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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일상을 잊은 채 몇 일전부터 준비해온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길에 올랐다.
출발하는 첫날의 날씨가 서울-16도, 익산은 -13도로 우리나라 동절기 기온 중에서도 비교적 추운 그러한 날씨였다
흘러나오는 라디오 심야뉴스를 듣고 새벽 02:30분 아내가 태워다 주는 승용차를 이용 시청 앞까지 도착 해 보니 이미 그 곳에는 세화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버스에 는 여행을 함께할 분들 대부분이 좌석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일행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출발계획은 3시30분에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한분이 늦어 일행은 4시가 되어서야 출발하게 되었다. 모두들 새벽잠을 설친 상태라 곧 깊은 잠에 빨려드는 모습들 이었다. 나는 모처럼의 해외여행이라는 설레임 때문인지 그리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버스는 얼마를 달려 인천공항 근처의 전주 설렁탕집에 서 따끈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공항에 도착, 출국 수속을 밟았다.
출국 수속은 세화관광 이영희 사장이 직접 가이드 역할을 해 줌으로서 비교적 용이하게 마칠 수가 있었다. 수화물을 부치는 등 출국 수속을 마친 일행은 면세점에서 기념품을 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안 검색대를 거쳐 105번 게이트를 통해 나가 레일버스를 탄 후 BALTIC항공사의 KG301편에 탑승하였다. 나의 좌석은 NO 31E이였다.
비행기는 11:10분 인천공항을 이륙, 캄보디아의 “씨엠립” 공항을 향해 날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나는 입맛에 와 닿지 않는 기내식 “치킨라이스”를 먹었고 오렌지주스로 목을 축이기도 하였으며 지루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창문을 통해 눈 아래 펼쳐진 뭉게구름 과 무한대로 높은 하늘의 푸른 공간을 보면서 잠시 사색에 잠겨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교적 조용하기만 하던 기내에서 다급하게 의사를 찾는 안내 방송이 나오는가 싶더니 승객 중에 진통제나 지사 재를 가지신 분이 있으시면 도와달라는 것 이었다. 나는 일상 먹고 있는 약 중에 혹시 해당되는 약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약을 챙겨가지고 안내 방송실로 급히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중년 여자 한분이 뉘어져 있었고 의사로 보이는 승객 한 분이 그 환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챙겨간 약을 보이며 여기에 혹시 진통제나 지사제가 석여 있을지 몰라 가지고 왔노라 얘기하니 고맙다고 하면서 약을 살펴보던 의사 선생님 말씀 “이 약에는 필요로 하는 지사 제는 없군요” 하는 게 아닌가 “아 그래요 지사제가 포함 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하면서 환자가 어서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자리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환자는 장에 탈이 난 모양이었는데 감기 몸살 약을 가지고 갔으니 나도 어이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한편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6:25분 비행기는 씨엠림 공항 활주로에 안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임시 출국장으로 나오는 사이에 내 눈에 비친 씨엠림 공항은 그리 크지 않아 비행기 4대가 앉아 있는 정도의 적은 공항으로 매우 한적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공항 내에 근무하는 직원과 화단의 잡초를 뽑고 있는 삿갓 모자 쓴 아주머니들 모두 까무잡잡한 적은 키에 순진하고 착하게 보이는 정다운 모습 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풍기는 순수함과 소박함이 마음에 와 닿는듯하여 그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일행은 대합실 내에서 40여분을 기다리다 타고 왔던 KG301편 비행기에 재차 탑승하여 베트남 하노이 공항으로 가야만 했기에 후덥지분한 섭씨 30~40도의 더위를 실감 있게 피부로 느껴야만 했다. 나는 면세점에 들러 가족이 사 오지 말라고 신신 당부 했는데도 이곳에서 가장 비싸다고 하는 실크 스카프를 99불에 샀다. 우리는 정확하게 40분 후 타고 왔던 비행기에 탑승, 18:00정각에 베트남 하노이 공항을 향해 씨엠림 공항을 이륙하였다. 한반도 남, 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약간 적은 캄보디아 국토의 일부 하늘에서 내려다보이는 검푸른 대륙은 우기를 맞아 많은 비가 내려 여기 저기 강물이 범람하여 많은 논밭과 가옥들이 침수된 모습들 이었다. 우리는 19:30에야 하노이 공항에 도착하였다.
나는 비행기 트렉에서 내려 베트남 땅을 밟는 순간, 나의 동료들이 피 흘려 싸웠던 곳 월남 땅 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서로 죽이는 살벌한 전쟁터 이었을 터인데....
내가 살아 있어 이렇게 평화로운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와 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실로 평화통일에 대한 열망과 실로 감개무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출국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대합실로 나오니 현지 가이드 두 사람이 나와 피켓을 들고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공항 수화물 수취 대에서 찾은 여행용 가방 등을 대기시키고 있던 대형 버스에 옮겨 싣고 모두 버스에 탑승하였다. 버스를 타자마자 일행은 대부분 장시간 피로에 쌓여서인지 졸음 아닌 깊은 잠에 빠져 들었고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이는 몇 사람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버스 내에서도 내내 안케페스의 영웅하며, 귀신 잡는 해병, 천하무적 맹호부대, 후방 지원과 복구 대민 지원 임무를 맡았던 비둘기 부대, 호치민 루트에 의해 고엽제까지 살포하면서 전쟁을 이끌던 미군이 패배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모든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어찌하랴
미국의 불분명한 목적 없는 전쟁에 그들의 용병으로 고귀한 수많은 장병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던 힘없는 약소국의 설움이 국가 발전의 초석으로 변화된 지금에야 그들이 흘린 피가 얼마나 값진 충정 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우리는 21:40분에야 가이드가 안내하는 저녁 식사장소인 한식 식당에 들러 신선한 야채에 돼지고기 삼겹살이 겻 드린 된장찌개 백반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가 있었다. 또다시 버스를 타고 3시간이상 소요되는 고속도로를 이용, 하롱베이까지 이동해야만 했다. 하롱베이까지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 최성태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실감 나게 해 주었다.
베트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월남전, 둘째는 아오자이, 셋째는 호치민, 넷째는 라이따이한 이라 했다.
특히 월남전은 미국이 통킹 만 장악과 자원 확보를 위한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 손쉽게 승리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감행 했던 전쟁 이었으나 승리에 어둠이 깔리자 한국 전쟁 시 참전국으로서 각종 원조를 해 주었었다는 이유로 한국군까지 용병 화하여 전쟁에 참여케 하고 끝내는 고엽제까지 살포하였지만 기나긴 전쟁은 호치민의 전통적인 전략전술에 녹아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를 해야만 했던 미국의 실패한 전쟁이라는 것이며 “S"자형 몸매에 스치듯 내려뜨려 입은 베트남 처녀들의 의상인 아오자이, 미국의 폭탄 세래와 고엽제 살포에도 땅굴을 이용해싸운 호치민의 전략전술, 그리고 단결된 국민정신과 일심동체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 영웅을 빠뜨릴 수 없으며, 전쟁 와중에 파견된 산업 근로자와 일부군인 들의 애정행각의 산물로 태어나 종전 후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이별로 탄생하게 된 라이따이한과 그들이 격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실상들을 의미 있게 얘기해 주었다.
베트남은 국토 길이가 1370km로서 북부, 중부, 남부로 나뉘며 지역별 계절차가 심하나 연중 기분 나쁘게 추위를 느낄 때에도 맨발에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전 지역에 남방 시설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 했다. 국민의 80%이상이 불교 신자이며 가톨릭11%, 기독교6%, 나머지는 도교를 믿는다 하면서 기독교의 선교 활동은 불가능할 정도라는 얘기도 해 주었다.
약2주전에도 베트남 정부는 부정부패 관료와 애인 변심한자, 유통기한 지난 식품 판매업자, 부동산 투기업자 4명에게 시내 한 복판에서 총살형을 집행한 일이 있었다고도 했다. 나는 여기서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씽가폴의 “이광요” 수상도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범법자에게 즉결처분도 불사 했던 것처럼 부정부패가 만연한 우리나라도 위에서부터 청렴결백한 솔선수범과 부정부패 범법자에게 강력한 처벌을 왜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서 못내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하였다. 나는 감히 이글을 통해 몇 가지를 주장하고 싶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되게 하거나 누를 끼치지 말자 무엇이 필요한가를 물어 필요한 것을 주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을 함께 해결하려 노력하고 아픔이 있다면 서로를 보듬고 쓰다듬어 주며 고통은 위로하고 슬픔은 서로 나누어라고....
1인당 GNP가 높고 큰 시설, 좋은 설비, 문화 공간이 좋다고 한들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가 심각한 상태 하에서 상위5%가 전체경제지수 85%를 차지한다면 하위 95%는 15%라는 삶의 지수 속에 허덕이며 살아가야 하는 아픔을 어떻게 행복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적 복지국가인 필란드를 보라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도 오히려 감사해 하는, 모든 국민이 평등원칙에 의해 노후까지 복지가 보장되는 국가가 진정 살고 싶은 나라 아니겠는가 차별을 두고, 아래층을 바라보지 못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높이는데 동참하게 하는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위정자들에게 묻고 싶다. 전 국민이 잘 사는 복지 국가의 머릿돌, 주춧돌을 심어 역사와 전통 앞에 떳떳한 위정자로서 후손 만대에 길이 빛나게 할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국가는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안식처가 되어야한다.
베트남에는 자원이 풍부하여 쌀과 고무, 광석, 석유까지 생산되고 있으나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이 한국 돈 10 만원수준으로 빈부격차가 심하여 상위20%가 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거리에 거지가 없는 것, 여자가 일하며 남자는 놀고 빈둥빈둥 한다는 말은 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교통질서 또한 혼잡한 특징이 있음은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영웅 호치민은 살아서 죽을 때 까지 소형 3칸 집에서 1식3찬하며 가족의 연을 끊어 가면서까지 청렴하게 살았고 오직 국민만을 위한 정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죽어가면서 “내 시신마저도 남기지 말라” “태워 남은 재는 남북 산야야 뿌려 달라”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실로 우리 위정자들이 표본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라 생각되어지기도 했다. 가이드는 우리 일행에게 참고하라 하며 월남말로 “신짜우”는 우리말로 “안녕”이란 말이고 “신따면”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이러는 사이 일행을 태운 버스는 23:50분 <하롱프라자>호텔에 도착하게 되었고 체크인 후 룸메이트인 익산시 문화원장 김복현님과 룸NO620호에 들어 샤워를 하니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24시간을 지나온 지라 몸이 피곤하여 “안녕히 주무셔요”라는 인사만 나눈 채 곧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07:00시 알람소리에 잠을 깨어 2일차 일정에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나니 피로가 풀린듯하여 간편복 차림으로 2층 식당에 내려가 일행들과 함께 군데군데 2~4명씩 그룹을 형성하여 뷔폐 식사를 하고 프론트에 내려가니 가이드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당일 일정 계획을 알려 주었다. 오늘은 호텔에서 버스로 5분 거리에 있는 <하롱베이 선착장>으로 11:20분 출발하여 그 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섬들을 해상 관광하면서 수상가옥과 섬들 중 천궁이 있는 석회암 동굴 섬을 구경한 후 점심은 바다고기 회로 선상 식사를 하며 소형보트로 007영화 촬영지인 무릉도원을 구경하고 쾌속정으로 많은 섬들을 관광 후 유람 선상에서 간식을 먹고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발 마사지를 하고 <키톤 치드> 판매 상가에도 들리며 저녁은 한식집에서 자연산 야채에 삼겹살로 식사를 한 후 호텔로 복귀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시간이 되어 일행은 초가을 날씨에 맞는 옷차림에 간단한 소지품, 여권, 카메라 등을 챙겨들고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 타고 보니 긴팔 셔츠와 긴 바지를 입고 벙거지 모자에 비상 상비약까지 챙겼지만 왠지 카메라 비상 바데리가 부족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선착장까지 이동한 우리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단체로 매입한 후 승선 검표를 받고 지정된 유람선에 올랐다.
하롱베이에 대하여는 국내에서도 절경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었지만 유람선에 승선하기 전 부터 우리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고 압도적인 매력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인생정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과거를 일상처럼 생각하며 나 홀로 있는 날이면 나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항상 “물을 바라보며 산을 바라보며 별을 바라보며 살리라”였다. 이러던 내가 잔잔한 바다 물속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하롱베이 섬들을 바라보면서 나의 일상의 생각이 여기에 아직 너무나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은 참으로 짧다 그러나 자연은 유구하다 물은 나이 들수록 낮은 곳을 찾아 흐르고 산은 나이 들수록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함으로 포용하고 감싸며 베풀고 별은 어두운 밤일수록 밝게 비추어 희망을 갖게 해 주지 않는가. 자신의 영화가 무엇이며 성공이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길 무엇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란 말이더냐 되묻고 또 되물어 보며 3000여개의 섬들 중 220여개 섬들 밖에 구경할 수 없다는 아쉬움 속에 우리는 기암절벽과 절벽 사이사이 자라고 있는 나무와 숲을 보면서 선상 관광을 만끽할 수 있었다. 155마일 철조망 넘어 구름과 바람 온갖 새들도 자유로이 넘나드는데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오 갈길 막혀 말로만 화려한 금수강산 가까이 찾지도 못하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면 눈물만이 앞을 가릴 뿐이다.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느 한 섬에 내려 천궁 관광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은 우리나라 단양의 고수동굴이나 제주도에 산재 되어 있는 것과 유사한 천연 석회석과 용출 암으로 생성된 동굴로 형형색색의 불빛에 보여 지는 신기함과 아름다움, 기이함, 웅장함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 곳 천궁 동굴은 월남전 시 호치민이 숨어서 작전지휘 하던 곳으로 미군폭격기 조종사가 폭격명령을 받고서도 너무도 아름다워 폭격을 할 수 없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고 했다.
동굴 구경을 마친 일행은 다시 유람선에 승선하여 수상가옥을 구경하기도 하고 선상 횟집에 들러 구입한 바다고기 회를 준비해간 음식들과 함께 먹으며 간단한 선상 쇼핑도 하였다. 그리고 주변 섬들이 비교적 잘 보이는 관망대 섬에 올라가 사방 전경을 바라보니 한눈에 내려다보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 그 자체였다. 관망대 섬에서 하산한 우리는 다시 노를 젓는 소형 보트를 타고 해수면과 동굴천장이 낮은 동굴을 통과하여 007영화 촬영지를 보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물결이 잔잔한 광활한 호수 같은 바다의 일부가 사면이 하나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말 그대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곳 이었다. 누구도 생각지도 않는 원숭이 떼들하며 까마귀 떼가 서식하고 있었고 코끼리 상, 불꽃상 등 기암괴석으로 빚어진 모습들은 007 제임스본드 영화에서나 본 듯한 연인들의 로멘스를 상상하면서 즐길 수 있는 정말 아늑하고 아름다운 바다호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노를 젓는 바람소리 물소리마저 산울림 되어 돌아오는 실제 모습 속에서 다 같이 고함을 질러 되돌아오는 메아리소리를 들어 보며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합창함으로서 삶의 고통 속에서 누구나 느낄 수 없었던 삼매경에 빠져 보기도 하였다.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19:00 처음 승선했던 선착장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피곤해진 몸의 피로를 풀기 위해 19:20분 <발 마사지 하우스>로 이동, 19:25~ 20:00까지 마사지를 하였고 20:00부터 20:40분까지 키톤치드 치약, 비누 등을 판매하는 판매장에서 특산품을 사고, 20:40~21:20분까지 우리나라 단군 신화와 같은 용을 주신으로 하는 베트남의 신화를 역사화한 전통 민속 문화를 극화한 수상인형극을 관람 했으며 한식식당으로 이동 21:40~22:55까지 자연산 야채와 삼겹살이 겸비된 녹색 쌀밥을 맛있게 먹은 후 23:00에 <하롱프라자> 호텔에 도착, 사진사가 중간 중간 촬영했던 사진을 각기 찾은 후 23:30분에야 룸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참으로 하루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배웠던 의미 있는 통일 관광 여행이었음 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여행3일차 06:00 모닝 콜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어 일어나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그리고 좋은 새날을 주심에 감사하며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해 주십사 하는 아침기도를 마친 후 샤워를 간단히 하고 가방을 꾸려 놓은 후 2층 지정된 식당에 내려가 아침 식사를 하였다. 1층 프론트에 장식 되어져 있는 매화나무와 금귤나무가 눈에 띄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곳 베트남은 년 초에 다산 다복 하라는 의미에서 축하 선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룸으로 돌아와 가방을 가지고 내려왔다, 오늘은 일명 <바딘광장>이라 하는 호치민 광장으로 이동하여 호치민이 죽어 묻혀 있는 문묘를 살펴보고 살아 생 전 죽기 전까지 생활 해 왔던 생가와 국보 1호사원인 <한 기둥 사원>을 둘러본 후 하노이의 <누이바이공항>으로 이동하여 다시 늦은 밤중에 캄보디아 <씨엠립공항>으로 이동, <앙코르 센츄리 호텔>에 여장을 풀게 된다는 일정 계획을 가이드로부터 들었다. 호텔 앞에 대기 중인 버스에 여행 가방 등을 실은 일행은 08:30분 하노이 시티를 향해 출발 하였다. 입담 좋은 가이드 최성태씨는 자신이 베트남에 유학 와서 살게 된 사연부터 시작하여 이곳 베트남은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약1.5배 크기로 7,6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고 수도는 하노이로서 월남 전쟁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호치민에 의해 낙후된 경제와 전쟁후유증을 경제개방과 정치, 경제, 사회운용에 관한 개혁을 지속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1995년 미국과의 국교정상화는 물론, 1992년12월22일 한.베트남 수교가 이루어져 1993년 호치민시에 총영사관이 개설 되어 있는 나라라고 설명하여 주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유교문화권에 속하면서도 우리나라나 일본에 비해 가부장적 요소가 약하며 남녀평등의식이 강하나 아직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여자는 16세만 되면 무조건 <라노> 모자를 쓰고 논밭에 나가 일을 하나 남자는 놀고먹는 성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상에도 중앙선 개념이 없이 버스, 택시, 오토바이, 자전거, 우마차까지 같이 이용, 혼잡함이 있고 오침문화가 있고 대머리가 없으며 집집마다 국기가 게양되어 있고 중국을 제일 싫어하며 커피와 고무, 쌀 등이 주산이고 쌀 생산은 세계2위 생산국이라는 설명도 해 주었다. 또한 아오자이와 라이따이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전쟁당시에 남 녀 간에 쏟은 애정표현의 결과가 지금 현재는 그들이 너무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도 다시 해 주었다.
일행은 가이드가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사이 피곤함에 못 이겨 조는 사람이 많았으나 나는 호기심 속에 한 가지라도 더 알고자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우리며 적은 수첩에 기록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13:15분 우리를 태운 버스는 하노이에 도착하였다.
하노이에 도착한 나는 버스에서 내린 후 <시크로>를 타고 시내 구경을 하면서 시내 곳곳과 오토바이 행렬, 전통시장, 결혼하는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았고 호치민 박물관에 들러 베트남의 역사와 호치민 생가모형, 애용품, 편지, 혁명과 관련된 것, 그리고 독립과 통일에 관련된 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점심을 거른 체 바딘광장이라 일컫는 <호치민 광장>에 도착하여 은 갈색의 대리석으로 된 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인 호치민 영묘를 볼 수 있었다.
그 곳의 넓은 광장 주변에는 황금색으로 도색되어진 베트남의 주요 관청들이 비교적 규모 있게 지어져 있었고 광장 곳곳에는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많이 와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베트남 국민들이 왜 호치민을 영웅시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가 살아생전에 얼마나 청렴결백하고 오직 국가와 백성만을 사랑하면서 자기를 버렸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 관료들도 이러한 호치민 정신을 이어 받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저버릴 수가 없었다.
어려운 민초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함께 눈물 흘리고 부모님께는 물론 자매지간에도 분명한 선을 그어 부정부패를 멀리한 사례하며 죽거든 화장하여 묘 만들지 말고 재를 조국의 남,북 산야에 뿌려 없애 달라 했던 유언, 그리고 그가 죽기 전까지 살아왔던 13평 남짓의 생가, 1식3찬 손수 지어 먹었던 주방, 어린아이 한 몸 자리 누울만한 나무침대, 그리고 즐겨 쓰던 메모지와 필기구 등을 보면서 통일시대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 같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도하면 득남한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한 기둥 사원>을 보며 “아버지 저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세계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역사를 보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일행은 호치민 광장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후 춘하추동이란식당에서 돌솥 밥을 시켜 먹고 라텍스 상가에 들러 베개, 침대, 방석 등의 제품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캄보디아로 출국하기 위해 베트남의 <누이바이공항>에 일행을 태운 버스가 도착한 시간은 19:40분 이었다. 일행은 급히 서둘러 출국 수속과 간단한 출국심사를 마친 후 비행기에 탑승, 21:15분에 누이바이공항을 출발, 1시간10분이 지난 22:25분에 캄보디아 <씨엠립공항>에 도착하였다. 캄보디아 입국심사를 마치고 화물 여행 가방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오니 23:00시, 예나 다름없이 여행사 버스와 캄보디아 안내를 맡을 새로운 가이드가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어 피곤함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일행은 새로운 버스를 타고 북부 시아모니의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 식당에 들러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앙콜센츄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피곤함에 지처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도 여행관련 기록을 간단히 정리한 후 따뜻한 물을 받아 몸을 담그니 잠이 나도 몰래 도둑처럼 몰려와 재빠르게 침대위에 몸을 던졌다.
오늘은 여행 4일차 08:30모닝콜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기도에 이어 샤워를 한 후 어젯밤 정리 하지 못했던 여행 가방을 정리하고 1층 호텔 레스토랑에 내려가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시간이 늦어 간단하게
토마토와 우유, 계란, 토스토로 식사를 한 후 룸에 올라가 긴팔 셔츠에 콤보 바지를 입고 카메라와 주요 소지품을 챙겨 프론트에 내려오니 버스가 곧 출발 하려고 하고 있었다. 버스에 타자마자 가이드 임영채씨는 인사와 함께 캄보디아 왕국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 시작하였다.
캄보디아 국토면적은 남한의 약2배에 달하고 수도는 프놈펜이며 2004년에야 내전이 종료된 나라로 일명 <킬링필드> 죽음의 땅이라 불리어진 나라이나 자원이 풍부하고 (최근 석유 생산국) 자연식 무 농약으로 유명하며 훈센총리가 2001년 방한하여 2030년까지 쌀 생산지로 임대계약까지 체결한 나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상호 우호적인 국가>라 하였다. 기후는 우기(3~10월)와 건기(11~3월)로 나뉘며 가장 더운 달은 4월로 최고기온 섭씨43도까지 올라가고 가장 추운 달은 최저섭씨15도까지 내려가는 곳으로 우리나라가 2월 가장 추울 때 이곳은 초여름 날씨에 해당 되어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관광을 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의 성격도 온화하여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소의 나라>로 불렸다 하였다.
90년대 들어 서로 총부리를 겨눠 왔던 정치세력들이 UN 감독 하에 1993년 5월 총선을 거쳐 신정부를 구성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비동맹 중립외교 노선을 표방하는, 친 서방 외교를 중시하는 나라로서 우리나라와는 농업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친교를 맺고 있는 나라라 하였다.
종교는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어 있으나 1975년에서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루즈 군에 의한 3000 여개의 사원파괴와 8만 여명의 승려가 살해당한 아픔을 지니고 있다 하였으며 소수 민족은 흰두교와 이스람교를 믿고 있는가하면 프랑스지배의 영향으로 지식층은 기독교를 믿는 등, 종교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는 나라라고 설명해 주었다.
민족 구성은 90%가 크메르인이며 중국계, 베트남계, 참 무슬림 등 10%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국민의 80%가 1차 산업인 농업, 임업, 산림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일행이 가이드의 캄보디아에 관한 해설을 귀담아 듣는 사이 10:50분 <씨엠립>의 앙코르 와트에 도착하여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렸다. 앙코르 왕국은 <후남국> 당시 이곳에 살던 뱀 신과 인도왕자가 결혼하여 살면서 건설한 왕국이라 전해지며 캄보디아의 네 번째 큰 도시인 씨엠립이 1860년 프랑스의 “앙리무오”가 발견할 때까지 화려 했던 유적들이 정글 속에 간직한 채 버려져 있을 정도였으니 변변한 역사기록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 과거 중국의 “주달본”이라 하는 학자가 쓴 <길라출품기>를 현재 캄보디아 역사서로서 대용할 수밖에 없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에 의하면 9~15세기초반 까지 앙코르 제국의 수도로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중앙에 있다하여 우주의 중심으로 믿어졌던 도시였었는데 그 화려했던 모습이 현재의 모습이라니 힘 없는 민족의 <패망역사>의 무상함과 허무함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처음 찾은 <앙코르 와트> 사원은 다른 사원들이 동쪽을 향해 있는 반면 서쪽을 향해 있어 발견 초기에는 “죽음의 사원”이라 불려 지기도 했으나 그 후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천문대 역할을 했음이 밝혀져 우주의 변화를 표현한 사원이었음을 알게 된 사원이라 했다. 현재는 “세계7대 불가사의”로 알려져 있는 이사원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그 값짐을 더해 주고 있었다. 세계적인 석조건물인 <앙코르 와트>은 그 웅장함이나 건축물 자체에서 풍기는 신비함 못지않게 세부적인 조각의 아름다움이 전체를 역어 나갔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였다.
우리는 500년 이상 된 보리수나무 그늘아래에서 음료수 등으로 목을 축이고 머리가 7개 달린 뱀 신을 상징하는 교각의 다리를 건너 1억3천6백만 흰두교 신 중 최고의 신인 <인드라>신을 모신 출입문 입구 쪽으로 향해 갔다.
다리 양쪽에는 원추형의 모자를 쓴 신과 투구를 쓴 악마가 머리 7개 달린 “나가”라는 뱀을 잡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도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67m의 최고높이인 주 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난 문과 이에 연결된 다리를 건너는 구조로 되어 있는 앙코르 입구 탑에는 각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4개의 거인 얼굴상이 있고 그 밑으로는 각 방향으로 인드라 신의 좌상이 머리가 3개인 3m높이의 코끼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웅장한 모습에 과거 탑 조성시의 기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댈 수밖에 없었다.
중심 탑에 오르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중앙 문을 중심으로 좌, 우측문과 쪽문 등, 네 개의 문을 이용해야 하는데 중앙문은 왕이 사용하고 좌, 우측문은 신하와 관료들이, 그리고 쪽문은 일반인, 노예, 우마차 가 이용하는 문 이었다한다. 나는 잠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야자열매 음료로 목을 축이고 간단한 튀김요리를 먹은 후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여기저기 허름한 옷에 까무잡잡한 피부색의 어른과 아이들이 기념품을 하나라도 팔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네들 보다 얼마나 행복한가. 멀리 이국땅에 관광 여행까지 왔으니 하면서 진심으로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 나는 익산 문화 지킴이 이신 한미화씨와 동행하면서 사진촬영을 서로 부탁하면서 중앙 탑의 상부까지 인위적으로 만든 목재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갔다. 내가 오른 탑은 가이드 말에 의하면 1개월 동안에 7일에 한하여 3층까지 올라 갈 수 있다고 하였는데 나는 다행이 오늘 오를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면서 넓은 내부 정상 곳곳 까지 살펴보니 힘들면서도 한결 기분이 좋았다. 어느 한 곳도 이를 축조한 예술적 섬세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건축기술에 연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성내를 모두 살펴보는 동안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아 더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체 서둘러 계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사원의 1면의 길이가 3km이니 사방 12km에 달하는 하나의 큰 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문> 까지 둘러본 일행은 성을 빠져나온 후 일명 “똑똑이”라 하는 인력거를 타고 성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나와 문화 원장님이 한 조가 되어 쌍발 인력거를 타고 시내를 지나 앙코르와트 주변 비포장도로를 따라 둘러보게 되었는데 일행을 태운 도로는 메말라 황토먼지가 뿌옇게 날리기도 하고 바람이 일어 모자가 날라 갈까 봐 조심스럽기도 하였다. <앙코르 톰>의 중앙에 위치한 <바욘 사원>은 200여개의 부조로 만들어 지고 54개의 탑들로 이루어져 있어 당시 화려한 생활상과 전투장면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게 하는 매우 인상 깊은 사원임을 알 수 있었다. 특히나 크메르의 미소라 불리는 조각상 앞에서 웃는 얼굴 모습으로 보이는지, 비웃는 얼굴로 보이는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그 보이는 모습자체가 자기 마음이란 이야기를 들으니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를 생각하면서 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면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코끼리테라스>는 높이3m, 길이300m,연단으로 5개의 계단을 통해서 올라 가도록 되어 있었다. 각종 축제나 군사행렬의 사열 장으로 사용 되었고 왕이 등장하여 위치했던 곳에는 코끼리 조각상이 아닌 가루다와 사자 상들이 받치고 있었으며 승리의 문과 왕의 출입문이 일직선상으로 형성되어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앙코르 톰>과 <남문>, <바욘 사원>, <코끼리테라스>를 완성한 왕은 자신이 왕이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타 프롬 사원>은 다른 사원과는 달리 수도원이 강화되어 있는 사원으로 보수를 하지 않아 자연 상태 그대로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곧게 뻗은 “이엥”나무가 사원의 벽과 기둥을 휘감고 있었고, 뒤엉킨 뿌리가 자라 사원까지 들어 올리고 있는 “스펑”나무가 울창하다 못해 웅장하고 신기할 정도로 사원 대리석들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는 나는 오랫동안 잊혀 져 있던 문명의 흔적을 탐험하는 느낌까지도 들게 하였다. 허물어져 가고 있는 모습들을 보아온 나는 이곳이 세계 유네스코 유적지로 등제된 이상 빠른 기간 내에 충분한 보수를 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세계유산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캄보디아를 쳐들어온 월남이 4년을 지배하고 왕의 군대가 이를 물리쳤으나 그 후 태국이 다시 쳐들어와 100년을, 프랑스가 쳐들어와 1934년까지 지배를 당함으로서 캄보디아인은 동, 서, 남, 북으로 와해 분산되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고통과 핍박 속에 살아 왔기에 그들은 이곳을 <악마의 도시>, <죽음의 도시>, <저주 받은 도시>로 불렀을까? 39개 사원만이 복원된 지금에야 “자연 앞에 신은 없었다”, “신은 위대하다” 각기 다르게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처지임을 알고 있는지라 나는 마음속으로 “이네들이 지금이라도 과거를 반성하고 왕성하고 부강했던 왕조를 다시 만들어 희망찬 국가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할 뿐 이었다.
일행은 동양 최대의 호수인 <톤레삽> 호수까지 타고 왔던 버스로 다시 이동하여 선착장에 대기 중인 유람선을 타고 넓디넓은 호수와 황토색 물을 보며 선상에서 살아가는 수상족의 생활모습을 볼 수 있었고 우리가 탄 유람선 가까이 따라 오며 팔찌 등 조그마한 기념품을 사 달라 조르는 까무잡잡한 가엽게 보이는 어린아이들을 보기도 하였다. 이 중에는 몸과 목에 자기보다 더 큰 뱀을 칭칭 감고 “1불, 1불만....”하며 구걸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의 압박 속에서, 그리고 한국 전쟁이후 비참했던 과거가 떠올라 그 어린 아이들에게 준비 해 갔던 1불짜리 지폐를 모두 나누어 주었다. 동정이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준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선상에서 아내에게 선물할 스카프도 사주고 과일도 사서 일행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우리는 선상에서 판매하는 요리들로 점심 식사를 하였고 선착장으로 돌아 오는 동안 못다 찍은 사진을 촬영하면서 내 눈으로 보아온 모든 것들을 오랫동안 지우지 않으리라 다짐도 해 보았다.
버스에 옮겨 탄 일행은 캄보디아의 내전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을 봉안하고 있는 “새사원”이라 칭하는 <왓 트마이>로 향했다. 프놈펜의 킬링필드를 보지 못한 일행은 이곳에 들러 캄보디아의 아픈 과거를 느껴보고자 한 것이다. 도착해 보니 이곳에는 캄보디아의 최대 사찰답게 대웅전 안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고 대웅전 정면 앞에는 크나큰 황금색 “와불”이 누워져 있었으며 “완납”이라 부르는 중학교가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영어로 사찰 내에 왠 학교가 있느냐고 물으니 이 학교는 사찰 승려가 운영하는 남녀공학 중학교라 하였다. 공부는 승려님들께서 가르쳐 준다 하였다. 또한 남자는 국방의무가 없고 남자 18세 성년이 되면 무조건 3개월 이상 승려학교를 수료해야하며 곳곳에 산재해 있는 사원에서 승려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마을까지 관리하는 대승불교 문화생활권 임을 알 수 있었다. 불상이 안치 되어 있는 학교 내부를 둘러본 나는 운동장 중앙부에 1면이 두터운 유리로 만들어진 원두막 형 막사에 수 백 개의 유골을 차곡차곡 정렬해놓은 유골 보관소를 보면서 그네들의 참혹상을 실제 보는듯하여 이들의 영혼을 달래어 주십사 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빌었다. 18:00 사찰 관람을 마친 일행은 <샬트>재래시장에 들러 우리나라 자판 식 재래시장과 유사한 시장 풍경을 보면서 이곳에서의 순금은 97.5%가 순금으로 정해져 있음도 알게 되었다. 프놈펜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도로를 따라 숙소인 호텔로 돌아와 여장을 풀은 후 석식을 하고 룸에 돌아온 나는 내일이 여행 마지막 일정임을 생각하면서 가방을 정리하고 내일 입을 옷가지와 휴대품을 별도로 챙겨 놓은 후 여행 후기를 정리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샤워 후 꾸려진 가방과 휴대품을 재차 확인한 후 아침 식사를 1층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하였다. 일찍 식사를 마친 일행 몇 분은 가방들을 가지고 프론트로 내려와 버스에 짐을 싣고 있었다. 나도 급히 서둘러야겠다는 마음으로 룸에 올라가 꾸려진 가방을 챙겨 가지고 내려 왔다. 체크아웃을 한 후 버스하단에 짐을 넣고서야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일행 전체가 승차하자 가이드는 금일 일정에 대하여 말해 주었다. 오늘은 <사라>호수 주변 경관을 구경하고 그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물건을 팔며 한국노래 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재래시장 한 곳과 상황버섯 판매장을 들린 후 쇼핑매장에서 기념품을 구입하며 석식은 한식 전문 식당에서 <스끼>를 먹고 <씨엠립>국제공항으로 이동, 내일 새벽 02:30분에 출발하는 BALTIC항공사의 K9 103 비행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를 것이라 했다.
일행은 10:00경 <사라> 호수에 도착, 주변구경을 한 후 제방에 지어진 햇빛이 가려진 움집 같은 곳에 가이드가 구입하여 준비한 망고를 맛있게 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 다섯 살부터 열한 살 또래의 남녀 아이들이 6~7명씩 모여 “만남” 등의 유행가와 한국 동요를 부르는데 우리 한국의 어린이들보다 더 잘 부르는 것 같아 그들이 가지고 판매하는 물건들을 하나씩은 사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보는 재래시장은 그런대로 흥미 있는 구경꺼리를 제공해 주었고 상황버섯 매장에 들리니 그곳에는 캄보디아에서만 볼 수 있는 신이 내려준 나무인 400~600년간 자연에서 자라온 뽕나무에 서 채취한 300~450년산 상황버섯을 볼 수가 있었다.
마침 매장 주인이 한국의 전주가 고향이라 하면서 특별히 45%활인하여 주겠다하여 일행 중 많은 분이 구입하였고 나는 상황버섯으로 담근 술 한 잔과 차 한 잔을 시음해 보기만 하고 사지는 않았다.
쇼핑 매장에 들려서는 실크 목도리 하나와 비염 약, 모기물린데 바르는 약 등을 사는 것으로 만족 해 했다. 우리는 가이드가 안내하는 한식 전문 식당에 들어가 <스끼>를 먹은 후 귀국하기 위해 <씨엠립>공항으로 출발 하였다.
24:00에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수화물 탁송부터 한 후 출국신고와 공항내의 면세점을 구경도하고 물건도 사고 하다가 정해진 게이트의 출국 검사를 받은 뒤 02:15분 비행기에 탑승, 02:30분 <씨엠립국제공항>을 이륙하였다. 나는 피곤함과 안도감이 겹쳐 비행기가 이륙 후 곧장 몰려오는 잠을 청하여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 글을 통하여 여행이 무사히 끝나는 순간까지 여행길에 리더로서 역할을 해 주시고 2차에 걸쳐 통일 특강까지 해 주신 김복현 문화원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여행을 통한 통일의 중요성과 힘없는 약소국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어떠한 활동을 통하여 국민 모두에게 통일 의식을 심어주고 남북한 통일을 앞당기게 할 것인가 또한 통일 후는 어떻게 대비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산지식을 충분히 보고 느끼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감히 졸필을 놓습니다. 끝으로 가이드 본인 집까지 안내하여 성공한 모습을 보여 줬던 임영채 선생님과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임영채씨 아내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해 주신 이영희 세화관광 여행사 사장님께도 삼가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2012년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을 마치고 전근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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