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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성탄메세지
오늘부터 마태복음에 나타난 성탄메세지를 통해서 성탄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004년에도 아기예수로 오신 예수님의 성탄의 은혜과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경중에서 가장 강력한 수면제 역할을 한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한번 일독하려고 성경을 폈다가 1장을 못넘기고 중단한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슬라엘 사람들은 어느 민족보다 족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강력한 결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이는 이들이 선민이라는 뿌리깊은 사상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민족편에서 족보를 기록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족보를 기록하므로서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성탄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메시야의 전통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조상들중에 가장 중요한인물 두사람을 뽑으라면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을 뽑을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은 민족의 조상일 뿐만아니라 믿음의 조상이고 다윗은 이스라엘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건설한 전설적인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바로 메시야가 이들의 후손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는 예언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가 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2장 18절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라고 예언하셨는데 예수님은 바로 천하만민에게 복을 나누어질 바로 그 아브라함의 씨가 되십니다. 이사야 11장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예언하셨는데 예수님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줄기에 나온 그 한싹, 그 뿌리에서 나온 그 한가지가 되십니다. 사도행전 26장은 사도바울이 아그립바왕앞에서 자신왜 유대인들의 고소를 받아서 이렇게 재판을 받게 되었는가를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6,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로 그 소망을 인하여 지금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열두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로 그 소망이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그것도 촌구석인 게땅세 갈릴리 그것도 나사렛 사람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일수 있느냐며 영접을 못했습니다. 마태는 이런 유대인들에게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이 바로 예언된 진짜 메시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태는 구약에서 예언의 성취를 통해서 예수님이 바로 예언된 진짜 구원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후에 이땅에 자칭 재림한 예수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만해도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15명 자칭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무려 3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순수한 영혼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게 하고는 그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제가 캠퍼스 시절에 제이엠에스라고 자칭 예수라고 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없는 캠퍼스 순수한 젊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자신을 따르게하고 특히 자매들을 추행하여 구속되기까지 한 참으로 파렴치한 마귀의 괴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거짓 그리스도들이 우리의 영혼을 늑탈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23절에서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메시야시요 진짜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시대가 수없이 미혹의 영이 판을 치는 시대이지만 우리의 참된 그리스도되신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르기만 하면 조금도 미혹되지 않고 참된 구원을 반드시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족보는 생명을 살리는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와 창세기 5장에 아담의 족보와 비교해보면 한가지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의 족보는 낳고 낳고 그리고 몃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마치고 있는 반면 예수님의 족보는 그냥 낳고, 낳고 하다가 마침내 예수님 나신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아담의 족보는 죽음으로 끝나는 족보이지만 예수님의 족보는 생명으로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아담의 족보는 죽음이 지배하는 족보이지만 예수님의 족보는 생명이 지배하는 족보입니다. 이는 불순종한 아담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이제 순종하신 예수님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바로 아담안에서 영원한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예수님안에 있는 영생으로 바꾸기 위해서 오신것입니다. 아담안에 있는 어떤 영혼도 이제 예수님안으로 옮겨오게 되면 한마디로 사먕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아담의 족보에 이름을 자동적으로 올리게 됨니다. 태어날때부터 아담의 죄악된 피를 이어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담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모든 인생은 일생동안 사망이 지배하는 족보에서 사망권세아래서 두려움고 불안에 떨며 살다가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는 날동안 주님의 크신 은혜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린 보혈을 영접하게 되면 예수님의 피를 이어받게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옮겨지게 됨니다. 아담의 족보에서 예수님의 족보로 이름을 옮긴 이들은 사는 날동안 예수님의 부활생명아래서 참된 평안과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때가됨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태어날때는 아담의 족보에 있었습니다.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될 운명가운데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제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옮기게 되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영생의 다스림을 받고 영생이 보장되어 있는 예수님의 반열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실로 큰 은혜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시간 이 크신 은혜를 할렐루야 찬양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절에다가 이름을 올리면 생명을 얻을것으로 착각합니다. 또한 법사들에게 이름을 올리면 귀신의 괴롭힘을 안 받고 형통할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교인들중에도 교회에 등록만하면 예수님의 족보에 올린것이라고 생각한분도 있습니다. 어떤 교인은 세례만 받으면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한것이라고 생각한분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교인은 예수님의 족보에만 이름을 올리는 것이 안심이 안되어 절에다가도 올리고 법사에다가도 올린분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아직도 아담의 족보, 아담의 반열, 사망의 반열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여 심판학실때에 불로 심판하시는데 이땅에 있는 그 어떤것으로도 우리를 심판의 불에서 막아줄 수 없습니다. 심판의 불앞에서는 그 화려한 절도 다 타버립니다. 그 시끄러운 무당집도 타버립니다. 심지어는 여기 예배당도 타고 세례명부도 타버립니다. 오직 타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영접한자는 그 예수님의 보혈을 인하여, 보혈의 공로때문에 참된 영원한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아담의 족보를 잇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족보에 참여하였습니까? 군대에서 줄을 잘 서야한다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줄에서 나와서 예수님의 줄에 서게된 것은 실로 큰 주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특히 교회도 가고 절도 가고 교회도 가고 무당에게도 가고 하며 양다리 걸치면 가랑이기 찢어져 버립니다. 아담의 줄이든지 예수님의 줄이든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양다리 걸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좇게 된것도 시로 큰 은혜인줄 믿습니다. 아담의 족보에 태어나 영원히 죽은 저희를 예수님안에서 믿음을 주시고 구원하셔서 영원한 예수님의 생명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를 다시한번 진심으로 찬양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족보는 여인에 대한 혁명적인 사고를 보여줍니다.
족보를 잘 살펴보면 마태가 의도적으로 넣은 네 여인이 나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와 그리고 마리아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여인은 잘 아시는데로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천시를 받았습니다. 여인들의 인권은 참으로 무시받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혼할때도 하도 그냥 이혼을 해서 버림받은 여자는 다시는 결혼을 할 수 없으므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하라는 율법에 규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존재하는 시대에 그것도 참으로 거룩하게 여긴 족보에 여인이 기록되었다는 자체가 마태의 놀라운 사고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사고방식정도가 아니고 혁명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출신이었지만 세리이기이전에 마태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몇천년 내려온 남성위주의 사고방식은 마태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마태가 여인의 인권을 이렇게 존중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 거룩한 족보에 여인을 기록할 정도로 여인을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태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도우실 때 남성과 여성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남성이면 남성대로 여성이면 여성대로 똑같이 존중하시며 섬기셨습니다. 성령님도 남성에게만 임하시거나 아니면 남성은 더 강하게 임하시고 여성에게는 조금 적게 임하시지 않으시고 놀랍게 동등하게 임하셨습니다. 요엘서에 예언된 데로 남종과 여종에게 똑같이 임하셨습니다. 또 실제로 복음서에 보면 진짜 믿음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성들이었습니다. 정말 위급할때는 남자들은 다 도망가버렸지만 여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모든 것을 마태는 예수님안에서 생생하게 목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성을 남성의 헬퍼 동역자로 창조하셔서 질서를 정해주셨지만 신분적으로는 하나님안에서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여자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죄를 해결받게 되면서 다시금 창조질서를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이 창조때로 회복될 뿐만아니라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등동하게 존중해야할 인격으로까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태가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게 되면서 몇천년동안 이어온 여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한 벌로서 생겨난 것이므로 이것은 교육으로나 개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을때만이 변화될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고정된 한국에서 호주제폐지가 나올정도로 여성에 대한 지위가 올라간것도 성경적 여성관이 점점 우리 사회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남집사님은 정말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을 할때도 여자들을 울리는데는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깊이 만나고 성령의 사람이 되면서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를 울리는데 선수였던 그가 자매님들을 섬기는데 선수로 변화된 것을 보았습니다. 외동딸 공주님과 결혼하여 아내를 얼마나 공주님으로 잘 섬기던지 장인어른이 100점남편이라고 하는 확실한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여성해방운동으로 교육으로 개혁으로 한계입니다. 혁신이 필요합니다. 이 혁신은 오직 예수님으로만이 일어나는 역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저와 여러분의 사고방식에도 이런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예수님을 가정에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면 가정의 사고방식에도 이런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날줄 믿습니다.
네째 예수님의 족보는 은혜의 혁명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경건한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의 모습은 여인을 기록한 이상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 경건한 족보에 여인이 들어간것만해도 가히 혁신적인데 여기에다 기록한 여인들의 모습은 정말 뒤로 넘어지게 만듭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저히 이 족보에 도저히 들어와서는 안되는 사람들만 뽑아서 기록한 것입니다. 보통 족보라면 가문에 수치라며 감추고 감추어야할 이름들을 더욱 담대히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이 다말은 놀랍게도 유다의 자부 며느리였습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와 관계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이런 반인륜적인 사건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 라합은 이방인인데다가 기생출신이었는데 여기서 기생은 오늘날로 하면 요즘 문제시되는 창녀를 말합니다. 또한 룻도 이방인인데다가 남편잃은 과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야의 아내를 보십시오.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을 낳았으며라고 하면 덧납니까 왜 정말 창피하기도 유분수지 그 존경하는 다윗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그것도 그냥 바셋바라고 하면 되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입니까? 그리고 여기에 첨가하여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나사렛동네에 정말 평범한 시골처녀였습니다.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여인들처럼 공부는 제대로 못했을 것입니다. 전문대라도 나왔을지 궁금한 수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사렛하면 굉장히 천시한 곳이었습니다. 나세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수 있느냐 할정도로 역사적으로 방항적이고 문제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골처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한것입니다. 마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으려면 율법앞에서 흠이없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쓰임받은줄 알았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볼때는 여기 나온 여인들은 자격이 될 수 없는 불가능한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돌아 맞아 죽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한 시대에서 정말 죄인중에 죄인들이 그것도 메시야족보에 쓰임받은 것은 정말 혁명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계속해서 혁명적인 행보를 하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주인공이 바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입니다. 마태는 세리출신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죄인하면 세리와 창녀들을 의미했습니다. 당시 이런 죄인들은 이미 지옥에 방들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이는 정말 혁명 그 자체였던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혁명적인 은혜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어제 담양에 류영순자매님을 명숙사모와 류선영자매님과 함께 심방하고 왔습니다. 또 저녁에 와서는 다른 교회성도이지만 어려운문제에 처해 있는 한가정을 위로해 주고 밤늦도록 메시지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저는 밤이늦도록 메시지를 마무리하면서 과거 정요과 인생의 허무와 두려움으로 떨며 밤마다 고통하며 밤을 두려워하던 이자가 이제는 종일 주님의 귀한 양떼들을 섬기며 또 밤이 늦도록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은 실로 크신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정말 죄인중의 괴수였던 이자가 주님의 피값으로 산 양떼들을 섬기는 주님의 종이 되었다것은 오로지 주님의 온전한 은혜입니다. 참으로 세상에 정말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은데 죄인중에 죄인이었던 저와 여러분을 그 많은 사람들중에서 택하사 구원하시고 크든 작든 여러모양으로 귀하게 사용하신 것은 정말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인줄 믿습니다. 이시간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찬송합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족보는 그 스케일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고를 보여줍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중에 가장 고정된 것이 바로 유대인은 선민이고 이방인들은 야만인이라는것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이방인을 위한 구원을 이야기할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오늘 라합과 룻 특별히 이방여인을 기록하므로 예수님은 유대인게 국한분이 아니라 야만인이라고 생각되는 이방인의 구주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은 혁명적인 사고였습니다. 도저히 허물어지지 않을 것같은 장벽이 예수님을 통해서 허물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장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장벽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장벽은 세상 어떤 장벽보다 크고 영원한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이 장벽을 해결하사 막흰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인간상호간에 어떤 장벽도 해결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세리마태는 예수님을 통해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던 죄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세리마태가 생각할 때 나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 나같은 죄인도 살려주셨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세상 어떤 사람도 구원하실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 사람이 통이 커지고 스케일이 넓어집니다. 마음이 쪼잔한 사람이 태평양같이 넒어지고 물질에 인색한 사람이 풍성하게 섬기게 되고 시기심으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던 사람이 진정으로 축하해주고 인정해주는 대범한 사람이 됨니다. 무엇보다 만나는 어떤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전하게 됨니다. 나아가 그 은혜가 큰 사람은 선교사로 나아가 땅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의 은혜를 전하게 됨니다. 사도바울이 그 대표적인 증인입니다. 바울은 보통 죄인이 아니도 적극적으로 주님을 핍박하고 성도들을 잡아다고 죽인 죄인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중에 괴수도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 복음을 어찌하든지 세상만민에게 전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위로는 대통령에서 아래로는 죄수들에게까지 종류대로 모든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세상만민을 능히 구원할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오늘날 뉴욕과같은 로마에까지 가서 순교가지 직전까지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면 도저히 허물어지지 않을것같은 장벽들이 허물어지게 됨니다. 도저히 남남되어 하나되지 않을것같은 사람간에 곧 부부간에도 형제간에도 고부간에도 이웃간에도 그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또한 쪼잔한 심령이 태평양이 되고 좀팽이 심령이 우주같이 되는것입니다. 이렇게 넒고 스케일이 큰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예수의 복음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수많은 노력을 안되는 일이 혁명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족보에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언약된 언약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침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수많은 언약중에서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언약만큼 이루어지기 어려운 언약은 없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과 원수에서 누구를 포기할 것인가 생각할 때 생각할 것도 말 것도 없이 원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수된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아들을 포기하시겠다는것입니다. 이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 곧 메시야가 오시는데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오실줄 알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것이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예언한 이사야 53장에서는 정말 누가 이 사실을 믿을수 있단말인가 정말 이 일이 이루어진단 말인가?라고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언약이 성취되기 어려웠던 것은 도중에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이 이땅에 태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이스라엘민족을 수없이 말살해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언약이 이루어지기 아예 사라져버린것같은 상황도 많았습니다. 특비 바벨론포로시절은 정말 절말 그자체였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끝났다라고 생각이 되던 때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마른뼈로 묘사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태어나는 시점에서도 잔인한 헤롯대왕을 때문에 2살이아의 어린아이가 다 죽게 되면서 예수님도 태어나자마다 죽을 가장 어려운 현실적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불가능하게 보인 그 언약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마침내 성취된 것입니다. 그것도 유보하지 않고 주저하지않고 정확히 때가됨에 오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신실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더 이상 논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대목입니다. 자기 외아들을 보내시겠다고 그것도 십자가에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 지키신 하나님에 앞에서 하나님 왜 신실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낸다는 언약외에 수많은 언약들, 약속의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독생자약속을 지키신 하나님께서 다른 언약들에 대해서 신실할 것을 논의한 것은 정말 더 이상 무의미한것입니다.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살고자할 때 두가지가 걸립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정말 말씀대로 이루실까와 이렇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 이 말씀이 이루어질까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붙잡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정말 믿으면 가정복음화를 이루실것인가 또한 전혀 요동하지 않은 상황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어떤 시련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붙든 그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 증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또 예를 들어 저와 같이 주님의 역사를 온전히 섬기고자 물질문제가 큽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붙들었지만 정말 맡겨주신 주님일에만 열심히 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실까하는 의심과 함께 실제적으로 망막한 현실앞에서 더욱 말씀에 의탁하기를 힘들어합니다.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시련속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이 말씀도 신실하게 이루십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나또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이루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약속한대로 오시고 언약하신대로 죽으시고 언약하신대로 부활하사 승천하신 예수님은 약속하신대로 신실하게 반드시 다시오실 것입니다. 다시 오셔서 이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는 약속하신대로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이땅에서 믿음으로 살 때 흘린 모든 눈물을 다 딲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품에 안겨서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는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또한 약속하신대로 이땅에서 믿음으로 살지 않은 자들은 그 죄과대로 영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제자요 서마나의 감독이었던 포리캅은 늙은 말년에 잡혀서 순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로마장교가 마지막으로 권면했습니다. 폴리캅감독 한번만 예수를 부인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살려주겠습니다. 그때 폴리캅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내평생에 나를 한번도 부인한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부인할수 있겠소라고 순교하였습니다. 포리캅의 인생에 신실했던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동일하게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현재 형편을볼 때 여러 가지 부족한점이 많고 불만스러운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씩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이날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폴키랍과 같이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제까지 나를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인할수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할때 이 하나님께서 현재도 신실하게 인도해가시고 앞으로도 신실하게 인도하실것이라는 확신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현재와 미래도 저와 여러분의 신실한 하나님이 되실줄 믿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그 어려운 시련속에서도 신실하게 아기예수로 오신 주님께서 2004년 이번 성탄에도 동일하게 많은 어려운가운데 있는 우리나라, 우리가정, 우리의 심령에도 동일하게 신실하게 오실줄 믿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이들에게 믿고 기도하는 이들에게 모든 언약들을 성취해주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실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이 신실함의 은혜와 은총이 이번성탄에도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고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