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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위증
삼하 16:1-4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16:1-4 / [사울의 종 시바의 간교한 슬기] 다윗이 감람산 꼭대기에서 요단강 쪽으로 조금 내려가기 시작하였을 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의 하인 시바가 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그는 나귀 두 마리에 안장을 얹고, 납작한 떡 200덩이와 건포도 100개와 싱싱한 과일 100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왔다. 2) 왕이 `이것이 모두 무엇이냐?'고 묻자 시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나귀 두 마리는 임금님의 가족들이 타고 가시라고 가져왔고, 이 떡이나 건포도나 과일은 임금님의 신하들이 노상에서 먹고, 이 포도주는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기진하는 사람이 있으면 누구나 마시라고 준비하였습니다.' 3) 이때 왕이 `그런데 네 주인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자, 시바가 터무니 없는 중상 모략을 하였다. `그분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제 세상이 왔다고 좋아합니다. 그분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그의 할아버지 사울의 왕위를 되찾아 그에게 되돌려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4) 왕은 시바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네 주인의 재산을 모두 네가 가져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시바가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나의 주 임금님께서 앞으로도 언제나 이렇게 은총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겨 망명하는 중에 므비보셋의 사환이며 기회주의자인 시바에게 속임수를 당합니다.
다윗을 찾아 온 시바(1-2)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 감람산 꼭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떡과 건포도, 여름 과일과 포도주를 두 나귀에 가득 싣고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사람입니다(9:2, 9-11). 하지만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한 자였습니다. 이러한 자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궤한 것은 도망자인 다윗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시바의 간교에 넘어간 다윗(3-4) 시바는 주인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포상을 노리는 교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이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고 한다며, 다윗과 므비보셋의 사이에 이간질합니다. 시바의 말은 철저하게 계획된 거짓말입니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를 지닌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모함한 말은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사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안타깝게도 다윗은 그 말을 곧이듣고 그에게 므비보셋의 재산을 전부 넘겨준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며, 시바가 공궤한 음식(1-2)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가의 사람들이 왕권을 다시금 회복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이 사건은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고 하신 것처럼,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신중한 언행인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적 용 :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 곁에 다가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시바와 같은 사람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와 같은 사람입니까? 그리고 나는 내 이웃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어떤 종류의 사람으로 다가갑니까?
‘내면의 평화를 얻으려면 평화의 반대상황을 기꺼이 헤쳐 나갈 각오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진리다.’ 인도의 명상수행가 스와미 브라마난다의 말입니다. 살다보면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중한 병에 걸렸거나 오래 추진해왔던 일들을 망쳐버렸던 좌절의 시기와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련을 이겨내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은 삶의 모든 부분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됩니다. 예부터 고진감래란 말이 있듯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6: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 여기서 '마루턱'(top of hill)이란 감람 산 마루턱 곧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한다.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 -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이다 (9:2, 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그의 그 같은 성품은 본장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되고 있다.
여름 실과 - 여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익은 열매를 가리킨다(암 8:1,2). 이 실과는 열매 야자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70인역(LXX)에서는 '대추야자'(' , 포 이닉스)로 번역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행시에 종종 이것으로 갈증을 해소한다고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16:2
시바가 가로되...마시게 하려 함이니 이다 - 시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 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공궤한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The Interpreter's Bible).
=====16:3
저가 말하기를...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 이와 같은 시바의 말은 철저한 위증(僞證)이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 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4 :4 주석 참조)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시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 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4절).
=====16:4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 이는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이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시바가 공궤한 음식(1, 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3) 다윗에게 다소나마 사울가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Keil).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크나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이다.
< 설 교 >
시바의 속셈
세상은 타인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 그 위기를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얻어낼 것인가를 궁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위기는 그의 문제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타인의 위기를 대해야 합니다. 타인이 어떤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 그 일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위기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1:1의 문제로만 봐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위기를 당하게 된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를 책망하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위기는 위기를 당한 본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위기를 당한 그 사람만을 향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묻는 것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고통의 문제를 소경된 그 사람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다만 소경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소경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즉 남의 처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는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어떠함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소경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아는 신자라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말씀하심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 하나하나가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되지 못할 때 그는 타인의 위기는 오직 그의 문제며 위기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뿐입니다.
성경은 사실 내 얘기라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아니고 나의 나라의 역사도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과거의 이야기이며 그것도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해 귀가 열려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해서만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타인이 겪는 문제나 어려움을 두고 이러저런 입방아를 찧기보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고,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시바라는 사람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의 사환이었으나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므비보셋의 집을 관리하도록 한 사람입니다(삼하 9:9,10). 그런 그가 나귀와 식량을 가지고 다윗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에게 다윗은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답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다윗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다시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되고 시바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아비의 나라, 즉 요나단의 나라를 되찾아 내게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의 나라는 그 아들 요나단의 나라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요나단의 나라는 아들인 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옳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나 시바의 이 말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삼하 19:24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떠난 후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맵시내지 않고 수엽을 깍지 않고 옷을 빨지 아니하고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거짓으로 므비보셋을 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을 모두 시바에게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바의 말만 듣고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 않고 행동한 다윗의 실수임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다윗이 도피하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단지 도피하는 도중에 종 하나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는 나귀와 양식을 받았을 뿐입니다. 왜 이런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까지 기록하여 놓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작은 일로 여겨지는 것이지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기에 사소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다윗처럼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삶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삶의 실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삶을 향한 관심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바램은 무엇일까요? 그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가령 사업을 할 때 관심은 자연 사업이 성공하는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성공에 관심을 두게 될 때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와서도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는 요구만을 쏟아 놓을 뿐이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과 문제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 19:21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계획한 바가 성취되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하고자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면 굳이 사람이 계획을 세울 이유가 있으며 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우릴 하여금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에서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피하고 있지만, ‘다윗이 어떻게 될까?’라는 결과보다는 다윗이 당하는 이러한 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위기는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할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타인을 내 앞에 세우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바는 다윗의 위기를 이용해 이득을 얻고자 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 나귀와 양식을 가져다주면 분명 다윗은 자신을 신임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므비보셋을 참소한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다윗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말씀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산다면 그 어떤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을 주시며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다만 그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를 원한다면 시바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속셈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위기는 다윗의 죄로 인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제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위기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 보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바는 오히려 다윗을 이용해서 자기 것을 챙기고자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함을 보이시는 일 앞에서 죄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항시 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으므로 죄를 쌓으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삶을 내어 놓고 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어떤 결과를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들었느냐를 날마다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
이준원목사 / 삼하 16장 1~23절
혹시 사업하다 실패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사업에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다 실패해서 야반도주한 사람들에 의하면, 그럴 때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이 망하면 그렇게 가까웠던 친척들이나 친구들도 다 등을 돌리고, 무서울 정도로 거기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뭔가 자기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이 그런 상황이 되면 자기 것을 잃어버릴까 봐 달려 붙어서 남아 있는 것이라도 가져가려고 다툰다는 것입니다. 참 비정합니다. 돈이 그렇게 사람을 비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집에 남아 있는 가구나 나머지 재산을 다 포기하더라도 빚쟁이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거의 맨손으로 급하게 도망가야 하는데, 그러다 우연히라도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멱살 잡히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욕을 있는 대로 다 듣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폭행을 당하거나 경찰에 넘겨지는 등, 험한 꼴을 당하게 됩니다.
도망가서 숨어다니느라 정신없을 때 요즘처럼 선선한 날씨에 비라도 오면 신세가 정말 처량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순간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생명의 은인이 따로 없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럴 때를 이용해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 자기에게 뭔가 이득을 빼먹으려는 사람, 자기를 더 망하는 길로 몰고 가는 사람을 보면 정말 밉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도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그렇게 도망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아들에게 배반당한 처지였기 때문에 더 심한 저주와 수치의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매번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설교는 설교자가 전하는 것이라도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들어야 합니다. 사실 내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붙들려고 하기보다는, 그중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 것, ‘내가 이러면 안 되겠구나’ 또는 ‘내가 이래야겠구나’ 하는 한 가지를 붙잡고 일주일 동안 생각하며 묵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 애쓰다가 목장에서도 나누고 그렇게 살아보다가 다음 주일에 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내용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터치해주시는 한 가지를 붙들고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1. 다윗을 속이는 시바 (1~4절)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1절)
다윗 일행이 지나고 있는 곳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 즉 사울 왕의 기업이 있는 곳입니다. 첫 번째 왕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는데, 그곳을 지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자마자 처음 만난 사람은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Ziba)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사울의 종이었는데, 다윗의 명령에 의해 다윗의 절친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입니다.
그는 므비보셋의 종이 됨으로써, 이전에 사울의 재산을 다 맡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자기 입장에서는 므비보셋에게 다 빼앗긴 셈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 회복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압살롬의 반역으로 혼란한 시기를 틈타 다윗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방법으로 므비보셋에게 넘어간 토지와 노비를 전부 되찾을 생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이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2절)
뜻밖의 일을 당한 다윗은 이 사람이 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여기 웬일이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이전에 다윗은 사울의 재산을 차지했던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종이 되어 그를 섬기라고 명령했는데, 그 일로 시바가 자기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다윗의 질문에 대해 시바는 “나귀들은 왕의 가족들이 타라고, 음식은 신하들이 먹으라고, 포도주는 누구나 지칠 때 마시라고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상당한 양을 가져왔는데,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는 피난길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를 세심히 살펴 나귀와 음식을 자기가 준비하여 가져온 것처럼 대답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가 므비보셋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그의 간교함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3절)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라는 이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네가 섬기는 상전(사울)의 손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다윗의 이 질문은 므비보셋이 물리적으로 이 순간 어디에 있느냐는 것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그가 이 반역의 상황에 어느 편에 섰느냐를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자 시바는 자기 상전 므비보셋을 모함하면서 절반의 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사실도 이야기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교묘하게 말하며 거짓말을 합니다. “그(므비보셋)는 예루살렘에 있으며, 드디어 자신의 정당한 왕권을 되돌려 받을 날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을 반역하여 사울의 왕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므비보셋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시바의 진짜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는 요구된 이상의 내용을 대답하면서 논리에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압살롬이 지금 반역했는데, 사울 집안의 므비보셋에게 왕권을 회복시켜 주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입니까? 말이 되지 않습니다. 므비보셋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런 착각에 빠질 가능성은 아예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킨 것은 자기가 왕이 되려고 그런 것이지, 왜 므비보셋을 왕으로 세우려고 반역을 일으켰겠습니까?
게다가 므비보셋은 신체적으로만 보아도 왕의 자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자기도 압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자기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 자기들을 위해 싸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인 므비보셋은 애초에 고대시대에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시바의 대답은 주인 므비보셋을 완전히 모함하는 말일 뿐입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4절)
순간적으로 감정이 상한 다윗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게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시바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에게 사울의 재산을 넘깁니다. 다윗은 지금 시바의 악한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다윗이 육체적으로 굉장히 곤고한 상황에 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주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움을 당하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할 때 옆에서 바르고 선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서 갑자기 나오겠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교제하는 지체들 가운데 내가 어려움을 당해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 나를 붙잡아줄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교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다윗이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도 공의로운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처하면 판단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겉으로 나타난 시바의 호의만을 보고 그것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말만 믿고 섣불리 므비보셋을 정죄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 재산을 시바에게 넘겨주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겁니다.
시바처럼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중에 거기에 동참하며 함께 슬퍼하지는 못할망정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의외로 세상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태도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 이익이 중요하고 급해도 남의 불행을 이용하면서까지 이득을 취하려는 것은 악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입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한 사람과 함께 울어주고 슬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는 시바처럼 하는 것을 똑똑하다고, 잘했다고, 아주 지혜롭다고 칭찬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한 태도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의 힘든 상황을 이용해 달려드는 간교하고 악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힘들 때일수록 우리가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도록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자기 주위에 사랑의 공동체가 없을 때 위기입니다. 평소에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섬기며 서로 기도해주는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안 할 경우, 괴롭고 힘든 가운데 이단에서 와서 너무 친절하게 사랑으로 대해주면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이단이 나쁜 줄 몰라서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아는데도 지금 이 어려운 순간 나와 함께해주는 사람은 이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넘어가 버리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 잘못으로 교제를 안 하는 것도 문제이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이렇게 함께 모이고 교제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허락하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잘못된 영적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순간적으로 분별력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믿음의 동역자들과 지체들이 정말 필요합니다.
위기의 순간이나 마음이 요동하는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그것을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손해를 가져올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떤 말을 듣거나 상황이 변했을 때 쉽게 결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기도하고, 믿음의 지체들이 함께 기도해주며 조언하는 것을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2.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 (5-14절)
1) 시므이의 잘못된 저주 (5-8)
“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5-6절)
곧 다윗 일행은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는데, 거기서 사울의 친족인 베냐민 지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저주를 하고 돌팔매질을 합니다. 피난길에 오른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 중 첫 번째는 시바이고, 두 번째는 시므이입니다.
레위기(20:27)에 의하면 돌을 던지는 것이 사형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경우 사람들이 밖으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이는 것이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도 바로 그런 율법에 의하여 신성 모독죄를 뒤집어씌워서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여기서 시므이는 돌을 던짐으로써,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선포하며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8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7-8절)
성경은 상당히 순화(?)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험한 욕을 막 한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사시면서 욕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것의 10배 이상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엄청나게 욕을 해대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피 흘린 자’라고 부릅니다. 또 다윗에게 닥친 고통이 우연이 아니라 사울 집안의 사람들이 흘린 피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보응의 결과임을 외치며 저주합니다. 시므이는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과 같은 베냐민 지파인데, 사울은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잘못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냥 놓아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의 잘못으로 죽었습니다.
그 후 사울의 아들 중 하나인 이스보셋을 내세워서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마하나임에서 다윗을 대적하여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때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만의 왕으로 있었고,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를 데리고 이스보셋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아브넬도 요압의 속임수로 암살당했습니다. 시므이는 그 모든 이들의 죽음에 있어 다윗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여기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므이의 이런 저주의 내용은 다윗의 죄와는 상관이 없는 일임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위에서 폐위되고 그의 집안 사람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배신한 것에 대한 결과였던 겁니다.
도리어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는데도 두 번 다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신뢰, 그리고 사울에 대한 사랑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또 다윗은 요나단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스보셋을 죽이고 의기양양하여 온 암살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전에는 사울이 죽었다고 보고한 아말렉 청년도 역시 처단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오히려 사울 집안에 자비를 베풀었는데 시므이는 그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이의 이러한 저주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므이는 “여호와께서”라고 하며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입에 올린다고 다 올바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게 아닌데, 자기 개인 감정으로 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2) 피곤한 다윗의 인내 (9-14)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9절)
이것도 역시 상당히 순화된 표현입니다. 막 욕을 하면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 ‘스루야의 아들’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스루야가 다윗의 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입니다. 아비새는 아주 용맹한 장수로서 한 번에 여러 명을 죽이는 용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이 같은 사람은 아비새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를 말립니다.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0-12절)
다윗의 이 말은 시므이의 잘못을 정당화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자식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사울 집안의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빌려 나를 저주하시는 것이라면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혹시 하나님께서 그의 저런 말과 행동을 듣고 보신 다음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주실지 누가 알겠는가?”
다윗은 악으로 악을 갚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기로 작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비참한 처지일 때는 와서 욕하며 저주하다가, 나중에 다윗이 회복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와서 그대로 엎드려 절하며 제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를 살려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그를 잘 처리하라고 합니다. 자기 대에 처리하지 않고 솔로몬에게 처리를 맡기는데, 실제로 시므이는 자기 잘못으로 결국 처형당하고 맙니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함에 있어서, 시므이가 하는 말이 정말 말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그러나 칼로 시므이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겸손히 회개하며 이 원통함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더 좋은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13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4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13-14절)
사실 시므이가 이렇게 나와서 저주하며 돌 던질 때는 목숨 걸고 하는 겁니다. 누가 생각해도 이렇게 하면 당연히 죽지 않겠습니까? 용사들이 몇 명인데 저쪽에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자기 같은 사람은 상대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걸고 나와서 다윗을 저주하며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죽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신이 나고 자신감이 붙어서 더 저주를 퍼부으며 깐족 깐족대는 겁니다. 그걸 듣는 용사들은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습니다. 그래도 참고 갑니다. 왕이 하지 말라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시므이가 계속 그 뒤를 따라오며 돌팔매질하면서 모욕하고 저주하는 것을 그냥 두는데, 이것은 다윗의 겸손하고 영적인 모습인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같이 ‘뱀처럼 지혜로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므이의 이런 행동이 참 무모한 게 아닙니까? 용사들이 많은데 그 앞에서 어떻게 혼자 이렇게 합니까? 그러니까 시므이는 대표로 나온 겁니다. 지금 사울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는데, 다 나왔다가는 몰살당하니까 대표로 나와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때까지도 이스라엘에는 ‘사울 충성파’가 아직 건재하고 있음을 암시해줍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시므이를 단칼에 죽여버리면 사울 충성파를 비롯하여 사울을 그리워하는 베냐민 사람들, 또 사울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이 압살롬에게 기울게 될 것은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은 것도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다윗은 언제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일들을 정확하게 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너무 뛰어났고 정치적으로도 너무 뛰어난, 정말 대단한 인물입니다.
3. 다윗을 대적하여 계략을 꾸미는 아히도벨 (15~23절)
1) 압살롬에 대한 후새의 속임수 (15-19)
“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5절)
다윗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난 후 압살롬은 그의 추종자들 및 아히도벨과 함께 아무 저항 없이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오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아버지 다윗을 향한 반역이 드디어 결실을 거두게 된 것이고, 그가 꿈꾸던 것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6절)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니까 그를 환영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후새였습니다. 압살롬에게 있어서 후새의 출현은 뜻밖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다윗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이고 상담자이자 모략가였습니다.
과연 후새는 다윗의 친구로서 지금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위장 투항하고 있는 겁니다. 후새는 이 순간 다윗이 15장에서 요청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들어온 압살롬 앞에 와서 다윗을 도울 길을 찾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7절)
압살롬은 이러한 놀라움을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하는 말로 표현합니다. 압살롬은 후새가 다윗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친구에 대한 마땅한 자세는 친구와 대적하는 자기에게 나오는 게 아니고 지금 피난길에 있는 친구와 함께하며 고통을 나누고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은 사실상 압살롬이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이러한 압살롬의 태도를 가리켜 요즘 많이 쓰는 전문용어(?)로 ‘내로남불’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그대로 그에게 적용해보십시오. 반역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대로 대입하면 ‘이것이 네가 아버지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아버지와 함께하지 않느냐?’
지금 아버지를 반역한 주제에 그의 친구가 자기에게 왔다고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압살롬은 지금 친구 정도가 아니라 친아들로서 자기 아버지를 반역하는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입니까?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8절)
압살롬에게 후새가 다윗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붙었다는 것은 의외이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후새의 항복을 내심 반기면서도 이게 진짜인지가 상당히 의심스러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아버지의 친구인데 나에게 온 게 진짜인가?’
이때 후새가 압살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의심과 궁금증을 만족스럽게 풀어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죽임당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특히 아히도벨 같은 사람의 눈이 얼마나 날카로운데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후새는 먼저 압살롬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합니다. 나중에 보면, 이상하게도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기가 막힌 모략을 듣지 않고 후새가 제시한 말을 듣습니다. 누가 봐도 그건 이상한 일입니다.
아히도벨은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목적을 이룰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는 완벽한 계략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후새는 그런 식으로 방법론에서는 자기가 아히도벨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후새는 마음을 파고드는 전략을 폅니다. 아히도벨의 전략은 아주 기가 막히고 완벽한 것이었지만, 후새의 전략은 압살롬의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방법을 썼습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선택을 받지 못하여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후새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왕위 후계자 서열 1순위인데 아버지는 자기를 왕으로 삼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한 압살롬을 후새는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라고 부르면서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후새는 다윗에게 인정받지 못해 생긴 압살롬의 상처, 즉 그의 인정 욕구를 파고들어 만져줌으로써 그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입니다. 대단한 전략입니다. 그러면서 충성을 다짐하니까 압살롬이 어떻겠습니까?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19절)
지금 자기가 다윗을 따라가지 않은 것은, 다윗이 쫓겨가고 압살롬이 왕이 된 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압살롬의 허영심을 부추깁니다. 자기는 친구 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해서 압살롬 편에 남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은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 당신이다.’라고 말하니까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다시 말해,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가 이어져야 하는데 후새는 압살롬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절대 다윗 왕가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절대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그는 압살롬의 쿠데타가 큰 그림으로 보면 다윗 왕조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다윗 개인에 대한 것임을 말하는 것도 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도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새의 대답은 압살롬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압살롬의 신뢰를 얻게 됩니다. 많은 경우 머리로 이해되는 것보다 마음을 터치하는 게 더 통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보면 후새는 압살롬을 왕으로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 후새가 압살롬을 보면서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라고 외쳤는데, 이 왕이 누구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압살롬은 자기에게 그런 줄 아는데, 속으로는 다윗을 생각하며 그렇게 외친 겁니다. “(다윗) 왕이여 만세, (다윗) 왕이여 만세!”라고 외친 겁니다.
그리고 19절에서도 잘 보면,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라고 했는데, ‘섬기다’라는 말이 두 번 나오지만 각각 쓰인 단어가 다릅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내가 당신의 아버지를 곁에서 섬겼던 것처럼, 저는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버지를 섬겼으니 이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맹세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곁에 있겠다고 한 겁니다. 의도적으로 ‘당신을 섬기겠다’는 말을 생략한 겁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후새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그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측근으로 삼습니다. 이처럼 후새의 말이 먹혀들어 간 것은, 사실 후새가 아주 기가 막힌 전략을 써서 그런 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압살롬을 징계하실 것의 분명한 징조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과 교만은 너무나 큽니다. 압살롬은 주도면밀하게 세상 지혜에 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를 높이는 것에는 쉽게 속아서 스스로 알고 있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고 그냥 넘어간 겁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그냥 놓아두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답답하고 괴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악의 최종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악을 심판하시며 진리가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계속 하나님을 잘 섬기며 나아가면 됩니다. 언젠가 분명히 인도해주십니다.
그런데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반대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지도 않은데 일이 잘 풀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망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지도 않고, 예배드리지도 않고, 성경도 안 읽고, 기도도 안 하고, 봉사도 안 하고, 섬기지도 않는데도, 일이 너무 잘 풀리고, 사업이 잘되고, 직장에서 잘 나가고, 성적도 잘 나오고, 아이들도 잘되고, 전부 순조롭게 잘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곧 저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된다면,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기다려주고 계시는 것임을 깨닫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보장이 안 됩니다. 우리의 보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입니다.
2) 아히도벨의 첫 번째 조언 (20-23)
“20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0-21절)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아히도벨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 두고 간 후궁들과 동침함으로써 다윗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함으로써, 압살롬 편에 가담한 자들이 더 이상 다윗에게 미련을 두지 않게 하는 것과, 또 압살롬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할 수 있도록 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런 일은 당시 흔한 일이었습니다. 적국을 정복한 나라의 왕이 정복당한 왕의 후궁들을 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히도벨의 말이 약간 이상한 게, 21절 뒷부분에서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질 것이다.’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지금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면 압살롬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힘이 더 강해지겠습니까? 더 결집한다는 말인데 그 이유는 뭔가?
아직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윗과 압살롬이 원수지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압살롬의 의도는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권을 자기에게 넘겨주도록 다윗을 압박하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겁니다. 압살롬도 다윗 왕조의 합법적인 왕이 되고 싶지, 누가 불법적인 왕이 되고 싶겠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압살롬을 살리라고 간청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면 다른 왕자들도 언제 아버지 손에 죽임을 당할지 몰라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다음 왕으로 평안하게 권력을 이양하겠습니까?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가 이렇게 계속 애매하게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반역 편에 서서 쿠데타에 동참한 신하들입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윗과 압살롬이 화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다윗은 압살롬이 자기 아들이니까 봐주겠지만, 거기에 가담한 자기들은 죽임을 당할 게 뻔합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절대 관계가 좋아지면 안 되는 겁니다.
아히도벨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하여 압살롬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압살롬에게 결집한다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얼마나 정치적입니까? 지금도 이런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22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22-23절)
이것은 사실 지난번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후 나단이 찾아와 12장에서 이야기한 내용의 성취일 뿐입니다. 또한 이것은 다윗이 후궁을 많이 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도벨의 모략은 악한 것이었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한 압살롬의 행위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한 행위였습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다 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악함도 사용하셔서 그것조차 다윗을 징계하는 기회로 삼으시고, 또 나중에 압살롬과 아히도벨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아히도벨과 압살롬 일당은 악한 방법을 통해 스스로 강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대적하는 악인들이 성공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악한 사람은 건강하며 장수까지 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수치를 당하고 위험에 처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 ‘믿어봤자 소용없네. 기도해봤자 소용없네.’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소용없는 게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곤란합니다.
결국 악인들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그런데 혹시 이 땅에서 심판이 전부 이루어지고 보상이 전부 이루어지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이 땅에서도 그럴 수 있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악한 사람들이 심판받거나 하나님 뜻대로 산 사람이 상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들을 반드시 책임져주신다는 것, 천국에서 영원한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 아닙니까? 영원한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악인의 죄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단지 지금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시각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혹시 심판과 보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공의의 하나님을 믿으며 신뢰하기 때문에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면 결국 악으로 망하게 됩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악을 당할 때 힘들지만 그때 인내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꼭 붙들고 나아가야겠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해 기도해주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럴 때 놀라운 은혜가 임하고 주 안에서의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도 그러한 마음으로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리면서 승리를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줄 잘 서야 합니다
삼하 16장 1~14절 / 조상호목사
지난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가족과 함께 웰링턴에서 3박4일의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이미 Ferry를 타고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크라이스트처치에서 5시간 정도 달린 후, 뉴질랜드 남섬의 가장 북쪽이자 웰링톤으로 가는 Ferry를 타는 Picton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배가 출발하기 1시간 전에 도착하였지만, 많은 자동차들이 1번 레인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직원이 지시하는 대로 4번 레인에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출발하기 40분 전 쯤 되자 직원들의 신호에 의해 가장 먼저 와서 1번 레인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시동을 켜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1번 레인의 중간쯤에 있던 미색 칼라의 Jaguar 한대가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멀리에서 자동차 안을 보니까 운전석에 운전자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있는 차들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Jaguar 뒤에 그대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줄을 지어 Ferry로 들어가야 할 자동차들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본 직원이 1번 레인을 따라 밖으로 나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Jaguar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를 앞으로 움직이도록 지시하자, 그제 서야 뒤에 있는 자동차들이 Ferry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Jaguar 뒤에서 기다리던 자동차들은 다 들어갔지만, 뒤늦게 1번 레인으로 진입해 온 자동차들은 영문도 모른 채 또 다시 중간에 정차해있는 Jaguar 뒤에 줄을 서서 마냥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Complaint하지 않고 기다리기를 잘 하는 뉴질랜드 사람들의 특징처럼, 또 다시 서너 대의 자동차가 Jaguar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안쪽에 들어갔던 직원이 또 다시 1번 레인을 따라 밖으로 나와서 Jaguar 뒤에서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들을 앞으로 나아가도록 지시하자, 그제 서야 뒤에 있는 자동차들이 Ferry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있다보니 또 늦게 도착한 자동차들이 또 Jaguar 뒤에서 영문도 모른 채 기다리고, 그러면 직원이 나와서 그 자동차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등, 같은 일이 계속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저는 4번 레인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기도회에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만,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을 웰링톤에서 Picton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Picton에 도착한 후 Ferry에서 뭍으로 나올 때, 제 자동차는 수 십대가 줄을 서 있는 한 레인의 제일 뒤에 있었습니다. 저는 앞에 있는 자동차가 움직이는 대로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지만, 어떠한 자동차도 저의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자동차가 배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주차장 한 가운데로 나왔을 때에도 단 한 대의 자동차도 제 뒤를 따라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차가 서 있던 레인과 그 다음에 뒤따라오는 자동차들이 서 있는 레인 사이의 칸막이 때문입니다. 제 뒤에 따라와야 할 자동차, 다시 말하면 옆 레인의 제일 앞에 있는 자동차가 가운데 있는 칸막이 때문에 제 차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칸막이를 돌아 U-turn 하듯 우리 쪽 레인으로 조금만 이동했으면, 앞에 있는 자동차들이 이미 Ferry를 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옆 레인에 있는 모든 자동차들은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제일 앞에 있는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옛날 어른들의 말씀처럼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한 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인생은 줄 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가운데 조목사가 휴가를 다녀오더니 “타락했나?” 뜬금없이 “인생은 줄서기” 라느니, “우리는 줄을 잘 서야 한다니?”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우리 크리스챤들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줄을 잘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 줄서기라는 의미가 나쁜 의미를 띄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사람과 연줄을 대려고 하는 행동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줄서기와 우리 크리스챤들의 줄서기는 비슷한 것 같지만, 실상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정치가나 사업가만이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선을 놓으며, 어디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과 물질과 명예를 향해 줄서기를 하지만,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을 향해 줄서기를 하는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정치인들은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군인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사업하시는 분들은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줄서기를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줄서기를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 몇 년 동안만 지속되는 이 세상의 정권을 위해서 줄서기를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영원토록 지속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줄서기를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지만, 그 중에도 빼놓을 수 없는 교훈이 바로 ‘줄서기’의 중요성입니다. 본문의 주요 등장인물은 시바, 시므이, 다윗, 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 왕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당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서 멀어지고 아들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지자, 다윗 왕은 600여명 가량의 신하들만을 데리고 궁궐을 떠나 아무 기약도 없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본문 바로 앞장인 사무엘하 15장 30절에서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가니라.”고 언급된 것을 보면,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슬프고 다급했던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가리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울면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본문은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빠져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 물질에 줄을 선 시바
본문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시바입니다. 원래 그는 사울의 종이었지만, 다윗 왕의 명령에 의해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물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다시 말하면 물질에 줄을 선 사람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피난길에 오른 다윗 일행을 감람산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윗 일행이 감람산을 넘어오자, 그는 두 마리의 나귀에 200개의 떡 덩어리와 100송이의 건포도와 100개의 무화과 열매와 한 가죽 부대의 포도주를 싣고 왔습니다(1절). 그것들은 피난 가는 다윗 일행에게 굉장히 필요한 음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시바가 이처럼 많은 음식과 선물을 다윗에게 가져온 줄 아십니까? 순수하게 피난 가는 다윗 왕을 돕고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다윗에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찾아온 동기는 불순했습니다. 그는 준비해 온 음식과 선물로 교묘하게 다윗 왕의 마음을 얻은 뒤, 므비보셋을 모함했습니다. 자기의 주인인 므비보셋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이 죽은 뒤에 다윗에게 빼앗겨버린 왕권을 다시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다윗은 시바의 음모에 넘어가 므비보셋에게 허락한 전 재산을 시바가 가지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결국 시바는 교묘하게 므비보셋의 전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주인까지 배반했던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약 5년 전인 2000년 10월26일자 모 일간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배은망덕한 제자, 스승 신기술 훔쳐 벤처차려” 대학교수가 설립한 벤처기업에서 근무하다 집단 사직한 후, 훔친 신기술 프로그램 등을 이용하여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려던 제자 등 17명이 검찰에 적발되었다는 사건입니다. 경남의 U대학 이모교수는 김모씨, 등 5명이 대학과 대학원에 다닐 때 등록금까지 대납해주며 키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설립한 벤처기업에 취직을 시켜주고, 회사의 전권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승을 배반하고 “모두가 주인 되는 회사를 차리자”며 직원들을 선동하여, 이사 1명을 제외한 17명이 집단 사직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일은 사직을 하면서 그 회사의 연구 자료와 신기술프로그램 등을 복사한 뒤, 그 회사의 연구개발을 방해하기 위해 컴퓨터에 보관된 모든 자료 등을 지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시바 타입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물질을 위해서라면 자기를 키워주고 돌보아 주었던 주인까지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시바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과거 오클랜드에서 사역할 때 보면, 시간당 50센트 더 준다고 A식당에서 B식당으로 옮기고, 또 얼마 있지 않아 시간당 1불 더 준다고 B식당에서 C식당으로 옮기는 조선족출신 요리사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또 과거 시드니 살 때에는 영주권 취득을 위한 JOB OFFER를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다가, 막상 영주권을 얻고 나서는 완전히 태도가 바뀌어 고용조건이 약간 나은 업체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옮기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들이 ‘물질에 줄을 선 사람’들이고 ‘돈에 줄을 선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시바처럼 물질 때문에, 돈 때문에 도덕적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시바처럼 물질을 줄 선 사람들은 아닙니까? 저는 이 자리에 물질에 줄을 선 사람들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물질에 줄을 서기 보다,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께 줄을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출세에 줄을 선 시므이
본문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시므이입니다. 그는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원래 그는 사울왕의 신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죽고 나서 다윗 왕조가 세워지면서 패가망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윗이 왕위에 올라 나라를 강력하게 이끌고 갈 때, 그는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조국인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출세였습니다. 그는 다윗이 왕으로서 나라를 잘 이끌 때에 숨어 있다가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다윗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이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을 누르고 다시 재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바후림"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다윗에게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로만 저주한 것이 아니라, 돌까지 던지며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다같이 7절과 8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 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시므이는 다윗을 향하여 "피 흘린 자"라고 부르며, 다윗이 사울 왕과 사울의 아들들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피를 다윗에게로 다시 돌리고 있다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닥친 환난이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라고 외치며 다윗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므이의 저주는 다윗의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저주였습니다. 사울이 왕위에서 폐위당하고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은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울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지,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므비보셋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시므이는 다윗을 향해 마구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그는 다윗을 향해 “불한당 같은 놈아, 너는 사울 왕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놈이야, 빨리 꺼져라!“ 등의 말을 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쿠데타를 무력화시키고 나서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 왕으로 복귀할 때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피난 같던 다윗 왕이 온다는 말을 듣고 급히 왔습니다. 자기 혼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은 지파 베냐민 사람 1,000명을 데리고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무엘하 19장 18절 하반절부터 20절을 보면, 재미있는 한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시므이는 죽을 죄를 지었다고 싹싹 빕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기회주의자, 혹은 박쥐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옛날이야기 ‘박쥐 이야기‘를 아시는 분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옛날 동물나라의 들짐승과 날짐승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들짐승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 편에도, 저 편에서 속하지 않고 숨을 죽이며 지켜보던 박쥐가 들짐승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날개가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쥐에 해당합니다. 여러분과 같은 들짐승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들짐승들은 박쥐를 같은 편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전세가 역전이 되어 날짐승들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를 본 박쥐가 들짐승 나라를 떠나 날짐승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멋진 날개를 가진 날짐승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날짐승들은 박쥐를 같은 편으로 맞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날짐승에게 유리하던 전세가 다시 반전이 되어 서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이제 우리 어리석은 싸움을 그치고 평화롭게 지냅시다, 화해합시다, 용서합시다.”라고 합의하였습니다. 이제 동물 나라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전에는 원수였지만 이제는 친구가 되어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는데, 함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박쥐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들짐승들이 ’박쥐는 전에 우리 편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날짐승들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박쥐는 전에 우리편이었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양다리 걸쳤던 박쥐의 행동이 들통이 났습니다. 들짐승들이나, 날짐승들 모두가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는 간사한 녀석이 어디 있냐고 박쥐를 향해서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박쥐는 모든 동물들을 피하여 동굴로 들어가 혼자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박쥐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양다리 걸치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회주의자의 말로는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공부할 기회, 열심히 일할 기회, 열심히 봉사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회만을 좇아 이리 갔다, 저리 갔다하는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두 번째 등장하는 시므이는 꼭 박쥐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다윗을 저주하기도 하고, 다윗에게 아부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열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하나님나라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욕망과 출세욕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판단기준은 “이것이 내게 유익한가? 아니면 내가 손해인가?”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양다리 걸치기 명수였습니다. 그런데요, 오늘날 크리스쳔들 중에는 양다리 걸치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점쟁이는 자신들의 고객 중 50% 이상이 교인들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과 추진할 사업과 결혼할 배우자 등, 여러 일들을 결정하기 위해서,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고, 낮에는 점쟁이 찾아가서 점치고, 밤에는 중을 찾아가서 부적을 만드는 양 다리 뿐 아니라, 세 다리를 걸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양다리 걸치기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시므이와 같은 사람이 이 자리에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성도는 출세를 위해 줄 서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 줄을 선 다윗
본문에 세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줄을 섰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시므이는 피난 가고 있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있던 다윗의 신복들이 분노했습니다. 9절을 보겠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다윗의 조카이자, 충성스러운 부하 아비새는 당장 가서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있는 시므이의 목을 베어 오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게 되면 시므이는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윗이 지금 쿠데타를 피해 피난 가고 있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부하 600명이 다윗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 시므이는 혼자입니다. 겨우 돌멩이를 던지고 욕을 할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황에 우리가 처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니?” “내가 왜 너 같은 녀석에게 비난받아야 하니?” “내가 잘 못 했는지, 네가 잘 못했는지, 한 번 따져볼까?” 라고 하며 억울함을 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비새가 시므이에게 복수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스루야의 아들아, 나의 일에 너희가 왜 나서느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를 저주하라고 분부하셔서 그가 저주하는 것이라면,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 다윗은 악으로 악을 갚기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시므이가 계속 그 뒤를 따라오며 돌팔매질을 하며 모욕하는 것을 보고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칼로 시므이의 목을 베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려고 하기보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하고 저주하는 시므이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압살롬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후, 그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에 자기에게 나아와서 용서를 비는 시므이를 여전히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줄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줄을 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현재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 줄을 선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돈에 줄을 서고, 물질에 줄을 서고, 세상적인 것에 목숨 걸고 줄을 선 사람들입니까?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오래 전에 영국의 청교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God을 찾아 북미로 갔고, 다른 사람들은 Gold을 찾아 남미로 갔습니다. 사실 God과 Gold의 영어 글자를 보면 비슷합니다. God에 'l'라는 스펠링 하나 더 있는 것이 바로 Gold입니다. Gold를 찾아 남미로 갔던 사람들은 Gold도 놓치고 God도 놓친데 반해, God을 찾았던 청교도들은 God도 찾고 Gold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God에 줄을 서면 God도 놓치지 않으면서 Gold을 얻을 수 있지만, Gold에 줄을 서면 Gold도 얻지 못하고 God도 놓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Gold에 줄을 서면 실패합니다. 시바처럼 물질을 위하여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은 실패합니다. 시므이처럼 출세를 위하여 양 다리 걸치기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께 줄 서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줄 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가수이자 방송 PD인 에디 칸토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공을 위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숨 가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에게서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의 부와 성공과 인기를 위해 살던 그가 하나님께 줄 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편지 내용은 단 한 줄이었습니다. "내 아들 에디야! 오늘 너는 어느 쪽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니?" 에디 칸토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자신의 수첩에 네 가지 질문을 적었다고 합니다. “1) 나는 지금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2) 나는 지금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3) 나는 인생의 참다운 보물을 추구하고 있는가? 4) 나는 지금 어느 쪽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는 평생 동안 네 가지 질문을 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참다운 보물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시바나 시므이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질과 출세를 위해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다윗처럼 하나님께 줄을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과 시바
삼하 16:1-4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가 므비보셋을 모함하여 다윗으로부터 그의 재산권을 넘겨받은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먼저 1절에,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나귀 두 마리에 많은 선물을 싣고 다윗 왕을 맞으러 나왔는데, 그가 가지고 온 선물들은 압살롬을 피해 급히 피난길에 오른 다윗 왕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이러한 선물들과 달콤한 아부의 말로써 다윗의 환심을 산 다음, 자기 주인을 무고한 말로 모함함으로써 주인의 재산을 가로채고 말았다는 것입니다(3-4절). 시바는 참으로 간교한 사람이었고, 다윗은 시바에게 속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인간은 제아무리 똑똑하고 신앙이 있다고 해도 아첨하는 자의 뇌물과 간사한 말에 쉽게 마음을 열고 그의 흉계에 넘어가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더구나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윗도 당시 처한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에 자기에게 선물을 가지고 온 시바의 말만 믿고 므비보셋의 재산을 그에게 넘겨주는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럴듯한 선물과 말로 자신을 위장하며 접근하는 사탄과 악한 인간들의 흉계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의 진심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유혹의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약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 예수님까지 달콤한 말로 미혹했습니다. 일례로, 사탄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이용하여 마치 선의 인양 예수님께 십자가에 달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이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듣기 좋은 위로의 말로 들렸지만, 그 말의 배후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음흉한 의도가 있음을 아시고 매우 강하게 질책하시며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마 16:21-23).
그런데 여러분, 그 사탄은 지금도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매우 호의적인 모습으로 다가와 가장 그럴듯한 것들로 미혹합니다. 예수님에게 그러했듯이 가장 가까운 성도나 가족을 통해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중심을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를 통해 사탄의 악한 흉계를 능히 제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시험은 어떤 것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것을 단호하게 물리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에, 시바는 므비보셋의 안부를 묻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라며 거짓 보고를 합니다. 시바는 자기의 주인인 므비보셋과 다윗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전혀 쓸 수 없는 장애인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처지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왕권 찬탈을 기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다윗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마치 자기 일처럼 슬퍼했던 사람이었습니다(9:3, 19:24-30).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바는 므비보셋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다윗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이 평생을 바쳐 충성하던 주인을 배신하고 오히려 모함까지 하면서 주인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한 것입니다(4절).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시바만이 이렇게 악한 것이 아닙니다. 시바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악한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거짓으로, 선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의로 맺어져 있는 사람들을 이간하고 갈라놓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악행을 파헤치거나 밝혀낼 여지를 없앱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인간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하려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합니다. 선악과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사탄이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성도 사이를 이간질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의 추종자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거짓말로 하나님과 우리 성도 사이를, 그리고 성도와 성도 사이를, 가족과 가족 사이를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관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마 13:9).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찾아오는 이러한 사탄의 시험을 깨어 정신을 차리고 이겨내야 합니다. 오늘, 나를 미혹하는 사탄의 흉계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깊이 돌아보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4절에, 시바로부터 므비보셋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경솔하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도주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평소의 침착성을 잃어버리고, 아들인 압살롬도 아버지인 자신을 배신하는데, 선왕의 손자인 므비보셋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주어진 상황에 생각이 매몰되어 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은 이러한 실수를 하신 적은 없습니까? 자신의 짐작이나 주변의 떠도는 소문이나 아무 근거가 없는 이야기만을 듣고 일방적으로 무고한 사람을 의심함으로써 평소 쌓아왔던 우정과 신뢰 관계를 깨뜨리는 실수를 하신 적은 없습니까? 나중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난 다음, 경솔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아마도 누구나 다 이 같은 실수를 종종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실을 완전히 확인하여 진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경솔하게 이웃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잠 18:17). 또한, 세상의 법에도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있습니다.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을 방지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런 확인 절차도 없이 타인의 말만을 듣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매몰되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지지 않도록 늘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성경은 잠언 17장에서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허물을 거듭하여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급적이면 타인에 대한 비방의 말을 삼가는 동시에 혹 그러한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할지라도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를 찾아 부드러운 말로 권면함으로써 더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과연 어떠한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판단이나 정죄하기보다는 용서와 자비로 사람을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다윗을 통해 인간은 제아무리 똑똑하고 신앙이 있다고 해도 아첨하는 자의 뇌물과 간사한 말에 쉽게 마음을 열고 그들의 흉계에 넘어가는 매우 연약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고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시바와 같은 악한 자들이 늘 우리 곁에 서성이는 것과 그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경성하되, 정죄보다는 용서와 사랑으로 품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과 자비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악한 종 시바
삼하 16:1-4 / by skd1
악한 종 시바 이야기: 우리에게 주는 교훈
삼하 16:1-4에서 배우는 신앙의 지혜유명한 인용문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짧은 구절 속에 깊은 교훈이 담겨 있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은 사무엘하 16장 1-4절에 나오는 악한 종 시바의 이야기를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시바의 행동과 다윗의 선택은 우리 삶 속에서 진실, 신중함,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줍니다. 이 글은 성경을 읽는 모든 분들께, 시바와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시간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 함께 시작해볼까요?
시바의 음식 바구니, 그 뒤에 숨은 속마음
사무엘하 16장은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치던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때 시바는 다윗에게 빵, 포도주, 과일 등 풍성한 음식을 가져옵니다. 겉보기엔 다윗을 위로하고 돕는 따뜻한 행동처럼 보이죠. 하지만 시바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 음식을 통해 다윗의 신뢰를 얻고, 자신의 주인 므비보셋을 배신하려 했습니다(삼하 16:1-2).
시바의 행동은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치는 ‘겉과 속이 다른’ 순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군가의 친절이 항상 순수한 동기에서 오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마음의 분별력을 구해야 합니다. 잠언 2장 11절은 “명철이 너를 보호하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사람과 상황을 분별하는 눈을 달라고 기도해보세요. 둘째, 겉모습에 급히 반응하지 말 것입니다. 시바의 음식 바구니처럼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은 의도를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실을 감춘 시바의 말
시바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남아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합니다(삼하 16:3). 이는 완전한 거짓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에게 충성했으며, 나중에 이 진실이 밝혀지죠(삼하 19:24-30). 시바는 진실을 감추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선택했습니다.유대교
이 대목은 우리에게 진실의 중요성을 묵상하게 합니다. 시바처럼 거짓으로 단기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요한일서 1장 6절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며 어두움에 행하면 거짓을 행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진실한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오해를 주거나 진실을 감춘 적은 없었는지요? 만약 있다면, 용기를 내어 그 잘못을 바로잡는 작은 걸음을 내디뎌 보세요. 진실은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납니다.
다윗의 성급한 약속, 그리고 그 결과
다윗은 시바의 말을 듣고 즉시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삼하 16:4). 하지만 다윗은 시바의 말을 확인하지 않았고, 므비보셋의 입장을 들어보지 않았습니다. 이 성급한 결정은 나중에 므비보셋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다윗 자신도 이 일을 되돌리기 위해 고민해야 했습니다(삼하 19:29).
다윗의 모습은 우리에게 신중함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잠언 19장 2절은 “지식이 없이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 못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처럼 성급히 판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기도로 결정을 준비하세요. 하나님께 그 상황을 올려드리고 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둘째,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세요. 신뢰할 수 있는 친구나 멘토와 이야기를 나누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두고 결정하세요. 급한 마음이 들 때일수록 한 발짝 물러서서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시바와 다윗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
시바와 다윗의 이야기는 짧지만,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이 가득합니다. 시바는 우리에게 진실과 순수한 동기의 중요성을, 다윗은 신중함과 분별력의 가치를 가르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내가 누군가의 겉모습에 속은 적은 없는지, 성급한 판단으로 누군가를 오해한 적은 없는지 말이죠.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성경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나침반입니다. 시바와 다윗의 선택을 통해 우리는 더 진실하고 신중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세요. 그리고 이 글을 읽은 후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나눠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어떤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는지, 어떤 교훈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경은 우리에게 단순히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아닙니다. 시바와 다윗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교훈입니다. 진실을 선택하고, 신중함을 잃지 않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성경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한 걸음씩 나아가 보세요.
시바의 속셈
사무엘하 16:1-4
세상은 타인이 위기에 처하게 될 때 그 위기를 이용하여 어떤 이익을 얻어낼 것인가를 궁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위기는 그의 문제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타인의 위기를 대해야 합니다. 타인이 어떤 위기에 봉착하게 될 때 그 일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위기가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1:1의 문제로만 봐야 할까요? 다시 말해서 위기를 당하게 된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를 책망하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위기는 위기를 당한 본인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위기를 당한 그 사람만을 향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묻는 것이 나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날 때부터 소경이라는 고통의 문제를 소경된 그 사람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즉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다만 소경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소경의 운명에 대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즉 남의 처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기 좋아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는 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 어떠함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소경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일을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시고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아는 신자라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과 말씀하심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제대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 하나하나가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루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되지 못할 때 그는 타인의 위기는 오직 그의 문제며 위기일 뿐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뿐입니다.
성경은 사실 내 얘기라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아니고 나의 나라의 역사도 아닙니다.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과거의 이야기이며 그것도 나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남의 나라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일으키셨던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대해 귀가 열려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해서만 가져야 할 자세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타인이 겪는 문제나 어려움을 두고 이러저런 입방아를 찧기보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이고,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타인의 위기를 이용하여 득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시바라는 사람입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라고 말합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의 사환이었으나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므비보셋의 집을 관리하도록 한 사람입니다(삼하 9:9,10). 그런 그가 나귀와 식량을 가지고 다윗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에게 다윗은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뇨”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답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다윗을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다시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게 되고 시바는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3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아비의 나라, 즉 요나단의 나라를 되찾아 내게 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울의 나라는 그 아들 요나단의 나라가 되는 것이 당연하고 요나단의 나라는 아들인 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옳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나 시바의 이 말은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삼하 19:24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떠난 후 돌아오는 날까지 발을 맵시내지 않고 수염을 깍지 않고 옷을 빨지 아니하고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을 향한 므비보셋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거짓으로 므비보셋을 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바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을 모두 시바에게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바의 말만 듣고 사실 여부를 알아보지 않고 행동한 다윗의 실수임이 분명합니다.
지금은 다윗이 도피하는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까? 다윗은 단지 도피하는 도중에 종 하나를 만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주는 나귀와 양식을 받았을 뿐입니다. 왜 이런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까지 기록하여 놓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사소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사소한 작은 일로 여겨지는 것이지 모든 일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이기에 사소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다윗처럼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삶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삶의 실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삶을 향한 관심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바램은 무엇일까요? 그 일이 잘되는 것입니다. 즉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가령 사업을 할 때 관심은 자연 사업이 성공하는 것에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성공에 관심을 두게 될 때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와서도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는 요구만을 쏟아 놓을 뿐이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일들과 문제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 19:21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이 계획한 바가 성취되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계획하고 일을 하고자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면 굳이 사람이 계획을 세울 이유가 있으며 일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우릴 하여금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에서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피하고 있지만, ‘다윗이 어떻게 될까?’라는 결과보다는 다윗이 당하는 이러한 위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의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말씀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위기는 내 이익을 위해 이용할 기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타인을 내 앞에 세우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바는 다윗의 위기를 이용해 이득을 얻고자 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다윗에게 나귀와 양식을 가져다주면 분명 다윗은 자신을 신임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므비보셋을 참소한 것입니다. 결국 시바는 다윗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말씀도 듣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산다면 그 어떤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런 저런 일을 주시며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다만 그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를 원한다면 시바처럼 자신의 이득을 위해 살아가는 속셈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위기는 다윗의 죄로 인한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제대로 직시하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위기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죄를 돌이켜 보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바는 오히려 다윗을 이용해서 자기 것을 챙기고자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함을 보이시는 일 앞에서 죄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항시 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시바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으므로 죄를 쌓으며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로 보기 위해 삶을 내어 놓고 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악한 자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을 제대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어떤 결과를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들었느냐를 날마다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무비보셋의 시종 시바의 만남
삼하 16:1-4 / 매원감리교회
1. 압살롬을 피해 피신하던 중,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를 만남. 시바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위해 많은 양의 양식을 나귀에 싣고 나타남.
2. 다윗은 므비보셋에 대한 질문을 했고, 시바는 므비보셋이 왕위를 되돌려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다고 답함.
3. 다윗은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전 재산을 가지라고 함.
묵상 말씀: “므비보셋의 재산을 네가 모두 가져라.”(삼하16:4)
1. 석연치 않은 시바의 행동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로 사울왕의 직계 혈통입니다. 다윗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므비보셋은 죽거나 비참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따듯한 보살핌으로 므비보셋은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고, 그에 대하여 늘 고맙게 여기고 있었던 터입니다. 그랬던 므비보셋이 감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윗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므비보셋에 대한 특혜를 철회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예루살렘을 떠나올 때 남게 된 게 그런 판단의 빌미를 제공한 듯싶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므비보셋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암튼 다윗의 결정으로 인해 시바는 수지맞았고, 므비보셋은 벼락을 맞았습니다. 다윗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요. 과연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이 왕위를 노리고 예루살렘에 머물렀을까요? 아버지의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이라는 사람을 제치고 말입니다. 과연 진실이 무엇일까요?
2. 다윗의 흐려진 판단
진실은 사무엘하 19장에 나옵니다. 다시 예루살렘에 입성한 다윗은 므비보셋을 만나 사실 확인을 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19장 말씀을 종합해 볼 때, 므비보셋의 말에 더 신뢰가 갑니다. 당시 왕이 된다는 것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하고 그 전쟁에 앞장서서 진두지휘해야 할 때가 많을 텐데,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의 신체적 조건은 그런 면에서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압살롬을 제치고 왕위를 노린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동안 보여준 므비보셋의 성품상 그렇게 배신을 때릴만한 처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시바의 말만 듣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 판단을 유보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 양식을 싣고 온 시바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진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배가 고프면 판단이 흐려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싸움을 할 때는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는 게 익숙하고 따뜻한 리더십을 지닌 성군, 다윗도 그렇게 판단이 흐려져 오류를 범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시바의 말만 듣고 잘못 판단하다
삼하 16:1-4 / 야곱
◆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
(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감람산에 올라서 마루턱을 막 지나자 므비보셋의 시종 시바가 각종 음식물을 들고 마중 나왔다.
시바는 본래 사울 집안의 청지기로서 사울의 재산을 관리하던 자였는데, 사울 집안이 몰락하자 자연스럽게 그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 왕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그 재산을 돌려 주도록 하고,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시종이 되어 그 모든 것을 관리하도록 했다. 사울의 재산이 자신에게 공짜로 굴러온 것 같아서 좋아했던 시바에게 이런 상황은 무척 불만스럽고, 다시 자기를 므비보셋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한 다윗에게 적대감을 가질 만했다. 그런데 그 시바가 다윗의 적인 압살롬에게 가지 않고 다윗에게 음식물을 싸들고 맞이한 것은 아주 뛰어난 전략이었다.
다윗은 도망하는 중에 자기 편에 서서 이렇게 음식을 들고 맞이해주는 시바가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다윗은 왜 므비보셋이 보이지 않는지를 묻자, 시바는 자기 주인인 므비보셋을 모함했다. 므비보셋이 모반을 꿈꾸며,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라고 없는 소리를 지어냈다.
도망하느라 판단력이 흐려진 다윗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시바의 말만 듣고 격동이 되었다. 즉시 시바에게 므비보셋이 가진 재산을 다 차지하라고 했다. 시바의 계략이 통해서 그는 사울에게 속했던 거대한 재산을 다시 손에 넣게 되었다.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기 때문에 시바를 따라잡을 수 없었을 뿐, 그는 여전히 다윗에게 충성된 자였다. 그러나 시바의 모함으로 므비보셋은 졸지에 역적이 되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오해가 풀리긴 했어도 냉랭해진 다윗의 마음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한쪽 말만 듣고 무엇을 판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살인범의 말만 들으면 살인도 정당해 보인다. 다윗같이 현명하고 하나님의 영에 민감했던 자조차 곤궁에 처하니 한쪽 말만 듣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을 본다.
역사를 보면 악한 자의 말만 듣고 섣부르게 판단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인 예가 무수하다. 특히 어리석은 백성들이 정치인들의 지어낸 말만 듣고 선동됨으로써 졸지에 그들의 악한 죄에 동조자가 된 예가 수두룩하다.
오늘날은 정보가 넘치는 시대다. 그런데 상당수가 거짓 정보다. 허구가 사실처럼 말해진다. 그것을 지어낸 사람은 당연히 악한 사람이지만, 사실 여부 확인도 없이 그것을 그대로 퍼 나르는 사람들도 그 악한 일에 동조자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오, 성도는 이러면 안 된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명심해라.
그것이 아무리 좋은 건강 상식이든, 감동적인 이야기든 일단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것은 퍼서 나르지 말라. 그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뱀 같은 혀를 가지고 있어서 너무나 그럴싸하게 말하니 우둔한 사람은 속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혜로우신 우리 주님께서는 이렇게 어리석은 우리에게 분별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오늘날 성도들은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의 말에 솔깃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눈을 크게 떠서 그들의 열매를 살펴야 한다. 도대체 그들의 열매가 무엇인가? 열매가 없다면 단호하게 손절하라.
쉽게 선동되어서 확인되지도 않은 말을 여기저기 퍼 나르지 말고,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고 확인해보라. 거짓말이나 진실은 그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그리고 열매가 악한 것으로 드러나면 반드시 그 사람을 떠나라. 그렇지 않고 그의 변명을 듣고 있으면 또 속게 된다.
악한 자를 따르면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을 만들고, 다른 사람까지 망하게 한다. 그러니 깨어서 분별하고 분별하라. 그것은 성도의 의무다.
다윗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양쪽 말을 들을 귀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악한 자의 말에 속아서 억울한 사람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해주십시오.
분열의 영을 조심하라
삼하 16:1~4 / js919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삼하 16:1)"
'화목제물, 예수님은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혀 있던 죄의 담을 허물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셨어요. 우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어디에 있든지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 주변에는 화평케 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바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시바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다윗과 므비보셋 사이를 이간질 시켰는데요, 이를 통해 두 가지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자니다.
첫번째로, 분열이 아닌 화해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바는 본래 사울의 집을 관리하는 종이었는데요, 사울이 죽은 뒤 다윗은 시바를 불러서 사울의 손자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사울의 재산을 다 주고 그를 보살피라고 명령했습니다. 시바는 다윗의 명령대로 므비보셋을 섬기고 있었는데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도망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먹을 것을 싸들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이 다윗을 배신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바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시바가 다윗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는 므비보셋을 향한 다윗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므비보셋에게 넘어간 사울의 재산을 빼앗아 오려고 한 것이죠. 시바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윗과 므비보셋 사이를 이간질 한 거예요.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간질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간질은 분열의 영인 사탄이 좋아하는 행동입니다. 이간질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기 때문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행동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이간질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번째로,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도망자가 되어 지쳐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과 가족들이 탈 나귀를 가지고 찾아온 시바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습니다. 므비보셋이 배신했다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어요. 그래서 그는 시바에게 므비보셋에게 속한 모든 재산을 다 가지라고 말했습니다.(4)
시바는 이간질에 성공했고 다윗은 속아 넘어갔습니다. 므비보셋은 졸지에 배은망덕한 배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속아 넘어간 사건은 우리에게 아쉬움과 경각심을 줍니다. 다윗이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하는 아쉬움과 동시에 우리 역시 정신없는 상황에 놓이면 분별력을 잃고 이간질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경각심이 생기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우리의 틈을 노립니다. 우리가 분주한 상황에 있을 때를 노려서 분별력 없는 결정을 하게 해요. 그리고 사탄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서 나를 위하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악한 간계가 있어요. 나를 위한다고 하는 말과 행동들 중에 사탄의 간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 바랍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속아 넘어가지 않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분열이 아닌 화해시키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공동체를 살리기 원합니다. 그리고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 영적인 분별력을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하고 공동체를 살리는 결정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윗이 시바의 속임에 넘어가다
삼하 16:1~4 / js9191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2)"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통해 영적인 분별력으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다윗이 감람산 정상을 지난 직후에 ‘시바’가 다윗을 맞이했습니다. 사울의 재산 관리인 시바에게 아들이 열다섯 명, 종이 스무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바가 사울의 권력을 이용하여 얼마나 세도를 많이 부렸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바와 그의 아들과 하인들을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의 재산을 찬탈할 목적으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탈출할 때 왕의 가족이 탈 수 있도록 안장을 갖춘 한 쌍의 나귀와 200개의 빵과 100개의 건포도, 100개의 여름 과일 무화과 열매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다윗에게 제공했습니다. 이것들은 급하게 피신하는 다윗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전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고자합니다.
첫번째로, 거짓과 조작으로 얻은 이익은 결국 자신을 무너트립니다. 2절 말씀입니다. 시바는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말로 다윗의 환심을 샀습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너의 주인 므비보셋이 어디에 있느냐?” 물었을 때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므비보셋에게 주리라 하나이다(3)"라는 말을 했다고 거짓을 고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의 배은망덕한 짓에 분노하여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준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대해 시바는 감사의 표시로 왕 앞에서 “내가 절하나이다”라고 말하며 큰절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조금만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시바의 말이 거짓인 것을 금방 알았을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왕권 찬탈을 위해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은 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습니다. 므비보셋은 후에 자신이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다윗은 이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바의 행동은 이웃의 고난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려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첨을 해 본 사람은 그것이 관계 회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추한 모습만 드러나게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바는 아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으나 곧 탄로가 나서 그의 잘못된 인간성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바의 행동은 아첨이 인간의 악을 실행하는 크고 효과적인 도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은 죄요, 위선이며 사기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위기를 모면하거나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아첨으로 환심을 사려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면서 접근하는 자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다윗은 시바가 가져온 뇌물에 속아 므비보셋을 모함하는 말을 분별하지 못했는데, 우리도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외모나 뇌물이 아닌 진실과 공의로 판단해야 합니다. 타인이 전해 준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다윗이 시바가 한 말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께 영안을 간구했다면 결코 므비보셋을 오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쉽게 므비보셋을 나쁜 사람으로 단정 짓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할 때 늘 신중하고, 그 진위를 따져보거나 그 사람을 평가하는 말과 행동 그리고 동기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진위를 파악하는 영적 분별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그래서 올바른 판단을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