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누리다와 누르다 = =
번역본은 아주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도자가 이룬 최고 정상, 즉 화엄을 이룬것으로 전하는 것이 살아있는 법문이게 됩니다.
앵무새처럼 되뇌이는 것은
수도자가 아닌, 시도자나 앎 보다는 믿음으로 다가오는 신도, 즉 도조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많은 수도자가 이미 번역한 것을 또 반복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수도자가 번역하면 화엄경의 의미가 다릅니까?
화엄의 법을 이루면서 알게된 최정상이 무엇인가와 어떻게 하면 헤매지 않고 이를수 있는가를 자신이 걸어온 과정보다 더욱 쉽게 오를수 있도록 들려주는 것이 화엄법문이게 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경주 불국사 앞마당에 있는다보탑을 보십시오.
화엄에 이르는 과정을 쉽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가지는 생노병사의 4성을 네방향에서의 계단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각각의 과정을 거쳐서 최정상의 화엄에 오르는 길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법문입니다.
그리고 석가탑을 보십시오.
아주 간결 단순하면서도 안정되게 보여주는 것은
최정상에 오르면서 거치는 과정은
배움과 자람과 채움으로 이루어지며,
최정상에는 풀한포기 살수 없는 바람만 세차며, 풍우에 깎여진 바위돌만 있으며 세상의 사람들이 살수없는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산아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러한 내려오는 과정을 석가탑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를때는 복잡하여 얻는것도 많으나,
내려올때는 당당하고 쉽게 내러와,
그때서야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빛이 되어 앞길을 열어주고, 배운 것으로 가르치며, 채운것으로 도와서 나누는 비로소 함께하게 되는 법화경을 석가탑으로서 천년동안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높은 위치에 오르면 누리려고 합니다.
누리려고 할수록 그 위치를 유지하려고, 다른이는 오르지 못하게 누르게 됩니다.
이는 우리글의 구조로 보면,
누리다 에서의 중간음 리 의 모음 ㅣ 는 ㅡ 로 진행하므로, 누리다 는 누르다 로 이어지게 됩니다.
지금 누리고 있다면,
곧 누르게 된다는 것은 보지않고도 알게 되므로 이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 이글은 페북에서의 어느 게시글에 댓글로 적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