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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ㆍ끝> 고단했던 동국대 경주분교 생활 |
다가 불교적 유적이 많고 대학형편을 고려하여 경주지역을 확정하게 되었다. 1978년 11월27일 동국대 학교 경주대학 설립을 당시 문교부로 받았다. 1979년 3월 개교를 앞두고 모든 것아 준비가 되어야 하므 로 임시교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경주고등학교 체육관을 빌려 쓰게 되었다. 당시 체 육관은 완전한 건물이 아니고 겉모양만 건축된 것이므로 대학사무실, 강의실 등 모든 대학운영의 시설 이 모두 갖추어져야하므로 임시사무실에서 입시행정과 79년 학사행정을 총괄하려니 대단한 업무가 가 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려니 서울 본부대학에도 대단한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받고 본교 교수가 강의를 협조하는 방법으로 했다. 당시 경주대학 학장은 김병옥 교수가 임명되어 총 괄업무를 관장하였고, 파견 전임교수로는 전호종, 송혁, 조광, 목정배가 위촉받아 경주생활을 시작하였 다.
에서 녹물이 나오고, 어떤 때는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본래 여관으로 쓰던 집을 사서 임시숙소로 사용 하였는데도 난감한 시설이었다 . 면 편하게 가기는 하지만 아침부터 강의가 없는데도 조기 출근은 조금 한심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간 이건물의 교수 사무실은 봄바람에 흔들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경주 근처 경산, 포항, 부산, 영일, 울산, 대구 등에서 입학한 순진한 학생들의 젊은 기세를 볼 때는 새로운 힘이 솟기도 하였다. 이었다. 그러면서도 기쁘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서라벌은 살아있는 박물관이므로 이런 쪽으로 마 음을 돌리면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경주 남산에 올라 이곳저곳 답사할 지도를 그려 보았다. 강의가 끝 난 뒤 시간이 있을 때는 황룡사지, 안압지, 삼릉계곡, 서천, 북천, 단석산, 나원, 건천 등 발길 닿는 데로 길을 걸어보면서 신라시대 화랑도 되어보고 농사꾼 아니면 스님이 되어 보았던 그 시절이 즐겁기도 하 였다.
리를 마련하였는데 미당이 “관창의 나라사랑”인가를 강연하셨다. 그 많은 설담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 만, 저녁때 미당선생 당신이 머물고 있는 여관으로 오라고 하였다. 파견교수가 대거 참방하였다. 맥주 잔치에 거나하게 되신 선생이 기쁜 마음으로 필자에게 글을 써준다고 화선지에 붓글씨를 써 주셨다. 글 씨는 솜씨가 아니고 마음씨로 생각해야 한다. “거시기 팔자 상팔자” “원효의 한 표주박이 되어서” 이란 두 폭이다. 사실 필자는 필자가 그렇게 난하지 않게 바르게 살아가고 있고, 또한 원효의 표주박에 맑은 감로수를 받아먹는지 항상 건실하게 살고 있다. 미당의 시안이 필자를 뚫어 보았는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어찌 되었건 경주캠퍼스는 이렇게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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