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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가는 길
[무엇을 담을 것인가...] 누군가 ‘웰빙라면이 무엇인가?'라고 나에게 물을 때...
‘그것은 쑥의 씁쓰르함이 돋운 식욕이, 사르르 녹으며 시원하게 달라붙는 냉이와 채 빠지지 않은 매운 향을 코끝으로 뿜어내는 (서리해 온)파의 절묘한 궁합으로 ..(두 줄 이상의 설명).. 봄의 역사를 그 안에 담고 있는 라면이다’라고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 장의 사진을 들이 미는 것이 효과적인 것은 분명하다.
‘네가 여지껏 활동했던 중에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대한 답도 지리멸렬한 설명보다는 한 장의 사진을 들어 보이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불필요한 상상을 억제시키며 인간대뇌자극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각적인 만족을 이뤄낸다는 점에서는 그 필요성에 이의를 달 수는 없으리라. ‘야설’ 보다는 '야사‘ 게시판 클릭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은 이론(다른 생각)에 대한 관 뚜껑을 덮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거언 3주만에 카메라가 수리를 마치고 돌아와서 작동을 시작하게 된다.
자... 이제 카메라의 눈으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아쉽게도 늦게 사진기가 도착해서 거제도에서도 많은 사진을 찍지 못했다.]
[거제 가는 길] 통영에서 거제 오는 길에 갓 길 화단에 꽃들이 심어져 있었다. 노란색의 '메리골드'가 4열 종대로 10m 길이로 질서 정연하게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일사 분란한 질서에 아랑곳 않고, 금송화 가 하나 도로 쪽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화단 밖으로 튀어 나와 있는 이유로 그 꽃은 지나는 행인의 발에 밟히기 쉬웠고, 질서를 무시한 댓가로 화단관리인에 의해서 뽑힐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꽃이 뿌리를 뻗어 있음으로 그 공간은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소중한 공간이 된 것이었다. 한편으로 그 삐져나온 꽃은 작위적인 일사분란함과 조직화된 전체성에 큰 생명을 불어 넣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일사분란한 질서의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용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이 튀어나온 꽃으로 -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에 씨가 퍼트려질 것이고 그 씨가 다시 뿌리를 뻣고 싹을 틔우면서 그 작위적으로 정렬된 공간은 ‘자연’ 상태로 이끌어질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이리라... 어렸을 때부터 별다른 회의와 고민 없이 ‘모두가 가는 길’을 비판 없이 따르는 길을 가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믿는 우리... 그 자유가 만들어내는 고도의 욕망과 경쟁심, 필연적으로 내가 하나 더 갖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을 수 밖에 없는 그 ‘자유의 향유’를 통해서, 차별과 억압이 만들어지고, 가난한자와 약한 자의 결핍을 발생시키며, 환경을 파괴시키고 후손의 존립 자체가 불분명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계화 된 욕망의 구조 속에서의 톱니바퀴로 돌아갈 자유’가 아닌... 그 관성을 무릅쓰고 빠져 나와 자신의 발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풍요해 지리라.
비록 외롭고, 비루한 투쟁이 그 평생을 함께 할 지라도... 그 주체적 존재의 풍요로움이 전파되리라. 뻘쭘히 뿌리 뻣고 있는 저 꽃처럼.
[전체적/집단적인 조직 구조에 지쳐하는 '그'를 위해서... 4시간 거리를 돌아가서 찍은 사진 ]
[후손의 미래를 말아먹는 자유] 나는 종종 한국사회내지는 국제사회의 문제를 들먹이며, 그 속에서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원으로서, 인간성을 착취당하고 반대로 착취하면서 사는 인간의 삶을 모습을 나름대로 조명한다. 그리고 세상이 좀 더 우애와 화합과 사랑이 가능한 세상이 될 수 있음을 희망한다. 아니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지속가능할’만큼의 소비생활과 욕망만을 가지면서 사람들이 더불어 살기를 희망한다. 현재와 같은 무분별한 소비와 욕망이 앞으로 후손들의 삶과 생태계의 파괴를 100년 앞으로 앞당겨 놨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때 ‘특정부류’의 사람들로부터 저항이 따른다. ‘너는 왜? 너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냐?’ 일반 평범한 사람들도 그들의 ‘삶’과 ‘관점’ 그들만의 ‘욕망’이 있는데... 왜? 그들이 ‘자유로운 욕망’을 누리는 것이 너에게 비난 받아야 하냐?‘는 것이다. ‘그들도 그렇게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들의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전체주의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자도 아닌, 길바닥에서 겔겔 거리고 다니는 이 보잘 것 없는 나그네가 도대체 누구에게 그러한 삶을 강요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않고, 무턱대고 소유하고 소비하는 삶’의 결과로 인해서 세상이 망가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한심해 할 수’는 있다. 하나라도 더 갖고 높아지려는 그 무한의 욕구로 ‘지속가능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어 내어, 수많은 생물들과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망가트려 놓는 것에 마저, ‘비판’할 명분이 없다면, 도대체 내가, 내 후손이 존재 할 수 있는 존립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바 대로의 완전한 회의와 허무의 기준에서 아무런 사고와 비판의 근거마저도 없는 그러한 ‘황망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는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들의 삶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더군다나 나는 ‘내가 잘 하고 있는 상황에서 타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이루는 방랑의 길 속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누고’ ‘비움’을 배우려 하는 중에 그 방법을 연구하고 공유하고자 할 뿐이다. 나는 오늘도 그들의 ‘마음껏 즐기는 욕망’을 실현함으로 인해서 ‘생명’과 ‘후손’들의 자유를 착취해가는 그들의 ‘자유’를 규탄한다. [거제로 향하는 길 중간 중간에...] 거제도에는 삼성중공업, 대우조선소가 경제의 큰 축을 받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세계적 규모의 조선소로 향하는 국도는 유난히 많은 화물트럭들이 각양각색의 철재를 짐칸에 싣고 씽씽 거리며 오고 갔다. 인간의 활발한 움직임이 있는 공간에는 늘 그렇 듯이 역시 유난히 많은 생명의 죽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중간에는 반가운 사람도 만났다. 어느 언덕을 낑낑 거리며 올라가는데, 갓 길에 차가 한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사람이 한명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별 생각 없이 그 앞쪽에 이르렀을 때 아주머니 한분이 아는 체를 하시면서 다가오신다. 4월에 남해에서 사천가는 길에 길가 정자 아래에서 밥을 주셨던 분이셨다. 차들만 무표정히 지나치는 노상에서 그렇게 아는 분이 밝은 웃음으로 맞이해 주시니 너무 반가웠는데, 일행은 참외 두개를 챙겨 주셨다. 앞으로도 경상도 땅에서 종종 뵐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 드리면서 그때 만나서는 수박 한통 얻어먹을 수 있기를 소망드리면서 헤어졌다. 동행하시는 분들은 처음 뵙는 분들이셨는데, 고생하신다며 크락션을 울려주시며 격려해 주셨다. 이런 분들 한 번씩 마주하면 짐이 가벼워진다. 12시 반 한 작은 휴게소 식당에서 콩나물국을 시켜 먹었다. 그런데 반찬으로 나온 고추를 먹으려고 들어보니, 끝이 베어 물려져 나간 위에 된장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먹던 반찬이 올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한마디 해주려다가 주변에 다른 손님이 있길래 그냥 조용히 명함만 받아가지고 왔는데, 나중에 전화 해서 한마디 해주려 했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명함을 잘 못 준 듯 하다. 엉뚱한 곳이 연락이 된다. 식당에서 밥 먹는 중에 영 께름직 해서 반찬통에 남는 반찬도 못 담아가지고 왔다. 찝찝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 어느 작은 마을 입구 담벼락에 배낭을 깔고 누워서 한숨 자다 일어나서 참외를 깍아 먹으니 위가 좀 시원하게 씻기워지는 듯 했다. 통영에서 거제도가 24km 거리인데, 아침 8시에 출발해서 오후 4시 40분 쯤에 도착했다. [초록빛깔사람들 조소장님과의 대화] 거제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초록빛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꿔 오신 조소장님을 뵙고 말씀을 들었다. 거제도 게시판에 [빌어먹는 나그네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ㅜㅡ 글]을 올렸었는데, 그것에 친절하게 관심을 갖고 연락을 주셔서 저녁 식사를 사 주시면서 이런 저런 좋은 말씀을 들었다.
이 단체는 95년부터 운영되는 단체인데, 자연 보존의 문제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환경단체’라는 이름은 거부한단다. 단체의 설립 목적 등을 살펴 보자. 설립목적 : 생태계를 보전하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 종이 공존하는 생태공동체 사회 ecotopia의 실현. 목적사업 : 생태계 보전을 위한 조사,연구,감시. 훼손된 생태계의 복원 시민들의 생태계 보전 의식을 높이기 위한 홍보,교육. 소 개 : 『초록빛깔』은 환경단체가 아닙니다. "환경" 그 말은 사람만이 살아가기 위한 인간중심적 용어. "자연"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일 생물종의 필요에 따라 구성 될 수도 되여져서도 아니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존재가 고귀하다면 바로 그만큼 자연속의 생명체도 고귀한 존재이니까요. 그러하기에 [초록빛깔]은 자연생태 보전 단체로서, 자연을 '환경적 시각' 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연속의 생명체들을 대할 때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것.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진정 애틋이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렇게 이념에서부터 특이한 조직의 ‘역사’를 보면, 틀림없이 뭔가 다른 것이 있다. 이 모임의 전신은 등산모임이란다. 단순히 끙끙대면서 산에 올라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이 아니라 산의 생태와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임이란다. 이들 생명에 대한 순수하고 깊이 있는 마음을 가진 이들은 95년도에 ‘초록빛깔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자연생태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했단다. 현재 이 조직은 자연보호 정책 제안, 천연보호림 지정, 희귀식물조사발굴, 행정 감시 등의 무수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가로수 조성과 관련한 사업 등에 대통령 상을 두 차례 받는 등으로 그 전문성도 공인이 된 상황이다. 단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조소장님 본인은 환경관련 학과를 전공하거나, 시민운동에 몸담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명에 대한관심과 사랑의 마음은 각종 제도와 법령들을 깊히 들여다보면서, 반환경적인 행정절차와 난개발 등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고도의 집중력을 부여한 듯 싶었다. 종종 흔히 말하는 ‘전문적교육’(해당학과 전공 등)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이나 ‘복지’관련해서 자신들의 활동의 지반에서 대단한 성과를 발휘하는 이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아마 전문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기존의 틀에 짜여진 인맥과 운동의 방향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반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열정과 의지를 자신의 직관에 그대로 쏟아 부을 수 있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그러한 집중이 10년 이상 계속 되면서, 초록빛깔 사람들은 다른 일반적인 시민단체와는 다른 독특한 지위에 오른 듯 하다. 거제도 5.4 [카메라의 귀환] 거제도에 도착하자마자 [초록빛깔사람들]이라는 자연보호 단체에 가서, 드디어 도착한 ‘카메라’를 찾았다. 수리 기간이 2주가 들다니... ㅠㅜ 정품인 줄 알고 산 것이 이러한 번거로움을 자처하고 있었다. 그간 ‘남해’ ‘사천’ '고성‘ ’통영‘등을 거쳐 오면서 찍지 못했던 주옥같은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여간 무사히 수리를 마쳤으니 다행이지, 카메라를 작동시키기 위해서 on 스위치를 올린다. ...(잠잠) 어라? 아무런 반응이 없다. 왜 그러지? 이런 저런 스위치를 조작해 본다. 먹통이다. 아예 전원 자체가 공급이 안 되는 행색이다. 예감이 불길해서 밧데리 박스를 열어보니, 밧데리가 없다. ‘부글부글~~~’ 수리하고 나서 친절하게도 방전의 문제 때문에 밧데리를 빼 놓은 후에 카메라만 보낸 듯 싶었다. ‘돌아가시겠구만...’ 한 번씩 이렇게 자기 일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 만나면 열이 북북 받힌다. 처음에도 1주일 안에 수리 받을 것이라고 얘기하더니 시간이 점점 늘어나서 2주를 채웠었다. 그간 통화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폭발할 지경이다. 토요일, 일요일 근무를 안 할 테니, 월요일 아침에 전화를 해서 뭐라고 소리를 쳐 준다 ??? ‘여보시요. 당신들 내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말하는데...’ 월요일 아침부터 너무 막 나가면 안되지... ‘저기요. 도대체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합니까!’ 직접적인 죄도 없는 전화 받는 여직원 기분만 상할라. ‘금요일 날 택배는 잘 받았는데요. 어렵지 않으시다면 밧데리도 함께 보내주실래요?’ 그래... 우선 이렇게 나갔다가 상대방이 무성의하게 나오면 위로 한 칸씩 올라가자! -> 다음날 ‘금요일 택배는 잘 받았는데요. 어렵지 않으시다면 밧데리도 함께 보내주실래요?’라고 전화했더니... 수리 요청을 해소 보낸 택배 박스에 ‘밧데리가 없었’덴다. ㅠㅜ 일부로 메모리 카드까지 끼워서 보낸 내가 밧데리를 안 보냈을 리가 있나. 하지만 안 보냈다고 하니 어쩌나 ㅠㅜ 하나 사야지. 끄응~~ 몇 일 밥값 날라가겠구만... [야영지 물색] 모 초등학교에 밤이 되어 숨어 들어갔다. 운동장 조회대 옆에 텐트를 쳤다. 하루 행군으로 발바닥이 땀이 배이고 짖 무르고 한 터였고, 얼굴에는 땀이 엉겨 붙어 있었기 때문에 좀 씻어야할 상황이었지만, 수돗가가 없어서 물통에 물 몇 모금 남은 것으로 발을 씻고, 수건에 물을 적셔서 얼굴을 닦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끈끈한 몸이 옷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불쾌한 기분을 줬다. 삭신이 쑤셔서 잠이 든 후에도 낑낑대면서 여러 차례 뒤척였다. 5월 5일 이날 최대의 화두는 ‘빨래를 빨아서 널어 말릴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 최고의 공간이 ‘초등학교’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기에 몇 곳 찾아 다녔는데, 어린이날 행사를 위해서 임시로 주차장 자리가 된 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빨래를 빠느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감수해야 했다. 급수대 공간이 때가 쩔어있었 때문에 빨래를 그 바닥에 놓고 비벼 빨 상황이 아녀서 큰 비닐 봉지 안에 비누만 뭍혀서 손으로 뒤적 뒤적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운동장 반대편에서는 수위아저씨로 보이시는 분이 계속 내 쪽을 주시하고 있는 터여서 상당히 불편했다. 어떤 이상한 복장을 하고 나타난 녀석이 수돗가 근처를 배훼하면서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가 나왔다(건물 뒤편에 빨래 줄을 매달기 위해서)를 하는데, ‘순찰을 나가봐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래서 ‘학교측에 적대감을 갖거나 불이익을 줄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그냥 빨래 빠는 사람이다’는 ‘믿음’? 을 주기 위해서 런닝구 빤 것을 힘차게 하늘에 휘두르면서 물기를 털어 냈다. 이는 일종의 ‘항복 신호’였는데, 런닝구가 흰색이라면 더 좋았으리라... 이러한 신호는 효과가 있어서 이내 아저씨는 다른 곳을 두리번 두리번 살피더니 그냥 교실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비누칠도 제대로 안되고 온전히 비벼지지도 못해 영 께름직하게 빨래를 하고 난 후에 이를 널어 말리려고 하는 찰나, 하늘을 보니 어느새 구름이 밀려와 있는 것이었다. 빨래에 물을 쏟기 전까지만 해도 쨍쨍하던 햇빛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빨래를 걸어 말리고, 그것이 마를 때 까지 ‘죽치고’ 감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 노숙인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였다. 깔판 깔고 누워 있으려니 바람이 쌀쌀해서 텐트를 치고 안에 들어가 라면을 하나 빠개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몇 방울 떨어져 내렸다. ㅠㅜ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에 빨리 텐트를 옮기라고 ‘위’에서 신호를 주고 있었다. 바로 옆 식당 처마 아래쪽으로 신속히 짐을 옮겼다.
상황을 보아하니 빨래가 마르려면 최소한 3일은 걸리겠구만... 낮에는 그 젖은 빨래- 가방에 말아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저녁에나 좀 빼서 텐트 안에서 말리고, ‘반복의 반복’. 흐극~ 건조기를 하나 리어커에 싣고 다녀야 하나... 야영지는 그리 만족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담벼락이 낮고 벽면이 주변의 사람소리, 차 소리를 그대로 집중시키는지라, ‘어머 저기 사람이 자는가봐’라는 두 아가씨의 속삭임 소리마저 그대로 내 귀에 전해질 정도였다. 밤새 내 귀는 잡음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떨어지는 빗소리가 각종 소음을 집어 삼켜 주지 않았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5월 7일 고현초등학교] 전날은 고현초등학교 건물 계단 앞에 텐트를 쳤다. 아이들이 2000명이 넘을 정도로 학교규모는 상당히 큰데 학교가 변두리에 있고, 건물 한쪽이 야산이고 한 이유로 수업시간이 아닐 때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텐트를 치고 나서 군산에서 20년 이상 사업을 하셨다는 숙직서사는 주사님과 함께 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고향사람을 마주대한 것 같은 기분으로 많은 말씀을 나눴다. 야산의 꿩소리를 들으며 조용한 분위기에서 푹 잠이 들 수 있어서 좋았다. 5월 7일 아침에는... 아침식사 후에는 늘 그렇듯이 뒤가 무거워서 주변에 화장실을 찾아 다녔다. 마침 바로 옆의 [거제도포로수용소 체험관]에 들어가서 볼 일 보고... 나왔다. (아... 이 유서 깊은 곳에 들어와서 하고 간 일이 고작 끙아라니...) 짐을 놓고 잠시 활동 준비하고 있으려니, 교통봉사대 할아버지들이 학교 앞 도로 이쪽저쪽으로 해서 서 계신다. 이곳 역시 차량 진입로와 학생들 통학로가 분리되어 있어서 활동하기가 수월했다. 한 명씩 들어오는 아이들을 맞았다. 아이들 수가 2000명이 넘는 학교이다 보니, 아이들의 숫자가 금새 불어난다. 스티커를 배포하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바닥과 담 너머로 버리는 아이들이 꽤나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야단 맞을까해서 중간 중간 올라가서 떨어진 스티커를 줍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스티커가 300여장 정도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선생님 한분이 오신다.
‘휴지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만 했으면 하는 생각을 비추신다. ‘끝나고 다 주워 가겠으니, 조금만 더 하고 갈수 없는지’ 여쭙는다. 살살 웃으시면서 ‘그만 했으면 좋겠네요’라고 계속 말씀하신다. 휴지가 떨어지니 환경 캠페인의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만 하는 것이 바람직하네요’라는 식이다. 물론 이 상황에서는 ‘휴지 떨어진 것 때문에 환경캠페인의 의미가 없으면 수업시간에 애들이 떠들고 점수 잘 안나오면 그것 자체로 선생님들 수업의 필요가 없나요?’라고 반발할 수도 없고 ‘휴지가 그렇게 떨어지는 것은 선생님이 잘 못 가르친 결과 아닌가!’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다. 더군다나 ‘그것 몇 장 떨어진 것 선생님이 좀 주워줄 수는 없나요’라는 말은 더더욱 안된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은 나의 활동에 대해서 비하(쓸데없는 짓 하는구만)하거나, 특별한 행동지침(꺼져라!)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의향을 비춘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선생님들이 그러한 캠페인의 의미를 일부로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기나 해야 내 활동의 효과가 있을까 말까 한데, 선생님들 스스로가 ‘쓰레기만 떨어지는 활동’이라고 규정 짖게 되면 그 순간부로 내 활동은 그야말로 ‘하나마나한 짓’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겠습니다.’고 고개 숙이고, 활동을 접었다. 아이들 몇몇이 옆에서 ‘왜 나는 안줘요’ ‘아저씨 저도 줘요’라고 소리 치는 것을 들으며... 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진입로를 거슬러 오르면서 보니, 휴지도 그리 많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해서 선생님께서 좀 양보하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더 했다. 내 ‘소영웅주의적 이상주의’ 인줄은 몰라도. ‘저 아이들 중’에서 한번이라도 이런 자극을 더 받음으로 좀 더 인간과 자연에 대해서 민감한 수용력을 가질 아이들이 좀 더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아쉬움... 늘상 그렇듯이 건물 기둥 등에 아이들이 스티커를 몇 개 붙여 놓은 상태였다. 너 덧개 정도 붙어 있었다. 선생님의 눈에는 저게 그렇게 심각하게 보였을까... 그런데 휴지를 줍고 이를 열심히 떼고 있을 때... ‘사방이 난리가 아니네. 이거 다 주워가소.’라고 하면서 한분이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옆에 서는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함의 말씀을 드리면서 계속 스티커를 뗐다. ‘어쨋튼’ 내 잘 못으로 이리 된 것인데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그런데 ‘학교 관계자’임을 밝힌 그 분이 잠시 후에 다시 구겨진 스티커를 손에 들고 돌아와서, 이를 흔들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이게 뭔 환경에 대한 내용이냐’하면서 따져 묻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 자. 나는 자신들이 해야 할 수준의 말이 아닌 말을 하면서 타인의 의지와 가치를 비하하는 것 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벌떡 일어나서 ‘야이 양반아! ~ ... ’부터 시작해서 한참을 쏘아 붙였다. 어떤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라 ‘도의적’인 관점으로 떨어진 스티커를 줍고 있는데 왜? 계속 잔소리하면서 쓸데없는 얘기를 하냐는 것과... 문제가 있으면 학교위생법에 의거해서 고소를 하라고 말했다. 어른 둘이 서서 자웅을 겨루고 있는 모습에 흥미를 가진 아이들이 금새 2열 횡대로 뺑 둘러서는 것이다. 멋쩍은 마음에 바로 다시 앉아서 스티커를 엄지손가락으로 박박 문지르면서 뗐다. 학교 관계자 분은 ‘붙은 것 다 떼고 가라’고 했고, 나 역시 법적인 책임은 없지만 도의적으로 그러는 것이 마땅하고 여지껏 거쳐 온 학교에서도 그래왔기 때문에, 엄지손가락으로 열심히 문질러서 떼었다. 그 관계자분에게 소리친 것이 미안한 때문에도 조용하고 겸손하게 ‘알겠습니다’하고 답변하고 그 ‘공포’의 ‘스테인레스 파이프’에 붙은 스티커를 떼기 시작했다. (=> 스테인레스 파이프는 페인트 덧칠이 몇 번씩 된 쇄파이프 등과는 달리, 표면에 굴곡이 없기 때문에 한번 붙은 스티커를 떼려면 겉 코 팅부분만 떨어지고 찐득이 칠이 된 흰 종이 부분은 그대로 남는다. 그 잔해를 떼려면은 마찰력을 높여서 비벼 떼는 수밖에 없는데, 주로 엄지손가락이 이용된다.) 하여간 몇 곳에 붙은 스티커 다 띄었고 과거로 붙어 있었던 다른 접착물 찌끄레기까지 다 띄었다. 그 ‘학교 관계자 분’도 내 보이는 성의에 뭔가를 느끼셨는지 ‘그 정도면 되었다’고 하셨지만, 아예 ‘광’을 낼 수준으로 싹싹 긁어서 떼었다.
한편으로 조급한 마음에 너무 박박~ 문질러 댔는데, 엄지 나중에 손가락을 보니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것 때문에 젓가락질 하는 것과 물건 들었다가 놨다 하는 것이 영 어색하다. 영광스러운? 투쟁의 흔적 @.@~ 신께서 친히 이렇게 영웅?에게 훈장을 수여하신 만큼 나는 그 물집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상황이다. 까딱 잘못해서 터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으~~~ 그 쓰라림. (혼잣말 : 발바닥에 허고 헌 날 물집 잡히는 것도 부족해서, 엄지손가락에까지 물집이 잡히다니... ㅠㅜ 하여간 터지지 않게 소중히 다뤄야 한다. 암~ 터지면 안된다. 안돼.) [초록빛깔사람들 조 소장님과의 산책] 오후에는 초록빛깔 사람들의 조소장님께서 거제도를 빙 둘러 일주를 시켜주셨다. 거제도는 해변을 끼고 순환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다. 해금강이 보이는 전망 좋고, 생태적으로 특별한 식물군락이 있는 **에 가서 일몰을 바라보는 감흥은 특별했다. 소장님과 얘기하면서 이런 저런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말씀을 통해서 대충 판단해 보건데, 소장님은 고도의 정합성과 논리적 가지고 환경/자연생태 사안에 대한 접근 하시는 분이셨다. (개인적으로 누가 될 수 있기에 논의 중에 나눴던 얘기는 다 올릴 수는 없지만) 그 냉철하고 신중한 정신은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행정과 법에 작용해야하는 시민운동성에 바람직한 역할을 부여할 듯 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분 밑에서 몇 년 열심히 배워서 문제가 있는 행정가들과 정치인들을 깨 부수고 싶은 의지도 다분히 있다. 더군다나 나이 먹어가면서 ‘정착’하여 뭔가 ‘쌓고’ 싶은 열망도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법과 제도의 기술적인 적용에 의한 사회변화는 ‘그들’의 몫이리라.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법... 내 역할은 ‘예수의 일’이 아닌, ‘바울’의 일이다. 나는 사람의 ‘주체’와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나섰다. 나는 직접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이 아니라, 사람의 열정을 깨워서 그들로부터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을 하는 것이다. 나만의 갈 길이 멀다.
5월 8일 계룡 초등학교에 캠페인을 위해 섰다. 포크레인이 학교 앞에서 공사하느라고 번잡하다. 아이들 등교하는데 위험하지 않느냐고 하니, 곧 중지할 거란다. 그래서 스티커를 펴 놓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교문 뒤쪽에 수상한 그림자가 보인다. 앗~~ 만화영화 할인권 나눠주는 아주머니다. 으큭~~~
이렇게 활동이 겹쳐 버리면 떨어지는 휴지만 늘어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정신이 없을 듯 해서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할 듯 했다. 혹시나 또 겹치지 않을까 해서 다음날은 어디서 하시냐고 물었더니 ‘진해’가서 하신단다. 진해 활동은 다음 주이니까 겹칠 일은 없겠다.
하여간 학교에서 나와서 15분 쯤 떨어져 있는 신현초등학교로 향한다. 급한 마음에 입에서는 씩씩하는 기관차 음을 내며 뛰다 시피 해서 당도했다. 으큭... 그런데...이쪽에도 할인권을 나눠주는 아가씨가... 할인권 배포를 위해서 지역을 순회하면서 동시 다발로 활동을 하는 듯 싶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근처 아파트 정자위에 올라가서 드러누웠다. 전날 묵었던 시민단체 사무실 뒤편이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영 시끄러워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밀린 피로나 풀자~ [저녁 야영] 도서관 주변에 교회 한쪽 터가 조용하고 텐트치기 좋을 듯 했다. 주변을 삥 둘러봐도 사람도 없고 목사님 사택도 안보였다. 더군다나 교회 입구 간판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은가!!! 근처 건물 등의 상황을 짐작해보건데, 텐트를 치려고 위치를 봐둔 곳으로는 사람들이 오갈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혹시나 새벽기도를 하기 위해서 오는 신도들도 주로 정문으로 들어갈 테니 이곳 뒤편은 안전한 듯 했다. 그리하여 텐트를 치고 나서, 교회 옆구리에 붙어 있는 수돗가에서 쌀과 발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누구십니까?’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린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본다. 아무도 없다. ‘위입니다.’라는 소리에 목뼈가 접혀질 수 있는 한도에까지 뒤로 젖히니 교회건물 옥상에 한분이 내려다 보시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목사님인 듯 하다. 허락도 안 받고 교회 시설 이용한 것에 대한 민망한 마음에 ‘아무도 안 계시는 줄 알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하루 묵어갈 수 있는지를 타진한다. 무리 없이 허락하신다. 그래도 이렇게 번화가에서 떨어진 공터가 있는 교회는 인심이 야박하지는 않단말야. 그런데 텐트가 세워진 위치가 약간 언덕배기인데 바람이 밀려 올라오는 곳이다. 텐트를 치고 잠시 누우니 바람이 너무 세서 텐트가 꺽일 상황이다. 양 손으로 교차한 양쪽 폴대를 지지하면서 씩씩거려보지만, 바람이 기세가 심상치 않다. ‘주여~ 쉬로 왔습니다. 좀 쉬게 해주십시요.’ 4월 9일 새벽 [슬픔을 눈에 가득 머금은 개] 개 낑낑거리는 소리에 눈이 떳다. 털복숭이 발발이인데, 이제 몇 주도 안 된 새끼이다. 어미와 함께 교회 부속 컨테이너 창고 틈 아래의 방석 위에서 살고 있는데, 어미도 그렇고 새끼도 그렇고 영 깡말라서 볼품이 없다. 녀석들이 못 먹어서 힘 아리가 없어서 그런지, 움직임에 날렵함이 없고 표정 자체도 무뚝뚝하다. 어미 녀석은 평생 꼬리한번도 안흔들어 봤게 생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어미는 어디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는가 보다. 그래서 그 깡마른 새끼 녀석이 배 굶주림과 외로움에 힘겨워 새벽부터 어미가 나간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낑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왠지 이 녀석도 어미를 닮아서 그 삶이 몹시 활력이 없고, 슬픔에 가득할 듯 하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순수한 영혼을 한 이들’이, 흔히 ‘포악한 동물’마저 그 품에 안아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 처럼... 나도 그 개새끼 앞에서 나름 진지하고 사랑 가득한 표정으로 얼르면서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개는 슬슬 눈치를 보면서 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한다. 배낭을 열어서 잔멸치를 좀 던져보지만, 녀석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슬슬 기어 컨테이너 아래 틈에 깊숙하게 박힌다. ‘내 하는 일이 이렇지 뭐.’ 슬픔을 가득 머금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 개를 보면서 교회로부터 빠져 나왔다. [계룡초등학교 캠페인] 어제와 같이 학교 앞에 아침부터 공사도 없고, 영화 초대권 나눠주는 아주머니도 없다.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학교 앞에 설 수 있었다. ‘주번’ 아이들이 나와서 아이들 교통 단속을 하고 있었다. 앞이 공사장이어서 위험할 수가 있는지라, 6학년 생으로 보이는 주번 아이들은 ‘인도로 가세요’라고 교문 앞에서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곤 했다. ‘야 왜? 한국 사람이 한국에 살아야지 인도로 가라고 해’라고 맞 받아 치면서 마음의 여유도 있고 유머어 감각도 있는 아이들을 종종 접하면서 캠페인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 중에 몇몇은 내가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하며 스티커를 건네는 어감이 맘에 들었는지, ‘아저씨 어떻게 해야하는 거예요?’ 라고 묻고는 스티커를 몇 장 달라고 해서 자신들이 나줘주기도 했다. 고마운 마음에 생각 같아서는 함께 하고 싶었지만, 아이들 등교해서 수업 준비해야하는데 선생님에 의해서 오해받을 소지도 있고 해서, 그냥 들어가라고 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발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에 대해서 어떤 ‘기회’를 주거나 ‘이름’이라도 기록해 와서 책이라도 한권 보내줬어야 하는 것이 옳았는데, 아이들이 많이 밀려오는 순간에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챙기지를 못 했다. 선생님들 두 분도 잠깐 지나가셨지만, ‘이런 이런 캠페인 한다’고 말씀 드리며 ‘끝나고 다 주워간다’니 교문 앞을 거의 막다 시피(교문에 좀 작아서) 활동을 하는데도 문제 삼지 않으셨다. 스티커를 다 나눠주고 난 후에는 학교를 빙 둘러서 떨어진 휴지를 주웠는데,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의 휴지를 줍고 계시길래, - ‘제가 다 주울 텐데요’ 라면서 송구한 말씀을 전했고, 함께 줍고 있는 아이들에게 - ‘미안하다 얘들아 나 때문에 수고하게 되었구나’라고 한마디 건네면서 떨어진 몇 개 안되는 휴지를 주웠다. (음... 쇼맨쉽이 늘었어...) 아이들이 예의도 바르고, 착하기도 해서 그런지 떨어진 휴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간 가쁜한 마음으로 짐을 챙겨 들고 주변에 있는 도서관에 올랐다.
[스티커 배포의 기술]
바닥에는 종류별로 스티커가 깔린다.
손가락에는 ‘네 수준’으로 스티커를 끼워 넣는다.
총 10여 종류의 스티커가 있기 때문에 난이도 별로 나누고 ‘고학년’ ‘저학년’ 수준에 맞게, 스티커를 전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 스티커 버리거나 다른 사람 물건에 붙이면 안돼요’라고 ‘당부’한다. 아이들이 듬성 듬성 등교할 때는 별 문제 없지만, 4열, 5열 종대로 밀려 들어올 때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저학년에게 줘야할 것을 고학년에게 주는 것은 문제없지만, 고학년에게 줘야할 것을 ‘순간적 판단미스’로 저학년에게 주면, 방향을 바꿔 이를 옆의 고학년 아이에게 주거나 회수해서 저학년 용으로 바꿔 줘야 하는데, 이때 ‘아저씨 한 장만 더 주세요’라고 뒤쪽에서 녀석이 하나 낄 때는 혼란이 가중되고, 안 받고 지나가는 녀석들이 그 사이에 끼거나, 스티커를 건네는 손에 대해서 뒤늦게 반응하는 녀석에 의해서 회수된 손을 다시 밀어 보내 스티커를 건네야 할 상황이 발생될 때는 [확보된 공간 내에서의 활동의 균형]이 깨지면서 아이들에게 떠 밀리게 되기까지 한다. 아이들이 밀려올 때는 제대로 숨 쉴 순간조차 없이 앵무새처럼 한 얘기를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데, [신체]와 [정신]- [호흡]의 [삼위 일체]@.@가 되지 않으면 완성될 수 있는 활동이다. ^^‘ 그렇더라도 아무리 ’초절정‘의 스티커 배포 고수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숨이 차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한번 숨을 들이 마신 후 내 뿜으면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 스티커 버리거나 다른 사람 물건에 붙이면 안돼요’라고 ‘당부’ 한 직후의 0.5 초의 시간 동안 - 공기를 빨아들이면서 위축된 폐를 팽창시키는 규칙적 반복 패턴이 몸에 익으면, 그 숨차 오름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의 ‘몸의 익힘’이 단순한 효율성을 강조함으로 인한 ‘기계적인 기능습득’으로 그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무리 빨리 반복되더라도 그 안에는 ‘따스한 위로와 사랑의 감성’이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내 수준에서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더군다나 이런 저런 정신분산과 집중의 고도의 조화 상태로 인해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 아무리 숨이 차올라 호흡이 끈길 지경이 되더라도 진정 ‘스티커 배포의 명인’이라면 , ‘감사합니다’라고 예의 있게 반응하는 아이들에 대해서 0.5초의 산소를 빨아들이는 시간을 포기하고, ‘그래~’하고 사려 깊은 대응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상황에 선생님이 나타나면 ‘시야’와 ‘정신’이 다시 분할 되어 그 정신적 무질서함이 가중된다. 흔히 그러하듯이 자칫 잘 못하다가는 선생님에게 쫓겨나게 됨으로 특히나 ‘조신’하면서 ‘과장된 행동’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친절한 듯한)도 불사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른다. 이때 지나가던 선생님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리에 멈춰 서서 멀뚱히 쳐다보면 머리의 압력은 극을 향해 치닫는다. 이런 때를 ‘둥글이 행동교본’에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인식한다. 멈춰 선 선생님들의 50%가 말을 걸어오고 그 중의 다시 50%가 ‘박대’하기 때문이다. 즉 멈춰선 선생님중의 4분의 1은 적의를 가지고 접근해 오기 때문이다. 이런 터에 ‘선생님’이 다가와서 ‘말까지 걸 때’ ‘대뇌의 압력’은 극으로 치닫는다. 그들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면서 ‘우호적인 사람인지’ ‘저지를 하로 왔는지’ 아니면 ‘순전히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가 대충 구분되며, 그에 맞게 ‘대응’된다. ‘캠페인 때문에 학교만 지저분해지니 그만 가시죠’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는 1초 정도 뇌기능이 정지하면서 번개를 맞은 표정이 되곤 한다. 하지만 뇌파를 추슬러서 ‘적절한’ 전법을 구사하면 상황이 반전될 여지가 없지 않기에, 이에 대해서는 다시 훈련된 대응기술로 이를 지혜롭게 뛰어넘는 노력이 요구된다. 스티커 배포는 결코 ‘쉽게’ ‘아무렇게나’ ‘막무가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손에 쥐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단순한 ‘종이 쪼각’이 아니고,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에...
- 기도하는 마음으로 학교 앞에 서서... - [상가 캠페인] 원래 유랑을 하면서 하는 활동은 세 개로 나뉜다. 1. 학교 앞 캠페인 - 주로 초등학교 2. 상가 캠페인 - 상가 돌아다니면서 인간/환경문제에 대한 설문조사와 설명을 하고 자료를 건네는 활동. 3. 거리 캠페인 - 사람들 눈에 띄는 자리에 플랭을 걸어 놓고, 그냥 ‘잠자는’ 활동... ??? (과거에는 플랭을 벽에 걸어 놓고 그 앞에서 꼿꼿히 피켓 걸고 서서 몇 시간씩 서 있곤 했지만[최소 500여회], 체력만 바닥나고 관절이 상하고 하는 이유로 활동의 방식을 바꿨음.)
-> 문제는 ‘짐을 맡겨 놓고 다닐 공간’이 없는 이유로 [2번]의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활동을 하기가 영 쉽지가 않고, 사람들 잘 돌아다니면서 시선이 띌 공간에 플랭을 걸기가 마땅하지 않아 [3번]의 활동 역시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 거제도 도서관 전산실에는 담당하는 선생님이 문제 삼지 않음으로 배낭을 안전하게 놓을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유로, 인간과 자연 사랑과 관련한 ‘설문지?’를 가지고 상가 찾아 다녔다. 용지를 많이 확보하지 못해서 중심 상가 한쪽을 한 시간 반 정도 돌아다니면서 전단지와 스티커를 배포했고, 7, 8 곳 상가의 ‘사장’ ‘점원’들과는 상당히 진지한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환경문제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 하시는 한 아주머니의 경우에는 내가 ‘우리가 생업을 포기하고 다녀야할 만큼 혁명적으로 우리의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후손들의 미래가 없다’는 식으로 말씀 드리자, ‘그러면 원시시대로 돌아가라는 얘기냐’는 식으로 약간 발 반을 하면서 ‘어차피 놓여진 대로 사는 것이다’는 식의 입장을 피력하셨는데, 그 분 이외에는 우리가 놓여진 위기상황에 대해서 적극 공감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로 ‘2030년 양서류 멸종’ ‘2080년 지구상 대부분의 생물 멸종’이라는 2007년 UN 환경보고서 - MBC 뉴스 특보 4월 7일자 발표 내용을 인용했는데, ‘관심은 있었는데, 제대로 몰랐다’고 말씀하시던 대부분의 분들은 내가 말을 끝나고 나갈 때 상당히 고심하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놓고 나오는 전단지는 좀 더 진지한 숙고를 가능케 하리라. 상가에 들어가서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말을 시작하기가 여간 어색하지 않기 때문에, 설문조사의 형식을 취해서 질문하고 답변하는 와중에 설명이 가해진다. 한 상가의 아주머니는 내가 뜬금 없이 들어와서 뜬금 없는 이야기를 하니, 내용은 신중히 듣는 듯 했는데, 시종일관 히쭉히쭉 거리셨다. (긍정적인 의미로)‘이 사람 참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알고 보면 심각한 놈이 아니라 참 웃긴 놈인데... [저녁 야영] 도서관 휴게실이 컴퓨터 꼿아 쓰기도 좋고 무선인터넷도 된다. 죽치고 앉아서 이것저것을 하고 있는데, 창 밖으로 들리는 ‘차소리’가 심상치 않다. 자동차의 바퀴가 물기 가득히 머금고 아스팔트 지면을 끄시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어 보니 비가 쏟아진다. 아뿔싸! 몇 일 전에 날씨 예보를 봤을 때 1주일 내내 맑을 것이라고 해서 마음 놓고 있었는데, 비구름이 갑자기 밀려온 듯 싶었다. 8시 넘게까지 휴게실에 앉아서 책을 보면서 가끔 창을 열어서 보니 빗줄기가 좀 가늘어진다. 짐을 싸 들고 밖으로 나와 ‘지붕이나 처마가 있는 비 피할 곳’을 찾는다. ‘모 학교’의 경우에는 비를 피할만한 넓찍한 공간이 여러 곳 있지만, 몇 일 전 그 학교 관계자와 티격태격 한 것이 있어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겠다. 좀 더 북단에 있는 초등학교의 식당 처마 밑은 비를 피하기가 좋은데 주변의 소리가 몰려서 귀가 웅웅거릴 지경이고, 그 중간의 초등학교의 건물 아래 주차장 자리는 시멘트 멈지가 너무 많다. 밤 길에 가뜩이나 비를 맞으면서 텐트 칠 곳을 찾기 위해서 이곳저곳 기웃거릴 때는 기분이 유독 우울해 진다. 청승맞은 표정으로 어기적거리다 보니 읍사무소가 눈에 들어온다. 잡다한 부속 건물이 많은데, 화장실 바로 옆의 건물 처마 아래 텐트칠 공간이 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인해서 숙직서시는 분에게 안 걸리도록 ‘조신’하면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 눕는다. [이대우씨]를 통해서 알게 된 꼬마 아이의 집 전화번호가 찍혀 있어서 통화를 시도한다. 두어 달 쯤 전에 이대우씨의 집에 놀로 가서 아이에게 (손가락 빠지는) 마술을 보여줬는데, 녀석은 그것이 인상이 남았는지 화재를 삼아서 이야기 해 간다. 좀 더 호탕하게 객기를 부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큰소리 냈다가는 숙직서시는 분이 나타날 수 있음으로 소리를 죽여서 소삭이듯이 이야기한다. 아이는 내가 사 보냈던 환경 관련 책을 한번 보고 다시 보고 있단다. ‘다 보면 또 한권 사서 보내준다’고 했는데... 녀석은 미안스러운지 다시 읽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한다. 좋은 생각이다. 몇 번 읽고, 한권 배끼기까지 하면 다음에 책을 사서 보낼 주기가 좀 더 늘어나리라. @.@ 통째로 책을 배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된다고 조언해 준다. ^>^ 녀석은 웃으면서 알았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누워서 이런 저런 잡념에 빠진다. 빗소리가 굵어진다. [길 가는 중에 넝쿨로 도배를 한 건물] 5월 10일 신현초등학교 활동 초반에 들어가던 한 녀석이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 주세요’라고 건네는 말을 그냥 무시하고 들어갔고, 또 한 녀석은 손으로 X 표시를 하고 들어간다. 안 받는 것도 그들의 자유기는 하겠지만, 나이든 사람이 건네는 것... 아니 ‘사람’이 건네는 것 좀 더 성의 있게 반응하면 좋지 않을까 아쉽다. 하여간 이런 경우를 통해서 나는 아이들이 나를 선생님들에게 느끼는 권위와 존경의 마음 없이 그냥 ‘하찮게’ 보게 되는 것을 확인한다. 이 ‘하찮은 사람’이 건네주는 스티커를 ‘하찮은 것’으로 내 버리는 아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이 ‘하찮은 사람’이 건네는 스티커를 집중해서 읽는 아이들은 ‘능동적’으로 그에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주체성’ ‘자율성’을 깨울 수 있는 작은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그들의 ‘선택’의 문제이리라. 늘 그렇듯이 스티커 양이 부족한 이유로 아이들이 한참 들어올 때에 활동을 접고 청소를 시작했다. 선생님 한분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고 가신다.
[상가 캠페인 활동] 컴퓨터와 프린터, 복사기 사용이 자유스러운 거제시청 민원실에 들어가서 전단지를 뽑아서 전날에 이어서 상가를 돌았다.
한 시간 반 정도 동안 돌았는데, 뜬금 없이 인간과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낼 수 없음으로, ‘설문조사’의 형식을 취한다. 한 마디 한마디 질문하고 반응하는 답변의 성실정도에 따라서 깊고 자세한 이야기까지 끄집어 낸다. 손님 등이랑 와서 바쁜 가게에는 스티커와 전단지만 내려놓고 간다. 그리고 손님이 없더라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의사를 밝힌 가게에도 스티커와 전단지만 내려 놓고 간다. 조금 관심이 있을 듯 하면 설문조사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제는 주로 ‘1.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누가 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것과 ‘2. 그렇다면 님은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오셨냐?’ ‘3. 환경피해가 극심해서 후손들이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 언제쯤 올 것 같은가?’가 주된 문제이다. 대체로 환경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알고 있고, 30~100년 쯤에 환경피해로 후손들이 살아가기 힘들다고 답변을 했는데, ‘4. 그에 대해서 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냥 재활용 잘하고, 세제 적게 사용하고’ 하는 수준으로 멈추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느끼는 것은 환경문제에 대해서 메스컴을 통해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대충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해야할 바’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듯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적응하면서 살아오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비주체성’ ‘무실천성’이 그대로 반영된 듯 하다. 일 예로 대구지하철 사태 등이 빚어질 때 한국인들은 그 사건을 ‘직접적으로 일으킨 주범’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할 줄만 알았지, 그 사건이 근본적으로 각각의 국민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 사건은 사회복지적인 관심과 지지가 필요했던 모씨의 사회로 부터의 철저한 소외에 대한 분노가 발단이 되어 빚어졌다. 장애인 단체가 ‘이동할 수 있는 권리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면서 길바닥에서 쇄 사슬을 매고 노상투쟁을 몇 년째 하고 있고, 미 취학 장애아동의 50% 이상이 초기 교육의 실패로 평생을 ‘타인의 뒤치다꺼리’를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땅값 떨어진다’는 주민들의 장애인 교육시설 반대에 힘입는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사회복지적인 관심과 지지가 필요한 대상의 분노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짐작하기 힘든 수준이다. 방바닥에 누워 TV를 통해 대구 지하철 방화 사태를 접하며 손가락질해대던 상당수의 국민들의 대부분은 아마 사회복지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대상들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해 온 이들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아비규환의 참사 현장 앞에서 ‘이것은 대구 치하철 공사 씨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일개 기관사의 잘 못이다’고 ‘당당히’ 입장을 피력한 지하철공사 사장이나, 공무감독을 바르게 하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그러한 참사의 빌미를 준 공무원들의 ‘책임회피’도 결국은 일반 국민들이 생활의 장에서 늘상 보이는 일상의 반영일 뿐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우리 각자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과 무실천이 복잡한 사회적인 작용을 거쳐서 ‘그런 일’을 발생하게 만들어 냈는데, ‘사회적 책임감’이 동반되지 않은 시야로는 그러한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외한’ ‘눈에 보이고’ ‘책임전가를 할 수 있는 손쉬운 대상’에게만 그렇게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주체성’ ‘무실천성’의 문제는 심각하다. 모든 세상의 문제의 중심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자기 자신의 ‘인식’과 ‘행동’이 빠지니, ‘내 자신의 작은 관심과 참여’로부터 세상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늠하지 못하고, TV 기사를 보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한탄하는 것에 ‘여유 시간’을 보낸다. ‘시민사회’가 성숙해질 수 없는 것이고, 이러한 이해를 가진 이들의 사회구조가 ‘탄탄해 질리’는 없는 것이다. 대신 이러한 시민들의 사회일수록 종교적으로는 ‘영생’과 ‘내세’ 기복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전체주의가 지향된다. ‘주체적인 관심과 실천’의 에너지가 분출되어야할 곳에 분출되지 못하니, ‘현실’은 ‘내세’로 ‘자유’는 ‘전체적 질서 속에서의 안주’로 교체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것 처럼 환경문제에 대한 ‘심각성’은 TV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해야할 바’에 대한 고민이 안 되는 것이다.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그것은 ‘나의 일’도 아닐뿐더러 ‘전체적인 분위기’는 현재와 같이 그냥 살던 대로 살자는 것인데...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 개인’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질서 속에서 주체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할 수 없는 역학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반응 앞에서 - 자신이 처한 현실 속에서의 능동적 의지를 약간이라도 부추길 수 있는 ‘주체적 실존적’ 자극을 주기 위해서 아래와 같은 논법으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 이러한 환경 파괴로 인해 후손들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 이유는 많이 소유하고 많이 소비하는 특정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 그것은 현재 우리 각자가 타인의 소비수준을 비교하고 체면을 생각해서 ‘내가 이 정도는 살아야지 않는가?’하는 수준의 삶 자체가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300년 전에 비해서 1000배 이상 에너지 소비) ▶ 결국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는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착취해 오는 것에 불과하다. ▶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조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좀 덜 갖고 좀 덜 높아지고, 나누고 비우려는 마음가짐의 삶을 산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극단적인 파국은 피해 갈 수 있다. ▶ ‘지금’ ‘여기’에서의 ‘나 자신’으로 부터의 어떤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다. 상가에 사람이 있어서 긴 얘기 못하고 전단지만 놓고 온 상가... 그리고 시간 없다고 외면한 상가를 빼고, 총 20여명 에게 설명을 드렸는데, 그 중 3명이 듣는 중에 지루해 하며 말을 끊은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이야기가 끝날 때 쯤 되자 진지한 눈빛(긴장/흥분의 표정이 읽혀지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티커]를 나눠 드리면서 집이나 상점 한쪽에 붙여줄 것을 부탁드렸고, [하루 한명에게 이러한 위기상황을 전파하자는 전단지]를 드리면서 ‘이러한 위기 상황을 서로 공유하는 것만 해도 큰 일’이라면서 부탁을 드리고 나왔는데, 그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감으로 ‘수고하시라’고 내 뒤통수에다 격려를 해주는 것을 대하면서는 모종의 ‘희망’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내가 하는 활동이 ‘시험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는 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현실을 살필 때 마다 문제가 명확히 보인다. 한국사회는 ‘계몽의 시대’를 거치지 않아온 이유로 국민들의 ‘이성’이 제대로 깨워지지 않았고, ‘주체’가 바로 서지 못했다. 이런 터에는 역시 주체가 바로 서지 못한 ‘정치인’ ‘행정가’ 등이 조장하는 ‘전체주의’ ‘감상적 애국주의’에만 국민들이 몰입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사회적 약자]나 [사회 부조리]에 대한 ‘나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의식과 책임과 실천은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이를 깨워줘야 할 시민사회조직 자체도 ‘그 지반’에 머물러서 ‘반 자본’ ‘반 권력’ 투쟁을 일삼을 뿐이지, 구체적인 ‘개인’ ‘주체-실존’을 깨우려는 노력은 등한시 한다. 왜냐하면 이들 자신은 그나마 ‘주체’가 조금 깨어났다고는 할 지언정 그 의미(주체-실존)를 정확히 인식하고,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관점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얘기했던 바대로 한국 사회는 ‘계몽의 시대’를 제대로 거치지 않아 ‘주체-실존’의식을 구축해내게 할만 한 사회심리적 지반 자체가 약한 때문이다. [ # 이러한 주장이 ‘이성에 대한 맹신’으로 곡해될 소지가 있어서 추가하자면, 내 주장은 ‘논리적 이성을 구축하면 사회의 안녕이 도래할 것이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이성마저도 없는 상황에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5월 11일 전날 전날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엄청난 퇴근 행렬을 보면서 수월리로 이동해 왔다.
[삼성중공업 노동자들의 퇴근행렬 - 출 퇴근 시간에 오토바이 행렬은 끝이 안보일 정도이다.] 오늘 활동이 거제도에서의 마지막 활동이기 때문에, 다음 행선지인 진해로 넘어가는 여객선 터미널에 가장 근접해 있는 곳이 수월리로 이동해 온 것이다. 전날 저녁에 수월초등학교 한 켠에 야영을 했다. 주변이 임야여서 자는 사이에 짙은 안개가 밀려 와 내려 앉았는지, 일어나 보니 텐트가 습기에 가득 젖어 있다 못해 아예 물이 주르르 흐를 정도였다. 물기를 대충 털고 배낭을 정리하고 학교 정문 앞에 캠페인을 위해서 섰다. 해남의 초등학교 이후로 한 학교에서 몇몇 선생님들이 이렇게 우호적으로 대해주신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들 세분이 ‘무슨 활동 하냐?’고 물으셔서 ‘이런이런 활동한다’고 말씀 드리니, 잘 하고 가시란다. 특히나 나이가 좀 지긋한 한 선생님은 ‘이런 이런 캠페인 한다’고 말씀 드리니까, ‘그거 꼭 필요한 활동입니다’라고 독려해 주셨다. 혹시나 스티커가 바닥에 떨어져서 운동장이 더럽혀질까 죄송한 마음에 '휴지랑 떨어지면 주워 갈께요‘라고 말씀드리자, 손사래를 치면서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초등학교 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끝나고 나서 휴지를 주우려고 돌아다니는데 다섯 개 이상 줍지를 못했다.
그렇다. 이렇게 ‘주체적 활동’의 필요성을 느껴 이를 독려하는 학교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그러한 주체적 관점’을 인식시키는데 어느 정도까지는 성공하는 듯 하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결과는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발견 할 수 있다.
‘휴지를 버리면 안 되는 이유’를 ‘주입’당하는 ‘권위적인 교장선생님’의 학교의 아이들과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모범과 자극을 받는 아이들의 학교 운동장에 떨어진 휴지의 양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늘상 경험하는 바이다.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의 여유와 정이 함께 느껴지기도 해서, 유쾌한 마음으로 캠페인을 하다가 짐을 챙겨서 진해로 향하는 여객 터미널로 향했다.
2007년 5 월 11일 - 경상남도 거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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