서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정당ㆍ단체 및 개별인사들과의 접촉” 용의를 표명했다. 이 같은 김일성의 발언은 일체의 남북대화에서 남한의 ‘정부ㆍ여당 배제’를 절대화했던 북한의 종래 입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71년8월12일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북한이 이에 호응하여 남북간에 ‘대화’가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에 따라 남북간에는 정치적 대화 통로로 <남북조절위원회>, 인도적 대화 통로로 <남북적십자회담>이라는 두 갈래 대화통로가 개설되었다. 남북관계는 ‘대화 없는 대결시대’로부터 ‘대화 있는 대결 시대’로 이행(移行)했다.
남한에서는 1979년10월26일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의 시해(弑害)로 18년간의 ‘박정희 시대’에 비극적 종막(終幕)이 내려지고 같은 해의 ‘12.12 사태’, 다음 해의 ‘5.18 광주사태’ 등의 격동기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규하(崔圭夏)의 과도정권(1979년10월-1980년8월)을 경유하여 등장한 전두환 정권(1980-1988)을 상대로 북한은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략에 입각한 ‘평화통일’ 공세를 강화했다. 1980년10월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라는 이름의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북한의 대남 ‘평화통일’ 공세는 특히 ‘5.18 광주사태’를 전환점으로 남한 사회를 풍미(風靡)하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에 편승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남한에서도 역시 ‘통일방안’의 역제안(逆提案)으로 맞장구를 시도했다. 전두환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1982.1.12)이 그것이었다. 이때부터 남쪽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후속 정권들이 등장할 때마다 <민주화합민주통일방안>을 부분적으로 보완하여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노태우(盧泰愚) 정권(1988-1993)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9.11)과 김영삼(金泳三) 정권(1993-1998)의 <3단계 통일방안>(1993.5.24) 등이 이에 해당된다.
1980년대 후반기에 한반도의 내외정세에는 2차대전 종결 이후 최대의 격변이 진행되었다. 한반도 밖에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탈냉전(脫冷戰)’이 진행되었다. 1981년 출범한 미국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의 대소(對蘇) ‘신봉쇄정책’(New Containment)에 밀린 소련의 붕괴와 ‘레이건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명명(命名)된 대 폴란드 자유화 운동의 성공으로 동유럽 공산권의 와해가 시작되었다. 1985년에 등장한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 체제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여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을 타결시키고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Strategic Arms Reduction Talks)을 개시하는 데 동의했다.
1989년 루마니아 니콜라이 차우세스쿠(Nicolai Ceaucescu) 정권이 붕괴하고 동독주민들이 대탈출을 개시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동유럽에서는 동독의 붕괴에 의한 서독 주도의 독일 통일(1990), 소련 연방과 ‘와르샤와 조약기구’ 해체(1991) 및 동유럽 공산권국가들의 ‘탈공산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탈바꿈이 진행되었다. 1960년대로부터 1970년대에 걸쳐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은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1976)에 이은 덩샤오핑(鄧小平) 체제의 등장(1978)으로 마오의 교조주의(敎條主義)로부터의 이탈을 통한 ‘개혁ㆍ개방’에의 대장정(大長征)이 막을 올렸다. 전 지구적으로 ‘탈냉전’의 거대한 조류(潮流)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안 한반도 안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말로부터 1990년대 초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탈냉전’의 격랑(激浪)으로 배후 지지 기반이 함몰(陷沒)된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아(孤兒) 신세가 되었다. 북한은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300여만의 주민이 아사(餓死)하고 굶주린 수십만 주민이 중국으로 탈북하여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고난의 행군’을 경험해야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에는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했다. 이미 북한의 정치권력은 1980년대부터 그 축이 김일성의 맏아들 김정일에게로 옮아가 있었지만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정일은 권력세습을 공식화했고 북한은 김가(金家) 일문(一門)의 ‘공산왕조(共産王朝)’로 변질되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에게 1980년대는 국운상승(國運上昇)의 기간이었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에 이어 1980년 5.18 광주사태의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박정희 시대에 궤도가 깔아진 ‘조국 근대화’를 기치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력신장은 멈추지 않았다. 1988년의 하계 서울 올림픽은 그 같은 국운상승의 절정(絶頂)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여세(餘勢)를 몰아 ‘북방외교’를 밀어 붙였다. ‘북방외교’의 첫 수확은 해체 직전의 소련과의 국교정상화(1990)였고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1991)과 중국과의 수교(1992)로 이어졌다. 그 압권은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었다. 북한은 ‘남북고위급회담’ 수용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대한민국의 유엔가입은 물론 동시 유엔가입의 저지에 총력을 경주했지만 덩샤오핑의 중국이 대한민국의 손을 들어 줌에 따라 북한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그 동안 북한이 줄곧 우위(優位)를 유지했던 남북간의 국력 격차가 남한 우위로 역전(逆轉)하기 시작함에 따라 확보한 자신감에 더하여 국제적 ‘탈냉전’의 도도한 격랑에 편승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와 기동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랑군의 아웅산 묘지 폭파 테러(1984)와 대한항공 여객기 858기 공중폭파(1987) 및 동해안 잠수함 침투(1996, 1998) 등 이 시기를 얼룩지게 했던 일련의 과격한 폭력 행사가 보여준 것처럼 북한은 오히려 더욱 경직해진 태도로 한반도를 ‘냉전의 고도(孤島)’로 묶어 놓았다. 이와 함께, 북한은 비장(秘藏)했던 최후의 생존 카드로 꺼내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영변지역을 무대로 하여 비밀 핵무기 개발을 개시한 것이다.
북한이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호응한 것은 하나의 의외였다. 대한민국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추진한 것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기했던 남북관계에 관한 ‘포괄적 잠정협정’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반면, 북한의 목적은 딴 곳에 있었다. 북한이 이 회담에 호응한 것은 전형적인 ‘담담타타(談談打打)’ 전술에 따라 상황을 관리하는데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북한이 이 회담을 통해 챙기려 한 ‘부수입(副收入)’이 있었다. ① 대한민국의 유엔가입 노력을 좌절시키고, ② 팀스피리트 연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시키며 ③ 국가보안법 폐지 등으로 남한의 반공체제를 붕괴 내지 이완시키고 ④ 전향 거부 남파 간첩 출신 장기수(長期囚)들의 송환을 실현시키는 것들이었다.
돌연 부상(浮上)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압력에 대해 대처하기에 바빠진 북한은 1991년말 일단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이라는 ‘실익(實益)’을 챙기면서 그 대가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로 약칭)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비핵화선언>으로 약칭)이라는 2건의 중요한 합의문건을 타결시키는데 호응했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이 제기했던 ‘잠정협정’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하는 의외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곧 북한이 이때 이들 합의문건에 합의한 것은 ‘합의’ 그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지 ‘실천’과 ‘이행’에 뜻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두 합의문건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두 합의문건의 이행을 거부하고 남북대화를 중단시켰다.
3. 남한에서의 ‘左派’ 정권 出現과 왜곡되는 남북관계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엉뚱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3당 통합’에 의한 김영삼 정권이라는 완충기를 거쳐 1998년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성립으로 대한민국에 ‘친북ㆍ좌파’ 정권이 등장한 것이다. 2000년6월 김대중 대통령(당시)의 평양방문과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이 실현되었고 여기서 <6.15 남북공동선언>이 생산되었다. 김대중 정권과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정권은 <6.15 선언>을 근거로 일방적인 대북 경협을 추진하면서 “주어서 변화시킨다”는 논리를 내세워 ‘상호주의’ 원칙의 적용을 배제함으로써 격렬한 ‘퍼주기’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그의 ‘대북 퍼주기’는 북한의 ‘변화’는 끌어내지 못 하고 오히려 북한 독재체제의 연명(延命)을 도와주면서 ‘주는 쪽’인 남측으로 하여금 ‘받는 쪽’인 북측의 ‘볼모’가 되어 북의 주문에 따라 춤을 추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남쪽의 ‘친북ㆍ좌파’ 세력들은 <6.15 선언>의 성과로 남북간 인적 왕래의 확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허구(虛構)다. ‘6.15’와 ‘8.15’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을 명분으로 남과 북에서 진행된 각종 축전(祝典) 행사는 물론이고 금강산ㆍ개성 관광 등 대부분의 남북간 인적 교류와 왕래는 예외 없이 남쪽 사회의 주류(主流)인 ‘보수ㆍ우파’ 세력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제된 가운데 남한의 ‘종북(從北)’ 세력들이 북한의 ';대남사업 일꾼‘들과 어울리는 ‘잔치판’이 되어 “북의 주문대로 남이 길들여지는” ‘통일전선’의 무대(舞臺)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
남북관계의 이 같은 왜곡 현상은 2003년 이번에는 19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ㆍ‘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대한 충성 서약을 일상화(日常化) 하면서 북한으로부터 주로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제공되는 ‘민족해방 혁명’ㆍ‘민중민주주의 혁명’ 이론 학습을 통해 ‘종북(從北)’ 노선과 ‘좌파’ 이념으로 중무장한 ‘활동가’들인 소위 ‘386 세대’가 청와대를 장악한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노무현 정권 임기 5년 동안 ‘386 세대’는 정계는 물론 관계 및 재계와 학계, 그리고 방송ㆍTVㆍ신문 등 언론과 문화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대한민국 사회의 좌경화를 주도했다. 그 결과로 북한은 “과거 남조선 사회의 주류였던 ‘반공ㆍ보수’ 세력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친북ㆍ연공 세력이 남조선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구가(謳歌)하기에 이르렀다. 남쪽에서도 보수ㆍ우파 진영으로부터 비명이 터졌다. “공산화 통일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남한은 이미 공산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친북ㆍ좌경’ 행보(行步)는 2007년10월 임기 만료까지 4개월을 남겨두었을 뿐 아니라 후임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불과 2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무리하게 성사시킨 노무현의 평양방문 및 김정일과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권은 이미 17대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중이었던 11월 중순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강행하는 무리수(無理手)도 사양치 않았다. 남북 쌍방은 10월 평양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총론’의 차원에서 <10.4 정상선언>이라고 약칭되는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그리고 11월 서울 총리회담의 합의사항은 ‘각론’에 차원에서 <11.16 총리회담 합의서>에 각기 담아 내놓았다.
<10.4 정상선언>과 <11.16 총리회담합의서>의 내용은 황당했다. 이들 ‘합의서’들의 주요 내용은 크게 보아 3개의 보따리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보따리는 <6.15 선언>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는 ① 6월15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②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를 ‘통일지향적으로’ 정비한다는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보따리는 사실상 서해의 NLL(북방한계선)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내용이었다.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세 번째 보따리는 경제적 타당성과 재원 염출 방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대규모 대북 경협 프로젝트들에 관한 방만하기 짝이 없는 합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세 번째 보따리에는 ① 해주경제특구와 해주항 개발, ②개성-평양 고속도로와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③ 안변과 남포 지역의 조선단지 건설, ④ 2단계 개성공단 건설, ⑤ 단천지구 등 지하자원 개발, ⑥ 농업분야 종자생산과 가공시설 및 유전자원 저장고 건설 등의 현지 조사와 ⑦ 금강산 면회소 쌍방 사무소 준공, ⑧문산-봉동간 철도 화물 수송 개시 등 8개 프로젝트의 연내 실시와 함께 이를 위해 도합 14건의 기능별 남북회담들을 2007년 중에 소집한다는 합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이 세 번째 보따리에는 ①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분야에서 협력, ② 백두산 관광과 이를 위한 서울-백두산 직항 항공로 개설, ③ 2008 베이징 올림픽, ④ 이산가족 사업 확대, ⑤ 자연재해 대책, ⑥ 국제무대에서 민족이익과 해외 동포의 권리 및 이익을 위한 협력 등에 관한 합의를 담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무리한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으로 피날레가 장식된 노무현 정권의 ‘친북ㆍ좌경’ 행보로 인하여 극대화된 국가안보와 정체성에 관한 국민적 불안감은 2007년12월18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 결과를 통해 폭발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 결과는 1,150만표를 득표한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후보의 압승이었다. 표차는 이 나라 직선제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인 530만표였다. 표심(票心)의 의미는 명백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선거혁명’이었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정권교체’였고 그 뜻은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채택하라는 강력한 요구였다. 김대중 정권의 작품인 <6.15 선언>,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작품인 <10.4 정상선언>과 <11.16 총리회담 합의서>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 선언이기도 했다.
4. <6.15 선언>은 大韓民國 憲法을 위반한 不法文件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방법’과 ‘내용’이 국가 기본법인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3조의 영토 조항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역과 부속도서’로 명시함으로써 이 영토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주권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 법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보지 않고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보는 국가보안법의 법적 토대가 바로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은 제4조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표현으로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입장을 택했다. ‘통일’의 상대방이 되는 또 하나의 ‘분단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4조는 통일이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국가적 과제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통일의 ‘방법’은 ‘평화적 통일’이어야 하고 통일의 ‘내용’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보장되는 것이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물론 ‘통일한국’에서 보장되어야 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구체적 내용을 여러 조항에 걸쳐 열거해 놓고 있다.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제11조에서 헌법은 대한민국에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사회적 특수 계급도 인정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분단체제하에서의 대한민국에서는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통일국가에서도 ‘계급사상’이나 ‘계급관념’에 기초한 제도가 용인되는 것을 봉쇄한 것이다. 더구나 제8조에서 헌법은 “정당설립의 자유”와 “복수 정당”제를 보장”하면서도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배치되는 정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하여 ‘해산’될 것임을 분명히 해 놓았다.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제4조를 통해 통일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공산당의 존재를 불법화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헌법은 제14조에서 제23조에 걸쳐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은 물론 통일한국에서 보장되어야 할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열거하고 있다. ‘거주이전의 자유’(제14조), ‘직업선택의 자유’(제15조), ‘주거의 자유’(제16조), ‘사생활의 자유’(제17조), ‘통신의 자유’(제18조), ‘양심의 자유’(제19조), ‘종교의 자유’(제20조),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제21조), ‘학문ㆍ예술의 자유’(제22조), ‘재산권 보장’(제23조) 등이다. 그리고 헌법은 제10조에서 이 같은 기본권과 자유의 ‘불가침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 같은 헌법의 명문 조항들은, 이들 조항들이 사전에 개정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추구할 수 있는, 그리고 추구해야 하는, 통일에는 ‘방법’과 ‘내용’면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2000년6월에 있었던 김대중(남)과 김정일(북) 사이의 ‘남북정상회담’의 소산인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통일방안에 관한 합의가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내용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이든지, ‘높은 단계’이든지, 한반도에서 ‘연방제’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남북한이 각기 각자의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합되어 ‘중앙정부’는 ‘공동’으로 구성하고 남북의 두 ‘분단국가’는 각기 ‘주권이 없는 지방정부’로 격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경우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근본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사전에 개정되거나, 아니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가 사전에 해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라고 하는 ‘공산국가’가 대한민국과 함께 ‘연방’이라는 이름의 ‘통일국가’에 합류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명백하게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북한 땅에 실존하는 하나의 ‘주권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들만의 헌법과 또 그 헌법에 의거하여 “국가보다 상위의 정치실체”(헌법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지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로 자리매김이 되어 있는 <조선로동당>의 규약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계급주권론’(헌법 제4조: “주권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근로인민에게 있다”)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공산국가’“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북한이, 그 같은 내용의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이를 불허하는 대한민국 헌법이 여전히 발효 중인 상황에서,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통일국가’에 참가하는 내용으로 남한 정부와 ‘합의’하는 것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헌법 제69조에 의거하여 취임에 즈음하여 “국헌 준수”를 서약한 김대중 대통령(당시)은 북측의 김정일과 이 같은 ‘위헌적’인 내용의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형법 제91조1항의 ‘국헌문란죄’(“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따라서, <6.15 선언>과 이에 기초하여 이의 ‘재확인’과 ‘고수’를 다짐한 <10.4 정상선언> 및 <11.16 총리회담 합의서>의 해당 내용은 마땅히 헌법 제8조와 제111조의 관련 조항에 의거하여 <헌법재판소>(<헌재>)에 제소되고 <헌재>의 “헌법 불합치” 판결을 통해 무효화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에 의한 법적 구제는 <헌재법>이 제6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때로부터 90일 이내, 그 사유가 있은 날부터 1년 이내”라는 심판청구 시한이 경과함으로써, 기술적으로, 헌재 제소가 불가능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문제의 <헌재법> 제69조의 심판청구 시한에 대한 예외 조치를 인정하는 법 개정을 고려하는 것이 불가피해 졌다.
5. 南韓은 60년 체제경쟁의 勝者, 통일은 南韓이 主導해야
분단된 한반도는 대한민국에게 ‘대북정책’의 추진을 요구한다. ‘대북정책’은 두 가지의 정책 영역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통일정책’이고 또 하나는 ‘분단관리정책’이다. ‘대북정책’의 ‘종착역(終着驛)’은 당연히 ‘통일’이다. ‘통일’을 이룩해야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에 종지부(終止符)가 찍히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서 ‘통일정책’은 그 심장(心臟)에 해당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은 우리가 ‘통일’이라는 ‘종착역’으로 직행(直行)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과 북이 서로 완전히 상이(相異)한 ‘통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서 ‘통일정책’은 공란(空欄)으로 남겨져 있다. 대한민국이 추진하는 대북정책에는 ‘심장’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통일정책’이라는 ‘용어’는 있지만 이 정책은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국가’가 어떠한 ‘내용’의 국가기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떠한 ‘그림’도 그려내지 않는다. ‘통일상(統一像)’이 없는 것이다.
객관적인 수치를 가지고 본다면, 한반도 ‘통일’의 ‘그림’은 이미 그려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간에는 1948년의 국가분단 이후 64년간에 걸쳐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사활(死活)을 건 ‘체제경쟁’이 지속되어 왔고 이 ‘체제경쟁’은 이제 승패(勝敗)가 가려졌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선망(羨望)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성공한 국가’로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서 10위권에 진입해 있는 선진국이다. 반면, 북한은 세계 200여개 국가 가운데서 바닥을 헤매는 ‘실패한 국가’로 자력으로 주민들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수백만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내고, 수십만명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는 가운데 수십만명이 목숨을 걸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고 있는 ‘버림받은 나라’다. 그 가운데 2만5천여명이 죽음을 무릅쓰고 제3국을 경유하여 대한민국에 도착하여 자유를 누리고 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우리에게 강요된 ‘분단’의 시점에서 남의 경제력은 북에 비해 열세(劣勢)였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지하자원이 북한 지역에 편재(偏在)해 있었던 당시 남북의 경제는 ‘남농북공(南農北工)’•‘남경북중(南輕北重)’으로 북이 선도(先導)하는 상호보완형 구조였다. 1945년의 통계에 의하면 해방 당시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의 98%, 유연탄의 87%, 역청탄의 98%, 전력의 92%가 북한에서 생산되고 있었고, 1960년의 통계에 의하면, 비록 GNP는 인구 2천만의 남한이 1천만의 북한에 비해 19억 달러 대 17억 달러로 조금 앞서 있었지만 1인당 GNP는 94 달러 대 137 달러, 수출액은 3천3백만 달러 대 1억5천4백만 달러로 북한이 남한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분단으로부터 64년이 경과한 지금 남북한의 경제는 우열(優劣)이 역전(逆轉)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비교의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다. 2011년의 지표(指標)로 볼 때,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에 비해 무역총액이 170.8배(수출 199배, 수입 148.6배), 발전용량이 11.5배, 발전량이 23.8배, 원유수입량이 240.3배, 자동차 생산 대수가 1,164.3배, 강철 생산량이 55.9배, 시멘트 생산량이 7.5배, 비료 생산량이 5.8배, 화학섬유 생산량이 59배, 선박 보유 톤수가 18배로 GNP에서 38.2배, 1인당 GNP에서 18.7배로 압도하고 있다.
경제체제가 GATT에서 WTO 체제로 이행된 뒤의 세계에서, 개인과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경제주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유일한 가치는 ‘경쟁력’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오늘의 WTO 체제에서는 ‘경쟁력’이 있으면 생존을 유지할 수 있지만 ‘경쟁력’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도태되게 되어 있다. 과거 GATT 체제 때까지는 국가의 ‘보조금’으로 특정 부문의 부족한 ‘경쟁력’을 보충하는 것이 용납되었지만 오늘의 WTO 체제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과거 미국과 소련을 양대(兩大) 축(軸)으로 하는 냉전시대(冷戰時代)의 무한 경쟁 과정에서 공산주의 독재와 사회주의 경제는 원천적으로 ‘경쟁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도태된 것이 최근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이다.
우리의 ‘통일’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다른 문제가 있다. ‘자유’와 ‘인권’의 문제다. 오늘날의 세계는 국가간의 ‘국경(國境)’을 무력화시키면서 지구촌(地球村)의 차원에서 ‘자유’와 ‘인권’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은 당초 ‘건국(建國)’과 ‘호국(護國)’의 시기를 거쳐서 ‘산업화(産業化)’를 거치는 동안, 계속되는 북한으로부터의 안보(安保) 위협에 대처하는 등 혹독한 대가(代價)를 치르면서도, ‘민주화(民主化)’의 시대를 착실하게 열어 왔다. 세계 각국의 ‘정치 권리’와 ‘시민 자유’ 수준을 8개 그룹으로 분류한 Freedom House의 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정치 권리’ 수준은 최상위의 1그룹, ‘시민 자유’ 수준은 2그룹에 속하고 있다. 일본(日本)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극단적으로 대조적이다. 오늘날 남북한의 격차(隔差)는 경제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와 “당(黨)이 시키면 우리는 한다”는 구호에 의하여 통치되는 전체주의 사회인 북한은 비록 하나의 장신구(裝身具)에 불과한 헌법이 ‘권리’와 ‘자유’에 관한 조문들을 열거하고 있지만 이들 ‘권리’와 ‘자유’들은 원천적으로 ‘당’에 ‘헌납(獻納)’되어서 실제의 세계에서 개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북한은 북한판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무대(舞臺)일 뿐이다.
북한이 남북간의 ‘체제경쟁’에서 낙오(落伍)한 ‘실패한 체제’라는 것은 몇 가지 지표(指標)를 통하여 쉽사리 확인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평가기관들에 의하면, 북한의 ‘민주주의 지수’는 167개국 가운데 167위(의 “The World in 2007";), ';언론자유 정도‘는 195개국 가운데 195위(의 ”Freedom of Press 2008";), ';정치권리 및 시민자유 수준’은 193개국 가운데 ‘최악의 국가’ 8개국 중의 하나(의 “Freedom in the World 2008”), ‘실패국가 지수’는 175개 국가 가운데 15위( 2008년7/8월호)이며 생전의 김정일(金正日)은 177개국 지도자 가운데 ‘최악의 지도자’ 2위( 2008년7/8월호)로 랭크되어 있다.
한반도 분단 상황의 이 같은 현주소는 현실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통일’의 ‘시나리오’가 오직 한 가지뿐임을 명백히 해준다. 그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한반도의 ‘통일’은, 방법은 여하간에, 필연적으로 “북한이 대한민국 체제로 편입되는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自明)하다. ‘통일의 결과도 역시 ‘경쟁력’이 있는 것이라야 하는데 한반도 ‘통일’의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 가운데 ‘경쟁력’이 보장되는 ‘통일’은 오직 “대한민국 체제로 북한이 편입되는 통일”뿐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북의 두 체제 가운데서 ‘경쟁력’이 있는 체제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다. 따라서 ‘실패한 체제’인 북한이 ‘성공한 체제’인 대한민국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하여 이루어지는 ‘통일국가’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일정한 OJT(On-The-Job-Training•현장실습) 과정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경쟁력’이 북한 지역으로 이전되고 전체 한반도 차원으로 확산될 것임이 분명하다. 1990년의 독일통일 이후 구(舊) 동독 지역에서 진행된 상황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한반도 ‘통일의 ‘시나리오’는 그밖에도 두 가지를 더 상정(想定)할 수 있다. 첫째로 “대한민국이 북한 체제로 편입되는 통일”이고 둘째로 “남북의 두 체제를 절충하여 이룩하는 혼합형 통일”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통일’은 그 어느 것도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이유 역시 자명하다.
첫째로 “대한민국이 북한 체제로 편입”되면 그 같은 ‘통일’은 ‘내용’면에서 대한민국의 ‘성공한 체제’가 북한의 ‘실패한 체제’에 용해(溶解)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통일국가’는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한 오늘의 북한의 확대판(擴大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통일국가’는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 국가로 끌어 올린 그 동안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모든 가치들을 한꺼번에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남북의 두 체제를 혼합하여 이룩하는 통일”은 역사적으로 그 같은 일이 일어난 전례(前例)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그 현실성이 의문시(疑問視)되지만 그보다도 남북의 두 상이한 ‘체제’를 ‘혼합’할 경우 분명히 예상되는 결과는, 최소한, ‘경쟁력’ 부재(不在)를 무릅쓰고 북한이 참가하는 ‘통일’의 부분만큼은 확실하게 ‘경쟁력’을 상실하여 ‘통일국가’의 ‘경쟁력’을 잠식(蠶食)하게 될 것임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통일논의’에서는 반드시 유념(留念)해야 할 명제(命題)가 있다. 그것은 ‘통일’이라고 해서 모든 ‘통일’이 좋은 것은 아니며 ‘통일’에도 ‘좋은 통일’과 ‘나쁜 통일’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사를 통하여 우리에게는 몇 차례의 ‘분단’과 ‘통일’의 체험(體驗)이 있다. 과거 우리에게는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외세(外勢)의 힘을 빌어서 ‘통일’을 달성하는 과오(過誤)를 저지른 전력(前歷)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忘却)해서는 아니 된다. 이 같은 ‘통일’로 우리는 ‘통일’은 얻기는 했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뼈아픈 상실(喪失)은 국토의 상실이었다. 우리는 ‘통일’의 ‘대가’로 만주(滿洲)라는 광대한 영토를 상실해야만 했었다.
이제 새로운 ‘통일’을 도모(圖謀)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체험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통일’에 집착한 나머지 ‘분단’보다 못한 ‘통일’을 선택하거나 ‘통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분단’ 상태에서 성취한 발전과 번영 그리고 소중한 가치들을 상실하는 바보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통일정책’의 한계(限界)와 제약(制約)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한반도의 ‘통일’은 기필코 “북한이 대한민국 체제로 편입되는 통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그 같은 ‘통일’로 직접 가는 길은 없다. 북한이 완강하게 그 같은 ‘통일’을 수용할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실패한 체제’로 ‘경쟁력’을 상실한 북한 체제로 대한민국을 편입하겠다는 소위 “남조선혁명에 기초한 조국통일”이라는 이름의 ‘공산화 통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으로 인하여 ‘통일’로 직행하는 길은 현실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은 ‘통일’이 가능해 질 때까지 과도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안적(代案的) 정책 목표 설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분단의 평화적 관리”가 그것이다.
‘통일’이 실현되지 아니 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관리가 필요하다. 특히 1953년 6.25 전쟁이 ‘휴전(休戰)’으로 봉합되어 평화가 제도화되어 정착되지 못한 결과 ‘비전비화(非戰非和)’의 불완전한 평화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교전(交戰)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하여 휴전을 관리할 뿐 아니라 무력분규를 억지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보다 항구적이고 안정된 평화구조를 제도적으로 구축할 절대적 필요성을 제기한다. 또한 남북간에는 가급적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상호 불신 해소와 신뢰 조성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관계를 개선, 발전시켜서 궁극적으로 ‘통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평화적 분단관리”의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 ‘남북대화’다.
그러나, ‘통일정책’과 ‘분단관리정책’ 사이에는 상호 보완적이면서도 배타적(排他的)인 이중적(二重的) 상호관계가 존재한다.
‘통일정책’은 ‘북한의 변화’와 궁극적으로 “북한에 의한 대한민국 체제로의 편입”이라는 ‘현상변경(現狀變更)’을 요구하는 반면 ‘분단관리정책’은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라는 ‘현상유지(現狀維持)’를 요구한다. 우리 사회 안에는 “남북대화를 통하여 통일에 접근한다”는 논리가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는 ‘오해(誤解)’의 논리이다. 북한의 ‘체제세력’은 ‘분단관리’의 상대방이 될 수는 있지만 ‘통일논의’의 상대방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의 북한측 상대방은 ‘체제세력’의 독재에 의하여 박해받고 억압받는 ‘인민’, 즉 동포들이지 그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면서 국가분단, 민족분단을 심화시켜 온 범죄자(犯罪者)들인 ‘체제세력’이 아니다. 우리가 장차 이룩할 ‘통일국가’에서 북한의 현 ‘체제세력’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독일통일의 과정이 잘 말해 주고 있다.
‘통일’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오늘날 북한의 ‘체제세력’은, 독일의 경우처럼, ‘심판’과 ‘도태’의 대상이며 백보(百步)를 양보하더라도 그들의 ‘개전(改悛)’ 여하에 따라 ‘관용(寬容)’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김정일(金正日)에 이은 3대 째 권력세습(權力世襲)의 주인공인 김정은(金正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북한의 현 ‘체제세력’을 상대로 ‘통일’ 문제를 가지고 ‘대화’한다면 그것은 비단 지난 64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에서의 ‘독재’와 ‘억압’을 추인(追認)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앞으로 실현될 ‘통일국가’에서 그 같은 북한에서의 ‘독재’와 ‘억압’의 주역들에게 ‘주주(株主)’로서의 위상과 지분(持分)을 부여하고 나아가서 그 같은 ‘독재’와 ‘억압’을 ‘통일국가’에서 상당부분 수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치 않은 일이다.
‘통일’ 논의의 과정에서 북한의 현 ‘체제세력’에게 어떠한 역할을 허용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북한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어서 북한 동포들의 민주적 의사 결정 능력이 확보되었을 때 그들의 자율적, 민주적 결정에 맡겨야 할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북한 동포들이 현 ‘체제세력’에게 대한민국과 ‘통일’ 문제를 논의할 권한을 위임하면 우리는 그들을 상대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북한 동포들이 그들을 배척할 때는 북한 동포들이 새로이 위임하는 대표들을 ‘통일’ 논의의 상대역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5. 남북대화는 원점에서 새로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분단관리’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남북대화’에서 우리는 북한의 현 ‘체제세력’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체제 하에서는 그들이 북한의 ‘지역’과 ‘인구’를 실질적으로 통제 관리하고 있는 실권자(實權者)들이기 때문이다. 분단체제 하에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하지 아니 하고는 1953년의 휴전협정 체제를 관리하는 것과 함께 ‘남북관계’를 관리하고,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으로 시작되어 41년의 연륜을 헤아리게 된 그 동안의 ‘남북대화’는 종래 대로는 더 이상 지속시킬 필요도 없고 또 지속시켜서도 안 된다. 특히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의 ‘좌파’ 정권 기간 중 소위 “묻지 마” 식 ‘퍼주기’ 시비에 끊임없이 휘말렸던 대한민국의 대북정책(김대중 정권: ‘햇볕정책’ 노무현 정권: ‘대북포용정책’)은 “주어서 (북을) 변화시킨다”는 것으로 그 목적의 합리화가 시도되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개된 상황은 그와는 반대가 되었다. 북은 완강하게 ‘변화’의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북한은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선군정치’라는 이름의 군사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핵과 미사일 등 비대칭 군사력을 앞세운 무력강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역으로 ‘민족공조’의 기치 아래 남한사회의 ‘좌경화(左傾化)’와 한-미 안보동맹의 무력화(無力化)를 적극 획책하는 데 ‘남북대화’를 철두철미 이용해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 같은 상황이 초래된 데는 원인이 있었다. 남북관계의 왜곡이 그 원인이다. 지금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명백한 ‘불평등관계’다. ‘성공한 체제’인 대한민국과 ‘실패한 체제’인 북한간에 형성되는 관계다. 따라서 남북간에 이루어지는 ‘대화’는 마땅히 이 같은 ‘불평등관계’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고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당연히 대한민국이 ‘갑(甲)’, 그리고 북한이 ‘을(乙)’의 입장에 서서 대한민국의 주도하에 남북관계를 관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동안 진행되어 온 ‘남북대화’에서는 이 같은 관계가 역전되어 있다. 남이 ‘을’로, 북이 ‘갑’으로 둔갑해서 남은 북이 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모양새가 되어 있는 것이다. 대북정책의 올바른 추진을 위해서는 이 같은 왜곡된 상황의 근원적 시정이 필요하다. ‘남북대화’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남이 확실하게 ‘갑’의 입장에 서서 주도하는 ‘대화’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북이 이를 거부할 때는 남의 입장에서 왜곡된 대화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북이 수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이 일체의 대북지원을 획일적으로 중단하는 것이 되어서는 물론 안 된다. 그러나 대북지원은 ‘인도적 지원’과 ‘비인도적 지원’이 엄격하게 구분되고 또 ‘정부 차원’과 ‘민간 차원’이 차별화되어 실시되어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도적 지원’은 계속 허용되어야 하지만 개별적 사업이 ‘인도적 지원’의 기준에 합치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엄격한 사전 검증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관-민 합동 심의기구’의 설치ㆍ운용이 필요하다. 정부는 ‘인도적 차원’을 벗어나 정부 예산을 사용하는 정책적 대북 경제협력에 대해서는 우선 그 같은 지원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하는 확고한 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분명하게 천명하는 한편 사전에 북이 이를 수용하는 것을 조건화 하여 반드시 관철되도록 해야 한다.
그 동안처럼 회담을 위한 회담의 개최 또는 1회성 이산가족 상봉 실현 등의 대가로 북측이 요구하는 대로 응해 주거나 아니면 주로 정권세력이 정략적 목적을 위하여 제공하는 무분별하고 방만한 지원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정부가 대북 경제 지원을 통해 추구할 목표는 이를 통해 북한이 개혁ㆍ개방과 함께 ‘시장경제’를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의 인권을 개선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것도 대북 경제협력 제공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
비인도적 차원의 정책적 대북 경제지원은 철저하게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추진해야 한다. ‘상호주의’를 이유로 북한이 우리의 경제지원을 거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상호주의’를 이유로 북한이 경제협력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대북지원은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그 같은 경우에는 북한으로 하여금 혹독한 ‘금단증상(禁斷症狀)’을 경험함으로써 “반대급부 없이는 지원이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스스로 깨우치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대북 식량지원은 순수한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 정부 예산이 수반되는 ‘정부 차원’의 경우에는 반드시 북한 농민들의 증산(增産) 의욕을 제고시킬 수 있는 농업 개혁의 수용을 전제로 하여 제공되어야 한다. 이 같은 농업 개혁은 반드시 현재의 ‘협동농장’ 위주의 집단농(集團農) 방식을 지양하고 중국에서의 가족농(家族農)과 같은 개인농(個人農)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 내용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북정책은 ‘투명성’이 제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과거의 ‘남북협력기금’ 집행실태에 대한 ‘백서(白書)’가 발간되어야 하며 앞으로 기금의 관리는 통일부의 자의(恣意)에 계속 맡겨 두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관ㆍ민 합동의 심의기구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대북정책은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북한을 상대로 평화를 구걸한다”는 발상(發想)과는 단절되어야 한다. 내년에 정권교체를 통하여 새로이 등장할 정부는 안보정책과 대북정책을 밀접하게 연계시키는 문제를 검토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을 이끌었던 로날드 레이건 제40대 미국대통령의 대소 신봉쇄전략과 대 폴란드 ‘십자군 전쟁’을 벤치마크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평화는 1953년 이래 59년간에 걸쳐 한반도에서 효과적으로 전쟁재발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켜 온 평화보장 장치들의 훼손 없는 유지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조정을 통해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국가안보에 관해서는 ‘힘에 의한 평화’가 대북정책의 확고부동한 기조로 유지되어야 한다.
북핵 문제에 관한 새 정부의 입장은 전임 정부들로부터의 발상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 그 동안의 베이징 6자회담의 경과와 최근의 북한의 움직임은 김정은 체제로의 권력이동 후에도 북한의 부동의 입장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중단없이 계속하여 북한에 대한 국제적 “핵보유국 인정”까지 밀어 붙이겠다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북핵 문제는 결코 ‘민족공조’ 차원에서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결국 북핵 문제는 북한의 현 체제와 수명(壽命)을 함께 할 문제임이 명백해 지고 있다. 따라서, 새 정부의 대 북핵 정책은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과 협력하여 북한의 모든 가능한 군사도발에 대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확고하게 유지하는 가운데, 북한 체제의 변경이라는 보다 근본적 방법에 의한 근원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아서 이를 위한 구체적 전략과 전술의 개발에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남북적십자회담에 목을 매고 집착해 온 그 동안의 입장을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2000년 적십자회담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족상봉 참가를 신청한 12만8천여명의 이산가족 가운데 겨우 1,800여명이 금강산 상봉의 수혜자가 되는 동안에 5만명 가까운 고령자들이 이미 세상을 하직했고 그 동안의 페이스대로 이루어질 경우 남은 7만여명의 이산가족이 그 나마의 상봉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500여년의 세월이 소요되게 되어 있는 그 동안의 적십자회담 방식의 상봉은 이산가족의 고통을 해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산가족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그 나마의 이산가족 상봉의 반대급부로 대량의 양곡과 비료를 늑탈(勒奪)해 갈 뿐 아니라 이산가족 만남의 장소에 선별된 납북어부와 국군포로를 데리고 나와 납북과 억류를 ‘의거 입북’과 ‘자진 잔류’로 왜곡하는 정치선전의 무대로 이용하는 북한의 파렴치한 반동포적, 반인도적 행동을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된다. 새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에 관해서는 적십자회담에 더 이상의 미련을 거는 것을 접고 그 대신 이 문제를 유엔과 국제무대로 가지고 나가 ‘인권’ 문제의 차원에서 제기함으로써 국제적 압박외교를 통하여 북의 입장변경을 강제(强制)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6. 대북정책의 정책 영역은 四重的 - 分業體制가 필요하다
한반도의 남북관계에는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4중(四重)의 정책영역이 있다. 즉 ① ';통일';을 준비하고 추진하는 영역과 ②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영역, ③ 북한의 변화를 가속시키기 위한 ';대북공작';을 수행하는 영역과 ④ 북한에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영역이 그것들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가운데 정책영역으로서 ';통일정책';과 ';남북대화'; 간에는 상호 모순성이 존재한다.
';통일정책';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관리하는 정태적(情態的) 정책영역인 반면 ';남북대화';는 ';현재';를 관리하는 동태적(動態的) 정책영역이라는 엇갈린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정태적 정책영역과 동태적 정책영역을 뒤섞어 관리할 경우 당연히 정태적 정책영역은 동태적 정책영역에게 세(勢)로 밀려서 퇴색이 되고 마는 것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위험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남북대화’에 밀린 ‘통일정책’이 실종될 우려가 커지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그 같은 현상이 이미 ‘현실’로 등장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서는 지금 ‘통일정책’이 실종(失踪)된 상태다.
';통일정책';과 ';남북대화'; 사이에는 또 기능상의 차이도 존재한다. 전자가 정책연구와 교육홍보를 주 업무로 하는 반면 후자는 정책부처 뿐 아니라 현업부처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 통제하는 일이 주 업무가 된다. 더구나 그 동안의 ‘좌파’ 정권 기간 중에 ‘안보’와 ‘통일’이 경합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현실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관련된 문제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통일부로 몰아주어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되어 왔다. 이 결과로 심지어 대외적으로 은밀한 추진이 불가피하여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대북공작';에 관계된 일까지도 통일부가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현상까지 초래되고 있었다.
합리성과 과학성을 자랑하는 서독 사람들이 통독 이전의 시기에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분단 시기 서독은 ';통일정책';은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내독관계성>(<전독성>의 후신)에 전담시켰다. <내독관계성>은 우리의 <민족통일연구원>에 해당하는 <전독문제연구소>를 산하에 두고 순수한 통독정책 연구와 교육홍보 분야의 업무를 전담하여 수행했다. 반면 동독과의 협상, 즉 대화는 내각수상실에 <특수임무 담당 무임소국무상>을 두고 그 밑에 정부의 관계 부처에서 담당분야 국장급 간부들을 차출 받아서 하나의 태스크 포스로 ';협상 전담반';을 편성하여 대 동독 협상을 전담케 했다.
대 동독 협상 전담반을 수상실에 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양독 협상이 ';고도의 통치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수반인 수상이 이를 직접 책임지고 장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 하나는 양독 협상의 현안들이 정부 전반에 걸친 사안들이고 복수의 이해 당사 부처들이 관계되기 때문에 이들 복수 부처의 입장들을 조정 통제하기 위해서는 수상실의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는 별도로 동독에 대한 ';공작'; 사안들은 당연히 정보전담 부서인 BND(연방정보부)의 소관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대북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선을 수습하고 예방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를 차별화하여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통일부는 ';통일정책';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남북대화';를 전담하는 별도의 부서를 조직ㆍ운영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통일부의 조직과 기능 및 인적 구성을 바꾸어서 서독의 <내독관계성>이 했던 것처럼 통일부는 통일정책의 연구와 개발, 그리고 이에 관한 교육과 홍보 업무를 전담하게 해야 한다. 통일부는 ‘남북대화’에서 손을 떼고 ‘남북대화’는 다른 방법으로 관리해야 한다. 서독은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협상 전담반';을 수상실에 두었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중심제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협상 전담반';이 청와대에 설치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현재 통일부 산하에 있는 <남북회담본부>를 태스크포스로 개편하고 청와대로 이관시켜 대통령 직속 기구로 전환시키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국무위원 급의 책임자(예컨대, 대통령특별보좌관)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총괄하게 하는 방법이 고려될 수 있다. 아니면, 국무총리 산하에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하는 <남북회담 담당 무임소 국무장관>을 두고 그로 하여금 태스크포스로 개편된 <남북회담본부>를 배속 받아서 ‘남북대화’를 전담하게 할 수도 있다. 정부의 관계부처와 <국가정보원>(<국정원>)은 그들의 전문성을 가지고 <남북회담본부>에 참여하면 된다.
7. 終末이 가까워지는 북한 체제 - ‘急變事態’ 대비 ‘비상계획’ 서둘러야
물론 북한의 변화 촉진을 위한 ';대북공작';에 관련된 업무는 당연히 국가정부기관인 <국정원>의 고유한 업무로 은밀하게 추진되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통일정책';의 영역과 ';남북대화';의 영역, 그리고 ';대북공작';의 영역이 각기 전문성에 입각한 분업체제를 구축하게 될 때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체제는 효율성의 극대화가 가능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날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것은 제4의 대북정책 영역이다. 북한에서 1980년대 말 루마니아와 동독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북한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 본다면 북한의 종말(終末)이 결국 ‘급변사태’의 형태로 도래(到來)하고 그 시기도 상당히 앞당겨질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우선 북한 핵문제의 ‘6자회담’을 통한 해결 전망이 날이 갈수록 어두어지고 있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6자회담’의 양상은 ‘6자회담’이 시작된 후 6년이 경과한 지금의 시점에서 미국과 북한은 여전히 서로 다른 핵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말하는 것은 “북한의 비핵화(denuclerization)”인 반면 북한은 여전히 “조선(한)반도의 비핵지대화(nuclear free zone)”을 가지고 이야기할 것을 고집하고 있으며 북한은 이 같은 입장대립이 지속되는 동안을 이용하여 핵무기 개발을 계속함으로써 ‘핵 보유국’으로서의 위상(位相)을 공인 받으려 하고 있다.
북한의 이 같은 자세가 지속되는 한 ‘6자회담’의 전도(前途)는 암담하다. 금년에 출범한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이 같은 북한의 입장을 결코 수용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해 왔다. 더구나 최근의 거듭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 폭발 실험 강행 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의 위상 동요는 ‘6자회담’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은 앞으로 미국을 상대로 추가적인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 재개 등의 ‘벼랑 끝’(brinkmanship) 전술로 압박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반응은 미국이 그 같은 북한의 협박 전술에 굴복하거나 타협할 가능성이 희박함을 보여 주고 있다.
더구나, 미국의 경우 오는 11월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저지하려 하고 있는 미트 롬니 후보의 공화당은 집권 시 더욱 강경한 대북정책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계속 추진하거나 도발행동을 취할 경우 보상 대신에 응징을 가할 것“이며 ";북한과 거래하는 모든 민간기업과 은행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북핵을 완전히 제거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국은 ‘6자회담’의 불은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면서도 이와 병행하여 주로 유엔 위주의 국제적 협력을 통한 대북 제재(制裁)의 수위를 점차 높여 감으로써 김정일 체제를 압박하여 북한의 체제변화를 강요하는 쪽으로 대북 전략의 방향을 틀어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에서 일어날 ‘급변사태’에 대해서는 주변 여러 나라도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에게 북한은 그 동안의 특수한 혈맹관계(血盟關係)에 더하여 중국의 가상(假想) 적대세력(敵對勢力)과의 직접적 접경(接境)을 방지하는 완충지대(緩衝地帶)로서 대단히 민감한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통일외교는 서독이 구 소련을 주 대상으로 하여 벌였던 ‘2+4’ 외교 노력에 못지않은 정력을 경주하여 주로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특단의 노력을 전개해야 하리라는데 이견(異見)의 여지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전개될 경우에 대한 대비책으로 일정기간 북한 지역에 대하여 과도적인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그 가운데서 우선 유엔안보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미, 영, 중, 러, 불)과 대한민국이 공동으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실시하는 가운데 중국이 주도하고 대한민국이 동참하는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안보 차원의 우려를 해소하는 동시에 향후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한반도 통일의 주체가 되는 상황전개와 관련하여 한-중 양국간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해와 신뢰가 축적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한 연구가 조야(朝野)에서 시급하게 진행되기를 희망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