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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은 조선 세종의 3남으로 그 명필로 이름을 남긴사람입니다.
안평대군
이름 용(瑢). 자 청지(淸之). 호 비해당(匪懈堂)·낭간거사(琅居土)·매죽헌(梅竹軒). 1418년 세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안평대군에 봉해졌고, 좌부대언 정연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0년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문종 때 조정의 배후에서 실력자로 역할을 하였으며, 1438년 야인을 토벌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 주요 문신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인사 행정기관인 황표정사(黃票政事)를 장악하여 둘째 형 수양대군의 세력과 은연히 맞서 있었다. 그러나 1453년(단종 1)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꾸며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일 때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귀양갔다. 그 뒤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36세를 일기로 사사(賜死)되었다. 시문(詩文)·그림·가야금 등에 능하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명필로 꼽혔다.
아래의 글은 신숙주가 남긴글 입니다. 동문선에 등재 되어 있는 글로 제목은 畵記 입니다.
신숙주의 문집 보한재집에서 발췌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제목은 보한재집에 있다는 것과 같읍니다.
안평대군의 호는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글에서는 비해당을 쓰고 있읍니다.
안평대군은 그당시 고화 콜렉션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콜렉션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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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82권 / 기(記) / 화기(畵記) / 신숙주(申叔舟)
비해당(匪懈堂)이 서화를 사랑하여, 남이 한 자의 편지 한 조각의 그림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구입하여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선택하여 표구를 만들어 수장하였다. 하루는 모두 내어서 신숙주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나는 천성이 이것을 좋아하니 이 역시 병이다. 끝까지 탐색하고 널리 구하여 10년이 지난 뒤에 이만큼 얻게 되었는데, 아, 물(物)이란 것은 완성되고 훼손되는 것이 때가 있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완성이 다시 후일에 훼손될 것을 어찌 알며, 그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역시 기필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한창려(韓昌黎)가 독고생(獨孤生)의 그림에 기(記)를 하여 스스로 구경하고자 하였기에 나도 짐짓 시를 지어 기록하였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기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가만히 들으니 장돈간(張敦簡)의 집에 수장된 그림이 겨우 10여 축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히려 백낙천(白樂天)이 이를 위해 기를 지었다 하는데 하물며 고금을 정선하여 수백 축에 이르렀으니 기를 지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수장품을 보니 동진(東晋)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른바
고개지(顧愷之)다. 소자(小字)는 호두(虎頭)이며 널리 배워 재주가 있으며, 그림 역시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감추고 아끼어 세상에서 그 그림을 보기가 드물다. 지금 각본(刻本)의 수석도(水石圖) 하나가 있는데, 그 정화는 얻어 볼 수 없으나 법도는 아직도 역력히 남아 있어 마치 모장(毛嬙)이나 서시(西施)가 늙어도 맵시가 남아 있는 것과 같다.
당(唐)에서 두 사람을 얻었으니,
오도자(吳道子)는 그림을 잘 그려서 이름이 천하에 떨쳐 한퇴지(韓退之)의 문(文)과 두자미(杜子美)의 시와 더불어 삼절(三絶)로 병칭되었다. 지금 불화(佛畵) 둘과 위에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찬을 쓴 화승(畵僧) 둘이 있으며,
왕유(王維)는 산수(山水)에 정하여 천기(天機)가 이르러 가는 곳마다 누구도 미칠 수 없으니, 더욱 시에서 얻은 것이다. 지금 산수도(山水圖) 하나가 있는데, 물과 산이 다 천연하여 인위적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송(宋)에서 여섯 사람을 얻었으니
곽충서(郭忠恕)가 누관(樓觀)과 대사(臺榭)를 잘 그려 다 고상하고 옛스러워 뛰어나다. 지금 설제강행도(雪霽江行圖) 하나가 있으니, 큰 배가 함께 가는데 인물과 기용(器用)이 정밀하여 비할 데 없으며, 위에 송휘종(宋徽宗)의 어필(御筆)이 붙은 고각임강도(高閣臨江圖) 하나가 있는데, 유사(儒士)가 도인(道人)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각(閣) 아래로 지나가고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익히 바라보는데, 풍치가 쇄략하여 그림인가 실경인가를 깨닫지 못할 정도이며,
이공린(李公麟)은 자호(自號)는 용면거사(龍眠居士)인데 널리 듣고 정밀하게 알았으며, 그 그림은 뜻을 세우는 것으로 위주하는데 더욱 인물을 잘 그렸다. 지금 영척장가도(寗戚長歌圖) 하나가 있는데, 송휘종(宋徽宗)의 어필로 된 제(題)에 이르기를, “형기(形氣)가 소쇄하여 그림을 펼쳐놓고 구경할 때마다 남산 백석(白石)의 소리가 어렴풋이 사람의 귀에 들린다.” 하였으며,
소동파(蘇東坡)는 지금 진서(眞書)로 쓴 조주비(潮州碑) 인본(印本) 하나와 풍죽(風竹)ㆍ설죽(雪竹)ㆍ춘죽(春竹)도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전아하고 표일하여 진실로 화가의 격 밖에 있으며,
문여가(文與可)는 묵죽(墨竹)을 잘하며 소동파와 더불어 가장 서로 친하였다. 지금 풍죽도(風竹圖) 하나와 순죽도(筍竹圖) 넷이 있는데, 큰 줄기가 곧게 빼어나서 만 척(萬尺)의 기세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운당(篔簹)이라는 것인가 보다.
곽희(郭熙)는 산수와 한림(寒林)으로 한 시대에 독보적이었다. 지금 산수도 둘이 있는데, 하나는 춘경(春景)으로 산장(山莊)에서 잔치를 파하고 말을 건널목에 세웠으며, 하나는 추경(秋景)으로 강촌에서 고기를 낚기 위하여 낚싯대를 쥐고 홀로 앉았으며, 삭풍표설도(朔風飄雪圖) 하나, 하경청람도(夏景靑嵐圖) 하나, 수석도(水石圖) 하나, 풍우도(風雨圖) 하나, 강설도(江雪圖) 하나, 재학도(載鶴圖) 하나, 고목평원도(古木平遠圖) 둘, 산수도 하나가 있는데, 다 웅장하고 기이하여 필세가 날아 움직이며,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 하나, 강천모설도(江天暮雪圖) 하나가 있다. 그 서릿바람에 국화가 비치는데 거문고를 안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나, 눈이 갠 장강에 외로운 배를 타고 홀로 낚시질하는 것이 각각 한가하고 방랑한 취미가 깃들었다. 임정도(林亭圖) 하나, 급우도(急雨圖) 하나가 있는데 다 선면(扇面)이며, 투우도(鬪牛圖) 둘이 있는데, 힘차게 밀고 대드는 품이 몹시 기력이 있어 보이며,
최각(崔慤)은 화조(花鳥)를 잘하여 한때에 추앙을 받았다. 지금 추화야압도(秋花野鴨圖) 하나가 있는데, 바람과 이슬이 처량하고 터럭과 깃이 스산하다.
원(元)에서는 21명의 것을 얻었는데,
조맹부(趙孟頫)는 서화가 무리에 뛰어났다. 지금 행서(行書) 26점과 묵죽 둘이 있으며,
선우추(鮮于樞)는 조맹부와 더불어 함께 글씨를 배웠는데, 지금 초서(草書) 여섯이 있다.
왕공엄(王公儼)은 화초(花草) 금수(禽獸)를 잘하였는데, 의(義)만 취하여 이루었으나 저절로 생기가 있다. 목화도(木花圖) 열이 있는데, 송이가 모두 만개한 가운데 새들이 서로 우짖으며, 화초도 넷과 과목도(果木圖) 넷이 있는데, 꽃과 열매와 초충(草虫)이 선명하고 생동하며, 패하노자도(敗荷鷺鷀圖) 하나, 황응도(黃鷹圖) 하나, 해청도(海靑圖) 셋, 도화요자도(桃花鷂子圖) 하나, 아골도(鴉鶻圖) 하나가 있는데, 혹은 깃을 거두고 몸을 우뚝 세웠고, 혹은 날아가며 날쌔게 치닫는 형상이 각각 핍진하다.
사원(謝元)과 진의보)는 역시 화조(花鳥)를 잘 그렸다.
사원은 지금 해당절지도(海棠折枝圖) 하나가 있는데, 정결하고 간략하여 조화(造化)에 방불하며,
진의보(陳義甫는 지금 매화도(梅花圖) 하나, 행화도(杏花圖) 하나가 있는데, 구슬 같은 꽃망울이 햇볕에 어울리고 진기한 새들이 목청을 뽑아 우짖는다.
유백희(劉伯熙)ㆍ이필(李弼)ㆍ마원(馬遠)ㆍ교중의(喬仲義)ㆍ유도권(劉道權)ㆍ안휘(顔輝)ㆍ장언보(張彦甫)ㆍ고영경(顧迎卿)ㆍ장자화(張子華)ㆍ나치천(羅稚川)은 모두 산수로 유명하였다.
유백희(劉伯熙는 필세가 호방하고 건장하며, 기암(奇巖)과 노목(老木)에 장기(長技)가 있는데, 지금 강정설제도(江亭雪霽圖) 하나, 장림설만도(長林雪滿圖) 하나, 춘효연람도(春曉烟嵐圖) 하나, 장강도(長江圖) 하나가 있다.
이필(李弼은 필세가 정미하여 누각(樓閣)과 인물에 장기가 있는데, 지금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화청궁도(華淸宮圖) 하나, 소상팔경(瀟湘八景) 각각 하나, 이십사효도(二十四孝圖) 열 둘, 고목도(古木圖) 하나, 현애준각도(懸崖峻閣圖) 하나가 있다.
마원(馬遠은 필세가 고상하고 우아하여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지금 장송모사도(長松茅舍圖) 하나, 계거관분도(溪居灌盆圖) 하나가 있다.
교중의(喬仲義)는 한 자의 산과 한 치의 나무도 법도에 벗어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 염채산수(染綵山水) 여덟이 있다.
유도권(劉道權은 더욱 농담(濃淡)을 잘 하였으며, 지금 수묵산수도 하나가 있다.
안휘(顔輝)는 암석(巖石)과 인물을 잘 그렸는데, 지금 산중간서도(山中看書圖) 하나, 유림채약도(幽林採藥圖) 하나, 화불(畵佛) 셋이 있다.
장언보(張彦甫)는 지금 계산우과도(溪山雨過圖) 하나, 절안도(絶岸圖) 하나, 장림권운도(長林捲雲圖) 하나, 수묵운산도(水墨雲山圖) 하나, 예중(倪中)의 시가 있는 송석도(松石圖) 하나, 게해사(揭奚斯)의 시가 있는 그림 일곱이 있는데, 산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암담(暗淡)하고 평원(平遠)하여 다 비범한 취미가 있다.
고영경(顧迎卿)은 지금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하나가 있는데, 유심(幽深)하고 한가하여 매우 고상한 풍치가 있다.
장자화(張子華)는 지금 소림소산도(疏林蕭散圖) 하나, 산수도 하나가 있고, 나치천은 지금 설산도(雪山圖) 하나가 있는데, 각각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 기격(氣格)이 청신하다.
화마(畵馬)로 유명한 이는 주랑(周朗)과 임현능(任賢能)인데,
주랑(周朗은 지금 희마도(戱馬圖) 하나, 목마도(牧馬圖) 하나가 있고,
임현능(任賢能은 지금 견마도(牽馬圖) 하나가 있다.
설창은 부도(浮屠)로서 난죽(蘭竹)을 잘 그렸는데, 지금 광풍전혜도(狂風轉蕙圖) 둘, 현애쌍청도(懸崖雙淸圖) 하나가 있다.
철관은 왜승(倭僧)으로 산수를 잘 그렸는데, 실제의 모습과 같게 하는데 뜻을 두었으나, 호방하고 표일한 기운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승기(僧氣)가 있다고 비평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지금 산수도 둘, 고목도(古木圖) 둘이 있다.
식재(息齋)ㆍ진재(震齋)는 그 이름이 유실되었다. 그러나 식재의 대그림과 진재의 용그림은 다 고수였다.
식재는 지금 채죽(彩竹) 둘, 금성도(金聲圖) 하나가 있고,
진재는 지금 운룡도(雲龍圖) 하나가 있다.
송민(宋敏)ㆍ왕면(王冕)ㆍ섭형(葉衡)ㆍ지유(知幼)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송민은 지금 묵죽도(墨竹圖) 하나가 있는데 풍격이 특절하여 천하에 짝이 없고,
왕면은 지금 묵매도(墨梅圖) 다섯이 있는데, 각각 시가 있어 운치가 청아하고 서법(書法)이 훌륭하여 삼절(三絶)이라 칭할 만하며,
섭형(葉衡)은 지금 수죽도(脩竹圖) 하나가 있는데, 역시 시가 있어 매우 청절(淸絶)하고,
지유는 지금 묵죽도 둘이 있는데 역시 가작이다.
우리 조정에서 한 사람을 얻었으니,
안견(安堅)이다. 자는 가도(可度)요, 소자(小字)는 득수(得守)이니, 본래 지곡(池谷) 사람이다. 지금 호군(護軍)으로 있는데, 천성이 총민(聰敏)하고 정박(精博)하며 고화(古畵)를 많이 열람하여, 다 그 요령을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산수가 더욱 그의 장처로써 옛날에 찾아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을 얻기 드물다. 비해당(匪懈堂)을 따라 교유한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이 가장 많다. 지금
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절벽도(絶壁圖) 하나, 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산수도 둘,
노안도(蘆雁圖) 하나, 목화도(木花圖) 둘, 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또 고화(古畵)로 누구의 작품이라 이름하기 어려운 것이 열하나인데, 거북 하나, 배꽃 하나, 살구꽃 하나, 송학(松鶴) 하나, 화압(花鴨) 하나, 사우(四牛) 하나, 왕발(王勃)의 사적에 대한 인본(印本)이 하나, 후원산수(後園山水) 하나, 아골(鴉鶻) 하나, 누각(樓閣) 하나, 고목산수(古木山水) 하나이다.
모두 오대(五代)에 걸쳐 35명을 얻었는데, 산수를 그린 것이 84, 조수(鳥獸) 초목을 그린 것이 76, 누각 인물을 그린 것이 29점이며, 글씨가 또 33점으로 합하면 2백 22축이 된다. 아, 독실한 애호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처럼 많이 수집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일찍이 이 방면을 해득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무릇 그림이란 것은 반드시 천지의 조화와 음양의 운행을 궁구하여, 온갖 물건의 정과 온갖 일의 변화가 가슴속에 서린 뒤에 붓을 들고 종이에 대면 정신이 모이고 생각이 합치되어, 산을 그리고자 하면 산이 보이고 물을 그리고자 하면 물이 보이며, 무릇 그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물건이 보일 때에 붓을 휘둘러 그에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슴에 서린 물(物)의 가형(假形)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진상(眞狀)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화가의 법이다. 이를테면 마음에서 터득하고 손에 응하면, 마음과 손이 서로 잊어버리고 몸은 물(物)과 더불어 화(化)하여, 조용하고 단아하여 마치 조화가 본래 단분(丹粉)의 밖에 있는 것이라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을 구경하는 자가 능히 저의 충담(沖澹)하고 고아(高雅)한 것으로써 나의 성정을 즐기고, 그림속의 호건(豪健)하고 진려(振厲)한 것으로써 나의 기운을 기르면 어찌 보익됨이 작다 하겠는가. 더구나 물의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며 널리 듣고 많이 아는 것에 이르러서는 장차 시(詩)와 더불어 공을 같이 할 것이니,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이 과연 여기에 미치는 자가 있을런지.
--------------------------------------< 이상 인용: 고전db>----------
1. 안평대군이 수집한 서화는 모두 222개입니다. 동진/당/송/원/명(?조선) 의 5대 에서 얻었읍니다.
이 한대목에서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낍니다.
五代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진/당/송/원/조선의 역사적 기년이 이어지는 관점에서
오대 입니다. 동진/당/송/원/명 이라고 하는 익숙한 기년개념의 5대로 보이는데 신숙주는 명이
들어갈 것 같은 자리에 我朝 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이 아조가 조선인지 명인지는 모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것이 조선이라고 알고있읍니다. 신숙주가 조선인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있는것 처럼 조선이라는 나라이름이 1392년에 세워진것인가?
신숙주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는 조선이 1392년에 세워진 것이 아닌듯이 말하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하여튼... 이글에서는 조선이 선지 얼마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안평대군이 수집을
한것이라 그런가 조선의 그림은 안견의 것만 나옵니다.
이 것은 원(고려)을 이은것이 조선이라는 뜻이기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때 이 송/원은 고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으로 비슷한 시기의 신라 고려는 진정 수집할
가치가 있는 아무런 그림/글씨도 남기지 못한 나라 였을까? 자기나라의 것은 하나도 없읍니다.
고서화 수집을 하면서 고려 신라의 것은 하나도 등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수상합니다.
고려 조선이 서화에 무지하여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안평은 어떠한 문화적 토양위에서
서화에 대한 감식안을 가졌을 것인가? 사람은 아는 만큼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서화가 풍부하고 이러한 화제가 풍성한 조선(대륙)에서 자라서 성장하여 심미안이
발달 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이 정말로 한반도 구석에 있는 비루한 나라라면 어떻게 저 많은
유명한 그림을 수집할 수 있었을까? 일부 송나라의 그림은 송휘종의 어필이 있는 매우 희귀한
것도 있읍니다. 그러한 것을 조선에서 쉽게 구할수 있었을까? 물론 안평대군의 신분이 왕족으로써
그러한 위치를 이용해 구할수 있었겠지만 그게 그렇게 쉬웟을까?
명나라의 왕족 귀족의 수집도 있었을 테고 또는 그 작가들의 후손이 가보로 지키거나 해서 쉽게
구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조선의 경우에도 수많은 왕족과 귀족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로 수집하는 것이 있엇을 터 입니다.
왕족이라해서 쉽게 구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안평대군은 명/조선이 같이 존재하는 그런 상태에서 그림을 구한 것이 아니고
대륙의 조선에서 그곳에 산재해 있던 그림을 모은 것으로 보입니다.
2. 안평대군이 수집한 목록중에 안견이 그린 목록이 눈길을 끕니다.
안견은 안평대군(비해당)과 친분을 쌓아서 그와 교류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안견의 그림을 많이 소장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재 알려진 안견의 작품은 몽유도원도가 전해지며 ,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 기록으로 전해지는그의 작품으로는
<비해당25세진〉〈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팔준도(八駿圖)〉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묵죽도(墨竹圖)〉〈적벽도(赤壁圖> 입니다.
그러나 위의 신숙주의 기록에서는 안견이 남긴 작품은 더있읍니다.
" 팔경도(八景圖) 각각 하나, 강천만색도(江天晩色圖) 하나, 절안쌍청도(絶岸雙淸圖) 하나,
분류종해도(奔流宗海圖) 하나, 천강일색도(天江一色圖) 하나, 설제천한도(雪霽天寒圖) 하나,
황학루도(黃鶴樓圖) 하나, 등왕각도(滕王閣圖) 하나, 우후신청도(雨後新晴圖) 하나,
설제여한도(雪霽餘寒圖) 하나, 경람필련도(輕嵐匹練圖) 하나, 제설포겸도(霽雪舖縑圖) 하나,
수국경람도(水國輕嵐圖) 하나, 강향원취도(江鄕遠翠圖) 하나, 기속생화도(起粟生花圖) 하나,
춘운출곡도(春雲出谷圖) 하나, 유운포학도(幽雲蒲壑圖) 하나, 광풍급우도(狂風急雨圖) 하나,
규룡반주도(虯龍反走圖) 하나, 장림세로도(長林細路圖) 하나, 은하도괘도(銀河倒掛圖) 하나,
절벽도(絶壁圖) 하나, 묵매죽도(墨梅竹圖) 하나, 수묵백운도(水墨白雲圖) 하나, 산수도 둘,
노안도(蘆雁圖) 하나, 목화도(木花圖) 둘, 장송도(長松圖) 하나가 있다"
와 같이 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읍니다. 이 작품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있을까?
아니면 모두 사라진 것일까? 왜 우리의 기록실은 이러 작품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이 황학루도 와 등왕각도 적벽도 입니다.
이 누각들은 흔히 그당시 명나라가 있었다는 대륙에 있던 역사적으로 유명한 누각들입니다.
수많은 명사들이 이에대한 시와 그림을 남기고 있읍니다. 현재의 시각으로
황학루는 양자강변 남쪽의 무창에 있고 등왕각은 강서성의 남창이란 곳에 있읍니다.
안견은 이 그림을 상상으로 그렸을까? 아니면 직접 안평대군을 모시고 다니면서 그린것일까?
아마도 상상으로는 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상으로 등왕각 황학루를 그려놓고 좋아라 하는 안평과 안견 신숙주가 상상이 됩니까?
터무니 없는 일입니다. 상상화가 아닙니다.
지금 유명한 화가에게 한번도 가보지 않은 명승지 한곳을 말하고 그리라고 명령하라해서
그릴수 있을까?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안평대군(비해당)과 안견은 조선의 땅인 그곳에서 황학루와 등왕각을 유람하면서
그린 것이 틀림없읍니다.
또한 적벽도를 그렸는데 그 적벽을 가보지도 않고 상상으로 또는 말을 듣고 또는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그렸다면 조선의 화가들은 모두 화가라기보다는 만화가 입니다.
3. 위의 기록에는 없지만 역시 전해지는 그림으로 소상팔경도가 있읍니다.
아래 그림은 안견의 그림이라고 전해지는 소상팔경도 입니다. (안견작이라는 증거가 없는 상태)
1첩, 산시청람(山市晴嵐), 푸른기운의 산간 마을 2첩, 연사모종(煙寺暮種), 안개낀 산사 황혼의풍경소리
3첩, 어촌석조(漁村夕照), 어촌에 물든 저녁 노을 4첩, 원포귀범(遠浦歸帆), 멀리 포구로 돌아오는 배
5첩,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내리는 밤비 6첩,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 달
7첩, 평사낙안(平沙落雁),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8첩, 강천모설(江天暮雪), 저녁 무렵 산야에 내린 눈
소상 팔경도는 현재 대륙에도 있으나 이것과 다른 풍경입니다.또 다른 그림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화가마다 다르게 그릴 것입니다.
소상팔경도는 많은 작가가 그렸읍니다. 이러한 그림을 상상으로 그렸다는것이 가능 할까?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소상팔경시첩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瀟湘 은 동정호 남쪽
의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곳의 경치입니다. 소상팔경도는 전해지지 않고 소상팔경시첩만
전해지고 있읍니다.
시첩은 아마도 인쇄를 하거나 필사를 하여 많이 전해진것으로 보입니다.
놀라운 것은 안평대군이 그림은 안견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시첩에는 당대의 명사를 망라하는
사람을 동 원하여 소상의 아름다움을 시로 짖게 한 것입니다.서문을 쓴 이영서를 비롯하여
하연, 김종서, 정인지, 조서강, 강석덕, 안지, 안숭선,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최항,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윤효동, 김맹, 석 만우 등 열 아홉 명의 시를 수록하였읍니다.
조선의 한반도에서 저 대륙 동정호 남쪽의 소상강 의 경치를 시로 읊으라니...
가능이나 할까요? 그당시 북경에 한번 가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건만 그보다 3배 5배 먼거리에 있는
그곳에 가보고 오라 했을까? 당연히 한반도 조선에서 그 곳은 갈 수가 없는 곳이고 또 가본적도
없는 곳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보지도 않은곳을 시로 읊으라고 부탁을 하고 그 부탁을 받고 상상으로 시를
만들었다면......!!
만약에, 정말로 그랬다면 명을 내린 안평대군이나 명을 받든 19명의 신하들이나
이게 뭐 하는 것입니까? 한때 유행하던 "이게 뭡니까?" 바보들의 행진 같지 않읍니까?
글을쓴자중에는 김종서 박팽년 성상문 같은 지조가 대쪽같은 충신 들도 있고
당대의 학자들인 하연 안숭선 최항 정인지 신숙주 같은 이들도 있읍니다.
생소한 조서강 강석덕 안지 이보흠 남수문 신석조 유의손 윤효동 김맹 석만우 도 있읍니다.
세종시대에는 안평대군의 권력(세종의 동생)이면 어짜피 상상으로 시를 만들라고 할 것이면
이러한 생소한 자들 대신 당대의 명사를 총동원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바보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들 그곳 소상강에 가본 자들인 것입니다.
명사들중에는 소상강에 가보지 않은 자들은 모두 빠진 것입니다.
그들19명은 모두 대륙에서 있던자들이고 그 근처에서 성장하던 자들이거나 그 지역에 갔다온
자들일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니 저 대륙은 조선의 땅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견의 소상팔경도와 명사들의 소상팔경시첩이 짝을 이루어 탄생한 것입니다.
소상강(소수와 상수)이 조선의 영역에 있으면
동정호 황학루 등왕각도 조선에 있을수 밖에 없읍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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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평대군에 대한 여러가지 속설은 아주 많다고 하네요. 그러나 그곳에 등장하는 "안평대군"은 "반도" 땅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다라고 봅니다. 明(명)나라는 결코 조선의 상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자료수집, 좋은 정보, 해설과 함께 올려주시는 님의 글을 보고있노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수고하였습니다.
<五代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진/당/송/원/조선의 역사적 기년이 이어지는 관점에서 오대 입니다.>라는 말에서 무언가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정인지 빼고 전부 다 계유정난 때에 플레이어에 베팅한 사람들 뿐이군요. 정인지는 뱅커에 베팅해서 승했고 나머지는 오링났죠. 확실한 건 안평대군, 안견 류는 지금의 한국문화와는 큰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고보니, 이더기리의 김좆개후레와 좆선의 눔물눔물이라는 인류력사상 쳐졸리기 짝없는 낙서장을 보면, 정인지와 김종서는 틀어질 수밖에 없는데, 김종서의 예폔네란 잡것하나 살리려고 리도씹색기가 한 행태를 보면 그냥 웃기지도 않은데, 정인지는 그 당시 '국법'을 지킨 것일 뿐인데, 리도-김좆개후레가 정인지에 대해서 뾰로통한 심정을 감출수 없었다하는데, 이는 정치를 감성으로 해서는 안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봐야합니다.
실제로 디스카바라는 고려사를 정인지가 썼다고 믿는 사람이고, 김좆개후레는 거기에 건방지게 숫가락만 쳐놓았다고 봅니다. (태조, 태종, 세조의 3성위주로 조선력사를 재편해도 씨언차늘 판)
한마디 덧붙이자면, 경혜공주 신사저를 짓는대 맹렬하게 반대한 집현전 학사를 보면 '정인지'가 유일하더라고요. (권절은 그냥 씹새끼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니, 권절 이하 생육Sin이하 떨거지들의 정신승리양태를 보면, 그냥 웃기지도 않지요. 사실 권절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도 모리는 븅신색기에 지나지않습니다. 사실 디스카바라가 가장 좆같이 여기는 것은 '노량진' 일대에 사육Sin의 무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안평개후레 관련자료를 여기서까지 보고싶진 않네여.후후.
(머 사족이지만 정인지는 1453년 비가담자 중에서 유일하게 경뽕개후레가 아닌 사람입니다)
- 안평개후레가 개지 사람이 아닌 이유는 더 말할 것도 없는데, 디스카바라가 알아본 결과 중 하나로는, 경혜공주와 안평개후레가 서로 비공식적으로 붙어먹었던 적도 있었다는겁니다. 놀라웁게도 이런 진기록이 숙종, 연잉개후레, 사도게이, 리산에 의해 모조리 사라졌다고 할 수 있갔삽네다. (특히 지는 귀성군의 후손 이인좌가 직접 왕이 되었어야 그 당시 막장조선이 그나마 제자리를 잡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 경종은 '독살'당한게 맞습니다.)
드레이크님. 언어좀 순화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드레이크>님께 부탁드립니다.
역사공부는 우리들의 선대에 관한 발자취입니다. 비록 잘못된 점, 반성해야 할 점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대인 우리가 그 분들을 향해 쌍스런 말과 언어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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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에 대한 열정은 예의와 신의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좋은 말과 겸손, 예의를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함을 일컫는 것입니다. 감정이 상하셨다면 미안합니다. 그러나 카페에서의 최소한의 예의는 기본적 필수 조건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