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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남시평신도축구선교단 원문보기 글쓴이: 조억제
기독교보> 오피니언> 기고 [기독교보 2005-11-30 15:18:22]조회 : 157 ■ 순교자 기념교회를 제안하는 이유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핍박을 받았는데, 그 역사적 배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후 1932년에 소위 춘기황령제 참배를 각급학교에 명하였으나 기독교 학교들은 이를 거부했고, 1932년9월 제21회 총회는 “교회학교 학생이 신사나 기타 여러 제식(祭式)에 참배하는 것은 계명 위반이니 할 수 없다”고 결의했다. 그 후 주후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게사다후(安武直夫)가 신사참배에 대하여 총독부에 지시를 의뢰하였고, 총독부는 신사참배는 모든 국민은 당연히 해야하고, 만약 이를 거부하는 자는 비국민, 천황모독, 반일본 등의 죄명으로 숙청하도록 지시했다. 드디어 주후 1938년9월9일 제27회 총회가 회집되어 동 9월10일 신사참배 할 것을 결의하고 부총회장 김길창의 인솔로 각 노회 대표가 평양신사에 참배했다. 이것이 교회가 공식적으로 한 첫 번째 신사참배이다. 주후 1943년 5월 7일 제31회 총회가 모여 ‘조선예수교 장로회를 해체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을 조직하였고, 경남노회는 노회 조직후(1906.9.20) 46회 때에 이르러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로 개편되었다. 초대교구장은 김길창 목사였고, 3년을 지낸 다음 주후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다(경남노회 유래 7쪽. 송상석 목사 제공). 이러한 와중에서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반대한 신앙의 사람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고, 구속되어 투옥되고, 혹은 은둔 생활로 신사불참배 운동을 했으며 그 중에서 많은 분들이 순교를 당했다. 특별히 주목하고 기억할 일은 신사 불참배 운동으로 구속되어 투옥된 분들은 거의 경남과 평안도 출신이며 순교하신 분들도 대부분 경남과 평안도 출신이며 경남출신 순교자는 마산노회(당시 경남노회) 소속교회 출신이 여러분이었다(이 목숨 주를 위하여 74-75쪽). 이제 광복 60주년과 고신총회 55회를 맞이하여 더 늦기전에 순교자의 신앙과 신사불참배로 고난 받으신 분들의 신앙을 기억하고, 또 이 신앙의 전통을 후대에 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되어 제안하게 된 것이다.
■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정할 수 있는 근거 (역사적 사료)
1. 제일문창교회를 주기철목사 순교기념 교회로 주기철 목사는 웅천교회 주현성 장로의 4남으로 출생하여 웅천 보통학교와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주후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량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다가 1931년 7월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 시무하였다. 그리고 1936년 7월 19일 문창교회 시무를 사면하고 평양 산정현교회로 이동하였다. 그 당시 주 목사는 열심히 교회를 돌보며 사역하였음으로 교회는 성장하였고, 영적 부흥이 고조되었다. 그런데 1933년 5월 16일 부인 안갑수 사모가 별세하므로 심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1935년 11월 의신여중 교사인 오정모 집사와 재혼하여 가정문제도 안정이 되었고, 목회에 전념하여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문창교회 시무를 사면하고 이동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 무렵 평양 산정현교회는 송창근 목사가 사면하고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는데, 후임 적임자로 첫째,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 둘째, 민족주의 자로 항일적인 목사. 셋째, 신학적으로 복음주의 목사. 넷째, 설교에 능하고 은혜있는 목사를 청빙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전국적으로 저명한 목사를 거론했다. 이때, 박형룡 목사가 주기철 목사를 강력 추천했다. “산정현교회는 조선교회의 중심교회로 조선교회를 지키고 신사참배 강요를 막고 복음적 신앙을 이어갈 사람은 주 목사 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조만식 장로와 김동원 장로가 수차례 마산으로 와서 청빙교섭을 했는데, 이 문제를 가슴에 안고 무학산 십자바위에서 많은 기도 가운데 이를 수락하였다. 이때, 주 목사는 죽음의 준비(1934.8), 예언자의 권위(1936. 5. 2), 일사각오(1935. 12)란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대로 일사를 각오하고 산정현교회로 이동 시무중 1938년 2월 8일 주일예배 중 일경에게 검속되었고(그 앞에도 수차 검속 수난당했음), 7년동안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 평양감옥에서 49세 때 순교했다.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왜 제일문창교회가 순교기념 교회로 지정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주 목사가 문창교회를 사면하고 산정현교회로 옮기는 그 길은 순교의 길이였다. 마산역에서 오정모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기차에 올라 기적소리와 더불어 마산을 떠날 때 마산역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다시 만날 수 없는 길이라고 인식되어 모두 눈물로 이별하였다. 주 목사가 떠난후 문창교회는 주 목사와 신앙이 동일한 한상동 목사가 후임으로 1938년 1월 6일 부임했고, 한상동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자로 1940년 7월 3일 구속되었다. 그 후 문창교회는 신사참배에 동의하고, 일제에 협조하던 목사가 부임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이약신 목사가 부임을 하였다. 이약신 목사는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1929년 평양신학교 24회 졸업했으며,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할 뿐만 아니라, 고신 총노회장으로 고신총회 창립 멤버중 한 사람이다. 주기철 목사, 한상동 목사와 동일한 신앙을 가진 분이며 이러한 목사가 광복후 문창교회를 담임한 것이다. 이약식 목사 사면후(1945.9 부임. 1946. 8. 24사면) 1946. 9. 1 황철도 전도사(목사임직 받기 전)가 부임했다. 황철도 전도사는 1940년 봄에 진주경찰서에 신사참배 반대로 감금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남부산경찰서로 이송되어 구타와 취조를 받았고, 1941년 6월 28일 남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병보석으로 출감되어 함안 여항산 숫굴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황철도 목사가 진주 봉래동 진주교회로 이동하신후 송상석 목사, 박성근 목사, 오주영 목사, 이금도 목사, 이윤삼 목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에 통합측으로 나누어졌지만, 고신 신앙과 전통은 오늘의 제일문창교회로 이어져 있으니, 고신의 신앙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하여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 교회로 지정함이 옳은 일인 줄로 사료된다.
2. 부봉교회를 이현속전도사 순교기념 교회로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큰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신실한 주의 종들은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주도 인물들은 평안북도는 이기선 목사가, 평안남도는 주기철 목사가, 경남지역은 한상동, 주남선, 최상림, 이현속, 손명복, 이인재, 황철도, 조수옥, 최덕지, 염애나, 태매시 제씨이고, 전라남도는 손양원 목사, 만주는 한부선 목사,박의흠 전도사(순교)이다(이 한 목숨 주를 위하여 74-75쪽). 그 중에 한 분이 부봉교회 출신 이현속 전도사이다. 이현속 전도사는 1929년 진주성경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지방의 교회들을 섬기다가 1935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진주 배둔병원 원목으로 시무하면서, 하동읍교회 교역자로 시무하였다. 이 무렵 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을도(金乙道)라는 악질 경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친일 목사와 의형제를 맺고, 친일 목사의 밀고로 많은 분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게 되었다. 이때(1940년 8월 19일 새벽3시), 이현속 전도사도 신사참배 반대선동자로 체포되어 사천경찰서에서 가혹하게 고문을 받다가 부산 남부형무소로 이송되어 약 4개월간 고문과 협박을 받게 되었다. 1941년 7월 11일 부산 남부형무소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최상림 목사, 조수옥 전도사와 함께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현속 전도사는 평양형무소에서 약 4년간 수감, 옥중생활을 하다가 1945년 5월 23일 오후 2시 옥중에서 순교했다(당시46세). 그 시신은 한상동 목사 부인 김차숙 사모님과 주기철 목사 부인 오정모 사모님과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인수하여 산정현 교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평양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은 이현속 전도사의 장남 이은성 영수외 몇 사람이 이 전도사의 순교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급히 갔으나, 이미 장례식은 끝났으므로 무덤만 둘러보고 왔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분묘는 평양 기독교 묘지에 그대로 있다. 현재 직계후손인 이성호 집사, 이충길 장로가 부봉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부봉교회는 이현속 전도사 순교기념교회로 지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사료된다.
3. 하기교회를 서성희 전도사 순교 기념 교회로
함안군 대산면 지역은 5처 교회가 있었다(하기, 구혜, 마산, 취무, 옥열 현재는 1954년 평기교회 설립, 1961년 성당교회 설립으로 7처 교회이다).
이 5처 교회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설립되었고, 그 중에서도 하기교회는 지리적으로나 교회적으로 5처교회의 중심교회이다.
이 5처교회가 공동으로 서성희 전도사를 담당 교역자로 모시고 사택은 하기교회에 있었다. 주후 1933년 연초에 부임하여 5처교회를 순회하면서 교역자로 충성하였다.
서성희 전도사는 계명을 지키고, 주일성수, 우상배격, 경건생활, 절제운동 등 성경중심으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생활을 실천하면서 교인들을 지도하였다.
1934년 3월에 5처교회 친목회를 조직하고, 1935년도에는 회장으로서 친목회를 지도했으며, 그 다음 부터는 순교하는 1942년도까지 친목회 고문으로 지도하였다.대산 5처교회는 황철도 전도사(함안 16개 개체교회 순회 전도사로 마산교회 출신이다), 태매시 선교사, 염애나 전도사, 인근 부봉교회 이현속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신사참배에 동의하지 아니했다.
함안경찰서에서는 이 원인이 서성희 전도사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1942년 봄에 서 전도사를 검속하여 함안경찰서 무도장에서 집단적으로 몽둥이 등으로 구타를 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조건은 신사참배 동의를 하고, 교인들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그 구타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경찰서 밖에까지 들려왔다. 이 고문은 수일동안 계속되었고, 마침내 서 전도사는 혼절되었고, 경찰서에서는 그 가족들이 시체라도 찾아가라는 뜻으로 혼절된 서 전도사를 죽었다고 판단하고 정문밖으로 끌고와서 버렸다. 그 가족들은 서 전도사가 검속될 때 경찰서까지 같이 갔으나 면회도 거절 당하고 정문 밖에서 수일을 머물다가 의식없는 전도사님을 집으로 업고 왔는데, 서 전도사는 결국 천국으로 가셨다.
이렇게 순교한 것이다.
장례식은 5처교회가 연합하여 성대히 거행했고,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동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5처교회 성도들은 서 전도사의 순교를 보았은즉 굳은 결심으로 신앙을 지킬 것을 다짐했고, 대산면 일대에서 이 장례식에 참석한 불신자까지도 일본 경찰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대하여 분노했다.
이상의 사실을 추억할 때 광복6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대산 7처교회를 대표해서 하기교회를 서성희전도사 순교기념 교회로 지정하고, 신앙선진들의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은 일인줄 사료된다. 직계후손으로 현재 서완서 목사(증경총회장)가 있다.
4. 칠원교회를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 교회로
안용준 목사가 저술한 ‘사랑의 원자탄’의 주인공은 손양원 목사이다. 손양원 목사는 칠원교회 초대장로 손종일(孫宗一) 장로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7세에(1917. 10. 3)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칠원 보통학교와 창신학교 고등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소압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22세에 칠원교회 서리집사로 임명받아 예배당 건축에 봉사했다.
그리고 1929년 3월 6일 경남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 4월 5일 평양신학교에 입학, 1938년 3월 16일 졸업하였으며, 부산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교회를 순회하였으며, 1939년 7월 15일 여수애양원교회를 담임시무했다.
손 목사는 순회전도사로 시무할 때 신사 불참배 운동을 했으며, 애양원교회에 시무하면서 전남일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을 강력히 전개했으며, 1940년 9월 25일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어 광주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1943년 10월 8일 청주 보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중에서 옥고를 겪던 중 8·15광복으로 석방되었다.
1946년 3월 경남노회서 목사로 장립받고, 애양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 1948년 10월 21일 여수반란사건이 일어나 그의 두아들(동인,동신)이 순교를 했는데, 그때 원수까지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교훈대로 사랑을 실천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사랑의 사도’란 칭호도 받게 된 것이다. 여수반란 사건때 순교한 동인, 동신은 칠원초등학교에 재학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므로 엄문섭, 엄무섭 4학생이 1937년 4월 퇴학처분을 받았으며, 이들에게 신앙을 지도한 이찬수 전도사도 구속되었다.
한가지 특기할 것은 칠원교회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앙동지들의 은신처이며, 엄밀한 기도처였는데, 이찬수 전도사의 집은(칠원면 용산리) 기도의 처소였다. 그때 함께 모여 기도한 사람은 이찬수, 최덕지, 염애나, 박인순, 김두식, 배학수(황철도 목사 부인), 김말순, 박장실, 이삼순, 한덕악 제씨였고, 이찬수 전도사는 해방후 창원교회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순직하였다.
손양원 목사의 모교회인 칠원교회는 이렇게 신앙으로 승리한 교회였다. 손 목사는 부친의 신앙과 칠원교회의 생명력있는 신앙을 이어 받아 일제시대는 신사참배 반대로 약 6년동안 옥중투쟁을 했으며, 광복후는 친히 동포와 성도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였으며, 6·25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 28일 여수근교 미평과수원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순교했다.
이상의 사실을 살펴볼 때 칠원교회는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 교회로 지정하여 그분들의 신앙을 기념하고 후세들에게 전하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5. 사촌교회를 조용석 장로 순교기념 교회로
함안군 군북면 사촌교회는 한국선교 초기에 설립된 교회이다. 이 지역은 함안 조씨(咸安趙氏) 문중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어서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가 어려운 지역이다. 그러나 군북면 덕대리 인천 이씨 이홍석 씨(훗날 목사), 함안읍 조동찬(훗날 장로)과 더불어 기독교에 입교하여 각각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처음부터 계명을 지키며, 주일성수, 우상배격, 금주, 금연 등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강요가 있을때도 황철도 전도사의 신앙 지도를 받아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함안지역 교회들은 처음부터 고신신앙 노선을 적극 지지하여 교회가 확실한 교리적 체계로 성장해 갈 때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여 불과 2개월만에 함안까지 진격하여 함안군 서, 남쪽 일대를 점령했다.
동년 8월 15일에 미군은 작전상 함안군 전역에 소개령을 내려 함안군 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창원, 김해,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가 버렸고, 인민군은 약 1개월 이상 점령지에 머물면서 잔인한 일을 자행했다.
조용석 장로는 80노령의 모친이 계시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모친을 모시면서, 홀로 남아 성전에서 기도하며, 공산군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같은 지방에 살던, 인민군에게 협조하던 사람이 조 장로를 기독교 교인으로서 인민의 반동자라고 고발(밀고)하여 동년 9월17일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사촌리 소재 오곡금광(烏谷金鑛)굴로 끌고 가서 혹독한 고문을 했다. 즉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것과 인민군에게 협조하라는 조건이었다.
조 장로가 이 2가지를 거부하니, 그들의 고문은 더욱 잔인했다. 결국, 인민군에게 협조는 하지 아니해도 좋으니,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면, 즉시 풀어주고 어머니도 봉양하며 살게 하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조 장로는 죽어도 예수님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켰다. 사실 그때는 모든 전선에서 인민군이 패망하여 후퇴하던 때인데, 조 장로를 고문하던 인민군도 수일후에 그곳에서 후퇴하면서, 조 장로를 끌고 가다가 남강가에 있는 박곡강변에서 총살을 하고, 시체는 강가에 모래로 덮어 버리고 떠나버렸다. 인민군은 떠났고, 피난갔던 분들이 돌아와서 조 장로의 가족과 사촌 교인들의 시체를 찾아 헤매던 중 박곡모래밭에 시체 한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갔더니, 시체는 물가에 그대로 있었다. 시체를 덮은 모래는 떠내려 가고, 남강 강물이 불어 모든 것이 떠내려 갔으나, 시체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시체를 찾아 올 수 있었다. 가족과 온 교인들이 애도하면서 사촌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조용석 장로의 순교 기록은 순교기념관에 수록되어 있고, 직계자손으로 조태제 장로가 있다. 이상의 사실을 살펴볼 때, 사촌교회는 조용석 장로 순교기념 교회로 지정함이 옳은 줄로 사료된다.
■ 마산노회 이금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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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몇 일을 망설였는지 모릅니다. 제가 살아 온 삶이 그저 부끄럽기도 하고... 기도중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경남 함안입니다. 참으로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순교의 땅이기도 하지요.
본 기사 중 5번째 함안 사촌교회 조용석 장로님이 저의 큰 아버님이십니다.
어릴 적 큰 아버지에 관한 아버님(조용기 장로) 말씀을 우연히 기독교보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말씀으로만 듣던 내용을 글로써 대하니.. 그 감격이란... 또한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 난 것과 한국 기독교사에 아로새긴 순교자의 집안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한편 제 자신은 부끄러움 투성이이지만... 새해에 새로운 믿음의 결단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