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에 서점에 들러 소설코너를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먼저 발견한 후배가 인사 대신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이거 읽어보세요, 안 읽어보셨으면..." 하고 말했습니다.
이미 대학 3학년 때 평론으로 등단해서, 평론집도 내고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후배입니다. 명색이 선배지만, 학점이 모자라서 1년 더 학교를 다닌 사람이 뭐라 할 말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약간 시큰둥한 표정으로 흘끗, 후배 얼굴과 책 표지를 훑어보고 "추천사가 있어야지..." 했지요.
"올해 평론가들이 최고로 치는 작품이에요. 한겨레문학상도 받았고."
역시 시큰둥하게 "그래?" 라고 말한 다음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사 왔습니다.
그날 밤, 오랜만에 새벽까지 책을 읽었습니다. 다음날 출근해야 된다는 생각은 아예 접었습니다. 책장 덮지 않고 한 자리에서 그렇게 마지막 쪽까지 단숨에 읽은 책은 근래 드물었습니다.
간결하지만 섬세한 표현력, 탄탄한 짜임새....
신인 작가지만 장수를 예감케 합니다.
60년대생 작가들의 바통을 이어, 우리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만한
역량을 지닌 70년대생 작가가 될 것 같습니다.
돈 있고, 시간 있으신 분들...독서는 취미가 아닌 교양활동이라고 여기시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세요. 책값 8천원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결정이 어려우신 분들을 위해 독후감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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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름 : 나의 아름다운 정원
지은이 : 심윤경
펴낸곳 : 한겨레신문사
값 : 8천원
'속 깊은' 소년의 해맑은 성장기
1970년 대 말 서울 광화문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인왕산 허리 달동네. 시난고난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가 소년 한동구의 눈을 빌어 섬세한 감성으로 펼쳐진다. 가난과 미움, 갈등, 그리고 여전히 엄격한 가부장적 가족질서가 자리잡고 있지만 소년을 통해 이해, 용서, 사랑, 화해로 나아가는 줄거리는 때때로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게 한다.
자칫 나른해지기 쉬운 배경과 소재를 씨줄과 날줄로 삼고 있으면서도 첫 장부터 경쾌하게 책장을 넘기게 된다. 간결하지만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문장력과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살 터울의 여동생 영주가 태어난 1977년부터 동구네 다섯 식구에게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는 순간들"이 펼쳐진다. "어지간히 못난 놈들도 동생이나 형이랑 같이 있으면 한결 번듯해 보인다"고 부러워하던 동구는 귀여운 구석도 눈에 띄는 갓난 여동생을 사랑해 주기로 마음 먹는다.
가정 분위기는 매일 살얼음판이다. 할머니가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생트집을 잡아 어머니를 곤경에 빠뜨리는 등 불화의 불씨를 지피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합리적인 중재자 역할을 외면하는 아버지는 소년의 눈에도 '비열한 인간'이라고 비쳐진다.
할머니의 거침없는 핍박과 무뚝뚝한 아버지의 간헐적 폭력의 희생자는 어머니와 동구다. 어머니가 "인왕산 치마바위처럼" 참을성을 보이고 연탄가스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에서 잠을 자는데 익숙해진 정도인데 비해 동구는 훨씬 증세가 심각하다. 주눅든 생활이 체질화되어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데 서툰 난독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다른 선생님들은 눈길조차 한 번 제대로 던져주지 않던 열등생 동구에게 따뜻한 배려를 해주는 담임 선생님이 등장하면서 동구는 부쩍 성장하는 계기를 맞는다. 미련하고 덜렁댄다고 업신여기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각 깊고 마음 넓은" 아이로 여겨주고, 난독증을 치유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담임 선생님을 동구는 "성녀나 여신쯤으로 생각하며 숭배와 경외를 바치며" 따르게 된다.
섬세하고 경쾌한 글놀림은 한결같지만 엄혹한 시대 1980년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한 징후가 곳곳에 복선처럼 배치되어 긴장감을 높여간다. 아버지는 보증 선 것이 잘못 되어 월급 차압에 적금해약 사태를 맞이하자 초라해졌고, 어머니의 신경질은 나날이 늘어간다. 집 밖에서는 대통령이 죽어서 경복궁에 군인들이 설치고 시내에 탱크가 진주하는데, 안타깝게도 동구는 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만다. 동구가 클 때까지 "남자 친구도 사귀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이대로 기다릴 게"라고 약속한 선생님이 어느 날 광주 고향집에 간 뒤 소식이 끊기는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땅이므로 선생님의 죽음은 독자 입장에서 예측 가능한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황금빛 깃털의 새'라는 제목이 붙은 이 단원은 또 하나의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 자동차 사고처럼 아차! 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 이로 인해 가정은 한순간에 풍비 박산나고 말지만 결국 '속 깊은 아이' 동구의 재치로 화합의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어른들의 이중적인 세계에 놀라 성장을 멈춰버린 '양철북'의 오스카와 달리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물론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비틀린 관계를 바로 잡아가는 어린 소년의 어른스러움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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