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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
2012년 9월11일
- 1890년 이전 단계 - 성서고고학을 하기위한 준비단계
가장 필요한 고대 근동의 값진 문헌들에 기록된 상형문자, 설형문자
그 문자들의 해석이 급선무 과거 기록할 때 쓰였던 글자
#. 로제타 스톤 (알렉산더에서 60km정도 떨어진 로제타 지역)
이 석비에 기록된 세 가지 문자
1. 이집트의 민간언어
2. 헬라어
3. “샹폴리옹”이 마지막 문자 연구 - 표음문자인 것을 발견 = 상형문자 알파벳 발견
ex> 프톨레미 왕의 공적을 기록한 석비인 것을 확인
카르낙 신전 벽에 있던 람세스2세 왕의 공적을 기록한 상형문자 해석
결국, 많은 문헌들 해석 가능해짐
#. 설형문자는? 베히스톤(이란) 암벽에 새겨진 설형문자들을 19세기에 탁본을 뜸
1. 바벨론어
2. 페르시아어를 통해서 설형문자 해석, 다리오왕의 이야기 기록되어있음
3. 엘람어
학개, 스가랴 선지자들의 활동 시기 - 다리오 왕 때 그때 왕의 기록
결국, 설형문자까지 해석하게 됨 - 그 해독을 통해 구약성경에 잘못된 해석들이 확인.
#. 성서지리에 대한 문제 - 에드워드 로빈슨 연구
ex> 오늘날의 세겜? 헤브론? 그 장소가 어디인가?
- 세 가지의 준비단계 완성 1. 상형문자 2. 설형문자 3. 성서지명 확인 작업
이 후 발전단계 시작
@. 1단계 1890~1914(2차 세계대전 발발) - F.Petrie(비블리카 아켈로지 리뷰 잡지)
고고학문을 출현 시킨 학자 - 체계적인 기초단계 고고학 성립
과거 근동 주거형태는 높은 곳에 형성(위험으로부터 안전을 위해)
층층의 둔덕(텔)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유물들 결국,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 발견
성지에 있는 언덕 속에 있는 유물들 통해 성서의 배경을 연구
@. 2단계 1차 세계대전 이후 활발한 고고학연구 (1918 2차 세계대전 끝~1948)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찾아옴
그 시대를 대표하던 토기 연구(토기 연대측정법)를 통해 시대 측정 학문화 - 올브라이트
ex> 에배소 지역은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지 않게 되고 그 지역이 뒤 덮혀 로마시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발굴 유적지
@. 3단계 (1948~1970)
20세기 성서고고학 발굴 중 최고의 발견
1. 사해사본(1947년) - 쿰란공동체 동굴
슈케닉(이스라엘학자) 1958년에 사해사본 확보 - 이것을 연구
2. 재도약의 기틀(이스라엘 독립)
자기 나라의 정체성 연구의 목적으로 엄청난 투자에 의한 연구들 자유로운 연구
3. 프랑스의 신부 - “롤라드보” 이들 프랑스인들이 영어로 번역한 성경 예루살렘 성경
이스라엘 초기 역사 연구, 후기 역사 연구 중 사망
이 사람이 발견한 쿰란지역에서 여러 사본들 발견
4. G.E. 라이트(올브라이트 제자) - 비블리카 아켈로지 저자
- 성서를 실증하기 위해 노력한 자. 60년대 신학 부정의 위기 때의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메시지를 전하였던 자.
- 세겜 지역 연구, 발굴
5. 영국의 고고학자 (케서린 캐니언=여성)
- 여리고 연구 주전 5천년 전에 파괴된 흔적 발견
6. 슈케닉의 아들 군인이었던 그가 고고학에 뛰어들어서 요세푸스 역사에 나온 맛사다지역
발굴
@. 4단계 (1970~현재까지)
각 분야별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다양한 고고학 발전
최근 발견
1. 1993년 탤단 석비(다윗의 집안 최초 기록)
2. 2000년 야고보의 유골함(예수의 동생)
3. 헤로디온, 헤롯의 피신처 (헤롯의 무덤 발견)
4. 인장반지 = 인간과 짐승이 새겨진 반지
<2012년9월18일>
@.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을 보며 성서의 기록들을 확인하는 작업
#. 원역사 창세기1장-11장 중에 에덴동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노아와 홍수? 바벨탑?
창조에서 고대 근동까지의 내용의 고고학 자료를 찾음. 그러나 정확히 밝히기는 어렵다.
고대 바벨론 시대 -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생지
앗시리아, 히타이트, 이집트 거대한 네 개의 제국들
앗시리아 역사에 길이 남는 ‘야슈르바니팔’ BC667-627년까지의 왕 때 유다의 왕 므낫세
697-642 므낫세
642-640 아몬
640-609 요시야
※바른 역사관에 의한 성경해석
* ‘야슈르바니팔’이 죽은 뒤 약해진 앗시리아 국력으로 분열되고 609년 멸망
국력이 강한 시기에는 늘 기록을 남기게 되는 성향에 그리고 그 기록들을 모으는 작업
그래서 고대부터 모든 문서들을 모아 작업 - 이 문서들은 토판으로 작업
진흙이 많은 지역이었기에 토판에 문자를 기록 - 문서저장창고(분류별 문서 구별된 곳)
이 토판 문서에서 구약성경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발견됨 (19세기 후반부터 연구)
니느웨 지역 발굴에 영국이 가장 많은 연구 참여 so 대영박물관에 보관
‘홍수 설화’가 기록된 토판
‘창조 설화’의 토판 = ‘에뉴마 엘리쉬’ 창조 과정의 기록 - 바벨론의 가장 큰 신 ‘말둑’이
혼돈의 신과 전쟁 후 죽인 뒤에 둘로 나누어 던져 하늘과 땅이
되는 창조 과정의 이야기
이런 기록된 문서들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백성들 보게됨
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지 않을까?
* 구약성서의 중심은 유일신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셨음을 강조!
How의 의미가 아니라 Who의 개념으로 설명, 다른 신들과의 비교우위의 입장이 아니다.
바벨론 토판문서와 비교해서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참신께서 창조하셨음을 재차 강조! 신학적인 의도!
고대에서도 창조에 대한 관심, 근본, 실존, 기원에 대한 고민, 처음 시작은 어떻게 시작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고민의 증거인 기록된 최초의 토판 문서
유사한 창조 설화의 내용이 있었다. - 관련된 책 ANET 번역본(장일선씨) - 구약세계문학
#. 길가메시 토판 - 홍수설화
길가메시라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가 죽었는데 죽음에 대한 회의가 듦. 영생에 대한 관심
그래서 영원한 삶에 대한 방법을 찾음. 그래서 한 노인을 발견. 그 노인은 몇 만살의 사람
오래 살았던 이야기를 해줌, 그 이야기의 내용을 기록한 토판. 그중에 하나 홍수이야기.
자기와 살았던 신들이 화가 나서 비를 내려 심판했다는 이야기.
옛날부터 내려오는 홍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언.
창세기의 홍수는 하늘이 창을 열고, 땅에서는 깊음의 샘이 터짐. 고대 근동지역의 생각에는
홍수에 상황은 혼돈의 시기!
구약성서와 유사한 공통된 시대정신을 찾아보고 구약의 메시지는 신학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 홍수도 우주적인 창조라는 신학적 의미
이런 맥락에서 창조와 홍수의 실재적인 고고학 자료를 찾는 것은 무의미함.
아라랏 산에 노아의 방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라랏 산맥이기에 정확한 장소를 찾는 것은 불가능!
아라랏산쪽에 살았던 우라라트 왕국, 그들의 지역에 있는 반호수
철기를 잘 다루었던 그들. 산헤립왕을 암살했던 자의 망명을 받아줬던 나라
강성할 때는 앗시리아 제국과 맞먹음.
<2012년 9월25일>
#. 족장시대, 족장들의 이야기(믿음의 조상들)
- BC 1800~1550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당시 이집트는 중간기, 메소포타미아는 구 바벨론 망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던 시기
메소포타미아 지역 갈대아 우르 (구바벨론 지역에 우르라는 도시지명이 있었다.)
하란에서 하나님께 소명 받음. 데라는 애당초에 가나안땅에 가려고 출발했었다.
이 당시 하란은 특별시이었다. (큰 도시였음)
* 사막지역을 가로지르지 않고 둘러서 가는 길로 가나안까지 가는 경로
사막에 항구-솔로몬 왕이 만들었던 물과 그늘을 제공하게 되는 사막속에 항구지역(타드몰)
아브라함은 배를 위한 교통이 발달해서 그 경로로 갔을 수도 있다.
완만한 강의 흐름,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하상교통발달 그 경로로 가나안 길
(수메르 사람의 유적들)
지구라트 - 건물 하단부분에 검은 물질, 히트라는 도시에서 검정 물질
- 역청, 자연 아스팔트(석유성분) 방수기능,
- 결국 지구라트 건물 하단 부분에 그 역청이 발라져 있던 흔적은
엄청난 홍수의 흔적. 대 범람이 있었으나 지구라트만 남아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범람은 신의 저주로 여겼다.
믿음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의 역사 배경이었던 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강과 강사이의 지역
* 티그리스강 지역
1) 니느웨(앗시리아의 수도) - 발굴된 유적, 문서저장 창고(에뉴마 엘리쉬)
고대의 사냥꾼 니므롯이 지었던 곳
2) 누지 - BC1500년경 지어졌던 도시 국가, 키에라라는 사람 이지역 발굴
많은 토판 문서에 아카드어 판독 후 근거자료
이 지역에 발견된 문서들이 증거자료가 됨
이집트 지역 - 티그리스 강(화살) 아주 빠른 물살의 강 주변으로 주거
메소포타미아 지역 - 진흙이 많고 넓은 평원, 밀밭
고센지역에만 진흙이 많았던 지역
* 누지 토판 문서
- 믿음의 조상 삶의 역사에 단상들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
- 생활에 대한 그들의 삶 그대로 기록한 문서들
- 형이 죽으면 그의 아내를 동생이 취하여 아이를 갖게 해야 한다는 의무에 대한 기록
법으로 정하였던 기록
동생에게도 거부권이 없었다. 신명기에도 이 원칙이 있다. 신명기25:6-7
누지 토판 문서에도 기록되었다.
- 양자제도 (아브라함의 후사, 양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
여 주인이의 종을 통해 자식을 낳는 경우, 하갈, 빌하, 실바 창세기30장3절
이 양자문화도 누지 토판 문서에 기록
- 장자권 매매제도
* 야곱과 에서 가능한 법이었다. 장자권은 유산상속이 두 배 인정.
조건, 아버지의 확인이 필요!
* 야곱의 12아들 중에 장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하여 그 장자권이 그 다음
장자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 넘어감. 두 분깃을 받아 에브라임, 므낫세 두 지파에게.
* 엘리야에게 엘리사가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있기를 원한다 했을 때 - 갑절은 재산
상속권이 다른 엘리야의 제자들보다 더 있기를 바라는 유산 상속문화
* 드라빔 - (가족수호신) 라헬이 야반도주 시에 그 드라빔은 장자권을 상징하는 물건
* 유프라테스 지역
이상적인 이집트 영토 - 구약성경에 15번 기록된 유브라데(유프라테스)
이 주변지역, 하란, 마리, 바빌론, 니푸루, 우르 - 항구도시들
사막지역을 완만하게 흐르는 강이었기에 그 강 지류를 따라 도시 형성됨.
이쉬타르 문, 고레스 실린더, 마리 신상(제사장 복장)
마리 발굴 터에서 발굴된 문서 저장 창고 안에 토판 문서들(계약적 기록된 문서)
계약문서 발굴된 것 중 가장 중요한 기록한 이름, 정확한 계약의미
계약의 의식 중 하나 당나귀를 하나 가져와서 세로로 쪼개어 그 사이로 두 사람이
지나감으로 완성되는 계약의식
이 계약문서를 통해 창세기15장에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계약의식 해석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언약체결 장면, 이 때 새를 쪼개지 않았다는 행위로 이스라엘 백성
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 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는 일방적인 축복의 언약체결
* 히타이트 지역 (헷 족속)
힛타이트 왕국 하튜사 지역 신약에서는 갈라디아(터키) 주전 d1800년~1200년까지 막강
제국으로 세계4대 왕국중 하나 (철기문화를 제일먼저) 전쟁무기 개발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무덤을 살 때 헷 사람과 계약하는 장면
다윗시대 때 헷 사람 우리야
엄청난 신무기로 카데쉬 지역(중동지역의 패권을 잡을 수 있는 도시)에서의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했던 히타이트 - 카데쉬 협약에는 그 히타이트 승리를 기록
그러나 이집트에 신전에서는 라암셋의 거짓된 자기입장에서의 기록들
아브라함시대에는 히타이트 왕이 강하기 전, 다윗 때 히타이트는 망한 후 200년 뒤
족장시대는 이 히타이트 왕국이 막강한 시절이었다.
히타이트들의 토판 문서들이 보관되어있는데 대 제국의 국가와 국가 사이의 언약문서들 이 보관되어있다. 우월한 지위에서 언약을 체결했던 히타이트 제국(종주권 언약)
이 종주권 언약과 유사한 신명기에 나타난 시내산 언약
<2012년 10월9일 성서고고학>
*출 애굽
- 12아들 12지파의 기원
요셉을 더 사랑한 야곱. 베냐민(라헬이 죽을 때 낳은 아이)보다 더 사랑함.
그 요셉이 팔려간 이집트 거기에 야곱의 사람들(약70명)이 가서 살았던 고센땅.
이 고센땅의 상황을 연구
- 고센땅에는 사시사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 많은 양의 버려진 목초지
유목 생활 중에 이동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풍요한 땅,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땅. 다산할 수 있는 좋은 지역
나일강의 삼각주 지역, 상류에서 내려오는 퇴적물들이 쌓이는 비옥한 지역
이 지역에서 목축.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왕 바로가 등극하여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고역을 지움
가나안 사람들과 연합하여 애굽을 공격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에게 노동시킴
비돔과 라암셋(국고성= 식량을 비축해두는 장소) , 고센땅 근처에 국경이 있었기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급확보를 위해 그 목적으로 국고성을 지음.
이 국고성을 짓게 하기 위한 노동을 시킴
- 피라미드는 주전 2500년경 제작이 끝났고 그 이후 국고성을 지은 시간적 차이가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짓는데 노예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맞지 않다. 관계없다.
- 가나안 사람이 요셉이 어떻게 이집트에 갈 수 있었는가?
힉소스 가설.
이 가나안 사람이 다스리고 있던 그 땅. 그래서 가나안 사람 요셉이 총리되는 것은 가능
요셉을 가리켜 술맡은 관원장과 보디발은 히브리 청년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들이 가나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셉을 히브리인이라고 표현함.
1. 출애굽의 연대 문제
2. 출애굽의 경로 문제
두 가지 문제가 상호 보완되어야. 성서에 기록된 것으로 고고학적 자료를 함께 제시
1. 연대문제.
① 15세기
② 13세기
주전 15세기 설 - 성경을 근거로
이집트 연대기. 힉소스가 다스리던 중간기 시대 1785~1570년
신왕국 시대 1570~1069년 가장 이집트가 찬란했던 시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 곧, 왕조가 바뀐 시기. (출애굽기1:8) 그래서 15세기이다.
열왕기상6:1 솔로몬 성전짓던 시기 BC958년, 이때 이집트에서 나온지 480년 곧, 1483년
사사시11:26
고고학자료를 근거로
히브리 토판.(텔엘아마르나 석비) - 아케나톤(BC14세기 말)
아톤신을 섬기는 아케나톤왕, 그 신왕국 시대 수도는 룩소에서 텔엘아마르로 수도 옮김
이집트는 다신교였지만 아케나톤은 아톤신만 섬기는 유일신 종교 섬김
이 아케나톤에게 보냈던 편지가 히브리 토판 예루살렘 성읍의 성주 압둘헤마가 보낸
그러나 15세기설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연대숫자가 어림잡은 숫자일 수 있기에 정확지 않을 수 있다.
히브리 토판에 기록된 하부리 족속을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주전 13세기 설 - 성경을 근거로
출애굽기 1:11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다. 여기서 라암셋은 자기를 위한 도시.
라암셋2세 자신이 건축함. 그래서 출애굽의 연대가 람세스2세 시절인 BC1279-1212 시기인 13세기 근거
고고학 자료근거
고대 사람들의 벽화에 이집트에서 건축하는 장면의 벽화,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한 근거
라암셋 2세 아들(13번째) 메르넵타 석비(2m) - BC 1230년경
자기 아버지 라암셋 2세의 죽음 뒤 왕이 된 그가 주변왕국을 정복한 것에 기록
그중에 이스라엘은 내게 무릎을 꿇었다 라는 기록
BC 1230년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그대로 처음 불렀던 기록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한 이후에 기록
라암셋2세 미라가 이집트 박물관에 그대로 보관 - 그가 곧 모세시대 이집트 바로왕
주전20-13세기 에돔, 모압, 암몬지역에 이스라엘 주변 지역에 700년동안 거주 공백지역
발견,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던 시기, 그러면 15세기 설은 거부가 됨.
13세기 설에는 가능한 고고학 자료로 근거
확실한 성경의 근거 -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복한 가나안땅, 완전히 멸하였던 흔적, 그 폐허 위에 흙을 덮어 새로운 문명, 그래서 13세기 파괴되었던 도시 흔적 발견되면 확실하지 않는가?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무너진 도시 여리고성읍 발견되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발견 되지 않았음. 벧엘, 드빌, 라기스 등은 발견되었음.
이스라엘 경로 문제- 이스라엘 신앙의 실존이 걸려있는
60만 대인구 이동 가능한 경로 1,2,3순위 경로
1. 2주면 갈 수 있는 경로, 식량, 식수도 2주만 준비하여 이동했을 가능성, 해안도로
2. 내륙도로, 믿음의 조상들이 이미 이용했던 도로, 요셉도 이미 아버지 야곱을 장사하러
갔던 도로
3. 왕의 대로
<2012년10월16일 성서 고고학>
* 출애굽의 경로 문제
- 고센지역에서 해변의 길을 따라 가는 바닷길(1번 경로)로 다마스커스로 연결된 경로
(향길 - 예멘으로 가는, 비단길 등 몇 종류의 경로들)
- 왕의 대로
- 출애굽의 고대 도로들 알아보기
* 제 1순위 도로
- 바닷길 = 아스겔론이라는 블레셋 지역의 바닷길(평평한 지역으로 도로발달)
최단거리 도로, 출애굽기13:17(블레셋과의 전쟁이 두려워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는 이유)
국경 수비대(고센 북부지역 발굴) 대규모 군대 막사, 식량등을 발굴 됨
이집트 귀환을 외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바로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경로를
가지 않고 노력을 통한 가나안 정복을 인도하심
* 제 2순위 도로
- 족장들이 주로 다녔던 길 = 내륙도로(족장들의 길) = 중앙산악으로 가는 길
* 제 3순위 도로
- 왕의 대로로 요단강을 건너가는 방법 = 아직도 요르단은 왕의대로를 따른 도로형성 됨
팀사호수, 비터호수 건넘 가설
가나안 정탐꾼들이 갔던 경로 -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맛 어귀까지 (내륙도로)
왕의 대로로 가기 위해서 에돔왕에게 민20장17절
*시내산
중요한 이유- 위치가 어디 있냐에 따라 다음 행선지와의 거리 차이?
떨기나무에 관한 관심
시내 남쪽을 모세의 봉우리로 주장하는 여러 학자들
또, 하나는 카르콤산이라는 이집트 바로 국경지역에 산
미디안 남쪽에 위치한 산
결국 출애굽의 경로가 가장 큰 이유로 시내산의 위치가 결정된다
1. 모세의 봉우리 <하레 시나이> 시내지역 산맥 전통적인 게벨 무사로 알려진 모세의 봉우리가 시내산으로 보고 있다
2. 카르콤산 (평평한 산 주변 지역 -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할 좋은 조건, 샘물이 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다고 예상되는 흔적 발견, 지금 이스라엘 교과서에는 등재
3. 미디안 지역 -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호렙산에 머물렀음을 주장
<2012년 10월23일>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상황과 그 이후 왕정시대 역사적 상황에 고고학 자료들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정착을 증명할 수 있는 고고학 자료
최소한 1200년대 살았던 흔적을 증명하는 메르넵타 석비에 나타난 이스라엘 사람들 이야기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로 최초로 불렀던 기록 비석(BC1230년경)
#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했던 고고학 자료 몇 가지 근거
군사적 침략설- 성경의 근거로 한 학설
그러나 가나안 족속들의 지켜야 할 국경이 없는 상황에서 군인이 없는 상황
군사적 침략보다 평화적 이주로 들어갔을 가능성으로 봐야 할 수도 있다
평화적 이주로 들어가 점차 정착(평화적 정착설)
사회적 혁명설 - 종교적인 차이로
13세기에 파괴 되지 않은 도시들의 남아있는 고고학 자료로 평화적 이주의 증거가 됨
# 가나안 이주에서 가장 영향을 끼쳤던 나라 블레셋
이스라엘 정착한 거주지역 단면도(사진)
해안지역, 쉐펠라(해안, 산악지역 사이), 중앙 산악지역, 계곡지역(해수면보다 낮은 지역),
다시 산악지역, 모압산지
이스라엘 정착기에 안전을 가장 방해했던 경쟁했던 나라 블레셋
블레셋은 주로 해안지역 평지에 정착, 이스라엘은 주로 산악지역(다소 약소 지파는 주로 해안 평지, 갈릴리 해안-방어하기 어려운 지역)
주로 쉐펠라 지역에서 두 민족 간에 전투가 벌어짐
*블레셋- 그들은 해양민족
바다 사람들, 주로 그리스에서 발족, 그들은 자신들을 주로 새우로 생각(작은 섬들 지역)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는 우리나라 일본 사이와 같은 국가 간
로잔 조약에서 오스만 투르크에서 본토는 터키, 섬들은 그리스가 되는 조약 체결
해양 민족의 특징으로 아주 호전적이고 기술력 또한 탁월했던 민족
당연히 무기 발전으로 강대한 국가 형성 추구
블레셋의 터키 해양지역을 정복하고 히타이트 점령, 이집트까지 (라암셋 3세때에 기록)
이집트와 블레셋의 전쟁을 묘사한 그림(이집트 입장에서) 이집트가 우세했음
결국 블레셋은 이집트 해안 지역 정복 실패
이스라엘은 지진 않았던 블레셋과의 전쟁은 지형적인 특징으로 가능했다
신체일부를 바치는 굴욕의 국가 간 상황- 강대국의 전쟁 철회를 위해 손목을 잘라 바침
# 블레셋의 다섯 지역(위성도시)
- 각각 왕들을 세운 가드, 에블론, 가자, 아스돗, 아스겔론 연합 국가
다윗시절에 막강한 블레셋이 항복하게 됨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블레셋의 문명을 받아 블레셋의 주 도시를 맡아서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항복을 받아냄
<2012년11월6일 성서고고학>
# 기브아(베냐민 지파의 중십지)
레위인 첩 사건으로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지역.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을 요구함에 하나님께서 제한적인 왕권을 가질 기브아 출신의 왕 세움
사울! 그는 개인적으로는 영향력이 있겠지만, 세력을 갖지 못한 사울.
- 세력을 갖지 못한 개인은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정치. 우리나라는 당을 위주로 정계진행
이스라엘은 유다 혹은 에브라임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생각하지만 베냐민, 직전까지 멸족까지 당할 뻔 약한 지파에서 세워지는 왕!
* 사울의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기브아 지역 발굴
올브라이트 고고학자의 발견을 통해 토기 사용까지 성밖 백성들과의 차이나지 않는 평범함
그리고 왕권의 상징이었던 성의 크기도 아주 미약함을 발견함으로
절대적인 왕권이 아니라 제한적인 왕권을 가졌음. 하나님의 뜻!
그러나 제한적인 왕권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그리하여 하나님께 버림받는 그
사울의 잔존세력 VS 다윗의 세력과의 싸움! 길보아 전투. - 사무엘하5장
기브온 지역- 중앙 산악지역, 계단식 지역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구별된 지역성은 다윗왕 전부터 있어왔다
그것은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의 세력분위기? 유다지파는 세력이 굳이 형성되지 않아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에브라임은 그것을 견제하기 위한 지파로 과거부터 구별적 성향
사사이전부터 유다이냐 에브라임중심으로 하는 연합체이냐 하는 지역성
이런 분위기에 베냐민 지파에 사울이 왕이되는 것은 상식을 깨는 것이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힘들었던 것은 유다출신인 다윗에 대한 지역성 편견이 영향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북쪽의 사람들이 지역성을 포기하고 다윗에게 복속됨. 통일왕국!
이런 이유로 다윗은 제일 먼저 해야 할 정책은 민족의 통일성을 최우선!
북쪽과 남쪽에 지역성 타파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 펼침
1. 수도 천도시도! 헤브론(중앙산악지역)에서 북쪽사람들의 반발을 방지하기 위한
그러나 모두가 반기지는 않은 것은 그 당시 수도였던 헤브론사람들은 지지하지 않고
나중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 때에 그들은 반역하게 됨
- 결국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지역인 예루살렘 그때에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지역(이스라엘이 점령하지 못한 지역)
- 그런 예루살렘 지역(여부스 족속)을 함께 점령하자는 명분으로 통일성 유도
- 삼면이 골짜기로 형성된 지역(예루살렘)은 난공불락! 북쪽이 유일한 점령가능 루트
<2012년11월13일 성서고고학>
다윗왕- 남북통일 정책으로 수도천도 시도! 난공불락이었던 예루살렘 성(당시 여부스족속)
점령시도, 물 긷는 수로의 길을 통해 정복
텔단 석비
당시 농사를 짓던 고고학자료 - 게제르 월력
성전 산 지하 터널, 히스기야 지하 터널
솔로몬의 남과 북의 통일평화 정책이 아닌 남쪽 편향정책 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여로보암의 반란으로 남과 북의 분리
유다 지파(남) vs 나머지 지파(북) 구조의 믿음의 조상 때부터 내려온 갈등 상황
*고고학 발굴자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종교! 바알(가나안 종교)
바알: 대단한 영향을 미쳤던 종교(주전6세기-포로기 상황)
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기 직전. 야훼종교는 소수밖에 없었다. 그 배후에는 절대 다수
바알 종교를 따랐음. 왜 그러했을까?
- 그림 자료: 날씨를 주관하는 농사의 신, 소를 발등상으로 그 위에 서있는 바알 조각 석비
금송아지위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심을 표현 그것 자체도 우상이다!
※ 자신이 생각하는 것도 잘못 아는 것도 우상일 수 있다.
잘못될 수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바알신의 발상지: 우가릿(시리아) - 바알을 섬겼던 신전 발견 자료
농사를 짓게 하는 날씨: 비, 강, 바람, 태양을 주관하는 신
가나안 지역은 풍요한 곳. 바알신도 풍요함 속에서 탄생한 풍요의 신 바알
바알종교란: 최고의 신 ‘el’ 엘. 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가나안 신의 이름을 차용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에서 엘과 같은 표현
최고의 신 엘이 낳은 아들 신 ‘얌’ 바다를 주관하는 신, 혼돈의 세계 다스림
바알(주인이라는 뜻) 내가 주인 삼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풍요와 돈의 신
모트= 죽음의 신
그 중에 바알신이 가장 강력한 신(순환적인 개념의 신) 신년 때마다 다시 살아나는 신
사계절에 따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힘을 발휘하는 신! 힘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있는 신, 한계가 있는 신!
레바논(페니키아인)
해양 민족이었던 그들. 내륙으로 진출할 수 없었던 지역(레바논 산맥, 안티 레바논 산맥)
그런 페니키아인들은 바다로 진출 해양민족이 되어 알파벳 기원이 되는 글씨 제작
그들이 바알 종교를 퍼뜨리는데 한몫.
이 바알종교가 아주 성행한 장소 바알벡(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사이에 위치)
이 평원에서 바알 종교가 크게 융성.
로마시대에 이 평원에 다른 신전들을 세워놓음
이렇게 바알 종교는 퍼져나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전에부터 그 지역에 융성했던 신
사람의 삶속에 농사와 직결되어있는 주관하는 신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종교
그 지역에 내려오는 바알종교적인 문화는 강력하였다.
일월성신을 섬겼던 바벨론(말둑신 종교)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 달신을 섬긴 왕
바벨론의 왕을 새겨놓은 석비 - 하늘의 천체숭배를 표현 하는 석비
바알과 바벨론의 말둑 종교, 담뮤즈 신. 강대국의 종교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힘
가장 무서운 종교 대중적인 종교가 가장 위험하다.
그 대중적인 종교 속에서 유일신 강조하는 이스라엘 야훼종교와의 혼합종교 발생하게 됨
갈멜=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히브리어 여기서 엘리야와 바알제사장들과의 대결
아주 풍요로운 땅의 지역에서 그들이 섬기는 바알 신이 가장 크게 영향을 주는 곳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과의 대결
예후 또한 바알선지자들을 죽이는 종교개혁을 했으나 앗시리아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다른 종교 앞에 절하는 예후. 좋은 평가는 못 받음.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 물을 주관하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엘리야의 요단강을 옷자락 뭉치로 쳐서 가른것도 바알이 신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물을 주관하는 신이시다. 라는 상징
엘리야의 능력이 갑절이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요구한 엘리사는 자신이 엘리야의 수제자이길 원합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옷자락 뭉치로 요단 강을 가른것도 나또한 선생님의 대적
바알과의 대결을 상징으로 보여줌
계속적으로 바알신의 무의미함을 선포하고 있는 엘리사의 모습
바알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만 신이시다. 물을 주관하는 유일한 신이시다.
사무엘 시대에도 법궤를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때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회개를 권고
미스바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쳐들어온 바벨론 강대국에게
건기였던 시기(샤보트, 맥추절)에 우레와 비를 내려 바벨론을 이겼던 때. 비와 우레를 주관하는 신이신 야훼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회개시키려 했던 때
잠언에도 여름에 눈이 오는 것과 추수 때 비가 오는 것. 말이 안 되는 상황. 이런 것도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가능케 하시는 바알이 아닌 야훼 하나님이 신이시다를 강조
바알 종교에 영향이 컸던 만큼 성경에 메시지는 그 바알이 아니라 오직 야훼 하나님만 신!
<2012년11월20일 성서고고학>
유다를 괴롭혔던 종교들.. 유일신 야훼종교의 흔들림.
바알..농사를 주관하는, 물을 주관하는, 풍요의 신이었던 민간 종교와의 대립..
강대국의 종교를 섬기는 모습들, 앗시리아(일월성신), 바벨론(말독, 일월성신)
기복신앙의 종교들..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아니고 바알, 이방신들과의 혼합종교!
종교 혼합주의..
다신주의였던 바알, 이방종교인들은 그 생각으로 야훼하나님도 다신중의 하나로 사고
중심에 바알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도 섬겨줄 수 있다는 사고
고고학 증거들..
브엘세바지역 아래 네게브 지역(남방이라는 의미) 성경에는 남방이라 표현, 그 아래로 내려가서 가데스 바네아를 지나 쿤틸렛 아즈루드 지역 여기서 발굴 작업
발견된 토기 조각이 혼합종교가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자료.
BC9~8c 초반시대
깨어진 조각에 그려진 남자 둘, 여자 하나, 소와 젖을 먹는 송아지 그림.
그 안에 쓰여진 히브리어 글씨들! 결정적 글씨.
여기 중앙에 있는 남자가 야훼(바알), 그의 아세라라고 표현하는 글씨! 하나님께 부인이 있었다는 혼합종교의 결정적 증거!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9~8c에 그들 정신 저변에는 야훼하나님을 바알, 아세라 신앙과 혼합.
# 에스겔 8장에 나타난 혼합종교
5절에 예루살렘 성전 북쪽에 질투의 우상, 질투를 격발케 하는 우상(아세라 목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자는 외침이 많은 혼합주의 종교인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외침!
오직 야훼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 아주 극소수만 존재했던 아주 슬픈 현실!
토기 그림 밑에 사마리아의 야훼라는 표현.
신명기6:4 쉐마 이스라엘 아도나이 엘로헤누 에카드
유일신을 강조하는 말씀..
여러 야훼 신을 신앙하는 당시 정신들.. 나는 어떤 야훼를 믿고 있는 다양함에서 나타난
흔적들.. 사마리아 야훼라는 표현.. (폴리 야훼이즘)
예레미야44장에 나타난 믹돌, 다바네스, 놉, 바드로스 지방
바벨론을 피해 망명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드로스에서 용병의 직업을 주로 하게 됨.
44장15절: 그리하여 자기 아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줄을 아는 모든 남자와 곁에 섰던 모든 여인 곧 애굽 땅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의 큰 무리가 예레미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아스완 지역! 나일강의 범람의 정도, 수위에 따라 한해 농사가 결정. 나일강을 관장하는 신을 섬김!
이 바드로스 사람들이 살았던 엘레판틴 섬! 우리나라 여의도와 같이 아스완 지역 중아에
위치한 엘레판틴 섬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군집했던 고고학 자료들 발견!
여기서 발견된 문서 엘레판틴 문서
엘레판틴 섬에 있던 크놈신! 나일강의 물흐름과 물높이를 주관하는 신!
나일강의 높이를 측정하는 고고학 자료들..
대표적인 운송수단. 펠루카(바람으로만의 동력)
크놈신의 신전은 높은 곳에 위치, 야훼신의 신전은 낮은 곳에 위치- 나일강의 범람시에는
크놈신전은 물에 잠기지 않으나 야훼신전은 수몰되어 버리는 장소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주거지역.
여기 야훼신전에서 발견된 엘레판틴 문서, 파피루스에 쓰여져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서.
이 문서에 나타난 혼합종교의 흔적들..그 내용들
엘레판틴 유대인 군집지역에 야훼신전을 만들었는데 크놈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와서 그 야훼신전을 파괴하였다. 우리의 야훼신전이 무너졌다. 다시 성전을 복구할 수 있게 지원을 부탁하는 내용의 문서들.
거기에 예루살렘에서 보내온 답신의 내용들도 발견.
그 내용에 성전재건은 좋다. 그러나 번제는 드리지 말라.(번제가 있었다는 증거) 매일 드리는 제사 아침 저녁에 양한마리를 번제로
그 번제때에 크놈신전에 해로운 영향을 주었던 상황. 유월절 행사에는 더더욱. 이런 정황에
성전파괴가 행해졌음.
번제가 드려지는 곳은 법궤가 있어야 가능. (법궤가 이 엘레판틴 섬에 있었을 가능성)
그 문서에 가장 중요한 부분. 문안드립니다. 누구누구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식의 편지내용들처럼..
그런 방법으로 크놈과 그의 야훼의 이름으로 인사, 문안드립니다. 라고 기록되어있음
혼합 종교의 증거!!!
크놈과 그의 야훼라는 표현은 크놈이라는 신의 배우자로 격하하는 야훼라고 표현됨.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아무렇지도 않는 문서의 기록상황! 상당한 혼합된 신앙.
크놈신이 우월하고 야훼신은 낮은 식의 종교의식 팽배!!
나름대로 머나먼 타국에서 자신들의 종교전통을 지키려 했던 처절함의 모습을 볼 수는 있으나 성경에서는 이들을 평가할 때! 혼합종교에 빠졌던 사람들로 평가!
온갖 우상들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평가! 아무리 죽음을 불러오는 상황에 시대 정신이었어도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 두려워 할 수 있는, 경외할 수 있는 신앙의 기준에서는 미달되었던 그들의 혼합종교 의식!
어쨌든 살기위한 처절한 삶에서 동화되어버렸던 그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요지부동!
<2012년 11월27일 성서고고학>
* 성서고고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같은 발굴은 예루살렘 성전 발굴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예루살렘 성전은 지형적으로 아람(이슬람지역)지역인지라 발굴자체가 불가능
현재 남아있는 통곡의 벽은 제2 예루살렘 성전임이 확실하다.
- 성전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 발굴 장소는 유대인 지역 ( 통곡의 벽 )
- 먼저 과거 솔로몬 성전의 실 모습은 어떤지 알아보자
가나안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현관, 성소, 지성소)
* 열왕기상 6장
세로*가로*높이 60*20*30
-백향목(판벽한 집) 고급스러운 나무재질, 두로와 히람사람의 도움으로 금박한 화려한 장식
잣나무 바닥
헤롯시대의 성전(미완성 성전) 완성 되자마자 반란진압에 의한 파괴
남아있는 로빈슨 아치(이사야66:14말씀), 윌슨아치, 훌다게이트, 나팔수의 자리, 미끄베
<2012년12월4일 성서고고학>
성전 이후 주전 9~6세기에 걸쳐 성경을 확증해줄 고고학 자료 발굴!
Ⅰ. 주전 9세기
* 모압석비 (열왕기하 3장에 나타난 기록) 모압왕 메사
1860년에 요르단 디몬지 역에서 베두흰들이 발견한 비문
오므리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모압을 수년 동안 억압하였다.
이는 그모스(Kemosh) 신이 모압에게 진노하였기 때문이다.
오므리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그는 말하였다.
“나는 모압을 억압하리라.”
내가 통치하는 때에도 그는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 그의 왕조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다. 영원히 망하게 되었다.
일찍이 오므리는 메데바(Medeba) 전체를 접수하고,
그의 평생을 그곳에서, 그의 아들은 그의 생애 절반인40년을 그곳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그모스 신이 나의 통치기간 중에 메데바를 돌려 주셨다.
그래서 나는 바알 메온(Baal Meon)을 짓고,
그 안에 저수지를 짓고,
키리아타임(Kiriathaim)도 건설하였다.(lines 5-9)
아주 중요한 부분에 야웨라는 부분이 고대근동 고고학 유물 중에서 최초로 등장했던 부분.
북이스라엘 왕 중에 고대근동에서 가장 기억되고 있는 왕은 ‘오므리’
* 예후왕의 종교개혁이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했던 증거 고고학 유물
살만에셀 왕 시대에 오벨리스크
성경인물 중에 얼굴과 이름이 함께 등장한 유일한 고고학 자료
앗수르 니느웨에서 발견된 살만에셀3세 블랙 오벨리스크 주전9세기
자기의 힘으로 가능한 바알에 대한 종교개혁 했으나 강대국의 종교를 섬기면서 선지자의
책망을 듣는 예후. 그것을 증명하는 오벨리스크 비문
Ⅱ. 주전 8세기 (웃시야, 아하스, 히스기야, 요시야)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흥황 했던 시기 ; 790년경에 늘 괴롭혔던 아람국가가 앗시리아에게
패배하고 회복하지 못하는 아람 국 (여로보암2세때)
그 당시 영토는 가장 이상적인 영토 확보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이상적인 영토를 확보할 만큼 흥했던 시기
그러나 강대국에 출현에는 어쩔 수 없는 북이스라엘 국가,
앗시리아 국가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 베가시기에 아람왕 르신과 동맹으로 남유다 침공
예루살렘에 쳐들어온 광경을 보며 이사야에 예언!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그러나 그 예언을 무시했던 아하스왕 그리고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 아람국
* 이런 국가 정황 속에 있었던 히스기야 왕의 반 앗시리아 정책
이때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던 기혼 샘이 넘쳐 흘러나온 기드론 골짜기 그때 내려가는 물을차단 시켜 그것을 다시 성안에 다시 끌어올리는 시도.
그래서 터널을 통해 기혼샘 물이 실로암에 저장되는 히스기야 터널 고고학 발견
이때 실로암 터널은 앗시리아에 저항하는 의미의 히스기야 터널
19세기 말 어린이에 의해 발견된 2000년 흘러온 히브리어 기록 비문 발견
이 유적은 히스기야 터널이 어떻게 작업한 과정을 기록된 비문
실로암 석비의 내용
터널이 뚤리게 되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석공들이 도끼를 들고 각자가 파들어가서 3규빗 정도 남았는데 서로 반대에서 만나는 장면
반대쪽에서 서로 출발한 석공들의 상황
* 또 다른 8세기 유물들, 반 앗시리아 정책에 의해서 침공해 오는 앗시리아 산헤립에 의한
산헤립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한 산헤립의 프리즘
기록된 쒜기문자를 번역
유다의 히스기야는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요새화된 성들을 포위한체 터널을 통하여 점령하였다. 히스기야는 그의 왕국 안에서 새처럼 감금하였다. 8세기 말
Ⅲ. 주전 7세기의 유적들
* 오스트라콘(도자기 조각들) 어떤 문서들, 편지 내용들
라기스 오스트라콘 가장 유명 라기스 지역은 가장 최전방 지역이었다.
주의 종이 내종 요아스에게
멀리 앞에는 성들이 함락됨을 보며 간절히 원군을 요청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을 나타내는 내용.
* 여호야긴 토판
열왕기하 25장27~20절에 기록된 여호야긴의 내용을 증명해주는 토판문서
바벨론왕의 여호야긴 왕에게 주었던 쓸 것 들을 기록한 문서
* 나보니두스 왕(바벨론 마지막 왕)의 토판문서 (이사야46장)
말둑신의 종교를 거부하여 백성들의 민심은 돌아섰던 내용을 기록한 나보니두스 왕에 대한
비판하는 문서들의 내용.
말둑신의 신년 축제에 또 다시 나오지 않았던 나보니두스 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문서
나보니두스 왕의 돌아선 민심을 고레스왕이 기회를 찾아 점령정책을 썼던 증거 문서
* 고레스 실린더 - 나는 말둑의 종으로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