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내린 영동지방의 폭설로 백두대간 마루금 길이 지워졌다 한다.
오늘밤 가야 할 대간길에는 아직도 눈이 적게는 30cm, 많은 곳은 1m 이상 쌓여 있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한다.
러셀(russell)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눈위에 첫 발자욱을 찍을 상상에 약간의 흥분을 느키며...
버스는 치악 휴게소에서 잠시 쉬더니만, 제천을 지나 영월 땅 오지 꼬부랑 길을 하염없이 올라간다.
버스의 흔들림과 산행에 대한 약간의 흥분으로 눈은 감고 있지만 잠은 달아났다
이번 구간에 있는 옥석산(1,244m)과 선달산(1,236m)은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태백산맥에서 소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징검다리 같은 산으로서,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동쪽의 태백산과
서족의 소백산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북쪽으로는 강원도의 오염되지 않은 영월땅 내리계곡과, 남쪽으로는 경북의 오지인 봉화,
영주고을... 부석사, 우리나라에서 수질이 가장 좋다는 오전약수 등이 있지만 접근성이 아직은 불편하다
3:30분 오늘 백두대간 들머리인 도래기재 도착...
달도 별도 보이지 않고, 랜턴 불빛에 의존하여 눈위에 첫 발자욱을 찍으면서 올라간다
러셀하는 산우님이 찍어 놓은 발자욱을 25명이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혹시 잘 못 밟으면 큰 일이라도 나듯이...
찍어놓은 발자욱 길을 따라... 그 길이, 맞는지 아닌지는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수령이 550년이나 되는 보호수 철쭉도 그냥 지난다
옥석산 정상까지는 된비알이 심한 구간이지만...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간다.
산 능선 마루금에는 칼바람이 간간히 불어 오지만 우수가 지난 뒤끝이라 매서움이 한결 누그러 졌다.
박달령까지의 내리막길은..
무릅까지 쌓인 눈을 헤집으면서 미끄럼도 타고,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면서... 눈위를 뒹굴듯이.... 날아 가듯이.... 가볍게 내 달린다.
몸은 늙어 가지만 마음은 동심이 된다.
꺄르르... 꺄르르... 산우님들이 내는 어린아이 웃음소리가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산속에 경쾌하게 울려퍼진다
한 시간 이상을 내려가 박달령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산우님들의 표정들이...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얼굴같이 순진하다..
날이 밝아오면서 러셀 하는 사람이 바뀐다.
롱 다리는 보폭이 길고 숏 다리는 조금 잛다.
뒤에 따라가는 산우들은 자기가 롱 다린지, 숏 다린지 관계없이 러셀한 사람의 보폭에 맞춘다
롱 다리가 찍어 놓은 눈위의 발자욱에 따라가는 숏다리가 다리를 힘껏 벌려 맞춘다.
저러다가 가랭이 찢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하면서..
숏다리가 러셀하면 종종걸음을 해야 한다. 찍어놓은 발자욱에 따라...
가끔은 반발심으로 자기 보폭으로 가는 산우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찍어놓은 발자욱 따라 말없이 그냥 간다
롱다라면 롱, 숏다리면 숏이 남긴 보폭에 맞추어...
다리는 있는대로 벌렸다가, 때로는 제자리 걸음 하듯이, 그래도 아무런 불평이 없다.
즐기면서, 흐느적 거리면서 맨뒤에서 따라간다. 25명이 잘 딱아 놓은 눈길을...
이런 날은 후미가 좋다..
아침식사후 내가 러셀할 때에는 보폭을 더 넓혔다.. 경쟁하듯이.. 누군가 보폭을 줄이란다
그냥 계속한다... 허벅지가 팽팽하다...
가야할 길들이 능선길이라 눈이 더 많이 쌓여 있는 것 같다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지만, 철쭉 등 잡목들의 가지 끝이 보이지 않은 깨끗한 곳이 길이라 짐작하고 눈속을 내 딛는다
뿌드득~ 쑤욱~
자전거 패달을 밟듯이 내 딛을 발을 가슴까지 올렸다가 눈 속으로 쑤욱 밀어 넣는다. 일단, 이단으로..
어떤곳은 복숭아 뼈 높이 까지, 어떤 곳은 허벅지까지 깊이 깊이 들어간다
끝없이 빠지는 곳은 바닥에 닿을 수 있는 깊이인지 아닌지, 조심~조심~ 약간의 두려움도 느끼며..
산 비탈길도 지나고, 아름다운 굵은 상수리 나무들 사이로도 지나고...
바위도 타고 넘고, 바람이 만들어 놓은 눈산은 가슴으로 밀고, 손으로 헤치면서 ...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
때로는 강아지 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때로는 고양이 걸음으로 살금살금,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서 앞 발을 휘휘 젓기도 하고...
평탄한 지형에서는 산짐승들이 남겨 놓은 발자욱들 처럼 눈위에 가벼운 흔적을 남기면서..
즐겁게 거침없이 내 달린다...
옛날 보았던 영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을 상상하면서......
산행속도가 평소보다 2배로 느리다..
이런 속도로 간다면 오늘은 목적지인 고치령까지 산행하기가 불가능하다.
산우들이 서로 상의하여 마구령까지만 가기로 한다.
러셀을 다른 산우에게 부탁하고 선달산 지나 늧은목이에서 뒤처지는 산우님들과 다시 후미그룹을 따라간다
늧은목이에서 목적지인 마구령까지는 약 5.9Km 남았다.
체력이 소진되어 가는 이때부터 목적지까지 산행은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나타난 남은 거리에 민감해지고, 500m가 얼마나 길고도 긴~ 거리인지 체득한다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다. 웃음도 사라지고, 표정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후미에서 산우님들이 마지막 5Km를 산행하는 뒷 발걸음을 보면 어느정도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
대간을 타지 않는 2주동안 무엇일 했는지 몸은 속이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고 나타낸다
2주동안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마루금에서 받은 정기를 열심히 일하는데 썼는지 아니면 아내에게 봉사하다가 무리했는지,
신랑을 괴롭혔는지 아닌지 금방 표시가 난다.
나는 안다... 누구가 어떤지를... 본인도 안다...
마구령에서 400m 남은 헬기장이 있는 산 정상에서 산행대장과 같이 뒤처진 산우들을 기다린다.
뒤처진 산우들에게 먹일 진통제.. 사과 1/4 쪽, 산행중 피로 회복에 특효인 사이다 한 병...
초라하기까지 하지만 이런 산중에는 이것이 최상의 준비다..
바람은 잠잠하고, 내려 쬐는 햇살이 따뜻하여 졸음이 몰려온다.
한 사람은 눈위에 앉아 졸고 있고, 나는 목이 빠져라 지나온 길을 보고 또 바라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하얀 눈 속에서 빨간것이 움직인다. 뒤처진 산우들이다
반가와서 소리처 본다.. 용기를 날려보낸다. 아자~ 아자~
마지막 모든 힘을 쏟으며, 헬기장에 올라서는 순간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감격이 몰아치는 산우님~~
그렇게 힘은 들었지만 즐거운 산행이었죠...
다음에도 오실거죠 ? 다짐 받으며 오늘 산행을 접을 쯤~
이렇게 아름다운 선달산을 눈속을 러셀하느라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키지 못한 아쉬움에...
선달산 북쪽 영월 땅 산자락에 묻혀있는 방랑시인 난고 김삿갓(김병연)이 선달산 일대를 둘러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영주 부석사에 남긴 시한 수를 옮겨본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수가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라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듯
우주간 내 한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었구나
11시간동안 눈길을 헤치면서, 여러가지 사연을 만들면서 넘어온 이번 구간은
잊지못할 아름다운 산행으로 기억될 것으로 확신하며... 끝
백두대간 무박산행(2010.2.19~20)을 다녀온 후
마바르
※ 마구령에서 차 태워주신 고마우신 분, 이글을 통해 다시 한번 더 감사 드립니다.
사모님과 부석사에는 잘 다녀 가셨는지요? 운행중에는 천당의 문턱도 함께 넘나들고...
사모님이 많이 놀라신 것 같으니 잘 보살펴 주세요.
그리고 같이 타고, 경험한 산우님들 괜찮으시죠... ㅎㅎㅎ
첫댓글 김삿갓 -부석사(浮石寺)-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백수가 된 오늘에야 安養樓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그림 같은 강산은 東南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천지는 부평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悤悤馬(풍진만사총총마)/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백년동안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가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