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철’을 보내며
2018년 6월 9일(토) 서울 시청 앞에서는 6.10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민족민주 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가 열렸다. 희생자들을 모신 제단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그는 1981년 우리와 함께 서울교대에 입학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1996년 6월 18일 KT의 노동자로서 구로고대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인생의 어느 한때를 같이 했지만 결국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이름은 오용철이다.
1981년 서울교대에 입학했던 약 140명의 남자 중에서 오용철은 가장 개성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인지 모른다. 1981년 대학입시는 여러모로 많은 변화 속에서 치러진 입시였다. 1981년은 입시제도의 대 전환기에 해당된다. 1981년은 마지막 대학예비고사가 치러졌지만 본고사가 폐지됨으로써 예비고사로만 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다. 1982학년도부터는 ‘학력고사’가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1981년은 1980년 계엄과 광주학살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의 제5공화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기도 하였다. 5공화국은 ‘졸업정원제’라는 이상한 제도를 공고하였다.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라는 취지로 ‘공부하는 대학분위기’를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81학번 서울교대 남학생들은 재학생 출신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서울교대는 다른 일반대학과는 다르게 군대 면제라는 매우 달콤한 특혜가 주어졌다. 졸업 후 곧바로 취직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 관계로 군 입대를 앞둔 3수생의 수가 많았으며 군대를 제대하고 입학한 사람들도 상당한 수가 되었다. 서울교대에 입학 한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 문제 때문에 각자의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서울교대는 강남 개발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초동의 황량한 벌판 위에 외롭게 섬처럼 세워져 있었다. 입학생들의 가정사정과 학교의 위치 그리고 특수대학이 갖고 있는 목적의식이 결합되어 서울교대는 80년대 초 학생운동의 열정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오용철은 1975년 성남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군대를 제대한 후 서울교대에 입학했다. 그는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부당한 폭력을 통해 권력을 잡은 5공화국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후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예비역은 그밖에는 없었다. 다른 예비역들은 조금은 안정된 삶을 목적으로 교대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예비역과도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를 학교에서 보는 것은 낮보다는 밤에 익숙했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 언제나 사자후를 토해냈다. 현재의 정치사회 상황에 좌절했으며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하고 개인적 삶에 몰두하고 있던 동기들에 대하여 안타까워했다. ‘고통의 시대에 눈 감고 사는 모습’을 분노했던 것이다.
80년대 초는 5공화국의 권력이 가장 강력한 시기였다. 5공화국은 정치적 탄압을 완화하기 위하여 사회문화적으로 규제를 완화하고 소위 3S라는 소비문화를 권장하였다. 통금이 해제되었으며 수많은 축제가 기획되었고 칼라TV방송이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책적 ‘우민화’에 익숙해져 갔지만 많은 대학생들은 그들의 폭력을 감추려는 태도에 분노했고 소수의 급진적 운동세력은 5공화국 정권에 협조한 미국에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울교대는 정치적 분노가 폭발하지 않았다. 4년제로 승격됨으로써 학생들의 수는 많아졌고 학교의 소비적 문화도 확대되었으며 술과 쾌락에 익숙해져 갔다. 임시로 만든 사범대학 형태의 교육과정이 폐기되고 새롭게 만들어진 교육과정은 철저하게 초등교육에만 집중하도록 구성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학문에도 정치에도 무관심하고 철저하게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삶에 낭비하게 만들었다. 군사훈련 후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학생운동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졸업 후 취업이 보장되는 특수학교에서 학점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오용철이 보였던 교대문화 속에서의 이질적인 행동은 때론 사회문제에 소홀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자극하기도 하였고 때론 그런 행동의 과장스러움에 불편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무튼 외로웠다. 그의 개인적 사정을 알 수 없었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고 특별히 그런 필요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나는 철저하게 무역사적인 ‘인문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며 폭력적인 시위에 일정한 두려움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른 많은 친구들도 비슷한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불시검문과 같은 거리에서의 억압은 일상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용철이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학교를 자퇴하고 당시 한국통신에서 공모한 공채시험을 통하여 1984년에 합격한다. 하지만 그는 교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1985년 민병철의 결혼사진을 보면 양복을 입고 참석한 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통신(KT)에서의 오용철은 가장 잘 맞는 옷을 걸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열정이 결국 그를 이른 죽음과 조우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당시 한국통신은 한전과 함께 가장 어용적인 노동조합이 있던 곳이라 한다. 어용조합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 어용적인 노동조합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구성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1987년 민주대항쟁을 통해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더 큰 자유와 힘을 얻게 되었으며 노동운동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오용철이 있었다. 그는 민주 노동조합에서 주로 ‘교육’파트를 맡았다고 한다. 서울교대 입학했던 경험을 보아서 오용철에게는 분명 ‘교육’에 대한 꿈과 갈망이 있었던 것같다.
그의 열정적인 투쟁은 수많은 탄압을 동반하였다. 지방으로 강제로 발령나기도 하였으며 민주노조 활동으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을 약화시킬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동료들에게 열정을 심어주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노동운동가를 육성하기 위하여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그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이 ‘술’이었다. 노동이 끝난 후, 노동문제의 토론 현장에서 그는 술을 즐겼다. 어쩌면 술은 노동운동과 함께 그를 지탱한 강력한 도구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작업의 강도와 술의 혼합은 결국 그의 건강을 파괴하였다. 치열한 그의 삶은 결국 1996년 마무리된다.
2017년 우연하게 알게 된 그가 안장된 철원의 목련공원에서 열린 추모제에 참석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동료들은 아직도 그를 추모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열정적인 선배로서 그는 좋은 모델이 되고 있었다. 하나의 공동체 조직이 그리고 정신이 살아있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끊임없이 재생되며 역사를 만들고 있다. 추모식에는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참석하였다. 40년이라는 짧은 생애에서 그는 나름의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활력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조합의 정신 속에 살아있을 것이며 그렇게 살아온 것을 증언하는 동료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알려줄 수 있는 가족을 남겼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억을 갖고는 있지 않겠지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할 것이다.
오용철은 1981년 서초동의 벌판에 발을 디뎠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20세기적인 삶을 살다 갔다. 그의 이력을 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과 일치한다. 약 15년에 걸친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의 일정한 가치를 증진시켰다. 노동운동 초기에 헌신했던 인물들은 현재와는 다른 열악한 상황을 견뎌내야 했다. 그의 삶은 그런 어려움과 성취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그렇기에 아직도 동료들은 그의 묘지를 찾으면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올해(2018)는 병철과 함께 그의 묘지를 방문하고 그와의 만남을 종결지을 예정이다. 우연하게 만날 기회가 있다면 모르지만 의도적으로는 찾지 않으려고 한다. 그를 충분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삶은 서울교대를 떠남으로써 올바른 경로를 찾았다. 그는 그들과 오랫동안 연관되고 기억될 것이다. 나는 다만 30년이 더 된 어느 날 어둑한 술집에서 열정적으로 토해내던 그의 음성이 가끔은 생각날 것이고 쓸쓸하게 사라진 다른 친구들의 모습과 함께 떠오를 것이다.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소멸시킨 한 인간의 치열한 삶을 생각하며 이제 그를 보내려 한다. 그는 나와는 다른 공간에서 살아있을 것이다.
첫댓글 * 같은 공간과 시간을 함께하였음에도 생각은 함께하지 못하였다. 나이차 때문이었을까? 용철이 형은 어린 나를 그저 귀엽게 봐주던 형으로 기억된다. 라면 한 그릇이 250원인지 300원인지 하던 그 때에 같은 값의 라면 대신 막걸리와 깍두기를 마시던 형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강의실에서 내 뒤에 엎드려 잠을 자던 모습도 떠오르고... 그 당시 술을 마시지 못하였던 나와는 대화도 빠져버렸으니 깊은 이야기도 없는 그냥 같은 반 동기로서의 연결고리만 있었다.
* 함께한다는 것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22년 전에 죽었다는 것과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이 뭔 차이가 있는건지... 열정적으로 산 삶과 그냥 주어지는대로 무사태평하게 산 삶은 어떻게 다른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산 것이요, 살았다고 하는 것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자는 그저 회상만 할 뿐인지.......
* 오용철 형은 지금 웃고 있을까? 아니면 그저 착잡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 땅에 평화의 메세지가 단비로 촉촉하게 내리는 아침이다. 민주 세력의 선거 압승! 이번 선거의 뜻대로 앞으로 잘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진 자와 없는 자가 차별 없는 세상, 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세상... 지금 당장 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역사적인 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낡고 어두운 그림자가 꼬리를 내리며 사라지고 밝은 빛의 새시대가 우리 앞에 열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