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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당 할아버지 큰 따님은 밀양박씨 집안에 출가하였는데, 부군이 朴希良입니다. 할머니께서는 임진왜란시 자결하여 치욕을 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동강유집의 밀양지 부분을 발췌하여 탑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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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16권 / 별록(別錄)
밀양지〔密陽志〕
밀양부는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밀성(密城)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成宗) 때 주(州)로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다. 그 후 그대로 따르거나 변경하여 추화부(推火部)라고도 했다가 공양왕(恭讓王) 때 왕의 증조할머니 박씨(朴氏)의 본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주로 승격시켰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다시 군(郡)으로 삼았다가 태종(太宗) 때 비로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라고 하였으며, 선조(宣祖) 때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인조(仁祖) 때 폐지하고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고을의 이름을 추화, 밀성, 밀주(密州), 귀화(歸化), 응천(凝川), 밀산(密山)이라고도 한다.
밀양부는 서울과는 812리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 양산군(梁山郡) 경계까지는 49리, 또 동쪽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는 93리이며, 남쪽으로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는 47리, 또 남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는 50리이며, 서쪽으로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는 38리이며, 북쪽으로 청도군(淸道郡) 경계까지는 31리, 또 북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는 150리이다.
부치(府治 치소(治所))는 경내의 중앙에 있는데 감방(坎方 정북(正北))을 등지고 이방(离方 정남(正南))을 향하고 있다.
진산은 무봉산(舞鳳山)인데, 구불구불 이어진 산들이 그 좌우와 앞에 솟아 있다. 그 안쪽에 있는 큰 들판을 긴 내가 둘러싸고 있는데 내의 이름은 남강(南江) 또는 응천(凝川)이라고 한다. 그 발원지는 셋인데 하나는 재악산(載岳山)에서, 하나는 운문산(雲門山)에서, 하나는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온다. 이 세 물줄기가 합류하여 부성(府城)을 지나 남쪽으로 해양강(海洋江)으로 들어가는데, 해양강은 바로 낙동강의 하류이다.
관아는 옛날에 무봉산 아래에 있었다. 지세는 조금 낮으나 건물은 제법 크고 넓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지금은 지세가 조금 높지만 건물은 협소하다. 공무를 보는 당(堂)에는 ‘노졸(勞拙)’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역시 매우 좁다.
읍성의 둘레는 4,670자이고 높이는 9길인데, 동문과 서문과 남문이 있다.
객사(客舍)는 옛날에 남문 안에 있었는데 그 또한 전란으로 소실되었다. 별관으로는 영남루(嶺南樓), 능파당(凌波堂), 침류당(枕流堂), 공신관(拱辰館), 납청당(納淸堂), 연훈당(延薰堂), 전월당(餞月堂), 신당(新堂), 연당(蓮堂)이 있다. 객사는 소실된 뒤에 중건하지 않고 영남루로 대체하여 전패(殿牌)를 봉안하였다.
영남루는 관아의 남쪽 수백 보 되는 지점에 있고, 능파당은 영남루의 동쪽, 침류당은 영남루의 서쪽, 공신관은 영남루의 북쪽에 있다. 납청당, 연훈당, 전월당, 신당은 모두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 터를 자세히 알 수 없다. 연당은 관아 남쪽 수십 보 되는 지점에 있는데, 못에는 연꽃 천여 포기를 심어 놓았으며, 건물은 대로 얽고 띠풀로 덮었다.
영남루의 경치가 가장 빼어난데 ‘영남’이라는 편액을 건 것은 밀양부에서만 으뜸가는 명승일 뿐 아니라 영남의 뛰어난 경치를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영남루는 고려 때 영남사(嶺南寺)의 작은 누각이었는데 절이 없어지고 나서도 누각은 옛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영남루도 소실되었다가 숭정 계미년(1643, 인조21)에 중수하였다. 높이는 몇 장이나 되고 그 위에는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까지 앉을 수 있다. 영남루는 성 남쪽을 굽어보고 있는데, 성 밖에는 강물이 띠를 두른 듯 흘러가고, 강 너머 밤나무 숲에는 수많은 밤나무가 있다. 그 앞에는 큰 들판이 있고, 들판 너머 멀리 산이 있는데 남산(南山), 마암(馬巖), 용두(龍頭) 등의 늘어선 산들이 상투를 튼 듯, 쪽을 찐 듯 솟아 있다. 고려 사람 김주(金湊)가 그 절경을 기록하기를,
“긴 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광야를 삼킬 듯하다. 늘어선 봉우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다.”
하였으니, 이는 실경을 기록한 것이다. ‘무성한 숲’은 바로 무성한 밤나무 숲인데 해마다 천여 석의 밤을 수확한다.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은 삼복더위에도 시원하게 더위를 잊게 된다.
관아의 동쪽에 사창(司倉)이 있는데, 나라의 곡식을 비축하였다가 조적(糶糴)한다. 옛날에는 비축량이 수만 섬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겨우 6천여 섬밖에 안 된다.
관아의 서남쪽에는 관청이 있는데, 관청은 아록(衙祿)과 잡비를 보관해 두는 곳이다. 그 수량 역시 예전에 비해 크게 줄어 한 해에 290여 섬을 거둬들이는데 밤나무 숲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지출한다.
관청의 서쪽에는 대동청(大同廳)이 있는데, 대동이란 한 해의 봄과 가을에 농지 면적을 계산하여 미포(米布)를 거두어 정공(正貢 공납) 및 북인과 왜인을 대접하고 불시의 수요에 충당하는 것이다. 남으면 거두어들이는 수량을 경감해 주고 부족하면 기준량을 채우게 한다.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수량은 1부(夫)당 베 1필과 쌀 1말씩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밭의 면적이 8천 장(丈)인 경우를 1부라 한다. 대동의 업무를 보좌하는 사람은 도유사(都有司) 1인, 유사(有司) 2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청의 동쪽에는 군기청(軍器廳)이 있는데, 군기는 정해진 수량이 없고 필요에 따라 늘이거나 줄인다.
관청의 서쪽에는 장군청(將軍廳)이 있는데 장교들이 모이는 곳이다. 파총(把摠) 1인과 초관(哨官) 5인이 있으며 그들이 거느리는 속오군(束伍軍)은 3백여 인이다. 수군과 육군은 정원이 있지만, 직례(直隷)는 정원이 없고 직례 중에 속오군을 겸하는 부류도 있다.
관청의 뒤에는 의국(醫局)이 있는데 의약을 관장한다. 유사 2인이 있다.
성 서쪽에는 향사당(鄕射堂)을 설치하였는데 향관(鄕官)이 머물러 입직(入直)하는 곳이다.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이 있다. 좌수는 부(府)의 일을 총괄하여 보좌하며, 별감은 6방의 업무를 나누어 맡고 겸하여 관청도 관리하는데, 5일마다 돌아가면서 입직한다.
작청(作廳)은 관아의 동남쪽에 있는데 이서(吏胥)가 직숙(直宿)하는 곳이다. 향리 1인, 가리(假吏) 60여 인, 아리(兒吏) 20여 인이 있다.
연당의 서쪽에 교방(敎坊)이 있다. 예로부터 〈죽지곡(竹枝曲)〉 9장이 전해 오는데 누가 지은 것인지는 모른다. 기녀 23인이 있다.
부사(府司)는 관청 앞에 있는데 땔나무와 꼴을 저장해 두는 곳으로, 호장(戶長)이 주관한다. 호장은 겸하여 관노비도 관리하는데, 남자종 56명과 여자종 40명이 있다.
공수(公需)는 관사〔衙舍〕의 남쪽에 붙어 있는데 관청의 주방이다. 빙고(氷庫)는 사창의 동남쪽에 있다. 부옥(府獄)은 성 밖의 서남쪽에 있다.
성 안팎에는 인가가 빽빽하지 않고 서문 밖에 백여 호가 있을 뿐이다. 용성리(龍城里)는 부(府)에서 동쪽으로 5리 떨어져 있고, 장선리(長善里)는 동쪽으로 7리 떨어져 있고, 전천리(箭川里)는 동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는데 고양장(羔羊場)이 있다. 수남리(水南里)는 부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감천리(甘川里)는 부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져 있는데 논이 밭보다 많다. 송정리(松亭里)는 북문 밖에 있는데 그곳에는 노룡암(老龍巖)이 있다. 월산리(月山里)는 부에서 북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이 마을들은 모두 부내(府內 행정구역 명칭임)에 소속된 마을이다.
부 밖의 큰 마을이 모두 10개인데 작은 마을까지 모두 합하면 백여 개이다. 부북(府北)에는 삽포(鈒浦), 지동(池洞), 오례리(五禮里), 용현(用峴), 덕곡(德谷), 구을전리(仇乙田里), 적항리(赤項里), 대항리(大項里), 퇴로리(退老里), 위량동(位良洞), 무정리(無丁里), 월매리(月每里), 저대리(楮代里)가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부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상동(上東)에는 구곡(仇谷), 가곡(嘉谷), 평릉리(平陵里), 금곡(金谷), 고답리(高沓里), 사지촌(沙旨村), 오곡(烏谷), 내장(內場)이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45리 떨어져 있다.
중동(中東)에는 오치리(烏峙里), 천화리(穿火里), 석골리(石骨里), 시례리(時禮里), 원당리(元堂里), 가좌리(加佐里), 미라촌(美羅村), 화랑동(花郞洞), 발례동(發禮洞), 소고례촌(所古禮村), 말례촌(末禮村), 희곡촌(希谷村), 보라리(甫羅里), 회동리(會洞里), 사연리(沙淵里), 구천리(仇川里), 삼거리(三擧里), 호도연촌(虎渡淵村), 고여리(古汝里), 노곡리(蘆谷里), 단장(丹場), 금곡리(金谷里), 법귀리(法貴里), 감물례리(甘勿禮里), 사촌(士村), 구미리(仇彌里), 다원리(茶院里), 구서원리(舊書院里), 와요촌(瓦窯村), 양덕촌(陽德村), 엄광리(嚴光里), 남가곡(南加谷), 석동(石洞)이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시례리의 동쪽에 절구처럼 생긴 못이 있는데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하동(下東)에는 금물리(金勿里), 안태리(安泰里), 병항점(甁項店), 우읍곡(于邑谷), 율동(栗洞), 작원(鵲院), 소야항리(所也項里), 삼랑리(三浪里)가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50리 떨어져 있다. 삼랑리는 김해(金海)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데 바로 부(府)의 전세(田稅)를 바다로 운송하는 곳이다.
부남(府南)에는 운례리(運禮里), 고곡(古谷), 북곡(北谷), 이동음리(伊冬音里), 구금동(舊金洞), 백족리(白足里), 마산리(馬山里), 동산리(東山里), 소음촌(召音村), 무량원(無量院), 구박촌(仇朴村), 서전리(西田里), 파서막(破西幕), 백산촌(柏山村), 멱례리(覓禮里), 휘영수(揮影藪), 수산현(守山縣), 귀명동(貴命洞), 곡량동(谷良洞), 우암(牛巖), 사당동(祀堂洞), 수량동(守良洞)이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45리 떨어져 있다.
상서(上西)에는 고강촌(高江村), 성만촌(星萬村), 구령리(龜齡里), 백산(白山), 대곡(大谷), 반월촌(半月村), 벽력암(霹靂巖), 벌음리(伐音里), 오방동(五方洞), 신동(新洞), 삼손리(三孫里), 당동(堂洞), 임곡(林谷), 고조곡(高槽谷), 인교리(茵橋里), 모로곡(毛老谷), 적동(赤洞), 둔지리(芚池里), 임곡(林谷)이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50리 떨어져 있다.
하서(下西)에는 근곡(根谷), 신법리(新法里), 하봉점(河峯店), 당북리(堂北里), 신화리(神化里), 복을촌(伏乙村), 마을례리(麻乙禮里), 우령리(牛齡里), 신야치(新也峙), 판곡리(板谷里), 죽동(竹洞), 곡량동(谷良洞), 내진리(來晉里), 동산리(銅山里), 근기리(近奇里), 소고율리(所古栗里), 요제원촌(要濟院村)이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각남(角南)에는 사을외리(沙乙外里), 신당리(神堂里), 녹갈리(祿曷里), 우척동(牛隻洞), 죽암(竹巖), 송동(松洞), 양산(陽山), 차산리(車山里), 대산동(臺山洞), 묘봉리(妙峯里), 무태리(無台里), 금동리(金洞里), 흑석리(黑石里), 평리(坪里), 마곡(馬谷)을 관할하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70리 떨어져 있다.
각북(角北)에는 송지서리(松脂西里), 저대리(楮代里), 나립리(羅立里), 진읍촌(陳邑村), 방지촌(方旨村), 남산리(南山里), 지촌(枝村), 지곡(只谷), 금곡(金谷), 고산리(孤山里), 오리원(五里院), 부동(釜洞), 우곡(牛谷), 소월배리(所月背里)가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90리 떨어져 있다.
각남과 각북이라는 곳은 옛날의 속현인 풍각현(豐角縣)인데 지금은 큰 마을 두 개로 나뉘었다. 부(府)에서 그곳까지는 가파른 고개 두 개를 넘어 밤새 가면 도착할 수 있다. 현창(縣倉)은 각북에 있는데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도둑이 이 마을에 많이 모인다고 한다.
고미(古彌)에는 초고미리(初古彌里), 이사례리(伊士禮里), 북곡(北谷), 자물례리(自勿禮里), 지촌(知村), 동경리(東京里), 두평리(豆坪里)가 소속되어 있는데, 먼 곳은 관아에서 120리 떨어져 있다.
요컨대 부북에는 사족(士族)들이 많이 거주하고 무인들이 간간이 섞여 살며, 흥방제(興方堤)라는 수리시설이 있어서 논에 충분히 물을 댈 수 있다. 상동은 산이 많아 화전에 의존한다. 내장촌은 큰 내에 인접해 있어 어업으로 생계를 영위한다. 중동은 밀양부의 큰 마을이다. 역시 산밭〔山田〕이 많으며, 논은 비옥한 논과 척박한 논이 섞여 있다. 하동은 곧장 동래(東萊)로 길이 나있고 또 조운(漕運)을 담당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은 사신 접대에 고달파 삶이 상당히 피폐하다.
부남 또한 밀양부의 큰 마을인 데다 사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묵은 갯밭이 많기 때문에 유민들이 많이 모여든다. 상서는 논농사와 화전이 모두 넉넉하고 간간이 갯밭이 섞여 있다. 하서는 낙동강 하류와 접해 있는데 들이 많고 산은 적다. 각북과 각남은 땅이 넓고 논이 많아 백성이 가뭄을 근심할 일은 없지만 죄를 짓고 도망친 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고미는 외지고 먼 데 있어 백성들의 풍속이 더없이 순박하지만 땅이 좁아서 전적으로 화전에 의존한다.
향교는 부(府)에서 북쪽으로 5리쯤에 있다. 대성전(大成殿) 3칸, 동계(東階)와 서계(西階),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는데, 또한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만력 임인년(1602, 선조35)에 중수하였다.
사직단은 부의 북쪽에 있다. 여단(厲壇)은 구벌촌에 있는데, 단 아래에 토암(兔巖)이 있다.
부에 소속된 역이 6개인데, 수안역(水安驛)은 영산도(靈山道)로, 유산역(幽山驛)은 성주도(星州道)로, 용동역(龍洞驛)은 청도도(淸道道)로, 무흘역(無訖驛)은 김해도(金海道)로, 용동역(龍洞驛)은 창원도(昌原道)로 나 있다.
원(院)은 11개인데, 북정원(北亭院)은 용가역(龍駕驛) 동쪽에, 금곡원(金谷院)은 구곡(仇谷) 서쪽에, 다원(茶院)은 금곡(金谷) 서쪽에, 작원(鵲院)은 양산(梁山) 경계에, 해양원(海陽院)은 김해(金海) 경계에, 무량원(無量院)은 금동역(金洞驛) 남쪽에, 입량적원(入良赤院)은 마산(馬山) 서쪽에, 성덕원(成德院)은 적곡(赤谷) 동쪽에, 요제원(要濟院)은 대항리(大項里) 서쪽에, 남정원(南亭院)은 감천리(甘川里) 동쪽에, 신원(新院)은 구곡(仇谷) 동쪽에 있다.
절은 11개인데, 재악사(載岳寺)는 언양(彥陽) 경계에, 숭진사(崇眞寺)는 무흘역(無訖驛) 북쪽에, 석골사(石骨寺)는 경주(慶州) 경계에, 만어사(萬魚寺)는 숭진사(崇眞寺) 동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로는 그곳 산골짜기에 있는 크고 작은 암석에서 모두 종과 경쇠 소리가 나는데 옛날에 바닷속의 용과 고기가 돌로 변하여 그렇다고 한다. 구박사(仇朴寺)는 남산 봉수 서쪽에, 영은사(靈隱寺)는 삽포(鈒浦) 동쪽에, 안동사(安東寺)는 오방동(五方洞) 서쪽에, 대산사(臺山寺)는 무태리(無台里) 서쪽에, 안마사(鞍馬寺)는 요제원(要濟院) 서쪽에, 정전사(征戰寺)는 풍각현(豐角縣) 동쪽에, 용천사(湧泉寺)는 성주(星州) 경계에 있다. 용천사와 재악사는 규모가 큰 사찰로, 부에서 사용하는 종이와 북인(北人 청나라)들이 요구하는 상화지(霜華紙)ㆍ백면지(白綿紙) 등의 종이를 만드는 일에 동원된다. 옛날에는 거주하는 승려가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까지 되었는데 지금은 4, 5십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상은 밀양 지역의 대략적인 사항이다.
토지는 상상전(上上田 1등급의 토지)이 많고, 산과 물이 10분의 4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흉년이 들더라도 크게 군색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다.
성씨로는 손(孫), 박(朴), 김(金), 변(卞), 조(趙), 변(邊), 양(楊), 당(唐), 이(李), 최(崔), 윤(尹), 조(曺), 제(諸), 노(魯), 전(田), 유(劉), 부(斧), 태(苔), 두(豆), 보(保), 백(白)씨가 있다.
토산물로는 차, 닥나무, 적죽(笛竹 피리를 만드는 대나무), 죽전(竹箭 대로 만든 화살), 송이버섯, 석이버섯, 석류, 밤이 있다. 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량이 으뜸이다. 동서남북 네 곳의 숲이 있는데 남쪽은 바로 영남루 앞이다. 또 옻, 벌꿀, 지황(地黃), 복령(茯苓), 반석(班石), 삼〔麻〕, 천문동(天門冬), 맥문동(麥門冬), 농어〔鱸魚〕, 은어〔銀口魚〕, 웅어〔葦魚〕, 황어(黃魚), 쏘가리〔錦鱗魚〕, 붕어〔鯽魚〕, 눌치〔訥魚 누치〕가 난다.
고적으로는 이궁대(離宮臺), 추화산성(推化山城), 장군정(將軍井), 장군석(將軍石), 경락암(經絡巖), 마전암(馬轉巖), 정전사(征戰寺)가 있다. 이궁대는 수산현에서 서쪽으로 5리 되는 지점에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로는 신라의 왕이 강우(江右 경상우도)를 병탄하려는 뜻을 품고 장수에게 명하여 이곳에 진을 치게 하고는 행행(行幸)하는 곳으로 삼았다고 한다.
추화성은 부에서 동쪽으로 5리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그 위에 손 장군(孫將軍 손긍훈(孫兢訓))의 사당이 있는데 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빈다. 장군석 역시 손 장군이 군막을 쳤던 곳이라 하는데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미상이다. 장군정은 객사의 동북쪽에 있다. 물이 맑고 시원하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데 깊이는 10여 길이다. 세속에 전하기로는 김석(金碩) 장군이 팠다고 하는데 역시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미상이다. 경락암은 세속에 전하기로는 옛날에 선구(仙嫗)가 경락(經絡)을 한 곳이라 한다. 그 아래에 깊은 연못이 있다. 마전암은 세속에 전하기로는 삼한(三韓) 시대에 이서국(伊西國)이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의 군대에게 패하여 말이 많이 굴러떨어진 곳이라 한다. 정전사는 세속에 전하기로는 신라의 왕이 대가야(大伽倻)를 정벌할 때 머무른 곳이라 하는데, 매우 높은 탑이 있다. 이상의 전설은 모두 의심스럽지만 들은 대로 전할 뿐이다.
풍속은 대체로 농사에 힘쓰고 조그만 것도 아끼는데 무속과 송사를 좋아한다. 토지가 비옥하고 물고기와 게가 풍부하기 때문에 이곳의 백성은 쌀밥에 고깃국을 먹지 않는 자가 없다. 선비들은 학문에 힘쓰고 논의하기를 좋아하며 남의 장단점을 따지는데, 이것이 영우(嶺右 경상남도)의 풍습이다. 옛날에는 선비의 수가 교액(校額 향교의 정원)보다 많아서 수십에서 백 명 가까이 되었는데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죽지 않았으면 다른 인근 고을로 옮겨 버려서 지금은 겨우 20여 명만 남아 있다. 어(魚) 자와 시(豕) 자도 구별 못하는 진사 2인도 정원에 포함되어 있는데, 문장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반도 안 된다. 여자들은 자못 정조를 지킬 줄 알아서 나가 노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아전들은 아둔하여 일에 익숙한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신라와 삼한은 시대가 멀어 자세하지 않고,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는 서울과 대등할 정도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고려 시대에 박인간(朴仁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충숙왕(忠肅王)이 원나라로 끌려갈 때 시종하는 신하들 대다수가 도망가지 않으면 짐독을 마셨지만 박인간만은 어려운 기색 없이 시종하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 가는 충숙왕을 수행하였다.
충선왕(忠宣王)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한 박의중(朴宜中)이란 사람은 소음촌(召音村) 사람이다. 문장이 뛰어나서 장원급제하여 신우(辛禑)를 섬겼는데, 주색에 빠져 지나친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극력 간하였다. 후에 명(明)나라 수도에 가서 침탈한 철령위(鐵嶺衛)를 반환해 달라고 청하자 명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융숭하게 예우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을 윤허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박위(朴葳)라는 사람이 있다. 왜구가 황산(黃山)을 침범하여 김해의 남포(南浦)까지 육박하자 당시 김해 부사였던 박위는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적을 공격하니 적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대부분 익사하여 마침내 성을 온전히 지켰다. 또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가서 대마도를 토벌하여 왜선(倭船) 300척을 불태우고 우리 포로 100여 명을 귀환시켰다.
변계량(卞季良)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문장이 뛰어나서 1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으며, 문형(文衡)을 맡은 기간이 20년이었다. 권근(權近)의 뒤를 이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찬수를 완료하였다. 저서로 《춘정집(春亭集)》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종직(金宗直)은 대동촌 사람으로, 자는 계온(季昷)이고,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지위는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문장과 경술(經術)이 당대 으뜸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호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김종직은 주서 길재(吉再)에게 수업하였는데 길재는 포은 정몽주에게 배웠다. 그의 문인 중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 같은 분이 있었으므로 더욱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저술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 《여지승람(輿地勝覽)》,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오경석의(五經釋義)》가 있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고, 상례와 제례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조사(詔使) 위시량(魏時亮)이 우리나라에서 충효와 절의와 도학에 뛰어난 선비가 누구인지 물었을 때, 당시 퇴계 이황 선생이 예조 판서로서 그 물음에 응답하기 위해 16인을 뽑았는데 김종직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일찍이 쌍수정(雙樹亭)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터를 쌓아 추모하였는데 그 터는 분재곡(粉齋谷)에 있다. 선생을 모신 예림서원(禮林書院)은 부(府)에서 남쪽으로 7리쯤 되는 지점에 있다.
박한주(朴漢柱)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호는 우졸(迂拙)이다. 그는 강개하여 직언하기를 좋아하였다. 한번은 간관으로 있으면서 연산군이 상기를 마치자 마자 종묘에 절하지 않고 용봉장(龍鳳帳)을 설치하여 놀고 잔치 벌이기를 즐긴다고 직간했다. 그러자 연산군이 매우 노하여
“장막이 네 것이냐?”
하니, 박한주는
“이것들은 모두 백성들의 힘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군주가 사적으로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후에 임사홍(任士洪)의 간악함을 논하였다가 마침내 그에게 모함을 받아 해를 당하였으니, 이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사건에 연좌된 것이다. 처음에는 멀리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처형을 앞두고도 안색이 그대로였다. 김종직도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날은 낮인데도 그믐밤처럼 캄캄하고 우레와 번개가 크게 쳤다고 한다.
신계성(申季誠) 역시 김종직의 문인으로, 호는 송계(松溪)이며, 삽포 사람이다. 소싯적부터 과거 공부를 달가워하지 않고 경전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교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세의 명현(名賢)들이었다. 삽포에 정사(精舍)를 짓고 온종일 향을 피워 놓고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마음이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생업을 돌보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의리를 사모하여,
“선하지 않은 행실이 있으면 차라리 관청에서 벌을 받을지언정 선생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훗날 어떤 사람이 그의 묘지명을 짓기를,
삽포리에 길인이 태어났으니 / 鈒浦之里吉人生자신을 감추고 학문을 과업으로 삼았네 / 韜光晦迹學爲程
하였다. 김종직을 모신 예림서원에 박한주와 나란히 배향되었다.
강혼(姜渾)은 금물촌(金勿村) 사람이다. 사마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장형(杖刑)을 받고 유배되어 죽었다. 관직은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박홍신(朴弘信)은 무인으로 부내(府內) 사람이다. 일찍이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선 130척을 빼앗았으며, 집을 불태우고 적의 수급을 베고 사로잡은 포로가 매우 많았으며, 우리 포로 131명을 송환하였다. 후에 전쟁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박증영(朴增榮)은 14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그를 본 자들이 놀라워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수찬을 지냈다. 부모의 상을 매우 엄격하게 치러 병이 들어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병이 심해지자 아내가 그를 한번 만나 보려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전불산(全佛山)은 촌부로, 곡량동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상에 여묘살이할 때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반드시 무덤 주위를 돌면서 아침까지 슬프게 울부짖었다. 상기가 끝났는데도 3년 더 여묘살이를 하면서 집에 가지 않았다.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금지(今之)는 시골 처녀로, 천화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산밭에서 김을 매다가 어머니가 범에게 물리자 한 손으로는 어머니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미로 범을 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쳤다. 범이 어머니를 백여 보 끌고 가는데 금지가 어머니를 따라가니 범이 드디어 어머니를 버리고 갔다. 어머니가 마침내 운명하자 금지는 마치 어른처럼 시신을 안고 통곡하였으며 옷을 팔아 어머니의 상을 치렀다.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손기륜(孫起倫) 역시 효자이다. 어머니를 데리고 재악산으로 가서 왜적을 피하였는데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어머니가
“나는 늙어 잘 걷지 못한다. 모자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하다.”
하니, 손기륜이
“차마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자기 몸으로 어머니를 감쌌다. 그러자 왜적이 손기륜을 찔러 죽이고 어머니는 버리고 갔다.
배상경(裵尙絅) 또한 아버지를 따라 왜적을 피해 숲 속으로 갔다. 왜적이 아버지를 찔러 죽이자 배상경은 대성통곡하고 몽둥이를 들고 왜적을 향해 돌격하여 한 놈을 죽이고는 마침내 아버지의 시신 옆에서 해를 당하였다.
또 손인갑(孫仁甲)과 그의 아들 손약해(孫若海), 그리고 노개방(盧蓋邦)이란 사람이 있다. 손인갑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의령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고, 손약해는 복수를 도모하여 남은 병사를 이끌고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노개방은 동래 교수(東萊敎授)로 향교의 위패를 받들고 성으로 들어갔다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같은 날 죽었다.
조광익(曺光益)은 오방동(五坊洞) 사람이다. 문장이 뛰어나 중시에 급제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상사와 제사에 마음과 예제를 다하니 향리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김불수(金不受)와 박심사(朴尋仕)도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손씨(孫氏)는 안근(安近)의 처이다. 시집간 지 며칠 만에 안근이 죽자 피눈물을 흘리며 삼년상을 마쳤다. 부모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을 가엾게 여겨 개가시키려고 하자 손씨는 몰래 목을 매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어 살아났다. 손씨는 즉시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침저녁으로 끼니때마다 반드시 남편에게 제를 지냈다. 향년 22세였으니, 그녀가 요절한 것은 몸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비(蘭斐)는 벌원촌(伐苑村)의 아낙이다. 15세에 시집갔는데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몹시 슬퍼하며
“한 여자의 몸으로 두 남편을 섬긴다면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정씨(鄭氏)는 양갓집 규수로, 우곡리(右谷里) 사람이다. 역시 15세에 시집갔는데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부모가 수절하려는 그녀의 뜻을 꺾고 사위를 맞이하자 즉시 몰래 방으로 들어가 자살하였다.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노개방의 처 이씨(李氏)는 남편이 전사한 것을 애통해하여 항상 남편의 홍패(紅牌)를 안고 있었다. 왜적을 피하여 엄광산(嚴光山)에 갔다가 왜적이 범하려 하자 홍패를 안고 언덕 아래로 투신하여 죽었다.
처녀 민씨(閔氏)는 민응녕(閔應寧)의 딸이다. 19세가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안았는데 임진왜란을 만났다. 부모가 근심하여
“너는 장성한 몸으로 아직 시집가지 못했는데 난리를 만났으니 어찌할꼬.”
하니, 민씨는
“제가 잘 처리할 것이니, 부모님께서는 잘 피신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왜적이 부(府)에 들어 왔다는 말을 듣고 은밀한 곳에 가서 자결하였다.
손기후(孫起後)의 처 장씨(張氏), 박희량(朴希良)의 처 민씨(閔氏-삼매당할아버지 큰 따님), 성한(成僩)의 셋째 딸, 남순길(南順吉)의 처 안씨(安氏), 손시일(孫諟一)의 처 조씨(趙氏), 향리(鄕吏) 박경명(朴敬明)의 처 박씨(朴氏), 박학수(朴鶴壽)의 처 이씨(李氏)도 모두 왜구를 만나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켰다. 이상은 그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사례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오른 사람은 명성이 당대에 어느 정도 드러난 자들만 해도 수십 인이나 되기에 다 서술할 수 없다. 그렇지만 박익(朴翊)과 송일(宋軼)은 관직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변중량(卞仲良)은 판중추부사에, 박건(朴楗), 현석규(玄碩圭), 박열(朴說)은 찬성(贊成)을, 이신(李申)은 참찬(參贊)을 지냈으며, 안구(安覯)는 순리(循吏)로, 손효조(孫孝祖)는 독행(獨行)으로, 손기양(孫起陽)은 청렴과 검소함으로, 양담(梁澹)은 서법으로, 박곤(朴坤)은 무용(武勇)으로 알려졌으니 역시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동안 이 고을을 맡았던 지방관 중에 문헌에서 그 치적과 공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인물이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부터 지금까지 약간 명이 있는데, 그중에서 특히 채록할 만큼 뛰어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윤송균(尹松筠)은 청렴하기로 알려졌고, 김주(金湊)는 〈영남루기(嶺南樓記)〉를 썼고, 이세응(李世應)은 정사를 엄정하게 처리하였고, 권벌(權橃)은 예조 참판으로 있다가 부임하였고,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선생은 백성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제어하기를 모두 법식대로 하였고,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은 통정대부의 품계로 부임하였고, 최개국(崔蓋國)은 선정비(善政碑)가 있고, 박광옥(朴光玉)은 통훈대부의 품계로 부임하였고, 신집(申磼)은 중직대부의 품계로 부임하였고, 박진(朴晉)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에 올랐고, 이수일(李守一)은 통훈대부의 품계로 부임하여 수군절도사로 승진하였고, 최기(崔沂)는 덕정비(德政碑)가 있고, 정기룡(鄭起龍)은 청정비(淸政碑)가 있고, 이사상(李士祥)은 청덕유애비(淸德遺愛碑)가 있고, 이지선(李祗先)은 청검선정비(淸儉善政碑)가 있고, 김응조(金應祖)는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가 있다. 이상은 밀양부에 대한 지금까지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아! 밀양부의 면적은 2백 리도 못 되는데, 그 민물(民物)의 다과와 인재의 성쇠와 풍속의 후박을 전후로 비교해 보면 차이가 현격한 정도에 그치지 않으니, 이 역시 세도(世道)에 따라 변하는 듯하다. 천하의 이치는 작은 것과 큰 것이 같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나와 함께 다스릴 사람은 오직 선량한 2천 섬의 태수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좋은 말이다. 지방관에 적임자를 얻느냐에 따라 한 고을의 안위가 결정되는 것은 진실로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백성이란 반드시 항산(恒產)이 넉넉한 뒤에 항심(恒心)을 지킬 수 있으니, 앞에서 말한 민물이 증가하기도 하고 감소하기도 하며 인재가 많이 배출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며 풍속이 후해지기도 하고 박해지기도 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곳은 평소 토지가 비옥하다고 알려져서 백성들이 생업을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혹독한 전란을 겪은 뒤로 피폐함이 누적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호구가 겨우 열에 두셋 정도인데 수탈은 배나 된다.
밀양부는 동래관(東萊館)과 인접해 있어 정부(正賦 조세)를 덜어 왜인(倭人)을 먹이고, 또 부녀자들에게 길쌈을 독촉하여 북인의 끝없는 요구에 응하며, 게다가 기근과 역병까지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백성으로 하여금 위로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식을 부양하게 하고 이들을 선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어찌 수월하기를 바라겠는가. 황패(黃霸)와 탁무(卓茂)에게 맡기더라도 진실로 단기간 내에 백성을 소생시키고 윤택하게 하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내가 이런 말세에 수령으로 부임한 경우이겠는가. 그저 지방관을 맡기신 성상의 기대를 저버릴까 날마다 두려워하여 이 〈밀양지〉를 지어서 반성한다.
때는 숭정 기원 25년 임진(1652, 효종3) 6월이다.
[주-D001] 밀양지 :
이 글은 1652년(효종3) 6월에 지은 글이다. 작자는 이해 4월 19일에 밀양 부사에 임명되었는데 가을에 자형 조계원(趙啓遠)이 관찰사로 부임하자 친척간이라는 혐의로 체차되어 돌아왔다. 조계원은 8월 19일에 경상 감사가 되었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 《承政院日記 孝宗 3年 4月 19日, 8月 19日》
[주-D002] 전패(殿牌) :
지방 관청의 객사 정당(正堂)에 봉안하는 ‘전(殿)’ 자를 새긴 나무패를 말하는데, 임금을 상징한다. ‘궐패(闕牌)’라 하기도 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관리 전원이 모여 배례(拜禮)하고, 또 지방에 출장 간 중앙 관원도 여기에 배례하였다.
[주-D003] 밤나무 숲 :
율림수(栗林藪)를 가리킨다. 밀양읍 삼문동(三門洞) 일대에 미만(彌滿)했던 율림으로 남림(南林) 또는 율수(栗藪 밤숲)라고도 하였다. 밀양팔경의 하나이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632쪽》
[주-D004] 고려 …… 것이다 :
‘긴 내가 한 눈에 들어오고 광야를 삼킬 듯하다.〔俯控長川 平呑曠野〕’는 내용은 김주의 기문에 나오지만, ‘큰 강이 그 사이에 비껴 흐르고 늘어선 봉우리들이 삼면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大江橫流於其間, 列岫重圍於三面.〕’는 내용은 성원도(成元度)의 영남루시의 서문에 나오고,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 이어진 봉우리와 겹겹의 산이 있다.〔茂林脩竹, 連峯疊嶂.〕’는 내용은 권기(權技)의 〈소루기(召樓記)〉에 나온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6 慶尙道 密陽都護府 形勝》
[주-D005] 조적(糶糴) :
환곡을 꾸어 주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일을 가리킨다.
[주-D006] 아록(衙祿) :
지방의 원과 벼슬아치들에게 주는 녹봉을 가리키는데, 아록전(衙祿田)을 주어서 백성들로부터 그 결세를 받아쓰게 하였다.
[주-D007] 속오군 :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27)에 처음 생긴 제도로 대개 공사(公私)에 역(役)을 지지 않는 양인(良人)과 노비 등 천인(賤人) 중에서 15세 이상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작대(作隊) 편성하였는데, 평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입번(立番)하지 아니하며 유사시에는 당지에서 소집하여 훈련과 병역에 종사하였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15쪽》
[주-D008] 작청(作廳) :
질청(秩廳)을 가리킨다. 아사(衙舍) 정문에서 동남쪽으로 약 20보 지점 앞에 있었는데 지금의 밀양읍사무소 자리이다. 일명 ‘전헌(詮軒)’ 또는 ‘인리청(人吏廳)’ 혹은 ‘연청(椽廳)’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방을 비롯한 6방 관속들이 부사의 명령을 받아 직무를 수행한 사무소이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00쪽》
[주-D009] 연당의 …… 있다 :
원래 교방 제도는 고려 초기부터 있어 온 것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사(官司)에서 기녀를 선발하여 속악(俗樂)과 가무를 교습시켜 유연(遊宴)에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밀양부의 교방도 이러한 여악(女樂) 교습의 풍습에 따라 이미 고려 시대부터 설치된 듯하다. 특히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이 향토적인 정회를 가득 담은 〈죽지곡〉 9장의 장가(長歌)를 지어 보급하였는데, 밀양 교방의 기녀들이 그것을 가곡에 실어 애송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 따르면, 교방은 객관의 대문 동쪽에 있었고 1632년(인조10)에 부사 이필영(李必榮)이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그때에도 점필재가 남긴 〈죽지곡〉 9장이 여악의 애송 가곡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19쪽》
[주-D010] 부사(府司) :
아사(衙舍)에서 서쪽으로 200보 지점으로 객사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로 고을의 호적과 재산 문서를 통할하던 사무를 맡았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01쪽》
[주-D011] 부옥(府獄)은 …… 있다 :
옥소(獄所)를 가리킨다. 읍성의 서문 밖에 있었으며 지금의 내이동(內二洞) 밀양 우체국 서편이다. 옥소는 형방에 소속된 중요한 기관으로 대개 둥근 장벽(墻壁)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원형의 형옥(刑獄)으로 ‘옥장(獄墻)’ 또는 ‘환옥(環獄)’이라고도 한다. 밀양 옥소는 높다란 담장으로 에워싸인 넓은 마당 한가운데 3칸〔間〕의 건물로 이루어졌고 문 안에 ‘옥녀각(獄女閣)’이 있어 옥신(獄神)을 받들었으며 관원으로 옥사직(獄司直)이 있었다. 1632년에 부사 이필영이 담장을 쌓고 옥소를 중수하였다는 내용이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20쪽》
[주-D012] 전천리(箭川里)는 …… 있다 :
전천리는 살내 마을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인 살내를 한자로 전천(箭川) 또는 활천(活川)으로 표기하였다. 마을 뒷산에 화살대(箭竹)가 많이 나고, 마을 앞내가 활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살내라고 하였다. 살내 마을 앞들에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돌로 쌓은 방축이 있었는데, 마치 양의 창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양장성(羊腸城)이라 하였다. 《조희붕, 밀양 지명고,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94》
[주-D013] 삽포(鈒浦) :
부북면(府北面) 전사포리(前沙浦里) 앞 응천(凝川) 가에 있었으며 옛날에는 배를 정박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본래 ‘신포향(薪浦鄕)’으로 ‘신(薪)’의 방음(方音) ‘섶’이 ‘삽’과 상사(相似)한 데서 ‘삽포’가 되었고 지금은 ‘사포(沙浦)’ 또는 ‘삽개’로 통용하고 있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631쪽》 여기서는 사포리(沙浦里)를 가리킨다.
[주-D014] 임곡(林谷) :
바로 위에도 ‘임곡’이 나왔으므로 중복된 듯하다.
[주-D015] 흥방제(興方堤) :
부북면 제대리(堤大里)에 있다. 제대리를 ‘못골’ 또는 ‘지동(池洞)’이라고도 했는데 흥방지(興方池)로 인하여 생긴 동명(洞名)이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71쪽》
[주-D016] 부에 …… 있다 :
부에 소속된 역이 6개라고 했는데 5개밖에 안 되고 용동역은 중복되었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는 “본부(本府)에는 용가역(龍駕驛), 금동역(金洞驛), 수안역(水安驛), 무흘역(無訖驛), 양동역(良洞驛), 유산역(幽山驛 풍각(豐角)에 있다)이 있다.”라고 하였다. 《密州徵信錄 卷1 郡勢 交通》 조선조 전기에 밀양부 구역에 관련되는 역참(驛站)은 용가, 금동, 수안, 무흘, 양동의 5개소인데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성현도(省峴道 청도(淸道)) 찰방(察訪)의 관할 아래 있었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544쪽》
[주-D017] 만어사(萬魚寺) :
만어사는 자씨산(慈氏山)이라고도 하는 만어산 중턱에 있는 고찰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어산불영(魚山佛影)〉에 사찰에 대한 연기설(緣起說)과 전설이 실려 있다.
[주-D018] 이궁대는 …… 한다 :
이궁대는 초동면(初同面) 검암리(儉岩里) 이궁골〔離宮洞〕에 있는데, 6세기경에 신라의 낙동강 이궁(離宮), 곧 임금의 전쟁 사령부 겸 행재소(行在所)로 전해오는 설화상의 유적지이다. 긴 강이 남쪽에 가로놓이고 사방의 경치가 빼어나 삼한(三韓) 이래 명승지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 때 지증왕(智證王)이 강우(江右)의 땅을 손에 넣고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대가야(大伽倻 고령(高靈))를 치고 남쪽으로 가락(駕洛 김해(金海))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陣)을 친 곳이라 한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431~432쪽》
[주-D019] 경락암은 …… 한다 :
신안 부락 음달에 여러 개의 서 있는 바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누워있는 것 같이 보이는 바위 하나가 있다. 《밀주지》에 바위 윗면에 작은 구멍 10여 개가 나 있어 마치 사람 몸의 경락과 같은데 먼 옛날에 신선 할미가 경락에 해당하는 부위에 침을 놓았다 하여 경락암이라 했다 한다. 지금도 바위에는 옛 기록과 같이 경락에 침을 시술한 것 같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희붕, 밀양 지명고,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94》
[주-D020] 명나라 고황제(高皇帝) :
1328~1398. 고황제는 명나라의 초대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의 시호이다. 자는 국서(國瑞), 연호는 홍무제(洪武帝),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그는 중국 호주(濠州), 즉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 출신이다.
[주-D021] 계온(季昷) :
저본에는 계온(季溫)으로 되어 있는데 《성종실록》 및 《점필재집(佔畢齋集)》 등에 의거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成宗實錄 23年 8月 19日》 《佔畢齋集 神道碑銘幷序》
[주-D022]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1493년(성종24)에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듬해 ‘문간’으로 고쳤다가 1708년(숙종34)에 다시 ‘문충’으로 복시(復諡)하였다.
[주-D023] 임사홍(任士洪) :
저본에는 임사홍(任士弘)으로 되어 있는데 《사가집(四佳集)》 및 《대동야승(大東野乘)》 등에 의거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四佳集 四佳先生集序》 《大東野乘 師友名行錄》
[주-D024] 금지(今之)는 …… 사람이다 :
《밀주징신록》에는 성명이 손금지(孫金枝)로 되어 있는데 그 아래 간주(間注)에 “백익형(白益瀅)의 처이다. 구본(舊本)에는 금지로 되어 있다.” 하였다. 그리고 거주지는 희곡(希谷)이라 하였다. 《密州徵信錄 卷1 州誌案 烈婦附貞女》
[주-D025] 난비(蘭斐)는 벌원촌(伐苑村)의 아낙이다 :
《밀주징신록》에는 이름이 난비(卵非)로, 거주지가 벌음(伐音)으로 되어 있다. 《密州徵信錄 卷1 州誌案 烈婦附貞女》
[주-D026] 한(漢)나라 …… 것이다 :
2천 섬이란 녹봉의 등급으로 그 녹봉을 받는 지방 수령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순리전서(循吏傳序)〉에 선제(宣帝)가 항상 이르기를 “서민들이 제 고장에 안착하여 근심 걱정이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이 일을 나와 함께 할 사람은 오직 저 어진 2천 섬(石)들이다.”라고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주-D027] 황패(黃霸)와 탁무(卓茂) :
황패(?~BC55)는 한(漢)나라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 시호는 정(定)이다. 영천 태수(穎川太守)에 임명되고 다시 승상(丞相)에 이르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한나라 때 선정을 베푼 관리를 말할 적에 황패를 제일 먼저 꼽는다. 《史記 卷96 張丞相列傳 黃霸》 《漢書 卷89 循吏傳 黃霸》 탁무(?~28)는 전한(前漢) 말기의 남양(南陽) 완(宛) 땅 사람으로, 자(字)는 자강(子康)이다. 평제(平帝) 때에 밀현 영(密縣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後漢書 卷25 卓茂列傳》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김재영 (공역) | 2015
+ 주석
주D018
이궁대는 초동면(初同面) 검암리(儉岩里) 이궁골〔離宮洞〕에 있는데, 6세기경에 신라의 낙동강 이궁(離宮), 곧 임금의 전쟁 사령부 겸 행재소(行在所)로 전해오는 설화상의 유적지이다. 긴 강이 남쪽에 가로놓이고 사방의 경치가 빼어나 삼한(三韓) 이래 명승지로 손꼽히고 있다. 신라 때 지증왕(智證王)이 강우(江右)의 땅을 손에 넣고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대가야(大伽倻 고령(高靈))를 치고 남쪽으로 가락(駕洛 김해(金海))을 정벌하기 위하여 진(陣)을 친 곳이라 한다. 《조희붕, 밀양지, 밀양지편찬위원회, 밀양문화원, 1987, 431~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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