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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민수기의 말씀 21,4-9>
그 무렵 이스라엘은
4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 복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8,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조급증에 대한 처방>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민수기 21,4)
오늘 우리가 들은 민수기는 조급함에 대해서 성찰케 합니다.
조급함은 죄일까?
아니면 그저 성격일 뿐일까?
조급한 성격이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그저 성격일 뿐이라면 죄가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조급함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조급함이 이렇게 죽음에로까지 몰고 간다면 조급함을 그저 성격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조급함 때문에 하던 일을 망치거나 회사가 망하고, 조급함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음에로 내몰 수가 있지요.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조급함은 성격입니까, 부덕함입니까?
성격적으로 조급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조급함은 부덕함의 소치입니다.
같은 나인데도 어떤 때는 조급하고, 어떤 때는 느긋하잖아요?
제 생각에 조급함은 욕심의 산물입니다.
욕심이 크면 클수록 조급함은 심하고, 그런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느긋하지요.
며칠 전 양성을 담당하는 형제들과 술 한잔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양성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피양성자들에 대한 걱정이 매우 크고 그래서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을 보면서 30대 때의 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때의 저는 아주 조급하여 형제들을 기다려줄 줄 몰랐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방황과 고뇌를 거쳐 도달한 상태를 형제들이 1, 2년 내에 도달하기를 욕심부리며 죄고 닦달을 했고, 그래서 저는 그런 저를 경계하기 위해 줄탁동시(啐啄同時)를 경구로 삼아 자주 자신에게 되뇌곤 하였지요.
아무튼 조급하지 않으려면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 곧 마음의 가난이 관건인데,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지요.
욕심을 이룰 수 있는데도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민수기는 스스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죽여주시고 살려주시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뱀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하여 욕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이시고, 다른 모든 욕심 버리고 오직 살기만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살리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이런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진정 이런 극약처방을 통하여 우리를 가난하게 하시고 당신께 순종케 하시며 우리의 욕심을 신심(信心)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이런 인생역정을 거친 우리는 이제 조르지 않아도 주시는 은총의 하느님을 믿고,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주시는 하느님을 믿으며, 고통을 주시어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죄를 지었어도 그 사랑 변치 않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 작은형제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엔 자녀는 아버지가 속한 곳에 속하게 된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입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요한은 그들이 땅의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래서 땅에 속해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향하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은 땅의 아버지에 묶여 땅의 욕망을 추구하며 죽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8,44)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느 아버지에 속해 있고, 어느 아버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 ‘욕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하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왜 필요한지 잘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아버지가 속한 세계로 향하고 그 안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보통 자녀에게 인간임을 믿게 하고 인간으로 생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남에게 무언가를 내어 줄 줄 알아야 살아갈 수 있는 수준으로는 들어 높이지 못합니다.
어머니에게만 자라면 아기는 필연적으로 매우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터넷 카페에 나와 있는 사례를 소개합니다.
“외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할머니(78·서울 관악구).
남편의 죽음은 살림만 챙기던 할머니를 아무런 준비 없이 냉정한 세상으로 내몰았다.
가진 기술이나 밑천이 없던 할머니는 파출부를 전전했다.
그렇지만 하나뿐인 아들 교육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 흉을 볼까, 혹 자신의 가난이 그대로 대물릴까 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끼니도 걸렀다.
재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포기했다. 아들만을 ‘삶의 희망’으로 삼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살았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했다.
아들이 결혼한 뒤에도 할머니는 입주파출부 생활을 계속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사치란 생각에 조금이라도 목돈이 생기면 아들의 사업자금에 보탰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돌아온 아들 가족의 태도는 냉담했다.
파출부도 힘에 부쳐 1년 전부터 어쩔 수 없이 아들 집으로 들어갔지만, 손자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예 밥도 같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더 나이 들어 병이라도 걸리면 양로원에 버리겠다.’라는 악담도 서슴지 않는다.
김 할머니는 ‘지금까지 자식 하나만을 위해 내 앞으로 된 통장 하나 만들지 못하고 살았지만 이런 대우를 받으니 너무 억울하다.’라고 하소연했다.”
[출처: ‘자녀에게 올인하는 부모들’, 다음 카페, ‘인천만수초등학교38회’]
김모 할머니가 아들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들이 그렇게 어머니에게 모질게 대하게 된 것일까요?
할머니의 잘못은 없습니다.
다만 아들이 나누는 본성을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데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무엇을 직접 주지 않고 어머니를 통해 줍니다.
따라서 자녀는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과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을 다르게 느낍니다.
어머니에게 받는 사랑은 자기 자녀를 생존하게 만드는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를 내어주는 사회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 보은할 줄 모르는 저 자녀는 사회생활도 원만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세상으로는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는 사랑도 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끝까지 알려주시려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아버지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예수님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삶은 그야말로 비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히틀러의 나치가 만들어낸 것 중의 하나가 ‘아기 공장’(레벤스보른)입니다.
아리아인들의 혈통만 남긴다는 신념으로 나치는 금발에 장신, 그리고 푸른 눈을 가진 친위대원과 미혼의 여성들을 말 그대로 ‘교배’시켜 아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나치의 선동에 넘어갔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철저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 이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비극 자체입니다.
아기는 먼저 어머니를 만나고 집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며, 아버지를 만나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믿고 따르는 아버지의 세상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아드님을 내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래야 하늘 나라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국어 공부를 잘한 사람은 ‘주제 파악’을 할 줄 알고, 산수 공부를 잘한 사람은 ‘분수’를 알며, 지리 공부를 잘한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고 말합니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행함에 있어서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며 명의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주님과 더불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과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고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갈라 2,20)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로마 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
(이사 41,10)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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