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연신 드나들면서 스노클링을 비롯하여 물놀이에 나선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는 바다. 바닥이 투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깨끗한 바닷물은 이방인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맑다고 소문난 태평양 한복판 하와이나 북극해 노르웨이 앞바다보다 더 청정한 때문이다. 배꼽까지 물에 담근 채 고개를 들어 수평선을 바라보자 바닷물은 코발트빛과 녹색을 함께 띠었다. 바로 이곳 여행상품에 나온 광고카피 ‘청록색 바다’ 그대로였다. 섬에 관광객들이 몰리는 것도 이처럼 맑은 바닷물에 매료된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투명한 물속을 무리지어 유영하는 송사리들조차 때깔이 달라 보이면서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맑은 물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라 잠시 혼란스러웠다. 물고기를 먹이로 살아가는 갈매기들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이곳 바닷물이 지나치게 청정한 때문일 것 같았다. 선착장에서 섬으로 들어가는 10여km 구간엔 수상가옥 마을도 있었다. 섬 앞으로 제법 길게 늘어선 수상가옥들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를 어떻게 처리하기에 바닷물이 이토록 깨끗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탄 제트보트가 섬을 찾아가면서 수상가옥 앞을 지날 때 아내는 옆에서 바닷물 오염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곧 쓰러질듯 위태해 보이는 낡은 수상가옥들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속으로 '수상가옥으로 오염이 발생한다면 정책적으로 이주시키겠지' 하면서도 말레이시아도 지구촌 곳곳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의 달러 수입만은 뿌리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해공항에서 코타키나발루로 향하는 저가항공 비행기는 200여석 좌석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설날연휴에 적도 부근을 찾아 남국의 정취를 맛보기 위해 나선 여행객들이었다. 탑승객은 대부분 청장년들이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이미 한두 번씩은 코타키나발루를 체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린 코로나에 발목이 잡히지 않아 가능했던 해외나들이였다. 코타키나발루란 긴 이름약칭 KK을 처음 들은 건 30여 년 전이었다.
KK를 함께 여행하자고 권한 사람은 대한산악연맹에도 관계하던 기업인으로 그의 욕심은 동남아 최고봉 키나발루산을 오르는 것이었다. 직장에 매인 몸은 갑자기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단념하지 않고 채근했었다. 하지만 결국 마음만 설레게 했을 뿐 동행하지 못하고 끝난 KK였다. 그러고 얼마 후 이번엔 유치원을 마친 손주를 KK로 어학연수 보냈다는 소식을 알려온 수필가가 있었다.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KK로 영어연수를 보냈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KK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가끔씩 KK에 관한 뉴스가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때마다 더 늦기 전에 꼭 한 번 KK를 다녀오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가 아닌지라 생각만 그랬지 KK행에 나서기란 쉽지 않았다. 코타키나발루 지명은 ‘바람 아래 고요한 땅’을 의미한다니 제법 문학적인 느낌도 갖게 된다. 하지만 KK는 영국과 일본의 지배를 받은 뼈아픈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KK의 옛 이름 제셀턴Jesselton도 영국 식민지 시대 산물이고 길가 곳곳엔 일본식 공동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6천km를 5시간 반 동안 날아가야만 도착하는 KK. 공항에서 우리 일행을 처음 만난 건장한 청년가이드는 버스로 자정이 가까운 어둠속을 달리면서 “여러분들에게 특별선물로 젊음을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KK가 한국보다 1시간 늦은 시차를 기억시키는 방법으로 그는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제셀턴선착장은 다양한 인종들의 전시장 같았다. 모두들 배를 타거나 내리는 사람들인데도 반팔소매에 반바지 그리고 구명조끼를 착용하거나 운반하는 사람들까지 바쁘게 오가고 있어서 마치 해수욕장 같은 분위기였다. 자세히 보니 구명조끼를 나르는 남성들은 검거나 흰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말레이시아는 코로나 비상사태에 돌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KK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제셀턴선착장이었다. 규모나 짜임새가 뉴욕이나 홍콩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면세점을 비롯하여 올망졸망한 커피숍과 초콜릿 아이스크림 매점들 그리고 넓은 홀을 가진 식당까지.
KK관광에서는 툰쿠압둘라초대총리 이름만 해양국립공원 5개의 섬Gaya, Sapi, Manukan, Mamutik, Sulug 투어가 빠지지 않는다. 제셀턴 선착장에서 프라이빗 보트로 10분이면 닿는데 우린 가장 큰 가야섬을 찾았다. 가야섬은 평화롭고 조용한 휴양지로 정평이 나있었다. 아름다운 바다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묻어나는 리조트까지 갖추어 우리나라에서는 신혼부부가 많이 찾는 곳이라 했다. 열대의 자연환경을 갖춘 섬에선 각종 해양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는데 바닷물만큼이나 깨끗한 백사장도 붙어 있었다. 우리 부부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닷물로 들어가 스노클링을 시작했다.
가야섬에서 200여m 거리에 위치한 사피섬도 아름다워보였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두 섬을 연결한 짚라인 Zip Line이 있었다. 이용하는 손님은 보이지 않았고 가는 강선은 심하게 부식된 상태였다. 이용객이 엉덩이를 붙이고 공중을 달렸을 철재 안장은 새빨갛게 녹슬어 있었다. 그때 작은 악어를 닮은 파충류도마뱀가 슬며시 나타났다. 손님을 만났으니 먹을 것을 달라는 것 같았다. 이곳 짚라인 구간 바다를 수영으로 건넌 만능재주꾼 김병만 영상이 <연예프로그램>에 방영되면서 국내에 널리 알려진 가야섬과 사피섬이다. 그때 방송이 나가자 곧바로 논쟁하기 좋아하는 국민들의 본성이 드러났다.
가야-사피 두 섬 중에서 어느 쪽 물이 더 깨끗하냐를 놓고 네티즌들이 충돌했던 것. 하나의 바다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출렁대면서 몸을 섞는 바닷물이 맑기에서 차이가 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싶다. 이와는 달리 가야섬은 한국인들이, 사피섬은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까지 무슨 대단한 일처럼 소셜미디어는 떠벌였다. 오늘 가야섬엔 명절을 맞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외에도 이슬람을 신봉하는 동남아인들과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양인들까지 다양했다. 일행이 식사를 막 끝내고 식탁의자에서 쉬고 있을 때 탁구공과 정구공만한 나무열매가 공중에서 연달아 떨어졌다.
열매는 다행히 사람을 피해 떨어졌지만 머리에 바로 맞았더라면 골치 아픈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구급시설도 없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놀란 사람들은 안전사고를 면하고자 곧바로 파라솔을 꺼내들거나 바닷물로 다시 들어갔다. 떨어진 열매가 달렸던 나무이름을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식물이 8백여 종이나 되어 다 외우지 못한다는 엉뚱한 대답만 했다. 카메라에 그 열매들을 담으면서 내가 인터넷에 물어서 거꾸로 알려줄 테니 뒤에 오는 사람들 다치지 않도록 잘 대비하라는 당부를 건넸다. 머리 타박상을 일으킬 뻔했던 열매의 나무는 “KK 해안가나 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다. 명칭은 ‘바다독나무’이고 영어로는 Barringtonia asiatica였다.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를 축으로 하는 서말레이시아와 코타키나발루를 축으로 하는 동말레이시아로 나뉜다. 적도에 근접하여 연간 기온변화가 적은 편이다. 보통 30도를 약간 넘지만 밤엔 23도 전후로 내려가 선선하고 쾌적하단다. 연중 낮과 밤의 길이도 거의 같고 지진대에서도 벗어난 데다 태풍까지도 없는 편이니 부러운 땅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코타키나발루가 부산과 많이 닮았다며 바다와 강과 산을 그 예로 들었다. 그 때문인지 귀국하는 날 자정 무렵 KK공항 발권창구 풍경은 의외였다. 같은 시각 인천과 김해로 떠나는 항공편인데 승객이 늘어선 줄은 김해 쪽이 인천보다 배나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