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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회 거문도 조계산 등산
1.일시
2005. 7.16~7.17
2. 참석 팀
7팀 14명
향산회는 제헌절을 전후해서 백도여행을 계획 하였나보다 전번 북한산 산행 때 요산요수님 께서 향산회 백도 여행에 함께하자고 한다 백도는 지난 2003년 7월15일 휴가 때 갔으나 그때는 여행객들이 없어 거문도에서 1박하고 돌아온 기억이 난다 그 기억으로는 별로 좋은 곳은 못 된다 일단 향산회와 같이 하기로 하고 일정을 잡았다 백도 보다는 조계산에 비중을 두고 준비에 들어갔다
매년 보면 7월17일 제헌절을 전후해서 비가 왔기 때문에 이번 에도 백도까지 갈까 의구심을 갖고 뚝곰과 나는 여수발 야간열차를 이용 여수에 아침 5시경 도착했다 백도로 떠나는 배는 07시40경 출발하는 배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배시간과 일행들을 기다리기 위해 여객터미널 부근 수산시장 등을 둘려보고 한참 기다리니 향산회 일행들이 도착한다
도착한 회원들은 가져온 아침거리로 식사가 한참이다 아침 식사는 자칭 오리엄마라고 부르는 오리엄마께서 모신잎 송편과 고구마 무근김치 등 푸짐하게 장만해 오셨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 있는데 빗방울이 한방울씩 떨러지고 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빗방울은 굴거지고 있다 배시간을 기다리고 있자니 안내 방송이 나온다 해상에 안개 때문에 배가 못뜨고 있으니 조금기다리라는 방송이다 어쩐지 오늘도 백도 구경은 못하지 안나하는 의구심이 머리에 스치고 지나간다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 승선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방송에 따라 우리 모두는 배에 승선 거문도로 출발하고 있다
거문도에 도착하니 2년전에 와보왔던 그대로다 거문도란 이름은 구한말에 생겼다. 거문도(巨文島)란 학문이 크다는 뜻으로 청나라의 해군제독 정여창이 이곳에 들렀을 때 거문도 사람들의 학식이 높은 것에 감탄해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는 거문도에 도착하자마자 백도 유람선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또 안내 방송이 나온다 오늘 안개 때문에 오후 1경에 유람선이 출항할 거라고 어쩐지 오늘도 백도 구경은 물건너간 것 같다
우리 일행은 우선 영국군 묘지를 관람하기로 하고 영국군 묘지를 향해 출발 했다 영국군 묘로 가는 길에 섬 특유의 자연 환경이 우리를 반긴다 거문도의 자연환경은 매우 아름답고 온화한 기후조건으로 육지에서 보지 못한 나무와 풀들이 자연 경관을 이루고 있다 거문도의 봄은 유난히 따뜻하며 여름철 중국 해안의 혹서와 살인적인 열기에 비하면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은 정말 매혹적이라 할 수 있다 섬의 규모로 보아 옛날에는 많은 인구가 거주하였을 텐데 빈집터와 빈공가가 여기저기 흩터져 있어 삭막하기만 하다 이따금식 보이는 노인네들뿐이다 영국군 막사자리였던 초등학교도 초라하기 그지없고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영국군 묘가 있다
영국군 묘는 조선시대 갑신정변(1884년) 이후 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에선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여 청·일 양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러시아도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조선 진출에 적극적 이었다 그런데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군이 러시아의 남방 진출을 막는다는 구실로 그해 3월 선제공격을 감행, 거문도를 점령했다. 거문도는 여수와 제주를 잇는 바닷길의 중간에 있어서 러시아 동양함대가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결국 조선을 제외한 러시아·청·영 3국이 교섭을 벌여 영국은 러시아는 조선의 어떠한 영토도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1887년 2월 영국함대를 철수시켰다 .
영국의 거문도 점령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유물로서 거문리의 동남쪽 산자락에 영국군 묘가위치 하고 있다. 영국군은 23개월간 머물면서 거문도 주민들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일을 시키는 대신 먹을 것과 옷가지 등을 주었으며 궁핍했던 당시의 섬사람들은 풍요로운 서양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거문도 초등학교 자리가 영국군 막사였으며 영국군 45,000여명이 다녀갔고 병원 방파제 서도에 목장 등이 있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영국군 묘지는 7~9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2기만이 확인될 뿐이며 남아있는 2기는 거문리 뒷편 산령에 있다. 당시 영국군은 해군 제독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거문도를 ‘포트해밀턴’이라고 명명했으며 1998년 초에도 영국인들이 방한 영국해군을 위해 이곳에서 제를 지냈고 지금도 거문도를 찾는 영국인 관광객들은 꼭 이곳을 방문한다.
우리는 영국군 묘를 둘려보고 그 유명한 거문도 은갈치회로 점심을 마쳤다 점심을 마친 우리는 백도 유람선 출항을 기다리니 안개가 거치지 않았다며 오늘은 유람선이 가지 않는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백도는 어쩌면 나같은 재수 없는 놈은 평생 구경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행은 백도 구경을 포기하기 다시 여수로 향하는 배에 올라 여수로 향하고 있다 취기도 있고 해서 배 후갑판에 나가보니 시원하고 좋다 여수에 도착 여수에서 제일 유명한 서더리 회에 곁들인 탁주에 그야말로 별미의 저넉밥을 먹고 순천 조계산 입구 숙소로 돌아왔다 이것으로서 거문도 백도 여행을 무사히 끝마치고 내일 일정인 조계산을 등산하기 위해 모두들 지친몸으로 꿈나라를 향해 취침에 들어갔다
둘째 날 우리는 조계산을 등산하기 위해 간단한 아침으로 때우고 조계산 등산에 들어갔다 조계산 등산은 선암사를 거처야 하는데 선암사로 가는 길은 조계산 전체에 고루 드리운 짙은 나무그늘로 인해 늘 상쾌하다. 마음속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 줄 듯 맑게 흐르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숲길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다채로울 뿐 아니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어서 더욱 좋다. 절 앞의 여관 촌에서 부터 이 기분 좋은 숲길을 따라 약 15분가량 오르니 오른편 길섶으로 하늘을 찌를 듯 장대한 측백나무로 둘러싸인 부도 밭이 나온다. 부도 11기와 비석 8기가 줄지어 있는데, 부도는 대부분 팔각원당형이다. 그중에는 사사자가 삼층석탑을 지고 있는 이형부도 한 기도 있다. 이 부도는 부도 밭에 함께 있는 벽파대선사비(높이 3.75m)와 같은 시기인 1928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산대사 부도(높이 4.1m)로,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전남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8호, 8세기 중엽 작품)이나 충북 제천 빈신사터사사자석탑(보물 제94호, 1022년 작품)을 닮았다.
부도 밭을 지나 계속 가면 길가에 장승 한 쌍이 서 있는데 특이하게도 남녀상이 아니라 모두 남자상이다.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갑진년(1904) 선암사 나무장승 이후 정묘년(1987)에 새롭게 세워진 나무장승이다. 갑진년 나무장승은 1907년 이래 70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킨 국내 최고의 나무장승이었다. 보통 나무장승은 10년 정도 지나면 썩어버리는데, 이 장승은 조직이 치밀한 밤나무로 만들어져 쉽게 썩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사찰 수호업무에서 퇴직하여 경내의 설선당으로 옮겨져 보호받고 있다. 정묘년 장승 역시 밤나무로 만들어졌으며 전체적으로 갑진년 나무장승을 모방했다. 몸통은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淨界)*라는 글씨가 씌어 있다. 방생정계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몸통까지 늘어뜨리고, 호법선신 장승은 세 갈래의 수염을 동그랗게 꼬았다. 눈꼬리를 치켜뜬 채 근엄하면서도 정겨운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각솜씨나 들인 공은 갑진년 나무장승에 미치지 못한다. 때문에 정묘년 나무장승은 갑진년 장승에 견주어 세인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형편이다. 본래 나무장승은 세월이 지나면 교체되게 마련인데도, 갑진년 나무장승의 명성이 너무 높아 정묘년 나무장승이 모조품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가련한 정묘년 장승을 지나 계속 큰길로 걸어 올라가면 왼편에 계곡을 가로지르는 작은 무지개다리가 나타난다. 이 다리를 건너 모퉁이 길을 따라 돌면 반원형의 큰 무지개다리가 나오고, 이 다리를 밟고 건너면 길은 강선루(降仙樓)로 향한다. 두 무지개다리 중 큰 무지개다리가 보물 제400호로 지정된 승선교(昇仙橋)이다. 두 무지개다리는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 축조방법이나 겉모습에는 차이가 없다. 큰 무지개다리는 길이 14m 높이 7m 너비 3.5m로, 길게 다듬은 30여 개의 장대석을 연결하여 홍예석을 드리우고 홍예석 양쪽에 잡석을 쌓아 계곡 양쪽 기슭의 흙길에 연결시켰으며, 위쪽에는 흙을 덮어 길을 만들었다. 기단부는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홍수에 쓸릴 염려가 없도록 하였으며, 홍예석 중간에는 이무기 돌을 돌출시켜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재해를 막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승선교는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축조했으며, 순조 25년(1825) 해붕 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영조 5년(1729)에 놓은 보성 벌교의 홍예(보물 제304호)도 선암사 스님들의 솜씨라고 전해온다.
작은 무지개다리에서 큰 무지개다리로 이어져 강선루에 이르는 길은 강선루로 직접 통하는 큰길이 생기기 전 선암사에 이르던 옛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야 비로소 반원형의 승선교가 물에 비치어 완전한 원형을 이루며, 강선루가 이 원 안에 들어앉은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선암사, 승선교, 강선루……. 그러고 보면 선암사는 선녀와 단단한 줄이 닿아 있는 게 틀림없는 듯하다. 이름에서부터 선녀가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선경이 떠올려지고, 그 이미지가 풍경으로 되살아난 듯하여 신비롭다.
강선루는 누하 정면 1칸 측면 1칸이지만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2층 팔작지붕집이다.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며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선루에서 뒤를 돌아보면 굽어 흐르는 계곡물 사이로 두 다리가 크고 작게 잇달아 있어 더 운치 있다. 강선루에 올라 둘러보는 경치가 더 멋지지만 오르지 못하도록 문이 잠겨 있어 아쉽다.
강선루에서 한 모롱이를 돌면 오른쪽 길섶으로 비껴나 있는 연못을 만난다. 길다란 타원형의 못 가운데에 알 모양의 섬이 있는 특이한 모습의 삼인당(三印塘)이다. 연못의 독특한 모습은 멋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형태 안에 심오한 불교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도선국사가 만들었다고 하지만 증명하기는 어렵고, 고려 의종 원년(1147) 낙성한 「대각국사중창건도기」(大覺國師重創建圖記)에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그후에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에 새롭게 단장되었다.
이밖에 선암사 경내의 연못으로는 설선당 서쪽의 쌍지(雙池)와, 삼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 축대 아래에 조그맣게 만들어진 방지(方池)가 있다. 쌍지는 중앙에 통로가 있어 건너다닐 수 있으며, 방지 옆에는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200년 된 적송 한 그루가 있다. 일주문 못미처 왼편으로는 방지와 쌍지에 고여 있다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물은 인공수로를 따라 삼인당으로 흘러든다.
삼인당에서 일주문으로 오르는 모롱이에는 짙은 녹음과 어울린 야생 차밭이 펼쳐져 있으며, 중간중간 어느 부도비의 잔재인 듯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측백나무, 전나무와 같은 키큰 나무들 아래 나직하게 자리 잡은 이 차밭 말고도 경내 뒤편에는 더 큰 차밭이 있는데, 선암사의 차는 다인들 사이에서 맛과 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일주문 앞에 도착하니 먼저간 우리 일행들이 사진촬영에 한참이다 나는 승선교와 강선루 삼인당 연못을 보느라 조금 늦게 도착 했다 나도 사진을 찍을려 하니 카메라가 말을 듣지 않고 있다 나중에 집에 와서 안 일이지만 카메라 메모리가 부족해서 그랬다 한다 아무튼 카메라 때문에 선암사을 보는데 노치는 부분이 많았다
선암사 경내에 들어서니 어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대웅전 등 굉장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선암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건물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 정방형을 이루는 몸체에 중앙 한 칸만 합각지붕을 내밀어 전체적으로 丁자형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내부도 특이하여 보가 없는 무량 구조이며, 불단이 설치된 중앙 세 면에 벽을 두르고 문을 달아 마치 집 속에 또 하나의 집을 지어놓은 것 같다. 건물 정면 어칸의 창호는 화려한 꽃창호이며, 꽃창호 아래쪽 청판에는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 찧고 있는 달나라 토끼 두 마리와 파랑새를 장식해놓아 눈길을 끈다.
또한 원통전은 조선 현종 원년(1660)에 초창하여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중수하였으며, 순조 24년(1824)에 재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숙종 때 호암대사가 선암사를 중창 불사할 때의 일이다. 호암대사가 중창 불사를 위해 대장군봉의 배바위*에서 기도하였으나, 효험이 없자 바위 밑으로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코끼리를 탄 여인이 하늘에서 내려와 보자기로 호암대사를 받아 다시 배바위 위에 올려놓으면서 "떨어지면 죽는 것인데, 어찌 무모한 짓을 하는가?"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인 것을 뒤늦게 깨달은 호암대사는 친견한 관세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丁자각 형태의 원통전을 짓고 이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조 후사가 없던 정조는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순조이다. 순조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데 보답한다는 뜻으로 선암사에 ‘큰 복의 밭’이라는 의미의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지금도 원통전에 걸려 있다. 후에 다시 천(天)과 인(人)자를 한 자씩 더 써주었다고 하는데, 두 글자의 편액은 선암사에서 따로이 보관하고 있다. 원통전의 뒤켠에서 왼쪽으로 비켜난 곳에 각종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짜리 팔작지붕집인 장경각에서는 특히 돌계단 소맷돌 부분에 조각된 해태와 사자상이 눈여겨볼 만하다
이외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 395호),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보물과 지방 문화재도 수두룩하다. 등산로 위쪽 해우소(화장실)는 CF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벽 없이 좌우로 남녀로 나눠져 있는 내부도 재미있다 한다 문없이 어른 허리높이만한 작은 칸막이로 각 화장실이 설치돼 있어 일어선 상태에선 건너편 쪽 여성 또는 남성들의 엉거추춤한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온다고 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해후소를 찾지 못했다
송광사가 우리 불교계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근본 사찰이라면 선암사는 조계종 다음으로 큰 교세를 가진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산사’의 모범답안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데 그중에서도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고려 중기 선암사의 모습은 적막한 산골 속에 자리한 엄숙한 예배처 였다. "적적한 산골 속 절이요, 쓸쓸한 숲 아래의 중일세. 마음속 티끌은 온통 씻어 떨어뜨렸고, 지혜의 물은 맑고 용하기도 하네"라고 읊은 김극기(金克己: 고려 명종 때의 문신)의 시구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선암사는 이러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 도선이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두 가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신라에 한창 불법을 전하던 아도화상이 어느새 이웃나라인 백제까지 와서 절을 지어주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엄연히 실재하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통일신라 말에 도선이 창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선암사는 선종 9년(1092)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된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 출가한 뒤 국내외 여러 종파의 불교사상을 두루 익혀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선암사를 중창할 때 의천은 대각암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선암사가 자리잡은 조계산은 불교 개혁의 산실이 된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한 송광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기존의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를 내세우는 개혁불교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이웃한 선암사가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지는 관련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송광사가 사세를 떨침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리학을 정치, 교육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 왕조가 억불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 조선 전기는 사찰들이 대단히 어려웠던 시기로 선암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후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거의 불타버리다시피 한 이후 부분적으로 조금씩 중수되다가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 약휴(1664∼1738)*에 의해 크게 중건되었는데 당시 선암사는 ‘교학의 연원’이라 할 만큼 교학이 융성하였다. 이후에도 선암사는 크고 작은 화재를 만나 여러 차례 중창 불사되었다.
영조 35년(1759) 봄 또다시 화재를 당해 계특대사가 중창 불사를 하였는데, 화재 발생이 산강수약(山强水弱)한 선암사의 지세 때문이라 하여 화재 예방을 위해 영조 37년(1761)에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으로, 절 이름을 해천사(海泉寺)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순조 23년(1823)에 다시 화재가 일어나자 해붕, 눌암, 익종 스님이 지휘하여 대대적으로 중창 불사를 하였으며, 이후 옛모습을 되찾아 산 이름과 절 이름을 조계산과 선암사로 원위치하였다. 현존하는 선암사의 건물 대부분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전각 60여 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의 피해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고 지금은 20여 동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선암사를 뒤로하고 조계산을 등산하기 위해 산에 오르고 있다 왼쪽 길로 조금 가면 순천산악회가 세운 팻말이 나온다. 이 팻말을 따라 50m 가면 길이 나뉜다. '←비로암, 장군봉→' 팻말이 선 이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비로암에 이어 작은굴목재로 올라서며, 우측이 장군봉으로 직등하는 길이다.
우측 길은 대각암 옆의 가늘고 긴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지나 서서히 능선 사면으로 붙는다. 길은 넓고 뚜렷하며 경사가 급한 곳에는 철도 침목 같은 목재로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대각암을 떠난지 30분 오르니 어제 먹은 술 때문인지 도무지 못가겠다 평소에 나지 않는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정말 죽을 지경이다 옆에 일행들을 보니 모두 괸찬아 보인다 어제 저넉 똑 같이 술을 먹은 것 같은데 나중에 알아보니 뚝곰은 먹는 채만 했다 한다
한참 오르니 작은 공터에 다다른다. 공터에 올라서자마자 눈앞에 높직한 축대가 바라뵈는데, 이곳도 과거엔 작은 암자라도 있었던 곳 같다. 이후 길은 왼쪽으로 주욱 산사면을 가로질러 나아간다 작은 공터 이후 30분쯤 지난 뒤 아까보다 훨씬 넓은 옛 절터에 다다른다. 작은 돌담 잔해와 수많은 기와 편이 경사면과 경계를 이룬 석축 위에 즐비한 곳이다. 굵은 노거수들이 그늘을 드리워주는 이곳은 거의 모든 등산객들이 쉬어가는 쉼터로, 조망이 트이는 쪽에는 자연석으로 간이 식탁을 만들어두기도 했다. 정상쪽 계단길목 바로 옆에는 바가지가 놓인 샘터가 있다 좔좔 나오는 샘물의 맛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샘 바로 옆에 고추나무라고 표시 말이 붙은 고추나무가 있다 이 고추나무를 뚝곰 사모께서 흔들어 덴다 나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너무 세게 흔들어서인가
절터 이후 꾸준히 20분쯤 오르니 이윽고 정상이다. 정상에는 '장군봉 884m'라 쓰인 높이 50cm쯤 되는 검은 돌비석이 서 있다. 정상은 비록 두루뭉실한 토산 둔덕 같지만 남쪽과 서쪽으로는 숲이 없어 조망이 시원스럽다. 정상에서는 4가닥의 등산로가 갈라져 나가고 있다. 북쪽의 접치 방면, 남쪽 선암사굴목재쪽, 동쪽으로 방금 올라온 대각암쪽, 그리고 소장군봉쪽 길이 그것이다. 이중 소장군봉 길은 통행이 별로 많지 않아 족적이 희미하며, 안내 팻말도 붙어 있지 않다. 정상 안내팻말엔 '장박골 1.8km, 선암사 2.7km, 작은굴목재 0.8km, 큰굴목재 1.8km'로 씌어 있다. 정상에는 경상도 쪽에서 온 산악회가 회원들과 함께 시끌스럽게 떠들고 있다 오늘이 제헌절이라고 애국가 까지 해덴다
우린 정상에서 간단한 빵으로 잠시 쉬었다가 선암사 굴목재로 하산하고 있다 가파른 경사로 다소 급한 길을 따라 내려가노니 평탄한 능선길이다 우리 일행은 아무 말 없이 한줄 종대로 굴목이재를 향하고 있다 굴목이재에서 잠시 쉬었다가 선암사로 하산했다
거문도와 백도 그리고 선암사 조계산 등산에 아낌없이 노력해 주신 향산회 회원님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7월20일
백두대간
첫댓글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여러 자료을 인용했습니다... 조금이나마 이번 여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이 등산하느라 고생하고 자료모아 글쓰느라 또 한번 고생 했네그려.
백두대간은 역시 카페지기야 ...수고했어...
선암사 박사가 되었네 그려. 잘 읽었습니다.
여행과 자료에 정성이 많이 들어있네 역시백두대간이여 그래도 조개산에는...
고추나무가 있어
고추나무 옆에 약수터도 있고~
고추나무를 흔드니 물이 떨어지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