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황혼의상록수 원문보기 글쓴이: 가보원
[안케전투 638고지 잔상(殘像)
"타당~탕탕~. 쾅!!!!"
깊은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소리...
아스라한 잠결속에서 그것은 분명 총성과 포성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날은 유난히도 짙은 안개가 온 누리를 짓누르고 있어
한치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황근무를 하다 잠자리에 든 시간은
새벽 2시경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요란한 총성과 포탄 터지는 소리에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관망대로 뛰어 올랐다.
관망대에서 둘러본 광경은 안케패스에 위치한 기갑연대 제1중대 상공에서
수없이 조명이 터지고 있었으며
M60 기관총 소리와 M16 자동소총 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콩 볶는 듯 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중대도 즉시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 갔으며
무전기에 메달려 상황전개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총성은 멎고 월남의 밤은 다시 깊은 정적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었기에 그렇게 요란스럽던 총성과
포성이 멈추어지고 암흑의 정적이 흐르고 있는지...
조금 후
1중대장의 보고내용은 M60초소 경계초병이 안개로 인해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앞에서 철조망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사격을 가한 것이 공격해
들어오는 세이파 부대(야간에 벌거벗고 온몸을 새까맣게 위장하고 침투하는
VC특공대)를 저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우리도 안심을 하고 비상경계태세를 풀고
평온을 되 찾으며 대부분의 병사는 다시 잠자리를 찾아들고 있었다.
나는 예민한 신경 때문에 다시 잠이 올것 같지않아 상황실에 앉아
무전기를 통해 고국으로부터 들려오는 방송을 들으면서
그 동안 월남에서 생활했던 2년여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대한의 남아로서
자유수호를 위해 월남전에 뛰어든지 벌써 20개월
이제 며칠 후면 나의 조국, 나의 사랑하는 부모형제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국특명을 받아놓고 있었다.
이제까지 산설고 물설은 열사의 나라 월남에서,
전쟁의 포연속에서 그 얼마나 그리웠던 조국이었으며
그 얼마나 보고 싶었던 부모형제였던가?
병환중에 계신아버지는 어떠하신지 한없는 상념에 젖어
나 자신을 잊고 있을 때도 시간을 흘러 어느덧 밖은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1972년 4월11일 주월 한국군 3대 작전중의 하나인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던 안케전투의 시작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을 그렇게 흘러가고 해가 오름에 맞추어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게 했던 안개도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1972년 4월 11일 새벽의 짧은 상황은 안케전투의 서곡이었으나
우리는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날이 밝아옴에 따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안개가 걷히고 나니
새벽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적은 OP 철책 마지막 선까지 공격해 들어왔고 그것도 소수가 아닌
상당수의 적이 침투하다가 실패하고 도주 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었다.
천우신조라고 할까?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만약 경계초병이 한순간이라도 경계근무를 게을리 했더라면
순찰을 책임맡은 분대장의 잦은 순찰이 없었다면
그 세이파 공격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사람의 예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날 따라 다른 때와는 달리
순찰담당 분대장이 쉴 사이 없이 순찰을 돌았다고 한다.
한번 돌고 나면 잠시 쉬었다가 돌 수도 있는데 연속적으로 돌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경계초병들이 더 긴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순찰을 담당했던 분대장이 나와는 무슨 인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사회에 나와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따금 같이 앉아 그때를 회상하곤 했지만
표현할 수 없는 불안감에서 순찰을 돌았노라고 했다.
어쨌든 만약에 순찰 분대장이나 경계초병이 한순간이라도
그 임무를 게을리 했더라면 그 세이파 공격에 의해 아마도
1중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며 전초기지가 무너지면 그 결과는
퀴논지역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에
순찰하사와 경계초병의 직감에 의한 반사적인 대응이 결국은
1중대는 물론 우리 맹호사단과 퀴논지역을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경계초병은 처음에는 본인이 오발을 한 것으로 착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찰나 동안에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정말 단순 착오사격이었다면 심한 꾸중이라도 들었을 것인데
그의 무의식적 사격이 기가막힌 결과를 가져왔기에
1중대는 물론 맹호사단을 지킨 유공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월남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중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고 또한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기에 별 관심없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는 시작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이제까지 우리가 겪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변 탐색잔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포탄소리가 1중대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적의 포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주월사령부가 창설되고 나서 파월초창기를 제외하고는
여지껏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것이다.
좀 공격하다 말겠지 하는 지휘부의 상황판단과는 달리
적의 맹렬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베트공에 의한 공격이 아니라
월맹 정규군에 의한 전면적인 공격이었던 것이다(월맹군 제3사단 12연대)
1중대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저지할 수 없는 맹렬한 공격이었다.
전쟁에서의 정확한 상황판단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빠른 시간내에 적을 괘멸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다.
그러나 안케전투 초기 잘못된 상황판단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들의 꽃다운 청춘을 이역만리 열사의 땅에
묻히게 한 限맺힌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자꾸만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것 같았다.
기갑연대 수색중대가 정글의 왕자 호랑이 나가신다고 호언 장담하며
작전에 투입된지 2시간만에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의 피해를 입고 만 것이다.
월맹 정규군의 작전은 베트공의 그것과는 원천적으로 전술부터가 달랐다.
그때서야 지휘부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연대단위의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1중대와 인접한 우리 2중대를 비롯
1대대 산하 부대를 제외하고, 2대대와 3대대 병력이 속속 작전에 투입되였다.
그러나 전투는 조금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을 밀고 밀리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급박하게 전해지는 불리한 상황
적에게 포위된 2대대 5중대장의 절규!
만약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면
"자유수호를 위해 대한의 남아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비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노라고 전해 달라!!!"
비감한 외침
그 절규를 우리가 그대로 듣고 넘겨야 하는가?
그 때 6중대장의 비장한 음성이 무전기를 타고 흘렀다.
"5중대장 힘을 내라! 내가 구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구해 내겠다!!!"
그렇게 5시간의 사투 끝에 많은 피해를 냈지만
결국 5중대는 사지를 헤처 나올 수 있었다. 그 절박했던 순간 순간들.....
그 때까지 우리 중대는 전투에 참가하지 아니하고 자체 경비를 하고 있었으나
자꾸만 불리하게 상황은 전개 되고 있었다.
1972년 4월 14일
드디어 우리 중대도 4월 18일을 기해 전투에 임하라는 명령이 떨어젔다.
그때까지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귀국특명을 받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내일 15일이면 귀국하기 위해 부대를 출발하는 날인데.....
그러니까 귀국특명을 받자마자 안케패스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전투투입 명령과 함께 귀국특명 취소........
청천벽력이라는 말은 이럴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며칠후면 어머니 품에 안길 것이라고 편지까지 해 놓았는데
부산까지 마중 나오셨다가 어떻게 그냥 혼자 가실 수 있을까?
당신자식 오지 못한 것을
혹시나 죽지나 않았나하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잘못되시지나 않으실까?
온갖 상념으로 인해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심정
그때 귀국특명을 같이 받은 전우들외에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어쩌랴 꿈이 아닌 현실인 것을 ......
우리 중대는 4월 18일 아침 일찍 전투에 투입 되었다.
우리는 캄보디아 방면으로의 수송도로인 19도로상의
16번 교량위 1중대의 전략 기지인 진달래 고지밑에서 부터
638고지를 향해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에서 부터 포탄이 날아오는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황속에서 포탄이 떨어진 곳을 골라 잡아가며 엄폐, 은폐를 번갈아
해 가면서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야 했다.
우리는 작전에 투입된지 불과 5시간만에
제 2소대장 임동춘 중위(대위 추서)가 전사하고 말았다.
포격을 당한 즉시 후송만 제대로 되었드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소대장을 잃은 소대원들은 우왕좌왕할 수 밖에...
그래서 평상시에는 몰라도 전시에는 아무리 못나고 능력없는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세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열이 흐트러질 수 있는 순간이었지만 선임하사의 임기웅변적인
대응으로 우리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고 "임동춘" 대위***
질기고도 허망한 것이 생명이던가?
콰쾅~ 꽝!!!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때린다.
"아니 오하사님!"
기어가 보니 두 다리가 없지 않은가?
대퇴부 아래쪽이 없어진 것이다...
자기의 대퇴부 이하가 없어진 것을 안
오하사는 총구를 자기의 목에다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심한 충격 때문에 순간적으로 죽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 그렇게 하도록 놔둘 수 있단 말인가?
목을 겨눈 총을 걷어차 버리고 껴안고 앉아 응급처치에 들어간다.
후송만 빨리 이루어지면 충분히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손을 조급하게 놀리며 후송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 그리 더딘지...
일각이 여삼추라 혹시나 임동춘 소대장님과 같은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나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으나
다행이도 빠른 시간내에 후송을 마치고 나니 온 몸의 맥이 다 빠져 나가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잠시나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찰나...
그러나 적의 포탄은 그런 상념에 젖어 있게 놔두지 않았다
생과 사의 급박함이 옆에 있는데
비어있는 자리...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보이지 않는다.
금방까지도 내 옆에 있었는데...
앞을 향해 전진하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윙크하며 눈 웃음치던 그 눈들이 없다.
쉴 사이 없이 쏟아지는 적의 포탄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옆에서 자꾸만 쓰러져가는 전우들
이러한 상황에서 눈에 보이던 것이 무엇이던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오직 분노밖에 더 다른 것이 없다
생과 사의 개념이 뇌리에서 사라진지 오래
사랑하는 전우들의 복수를 위한 일념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며
반드시 살아서 고국으로 부모형제 곁으로 돌아가자고
맹세하며 몸부림첬던 전우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곁을 비우고 텅빈 자리만 남긴체
내 옆에는 없다.
이렇게 사랑하는 형제들을 보내고
난 우리에게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저려오는 가슴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현장에서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들외에...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겨서 먼저간 전우들의 원수를 갚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우리가 죽고 살고는 염두에 두지 못한체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월맹 정규군은 vietcong에 비해 너무 강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적들은 우리 1중대의 2km 전방에서 월남의 특수부대를 괘멸 시키고
우리에게 도전한 것이다.
(전투 종료후 포로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월남의 특수부대를 괘멸시켰기에
한국군 일반부대는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고 하면서
"따이한은 지독한 군인들"이라고 실토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설 수 없다.
우리가 물러서면 퀴논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며
그러면 우리 맹호부대는? ......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케패스에서 적을 막아야 했다.
어느 방향에서 총알이 날아오는지 분간조차 어려운 절박했던 순간들
포탄이 쉴새없이 터지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수면 부족과 갈증이었다.
수면부족으로 총알이 귀밑을 스치고 지나가도 졸 때가 있고
걸어 다니면서도 졸기 일수였다.
또한 배 고픔은 참아도 목마름은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먹을 물이 없어 새벽이면 철모 위장포를 벗기고 이슬을 받아 갈증을 달래야 했으며
그래도 갈증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가 오줌을 받아 나누어 마시기도 하였다.
괴테가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않은 사람은 그 참맛을 모른다"고 하였던가?
그렇다 오줌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르리라.
목마름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를....
우리는 이러한 극한 상황속에서도
반드시 살아서 고국으로 사랑하는 부모형제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싸우고 또 싸우고 있었다.
진하고 진한 그리고 진정한 휴머니즘속에서.....
전투식량의 공급이 재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배 고품과 목마름의 극한적인 고통을 이기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전투식량의 공급이 이루진다고 해도
헬기에서 낙하 잘못으로 우리의 손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떨어지기 일수였고 설령 우리에게 제대로 떨어젔다고 해도
내용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었다.
c-ration 내용물이 거의가 고기 종류라서 구미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한두번은 몰라도 먹기가 여간 고역스러운 것이 아니였으며
생각나는게 밥과 된장국 그리고 김치였으며
간절하다 못해 비몽사몽간에도 눈에 아른거리기까지 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어쨋던 전투투입 2-3일 동안은 그런데로 지탱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너 고통은 가중되어 가고있는 상태였다.
배고품속에서도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고기 통조림은 먹으려니 사람의 살과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고
설령 먹었다고 하더라도 비위 약한 사람은 토해내기 일수였으며
쵸코렛이나 쵸코를 바른 빵은 더운 열에 의해 쵸코가 흘러 내리다보니
사람의 피 같아서 먹지 못하는 상태였으며
겨우 먹는 것이라고는 비스켓이나 과일 통조림(c-ration B3?) 정도였으니
그 고통 우리들 말고는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속에서 우리는 싸우고 또 싸웠다
옆에 있던 전우가 갑자기 "이 병장님!" 하며 뒤통수를 친다.
눈앞이 아찔하며 앞으로 엎어졌다.
일어나니 나를 쳤던 전우가 휴-- 한숨을 쉬며
"그렇게 머리가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해요?
이병장님 죽을려고 작정했어요?"
"왜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냐고요? 지금 장난 하는 거예요? 왜 머리를 높이냐구요.
한번 볼래요? 어떻게 되나 한번 보세요"
철모를 총구에 덮어 씌우고 가만히 올리니 피웅~ 소리와 함께
철모가 멀찍이 나가 떨어지는게 아닌가?
"이제 알았어요? 이병장님이 이 철모처럼 될 뻔 했다고요"
하며 씨익 웃는다.
묘연 송골해질 수 밖에 없는 순간에 그래도 "응 그렇구나" 하고
미소로 답하는 객기를 부렸지만 .......
그렇다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기다 보면
머리가 은폐물에서 벗어나 노출되는 줄도 모를 정도였으며
거의가 그런 상황에서 싸우다 죽어갔으며
그래서 더 먾은 피해를 입었는지도 모른다.
총알은 총알대로 포탄은 포탄대로
여기 저기서 수도 없이 날아온다. 마치 비오듯이...
"악 !!!......"
갑자기 들여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중대장님 소리가 귀를 때린다.
중대장님 바로옆에 있으면서도 중대장님이 넘어지시는 것을 몰랐다.
이런 경우를 천우신조라고 하던가?
온 얼굴이 피 투성이가 되어 나가 떨어져 있는 중대장님.
적의 포탄이 날아가면서 포탄 뒤 부분이 중대장님 뺨을 치고 나간 것이다.
만약 그 포탄두가 정통으로 얼굴을 때렸다면...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 진다.
중대장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이다. 한쪽 뺨이 없다.
"야! 위생병 어디있어?"
급한 마음에 소리 소리 지르며 위생병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대답이 있을리 없다.
위생병은 벌써 부상으로 후송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급하다 보니까 정신없이 불러댈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속에서는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중대장님 당번병이 가지고 있던 구급낭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중대장님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하여
지혈제를 바르고 붕대와 압박붕대로 동여매다보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얼마후에 의식을 찾으신 중대장님은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과 끝까지 할 수가 없게 되었구나. 정말 미안하다"
를 연발하시다 다시 의식을 읺으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급하다보니
까마득히 시간이 흘러간것만 같았다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중대장님을 후송시킨 다음
밀려오는 허탈감.
임동춘 소대장님 현장에서 전사하시고 다른 소대장님들은 이미 후송된뒤라
중대장님과 화기소대장님 두분이서 고군분투하고 계셨는데
중대장님 마져....
이제는 우리밖에 남지 않았다.
지휘관이라고는 화기소대장님 한분밖에 없는데 앞이 캄캄할 수밖에.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헤쳐 나간단 말인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망연자실 넋을 잃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싸워 이기고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서는 눈물을 감추고
이를 악물며 싸워야 하지 않는가? 전열을 재정비해야 했다.
손실병력의 충원이 될른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남은 병력으로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화기소대장님이 중대장 지휘봉을 잡고
각 소대는 선임하사들이 소대장의 지휘봉을 잡았으며
선임하사도 없는 소대는 선임분대장이 소대장 역활을 해야했다.
4월 23일 저녁
우리는 638고지 20여미터 전방까지 접근 하였다.
638고지 탈환 하루전까지 현장 전사 20여명 부상후송 60여명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병력은
겨우 1개소대 정도밖에 되지 않는 40여명이었다.
출정할 때는 130여명이었는데....
어처구니가 없는 일 아닌가?
명색이 정글의 왕자 호랑이들이 말이다.
그 정도로 월맹군은 강했고 화력도 막강했다.
결국 우리에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병사들의 신경은 온통 화기소대장에게 쏠리고 있었다.
만약 화기소대장 마저 잘못 된다면 우리는 갈곳이 없기 때문이다.
유능한 병사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이 없으면 오합지졸이거늘
그래서 무능한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전쟁터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수 많은 전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하물며 그 급박한 상황에서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이렇게 붙이고 싶다
"전쟁터에서 전우애는 피와같다" 라고.....
피와같은 전우애가 이심전심으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화기소대원들은 그때부터 어디서 "피융~" 소리만 나도
소대장을 몸으로 덮치고 깔아 뭉겠다면 과언일까?
그러니까 화기소대원 거의 너나 할것없이 "인간 방탄복"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병사들 사이에서도 자기 몸 돌보지 않고 전 보다 더 돈독하고
진하고 진한 전우애로 피를 말리는 절박한 상황을 헤쳐 나갔다.
우리나라는 지금은 자꾸만 회의감만 늘어나게 하고
도망가고 싶은 나라. 정나미 떨어지는 나라지만
그래도 그 때는 4계절이 뚜렷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야말로 살기좋은 나라였다.
베트남은 2계절로 4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철.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우기철로 구분되며
우기철에는 주야장창 계속 비가 오지만
건기철에는 이따금 쏟아지는 소나기외에는 거의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건기철이면 땅을 야전삽으로 파도 쇠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였다.
638고지 20여미터 전방까지 접근한 시간은 저녁 7시경
우리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하여 가능한 소리나는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무전기의 키를 잡으면 "쒜~"소리가 나기 때문에
그 소리를 적이 들을 수 있을까봐 생명과도 같은 무전기까지 turn off 해버렸다.
뱃속에서는 쪼르륵 소리가 들리고
목은 타들어가고.. 앞에는 적의 총구가 노리고 있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삽으로 파기도 어려운 땅을 우리가 몸을 숨길 수 있는 은폐호를 만들기 위해
맨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얼마지 않아 손끝에 피멍이 들기 시작했으며 피멍이 터져 살이 헤지고
뼈가 보일 정도까지 되었으며 그 고통 말해 무엇하랴?
각기 가지고 있는 압박붕대로 손가락을 동여메고 압박붕대가 없는 병사는
탄알 주머니를 뜯어 손을 싸메며 땅을 파면서도 그 누구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독할 수가 있을까?
은폐호를 다 파고나니 새벽녘이었다.
잠 한숨자지 못한 것이다.
일자로 길게 파놓은 은폐호..
여기가 최후의 결전을 위한 우리 생명의 보호막인가?
은폐호 중앙에 M72 로켓포를 전투대열 양끝에 M60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자는 M16과 수류탄을 옆에두고 있었다
정 중앙에 화기소대장이 자리잡고
M60 사수로는 귀신도 놀랄 정도로 총을 쏴대는 명사수
이상록 병장(승주 출신)과 공준기 병장(부산출신)을 그리고 중간 중간에
선임하사를 배치 전투대형을 완료하고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명은 제천이라는 억지를 부리면서
앞으로의 전개될 상황을 하늘에 맡기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밝기 시작 하였다.
우리는 약속했던 작전대로 중앙에서 M72 로켓트포가 울부짖으며 날았고
양쪽에서 M60 이 불을 뿜기 시작함과 아울러
일제히 개인이 가지고 있는 화기를 최대한 이용
단숨에 적을 제압하고자 공격을 가하기 시작 하였다.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끝이라는 각오로
적이 고개를 들 수 없도록 무차별 공격을 감행했다.
"쾅!!우루루 쾅쾅 !!!!!!!....."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앞에서의 저항이 무뎌지는것 같더니 잠잠해지는것 같았다.
총격을 멈추고 사태를 파악한 바 적은 거의 소멸된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앞으로 튀어나가는 것 같더니
적진으로 뛰어들어가며 수류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아찔하다 못해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순간 씨익 웃으면서 손짓을 한다.
그때 "야아~~~~" 하는 함성과 함께
전 병사가 638고지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은 퇴각하고 없었다.
13일동안 꽃다운 청춘을 이국땅에 버리며
그 많은 피해를 내면서 장악한 638고지...
마지막 전투에서 피해는 없었지만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많은 고귀한 피를 흘리고 천신만고끝에 장악한 고지..
기쁨보다는 어쩌면 그렇게 허망했는지..
그렇게 잠시동안 넋을 잃고 앉아있는 순간
"야! 적이다!!!~"
하는 소리가 사정없이 귓전을 때리고 있다.
우리가 올라온 반대 방향에서 우리가 있는 고지를 향해
시커멓게 기어오르는 일단의 병력...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다.
이제 죽는구나..
여기서 죽는구나...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부모형제 얼굴도 보지 못하고
꽃다운 청춘을 펴보지도 못한체
한많은 인생을 여기서 접어야 한다니.....
하늘이시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가 침울하다 못해 사색이다.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겼는가 했더니...
우리는 일자대형으로 전투대형을 정비하고
638고지 정상을 향해 기어오르는 물체들을 향해
최후의 일전을 각오로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운명은 하늘에 맡긴체........
"사격중지!"
"사격을 중지하라!!!~"
무전기를 통해 다급하게 들러오는 목소리
"왜?"
"야! 이 개자식들아 총을 쏘지 말고
우리보고 앉아서 총알받이가 돼 죽으란 말이냐?!"
"아니다. 아군이다! 우리 아군이다!"
"뭐! 아군이라고?.. 그게 뭔 말이냐... 아군이라니?"
우리가 638고지 정상에 도달할 즈음
우리의 좌우로 5중대와 6중대가 거의 동시에 고지로 기어 올랐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공격해 올라오는 부대는
없었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638고지장악 하루전 투입된 4중대가
우리의 반대편에서 기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선두 지휘장교는 안케전투로 영웅이 된 이무표 중위.
상황판단 미숙 등 계속 혼선을 빚어온 지휘부의 작전능력 때문에
하마트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뻔 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그렇게 완전장악된 638고지의 아침은 정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당연히 공은 우리라고 생각하면서
일순간에 밀려드는 피로감과 갈증과 배고품 아무 생각없이
된장국과 김치에 실컨 먹고
쭉 뻗고 잠이나 원 없이 자 보았으면 하는 생각밖에는.........
그렇다고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지위의 각 부대는 각기 구역을 정하여 경계에 들어갔다.
왜 그리 허탈했던지..
곁을 떠나버린 전우들과 같이 있었다면 그렇게 허탈하지 않았을텐데..
다 같이 한자리에 같이 있었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착각속에서
한참동안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도 해 보지만
현실은 냉엄하게도 허상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물과 식량이라도 빨리 보급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배고품은 둘째 문제고 그 지독한 갈증만 해결할 수 있다면..
638고지를 장악하고
고지에 머무른 4일 동안
우리는 인간적인 비애를 뼈를 깍는 아픔으로 견뎌내야했다.
고지장악 이튿날부터
주월사령부와 맹호사령부에서 수도 없이 높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어이 4중대가 어디야?" 하면 끝이었다
도둑맞은 공적 아니 강탈당한 공훈 .........
638고지 장악 하루전에 투입된 4중대..
그리고 이무표 중위..........
세상 참 불공평하고 엿 같다
우리들이 씹는 비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며
그 참담함 누가 아랴.
세상은 그렇게 불공평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많은 전우를 앞서 보내며
고생한 우리들에게 돌아온 것은 허탈감을 지나
배신감 그 자체였다
그러나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특별권력 관계하에서
어쩔 수 없는 비애였고.
개같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살아남아 돌아올 수 있는 병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철수 하루전 주변 수색잔전을 나갔다.
그 때까지도 엄습해오는 졸음을 퇴치하지 못한체
발길 닿는데로 걸음을 옮기도 있었다.
"쩡 !~"
쓰러지는 천 00 상병(이름이 생각나지 않음)
구급낭을 가지고 달려갔다.
부비츄렙에 걸린 것이다.
다행이랄까? 다친 전우는 천 상병 한사람이었다.
불구는 되겠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부상
그러나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일이면 OP로 귀대하는데 발가락 전체와 발 일부가 없어진 것이다
더럽게도 운이 없는 것이다.
천상병을 후송시키고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고지..
정나미가 떨어질 수 밖에...
천근 만근 비친몸을 이끌고 돌아온 보금자리 OP..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눈물로 부둥켜 안고 맞이하는 중대 자체경비 잔류 병력
휑한 눈으로 우리만 살아 돌아와 미안하다는 우리들의 소리없는 울부짖음..
여기저기서 흘러나와야할 머시메들의 소리
그리고 채취대신 텅빈 막사
살아 돌아온 것이 죄인것처럼 흐느끼는 사나이들의 진하고 진한 눈물
월남에 갖 도착하여 무엇이 무엇인도 모르고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는 신참들의 사색이 된 얼굴...
그제서야 생각나는 고국의 부모형제
귀국한다는 날짜에 귀국하지 못했으니
어머니는 지금쯤 얼마나 가슴 조이시고 계실까?
그러면서도 의식은
무의식의 속으로 함몰되면서 조여들기 시작하여
얼마가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녘이었다.
시간은 아무일 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만 가고......
[안케전투 638고지 epilogue]
또렷하게 각인 되어오는 기억속에 자꾸만 흐려지는 기억
예전은 책을 통체 외워버리는 그런 기억력이었건만
앞으로 내달아 도망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슴을 저미는 것은 잃어버린 전우들의 이름입니다
아무리 쥐어짜고 또 쥐어짜봐도 몇몇외에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생명의 은인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소중한 전우의 이름까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더욱 더 애달픈 것은
놔두고 온 전우들이 넋
몸은 한줌의 재로 저 허울좋은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하지만
육체를 진작 떠나버린 영혼은
아직도 열사의 나라 베트남의 하늘 어느 한구석을을
떠 돌고나 있지 않으신지?.....
그 동안 삶이 무엇이길래.. 잊고 살아온 세월이
원망스럽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
그 전쟁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전우들에게
과연 나는 무엇이었는가?
나 혼자 살기에 급급해서 그랬다고 변명이 통할 수 있을까요?
30여년이 지난 지금 참전체험을 쓴답시고
책상머리에 앉아 희미한 생각을 되살리며 key-board를 두드리다가도
설움에 복받쳐 그대로 앉아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꼭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성이는 모습이
동료직원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였는지
"왜 그러시죠?"
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직원들에게 눈물 보이지 않으려고
"눈에 티가 들어갔나?"하며 얼버무리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key-board위에 손을 올려 보지만
한번 복받쳐 오르는 설움은 그렇게 쉽사리 가셔지지를 않아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으며 회상에 젖고 한 시간이.........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역시 또 세월 탓인가?
그러나 어찌하랴 시간은 자꾸
나를 남겨 놓은체 앞으로만 달려가는데
나이가 먹어갈수록 그리워지는 얼굴들..
월남전의 참전으로 인해 되돌릴 수 없는 한을 남긴 인간..
그 인간이 바로 나인 것을...
전투속에서 영원히 잃어버린 전우
그 전우의 고귀한 피
그 존엄한 넋을 뒤로하고 돌아온 조국
그러나 나를 반겨줄 분들이 이미 이 세사상 분들이 아니신 것을
당신의 큰 자식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해야 할 아버지
24년간이란 세월을 당신의 품안에 안고
혹시나 내 손자 털끝이라도 다칠까바 조바심나 하시던 나의 외할머니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가장 소중한 분들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리시고...
귀국한다는 날짜에 부산까지 마중 오셨다가
귀국하지 못한 당신의 큰 자식 죽은 줄 알고
뱃머리에서 졸도하시어 응급실로 실려가신 어머니.
깨어나서도 "내 자식 살려내라" 고 육본까지 쫓아가
울부짖으셨다는 나의 어머니
나라는 인간은 이렇듯 불효를 저지르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한많은 인생 가슴에 한을 남긴 그런 인간이랍니다.
비가 오려는 날이면
어김없이 왼쪽 다리 붙잡고 아픔의 고통속에서 몸부림처야 합니다.
비가 오기 전날밤이면 마누라 밤잠 못자고 계속 주물러대야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것이 바로 월남전의 산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엽제의 고통속에서 신음하는 전우가 있습니다.
지금 이 전우들의 고통을 누가 알겠습니까?
본인들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고엽제 피해를 주제로 한 소설 "슬로우 불릿"을 읽다가
그만 또 울어 버렸습니다.
고엽제로 인해 인생을 망처버린 우리 전우들
그리고 아무 죄없는 우리의 2세들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우리가 당해야 합니까?
국가를 위해서 이 알량한 국가를 위해서 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알량한 국가를 위해서 우리는 희생했습니다.
그런데 국가는 우리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국가가 우리를 위해 해 준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한것이 있다면 우리의 위상을 우리의 명예를
무자비하게 짓밟아 버린 것밖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분에 넘치는 요구를 언제 해본적이나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단지 있다면 지금도 끝나지 않는 전쟁속에서
고엽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있는 전우들이
마음놓고 치료라도 원없이 받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소박한 바래움외에는
우리가 요구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생각을 달리해야 할 것같습니다.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의 댓가를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국가가 착취해 먹은 우리의 피와 땀의 댓가를 되돌려 받아야 합니다.
여러 전우님들 이를 악물며 이겨 나갑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뭉칩시다!
하나의 힘으로 결집하여 우리도 우리의 권리를 찾읍시다!
PS : "국가"는 이 국민의 정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월남전 참전 이후의 모든 정부가 해당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현 정부를 미워하고
헐뜯는 분들에게 악용당하지 않았으면하는 바래움에서
추신으로 명백히 달아 둡니다.
[안케패스 전승비에 세겨진 비문]
여기는 자유의 십자군 대한의 건아들이 피흘려 싸워 이긴
영원히 기념해야할 성지다. 1972년 4월 월맹군의 대공세에 의하여
월남 전역이 풍전등화의 위험을 고할 때 주월 한국군 예하 맹호사단은
이곳 안케패스에 침공해 온 월맹 정규군 3사단 12연대의주력을
완전 섬멸 시킴 으로써 월남 전사의 길이 빛날 전승의 금자탑을 세웠다.
적은 중부 고원 지대를 점거할 목적으로 군사요충인 안케패스 맹호
기갑연대 전술 기지에 4월11일 부터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이 전투는 4월26일까지 만15일간 638고지 일대를 중심으로 피아간 시산혈해의
작전이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악전고투는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그러나 상승 맹호의 대한 건아들은 우방 월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피 흘려 싸워 이김으로써 편재상 중부월남의 생명선인
19번 공로를 재 개통 시켰고 불리한 월남 전황 가운데 유일의 최초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승리의 이면에는 우리 맹호 건아들의 고귀한 젊은 피가 이 땅에
수없이 뿌려 졌음을 한-월남 양 국민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먼 이역 땅에서 평화의 수호신으로 장렬히
산화해 간 여러 전몰 장병들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빛나는 승리를
기념 하고자 주월 한국군 맹호사단의 이름으로 이곳에 전승비를 세운다.
1972년 10월1일
♣글쓴이: 이상길(병장1970.10~72.5파월맹호기갑연대2중대. 춘천거주)♣
www.vietv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