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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서 연구
BC7세기 선지자들의 신학
8세기 선지자들이 종말론을 어디에 근거하여 제시하고 있는가 하면은 시내산 언약에 비추어 볼 때 현 이스라엘이 내세우고 있는 다윗 언약의 무조건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나온 이론이다. 다윗 언약의 무조건성이란 모세 언약에 기초를 둔 것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룰 때 비로소 그 완성되는 형태로서의 무조건성이 되는 것입니다.(열왕기 상 8:56)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 언약이 조건부 언약이 되지 아니한가? 라는 오해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전 8세기 선지자들은 모세 율법을 갖고 있는 저주의 기능, 심판의 기능을 가지고 이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열왕기 상 8:46-47) 예를 들면 이사야 36장-39장 히스기야 왕과 앗수르 장수 산혜립 사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앗수르는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의 차원에서(이사야 6:1-6) 심판하는 도구로 등장되는 이방 나라입니다.
자, 이럴 때 다윗 언약의 상대자인 왕으로서 취할 태도에 대하여 언약은 어떤 내용을 요구하십니까? 어떤 방식으로 왕은 난국을 타개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왕은 다윗 언약에 의하면 여호와의 종입니다.(왕상 11:13/왕상 8:28) 그렇다면 이미 완성된 성전 여호와의 이름을 두는 성전이 완공하고 난 뒤에 체결된 다윗 언약에 따라 여호와의 종으로서 왕이 취할 태도는 바로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이 약속한 그 언약의 범주 안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왕은 바로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여호와의 이름을 향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앗수르의 침공에 맞서 다시 한번 다윗 언약의 회복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이사야 38:14) 즉 중보자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왕이 등장할 경우에만 이스라엘은 다윗 언약의 혜택 속에 놓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이사야 38:14에서 자기가 중보자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보고 중보자가 되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다윗 언약은 인간 왕의 율법의 철저한 이행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왕 즉 여호와의 종이 되셔서 그것이 속건제의 내용을 담아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 기능을 다할 때 이루어진다는 점을 히스기야는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왕의 무능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무조건성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다윗 언약은 무조건 언약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언약 상대자가 달라진다는 것뿐입니다.
인간의 혈통을 따라가 아니라 그 중보자 되신 왕의 자의로운 선택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이사야 53장) 뿐만 아니라 미가 선지자의 경우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1)스바냐
스바냐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철저히 심판의 날로 묘사하고 있습니다.(1:3/1:6) 특히 사람들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까지 전멸하고 멸절시키겠다는 표현은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를 무효화 시키겠다는 의도처럼 느껴지고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의 재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고 화가 났으면 이렇게 까지 자기 백성에게 이런 식으로밖에는 달리 표현이 안되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1:15-18) 그러면 그런 심판을 내리시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1:11)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무서운 화를 내시는 것은 가나안 땅에 기거하는 자들이 제대로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의 본질을 무시하고 살았으므로 그 약속의 진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여호와의 날이 도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철저하게 악이 발붙일 수 없도록 사전에 약속된 땅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하면은 3:13에 "악을 행치 아니하면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나 누우나 남을 놀라게 하지 않는 자. 그런 자에게 한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은 자란(3:13) 결국 하나님이 앞서 제시한 언약의 영속성이 있음을 증거 삼기 위해 남겨져 있는 자라는 定意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이런 남은 자가 계속 존속하게된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 언약 즉 약속의 땅을 계속 약속의 땅답게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약속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3:14) 가나안 땅에 파멸이 오게 된 것은 이 예루살렘을 제대로 이해 못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왕들 때문입니다.(3:1-4) 남은 자들이란 바로 이 예루살렘의 언약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말하며 인간 지도자들의 그런 불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아침마다 나타내시고 계신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산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날과 다윗 언약과 창조와의 관계를 따져 봅시다. 출발이 창조된 것을 파괴하는 쪽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선지자는 땅의 가치를 몰라 봤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땅의 가치를 몰라 봤느냐 하면은 소위 예루살렘 언약의 상대자들이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와 성공을 어떤 기준에 놓고 한 이야기냐 하면은 바로 아침마다 비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그들이 외면했다는 것이 문제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창조의 파괴까지 몰고 오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가 보는 여호와 날의 기능은 의의 소극적 기능인 심판을 통한 의의 자기 성취를 알리는 날로 여호와의 날을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은 다윗언약이야말로 참으로 창조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들입니다. 언약이 파기 되면 창조도 땅도 파기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공의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날을 앞둔 이 마당에서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오직 전능자이신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끝까지 시온을 의지하는 자만이 구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3:16-20)
스바냐 선지자는 다윗언약에 강한 희망을 거는 선지자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은 창조의 존립까지 이 언약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2)하박국
하박국은 유다에서 율법에 대한 태도가 해이해지고 공의가 전혀 시행되지 아니한 것에 대해 부지런히 기도하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이 없음을 이상히 여깁니다.(1:2-4)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유다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13) 그런 가능성 속에서 계속 기도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기대한 것이 당장에 결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유다의 정통성에 근거하여 확고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 하지만 당장에 있어 하나님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의 부족은 어떤 식으로 극복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악인이 의인을 에워 싼 그런 처지에서 믿음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젖과 꿀의 대명사였던 가나안 땅의 황폐화는 의인의 바라봐야 하는 대상을 더 깊고 심오한 차원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됩니다.(3:17-19)
여기서 하박국은 유다 내의 의인의 믿음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맹렬한 공격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 배역자의 죄를 비교해 봅니다.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해야 하는 그 상대는 그들의 5가지 악행 즉 고리대금, 착취, 강제 노역, 방탕, 우상 숭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 할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방식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 소치라고 여깁니다.(2:16) 하박국은 유다 신앙의 영속성을 할례 정신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그런 세속 정신과는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이 공격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하박국은 유다 내의 악인들의 사고 방식이 공격하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육체의 할례를 행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의도는 율법 조항 보다 율법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의 침입으로 확연히 밝혀진 것입니다.
3장에 가서는 하박국은 대 우주의 질서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흔들리는 최후의 징조를 보게 됩니다. 창조의 질서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과 관련 있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는 요지부동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바로 우주를 정화하는 능력이며 그 작업은 인간의 죄상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적절한 심판에 합당하고 공정한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보여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새로운 자연의 탄생이 감지됩니다.(3:2-4) 하박국은 이 묵시를 보고 미리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박국은 의인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의인이란 자기의 자체 내에서 힘으로 소지하지 않고 있으며 오직 그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나오게 될 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험악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높은 산을 넘나드는 사슴처럼 마음놓고 뛰어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3:19) 또 이 세대에서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 나무에 소출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 묵시를 보여주시고 그 묵시대로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이 계신 여호와만을 사모하겠다는 것이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3:17-18)
무엇을 보고 그런 확답을 내릴 수 있는가 하면은 바로 할례 정신이 결여된 이 이스라엘을 향해 할례를 무시하는 이방인 바벨론으로 하여금 치시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 때문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라는 하박국의 구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묵시에 대한 무조건의 기대를 갖는 자를 말합니다. 하박국이 생각하는 믿음이란 바로 이 세대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기 신뢰도의 고정이 아니라 묵시가 역사를 심판한 격이 된 셈입니다.
◈ 문서 선지자들의 등장 - 이스라엘은 이제 끝났다 !!
* 그렇다면 엘리사 이후에 이스라엘의 상태가 더 좋아졌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가 처음에는 이적을 행하다가 이제는 이러한 이적이 끝이 나고, 문서 선지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느헤미야, 하박국 등이라는 것이다.
* 이렇게 문서 선지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은 끝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사 때까지는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은 망했다' 라는 것을 외친다는 것이다. 회개가 아니라 이미 기차는 떠났다는 것이다.
* 그래서 문서 선지자들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이다. 즉, 이적을 행하는 것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신약시대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고 물위를 걷고 하는 것은 많이 봐준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손수건을 던지면 병이 낫고 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 그런데 말씀이 들어가 버리면,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서 사람들의 심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이것이 최고의 이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고의 고발이고 말이다. 병을 고쳐도 안 되고, 죽은 자를 살려도 안 되고, 이제는 오직 말씀뿐이라는 것이다.
* 처음에는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이적도 나타나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말씀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도 이제는 오직 말씀뿐이라는 것이다. 이적과 방언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말씀이 고발하고 말씀을 통해서만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이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 그래서 이제는 초창기의 그런 은사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말씀의 은사가 주가 되기에, 이런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자들을 배나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은사들이 정리가 되면서, 가르치는 은사가 중심이 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은사가 더 높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 이렇게 가르치는 은사가 중심이 되면서, 교회가 제대로 제 자리를 잡아간다는 것이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 말이다. 병 고치는 사람이 중심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이적도 있고 말씀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말씀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이것이 이미 엘리사 시대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 엘리야와 엘리사는 왕에게 개인적으로 충고도 하고 어루만져도 주고 위로도 해주지만, 그러나 문서 선지자들로 들어가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강하게 고발을 하니까, 상대방에서도 더 세게 나온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어서 선지자가 핍박을 받아서 죽어가니까, 죽어 가는 모습이 바로 장차 올 메시야의 본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선지자들의 고난과 죽음 자체가 메시야를 보여주는 것이다. 고발과 반발이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가면서 말이다. 그 최고점은 물론 예수님 때이고 말이다.
하박국서와 성전
◈ 성전 -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차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기념하려고 세웠다 !!
* 드디어 하나님의 택하신 장소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부스 족속의 마지막 수도가 예루살렘인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10족속의 마지막 족속이 여부스 족속이라는 것이다. 이 여부스 족속의 마지막 수도를 점령함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드디어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이다.
* 이 성전을 여부스 족속의 수도에다가 세우는데, 이 여부스 족속의 수도 이름이 바로 '시온'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말이다. 그런데 뒤에 이러한 성전을 바라보면서도, 아하스나 웃시야 왕과 같은 이들은 자기들이 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통치자이다' 라는 것이다.
* 참고 : 여부스 -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의 명칭(수 15:8; 삿 19:10; 대상 11:4). 다윗은 여부스 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 이름하였다. 여부스성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의 남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시온산이라 불렀다. 한편, 다윗이 정복할때까지 예루살렘에 살던 여부스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여부스를 취한 뒤에도 이곳에서 살았다(수15:63).
* 이렇게 왕들이 까부니까, 선지자가 뭐라고 하는가? '왕이여, 촐랑대지 마옵소서' 라는 것이다. 네가 왕이면 왕이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성전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계속해서 왕이 까부니까 엘리야가 말하기를, '성전은 부수어집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중 선지자들에게 뺨을 맞지만 말이다.
* 성전이 부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가고 마지막 신약 때에 모퉁이 돌로 다시 오는데, 또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버려진 모퉁이 돌로 다시 만든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새 성전' 이라는 것이다.
◈ 교회란,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
*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시고, 그리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 기초가 되어서,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이러한 예수님과 똑같은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모임을 신약시대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교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예수 이름만을 의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못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로 인도를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박국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버림받은 '모퉁이 돌'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버림받은 돌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신 새로운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택하신 장소라는 것이다.
* 스가랴의 성전개념 - 이렇게 택하신 장소에다가, 택하신 인물이 되어야 들어간다는 것이 스가랴에 나온다는 것이다. 이 스가랴의 주제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새로운 성전이 등장한다' 라는 것인데, 택하신 줄기와 택하신 씨와 택하신 땅이 따로따로 존재해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장소와 인물과 제사장이 모두가 다 택하신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언한 것이 바로 스가랴의 성전개념이라는 것이다.
* 학개의 성전개념 - 학개의 성전개념은 '지금보다 나중이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라는 것이다. 지금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것은 성전이 아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짓고 있는 이것은 하나의 폼에 불과하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참 성전은 장차 온다는 것이다. 물론 신약시대의 성전을 두고 말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다스리고 움직여 나가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충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떤 기능적인 면에서 뽑혀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긍휼로 선택된 자라는 것이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성전이다 !!
* 따라서 우리들은 전쟁을 하려면 자기 자랑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놀랍다는 것이다. 오직 십자가의 피만이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하는 증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하기가 싫다면? - 나가 놀아라 !!
* 여기서 신명기 27장을 한번 보자.
(신 27: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신 27: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신 27: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 에발산과 그리심산이 있는데,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의 산인 에발산에다 제단을 세우라는 것이다. 이것은 법궤가 이 에발산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이 에발산에 있다는 것이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알레고리처럼 들리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법궤가 어디로 가는가를 추적을 해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하늘에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법궤가 있는 이 에발산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 그런데 5절을 보면, 돌로 된 제단을 쌓되 다듬지 말라는 것이다. 즉, 징과 같은 것을 가지고 쪼아서 돌단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자연석으로 된 돌단을 쌓으라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능력과 솜씨가 첨가된 제단은 안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에도 보면, 너희들이 다듬은 돌로는 쌓지 말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 이 제단 돌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받으심을 보여주는데,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이 저주 산에 서면 어떻게 되는가? 함께 저주를 받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심산(축복산)에서 날아오는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저주가 아니라 말이다.
* 하나님의 제단이 없는 축복 산에 서서 축복을 받으려고 하면, 저주가 날아오게 되고, 반대로 주의 제단에 있는 곳에 있으면, 비록 그곳이 저주 산이라고 해도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정반대라는 것이다. - 거꾸로 사는 삶 !!
* 그렇다면 이것을 레위기나 민수기에서 말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신명기에서 말하는가? 그것은 앞서서는 실패하지 않았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신명기에 들어와서는 실패를 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신명기 - 구원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의 성취력으로, 하나님의 희생으로 !!
* 우리가 왜 저주 산에 서야만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의 성취력으로,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것이 신명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이 법궤를 중심으로 새로운 제사장 나라를 만들어나가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영원한 제사장 나라인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 그러므로 성도는 이런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안주하지를 말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싸우신다는 것이다. 용사이신 그분이 말이다.
◈ 이런 교회는 교회라 할 수 없다.
교회는 사람들의 호응도로 판정되는 것이 아니다.단지 하나님의 계시에 합당해야 교회라 할 수 있다.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보면 성도라면 반드시 배타해야 하는 유사 교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그것을 다음과 같이 대중 정리해 볼 수 있다.
1.욕심을 부축여 주고 장려하고 권장하는 교회 우상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용납해 주지 않았다.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무엇이 우상인가? 골로새서 3:5에 보면,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 되어 있다.흔히들 교회 욕심은 욕심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는 그 자체가 우상의 집단이다.
2.예수님보다 교회 조직 팽창에 더 관심 있는 교회 역대상 21장에 보면,다윗왕이 사단에 의해 부축임을 받아서,자기 나라가 얼마나 부흥 발전되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인구조사를 실시하다가,그 아까운(?) 백성이 무려 7만 명이 죽어 사라지는 재앙을 당하게 된다.수가 작아도 하나님의 작업이요 많다고 인간들의 수고의 결과 아님을 알아야 한다.이런 정신이 참 교회이다.
3.사회적 위치로서 성공한 자와 실패한 자로 가름하는 교회 시편 1편에 보면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이다.왜냐하면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사라지지만 그 사람은 나중에 의인의 회중에 참여되기 때문이다.참된 성공자는 거지 나사로처럼 아브라함 품에 안겨 천국 복락을 누리는 사람이다.
4.축복의 의미를,인간 됨됨이 보다 소유의 수입으로 간주하려는 교회 하박국 3:17-18에 보면,비록 무화과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다 할지라도 구원의 여호와를 기뻐한다고 되어 있다.참 축복이란,하나님 그 자체를 좋아하는 자이다.
5.목사를 교회 주인으로 보는 교회 사도행전 5장에 보면,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죽임을 당한다.베드로 사도가 죽이는 게 아니다.교회 주인 되시는 성령의 하나님이 죽이신다.교회의 머리 부분을 사람이 차지하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6.교회 내에 계급으로 질서를 세우고자 하는 교회 교회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에 나와있다.그리스도의 몸이란,십자가 지신 분의 은사와 선물로 유지되는 단체라는 것이다.그래서 질서란,오직 사랑의 질서만이 요구된다
7.교단이나 총회를 봉사하는 기관으로 보지 않고 지배하는 기관으로 보는 교회 장로교의 헌법은,총회를 일시적인 회합 그 자체로 간주한다.만약 총회를 늘 상주하는 기관으로 보면,개교회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는 집단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8.대내외적인 윤리적인 작업과 사업이 곧 영생을 주는 일로 착각하는 교회 영생이란,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죽음으로서 뛰어드는 것이지 개개인의 윤리 도덕으로 창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날마다 나는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나는 것이 참된 기독교 사업이다.
9.인간들의 결합력과 수고와 노고로서 축복이 찾아오는 것으로 여기는 교회 축복이란,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해서 주어진다.그것만이 의가 되기 때문이다.
10.헌금의 증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고 여기는 교회 전도란,인간들의 수완과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성령에서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하신다.따라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사실은,몸을 주님을 바치는 것이다.돈 액수와 상관없이.
◈ 광야에서의 마귀와 일대일 진검승부 !!
성령께서 40일 동안 금식하도록 하신 후에 그 다음에 성령께서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사단을 만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 배후에는 인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 본 세력인 마귀가 있었기에 바로 그 세력과 만남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1대1'의 영적인 진검승부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사단이 먼저 공격하는 것이 "예수, 40일 굶었는데 환각상태에서 돌이 떡으로 보이지? 본능에 충실해" 라고 나오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라고 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산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 안에 있을 때만 사는 것이지, 아버지의 뜻 밖에 나가면 살아도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그 자체를 죽음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이냐, 생명의 세계이냐?" 라는, 이 차이점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초월하기 때문에 죽어도 사흘만에 다시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들은 마귀에게 속해 있기에 그런 세계가 있는 줄도 몰라요. 그냥 눈에 보이는 자기 목숨, 자기 심장 뛰는 것만, 이것이 전부이지, 자기가 죽어도 괜찮은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전혀 들어본 적도 없고, 그냥 대충 상상만 할뿐이지요.
◈ 첫 번째 시험 - 말씀으로 되는 다른 세계가 있다 !!
그런데 예수님만이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알려주러 왔는데,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예수 왔어. 굶었다며, 얼굴 색이 영 안 좋은데, 배고프지. 돌이 떡이 되게 해서라도 살아야지.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할 것 아니니?"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는 겁니다. 즉 말씀으로 되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건방을 떨면서 돈을 초월한다구요? 돈을 초월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셨습니까? 십자가 지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안 되니까 대신 죽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돈을 초월한다면, "나에게는 내 십자가가 필요 없어. 잘 하고 있는데 내 십자가가 왜 필요해" 라고, 이렇게 되겠지요.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다" 라는 것은, 채찍은 예수님이 맞고 낫기는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이지요. 그것으로 구원되고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지, 그 외에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채찍 맞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관계 속에 다른 것을 집어넣지 마세요. 그런 것 집어넣는 것은 마귀들의 장난인 것입니다.
◈ 그냥 평생 돈 좋아하다가 천당으로 !!
우리는 그냥 평생동안 돈을 좋아하다가 천당에 갑니다. 왜 '아멘'이 안 나옵니까? 헌금을 하면서도 "이 받치는 것보다 몇 배로 채워주시겠지' 라고 생각하고, 또 부지런히 봉사하면서도 "이번에는 진급하겠지" 라고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돈에서 자유로울 인간은 이 세상에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시험 - 인간의 종교성 !!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종교' 라는 것입니다. 악마는 메시아를 성전 꼭대기로 초대했습니다. 이 성전은 뭐냐 하면, 이곳은 거룩한 장소입니다. 하박국이나 아모스에 보면 메시야가 나타날 때 거룩한 장소에 나타나지요.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이 임하는 성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거룩한 장소에서 눈으로 보이는 메시야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이 무엇이었지요? 생존문제인데, 사람은 돈 없이는 못산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유치원의 아이들도 알아요. 아버지의 소득 수준에 의해 아이들 등급이 매겨지니 말입니다. 그래서 어딜 가나 돈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돈을 밝히는 사람을 보면, 우리 자신도 아쉬우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예수 믿는 어느 청년이 취직을 했습니다.
회사 : 라이벌회사에 가서 정보를 빼와라.
청년 : 저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짓 못합니다.
회사 : 회사 그만둘래?
청년 : 회사를 그만 두는 한이 있어도 그런 짓 못합니다.
회사 : 그럼 그만 둬 !!
청년 : ? ? ?
이 청년은 주님 말씀대로 살다가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저의 생활을 주께서 보장해주세요" 라고 해도 주님은 전혀 보장을 안 해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경험하면서, 참으로 이 세상이 더럽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개인적인 정의감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사회의 범죄는 조직 차원에서 이뤄집니다. 집단, 회사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범죄 행각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하나 발 뺀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조직적으로 이뤄져요. 병원, 학교, 은행, 회사, 교회 모두가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 화이트헤드 - 뒤에서 미니 밀려서 내가 행동한다 !!
그러니 모든 사회 구석에서 이러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범죄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라는 요구가 온다면, 가입해도 문제고, 가입 안 해도 문제이고 말입니다. '화이트헤드' 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뒤에서 미니까 밀려서 내가 행동한다' 라고 표현했는데, 즉 타의에 의한 범죄, 남의 의사에 의한 범죄란 말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따져보니, 자기도 거기에 동조한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왜 가담을 했습니까? 처음에는 정보나 지식에 어두웠기 때문에 가담을 하게 된 겁니다. 사람이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어요. 온 천지에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알 수는 없잖아요. 지금으로서는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그 일에 동참을 했지만, 나중에 결과를 보니까 조직에 의한 범죄의 한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조직의 중간 관리자가 되면 위에서 지시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데, 그래서 만약 상부에서 돈을 주면서 밑에 있는 사람들을 회식시키라고 한다면, 본인은 교회에 다니고 해서 술을 안 먹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술을 사 주고 하면, 그 결과는 당연히 본인이 부하직원에서 술을 먹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하 직원 중 한 명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과장님! 저 과장님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평소에는 신앙인으로 자부하던 분이 어떻게 부하직원에서 술을 강요하고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이럴 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됩니다. "주여, 저런 부하 직원을 만나게 하셔서 내가 이렇게 주님의 용서 없이는 못사는 인간임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술 마시기 싫거든 하지 마라. 그러나 회사에서 쫓겨나거든 내 핑계는 대지 말고 그 사실도 주님께 감사해라. 나는 나대로 주님께 받은 은혜가 있다. 너는 주님께서 너에게 뭐라고 시키더냐?" 라고 말입니다.
◈ 불안하고 두렵기에 - 거룩한 영웅을 주시오 !!
일단 사람이 배가 부르면, 두 번째 나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거룩한 영웅을 찾습니다. 자신은 돈에 매여 더러운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남한테는 공개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렇게 살다가는 천번만번 지옥가도 합당하다는 사실은 본인은 알아요. 그래서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선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 목사 - 사람의 약점을 노리는 종교꾼 !!
그런 심리를 이용하는 자가 바로 목사입니다. 사람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거룩한 곳에 가고 싶어하고, 거룩한 사람을 그리워하고, 거룩한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그리고 거룩한 무엇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는, 그러한 시도를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보면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아요. 나이가 들고 힘이 쇠약해지면 권력도 허무하고, 정의감도 허무하고 모든 것 허무해져요. 자기 몸 하나도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서 의지하고 싶고,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약함을 깨닫게 되면 거룩한 선과 접촉을 시도하게 됩니다. 거룩한 선과 접촉하려면 다수의 의사에 의해서 여러 사람의 공동된 거룩에 참여하려 합니다. 자기가 죽어서 천국 가려면, 많은 사람들이"'이렇게 하면 구원받더라' 라는 것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욕구를 아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가지 말라" 라고 하십니다. 왜요? 그것은 필시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수가 인정하게 그것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두둔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민중의 법칙인데, 한때 이단이나 삼단이니 하면서 떠들어도 그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고 돈이 생기면 그것이 정통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는 언제나 다수의 힘이 진리가 됩니다. 진짜로 진리이기에 진리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것이 진리고, 제 아무리 진리라도 할지라도 소수의 주장이라면, 진리가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장소인 성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거룩한 성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긴 성전, 이 성전을 사람이 주목하는데 이 성전에 진짜 메시야가 등장했는데, 이 메시야의 특징이 뭐냐, 말씀대로 성취될 때 메시야임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뭐냐 하면, 시편 91편 12절에 나오지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와서 그를 붙들어 다치지 않게 되면 그가 곧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야 당신이 지금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천사가 붙들어서 다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당신을 메시야로 받아드릴 게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마귀의 유혹은 어느 인간도 안 넘어간 인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자신만만해서 예수님께도 이런 유혹은 시도한 것입니다.
(시 91:11)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12)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지금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돈에서 못 벗어난다고 했지요. 이 두 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살아있는 기적을 받고 싶은, 그런 유혹에서 전혀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기적을 받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인간은 없다 !!
예를 들어서, "폭우가 쏟아지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만 비가 갑자기 그치더라" 라는, 이런 것을 간증 목록에 집어넣습니다. "배가 아파 약국에 가는데, 성령의 음성이 들리기를 '믿음으로 기도해야지 왜 약을 의지하는가' 라고 해서 되돌아와 기도했더니 씻은 듯이 낳았다" 라는 것 등등 말입니다.
◈ 한국교회 - 자기의 의(義)의 경연장 !!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자기 의'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의' 사례집을 정당한 것으로 광고하는 곳이 오늘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의 '자기 의'를 끄집어내서 서로 경쟁을 붙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의를 더 많이 축적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인들의 신앙이란 것은, 성경 말씀이란 관념이 너무나 추상적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구체화 될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자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설교시간에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눈감고 잠을 청하다가, 갑자기 간증으로 들어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어떤 장로님이 감사헌금을 안 해서 아들 다리가 부러지고, 본인도 아파 누웠습니다. 그러다가 장로님이 기도원에 가서 회개하면서 이제 빼먹지 않고 감사헌금도 하고 십일조도 철저히 받치겠다고 기도하니까, 본인도 건강을 회복하고 아들 다리도 금방 낳았습니다' 라는, 이런 소리를 하면 자던 사람도 다 눈을 떠서 듣게 되는 것입니다.
◈ 마귀가 부흥시킨 교회에 무슨 구원이 !!
여기에 모든 사람들이 다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없어요. 성경 이야기를 하면 다 자니까, 잠을 깨우면서 감동을 주는 간증 사례집만 500개정도 외워서 대충 섞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도 모이고 헌금도 하고 종교 사업이 번창합니다. 바로 이렇게 해서 부흥된 교회가 한국 교회입니다. 물론 이런 교회는 마귀가 다 부흥시킨 교회이고 말입니다.
이런 판에 복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다 추방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사도 쫓겨나고, 복음을 듣기 원하는 성도들도 견딜 수 없어서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남은 자들은 악마의 추종자들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 요나의 기적 말고 다른 기적은 다 엉터리 !!
두 번째가 종교적인 기적인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기적을 원하지만 내가 보여줄 기적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요나의 기적, 즉 내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한다. 이것만이 기적이고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아니, 죽음을 이긴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이겼다는 것은 영원하지만 안수를 해서 병이 나은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는 기도해서 나을 생각 마시고 쌍화탕에 판콜A 2개만 잡수면 어지간한 감기는 다 떨어져요. 그래도 안 되면 주사를 한 대 맞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사실은 돈을 아끼려고 약국에도 안 가고 병원에도 안 가는데, 돈을 사랑하니까 기적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기적이 일어나면 돈이 안 들고도 문제가 해결되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저렴하게 병을 고치려고 기도원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마귀의 두 번째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인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라는 말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 뜻이 맞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악마 너희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예수 나 본인이 결정할 사항이다" 라는 것입니다.
◈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진짜 기적 !!
사실 예수님은 기적과 기적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것도 기적이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인 것도 기적이지만, 그러나 진짜 기적은 원천적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란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의미를 깨달은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을 받은 사람은 없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어도 다른 나라에서 다시 산다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진짜 기적이지, 악마와 한편 되어 있는 인간들이 요청하는 거룩한 곳에서 뛰어내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말씀을 주면 그 말씀을 가지고 다 엉터리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귀가 가르쳐 준 것이지요. 다시 복습해 봅시다.
첫 번째는, 우리는 평생가도 돈에서 못 벗어난다 !!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기적에서 우리는 못 벗어난다 !!
세 번째는, 세상의 부귀영화에 대한 기대에서 못 벗어난다 !!
세상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영웅되기' 인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내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럴 때 악마가 마지막 카드를 꺼내는데, 세상 부귀영화를 다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예수여,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에게' 에서 '나'가 누구입니까? 현재 이 세상 권력을 쥐고 있는 세상 신이지요. 즉 "세상 신에게 절하라, 그러면 세상 다 너에게 줄 게" 라는 것인데, 이건 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세상 신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절하면 자기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이지요.
◈ 인간의 욕망에는 제동장치가 없다 !!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 섬겨라"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뭡니까? 이 눈에 보이는 세상 전부를 갖고 싶어서 섬기는 것입니다. 조금만 아니고 전부 다를 말입니다. 사람의 욕망이란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제동장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서 있어서 권력 갖기, 유명해져서 이름 내기 등등, 이것은 모든 집안의 자녀교육 중에서 기본입니다. "비록 내 시대는 우리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나는 너에게 기대를 건다. 제발 네가 우리 집안을 빛내다오" 라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와 하박국의 연관성
고난과 신앙
히 10:32-39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오늘 본문을 대충보게 되면 구원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교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자기 교회나 자기 영역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하나님의 제시한 약속에 대한 집착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집착이 남들보기에 대단히 훌륭한 신앙처럼 간주되곤 합니다. 성격상 교회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신나겠지요. "야, 이거 오늘 본문은 완전히 내 이야기이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늘어진 채로 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란 이런 잣대를 옹호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좋기 때문에 늘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열심히라도 뭔가 해서 자신의 믿음없음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조감에 참지 못하게 되지요. 그런데 '느긋하다'는 말은 여유만만하다는 자신감을 말합니다.
성경 공부 분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아는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믿음을 공고히 한다고 생각하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많이 아니까 행복해지던가요?" 허한 것이 많기에 그 허한 부분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이 행복치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는데도 행복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제공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용서가 들어가 있고 용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화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인간이 안 받아주는 일입니다.
성경공부 하면서 불행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안받고 그 대신 자신이 아는 것으로 버티겠다는 심보 때문입니다. "용서받는 것 대신에 제가 전보다 더 착하면 될게 아닙니까?"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렇게 되면 본인이 괴롭고 본인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받아들이면 하나님과 좋고 그 사람도 좋고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는데 말이지요. 느긋한 가운데서 "저는 오실 이를 기다립니다"하고 살아가면 되잖아요.
용서가 들어오면 용서와 더불어 "왜 우리가 용서받아야만 하는가?"라는 상황도 기쁨과 같이 주어집니다. 34절에 보면,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줄 앎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흔히 고난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를 두고 표현합니다. 지지리 궁상과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은 신앙이 없을 때 갖고 있는 고난관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신앙이 있는 자의 고난은 그 고난 자체가 기쁨을 유발할 수가 있습니다. 즉 고난이라는 것을 용서받아 기쁜 것, 그리고 구원받아 기분이 좋고 감사한 것 과 연관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교회 안에서 통하는 상식과 상호 맞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너무 임의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구원도 받아야겠고, 교회에 집착을 하려는 몸은 몸대로 바쁘고, 돈은 돈대로 쓸 데가 따로 있고, 게다가 이 괴로운 상태에서 "온유하고 화평하고 기뻐하라"고 하니 억지로 웃음을 띠면서 합당한 표정 관리도 해야겠고, 완전히 뒤죽박죽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말씀으로 정리에 들어가 봅시다.
예를 들면, 중국 음식집에 보면 쟁반이 나오지요, 그 쟁반에는 순전히 중국 음식이 담겨 있습니다. 또 한식집에 가면 거기에도 쟁반이 나오는데 그 쟁반 위에는 순전히 한국 음식만 있습니다. 양식 집에 나오는 쟁반에는 양식만 담겨 있겠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겠다는 사실이 일종의 쟁반이라고 봅시다. 그렇다면 그 쟁반에 담긴 것은 기존의 용서와 관련된 기쁜 소식만 담기게 됩니다. 마치 중국 음식집에서 나오는 쟁반에 중국 음식만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쟁반은 쟁반대로 받고 거기에다 자신이 집에서 만든 요리를 같이 담는다면 이것은 온전한 중국 음식집의 음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뒤죽박죽 짬뽕이 됩니다. 이처럼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그 세계는 새로운 시간관과 공간관과 그리고 인간관을 가지고 들이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인간 세계에서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일체 거부하면서 말입니다.
하늘 나라는 일종의 쟁반에 담긴 나라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덮치면 기존의 것과 섞이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의 것을 가지고 마중나가서도 아니됩니다. 신혼 방에 보면 이불도, 요도, 베개도 모두 새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가 했으면 인간 쪽에서도 성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뭔가 해 드려야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신다면 신앙에 큰 오산을 갖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도 지상에서 '고생'하는 것과 연관시키면 그것은 해석 잘못한 겁니다. 초등학생이 중학교 올라가서 영어를 배우게 되는데, 영어 과목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회도 새롭고 수학도 새롭고 국어도 새롭습니다.
진짜 신앙인들에게 어떤 기쁨이 있느냐 하면, "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고난, 내가 알고 있었던 예수, 내가 알고 있었던 기적"이런 것들을 다 버리는 기쁨도 있고 그 빈 자리에 예수님이 소개하신 새로운 고난과 예수와 기적에 대해서 알게 된 기쁨도 있습니다. 기존의 것과 연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생들도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오 신이여, 제가 이 선지 동산에 헌신하려 왔나이다. 이 신지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 저의 한 몸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앞으로 개척교회 하면서 어떤 고난이 오고 심방하면서 어떤 모독이 온다할지라도 저는 이미 죽은 몸이라고 간주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고 견디겠나이다"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곧장 이어 부르는 찬송이 "부름받아 나선 이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입니다. 이 노래는 완전히 이 세상에서 고생하는 것을 미화하고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자기 세계의 형성 시도입니다. 믿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본인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래서 장차 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당할 고난을 미리 앞당겨서 이 신학교 시절에 자아에게 많이 실행케 하겠다는 겁니다.
찡그리는 연습과 찡그리는 훈련을 스스로에게 가합니다. "미리 고난을 많이 받게되면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라도 어지간한 고난을 능히 견디지 않겠는가"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넘어짐은 고난이 아니라 유혹입니다. 목사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당회장이라는 직임의 유혹, 시찰장이라는 직임이 주는 유혹, 노회장, 총회장이라는 직임에 주는 유혹 말입니다.
배고픔과 아픔은 오기만 강하면 버팁니다. 버티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워서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누가 이길 수 있습니까? 그 유혹 중의 하나가, "제가 주를 위하여 이렇게 희생하고 고생했나이다. 조금이라도 보상을…"라는 정신입니다.
이렇게 이 이야기를 쭉 하는 가운데 뭔가 빠져 있지요? 다름 아닌 "용서하심"이 빠져 있는 겁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용서하심에서 오는 '기쁨'이 빠져 있다는 이것은 진정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들보기에는 천하의 신앙인으로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하심과 형제 우애가 넘친다 할지라도 비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속에는 오기가 들어 있지만 겉으로는 연기를 피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 나라에는 연기가 필요 없습니다. 모방이나 시늉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주어지는 쟁반, 그 쟁반에 담긴 것을 믿음으로 후룩룩 마시면 그만입니다. 마셨으면 기존의 것과 교체하는 일에 돌입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바꾸라!"입니다. 용서하심에서 출발 될 신앙을 오기에서 출발하면 가짜 신앙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여기서 부터입니다. 가짜 신앙은 결국 주님의 곁을 떠나서 뒤로 돌아설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믿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로 바꿨기에 그 때부터 독자 세계를 따로 갖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이 간섭하지 마소. 내가 목사이기에 내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침륜에 빠진 꼴입니다.
"주님 저는 이 교회보다 주님의 오심을 더 간절히 고대합니다"라는 고백을 진심으로 못하게 됩니다. 그 대신 "주님, 제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해서 이 교회를 세운 줄 아세요? 무릎이 낙타 무릎 될 지경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참 신앙입니까?
기쁨으로 받아 쟁반에 무엇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37-38절에 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즉 이 본문이 지금 용서라는 쟁반에 담겨서 우리들에게 그저 제공된 겁니다. 그래서 이 내용의 의미를 용서라는 차원에서 파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구원되고 아니되고를 결정하는데 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말씀을 꼭 집어 거론해야 합니까? 전도 많이 하면 구원받고 헌금 많이 하면 구원받아 살리라 하는 그런 말씀을 아니하시고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은 구약 하박국 2:3-4절에 나오는 말씀의 성취라고 간주되어 따온 것입니다. 그 대목을 봅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하고 비교해 보니 뭔가 틀리지요? 구약 하박국에서는, 하나님의 묵시와 예언의 말씀이 장차 꼭 이루어질 것이니까 이점을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따 온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묵시의 자리에 어떤 인물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미 오신 분으로서 '앞으로 오실 어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는 그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 하박국에서 하신 묵시와 예언의 말씀은 이미 예수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참 신앙인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면, "구약의 모든 말씀이 예수라는 분에 의해서 다 완성되었음" 이라는 이 자체를 믿을 때만 참 믿음이라는 겁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가 잠시 잘못된 해석과 신앙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 어디 구세주 없나? 메시야 없나? 예수님이 구세주란다. 야, 모두 다같이 믿으세. 그런데 성경에 보니, 마지막 때일수록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참고 앞으로 오실 분을 강하게 믿어야 한데. 만약 나태해서 뒤로 물러가면 구원에서 탈락한데,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믿습니다."라는 주장 같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뭘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홀로 모든 예언과 묵시와 말씀을 다 이루어서 그 결과와 선물로 믿음이 생겨서 그 믿음으로 우리가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사항이 순전히 예수님 홀로 해내신 말씀 완성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다면, 예수님 믿는 것은 내 몫으로 여전히 남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람은 구원될지 아니될지 전혀 믿는 구석이 없고 그저 행하는 구석만 남게 됩니다.
다이어트 하는 사람 가운데 10% 밖에 성공이 안 된 답니다. 체중 조절하고 난 뒤, 5년 내에 다시 원 중량으로 안 돌아가면 다이어트 성공할 것으로 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거의 매일같이 쉬지말고 운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언제 그 노력이 중지될지 본인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구석은 전혀 없고 그저 행하는 추진력만 실시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이라면 그 누구도 신앙 생활에 실패합니다.
참된 신앙이란, 현재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까지 하박국에 예언대로 주님의 다 이루신 그 효과 안에 담겨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장차 누가 부름받게 되고, 믿게 되고, 누가 천국가게 된다는 사실까지 주님이 이미 담당하신 결과로 일어난다는 점을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 기쁜 일은 오늘 본문에서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로부터 별종이라고 구경거리가 되고 산업을 억울하게 빼앗기는 사태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듣기 좋아라 제가 지은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9:15에 보니,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용서라는 쟁반에 담긴 내용입니다. 홀딱 마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전서 1:3-4절에 봐도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반드시 거듭나게 하시고 또 결국에는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겠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어떤 유혹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유혹 말입니까? "네가 열심히 안하면 탈락한다, 모든 구원도 네 행위에 달렸다"라는 유혹이 오더라도 말입니다. 주께서 하신 일 속에는 우리가 못하는 것, 하는 것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의인은 산다는 겁니다. 믿음이란 인간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1에 보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날라온 쟁반은 지상에 사는 인간과 단절 되었기에 믿음에 대해 이런 표현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면, 세상과 하늘이 단절되지 않는 것이 더 신앙에 수월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신앙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신앙 생활 안하다가 갑작스럽게 애쓰면 또 유발할 수 있는 성질의 신앙이 오히려 수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순전히 하늘의 선물입니다. 용서와 같이 말입니다. 동시에 남들로부터 오해를 받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인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담대함을 가지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무엇을 했는가를 주목하면서 말입니다.
용서라는 쟁반에 있는 것을 홀딱 마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님이나 거지 나사로처럼 말입니다. 믿음에서 제일 큰 유혹은 다름 아닌, "아,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던고, 아 내가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던고"하는 후회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임을 안다면 이런 유혹 때문에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만든 기독교에 자신이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박국 3:16-18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6-18)
선지자들의 소리는 늘 급박합니다. 안일함이 없습니다.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세상을 보는 것이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선지자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지자들이 무엇을 기초로하여 예언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오직 하나님 약속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장애도 극복하고 줄기차게 세상 안에서 성취되어 왔던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15-19) 이 약속은 이 가나안 땅에서 변함이 없이 적용되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시기들은 한창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범죄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약속 속
에 불러오시기 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었습니다.
즉 선지자에게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한결 같이 하나님은 자기 약속대로 시행하게 되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이스라엘은 이러한 선지자들까지 배척하고 거부하므로서 점점 더 멸망의 나락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나라에는 이미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약속들은 남발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이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평안과 축복을 외치면서 삯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소위 치유와 위로의 목회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의 다수는 참된 선지자답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더 혹해져 있었습니다. 상호간의 축복 거래가 형성되어 있어 이것이 그들에게는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인 하박국은 백성들을 향하여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보았던 성경에 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는 선지자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죄악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와중에서 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느냐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기 약속대로만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점에서 여호와로 인하여 구원받을 자가 아직 따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남은 자들의 의식입니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말입니다.
비록 지금 와서 무화과나무가 문제가 아니요 포도나무와 외양간의 소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북에서는 금방이라는 바벨론이라는 무서운 군대가 온 유대나라를 철저하게 유린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와중에서 누가 살아 남을 남은 자가 될까요? 하박국 선지자는 말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변함없는 약속 실행력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이미 이스라엘이 바벨론 나라에 망한다는 이 소식은 수년 내에 현실로 필히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성취요 말씀의 부흥입니다.
수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은, 수년 내에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을 보이는 심판의 증표가 분명히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에 온 이후로 모든 것은 종말에 이미 접어 들었습니다. 세상이 심판받아 멸망당하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이런 종말 시기에 구원 얻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선지자의 원칙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그 어떤 장래도 극복하고 역사 속에 반드시 성취, 달성됨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과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재림의 약속이 또 남겨져 있습니다. 정말 무화과 나무나 포도나무의 수확이나 재물과 외양간의 소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믿는 믿음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믿는 자의 특색입니다. 말씀의 부흥은 다름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답게 분명하게 전파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남은 자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과 언약궤
⊙ 선지자들의 계시의 핵심은 두 가지로 설명된다. 하나는 다윗 핏줄의 허무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필히 도래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책)
◈ 선지자들 계시의 핵심 ① 다윗 핏줄의 허무성
② 하나님께서 필히 도래하셔야 한다는 것
* 하나님 나라 -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 그러니 기존의 하나님의 통치한다는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잘못된 것이다. 왕으로 직접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셔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를 하지 않는 곳이 전 세계에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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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어떠한 모습으로 오시는가? 무섭게 오신다는 것이다.
(사 64: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사 64: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 하나님은 과거의 출애굽 때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다. 양보하산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을 붙들어야지, 다른 것을 의지하면 박살이 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를 붙들었는가? 왕이었다. 하나님이 아닌, 허수아비 같은 인간 왕을 붙들었으니, 어떻게 살 수가 있단 말인가?
⊙ 시온의 건립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무가치하다. 여호와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음'을 말하고 싶어서다. 여호와 외에 어떤 왕도 허무한 존재들이다. 죽음만이 기다린다. (책)
*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뭘 보고 믿는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다. 즉 인자인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이사야를, 아모스를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이 선지자들이 하는 말은? '천당 갈 사람, 여기, 여기 다 모여라' 라는 것이다. 모였는가? 안 모였다. 모였다가는 같이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죽을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안 믿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남은 자만 믿는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고 한 것이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그러니, 다윗 시대부터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밖에 외칠 것이 없는 것이다. 종말시대의 특징인 인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메시야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가 나에게 이르렀다' 라고 한 것이다. 왕이 아니고 말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계통을 따라 온 것이다.
* 이 시대도 대한민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시대의 선지자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시 89:47)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시 89: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 선택, 144 페이지
⊙ 이러한 상태에서는 핏줄이니 혈통은 모두 죽음의 사슬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악에 매인 존재이기에 선한 왕이란 없다. 이 없음의 정신이 성전이다. (책)
* 왕이 타락하는 것을 보니까, 인간의 혈통은 악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그 악을 선지자가 지적을 하는데, 이 선지자는 혈통이 없는 것이다. 선지자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신이 임해서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미 모친의 뱃속에서 정해진 것이다.
* 우리도 성령을 받은 자라면, 혈통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말씀만 증거하면 되는 것이다.
◈ 성전은 누락 사상의 총화이다.
◈ 성전에는 하나님이 없다. 언약궤만, 즉 약속만 있는데, 이 약속을 지키면 있고, 지키지 아니하면, 떠나가시는 것이다. 신전은 신이 들어있지만, 성전은 그것이 아니다.
* 신전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그 안에 신을 가두어 놓고 리모콘으로 조정을 하는 것이다. 다곤 신전의 목이 부러진 것은 바로 언약궤 때문이다. 그래서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보내는데, 이번에는 이스라엘 제사장이 죽는다. 그러면 이 언약궤는 누구만 받을 수 있는가? 바로 다윗 왕이다.
◈ 하나님은 새 언약에 의해서 구원을 해주는 것이지, 교회와는 무관한 것이다. 새언약 만을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하박국 3장과 말씀에 합당한 기도- 3년내에 심판케 해 주옵소서!!
기도에 관해서는 너무나 심한 혼돈 속에 있는 듯한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돈을 야기하고 있는 주 세력은 소위 기도에 맛이 들린 자로부터 파생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하여 자신감이 있는 쪽에서 기도라면 늘 불편을 느끼는 자들을 기죽이기 위한 심보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행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로 통해 어떤 신앙에 관한 한 우월감을 확장지을려는 심리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이렇듯 오만과 교만을 몰고가는 것이라면 기독교의 본질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범람 때문에 기도에 관한 신학을 정립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빈번하게 많이 하고 밥을 굶어 가며 하는 용감한 기도에 대하여 곁에서 장려하고 추켜세우는 기도 신학이라면 소위 기도에 대하여 맛이 들린 사람들부터 사랑 받는 신학이 되겠지만 기도 신학의 결과가 조금이라도 기도의 열심에 대하여 별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쪽으로 나타나게 되면 기도 신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한다는 논리로 성경의 논리성을 전면으로 반기를 들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연구하기 전에 이미 결론을 맺어 놓고 하는 비논리로 접어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도를 안해 본 사람이 어떻게 기도에 알 것이며 40일 금식 기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금식 기도에 대하여 논하겠느냐 하는 식의 반박은 차라리 40일 금식한 사람들이 따로 모여 성경을 새로 제작 편찬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다는 신학의 대 전제가 변동이 없는 한 기도 신학도 이러한 전제에 의해 규제를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이단적입니다.
신학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또는 하나님께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신학의 대상은 인간이 하나님께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남겼으며 거기에 대해 인간은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학문입니다. 따라서 이 주장에 이의가 없다면 다음 주장에도 반드시 동의해야만 합니다.
즉 따라서 기독교 차원에서의 기도란(이방 종교에서의 기도와 비교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하기 이전, 하나님이 자기가 택하신 백성들에 발생시킨 계시 사건의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공로입니다.
성경의 예를 들면서 설명해 봅시다.
출애굽기 2:23-25에 보게 되면 '여러해 후에 애굽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 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 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하게 된 경위가
1.고통이 왔고
2.그 고통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르짖었고 3.언약을 기억하시고
4.구원자를 보내 주시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방종교식으로 부르짖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1의 과정과 3의 과정은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구원자는 오직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그것이 바로 언약을 이루는 구성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부름 받은 민족이(야곱의 언약 범위밖에 있는 백성은 안 됨) 비 언약 계통으로부터 공격과 압박을 당할 때 언약은 결코 중도에 탈락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출로 구원자가 나타나 비 언약 계통을 척결하고 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언약 백성을 구출하는 이야기로 전개됩니다.
따라서 1의 과정은 언약에 필연적이며 역사 진행에 있어 동인(동기 적인 원인)이 됩니다. 새언약의 생성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언약의 성취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는 (로마서 8:22,23,26,27) 최후의 심판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차원에서의 조치입니다. 결국 성령님의 기도는 응답되어 택한 백성의 운명을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순교와 고난의 길로 몰고 가게 됩니다.(베드로전서 2:21 ,4:14-16, 마태복음 5:11-12)
언약 성취에 있어 부르짖음의 표상은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에서 필연적으로 등장됩니다. 이것은 다 출애굽 정신의 계속적인 구현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음이 왜 필연적인 과정이 되느냐 하면 언약 백성들에게 있어 언약 성취는 당연한 하나님의 조치라고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긍휼로 이해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하인이 되어 자동적으로 우리의 기도 덕분에 쫓아 오셨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아니고서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었구나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15-16, 20에서 고통 가운데 아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그 여자가 바로 하와(생명)가 되는 것입니다. 즉 고통에서 생명이 산출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있어 방정식입니다. 그 이후의 언약의 민족, 이스라엘이 당하는 수모와 고난은 그 속에서 진정한 언약의 본질을 해산하는 산모의 고통의 기간입니다. 그렇게 배태하여 나온 것은 바로 은혜(긍휼)입니다. 이 사상이 새언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새언약의 상징도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로 대변되는 수난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 언약(구약)시대 때의 기도들(시편의 탄원시 같은 것)도 그 시대에 비추어진 언약에 대비하여 해석됩니다. 즉 빨리 언약대로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탄식과 울부짖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언약의 내용대로 이루어지게 자기 몸(혹은 우리 민족)을 도구로 사용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 이외의 기도가 있으면 성경에서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하박국 3장에 나오는 3년 내에 부흥케 해 달라는 기도는 언약대로 3년내에 심판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 와서 보면 기도하는 쪽에서의 주문하는 것이 많으면 많이 응답되고 주문하는 것이 적으면 적게 응답되는 논리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고 못 박아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6:7) 또 주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너희 아버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고 하셨습니다.(마6:8)
그러나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 쪽에서 구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 아닌가 하고 단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될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우리를 배제한 상태에서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당사자의 고난과 수난을 통로와 배경으로 하여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우리는 거부 반응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겨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난이 동반되어진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기꺼이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그 예는 우리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먼저 시범을 보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알아내기 위한 기도는 아니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면서 죽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힘든 일을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방도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이미 확정적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자기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위해 버립니다.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바로 여기에 기도의 모든 정신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 정말 성도가 순종하기에는 힘든 것입니다. 그래도 그 뜻은 불변하며 그 뜻에 의해 모든 것이 심판된다는 것을 우리는 감안해야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새언약대로 기도하는 내 자신을 도구로 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 7-12에 나오는 구하라 주실 것이 요라는 기도는 7:12에 나오는 사랑의 내용을 두고 말하며(산상보훈에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한 항목을 두군데 나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사항은 6:5-16에 한군데 모아져 있습니다.) 야고보서 4:3에도 정욕에 쓰려고 원하는 기도는 응답되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정욕이란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사항(언약 밖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새언약 시대에는 새 언약 안에서만 일하시기 때문이다)을 두고 말합니다.
데살전서 5:17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도 일종의 출애굽 당시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온실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대로 살아가면 부딪히는 것이 많습니다. 그 부딪침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7의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라고 하시는 말씀은 15:5과8의 과실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새언약의 열매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러 부딪침에 대하여 우리가 할 것은 복수가 아니라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새언약에서의 마지막 사건은 예수님의 재림 사건입니다. 그 분의 오심은 의미가 있는데 이는 우리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0) 창세기 4:10에서 땅이 아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호소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부르짖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란 이처럼 언약을 이해하는 가운데 응답이 있으며 만약 언약을 이해 못하게 되면 그 기도는 자기 중심의 기도가 되며 언약에 도전하고 언약을 파기하는 이단적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열매에 관해서 우리는 희생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오직 그것을 못 이루는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면 도저히 기도는 나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의 기도, 이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주여! 제가 손해 보는 일이 있더라도 아니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저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하서 제가 기꺼이 나서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