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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가톨릭의 독신 제도
송양 : 그런데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독신제는 성서 어긋나는 것 같아요. 성서 말씀을 보세
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라" .(창세 1, 28)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박신부 : 예,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인류 번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초대 인류와 조상이
었던 아담에게 한 말씀입니다.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톨릭에서 독신 제도를 인정한다고 해서 결코 결혼을 경멸한다
든지 등한시하진 않습니다. 다른 교회에서 없는 결혼 성사를 통해서 결혼의 신성성을 더욱
강조합니다.
송양! 성당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송양 : 전연 없습니다.
박신부:
밖의 미 신자들도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결혼 성사를 보고는 모두 결혼의 신성성을 얘기합
니다.
그런데 송양이 성서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신약 성서에 독신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나머
지 독신 생활을 권고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파 사제들이 이혼 문제를 들고 나와서 예수님의 의견을 들으려고 했던
장면과 더불어 독신의 의미를 설파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
셨다.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
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
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
8-12)
이 말씀을 하나하나 분석해 봅시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첫째로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 이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성의 불구자로 태어
난 고자를 뜻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은 개인적으로 성의 불구자는 아니지만 사회적인 여
건 또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셋째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결혼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마는 더 높은 하늘 나라를 위해서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
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을 받아들인 만한 사람은 받아들여라." 하심으로써 모든 사람
이 다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늘 나라를 위해서 아름다운 순결을 바칠 뜻이 있는 사람
만이 할 수 있다는 일종의 권고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독신 생활은 어디까지나 자유 선택의 문제입니다.
송양 : 그런데 천주교 신부님들은 모두가 독신 생활을 하잖아요?
박신부 : 그렇습니다. 가톨릭의 독신 생활은 복음 성서의 권고 말씀을 따라 교회에서 교회
법령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톨릭 신부들의 독신 생활의 교회법은 오늘이라도 얼
마든지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송양 : 그렇다면 예컨대 로마의 교황님이 신부들의 독신 제도를 폐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지요?
박신부: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 교회법상에는 스스로가 독신을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 성품 성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서 신부들의 독신 제도가 없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 안에서의 독신 생활 그 자체는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를 볼 것 같으
면 독신 생활의 고귀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린다면 초대 교회에서는 가톨릭의 성직자들도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일반 평신도들이 성서에서 말씀하신 독신의 고귀성을 깨닫고 스스로 모든 것을
버리고 산으로 사막으로 들어가서 독신 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깡그리 바치는 생활
을 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은수자(隱修者)’라고 했으며 이들이 모여서 결국 가톨릭의
수도회(修道會)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독신이었고 그가 간택한 세자 요한도 독신이었으며 열두 제자 중에서 독신이
었던 사도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이라든지 또는 요한의 묵시록에서 볼 수 있는 독신자
의 특은을 봅시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구출된 십 사만 사천 명 외에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이며 숫총각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묵시 14, 3-4)
독신자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표시하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도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태 19, 27)
이 고백을 보아서 그는 처음에는 결혼을 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다음부터
는 하늘 나라를 위해 부인과 별거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들입니다. 그가
부부 향락과 자녀들과의 가정의 단락을 누리면서 어찌 감히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
습니다."라고 했을 것입니까?
독신 생활은 인간 자연적인 욕망의 부정은 아닙니다. 더 큰 것을 긍정하기 위해 그것들을
버린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독신이었던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과 과부들에게는 나처럼 그대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
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1고린 7, 8-9)
바오로의 말대로 독신이 더욱 좋지만 "자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리
고 바오로는 독신 생활의 근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결혼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
에 마음을 쓰게 되어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나 처녀는 어떻게 하면 몸과 마
음을 거룩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쓰지만 남편이 있는 여자는 어떻게
하면 자기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 일에 마음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1고린 7, 32-34)
진정 하느님만을 위해 모든 생을 바치겠다는 성직자라면 예수님의 복음 정신에 철두철미해
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양! 우리 한번 솔직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두 성직자가 있다고 생각합시다. 한 사람은 부인과 다섯 아들을 가진 성직자요, 다른
하나는 오로지 하느님 사업만을 위해 사는 독신자라고 생각합시다. 주일 연보를 앞에 놓고
우선 처자가 있는 성직자는 그 돈으로 아들 미국 유학시킬 생각을 먼저 할 것이고 50평 짜
리 맨션 아파트를 사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처자가 없는 독신
성직자는 그 돈으로 교회 신축, 복음화를 위한 자금, 불우 이웃을 위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
겠습니까?
또 하나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아 봅시다. 처자가 있는 서울 모모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저
기 섬나라 거제도나 완도 교회로 가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같은 교직자로
서 자기만은 꼭 서울 중심가의 부자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
까? 그러나 가톨릭의 성직자는 예컨대 서울 명동성당 주임 신부로 있다가 저기 산골 미리내
정당으로 가라면 아무런 반응 없이 주님의 뜻을 따라 떠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주님의
진정한 복음 사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 정신보다 십일조에 눈이 어두운 목회자가 있
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독신 제도의 말씀을 하신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성직자는 성품 성사를 받은 사제(司祭)들입니다. 개신교에는 ’사제’라는 개
념이 없기 때문에 신부들을 목사님들처럼 생각하려고 합니다 구약 성서에 비친 사제들의 모
습을 잠깐 봅시다.
"’거룩한 떡밖에 없소이다. 한데 장군의 부하들은 여인을 가까이한 일이 없는지요?’하고 묻
자, 다윗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번 길을 떠날 즈음해서 며칠 동안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
았습니다 . 오늘만은 절대로 깨끗합니다.’ 그제야 사제는 거룩한 떡을 그에게 주었다."(1사무
21, 4-6)
이와 같이 거룩한 빵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몸이 깨끗해야 했다면 더구나 제단에서 성제(聖
祭)를 집행하늘 성직자의 독신은 당연한 결론일 것입니다.
송양 : 신부님 말씀에는 다 일리가 있긴 있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끔 여자 관계로 신부직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결과적으로 독신 제도가 주는 악한 평판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신부 : 사실대로 말씀드려서 가톨릭 신부로 살다가 독신 생활에 자신을 잃고 환속하는 사
제들도 있습니다. 16세기 마르틴 루터가 그 첫 공식 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송양 :신부가 환속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박신부:
현 교회법상으로는 공식적인 성직 생활을 할 수 없고 이런 경우에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면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평신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송양 : 이상 독신 제도에 대해서 말씀이 나왔으니 가톨릭의 수도 생활에 대해서도 좀 알고
싶어요.
박신부:
수도 생환의 기원에 대해서는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가톨릭 신자들이 초대 교회에서 더
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더욱더 복음대로 살기 위해서, 예컨대 마태오 복음 19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따라 살아 보겠다는 데서 수도 생활이 출발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 ’네가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 젊은이가 ’저는 그 모
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
께서는 ’네가 완전한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이런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더욱 완전한 자 되기 위해서 모여 사는 사
람들이 곧 수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밖에서는 수도 생활의 참된 가치를 모르기 때
문에 수도자들은 ’현실 도피주의자들’ 또는 ’염세주의자들’ 또는 ’사랑에 실패한 군상들’이
라고도 합니다.
참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저는 저의 가슴에 타고 있는 값진 사랑을 잠시 지나
가는 인간에게 바치고 싶지 않고 영원한 그분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들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가치스러운 영원한 하늘 나라
의 보화가 있다는 절대적인 가치를 생활을 통해서 증명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복음
의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송양 : 그런데 가톨릭에서 보면 메리놀파니 바오로파니, 또 무어라든가 , 살레시오파니 하면
서 많은 파가 있는 것 같아요.
박신부 : 역시 가톨릭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씀이지요. 개신교에서 장로 교파니 침례 교파
니 하면서 종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말씀입니다. 메리놀회니 가르멜회니 하는 것은
수도회의 이름들입니다. 가톨릭에는 여러 가지의 수도회가 있습니다. 사회 봉사의 성격에 따
라 또는 복음화의 방법에 따라 그리고 수도원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다양한 수도회가 있습
니다.
송양 : 그 많은 수도회를 다 알 수는 없을 것 같으니 근본적인 수도 정신이 무엇인지만 알
고 싶습니다.
박신부:
예. 금방 말씀드린 대로 교육 사업만을 하는 수도회, 사회 복지 사업, 또는 매스컴을 통한
복음과 사업 등등의 그 봉사 방법만 다를 뿐 수도회의 기본 정신은 다음 세 가지고 모두 공
통됩니다. 즉 청빈, 정결, 순종입니다.
청빈 정신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개인 소유권 없이 사는 생활, 즉 물질 속에 살지마는 물
질을 초월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정결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 있는 독신 생활을 통한 전인격을 하느님께 봉
헌하는 생활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정신, 즉 하느님의 복음 정신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교회의 가르침에 순종
하고 동시에 수도원 장상들에게 순종하는 정신입니다. 예수님이 성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
가를 지신 것처럼 하느님의 어떠한 말씀에도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순종의 생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즉 수도 생활에 대해서 잘 알고 싶으시면 ’결혼 성소와 수도 성소’(가톨릭출
판사 간)라는 책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끝으로 하나 참고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프랑스 ’테제’란 곳이 있어요. 거기는 전 세
계 젊은이들의 교회 일치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놀란 것은 거기에는 거의 많은 기독교 종파들이 모여 있는데 개신교 청년들
이 독신 생활을 하면서 수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0. 미사 성제와 성체 성사
송양 : 독신 제도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신부를 사제(司祭)라고 하셨고 또 성품 성사를
말씀하셨을 때에도 소위 신권(神權)이란 표현을 하셨는데 신부를 사제라고 하시는 그 이유
가 무엇입니까?
박신부 : 송양, 혹시 가톨릭에서 바치는 ’미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오래 전에 친구와 함께 성당에 꼭 한 번 가 본 적이 있어요.
박신부 : 그것으로써 가톨릭을 알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의 종교 의식의 핵심이 곧 ’미사’입
니다.
미사는 한마디로 종교적인 제사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절대자에 대한 경신 행위로서
종교 의식이 있고 고기나 기타 곡물로써 제사를 바치는 종교 의식으로 나타납니다. 구약 시
대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제사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뭇 민족 사이에 크게 떨쳐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며 향기롭게 제물을 살라 바치고 깨끗한 곡식 예물을 바치고 있다."(말라 1, 11)
구약의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사를 바친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창세 4
장)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바쳐진 유일 무이한 완전한 제사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밖에 없었던 가장 완전한 제사, 이것으로 인해서 인류가
하느님과 궁극적으로 화해되면서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린 십자가상의 제사, 이것을 재현해
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받는 길이 곧 미사 성제(聖祭)를 통해서 이루어집
니다. 그래서 이 제사의 주역들을 ’제관’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톨릭의 신부들은
단순한 설교자만이 아니라 제단에서 제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입니다.
이 미사 제사와 연결된 성체성사(聖體聖事)는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
니다. 최후 만찬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서 "내 살이요 내 피니라."하신
말씀을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성변화(聖變化)되는 성체(聖體) 성사의 신비는 역시 가톨릭에
만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 미사 성제와 성체 성사하시는 대사제
로 오셨습니다 .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
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9, 11-1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
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히브 10, 12-14)
예수님의 희생의 제사가 인류 구원의 필수 조건이었다면 오늘날 예수님의 그 희생의 은혜를
받는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미사 성제입니다. 십자가상의 제사가구체적으로
최후 만찬 시에 미사의 형식으로 변한 것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
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
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틀어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루가22, 19-20)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이 성찬식
을 지내 왔으며 오늘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원의 신비를 이 미사 예식을 통해서
기념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받습니다.
송양 : 성서대로 보면 "이것을 행하라."고 했지 그것이 직접 우리 구원에 어떤 연결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 개신교에서도 성찬식을 하고 있습니다.
박신부 :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성찬식은 하나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행되
는 상징적인 뜻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미사 성제는 그 빵과 포도주가 곧 예수님
의 진실한 몸이요, 피가 된다는 성체의 실재를 의미하는 신비의 제사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서 빵과 포도주가 사제인 신부의 축성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참된 몸과 피로 변한다는 성
변화(聖變化)의 교의입니다.
송양 : 성서에 정확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박신부:
예, 4복음서에 예수님의 성체 교리만큼 자세하게, 그리고 여러 번 되풀이된 내용은 없습니
다.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며 이것을 먹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이
교리는 알아듣기에는 너무나 벅찬 신앙 개조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
곧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것뿐입니다. 송양, 요한 복음 6장을 잘 살펴 읽어
보십시오. 요한 복음 6장에는 처음에 빵의 기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일
러주시기 위한 서론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생명을 위한 빵을 주신 다
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빵을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
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
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
한 6, 47-51)
송양! 우리 구원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I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 16)
하신 말씀을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
", 여기서 믿음의 내용 중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믿고 먹는 사랑들이 구원을 받는다
고 예수님은 못을 박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개신교에서는 이 빵을 예수님의 참된 몸이라고 믿지를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누가 믿겠습니까?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
다."(요한 6장 참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고 하셨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어떤 상징적인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친절하게 설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은 말
그대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요한 복음 6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때부
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는 열두 제자를 보시고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고 반문하시
면서 "물러가려면 물러가라 내 말은 진실되기에 더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셨
습니다 그 때 열두 제자 중 으뜸 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 63-68)하고
말했습니다.
자!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성서에서 우선 세례의 중요성을 얘기하
셨고 다음에는 당신 몸을 받아먹는 성체 성사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이 얼마나 명확한
말씀입니까?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서를 읽고 그 안에서 영원한 구원의 진리를 찾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지난날의 편견을 버리고 어떤 고집도 비판도 버리고 진실로 성서 말씀
에 귀를 기울여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체면이나 위신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신앙의 차원입니다.
송양 : 그렇게까지 깊이 성서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가톨릭의 신부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
은 사제권(司祭權)에 의해서 성체 성사를 진행한다는 뜻이군요.
박신부 :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신권의 소
유자이며 동시에 사제들이며 그래서 미사 성제를 집전하고 그 성체를 성당에 모셔 두기 때
문에 가톨릭의 교회당은 예배당이 아니고 성당(聖堂)이라고 합니다. 예배만을 보는 교회당만
은 아닙니다. 예배도 드리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제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송양 : 신부님,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지난날 저의 신앙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편견적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가톨릭의 의식 위주의 사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11. 가톨릭의 종교 의식
박신부 : 흔히들 말합니다. "가톨릭은 형식주의적인 종교이다." 그러나 종교학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무릇 참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즉 교의(敎義),
종교, 윤리, 그리고 종교 의식(儀式)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에서든지 종교 의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종교에 있어서 의식의 필요성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주체가 ’인간’이란 점에서 비롯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적인 요소와 물질적인 요소인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
해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정신 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행위를 하는 인
간이란 뜻입니다. 감각적인 외적 행위를 종교에서는 ’의식’이라 하고 일반 대중 사회에서는
’형식’ 또는 ’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송양 : 그런데 가톨릭교는 지나치게 의식 위주의 종교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박신부:
예, 외부에서 볼 때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차근 차근 ’형식’ 또는 ’예식’이란 문제점
을 얘기해 봅시다.
저는 우선 사회에 있어야 하는 소위 ’형식’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하면서 ’형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내용을 담는 그룻이다."라고 답변하고 싶어요.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결국 ’악수’라는 형식인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우정
의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송양 : 그야 물론이지요.
박신부 : 그런데 그 우정의 농도에 따라 그 악수의 행동도 달라집니다. 별로 달갑지 않은 친
구라면 그냥 힘없이 슬쩍 손만 잡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우정에 넘치는 친구끼리라면
팔이 떨어져라 흔들어 댑니다. 그 때 그 우정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에 아마 그들은 "저 사람들 돌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형식 또는 의식이 많이 있는데 그것의 근본 내용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가톨릭의 의식이 그만큼 성대하고 엄숙하고 장엄한 것은 그만큼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이 되겠고 또는 경신 행위의 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 의
식의 뜻을 모르는 데서 ’형식주의’라는 표현이 나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어버이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뜻에서 명절이 오면 큰절을 합니다. 그 형식은 자녀
된 자로서의 어버이에 대한 존경의 표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큰절을 하기 위해서 먼저
좋은 옷차림을 하고 얼굴도 깨끗이 씻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 앞에 나타난 인간의
경신 행위에도 최대의 화려함과 성대한 의식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
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
다."(필립 2, 10-11)
여기서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하느님을 찬미함은 지당한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도 지
상 생활에서 많은 형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시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
려라’라는 뜻이었다."(마르 7, 33-35)
"손가락을 귓속에 넣고", "침을 발라", 이따위 형식적인 행동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
리스도에게 필요했던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감각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의식에서 일어서고 앉고 무릎을 꿇고 하는 자연스러운 종교 의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최후 만찬 의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
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루가 22, 19)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그리고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신 이 말씀을
보아 종교 의식은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명령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도 보면,
"야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긴 다음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다. 그리고
다윗은 모시 에봇을 입고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과 함께 나발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올라왔다."(2사무 6, 13-15)
"솔로몬 왕은 자기에게 모여 온 이스라엘 회중을 이끌고 궤 앞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과
소를 제물로 잡아 바쳤다. 그리고 나서 사제들은 야훼의 계약궤를 성전 밀실 안 지성소로
모셔다가 거룹들 날개 아래에 안치하였다."(2역대 5, 6-7)
구약 시대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보지 않습니까? 특
히 ’레위기’에 나타나는 제사는 종칠 의식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습니까?
학생들이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받는 졸업장도 ’졸업식’이란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나는 사람들에게 ’장례식’이란 고별식이 있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부부
계약을 위해서도 성대한 ’결혼식’이 있다면 더구나 하느님과의 영원한 행복과 생병의 계약
이 이루어지는 종교에 있어서 그만큼 성대하고 엄숙한 ’의식’이 따라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신앙 행위는 마땅히 인간적
이어야 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느
님이 인간이 볼 수 있도록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인간입니다. 천사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닙니다. 그리고 동물도 아닙니다. 영육의 결합체인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요소가
담긴 종교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부처님 앞에서 절하고 비는 종교적인 의식을 우리는 어떻게 형식주의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3 1절에 우리는 기념식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내용 아니겠습
니까? 그것을 어떻게 순수한 형식주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2. 연옥에 대해서
송양 : 성전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 연옥(煉獄)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것도 처음 듣는 이
야기입니다.
박신부 : 먼저 하나 여쭈어 보겠는데요 개신교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까?
송양:
???
박신부: 개신교는 너무나 많은 교파가 있고 또 교파마다 주장하는 교리가 나르기 때문에 개
신교 교리를 획일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마는 일반적인 개신교의 교리에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옥 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양 :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우리 교회에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박신부: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에는 연옥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사람이 죽은 다음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전연 죄의 그림자도 없는 깨끗한 영혼은 천국으로 가고 대죄 중에
서 하느님과 영영 등을 진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이란 단련을 받는 곳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그 죄에 해당되는 보속을 치
르는 곳이지요.
송양 : 그 기간은요?
박신부:
그 기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법정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극형에 처하는 방법으로
사형 언도가 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자들은 무죄 석방이 되지만 그밖에 죄에 따라 유기 징
역이 있지 않습니까? 그 유기 징역의 기간은 죄와 정비례하지요. 연옥의 벌도 마찬가지입니
다.
실로 연옥이 없다면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27) 하신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겠어요. 송양!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송양이 지금 죽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천
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송양 : ???
박신부 : 그렇게도 자신이 없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듭니까?
송양:
글쎄요. 그렇게 질문을 받으니 연옥이 있으면 정말 위안이 될 것 같습니다.
박신부 : 순수히 어떤 위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극히 상식적인 사고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송양:
그런 것을 상식으로만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성서의 근거가 있습니까?
박신부 : 저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성서 이외에 성전의 권위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연옥설은
주로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만 성서에도 그 뜻이 밝혀져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 보면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
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
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
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 43-45)
그런데 저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부정하고 이 마
카베오 성전을 성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를 우리는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생각하는 연옥의 존재를 믿었
기 때문입니다.
송양 : 신약 성서에는 연옥에 대해서 어떤 子절이 있습니까?
박신부 : 신약성서에는 구약성서처럼 명확한 기록은 없지마는 연옥을 암시하는 구절은 있습
니다. 예컨대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
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 32)
여기서 내세에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암시가 있지요. 그러니까 연옥에서 천국에 가
기까지 죄의 벌을 받는 곳이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
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
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
할 것이다."(마태 5, 25-26)
이 옥은 연옥을 의미합니다. 지옥도 옥은 복이지만 거기서는 나을 수 있는 옥은 아닙니다. "
나을 수 있는 옥"은 곧 연옥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할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 13-14)
공심판 때에 인간의 업적을 시험하는 것은 불입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
들"은 곧 연옥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송양 : 그런데 연옥에도 불이 있다는 뜻입니까?
박신부 : 연옥 단련은 불로써 이루어집니다. 연옥의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사람들과 같아서
자기들 힘으로는 그 보속을 경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사람들이 바치는 기도와 희
생을 통해서 그들의 보속은 경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
위령 미사’를 위시해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진정 하느님께 죽은 자
의 명복을 비는 거지요.
송양 : 전통상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전통을 들 수 있습니까?
박신부:
유명한 성인이신 아우구스티누스 아십니까?
송양 : 어거스틴 성인 말이지요?
박신부:
예, 영어 발음으로는 어거스틴이라 하고 라틴어 본 발음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대학자이며 가톨릭 주교였습니다. 그분이 쓴 ’고백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는 구절이지요.
"내 마음의 천주님, 내 모친의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 하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처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에 기도드립니다. 저의 어머님이 저의 아버님과 함께 편안히 쉬
게 하소서."(고백록에서)"
이렇게 대성인 아우구스티누스도 돌아가신 어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송양! 혹시 로마에
가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송양 :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박신부 : 언젠가는 가시는 기회가 있겠지요. 로마에 가면 초세기 박해 시대에 신자들이 모여
서 기도했던 그 옛날 무덤들인 카타콤바라는 지하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그 당시 2, 3세기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흔적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송양 : 그렇게 중요한 교리인 연옥에 대해서 개신교에서는 왜 말이 없는지 전연 모르겠네
요?
13. 소위 종교 개혁의 문제
송양 그 동안 가톨릭의 교리를 대충 들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
던 그 당시의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신부 소위 종교 개혁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여기서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만을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물론 그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성직자들이 타락했습니다.
송양 그래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그 때 타락한 가톨릭 교회 앞에서 새로운 개혁을 하지 않으
면 안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명을 느꼈다고 주장합니다.
박신부
예, 잘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다른 게 아니
라, 그 당시 교회 일부 성직자들의 부분적인 타락이었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의 타락이 아
니었다는 점입니다.
송양! 그 당시 가톨릭에서 가르친 교리상의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그건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면죄부사건" 또는 "종교재판" 등등 가톨릭에서 너무나 지
나친 일을 저질렀지요!
박신부
송양, 우리 정신을 차리고 얘기합시다. 전번 소위 "면죄부"사건에 대해서 얘기할 때에도 말
이 있었지마는 일부 몇몇 성직자들의 비행을 교회 전체에 연결시킬 수 없으며 더구나 그것
이 가톨릭의 정통 고리와는 전연 관계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가끔 목사님들의 재산 문제, 권
력 투쟁, 신도 유도 작전 등등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도
또 개혁을 해서 전연 다른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원칙을 주장한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
까?
문제는 마르틴 루터의 소위 종교 개혁은 근본적으로 그 각도와 측면이 엉뚱한 데 있었습니
다. 정확히 말해서 타락한 성직자들을 상대로 개혁을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정통 교리
를 자기 임의로 뜯어고쳐 놓고는 종교 분열을 조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 개 혁
"이라 하지 않고 "종교 분열"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부 정치인들의 타락을 내세우고 민주주의의 자체를 제
거하고 공산주의나 기타 다른 독재 정치를 내세웠다면 그것이 진정 가장 건설적인 개혁이라
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송양 정통적인 교리라니요?
박신부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교회의 기본 교리를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왔어
요. 루터의 신학 이론은 세 가지로 요약되지요.
첫째로 신앙의 규범은 성서뿐이고 또 성서는 자유 해석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런 주장을 내
세우면서 교회의 교도권(敎導權)을 완전히 무시해서 전통적인 사도들의 가르침을 내동댕이
쳤습니다. 저번에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도 얘기가 있었지마는 성서 자유 해석은 드디
어 종교 분열의 종파주의만을 조장했을 뿐입니다. 같은 성서 구절을 놓고 저 목사님은 저렇
게, 이 목사님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붙이니 그 어느 것이 진정 하느님의 가르침
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고 그러니까 결국 많은 종파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 자유 해석
이 저지른 결과는 한국에만 해도 지난번 문공부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의 66종파, 세계적으
로는 약 5백 종파의 개신교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피 많은 종파가 다 그리
스도의 진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종파가
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개신교 신자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분의 말에 의하면, 개신교의 종파 싸움에 환
멸을 느꼈다고 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한 교리 안에 통일된 가톨릭에 와서 진정 참된 진리
위에 위로를 받았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실은 개신교 안에서의 종파심은 심각하지요. 남의 집안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송양 신부님! 저희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성서 해석은 각자 하되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서 한
다고 하시던데요?
박신부 성령의 이름을 대는 목사님은 그래도 훌륭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성서 해석을
한다는데, 그렇다면 한 분이신 성령은 그 가르침도 같아야 되겠지요?
그런데 같은 성령이 왜 그렇게 서로 다른 성서 해석을 합니까? 성령이 型개졌다는 말입니
까? 성령이 수백 개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송양 그건 교파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박신부
송양이 성서를 읽을 때에 성령이 직접 그 의미를 가르쳐 줍디까? 많은 사람들이 환상에 빠
져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서 말씀 잘
못 알아듣고 구원의 길을 놓쳤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루터에 의하면 성서만이 신앙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해서 성서 외에는 모든 것을 거
부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그렇지요?
송양 성서 내용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
다.
박신부
옳은 말씀입니다. 저번에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도 그런 얘기가 있었지만 가톨릭에서도
성서를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우선 성서 중심 그리고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성전을 중요시하고 나아가서는 교회의 교도권에 의한 가르침 이것입니다. 개신교에서
도 성서에 없는 것을 많이 하고 있어요?
송양 예컨대 뭔데요?
박신부
개신교에 있는 권사니 집사니 하는 직책, 특히 요즈음 와서는 "명예"를 붙여서 주는 직책들
그리고 수십 종에 달하는 교회 헌금, 이런 것은 성서에 없습니다.
송양 성서에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있어요!
박신부
예, 있습니다.
"십분의 인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
지 않겠느냐?."(마태 23, 23)
이 말씀 중에서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의 질서입니다. 자선 행위를 하면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송한 얘기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목
사님 설교, 특히 부흥회의 설교의 기본 내용이 주로 돈 얘기, 십일조의 얘기라고 듣고 있습
니다.
그 십일조가 정의롭게 사용되고 있는지, 정말 복음적으로 처리가 되는지 잘 모릅니다. 성서
를 너무 자기 위주로 해석하고 성서에 없는 것도 적당하게 자신의 유익에 맞추어 하는 목회
도 많지 않습니까?
송양 신부님, 그 말씀에는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교회와 돈’, 이 문제는 약간 심각한 것
같아요.
박신부 죄송합니다. 돈이 많으면 부패가 따라오는 것이 원칙적인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성서 자유 해석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집을 찾아가는 데 길은 하나이고 정확해야
하는데, 구원으로 가는 길은 제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우리 구원의 문제입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 하는 인생의 가장 귀중한 문제입니
다.
송양 신부님 말씀을 듣고 보니 성서 자유 해석과 ’성서만의 규범’이라는 설은 문제가 제기
되는 것 같아요!
박신부
둘째로 루터의 교리는
"신앙만으로 구원."
이런 이론입니다. 인간의 어떤 선행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 28)
이 말을 인용하여 인간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내 세우면서 야고보서에 있
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
26)
이 말이 극히 못마땅해서 그는 야고보서는 성서가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이 얼마나 개인주의적인 신앙 태도입니까? 아마 그가 가톨릭의 신부로서 독신 생활까지 하
느님 앞에 엄숙히 약속을 하고도 그것을 쉽게 팽개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미 이런 이론에
근거를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위 종교 개혁을 했다는 장본인인 루터가 가장 신성한 독신
의 약속을 깨뜨리고 수녀와 결혼을 했고 흐리고 세 번째로 그의 신학 이론으로 "인간은 원
죄로 속속들이 부패되어 다시 재기될 수 없다."고 했는데, 인간은 죄로 근본적으로 타락되었
기 때문에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어쩌면 자신이 선언한 하느님과의 약속
을 깨뜨리고 그것을 거룩하게 변명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송양 가톨릭에서는 언제나 교권이니 제도니 의식이니 전통을 주장하는데 애초의 교회에는
그런 것이 없었고, 또 그것은 진정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은 어
떤 제도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신
앙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신부 믿음이 중요합니다. 성서에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
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
가 특히 믿음을 강조한 것은 유다인들와 지나친 율법 정신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래
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강조했지만 로마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율법을 준행해야 함도 강
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할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받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례를 받지 알은 사람이라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도 할례 받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아주실 것이 아닙니까?."(로마 2, 25-26)
송양 뭐니 뭐니 해도 믿음이 제일 중요해요!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
니다 .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로마 3, 33)
박신부 믿음이 중요해요!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
칩니다.
송양
그럼 또 무엇이 필요한가요?
박신부 성서를 바로 읽어봅시다. 그리고 부분적인 성서 구절로 전체의 성서 뜻인 양 착각해
서도 안 됩니다. 우선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계명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
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했듯이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듯이 실천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구원을 주지 못합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13)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
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골로 3, 5-6)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 3)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
29-31)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 1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1요한 5, 3)
보십시오. 사랑의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송양! 개신교에 십계명이 있지요?
송양 예, 있습니다.
박신부 솔직히 말해서 십계명을 지져야 한다는 정신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냥 믿음만 있으
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라는 5계명에서 천주교에서는 자살이나 낙태를 크게 중죄시 합니다.
개신교에서 낙태나 자살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합니까?
송양 ?
박신부
이상 말이 나왔으니 . 성서에 이혼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
다."(마태 19, 5-6)
분명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개신교에서
는 이혼도 큰 문제로 삼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십일조’는 강조합니까?
송양 ?
박신부 성서에 분명히 이혼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십일조’는 구원과는 별로 관계없는
것입니다.
송양
십일조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것인데 ?
박신부 훌륭한 믿음은 있는데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개신
교에서 말하는 "믿음만으로 구원"이라는 교리에는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송양 똑바로 얘기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박신부
이건 중요한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방
법을 써서라도 ’구원의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낙태를 해도 괜찮고, 강간을 해도, 도둑질을 해도, 살인을 해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된다
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진정 성서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까?
송양 ?
박신부
말이 나왔으니 ’믿음만으로 구원’이라면 교회에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믿음을 키우면 됩니다.
송양 그건 아니지요. 교회에 나가서 선교 말씀을 듣고 믿음을 키워 나가야지요! 학생들이
학교 가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을 배우듯이 말입니다.
박신부
옳은 말씀입니다. 구원의 기본 조건이 ’믿음’만이라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다.
송양이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 일부에는 ’무교회주의자’가 있습니다.
송양 그건 무슨 뜻인데요?
박신부
개신교의 정신대로 성서만 있고 그것의 믿음만 있으면 구원이 가능하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고 깊이 예수만 믿으면 구원이 되니까 구태여 교회가 필요 없다는 주장입니다. 개
신교의 가르침대로 ’믿음’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무교회주의자’들의 말도 뜻이 있습니
다.
송양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이 성당에 나가는 이유는 뭔데요?
박신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목적으로 세우셨고 목자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
는 신권(神權)을 주셔서 성사를 집행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해 주는 귀한 하느님의 제사
(미사)에 참례하고 하느님의 몸인 성체(聖體)를 모셔서 구원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개신교처럼 순수히 예배만 바치는 교회와 성체와 제사인 미사 그리고 일곱 가지
성사를 집행하는 천주교와는 근본적으로 교회관이 다릅니다. 그래서 진정 구원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면 천주교가 주는 구원의 길,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정통 신앙을 알아보
고자 하는 마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내 구원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개신교 형제들은 자기들의 편견만을 내세우는데 진정 구원이 무엇이며 그 구원을 전해
주는 교회의 사명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하겠습니다.
송양 어떤 각도에서요?
박신부 지금 이 시간에 ’인간 구원론’에 관한 신학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간곡히 부
탁하고 싶은 것은 2천년의 교회 전통을 가진 가톨릭의 교리를 진심으로 한번 연구해 보시라
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로 지금까지 송양과 이야기한 것 다 그만두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질문을 하
나 하겠습니다.
송양 예!
박신부
송양! 아까도 말씀드렸지 마는 전 세계에 5백여 종의 그리스도교 종파가 있는데 그 교회가
모두 子원의 진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
박신부
2+2=4라는 진리는 천고 만대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닙니까? 이것이
미국에서는 6이 되고 한국에서는 4가 된다는 원리가 있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더구나 구원, 즉 영원한 삶의 길인 신앙의 진리를 이렇게 저렇게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
습니까? 그리고 그 많은 교파들이 다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송양 신부님! 신앙의 진리는2+2=4라는 수학적인 진리와는 다릅니다.
박신부
옳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그것이 2+2=4라는 수학적인 증명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래서 오늘도 성서를 손에 들고 얼마나 많은 사이비 종교
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수백 종의 종파 중에서 어느 하나만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송양, 여기서는 어떤 고집이나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 구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송양! 가톨릭 교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흑은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
니까?
송양 글쎄요!
박신부 송양이 속해 있는 교파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없다고 생각합니까?
송양
그야 말할 것 없지요. 구원이 있지요.
박신부 만일 제가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송양
글쎄요. 그렇게 질문을 하시니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네요.
박신부 먼저 진실한 마음의 자세를 가집시다. 구원 문제입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
교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송양! 만일 천주교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개신교가 이 세상에 나기 전 약 천 오백 년
동안은 전연 인류 구원이 없었던 시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송양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신부
그 때에는 이 세상에 천주교밖에 다른 개신교 종파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송양 ???
박신부
적어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 구원 사업을 하셨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천주교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천주교에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
은 결국 허수아비였고, 마르틴 루터에 의해 인간 구원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송양 ?
박신부
송양! 내 구원의 문제입니다. 진실합시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내 영혼 구원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서에는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통한 구령이냐, 아니면 마르
틴 루터를 통한 구령이냐?"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루터는 성인도 성자도 아닙니다. 고작
"루터 선생"으로 통하는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타락된 가톨릭의
한 신부에 불과합니다.
송양! 진정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루터 선생님입니까?
가톨릭이 그 당시 많은 스캔들을 주었던 타락된 교회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구원의 교회
를 악용한 일부 성직자들의 잘못입니다. 어찌하여 구원의 교회를 한 인간이 자기 임의대로
개조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는 그 개조된 그룻된 종파에서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까? 송
양! 백 보를 양보해서 가톨릭에서도 구원이 있고 5백여 파의 모든 종파에서도 구원이 있다
고 생각합시다. 그렇다면 그 믿는 신조가 다른데 어찌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그렇게도 멍청한 분입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합시다. 개신교에서는 저마다 성서 해석을 성령의 가르침이라고 하
는데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성령의 가르침도 하나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분열되었
다는 것입니까? 예컨대 가장 중요한 성서 내용 중에, 저번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성체
교리가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
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
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 53-54)
이렇게 명확하게 영생을 얻는 말씀을 놓고 개신교에서는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받아들이고
천주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몸과 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이고 하나는
긍정적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는 진리일 것이고 하나는 허위일 것입니다. 둘 다 진리일 수
도 없고 둘 다 허위일 수도 없습니다.
이 귀한 영생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다소곳이 겸손해야 합니다. 내 구원의 문제입니다. 송양
은 어느 진리를 선택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사제권(司祭權)을 주시어 당신
의 진실한 살과 피를 축성해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정통적인 천주교의 가르침과 타락한
천주교의 신부였던 루터의 가르침을 놓고서 어느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까?
우리는 어떤 체면이나 위선이나 개인 주관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 구원이란 진리 앞에는 어
떤 편견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송양 그렇다면 가톨릭에서만 구원이 있고 우리 개신교에서는 구원이 없단 말입니까?
박신부 그것은 간단히 답변할 수 없습니다. ’구원 신학’이란 딴 문제입니다. 이것을 더욱 깊
게 알고 싶으시면 제가 쓴 책입니다만 ’가톨릭 사상 강좌’를 참고하십시오. 여기서는 인류
구원의 신학적인 문제를 다를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개신교의 종파 의식과 진실한 그리스
도의 교회인 가톨릭 교회와의 근본적인 문제만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송양 신부님, 솔직히 말씀드려 서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단순히
개신교 신자니까 이렇게 믿어 왔고 또 가끔 개신교에서 가톨릭을 비판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만 있었는데 오늘 신부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
박신부 좋은 얘기했습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가 교회당에서 목사님이 선교할 때 가끔 천주
교를 치는 설교를 듣고는 ’왜 그럴까? 무언가 천주교에 대해 열등 의식을 느끼기 때문이 아
닐까? 무언가 천주교가 더 좋은 점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하고는 천주교 교리를 연구한 끝
에 개종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예배당에서는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치는 설교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어떤
문제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는 특별히 교리 시간 이외에는 성당에서 설
교 중에 남의 종파를 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 사이비 종교가 나타나도 가톨릭은 태
연 자약합니다. 왜냐하면 2천 년간 너무나 많은 이단과 싸워 온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요즈음 한국에서 보면 성서를 들고 이상한 소리를 하
고 나오는 사이비 종파가 일어나면 개신교에서 서로가 이단이라고 싸움질을 하는 것을 보는
데 .
송양! 한국의 실정만 봅시다. 스스로가 "재림 예수"라하고, 스스로가 하느님의 사신이라 하
며 ○○장로니, ××장로니 하고 일어나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진실한 교리를 믿는
올바른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송양 아니지요
박신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아니라고 합니까?
그렇다면 송양이 속해 있는 그 개신교도 진실한 그리스도의 교리를 믿는 참 종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있다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송양이 주장하는 같은 근거를 두고 사이
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들고 나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송양 ?
박신부
송양! 제가 가톨릭의 신부니까 아전 인수격으로 송양을 우리 교회에 끌고 오기 위한 방법으
로만 생각하시면 퍽 혼란합니다. 오늘 우연히 송양이 저를 찾아 주셨기에 진심으로 진실 자
체를 말한 것뿐입니다. 이런 기회에 한번 그리스도 교회의 진상을 그리고 구원의 근본 문제
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송양 그런데 신부님!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 아닙니까?
박신부
그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고 해도 ’절대자’를 표현할 수
는 없습니다. 용어 문제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송양 아니지요! 말이 중요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절대자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쓰는 ’하느님’이라고 하는데 그건 기독교
의 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미신적인 신앙입니다.
박신부 송양이 문제를 걸고 나왔으니 저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 숫자로
인격을 지칭하는 법은 없습니다. 예컨대 한 분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
렇다면 하늘의 태양도 하나뿐입니다.
그렇다면 태양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하
나님’이십니다. 우리 집에 강아지가 두 마리 있습니다. 그것들은 ’둘님’입니다. 병아리가 세
마리 있습니다 그것들은 ’셋님’입니다. 송양! 그렇지요?
송양 아이구 신부님, 어떻게 그렇게 따집니까?
박신부
하나밖에 없는 ’신’이니까 그분이 ’하나님’이라면서요. 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한자로 표
현해 봅시다. 하나 둘을 한자로 일(一), 이(二)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자로 ’일님
’이 됩니다. "일님 아버지시여 ." 그렇게 해 보세요.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신(神)자를 쓰지
요?
송양 그래요. 신학교 또는 신학(神學)이란 말을 씁니다.
박신부
이 신(神) 자야말로 귀신 신 자입니다. 원천적으로 이 신(神) 자는 기독교의 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신(神)자는 쓰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말, 하늘에 계신 절대자를
표시하는 ’하느님’이란 말은 왜 외면합니까? 그렇다면 신학(神學)도 "일학(一學)"이라고 해
야지요.
너무 고지식하게 일반적인 사고 방식은 대중의 공감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
이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보통 쓰는 ’사람’은 기독교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진정 기독교적
인 개념으로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사람이란 말 대신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써 보십시오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우리와는 더불어
살수 없는 이방인들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송양 ? 그렇게까지 생각합니까?
박신부 그러니 처음부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용어에 대해서는 말을 그만두자고
요. 천주교는 ’개신교의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데 개신교신자들이 괜히 이
런 문제를 가끔 걸어요.
송양 신부님,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끝으로 가톨릭 교회의 참모습이라 할까 가
톨릭 교회의 특징이라 할까, 가톨릭의 교회관을 듣고 싶습니다.
14. 가톨릭 교회관
박신부 : 이제 마지막으로 가톨릭적인 교회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인류 구원의 사업은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
습니다. 세상 마칠 때까지의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
리는 그리스도의 육성을 들을 수도 없고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를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대리 기관으로 이 세상에 열두 사도들을 모으시고 그들
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주시면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교회를 통
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이 약속하신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사명이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하신 말씀으로 표현이
되었다면 오늘 이 시대의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통해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분이 지시하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고 그분이 십자가의 제헌으로
이룩한 새로운 하느님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이란 구원의 진리를 전제로 한다면 이것은
오늘에 있어서는 ’교회를 통한 인간 구원’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의 방
법으로 이 지상에 오셨듯이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의 방법을 총대리하는 구원의
전당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나 요즈음 교회에 나간다." 하는 얇은 표현으로 나타나는 그런 교회의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곧 천국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다리(교량)의 역을 하는 그리스도의 지상 대
리자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신학적인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몸 ’또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교회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교회를 이렇게 정
의(定義)하고싶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우신 성사적(聖事的)인 인류의 집단.’
이 정의에서 교회의 요소를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창설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어떤 인간이 창설한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주는 자연적인 구원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구원을 주는 초월적인 교회입니다. 석가 세존은 불교를, 노자는 도교(道敎)를, 마르틴 루터는
많은 종파를 만든 인간이었지마는 가톨릭 교회의 창설자는 예수 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들
이십니다.
둘째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즉 ’인류 구원을 위한’교회입니다. 그 창설 목적이 어떤 상품을
만들어 돈을 모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세상에 어떤 집단과 대결하기 위한 권리를 과시하고
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교회의 사명은 곧 그리스도의 사명인 인류 구원에 있습니다.
교회가 인류 역사에 참여하고 어떤 제도나 조직을 하고는 있지마는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
로 인류 구원이란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창설 목적으로 보아 세상 어느 인류 집
단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세 번째는 그것이 성사적(聖事的)이란 초자연적인 은총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영원한
구원은 어떤 인간적인 조건만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새로운 의미, 즉 영성을 위한
구원은 다분히 하느님스러운 요소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 하느님의
요소, 즉 초월적인 은총의 요소가 곧 성사라는 내용으로 표현됩니다. 이 성사적인 요소가 있
기에 그 목적인 인류의 子원이 가능하며, 또 다른 인간의 집단과도 근본적으로 그 내용을
달리하는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성사적인 요소가 없다면 하나의 인류 집회요, 때로는 어떤
사업의 집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예수님이 주신 일곱 가지 성사를 가진 유
일한 초월적인 교회입니다.
네 번째는 소위 ’인류의 집단’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집단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요소
를 가진 교회간 뜻입니다. 인간적인 요소란 많은 부족과 결함 그리고 나약성을 지닌, 어떤
점에서는 뭔가 불완전한 내용의 교회란 뜻입니다. 때로는 제도와 조직이 범하는 과오도 있
을 수 있는 교회, 성서 말씀대로 선인과 악인이 같이 있는 교회란 뜻입니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서도, 때로는 성직자들 중에서도 많은 스캔들을 주는 인간 나약성을 안고 있는 인간의
집단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교회 지도자들의 스캔들을 보고 또는 신도들의 스
캔들을 보고서 교회를 무자비하게 비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이 모으신 열두 제자
중에도 유다가 끼어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그리스도 교회의 인간적
인 일면을 보여 주는 좋은 교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 네 가지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를 말씀드렸습니다. 한마디로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 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면서 그 교
회가 인류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데 틀릴 수 없도록 보장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
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다 .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 15 이하)
15. 가톨릭 교회의 특징
박신부 : 송양! 이왕 가톨릭적인 교회론이 나왔으니 가톨릭 교회만이 가진 네 가지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지일성(至一性)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씀드린다면 하나인 교회란 뜻입니다. 전 세계
10억 가톨릭 신도들은 어떠한 파벌 의식이 없이 한 교황님 밑에서 하나의 신앙을 고백한다
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진리의 교회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미국의 교회나
프랑스의 교회나 한국 교회나 그 설교의 내용이 같고 가르치는 교리가 동일하고 종교 의식
이 동일하고 같은 성사 같은 기도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어떤 교리나 윤리 도덕적인 관점에서 어떠한 분파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뜻이고 동시에 예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
시오 .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한 17, 21-23)
예수님의 기도는 교회가 분열되지 말고 하나의 교회로 하나의 신앙으로 뭉쳐지기 위해서 입
니다. 또 예수님은 이르셨습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는 양들도 있
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요한 10, 16)
예수님은 벌써 많은 종파가 떨어져 나갈 것을 예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양! 진심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이 성서 구절을 읽어봅시다.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
들"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양 우리"는 무엇을 뜻
하는 것입니까? 진정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어떤 편견이나 고집이나 체면이 문제
가 아닙니다.
둘째 가톨릭 교회의 특징은 지성성(至聖性)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그 본질상 거룩하고 엄숙
해야 합니다. 교회당에서 잡스러운 행동이 용납될 수 없고 성스러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성인 성녀를 배출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나약성으
로 스캔들을 보이는 교회이긴 하지마는 근본적으로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의 거
룩한 생활, 교회 의식의 엄숙성 등등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의 성성(聖性)을 표현하는 내용이
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지공성(至公性)이라고 합니다.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 자체가 ’공번된’
’보편된’ 교회라는 뜻이 아닙니까?
어떤 민족이나 어떤 지역이나 어느 시대에 구애 없이 만민이 받아들여야 하는 보편된 교회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진리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네 번째 사도 전래성(使徒傳來性)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파가 약5백여 종이
나 됩니다. 그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 중에서 진정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사도들이 전해 준
교회는 유일한 가톨릭 교회 뿐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파들은 기
껏해야 그 역사가3, 4백 년밖에 더 되지 않지마는 가톨릭만이 서력 기원의 주인공인 그리스
도의 탄생과 연결된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유일한 그리스도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언급이 필요 없겠지요, 송양?
송양 : 신부님, 신부님의 얘기를 듣고 보니 제가 너무나 편견을 가진 그리스도인임을 느꼈습
니다. 진실로 가톨릭교회가 그런 것인지는 전연 몰랐습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인간적인 어떤 체면이나 편견이 문제가 아니라 내 구원에 직결되는 문제지
요.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나의 구원 문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던지고 덤벼야 되
지 않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오늘 신부님의 말씀은 저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톨릭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을 계기로 가톨릭교리를 공부해야겠습니다.
신부님, 끝까지 저의 영혼을 이끌어 주십시오
박신부 :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 성서에도 이 세상을 다 얻어도 영혼 구제를
받지 못한다면 무슨 뜻이 있겠느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송양 :
신부님, 가톨릭 교리 서적을 몇 가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박신부 : 예, 좋습니다. 우선 미국에서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개종하게 한 유명한 책인 ’교부
들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장면 박사가 번역한 책인데 개신교와 가톨릭의 문제를 상세하게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정식 가톨릭 교리서로는 제가 쓴 책입니다만 ’가톨릭 사상 강좌’, 그
리고 대중용으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송양 :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으로 신부님,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문제에 대해서 인데요, 신부님은 어떻게 생
각하십니까?
박신부 : 개신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많은 사람
들이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고는 진실로 가톨릭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알고 있으면
서도 체면 때문에, 자신의 위신 때문에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것이 내 구원에 관계되는 문제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송양? 부디 가톨릭 교리를 연구하시면서 다시 찾아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고적으로 ’18인의 개종 실기’라는 책이 있어요. 18인의 개신교 신자들의 개종담을 실은 책
인데 그중 두 사람의 것만 여기에서 제가 소개해 드리지요. 그냥 참고로 보아주시면 좋겠습
니다.
우리는 종교 문제를 놓고 서로 비난하고 분파 싸움을 결코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 앞에는
겸손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천주교에서는 개신교 신자들을 ’떨어져 나간 형제’라
고 합니다. 절대로 이단시하든지 적대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이 하신 이렇게 진실한 기도를 바칠 뿐입니다
첫댓글 좋은글 정말 감사드려요..저도 읽으면서 성서에 대해서 많이 배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