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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경 유 지 |
세 부 사항 |
비 고 |
2015.9. 19, 06시30분 |
현대증권 앞 |
시간엄수, 모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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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출발 06:50, 픽업 |
반포 죽전 정류장 |
출발, 성지소개와 칠락묵주기도 김애경 벨린다 자매님 픽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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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40 |
휴게소 |
여주휴게소 15분 정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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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55 |
휴게소 |
여주 휴게소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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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
풍기, 성당 |
홍유한 유적지, 풍기성당,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습니다. |
054-639-6062 |
09:50 |
성당 |
출발 |
안동교구 풍기성당 |
10:20 |
유적지 |
홍유한 구구리 유적지 방문 |
054-639-6062 |
11:30 |
하회마을 |
입장료 3,000원 |
65세 이상 무료 |
11:30 – 12: 00 |
점심식사 |
낙동강 강변에서 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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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13 :50 |
걸음여행 |
병산서원 출발 – 하회마을 |
약4,5km |
14:00 – 15: 00 |
하회마을 |
별신굿 탈춤 관람 |
탈춤 전수회관 |
15:00 - 16:00 |
하회마을 |
탐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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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 |
하회마을 |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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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
반포도착 |
식사 후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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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회탈춤 공연이 2시부터 3시까지 있습니다. 트레킹 시간을 조절하여 공연관람을 꼭 하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탈춤을 보며 선조들의 해학과 멋진 놀이의 낭만을 공유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신청하신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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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 문규 도미나 |
8. 김애경 벨린다 |
15. Ahn severino |
총 15 명, |
2.유남수 헬레나 |
9. 윤정숙 골롬바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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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종식 파스칼 |
10 이장순 바울라 |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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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미경 크리스티나 |
11. 어숙자 율리안나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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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명자카타리나 |
12. 김정자 아네스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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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영주 펠레치아 |
13. 안덕순 데레사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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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유영제 마틸다. |
14. 백미자 수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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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풍기성당.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이 1784년, 이보다 30여 년 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심신을 연마한 선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홍유한이다. 비록 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천주교를 대하는 입장은 단순히 신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천지만물의 이치를 밝히는 종교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신앙 생활을 시작한 첫 인물로 꼽힌다. 경북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는 바로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는 실학자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천주학을 처음 접한 뒤 유교와 불교에서 구할 수 없었던 진리를 발견하고 바로 이곳에서 1775년부터 1785년까지 10년간 학문을 통해 깨달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했다. 본래 구구리는 순홍부 동원면 지역으로 마을 뒷산에 무학봉이 있는데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들린다."는 시전(詩傳)에 있는 옛 뜻을 따라 '구고'라 하였다 한다. 그 후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오현리, 이목리와 등영리, 상암리 각 일부를 병합해 '구구리'라 하여 영주군 단산면에 편입됐다. 홍유한은 안동의 풍산 홍씨 명문가의 16대손으로 이미 8세 때 사서 삼경, 백가 제서에 통달한 신동으로 전해진다. 그의 조부모는 손자의 장래를 위해 고향인 충청도 예산을 떠나 서울로 이사를 했고 16세 때인 1742년 그는 당시 유명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순암 안정복, 녹암 권일신, 복암 이기양 등과 함께 수학했다. 1751년 성호 이익이 "천주 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할 때 그의 제자들도 이 신학문과 종교 서적을 탐독하게 됐고 이때 그는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성호 이익은 서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피상적인 보유론적 입장에 머물렀고 함께 수학하던 순암 안정복은 천주교 신앙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고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홍유한은 유교와 불교에서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여기에서 발견하고 1757년 고향 예산으로 다시 내려가 1775년까지 18년간 혼자 신앙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다시 1775년 더욱 조용한 곳을 찾아 경상도 소백산 아래 있는 순흥 마을 고들미(현재의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옮겨 가서 1785년 6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심한 신앙을 키웠던 것이다. 그는 천주교의 진리를 처음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신앙 생활을 시작해 "칠극"에서 터득한 덕행을 쌓기 위해 7일마다 하루를 주일로 정해 세속일을 전폐하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나아가 욕정을 금하여 30세 이후는 정절(貞節)의 덕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천진암 강학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는 서학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스스로 신앙 생활을 시작했던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된다. 현재 구구리의 하이목에는 그 당시 그가 사용하던 대문이 아직도 보존돼 있고 경종4년(1724년) 갑진년에 홍유한의 조부인 홍중명이 하사받은 효자문이 잘 보존돼 있다. 또한 그밖에 순교자 권일신과 서신 왕래하던 친필 서찰들이 후손에 의해 보존돼 있다가 현재는 천진암의 전시관에 보관돼있다
1.
농은 홍유한선생 일대기
1)출생 및 가계
농은(隱) 홍유한(洪儒漢) 선생(1726-1785)은
조선시대 유학자이면서 실학자였습니다. 선생은 영주 순흥지방에서 비록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열심히 천주교
신자다운 생활을 실천했던 분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에 심취하였고, 『칠극』이 제시하는 신앙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매 7일마다 하루씩 축일을 지내고 금요일마다 단식재를 실천하였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정결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삶은 아직 천주교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놀랍고도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안동교구는 25주년 기념 교육관을 세우면서 홍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 그분의 삶이
두루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수련원 이름으로 그분의 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출생 - 풍산 홍씨 홍유한(洪儒漢)은 아버지 홍창보(洪昌輔)와
어머니 창녕성씨(昌寧成氏)에게서 1726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랑(士郞) 호가 농은(隱)이다.
가계 - 조부 중명(重明)은 효행이 뛰어나 숙종 때 정려되었고 영조 때는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되었다. 중명은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고 그로 인해 병을 얻어
1686년 32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 창보는, 문중 후손들의 증언에 의하면 「천주실의」, 「칠극」, 「직방외기」 등을 읽고 연구하여 수계생활하기를 원했으므로 문중과 주위의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2)생애
홍유한은 16세 때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성호선생은 “홍군은 입지의 확고함과 공부의 독실함이 아무리 옛사람이라도
견줄만한 이가 드물다”고 그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성호선생의
제자들 가운데는 안정복, 채제공, 이기양, 이가환, 권철신, 이용휴
등이 있었는데, 홍유한은 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호선생이 아버지 홍창보에게 보낸 편지에는 홍유한의 병세를 몹시 걱정하는 것이 있다. “아드님의
병세에 처음엔 심히 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지금은 잠잘 때 흘리는 도간이 비록 그쳤으나 여증이 남아
있어 오농조삽함이 모두다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은 그에게 산수에 유유하면서 마음에 울결된 두려움을 활짝
풀어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획이라고 권합니다”. 결국 홍유한은 23세
때 몹쓸 병에 걸려 4년 동안이나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홍휴한은
젊을 때 건강이 몹시 나빴던 모양이다.
마침내 홍유한은 산 속에 기거하면서 치료와 휴양을 하기 위하여 서울의 집을 팔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충청도 예산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천주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호를 농은(-논두렁
농 隱-숨을 은)이라 하고
18년 동안 조용히 천주교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예산은 경기지방과 가까워 찾아드는
이들이 많았고 은둔생활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번거로웠기 때문에 1775년 드디어 영남지방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소백산 아래 순흥 단산 구구리(배나무실)로 이사를
하였다. 그가 구구리로 이사할 때 정산 이병휴는 이렇게 송사를 지었다.
“영남은 퇴도자이자께서 정학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인도하고 교화시켜 순미하여 늙으면 편하고 붕우간엔 미더워 배율과 영송의 위의가 성하여
나의 계부 성호선생이 살집을 얻어 그곳의 백성이 되고자 했던 평소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어 지금부터 선생의 도가 벗을 통하여 점차 영남에 행해질
것이다.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한편 권철신도 홍유한이
영남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우리 무리 몇 사람이 당초에 약속했던 일 가운데 서로
손을 마주잡고 함께 하자던 계획이 마침내 공으로 하여금 그르치게 되고 말았습니다. 생각컨대 실로 내가
그렇게 되도록 떠밀어 넣은 것 같으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습니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이쪽의 여러 가지 사정은 자야가 자세히 알고 돌아가니 어찌 반드시 번거로이 말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이만 줄이겠습니다. 살펴 헤아리길 바라겠습니다. 갑진양원(1784. 11. 29) 하생 복인 권철신”. 위의 편지에서 권철신, 이기양 등 뜻 있는 학자들은 유교의 원류인
안향을 배향한 소수서원이 있고 퇴계의 도산서원이 있는 이곳 영남 지방에서 함께 살며 새로운 학문을 일으키고자 했던 듯 싶다. 후에 1779년 천진암 주어사를 중심으로 천주교 강학회가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함께 약조했던 계획이란 바로 그런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홍유한은 천진암 강학회보다 4년이나 앞서서 이곳 순흥에서 1775년부터 「천주실의」, 「칠극」에 따른 천주교 수계생활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홍유한은 구구리에서 축일표나 기도서도 없이 7일마다 축일,
곧 주일이 온다는 것만 알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 경건한 마음으로 일을 쉬고 세속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금육절의 자세한 규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샤를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의 수덕생활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홍유한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백산으로 들어가 13년 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는 예산에서 죽었는데 아마 화세(火洗) 밖에는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3)죽음
홍유한은 1785년 3월 10일, 6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일시 가묘했다가 5월 27일 궁중 풍수가 잡아준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의 문수산 중턱에 묻혔다. 달레의
천주교회사에는 그가 예산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구구리에서 죽었고 우곡에 묻혔다. 선생의
후손들은 홍유한의 묘소를 알고 있었는데 1995년 3월 8일, 봉화본당 교우들과 후손 홍관희씨가 묘지에 도리석을 쌓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그때 묘 위 부분의 흙을 팠는데 석회를 섞은 흙으로 관이 덮혀 있고 숯가루로
쓴 ‘산림처사홍공지묘’(山林處士洪公之墓)라는 글씨가 발견되었다. 그동안 한국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비로소 밝혀지게 된 것이다.
한편 홍유한 선생이 죽자 권철신과 홍낙민은 제문을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 제문은
홍유한의 사람 됨됨이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문헌이 되고 있다. 제문에서 지적하는
검약한 삶, 음식과 여색의 절제는 당시 천주교의 강조 덕목이었다. 또한
가난하고 늙고 병든 이들, 나그네를 따뜻이 돌보았다는 그의 행적은 홍유한이 천주교에서 권고하는 여러
가지 덕행들을 적극적으로 실천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 봉화에서 36번 국도를
따라 춘양 방면으로 10km쯤 가면 ‘다덕 약수터’에 이르고, 이곳에서(성지
안내 표지판) 좌측으로 6km쯤 문수산을 향해가면 우곡 성지에
다다른다. 지금은 도로포장 공사가 마무리되어 성지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이곳은 안동교구가 묘지가 있는 산 5정보, 산 아래 계곡 3정보를 매입하여 청소년 야영장으로 활용하고 있고
현재 성지담당 사제관, ‘우곡 홍유한 피정의 집’(054-673-4152)과
성당이 마련되어 있다. 약 3-40명 정도의 순례자들이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시설이다. 홍유한의 묘소는 문수산으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있고, 가히 좌청룡우백호의 명당자리에 놓여있다는 것을 굳이 풍수설을 모르는 이라도 대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묘지에는 1995년 가을에 봉화본당
신자들이 둘레석과 상석, 비석과 제대를 설치하였다. 선생의
묘소 앞에 서면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로 천주교 신앙인의 삶을 기꺼이 살았던 한 선배 신앙인의 삶을 생각하게 되면서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것은 신앙인으로 회심하고도 계율을 짐스럽게 여기는 우리의 형태와 견주어 볼 때 선생의 삶은 훌륭한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홍유한은 학문의 고향인 영남지방에 와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및 여러곳을 다니며 한가롭고 여유있는 자연과 함께 살면서 여러편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그의
신앙의 뜻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시를 한 구절 옮겨본다.
“하늘이 나를 살핀다.
공경하고 공경할 지어다.
천도가 매우 밝느니라.
천명을 보존하기가 쉽지 않으니
높이높이 있다 이르지 말라.
그 땅에 으르내려서
날로 살펴 여기에 계시느니라”.
4)구구리 은거지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배나무실). 홍유한 선생
은거지는 영주에서 북쪽으로 소수서원 방향으로 6km쯤 가다가 동촌 갈림길에서 단산방면으로 4km쯤 가서 오른쪽으로(이곳에 성지 안내 표시가 있다) 다리를 건너 구고초등학교를 지나 2.5km쯤 가면 다다른다. 홍유한은 1775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1785년 죽기까지 10년 간을 이 집에서 살았다. 홍살문으로 장식된 대문채는 문설주 위로 바깥쪽에는 “증통선랑사헌부지평홍중명지문” 안쪽에는 “일효자학생홍중명지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집 건물은 본래 ㄱ자형의 상채(현재 남아있는
건물)에 방, 마루, 부엌, 창고가 있었고, ―자형의 사랑채(현재
비석이 서 있는 곳에 있었으나 없어짐)에는 방, 마루, 부엌, 마구간이 있었다고 한다. 홍유한
선생이 살 때는 초가로 지은 집이었으나 후에 구운 기와를 올렸고 현재는 시멘트 기와로 바뀌었고 벽체 또한 시멘트 몰탈을 덧씌워서 본래의 모습이
없어지고 말았다. 구운 기와는 집 뒤편에 차곡차곡 쌓아서 담벼락을 만들어 놓았다. 대문을 들어서면 1995년에 세운
“한국최초의수덕자농은홍유한”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
2,걸음여행.( 하회마을 )
조선초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하회 마을은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채 다양한 양식의 살림집들이 현해있다. 솟을 대문의 양반가옥인 양진당,충효당,북촌댁,주일재,하동고택 기와집 과 서민 가옥인 초가들이 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조화롭게 | |
배치되어 있다. 학문 탐구를하던 옥연정사,빈연정사,겸암정 등의 정사, 인재 교육의 병산 서원과 화천서당 등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 마을 태생의 류종혜 공, 대유학자 겸암 류운룡(1539-1601) 선생,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우신 영의정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 등 많은 인물이 배출 되었다. 그래서인지 영남의 반촌으로 하회 마을을 꼽게 되었다. 하회 마을의 훌륭한 자연환 경은 민속 놀이에 있어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유달리 풍부한 감성을 갖게 하였다. 수많은 문화 유산을 지켜온 하회 마을의 놀이 가운데 서민들의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양반들이 즐 겨 놀았던 선유줄불놀이는 양반과 서민의 문화가 서로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한다. 서민들에 의하여 연희되었던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양반들의 선유줄불놀이는 음력 7월 16일에 놀이되었다. 위처럼 선조들의 소중한 삶의 자취와 생활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하회 마을은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로서 중요 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 보호받고 있다. '물이 돈다' 이름하야 물돌이, 그래서 하회마을이다. |
빼어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춘 하회마을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를 밝혀줄 문헌이나 기록이 업서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지만 마을에서 구전되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향언과 하회탈의 제작에 얽혀있는 허도령의 애듯한 전설로 미루어 대개 고려시대 초기로 알려져 있다.
초기 마을릐 형성은 가장 먼저 입촌하여 터를 잡은 허씨들에 의해서이다. 허씨들은 화산자락의다뜻하고 양지바른 거먹실골에 자리잡았으며, 그 뒤를 이은 안씨는 향교가 있었다고 전하는 향교골에서 모듬살이를 영위하게 된다. 현재와 같은 하회마을의 모습은 고려말 조선초에 이르러 풍산류씨 공조저서 류종혜 공이 풍산 상리에서 길지를 찾아 이곳으로 옮겨온 후부터이다.
마을의 구성은 화산의 얕은 능선을 따라서 길이 나고 그 길을 중심으로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진다. 이 마을의 건축물들은 능선과 길을 등으로 하고 밖으로 향하여 지었기 때문에 동서남북향의 모든 좌향이 나타나는 특색을 보인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좌향의 건물일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가 강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줄 뿐만 아니라 앞이 시원스럽게 트이고 강물이 흐르는 풍치를 즐기기 위함에서이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순응하여 그 속에 동화도고자 하는 선조들의슬기로움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로서 지금은 각시,중,양반,선비, 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9개의 탈들만 전해지며, 3개의 탈이 분실되었다.
하회탈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먼저 그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던 중에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을 맥타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교수에게 소개하여, 1954년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해외 학계에 발표함으로써 하회탈이 세계제일의 가면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그 후에 국내 학계에서도 활발히 연구하여 국보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겉으로만 보지 말고 깊이 연구하여, 그 소중함을 알아야 함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잃어버린 탈(총각탈, 떡다리탈, 별채탈)을 저명한 조각가와 화가 및 미술사 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복원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운보 김기창 화백과 그 일행이 하회탈을 면밀히 감상해 보고서 하회탈의 오묘한 이치와 조형적 탁월성에 놀라 자기들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회탈의 작가는 허도령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허도령에게는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고 탈의 조각을 위하여 홀로 외딴 집으로 가기 전에 탈을 완성하기까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하였으나, 오래 기다리던 처녀가 사모하는 정을 가누지 못하고 허도령이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가서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문구멍을 뚫어서 안을 들어다 보는 중 허도령은 이를 보자 부정을 타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신의 계시란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의미하며 부정을 타서 죽었다.란 심혈을 다하여 작업 중에 있던 허도령이 영감이 흩어지게 되자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생각되며, 이처럼 목숨바쳐 이룩한 작품이기에 오늘날 세계 제일의 가면으로 되어 있다.
양반탈은 위로 향하면 웃는 얼굴, 밑을 향하면 성낸 얼굴로 표정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털웃음을 웃을 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성을 낼 때는 얼굴을 아래로 하는 인체공학을 연구하여 조각되어 있으므로 광대의 몸짓과 자연스럽게 일치되도록 한 점도 두드러진다.
각시탈은 한쪽 눈이 가늘다. 이는 각시 광대가 얼굴을 살짝 돌리면 상대에게 눈을 흘기는 교태(윙크)가 되도록 하였다. 다른 탈 들도 제각각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의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은 재료가 오리나무로서 표면에 옻칠을 2겹 3겹으로 칠하여 정교한 색을 내었고, 격식과 세련됨을 갖추었으며, 부락에서는 별도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각시 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을 할 때 외에는 볼 수 없었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금기(禁忌)나 제약(制約)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하여질 수 있었다(자료 보존회에서 켑처)
첫댓글 그동안 하셨습니까 자유로운 몸과 마음으로 김 도미나 신청합니다. 고맙습니다.
환절기 건강 잘 챙기시기를 소원합니다.
더운 계절 모두 잘 보내셨죠? 오랜만에 저 김안젤라 참석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꾸벅
참가신청합니다.
환절기 건강 각별하게 챙기십시오, 형님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아가다 참가합니다.^^
반갑습니다. 영성교육 잘 진행되시지요. 이 가을 더욱 더 큰 은총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세베리노 아이코~죄송해요
울아들 청년성가대 연주회날이네요.
깜박했어요.
지원반교육열심히진행중이에요
감사합니다^^
신명희 필로멜라...유영제 마틸다, 참가합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늘 감사~~ 은총의 하루 보내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영주 펠레치아 참가합니다
수고해 주시는 총무님 환절기 건강 유념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명자 가타리나 참가 신청합니다.
환영합니다. 자매님! 어서오세요. 환절기 기온차 크죠. 잘 극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윤정숙 골롬바 참가 신청합니다
환영합니다.!! 골롬바 자매님 참 오랜만이시군요. 어서오셔요~~~
방배4동 이장순 바울라 참가 신청합니다.
반갑습니다. 바울라 자매님 건강하시죠. 환영합니다.
어숙자 율리안나 신청합니다.
백두산 동기시죠. 기온차가 큰 요즈음 감기 조심하셔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9.12 10:20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9.12 16:58
안덕순 데레사님 참가합니다
꽃지를 걸었던 인연~~ 이번엔 물돌이 마을에서.. 환영합니다.
김 정자 아네스님 참가합니다
최고이십니다. 꾸벅
백 미자 수산나~ 참석 합니다
환영합니다.
김미경 크리스티나님 참석합니다
총무님 무지 고생 많으심다. 인력송출 회장님이신가? 인력보충~~ 감사함다.
유남수 님 만 참석합니다~^
아~ 그래요. 참고하죠. 늘 감사, 감사하군요.
김안젤라입니다 무릎통증과 다리 마비가 와서 지금 재활의학과에 와서 치료중인데요 당분간 무리한 걷기는 자제하라는 의사샘 말씀땜에 눈물을 머금고 낼 행사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네, 연락주셔서 고맙습니다. 빠른 쾌유를 소원합니다. 기도중에 기억하여 쾌유를 빌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