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분배가 끝난 지 반년이 지난 12월 말, 윤성일에게는 6개월이 6년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변화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사건도 많았기 때문이다. 먼저 아버지 윤정수의 지시에 따라 한남동 저택에서 나와 파주의 전원주택으로 분가했다. 윤성일에게는 전세희한테서 멀어지는 것만으로도 분가가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는 강희나가 다시 미국으로 떠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워싱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 눌러 살 것이라고 했다. 윤성일에게는 전화로 인사를 했는데 부담은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분위기가 가벼웠다. 사금융 업무로 바빴던 윤성일은 공항의 환송 모임에도 나가보지 못했다. 그렇다. 윤성일은 윤정수한테서 2천5백억 가량의 재산을 상속 받은 것이 아니었다. 윤정수는 윤성일에게 비밀 사금융 7조8천억의 재산을 물려준 것이다. 공식 분배액까지 합하면 8조가 된다. 7조8천억은 현금 자산이다. 쉴 새 없이 회전되는 현금인 것이다. 현금 위치는 외국계 은행, 한국에 있는 수십 개 은행의 계좌에도 넣어져 있고 대기업 사주들이 차용을 해갔거나 증권, 주식에 투자되어 있기도 했다. 증권, 주식에 들어간 자금은 당분간 윤정수가 맡기로 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윤성일이 장악하고 있다. 윤성일과 박상호 둘이서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단순 용역은 수십 개 조직을 운용한다. 오늘, 파주의 전원주택 별채 응접실에서 윤성일과 마주앉은 사내는 정보용역을 맡은 최기용, 40대 중반인 최기용은 시킨 일만 하는 터라 윤성일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윤정수 때부터 그렇게 버릇을 들였기 때문이다. 최기용일 희멀건 얼굴을 들고 말했다.
“예, 김윤영을 만난 여자가 김가영이 맞습니다.”
윤성일은 시선만 주었고 최기용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봉투를 받은 윤성일이 안에서 사진을 꺼내 탁자위에 펼쳤다. 사진은 여러 장이다. 숨을 들이켠 윤성일이 사진을 차례로 보았다. 김가영이다. 김가영이 웃고 있다. 김가영이 걸어간다. 김가영이 슈퍼에서 채소를 사고 있다. 김가영이 차를 마신다. 김가영 옆에 여자 하나가 있었지만 윤성일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달라졌다. 세련된 옷차림, 승용차에서 내리는 장면도 있었는데 고급 외제차다. 이윽고 윤성일이 사진에서 시선을 떼었을 때 최기용이 말을 이었다.
“사는곳은 일산의 오션아파트 107동 1602호입니다. 70평형으로 가장 고급형이지요.”
“....”
“혼자 삽니다. 아니.”
윤성일은 최기용의 얼굴에 희미하게 번져가는 웃음기를 보았다.
“일주일에 엿새는 혼자 삽니다. 하루는 남자가 와서 자고 갑니다.”
“....”
“남자 신원파악은 쉬웠습니다. 승용차가 영국제 록스웰이어서요. 차적 조회를 해보니까 동명건설의 장기태 회장이었습니다.”
“....”
“김가영은 오션아파트에서 10개월째 살고 있습니다.”
“수고했어요.”
윤성일이 말하자 아직 보고 할것이 남았던지 입을 열었다가 닫은 최기용이 서류봉투를 앞으로 밀었다.
“나머지는 보고서에 다 적혀 있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윤성일도 탁자 밑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최기용에게 내밀었다. 용역비다.
최기용이 나가고 혼자가 되었을때 윤성일의 시선이 다시 사진으로 옮겨졌다. 김가영의 표정은 밝다. 그것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졌으므로 윤성일은 한동안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1년 4개월, 그리니까 16개월 만이다. 윤성일이 봉투 안에서 다시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 탁자위에 펼쳤다. 50대의 남자와 함께 김가영이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남자 사진만 따로 있었는데 중후한 분위기의 사내였다.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진도 있다. 김가영이 활짝 웃고 있다. 이윽고 윤성일이 서류를 꺼내 보고서를 읽는다.
“아파트 주민 말에 의하면 김가영은 장기태의 정부, 즉 숨겨진 여자라고 함. 주민과 교류는 없으나 관리실 및 경비원, 청소원들한테는 인기가 좋음. 예의 바르고 명절 때면 꼭 인사를 한다고 함.”
윤성일이 다시 우두커니 김가영의 사진을 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빈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석상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쳐다만 보았다. 그동안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으나 단 하루도 김가영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김가영을 다시 만나는 것이 생의 목표이기도 했던 윤성일이다. 16개월이 기다리는 동안에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이렇게 찾고 난 현실에서 보니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윤성일이 혼잣말을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구나.”
상대가 건설회사 회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모든 의혹이 술술 풀려졌기 때문에 최기용이 설명을 안 해줘도 될 정도였다. 이것도 윤성일이 예상했던 수백 가지의 경우 중 하나였기도 했다. 이윽고 윤성일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머리까지 기대었다. 눈을 감았더니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3시경이다. 하늘이 흐려서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휘날릴 것 같은 날씨였다.
전세희가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오명화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너, 여기 좀 앉아.”
오명화의 기색이 심상치 않았지만 전세희는 시큰둥했다. 가방을 소파 위로 던진 전세희가 밍크 재킷은 반대쪽에 벗어 던져놓고 오명화의 앞쪽에 앉았다. 그러더니 똑바로 시선을 준다.
“왜?”
“너, 열흘 동안 어디 있었어?”
오명화의 목소리는 굳어져 있다. 치켜뜬 눈이 번들거렸고 찻잔을 쥔 손에 힘이 실려졌다.
“내가 전화 했잖아? 제주도라고?”
전세희가 뱉듯이 말했지만 시선을 받지 못하고 외면했다. 오후 6시 반, 전세희는 열흘 만에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석달 전에는 허락도 받지 않고 한 달 동안 일본에서 놀다왔고 지난달에는 이주일 동안 중국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양상이 다르다. 전세희는 오명화의 침실에서 현금 3천만 원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외국에 나갔을 때 카드로 몇 백만 원씩 긁고 다녔기 때문에 카드를 정지시켰더니 이젠 도둑질까지 했다.
“여권 이리 내.”
오명화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확인해야겠다.”
“웃겨, 엄마가 무슨 경찰이야?”
“그렇지 않아도 경찰에 신고할 거다.”
“해봐, 그럼.”
벌떡 일어선 전세희가 오명화를 노려보았다. 눈을 치켜뜬 얼굴이다.
“그 금고에 현금, 수표가 한 1백억쯤 들었더구만, 그 돈이 탈세한 돈인지 뭔지 경찰에다 밝혀야 할 테니까.”
“이 미친년.”
마침내 오명화의 분이 폭발했다. 들고 있던 인삼차 잔을 전세희에게 던졌지만 빗나갔다. 대신 인삼차가 전세희의 손등에 뿌려졌다.
“앗 뜨거!”
바락 소리친 전세희가 오명화를 노려보았다.
“왜! 나한테는 돈이 아깝니! 그 많은 돈 누구한테 줄 건데! 또 만들어놓은 자식새끼 있니!”
“이 더러운 년! 넌 내 씨가 아냐!”
벌떡 일어선 오명화가 전세희에게 달려들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놔! 이년아!”
전세희가 같이 오명화의 머리칼을 쥐었지만 기세에서 밀렸다. 그러나 소리는 더 커졌다.
“놔! 이 후처 년아!”
머리칼을 휘두르던 오명화가 탁자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어 전세희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악!”
뒷머리를 강타당한 전세희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집안이 떠나갈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엄살이다. 그때 응접실로 뛰어들어 온 가정부와 운전사에게 오명화가 말했다. 서슬이 퍼렇다.
“이년을 방안에 가뒤놓고 밖에서 못나가게 해요. 핸드폰도 빼앗고, 한 발짝도 못나가게 하란 말야!”
다행히 윤정수는 집에 있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대영그룹의 유대영회장이 앉은 채였지만 허리까지 꺾어 절을 하자 옆에 앉은 상사사장 유진수도 따라서 절을 했다. 오전 11시20분, 파주 저택의 응접실 안이다. 윤성일의 눈짓을 받은 박상호가 옆에 놓인 가죽가방을 들어 유대영 앞에 놓았다. 묵직한 부피가 느껴지는 가방이다.
“무기명채권입니다. 확인 해보시지요.”
유대영이 가방을 열더니 유진수에게 넘겨주었다. 유진수는 유대영의 장남으로 대영그룹의 후계자다. 가방에서 채권 뭉치를 꺼낸 유진수가 한 장씩 세기 시작했다. 10억짜리 1백장, 1백 억짜리가 45장이다. 5천5백억이다. 이윽고 머리를 든 유진수가 윤성일을 보았다.
“맞습니다.”
그러자 유대영이 윤성일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제는 박상호가 봉투안의 서류를 꺼내 확인했다. 대영그룹의 주식 양도서류다. 이자까지 포함해서 6천3백억에 상당하는 그룹사의 주식 양도 서류는 이미 양측 변호인단의 검토와 인증까지 받아놓은 상태다. 서류를 확인한 박상호가 윤성일에게 말했다.
“확인했습니다.”
그때 유대영이 웃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윤사장하고 처음 거래를 하게 되었군요. 앞으로 잘 부탁합시다.”
따라 일어선 윤성일이 유대영이 내민 손을 잡았다. 유대영은 아버지 윤정수의 고객이었던 것이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윤정수의 사금융은 해단 기업의 최고경영자하고 직접 거래하는 방식인 것이다.
유대영을 배웅하고 돌아온 윤성일이 응접실로 들어설 적에 박상호가 말했다.
“사장님, 대한산업 박회장한테서 추천 할 곳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요.”
창가로 다가간 윤성일이 몸을 돌려 박상호를 보았다.
“어딥니까?”
윤정수는 규칙을 만들어 놓았는데 철저한 회원제였다. 회원이 아닌 기업체는 회원사의 추천과 보증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회원사인 대한산업 사주 박민수회장이 추천한다면 믿을 만 하다. 박상호가 수첩을 꺼내 읽었다.
“동명건설의 사주 장기태 회장입니다.”
“....”
“3천억을 단기 6개월로 융자받고 싶다는데요. 6개월 10%이자로 하고 주식과 부동산을 담보로 맡기겠다고 합니다.”
“....”
“박회장이 보증을 선다고 했으니 안전장치가 된 셈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때 머리를 든 윤성일이 말했다.
“동명건설 재무상태와 사주의 사생활까지 먼저 철저하게 조사를 하세요.”
박상호가 응접실을 나갔을 때 윤성일이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두 손을 창틀에 짚고 선 윤성일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연말연시가 지나 3월이 되었다. 앞쪽 산기슭의 개나리가 노랗게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잔디밭에 푸른 싹이 보인다.
“이렇게 인연이 닿는구나.”
창밖을 향한 채 윤성일이 혼잣소리로 말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돈이 과연 돌고 돌아서 인연의 끝까지 닿는가보다.”
그러고는 입을 꾹 다문 윤성일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밖을 보았다. 최기용한테서 김가영의 근황을 들은 것이 벌써 석 달이 되었다. 그 석 달은 지난 16개월보다도 더 길고 길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윤성일은 최기용을 시켜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움이 사라진 대신 분노가 그 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던 것이다. 분했다. 아무리 생활이 각박했다고 해도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창녀촌에서 몸을 파는 여자보다 더 쉽게 인생을 살려는 형태였다. 사진에서 본 김가영의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악취가 풍겨나오는 것 같았다. 김가영을 생각하면서 보낸 16개월이 아까워서 이가 갈렸다. 가치 없는 여자를 그토록 그리워한 자신이 저주스럽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미 사진은 갈기갈기 찢었고 바꾼 핸드폰에 애써서 옮겨 담은 김가영의 모든 기록까지 삭제시켰다. 김가영은 편하게 살려고 몸을 판 경우였다. 그 내막이 얼마나 처절했건 간에 결과가 증명해준다. 그래서 연락을 끊고 잠적을 한 것이다. 이것이 김가영의 본색이다. 인간은 제 주변의 인연을 미화시키려는 본능이 있다. 인연을 합리화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저렇게 뻔뻔하게 웃고 있는 김가영이 바로 그렇다. 이미 다 잊고 저렇게 사는 김가영을 그리며 살았던 16개월을 어떻게 보상 받는단 말인가? 차라리 찾지 말 것을 잘못했다는 생각이들 정도였다.
“자, 이제는 그 분함도 끝나게 된 것 같다.”
이윽고 눈의 초점을 잡은 윤성일이 말했다.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은 윤성일이 말을 이었다.
“운명이 저절로 정리를 해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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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기다렸던 글 잘읽어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굿,,즐감,,,
즐감요~
^^
감사히 잘봤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