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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인존(人尊)
“인생이 없으면 천지가 전혀 열매 맺지 못하느니라.” (11:118:10)
천지공사는 계속된다. ‘인류구원과 행복을 기도’하는 공사를 행한 이틀 뒤인 (1926년) 5월 27일, 고수부님은 성도들에게 “금산사에 일이 있어 가려 하니 준비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고찬홍, 고민환, 박종오, 강사성 등 열다섯 명의 성도들과 함께 금산사로 갔다.
금산사 초입의 금산동문(金山洞門)을 지날 때였다. 길옆 돌부처 앞에 다가선 고수부님은 “귀신도 안 붙은 것을 여기다 무엇 하러 세워 놓았냐”고 하며 담뱃대로 머리를 딱 때렸다. 돌부처의 머리가 뚝 떨어져 나갔다. 이 돌부처는 현재 금산사 입구 금산교(金山橋)를 건너기 전 왼쪽 숲 속에 있다. 고수부님 공사 후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을 지금은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돌무지개문을 지나 금산사 도량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곧장 미륵전으로 갔다. 증산 도문에서 금산사 미륵전이 무엇인가. 증산 상제님이 인간으로 오기 전에 30년 동안 임어해 있었고, 그때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던 (증산과 고수부님 도문에서) 성지 중의 성지가 아닌가. 고수부님에게는 지상에서 영혼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미륵전에서 치성을 올린 뒤 고수부님은 “이는 미륵이 갱생함이라”고 말했다. 미륵이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겠다. 여기서 우리는 증산 도문에서 미륵이 곧 증산 상제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기억하자.
‘미륵전 공사’를 마치고 나온 고수부님은 맞은편 대적광전(大寂光殿)으로 갔다. 상단 위에 ‘제물’을 진설한 뒤 고수부님은 공사를 보았다. 한창 공사를 행하던 고수부님은 불단 중앙에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불을 가리켰다.
“이 부처는 혼이 나갔으니 밥을 주지 못하리라.”
그리고 담뱃대로 불단에 금을 그어 동서로 가른 후에 동쪽 부처 앞에 있던 제물을 서쪽 부처 앞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다시 제물을 진설하였다. 고수부님은 담뱃대를 들어 천장을 가리키며 “법전(法殿)이 퇴락하였으니 중수하여야 하리라”하고 말했다.
천지공사란 그렇게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다. 과연 고수부님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법당 안에서 담뱃대를 휘두를 것이며, 누가 있어 그와 같은 소리를 외칠 것인가. 공사내용도 궁금하다. ‘대적광전’이란 불가에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비로자나불은 석가의 진신(眞身)을 높여 부르는 칭호.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의 본존불이다. 『대일경(大日經)』에 의하면 무량겁해(無量劫海)에 공덕을 쌓아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연화장(蓮華藏)세계에 살면서 대광명을 발하여 법계를 두루 비추는 부처이다. 고수부님은 왜 비로자나불에게 혼이 나갔으니 밥을 주지 못한다고 했을까. 어떤 원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지만, 이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현실적으로는 대적광전을 중수하여야 한다는 공사내용과 관련이 있다. 고수부님이 공사를 행한 며칠 뒤에 금산사 대적광전 대들보가 부러져 지붕이 무너졌고 비로자나불이 부서진 것이다. 법당도, 부처도 부서졌으므로 밥을 주지 못하는 것이야 당위일 터였다.
그해 6월 어느 날에도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데리고 공사를 보고 있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일 때 고수부님은 “억조창생이 ‘인생의 근본원리’를 모르고 있도다”고 말하며 고민환 성도를 불렀다.
“내가 설법(說法)하는 공사 내용을 적어라. …그 이치를 상세히 기술하여 온 인류에게 알리도록 하라.”
고수부님은 말한다. 천지를 향해서.
인생을 위해 천지가 원시 개벽하고
인생을 위해 일월이 순환 광명하고
인생을 위해 음양이 생성되고
인생을 위해 사시(四時) 질서가 조정(調定)되고
인생을 위해 만물이 화생(化生)하고
창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 성현이 탄생하느니라.
인생이 없으면 천지가 전혀 열매 맺지 못하나니, 천지에서 사람과 만물을 고르게 내느니라.(11:118)
인존(人尊)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는 이 공사에는 온 인류의 어머니로서 고수부님의 마음이 절절이 스며들어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니라. 이제 인존시대를 당하여 사람이 천지대세를 바로잡느니라.”(2:22)하고 ‘우주사의 인존시대’를 선언했다. 그러니까 ‘인존’이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천지 공덕의 열매를 맺고 우주의 주인자리에 서는 것을 일컫는다.
증산 상제님은 또 말한다.
形於天地(형어천지)하여 生人(생인)하나니
萬物之中(만물지중)에 唯人(유인)이 最貴也(최고야)니라
하늘과 땅을 형상하여 사람이 생겨났나니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니라.
天地生人(천지생인)하여 用人(용인)하나니
不參於天地用人之時(불참어천지용인지시)면 何可曰人生乎(하가왈인생호)아
천지가 사람을 낳아 사람을 쓰나니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참예하지 못하면
어찌 그것을 인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2:23)
두 공사를 비교하면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가 어떻게 상호보완작용을 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고수부님은 증산 상제님과 자신의 공사에 대해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낳는 일이요, 나의 천지공사는 키우는 일이니라”(11:99)고 말했다. 『시경』에 “아버지께서 날 낳으시고(父兮生我), 어머니께서 날 기르셨도다(母兮育我)”라는 시구가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父親生子女, 母親撫養子女). 그러니까 ‘부생모육(父生母育)’이란 전통적인 가족 담론이었다. 천지의 부모인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천지공사에도 부생모육의 원리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천지공사는 바로 온 인류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주는 사랑의 정표이기에!
공사가 끝날 무렵 고수부님은 고민환에게 “…기록한 공사의 설법 내용을 낭독하라”고 하였다. 고민환의 낭독이 끝난 뒤 고수부님은 그 글을 받아 불사르고 동쪽을 향하여 단정히 앉아 기도했다.
이날 고수부님의 공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옥구군 성산면장 강필문(姜弼文, 1893∼?)이 그 사람이다. 고민환 성도와 절친한 그는 이날 친구를 찾아왔다가 고수부님 공사를 참관하게 된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뒤 강필문은 “이 분은 진실로 여자 성인이로다!”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돌아갔다. 이후로 마음속으로 항상 고수부님을 존경하는 한 사람이 됐다.
6월 17일이다. 고수부님이 고민환에게 “너의 집 근처에 오성산이 있느냐?”고 물었다. 고민환은 “…있나이다”하고 대답했다.
“그러하냐. 거미가 집을 지을 때는 이십사방(二十四方)으로 줄을 늘여서 짓고, 다 지은 뒤에는 남이 알지 못하게 한편 구석에 숨어 있는 법이니라. 너는 그곳을 떠나지 말라.”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 “나는 동정어묵(動靜語默) 하나라도 천지공사가 아님이 없고 잠시도 한가한 겨를이 없이 바쁜 줄을 세상 사람들은 모르느니라.”(3:18)고 하였다. 이 말씀은 천지공사 시행을 선언한 1926년 3월 5일 이후 고수부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사에서 ‘거미’는 고수부님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고수부님 자신이 장차 오성산에 은둔할 것을 암시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전』은 물론 고민환의 『선정원경(仙政圓經)』에 따르면 고수부님의 오성산 은둔 공사에 대해서는 증산 상제님도 이미 집행한 바 있다.
이튿날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데리고 오성산으로 향했다. 그때 성도들이 하늘을 보았는데 흰 구름 한 줄기가 조종리 도장 상공으로부터 오성산을 향하여 길처럼 뻗쳐 있고 그 위에 구름 무더기가 사인교 모양을 이루어 고수부님의 행차를 따랐다. 돌아올 때에도 가마모양을 이룬 구름이 공중에 떠서 따랐다.
제20장 천지일심
태모님께서 보시고 “검부적 많구나!” 하시며 추리고 남은 짚을 움켜잡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진짜니라.” 하시니라. (11:130:7)
그해 6월 그믐날. 그날도 고수부님은 천지공사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수부님은 박종오, 고찬홍, 이근목, 전준엽, 강응칠, 강사성, 강원섭, 이석봉 성도들을 벌여 앉힌 뒤에 고민환 성도를 앞에 앉으라고 하였다.
이날 공사에 참여한 면면을 보면 왠지 심상치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들은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다. 물론 ‘조종리 강씨들’이 모두 고수부님 도장에서 신앙한 것은 아니었다. 조종리 강씨들의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강응칠과 그의 아들, 강사성, 강원섭, 그밖에 몇 명 강씨들이 신앙했는데 십중팔구 4촌 아니면 6촌간이었다. 이밖에 조종리 본소의 재정을 총괄하고 있는 전준엽이 전대윤과 사돈이요, 김수남과 매제·처남사이, 그리고 몇 달 전 강응칠이 딸을 전준엽의 집으로 시집보내 사돈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공사에 참여한 신도들이라고 해도 대부분 조종리 강씨들과 그들의 일가친척들이었다. 강종용(姜宗容, 강사성의 장남)의 아내 전복추(田福秋) 노인에 따르면 당시 신앙인들은 도(道)를 해야 살고, 안 하면 죽는다는 신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신도들끼리 서로 사돈을 맺는 일이 많았다.
공사는 계속 된다. 단위에 올라가 앉은 고수부님은 뜻밖에도 남자 의관을 갖추어 입었다. 잠시 후 고수부님은 고찬홍 성도를 향해 “나는 강증산이요, 고민환은 나니라. 절을 하라”고 명을 내렸다. ‘나(고수부님)는 강증산, 고민환은 나(고수부님)’라는 말씀 중에 후자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고찬홍 성도는 전자에 주목했던 것 같다. 고찬홍은 “저는 상제님께서 육신으로 출세하시기를 원할 뿐이요, 성령으로 출세하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하고 절을 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거듭 동의하기를 명하였으나 고찬홍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크게 노한 고수부님은 담뱃대로 고찬홍을 마구 때렸다.
고수부님이 공사 중에 담뱃대로 참석자를 내려치고 추상같이 꾸짖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전복추 노인은 “어느 날 저녁에는 태모님께서 신도들에게 벌을 주시는데 모두 꿇어앉히시고 추상같이 호령하셨다. 그리고 기다란 담뱃대로 내려치셨는데 그럴 때마다 문도들은 어구구 하고 매 맞는 소리를 지르며 사죄했다”고 회고했다(『도전』).
고수부님이 아무리 때려도 고찬홍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고수부님은 지팡이를 들고 다시 때렸다.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낭자하여 몸을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으나 고찬홍은 바위같이 틀어 앉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본새였다. 고찬홍이 거의 실신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수부님은 지팡이를 놓고 성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얼굴에는 노여움이 사라졌다.
“보았느냐. 너희들의 믿음이 이러하여야 상제님께서 출세하시리라.” 고수부님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이 공사에 대한 『도전』의 해석은 이렇다. 고찬홍 성도와 같이 잘못된 환상을 품고 신앙하는 사람들이 있다. 증산 상제님은 새 천지의 기본 틀을 다 짜고 하늘 보좌로 돌아가 오직 상제님의 심법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꾼들이 나와 대업을 이루기만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니까 고수부님은 고찬홍 성도의 생각은 잘못되었으나 그의 고집 하나만은 전범이 될만한 신앙의 지조로서 인정해 준 것이다. 육신이 산산조각으로 찢겨지는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태산처럼 틀고 앉아 꿈쩍도 하지 않을 옹고집이 있어야 생애를 바칠 수 있는 개척자의 신앙을 할 수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고수부님의 천지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해 7월 25일 고수부님은 자동차를 타고 도장을 떠났다. 고찬홍, 박종오, 강원섭, 강사성, 전준엽, 이근목, 서인권, 고권필, 김재윤 성도들이 뒤를 따랐다. 정읍 대흥리에 당도하여 신대원의 집에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날마다 성도들로 하여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했다.
28일 저녁이다. 고수부님은 강원섭과 더불어 누런 수건을 한 끝씩 잡고 하늘을 향하여 “영세불망(永世不忘) ”을 외운 뒤에 길을 떠났다. 성도들이 “영세불망, 영세불망…”을 외우면서 뒤를 따랐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증산 상제님의 묘각이었다. 고수부님은 큰 소리로 증산 상제님을 세 번 부른 뒤, “…왜 이다지도 깊이 주무시나이까”하고 통곡했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안에서 강사성에게 ‘상제님 명정(銘旌)’을 읽게 한 뒤에 (증산 상제님 보호신장인) ‘만수(萬修)’를 크게 불렀다.
이 공사는 왠지 예사롭지 않다. 증산 상제님의 묘각까지 찾아가 공사를 행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지만, 추측성 해석은 우리의 영역을 벗어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고수부님 ‘읽기’는 이어지는 공사와 입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후, 고수부님은 치성을 봉행했다. 치성이 끝난 뒤 고수부님은 “육임(六任) 도수를 보리라”고 말하며 도체(道體)조직 공사를 행하였다. 공사에 참석한 신도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당시 참석자 가운데 1백10여 명의 명단이 『도전』에 기록되어 있다.
공사 준비는 고수부님이 직접 지휘하였다. 먼저 동서남북 네 방위에 인원을 정하여 동서남북 사방에 청색, 백색, 적색, 흑색의 큰 깃발을 세웠다. 깃대 앞에는 책임자를 정해 세웠고 중앙에는 황룡기를 세운 뒤에 그 앞에 층으로 단을 높게 설치하였다. 단에는 윷판을 그려 놓고 그 위에 고수부님이 정좌했다.
“사방 60리 지령 기운(地靈氣運)이라. 지령 기운이 다 돌면 사람 추린다. 선자(善者)는 사지(師之)하고 악자(惡子)는 개지(改之)하라(선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잘 고치라).” 고수부님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내용인가. 지령 기운 다 돌면 사람을 추리게 되므로 내 마음에 선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본받아 스승으로 삼고 마음에 악한 것이 있다면 즉각 고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어 성도 50명을 뽑아서 사정방(四正方)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육임(六任), 팔봉(八奉), 십이임(十二任), 이십사임(二十四任)을 선정하여 동쪽 기에 육임, 서쪽 기에 팔봉, 남쪽 기에 십이임, 북쪽 기에 이십사임을 일렬로 세웠다. 나머지 인원도 배정하였다. 육임 아래에 6명씩 배정하여 모두 36명, 팔봉 아래에 여덟 명씩 배정하여 64명, 십이임 아래에 열두 명씩 배정하여 144명, 이십사임 아래에 스물네 명씩 배정하여 576명이다. 마지막으로 고민환과 강원섭 성도가 고수부님을 모시고 중앙에 섰다.
고수부님은 말한다. “…이 다음에 수백만의 인원이면, 그 본줄기 되는 인원만 일정한 규칙을 정하여 나아갈진대 세계 민족을 포섭하리라.”
이 공사를 집행한 이후부터 사정방의 육임, 팔봉, 십이임, 이십사임과 그 하단 조직으로 포교 운동을 일으켰다. 도세는 크게 일어났다.
9월이다. 음력 9월이면 가을 기운이 깃들면서 만산에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다. 조종리 도장의 9월에는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이라는 큰 행사가 있다. 고수부님은 물론 신도들도 맡은 바 각 분야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장연마을 신도 강봉삼, 김재윤, 이용기, 김봉우, 김형대, 박준달, 강성중, 박일중, 양문경, 전영숙 등 열 사람은 자금을 모아 황소 한 마리를 사서 도장에 헌성했다.
9월 18일, 조종리 도장에서는 장연 마을 성도들이 올린 황소 한 마리와 여러 가지 제수를 갖추어 증산 상제님 성탄치성을 성대히 준비했다. 원래 조종리 도장에 큰 치성이 있으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건넛마을 원조에서 보면 흰 도포에 큰 갓을 쓰고 길을 따라 일렬로 걸어오는 신도들의 모습이 마치 빨랫줄에 흰 빨래를 나란히 걸어 놓은 듯하였다. 도장 안팎은 치성 며칠 전부터 북새통을 이루었다. 치성에 참석한 신도가 많을 때는 임시 화장실을 수십 개씩 지어야 했다. 신도들은 도장 뒷산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치성을 기다리는데 조종리 일대를 하얗게 덮을 정도였다.
사람뿐만 아니었다. 치성에 바칠 소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주로 경상도에서 오는 신도들이 황소를 몰고 왔는데 쇠짚신을 신긴 소가 먼 길을 걸어서 오느라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조종리 도장을 향하여 걸어오곤 하였다. 소가 들어오면 도장 뒷산의 소나무에 매어 두었다가 잡아서 제수로 쓰는데 어느 때는 이것도 모자라 조종리 근방에서 개, 닭, 돼지도 수십 마리씩 사들여야 했다.
치성을 준비할 때는 대문 입구에 금줄부터 친다. 마당에는 차일을 치고 자리를 깔아 그 위에 제단을 쌓고 병풍을 세워 신위를 모신다. 대문 양쪽에는 등 두 개를 달고 장정 두 사람이 대문을 지키며 출입을 금하니 아무나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고 오직 고민환 성도만이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고수부님의 명을 받들어 치성 준비를 감독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치성이 시작되면 시종 엄숙한 가운데 진행된다. 치성이 시작되기 전부터 ‘시천주주’와 ‘태을주’를 비롯하여 여러 주문을 읽는데 고수부님은 신도가 내려 주송은 하지 않고 묵송을 하였다. 각지의 신도들이 치성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서 지역별로 수십 명씩 모여 한꺼번에 고수부님한테 절을 하고 물러갔다. 그때마다 고수부님은 신도들의 노고를 치하하시며 손을 들어 답례하는데 그 자체만으로 신도들에게는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조종리 도장에서 치성을 모실 때 광경이 그러할진대, 고수부님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고수부님이 치성을 모실 때는 베를 떠다 옷을 새로 해 입고 주요 간부들도 새 옷을 해 입도록 했다. 또 치성 음식은 사람을 따로 정하여 준비케 하는데 “침 들어간다.” 하며 입을 천으로 가리고 말도 함부로 못하게 했는데, 보는 사람마다 “그 정성이 기가 막히다”하고 혀를 내둘렀다.
이튿날 19일에 성탄 치성을 봉행한 후에 고수부님은 “12방위의 열두 동물을 모두 구하여 오라.” 하고 명하였다. 성도들이 구해 온 동물을 각 방위에 세우는데 동물을 구하지 못한 인진사오신(寅辰巳午申) 방위에는 백지에 그림을 그려 대신하도록 했다.
고수부님이 별안간 “서양 신명들은 어떻게 먹는다냐?” 하고 성도들에게 물었다. “밥은 먹지 않고 닭과 계란을 잘 먹는다고 합니다.” “그러하냐. 그러면 너희들이 알아서 준비하라.” 고수부님의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동쪽으로 10리 되는 부용 시장으로, 남쪽으로 20리 되는 김제 시장으로, 북쪽으로 30리 되는 익산 시장으로 나가 닭과 계란을 사서 올렸다.
동서남북과 중앙에 오색기를 세워 놓고 공사를 행하는데 고수부님이 공사를 진행한다. 고수부님의 의중을 알 수 없지만, 바람이 불지 않은 것이 당신의 뜻은 아닌 듯 했다. 고수부님은 12방위를 맡은 열두 동물에게 “너희들도 알지 않느냐?” 하고 갑자기 담뱃대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도전』은 기록한다.
…그 동물들이 다 각기 소리를 내는 가운데 바람이 일어나 사방에서 중앙으로 불어오매 중앙 기가 나부끼며 태모님의 전신을 둘러 감더라.(11:129)
고수부님은 기다렸다는 듯 성도들에게 ‘시천주주’를 읽게 한 뒤 동방 청색과 중앙 황색의 기폭(旗幅)을 잡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춤을 추면서 고수부님은 말한다.
“너희들 잘 들어라. 모두 일심(一心)들이냐?”
“예!”
“그러면 짚 한 다발 들여라.”
고수부님의 말씀을 듣고 한 성도가 짚을 갖다 놓았다. 고수부님이 짚을 추려 내라고 했다. 그 성도가 짚을 추려 내는데 고수부님이 계속 “더 추려 내어라.”고 말했다. 영문을 알 턱이 없는 성도가 “어머니, 어쩌려고 자꾸 이렇게 추려 내십니까?”하고 물었다. 고수부님은 “더 추려 내어라.” 하며 호통을 쳤다. 몇 번을 반복하여 짚을 추려 냈으므로 손에는 한 움큼 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고수부님이 가만히 보고 “검부적 많구나!” 하며 추리고 남은 짚을 움켜잡고 “이것이 진짜니라.” 말했다. 『도전』에 따르면 증산 상제님의 천지대업을 이루는 가장 큰 관건은 일꾼들의 천지일심에 있다는 말씀이다.
제21장 상제님이 오셨네
“고해에 빠진 창생 질병에서 구제하러 오셨네. 온갖 죄업 용서하러 오셨네.” (11:146:4)
고수부님이 도문을 개창한 뒤 천지공사로 가장 바쁜 한 해를 보냈던 1926년이 가고 1927년 새해가 밝았다. 고수부님의 나이 48세가 되는 해였다. 정월 초열흘이다. 조종리 도장에 이상한 급보가 날아들었다. 이른바 ‘보천교 혁신파’ 이달호, 임경호, 채기두, 채규일, 임치삼들이 장정 10여 명을 거느리고 자동차 두 대로 대흥리 본소 정문 앞에 내려 정문을 깨뜨리고 돌입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보천교 신도 수백 명한테 구타를 당하여 중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이었다.
고수부님은 이미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민환, 고찬홍, 전준엽, 강사성, 문영희, 김수응, 이근목 등 성도들이 뒤를 따랐다. 정읍에 도착한 고수부님은 병원으로 가서 ‘보천교 혁신파’ 간부들을 문병하고 치료비를 주는 등 위로했다. 고수부님이 증산계 교단의 일에 직접 찾아간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고수부님 자신이 씨앗을 뿌린 교단과 신도들의 일이라 관심을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해 2월 3일 경칩절 치성을 올리는 날이다. 그날 치성에 참석한 성도들은 4, 50여 명 정도였다. 증산계 난법 교단이 (증산 상제님이 도수를 붙여 놓았던) ‘초장봉기지세’의 말기 현상을 보이는 마당에 고수부님으로서는 생각나는 이 가신 님 증산 상제님이요, 만백성의 어머니로서 안타까운 것은 후천개벽을 앞두고 죽어가는 천하창생들의 운명이다. 후자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참 일꾼들이었다.
이날 치성 때 고수부님은 신도들에게 “일심으로 신봉하라. 너희들 신세를 그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증산 상제님과 내가 합덕하여 여는 일이니 너희들은 팔 짚고 헤엄치기니라”고 격려했다.
하루는 (고수부님께서- 인용자주) 말씀하시기를 “천지공사와 후천 도수는 너희들의 아버지께서 말(斗) 짜듯 물샐틈없이 짜 놓았으니 부귀영달(富貴榮達)과 복록수명(福祿壽命)이 다 믿음에 있는 고로 일심만 가지면 안 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일은 후천 오만년 도수니라.” 하시니라.(11:139)
증산 상제님이 고수부님에게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6:42)라고 행하였던 공사의 재확인이다. 고수부님의 이 공사 내용을 당시의 조종리 도장 신도들에게 한정하여 이해한다면 오독이 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진법 도장에서 신앙하는 모든 참 일꾼들에게 들려주는 천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의 목소리다.
태모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척(隻)이 없어야 한다. 척을 풀어야 하느니라.” 하시더니 성도들을 거두어 쓰실 때 반드시 먼저 그 액(厄)을 제거하시고 몸에 붙어 있는 척신(隻神)을 물리쳐 주시며 혹 몸에 병이 있으면 그 병을 낫게 하시고 또 앞길의 모든 장애를 없애어 새롭게 하신 뒤에 비로소 따르게 하시니 성도들이 태모님의 은혜에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더라.(11:140)
1927년 이후부터 고수부님은 질병 치유에 대한 공사를 많이 행하였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그러하듯 고수부님의 치유공사에는 조선이고 일본이고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그해 3월 장연 마을에 사는 일본인 쿠라오까(倉岡)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체증이라 하여 약을 썼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용기 성도를 통해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고수부님은 “그 병은 체증이 아니라 주달(酒疸)이라.” 하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쿠라오까는 다음날에 완치되었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직접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하였다.
오셨네, 오셨네, 상제(上帝)님이 오셨네.
주조(主祖)님이 오셨네, 열석 자로 오셨네.
고해에 빠진 창생 질병에서 구제하러 오셨네.
천길 만길 가로막힌 장벽 허물러 오셨네.
세상의 온갖 죄업 용서하러 오셨네.
지극한 평화와 기나긴 영락으로 인도하러 오셨네.(11:146)
공사에서 ‘열석 자로 오셨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천주를 모시는 주문 ‘시천주주’의 열석 자(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의 신앙대상인 천주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노래로 부르는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을 기리는, 증산 상제님이 인간으로 온 이유를 재확인해 주는 공사라고 할 수 있다. 고수부님을 직접 모시는 성도들은 물론 온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은 물론이다.
고수부님은 치성 때가 돌아오면 많은 신도들이 보는 가운데 인마(人馬)를 타고 다니곤 하였다. 여러 성도들이 번갈아가며 인마를 지었으나 주로 강원섭 성도가 맡았다. 강원섭의 호는 백호(白虎). 고수부님이 인마를 타려고 할 때는 큰 소리로 “백호야! 백호야!”하고 원조마을을 향해 불렀다. 중조 마을에서 10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원조마을에서 강원섭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달려오면 고수부님이 “인마를 지어라”고 명하였다.
강원섭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등을 타고 오른 고수부님은 손으로 강원섭의 허리께를 말채찍 휘두르듯 철썩철썩 때리며 큰 소리로 “백호야! 달려라. 이랴! 어서 가자”하고 도장 마당을 돌았다. 어떤 때는 강응칠 성도의 아들 대용에게 인마를 짓게 하고 강원섭을 마부로 정하여 인마를 끌게 하기도 하였다. 종종 인마를 타고 중조 왼편에 위치한 당산마을 앞 당산나무 주위를 강강술래 하듯 빙빙 돌았는데 그때마다 성도들은 공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하여 주문을 읽었다.
김제시 백산면 조종리 665번지 일대 당산마을 앞에 있는 당산나무 느티나무는 지금도 암수 두 그루가 마주하고 서 있다. ‘김제시 지방 보호수 지정번호 9-16-3-1’이기도 한 당산나무는 수령이 310년, 높이가 14미터, 둘레 620센티미터에 이르는 거목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인마 공사의 의미다.
‘온 인류의 어머니’되는 고수부님이 역시 마흔 살이 넘은 남자신도 강원섭을 인마로 하여 이와 같은 공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왠지 예사롭지 않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고수부님의 천지공사 문법을 이해하는 지름길은 우선 키워드(key word)를 찾아내 그 의미를 알아내는 일이다. 이 공사의 키워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인마’일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나는 옥황상제니라. (…) 나는 마상(馬上)에서 득천하(得天下)하느니라”(6:7)고 하였고, 또 “…난리 치나 안치나 말(馬)이 들어야 성사하느니라. 말에게 이기고 지는 것이 있다”(5:108)고 하였다. 증산 상제님이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천지대업을 이룰 수 있는, 천지대업의 성패 여부가 달려 있는 ‘열쇠’가 ‘말[馬]에 있다‘고 할 때,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증산 상제님이 이와 같은 공사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 공사가 고수부님의 인마 공사다.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제기된다. 당시 조종리 도장의 재정규모로 보아서 말 한 필을 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을 터인데 왜 굳이 인마인가? 우리의 해명은 이렇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대도 천지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말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사에서 ‘인마’로 표현되는 ‘바로 그 사람’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을 인마 태우고 천지대업을 이루게 될 것이다.
‘도운’공사는 계속된다. 고수부님은 항상 “내 새끼들 중에서는 안 되고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어올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은 이미 논의하였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을 터였다. 그날도 고수부님은 같은 얘기를 반복하였다. 증산 상제님을 추종했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으나 당시 성도들이 고수부님 도장에 와서 신앙하는 개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살아생전에 큰 환란기인 후천 가을개벽이 오고, 그 개벽에서 살아남아 후천 선경세계에 거듭나는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가르침에 더욱 충실한다면 개벽기에 죽어가게 될 인명을 단 하나라도 더 많이 살리는 것이 신앙인들의 사명이 돼야 할 것이었다. 그것이 곧 천지대업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고수부님의 그런 얘기가 그들이 당신을 신앙하고자 하는 이유를 뿌리째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석성도 고민환이 용기를 내어 “늘 그와 같이 말씀하시는데 오늘은 왜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어오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고수부님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사장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성도들의 눈길이 고수부님을 향해 빗발같이 몰아쳤다. 고수부님은 “흥!”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성도들은 몰랐다. 도운이란 지난한 고생과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개척해야 하는 것이지 단지 ‘감나무’ 밑에 누워 입만 쩍 벌린 채 누워 있다고 해서 잘 익은 홍시가 떨어져 입으로 쏙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고수부님의 말없는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성도들은 ‘개인적인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며칠 뒤 성도들이 고수부님에게 간절히 청하였다. “어머니, 하루 속히 개벽이 되어 좋은 세상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너희들 검은머리가 흰 파뿌리 되도록 기다려도 어림없다. 이놈들아.” 고수부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진리 앞에서 고수부님은 냉정하다. 고수부님은 “…기다리지 마라”고 한 마디로 잘라서 말했다.
“천지에는 정해진 도수가 있나니 때 오기를 걱정하지 말고 너희 마음 심(心) 자나 고쳐 놓아라.”
고수부님은 또 “너희들이 앞으로 한 지경을 넘어야 하리니 나는 그것을 걱정한다”고 말했다.
고수부님의 가르침이 당초 성도들이 신앙할 때의 ‘개인적인 욕망’과는 달랐으므로 도장 안에서 균열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조직의 생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무렵 임피ㆍ옥구 신도들 중에 몇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친목계를 조직했다. 그들은 각처로 돌아다니며 신도들을 포섭하여 계원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몇몇 성도들이 고수부님을 찾아와 이 사실을 고했다.
“언제는 너희들이 돈을 모아 묶어 놓고 했느냐?”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타일렀다. “연전의 일을 잊었느냐?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너희들은 잘 된 일로 아느냐? …가서 일을 꾸미는 놈들에게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니 계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라.”
성도들이 주동자들을 만나 고수부님의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고민환을 시켜 고수부님을 설득하려고 했다. 고민환이 고수부님을 찾아왔다.
고수부님은 대뜸 “계의 내용을 아느냐?”고 묻고는 “너 죽을 줄 모르고 그러느냐. 당장 그만 두라”고 꾸짖었다.
고민환이 돌아가 주동자들을 만나 “나는 다시 말을 않겠네”라고 말했다. 주동자들이 “민환과 상의하는 우리들이 그르다”하고 아예 결별을 선언했다.
일은 점점 커져갔다. 주동자들은 평소 고수부님과 고민환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조종리 강씨 신도들과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민환이 본소에 오면 생사를 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본소 성도들이 조종리 강씨 신도들과 주동자들을 만나 간곡히 만류했다.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심지어 고수부님한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로부터 조종리 도장에는 ‘임옥조종파(臨沃祖宗派)’가 생겨나 임옥 신도들끼리도 갈라지게 되었다.
조직의 분열상을 보고 있는 고수부님은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임옥신도들이 분열한 것이 그랬다. 고수부님이 임옥신도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고수부님 도장에서 임옥 신도들만큼 성경신(誠敬信)을 다 바치는 신도들은 드물었다. 조종리 시절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그랬다. 임옥신도들은 고수부님의 신도 세계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치성 때면 대소사를 전담하고 공사에 잘 수종하며 뒷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고수부님이 항상 “임옥 신도가 내 자손이니, 보리밥일 지경이라도 임옥 자손을 데리고 모든 일을 처리하리라”고 말했다. 그랬는데, 바로 그 임옥신도들이 분열을 했으니 고수부님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제22장 너희가 도통을 원하느냐
“도통(道通)이 두통(頭痛)이다, 이놈들아! 어른거려서 못 사느니라.” “제 오장육부 통제 공부로 제 몸 하나 새롭게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11:165:1, 11:182:7)
이 무렵 고수부님이 심법공사에 치중하는 것도 도장 안의 분열상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개인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은 수석성도 고민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고민환의 ‘개인적인 욕망’은 좀 다르긴 하였다. 그것은 ‘개인적인 욕망’이라기보다 신앙인의 열망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인이라면 십중팔구 열망 하나씩을 갖고 있을 터. 도통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고민환도 누구보다도 도통에 대한 열망이 컸다. 열망이 너무나도 간절했던 고민환은 고수부님에게 심고할 때마다 항상 “…어머니, 저에게 도통을 좀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고수부님도 고민환의 열망을 모르지 않았다.
어느 날 고수부님은 이용기 성도에게 “야, 민환이가 도통 달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고민환을 보고 “야, 이놈아! 도통이 어디 있다냐. 하늘에서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것이 도통이다”하고 꾸짖었다.
그러나 고민환은 쉽게 도통에 대한 열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있는데 문득 도통해 볼 생각이 크게 일어났다. 아예 산에 들어가서 공부하려고 돈을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막상 입산하려고 하니까 고수부님이 눈앞을 가렸다. 고민환은 고수부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너 지금 어디 가느냐?” 고민환의 속내를 모르지 않는 고수부님이 말했다. “너희 아버지가 도통문을 닫아서 통(通)이 없으니 너는 내 곁을 떠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네 공부만 해라. 마음 닦는 공부보다 더 큰 공부가 없나니 때가 되면 같이 통케 되느니라. 너는 집만 잘 보면 되느니.”
고민환을 도장에 주저 앉혔으나 고수부님의 마음이 편할 리 만무하였다. 조종리 도장의 수석성도 고민환의 마음이 그러할진대 다른 성도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인간의 욕망이란 그랬다. 아무리 가르쳐도 듣지 않는 성도들을 보고 고수부님은 답답하고 야속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수부님은 더욱 더 강하게 성도들의 마음단속을 하였다.
“도통(道通)이 두통(頭痛)이다, 이놈들아! 어른거려서 못 사느니라.” 고수부님은 호통을 쳤다. “내 일은 판밖에서 성도(成道)해 가지고 들어오나니 너희들은 잘 닦으라.”
고수부님이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성도들은 도통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이후 성도들이 “도통.” 소리만 하면 고수부님은 “아나, 도통 여기 있다!” 하고 담뱃대로 사정없이 때리곤 했다.
그해 9월 21일 고수부님은 고찬홍, 전준엽, 이근목 성도 등 10여 명과 함께 금산사로 행차하였다. 금산사 미륵전에 치성을 올린 후 고수부님은 선언하였다. “상제님의 성령이 이제 미륵전을 떠나셨느니라.”
고수부님은 성도들에게 “요강을 가져 오너라”고 하였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금산사 대중들이 혼비백산하여 말렸으나 고수부님은 당장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다. 금산사 대중들은 꼼짝을 못하고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고수부님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요강에 걸터앉아 소변을 보고 옆에 있는 이근목 성도에게 주었다.
“저 미륵한테 가서 끼얹어라. 헛것이니라.”
누가 감히 그와 같은 명령을 망설임 없이 따를 수 있겠는가. 이근목이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데 고수부님이 벼락을 쳤다. 이근목이 할 수 없이 요강을 들고 미륵불상 앞으로 다가갔다가 짐짓 넘어지는 체하며 미륵전 마룻바닥에 오줌을 엎질러 버렸다.
“앞으로 너희는 절도 하지 말고 오지도 말라. 헛것이니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미륵전을 나온 고수부님은 다시 대적광전으로 갔다. 불단 앞으로 다가선 고수부님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향해 꾸짖듯 말하면서 담뱃대로 석가모니불상의 머리를 탕탕 때렸다. “너는 어찌 여지껏 있느냐. 빨리 가거라.”
좀 희화적이고, 보는 이에 따라서는 간담이 서늘하기조차 하는 이 공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녕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일을 고수부님은 지금 천지공사로서 집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신도 차원이 아니라면 접근하기조차 난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도문과 금산사 미륵전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인간으로 오기 전에 금산사 미륵불상에 30년 동안 임어해 있었고 그때 고수부님이 안내하고 모셨었다는 것은 이미 논의하였다. 어천 직전에 증산 상제님은 “내가 미륵이니라. (…)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고수부님이 이따금씩 금산사 미륵전을 찾아와 치성을 드린 이유도 물론 거기에 있었다. 불가의 금산사 미륵전 미륵불상이 아니라 미륵불인 증산 상제님에게 치성을 올린 것이었다.
문제는 이 공사에서 고수부님이 ‘증산 상제님의 성령이 이제 미륵전을 떠났다’고 선언한 점이다. 고수부님은 자신의 선언을 확인하듯 요강에 오줌을 누어 미륵불에게 끼얹었고 ‘헛것’이라고 했다. 내막은 그러하였다. 증산 상제님은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고 유언한 직후 “내가 8월 1일에 환궁하리라”고 말했다. 1909년 6월 24일 어천한 이후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다가 8월 1일 천상의 호천금궐로 돌아가겠다는 얘기다.
증산 상제님의 장례식을 치른 뒤 뿔뿔이 흩어졌던 김형렬, 차경석, 김광찬 성도들은 같을 해 7월 그믐날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 미륵불을 보라’는 증산 상제님의 유언을 되새기며 금산사 미륵전으로 와서 [옥황상제지위]라는 종이 위패를 미륵불상에 붙이고 치성을 드렸다. 김형렬은 바로 그날이 증산 상제님이 환궁하겠다고 한 8월 1일인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일화에 따르면 증산 상제님의 성령이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렀던 것은 1909년 음력 6월 24일부터 같은 해 음력 8월 1일까지였다.
그해 동짓날, 고수부님은 동지치성을 봉행한 뒤 신도 120여 명을 소집하여 대공사를 행하였다. 24방위에 각기 다섯 사람씩 세우고 중앙에는 단을 높이 설치한 다음 고수부님이 단 위에 앉았다. 고수부님은 “이 공사는 후천 오만년 선불유(仙佛儒) 삼도합일의 운도(運度)를 다시 살펴 새롭게 하는 공사다”라고 결론부터 말했다.
‘후천 오만년 선불유 삼도합일의 운도’는 무엇인가. 이해를 위해서 증산도 우주론에 대한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때는 우주의 가을이 문턱에 와 있는 후천 가을개벽기 .
증산 상제님은 말한다.
지금은 온 천하가 가을 운수의 시작으로 들어서고 있느니라. 내가 하늘과 땅을 뜯어고쳐 후천을 개벽하고 천하의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후천선경의 무량대운(無量大運)을 열려 하나니 너희들은 오직 정의(正義)와 일심(一心)에 힘써 만세의 큰 복을 구하라. 이때는 천지성공시대(天地成功時代)니라. 천지신명이 나의 명을 받들어 가을 운의 대의(大義)로써 불의를 숙청하고 의로운 사람을 은밀히 도와주나니 악한 자는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멸망할 것이요, 참된 자는 온갖 과실이 가을에 결실함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이제 만물의 생명이 다 새로워지고 만복(萬福)이 다시 시작되느니라.(2:43)
삼척동자도 다 알다시피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요, 또한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길러져’ 이제는 저 들판에 무르익어 가는 황금의 곡식들도,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온갖 과일들도 농사꾼에 의해서 가을걷이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가을에 지는 낙엽같이 떨어져’ 부패할 것이다. 알곡이 되느냐, 낙엽이 되어 떨어지느냐 , 여기에는 그 어느 것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인간까지도.
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여름철’까지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던 유불선과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삼도합일의 운도’를 맞이한 것이다.
본래 유(儒)·불(佛)·선(仙)·기독교(西仙)는 모두 신교(神敎)에 연원을 두고 각기 지역과 문명에 따라 그 갈래가 나뉘었더니 이제 성숙과 통일의 가을시대를 맞아 상제님께서 간방 땅 조선에 강세하시매 이로써 일찍이 이들 성자들이 전한 천주 강세의 복음이 이루어지니라.(1:6)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하여 따르리라. ‘예수가 재림한다.’하나 곧 나를 두고 한 말이니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2:40)
증산도 우주론, 상제관에 기대면 증산 상제가 인간으로 온 것도 우주의 가을 개벽기에 ‘삼도합일의 운도’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온 증산 상제님은 “이제 온 천하가 대개벽기를 맞이하였느니라. 내가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이라”(2:41)고 하여 개벽을 통한 새 역사의 시작을 온 우주에 선언하였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2:13)고 선언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고수부님이 ‘삼도합일의 운도를 다시 살펴 새롭게 하는 공사’를 진행한다는 것이다. 단 위에 우뚝 올라앉은 고수부님은 고민환에게 [현무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담뱃대를 좌우로 휘두르는데 갑자기 서기 어린 노을이 일어나 도장 건물을 환하게 둘러쌌다. 이어 고수부님이 창을 한다.
“선지조화(仙之造化)요, 불지양생(佛之養生)이요, 유지범절(儒之凡節)이라(선도는 조화를 주장하고 불도는 양생을 주장하고 유도는 범절을 주장한다).” 창이 끝나고 고수부님이 단에서 내려오자 상서로운 노을이 흩어졌다.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이 집행한 바 있는 ‘가을 문명, 유불선 통일의 관왕(冠旺) 도수’(2:150), 종교문화 통일 공사(4:8)들과 유사한 공사라고 할 수 있다. 관왕 도수를 보면서 증산 상제님은 “…모든 술수는 내가 쓰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공사를 마무리했다. 여기서 ‘술수’는 물론 유·불·선을 가리킨다.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상제님은 종교문화 통일 공사를 행하면서 각 족속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정수를 뽑아 모아 통일케 하였다. “나의 도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 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仙)에 붙여 놓았느니라.” 고 하셨다. 깊은 논의는 생략하겠으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후천 가을개벽을 앞둔 천지의 가을시간대를 맞아 유·불·선의 정수를 뽑아 통일시켰다는 것이다.
증산 상제님의 이와 같은 공사를 고수부님은 ‘후천 5만년 선불유 삼도합일의 운도를 다시 살펴 새롭게 하는 공사’로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공사를 마친 고수부님은 성도들을 단속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 오장육부 통제 공부로 제 몸 하나 새롭게 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하시고 “후천 천지 사업이 지심대도술(知心大道術)이니라. 각자 제게 있으니 알았거든 잘 하라.” 하시니라.(11:182)
어디 당시 공사 현장에 참석한 성도들뿐이겠는가.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고수부님이 단속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후천 5만 년 천지 사업을 하는 모든 일꾼들의 마음이요, 일하는 자세일 터였다.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 미륵갱생(彌勒更生)
“하늘 아래 사는 놈은 다 내 자손이니 사람 대접을 잘하라.” (11:189:7)
해가 바뀌었다. 1928년, 그해는 새해 벽두부터 이른바 사상사건으로 나라안팎이 온통 시끌벅적하였다. 영등할머니가 시샘을 하는 듯 아직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그해 2월 사회주의자 34명이 한꺼번에 구속되는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은 여전히 암울한 피압박민족의 한 해를 예고하는 듯하였다. 무엇보다도 그 해는 증산계 교단, 그 중에서도 보천교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난 해였다.
그해 정월 초사흗날 치성(증산도에서는 ‘정삼치성正三致誠’이라고 부른다. 이하 같은 명칭으로 표기한다)을 마칠 무렵 고수부님이 별안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조종리 도장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성도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다행하게도 고수부님은 쓰러진 지 서너 시간 뒤에 깨어났다. 고수부님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둥글게 휘둘렀다. 옆에 있던 고민환, 박종오 성도가 처음에는 고수부님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때 문득 한 성도가 “상제님의 영정을 그리라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고수부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환을 비롯하여 도장에 머물고 있던 성도들이 증산 상제님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작업을 서둘렀다. 증산 상제님 어진을 그리려면 화가부터 찾아야 한다. 성도들은 김제군 백구면 가전리에 살고 있는 화가 김옥현(金玉鉉: 1878∼1960)을 불러 증산 상제님의 어진을 주문하였다. 어진이 완성됐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2월이다. 고수부님은 간부들을 소집하여 “상제님 영정을 다시 그려 봉안하라”고 명하였다. 간부들이 의논한 끝에 화가 정산(定山)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을 선정했다.
정산은 조선조 전통양식의 마지막 인물화가로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걸쳐 활약했던 손꼽히는 대가.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소위 ‘채석지(蔡石芝, 석지는 채용신의 다른 호) 필법’으로 일컬어지는 독특한 화풍을 개척한 인물이다. 고종어진과 흥선대원군, 최익현, 전우, 황현, 최치원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 20년이 넘게 관직에 종사하였던 정산은 1906년 전라도로 낙향하여 익산, 변산, 고부, 나주, 남원 등지로 전전하면서 초상화 제작에 몰두하였다. 1941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허영환, 『석지 채용신 연구』) 1928년 당시 조종리에서 멀지 않은 정읍군 용북면 육리에 살고 있었다.
증산 상제님 어진을 주문 받은 정산은 흔쾌히 응낙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다. 정산이 증산 상제님 어진을 거의 다 그려갈 무렵 고수부님이 찾아왔다. 고수부님은 그림을 보더니 담뱃대로 휙 걷어 젖히고 이어 담뱃대로 정산의 등을 내려치며 “이놈아! 증산을 그리라 했거늘…” 한 마디를 남기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정산은 차마 할 말을 잃어버린 표정이었다. 도장 간부들이 정산을 달래어 어진을 다시 그리게 하였다.
증산 상제님 어진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고수부님이 다시 찾아왔다. 어진을 보던 고수부님은 또 “증산을 그리라 했지, 누가 미륵을 그리라 했더냐!” 호통을 치며 정산의 등을 담뱃대로 때렸다. 그리고 어진을 담뱃대로 휙 걷어서 젖혀버렸다. 심한 모욕감을 느낀 정산이 화구를 수습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이때 고민환 성도가 나서서 정산을 진정시키고 다시 어진을 그리게 하였다. 정산이 세 번만에 증산 상제님 어진을 그렸다. 고민환이 고수부님에게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고수부님은 “그만하면 너희 아버지와 비슷하다.”하며 허락하였다. 증산 상제님 어진은 그해 3월 26일 고수부님 성탄절에 봉안되었다.
고수부님의 조종리 도장 시절, 치성 때가 되면 동냥을 온 한 거지가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먼발치에서 고수부님을 향해 절을 올린 뒤 돌아가곤 하였다. 그해 치성 때도 그 거지는 어김없이 나타나났다. 마침 식사시간이라 거지는 밥을 얻어먹으려고 맨 뒤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고수부님이 거지를 불렀다. “아이고, 이놈. 내가 너를 좋은 곳으로 보내 주마.” 고수부님은 부엌일을 하는 성도들을 향해 “이놈 밥 좀 줘라”고 말했다. 고수부님이 아직 수저를 들기 전이다. 성도들은 밥 퍼 줄 생각을 않고 자기 할일에 바빴다. 고수부님은 “너 요놈 먹어라”하고 자신의 밥상을 거지에게 밀어 주었다.
거지가 돌아간 지 며칠 뒤였다. 고수부님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야, 너희 놈들, 형제간에 우애가 그래서야 쓰겠느냐”하고 꾸짖었다. 영문을 모르는 성도들은 ‘우애 있게 지내려고 신도들 간에 서로 형님 아우하며 지내왔는데 어째서 저러실까?’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만경 삼거리 솔밭에 가면 너희 형제란 놈이 거기에 있을 것이니 가서 보고 오너라.” 고수부님이 말했다.
성도들이 만경 삼거리 솔밭에 가 보았는데 치성 때 왔던 거지가 얼어 죽어 있었다. 성도들이 거지를 땅에 묻어 주었다.
도장으로 돌아온 성도들을 보고 고수부님은 “참 좋은 일 하고 왔다. 그런 사람을 잘되게 해 주어야 후천이 올 것이니라”하고 말했다.
얼마 후 고수부님이 “내일 큰손님이 오니 대청소를 하라”고 말했다. 성도들은 서둘러 도장 안팎을 청소했다. 이튿날 삼베옷을 입은 누추한 차림의 한 노파가 도장을 찾아왔다.
“아이구. 저런 노파 때문에 어머니께서 대청소까지 시키셨는가. 야박도 하시구먼.” 성도들이 실망하는 투로 투덜거렸다. 성도들의 분위기를 모르지 않은 고수부님은 “없는 사람을 더 끔찍이 알라”고 당부하듯 말했다.
앞의 거지 일화와 함께 이 ‘노파’ 일화는 인류의 어머니로서 고수부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들이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같은 공사를 자주 행하였다.
하루는 태모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잘나든 못나든 모두 천지자손이니라.”하시고 “하늘 아래 사는 놈은 다 내 자손이니 사람대접을 잘하라.” 하시니라.(11:189)
그해 4월 초파일이다. 고수부님이 도장을 개창한 이후 4월 초파일치성을 봉행해 왔다. 물론 그해 4월 초파일 치성도 예년과 다름없이 봉행됐다. 그리고 치성을 봉행한 후 고수부님은 “4월 초파일 행사는 석가불의 탄신일이니 불가에서나 할 일이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세상 돌아가는 철을 찾아야 하나니 앞으로 치성은 절후를 찾아 봉행함이 옳으니라. 이것은 곧 본래의 뿌리를 찾는 일이니라. 앞으로는 미륵 운이니라. 선천 종교는 씨가 다 말라죽었느니라.”
절후란 24절기를 가리킨다. ‘절후를 찾아 봉행하는 것이 본래의 뿌리를 찾는 일’이라는 것은 증산 상제님 대도의 종지이기도 한 원시반본(原始返本) 정신에 따른 것이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 “이 때는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시대라”(2:26)고 선언했다. 그 선언 이전에 증산 상제님 또한 ‘원시반본의 도로써 인류 역사의 뿌리를 바로잡고 병든 천지를 개벽하여 인간과 신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1:1)한 것이다. 증산 상제님이 그러하다면 고수부님도 예외가 아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가 우주의 가을철에 해당한다고 했다. 가을에는 농부에 의해 가을걷이 되는 알곡이 될 것인가, 낙엽 되어 떨어질 것인가 두 길 중의 한 길을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가을은 곧 어떤 식으로든 통일(수렴)하는 계절인 까닭이다. 원시반본은 문자적으로는 ‘시원의 근본(뿌리)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가을의 통일(수렴)운동의 정신을 의미한다. 결실·추수하는 우주 가을의 때를 맞이하여 가을의 변화 정신에 따라 천지만물은 생명의 근원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도전』에 따르면 이 때 ‘반본(返本)’의 방향인 시원(始原), 뿌리[本]는 곧 조상, 민족의 주신 등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다. 원시반본은 보은(報恩, 넓게는 도통천지보은)을 통해 이루어지며 실천적인 면에서는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을 통해 달성된다. 원시반본이 보은, 해원, 상생과 함께 증산 상제님 대도의 종지가 되는 까닭이다.
공사 후반부에서 고수부님은 기성종교 시대는 가고 미륵의 시대, 다시 말하면 증산 상제님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공사 역시 증산 상제님과 지금까지 진행된 고수부님 자신의 공사와 입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장 가깝게는 지난해 9월 21일 금산사 대적광전에서 ‘…빨리 떠나라’고 꾸짖으며 담뱃대로 석가불상의 머리를 때리는 공사를 집행하였고 이날 공사에서는 ‘4월 초파일 행사는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다음 공사도 마찬가지다. 고수부님은 고민환, 박종오, 강원섭, 강사성, 유일태, 오수엽, 강춘택, 강대용 등 성도 수십 명을 늘여 앉히고 “오늘은 천상계의 신선세계에 사는 선관선녀(仙官仙女)의 제도와 풍경을 보여 주리니 모두 동북하늘을 보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모두 동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때 고수부님이 담배연기를 입으로 훅 내뿜었다. 동시에 오색구름이 일어나 사람형상으로 변하며 선관선녀의 모습을 이루었다. 고운 옷을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쓴 선관선녀들이 춤추며 기뻐하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가운데 붉은 봉황과 백학이 춤추듯 창공을 날아다닌다. 고수부님은 “다가오는 후천 선경세계가 저러한 형국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하루는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일은 다 신선(神仙)이 하는 일이니 우리 도는 선도(仙道)니라.” 하시고 “너희들은 앞으로 신선을 직접 볼 것이요, 잘 닦으면 너희가 모두 신선이 되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신선이 되어야 너희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느니라.” 하시니라.(11:199)
같은 날 고수부님은 다른 공사를 행하였다. 증산 상제님 어진을 모신 방문 앞에 단을 설치하여 향촉을 밝히고 치성 음식을 성대히 준비하여 진설하였다. 이어 강진용(姜鎭容)의 논 아홉 두락에 ‘금산사 불양답(金山寺佛糧畓)’이라 쓴 푯말을 세웠다. 무대가 마련되었으므로 인물들이 등장할 차례다. 고수부님은 고민환 성도에게 가사와 법복을 입힌 뒤에 “단 앞에서 24일간 천수경과 칠성경을 송주하라”고 명하였다.
“이 공사는 선천의 주불(主佛)인 석가모니의 운이 이미 갔으니 이제 후천 용화세계의 주불이신 미륵불을 봉영하는 공사니라.”
고수부님은 “천갱생(天更生) 지갱생(地更生) 인갱생(人更生) 미륵갱생(彌勒更生)”이라고 삼창한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증산 상제님은 일찍이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고 하였으되, 고수부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미륵불’ 증산 상제님과 함께 하늘도 새롭게 바뀌고 땅도 새롭게 바뀌고 사람도 새롭게 바뀐다는, 후천 대개벽을 앞두고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게 되는 ‘후천선경의 주불 미륵불 봉영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천갱생 지갱생 인갱생. 지금까지 우리는 천지공사에 대해 많은 논의를 전개해 왔고 선행연구에서도 천지공사에 대한 많은 연구가 없지 않았으나 고수부님의 이 한 마디만큼 ‘천지공사’의 개념규정을 정확하게 드러낸 말씀이 또 있을까. 천지공사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이 공정한 ‘우주 재판’을 통해 뒤틀린 자연 질서와 그릇된 인간질서에 대한 재조정 작업을 시도하여 우주 생명의 판과 틀을 새롭게 짜서 바꾸는 일이라고 할 때, 구체적인 목적은 (고수부님의 가르침 그대로) 천개벽(天開闢)과 지개벽(地開闢), 인간개벽(人間開闢)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개벽과 문명개벽, 인간개벽이다. 여기서 고수부님은 미륵갱생을 덧붙였다.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제24장 대사부 출세공사
“들어가기는 어느 구멍으로나 다 들어가 서로 잡아먹다가 나올 적에는 한 구멍밖에는 나오는 데가 없으니 꼭 그리 알라.”
그해 5월 고수부님은 간부 신도들을 불러 모은 뒤에 10개 항목의 ‘계율’을 내려 주는 공사를 행하였다.
(1) 투도(偸盜)하지 말라.
(2) 간음(姦淫)하지 말라.
(3) 척(隻)짓지 말라.
(4) 시기(猜忌)하지 말라.
(5) 망언(妄言)하지 말라.
(6) 기어(綺語)하지 말라.
(7) 자만심(自慢心)을 갖지 말라.
(8) 도박(賭博)하지 말라.
(9) 무고히 살생(殺生)하지 말라.
(10) 과음(過飮)하지 말라.
계율이 무엇인가. 신앙인으로서 수행생활의 규칙, 도덕적인 덕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을 일컫는다. 어원은 산스크리트의 ‘실라(sila: 戒)’와 ‘비나야(vinaya: 律)’로 원래는 불교용어이다. 그러나 불교의 계율에 해당하는 종교적 규범은 다른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교단의 규칙이라는 뜻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따라서 고수부님이 내려준 계율에는 당신의 도덕적 실천 윤리관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 주목된다.
고수부님은 왜 이 시점에서 계율을 내려주었을까. 성도들에게 심법공부를 계속 시키고 증산 상제님 시대를 거듭 선언하고 이제 계율까지 내려주는 공사를 행하는 고수부님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우선 조종리 도장 안의 내분을 지적할 수 있다. 문제는 조종리 강씨 신도들이었다. 원래 고수부님을 조종리로 모시고 왔던 그들은 대부분 감투욕과 권력욕에 빠져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분란을 일으켰다. 고수부님이 몇 차례 주의를 주었으나 도대체 뉘우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고수부님이 간부 조직을 개편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민환을 내무로, 고찬홍을 외무로, 그리고 사정방에는 전준엽을 동방주로, 이근목을 남방주로, 강원섭을 서방주로, 강운서를 북방주로 임명했다. 조종리 강씨 신도 중 원로격인 강응칠과 강사성은 빠지고 강원섭과 강운서 성도가 사정방에 등용되었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고수부님이 갑자기 조직개편을 한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고수부님이 그토록 우려하고 경계했던 조종리 도장의 내분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강응칠, 강사성 성도 등은 도장을 나가 아예 드러내놓고 고수부님을 비방하였다. 내분 양상은 살해 음모로까지 발전했다. 일차적인 타깃은 수석성도 고민환이었다. 고수부님도 그와 같은 움직임을 알았다. 조종리 강씨 신도들의 고민환 살해음모는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고수부님이 도장 밖으로 공사를 보러 갈 때는 고민환을 병풍 뒤에 숨겨둘 정도였다. 그것으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 있지 말고 몸을 피하라.” 고수부님은 고민환에게 말했다. 고민환이 밤을 틈타 고향 옥구로 돌아갔다.
도장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고수부님의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럴수록 더욱 큰 공사를 행하였다. 그것도 앞으로 전개될 도운 공사, 특히 자신의 후계자를 내는 공사가 이 무렵에 집중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두목을 내는 정읍 칠보산 상봉에서의 태자봉 공사(11:210), 백만 억 불(佛) 출세 축원 대공사(11:211)들이 그것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가고 가을 초입에 들어섰다. 이 무렵 고수부님은 종종 “자던 개가 일어나면 산 호랑이를 쫓는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내가 숙구지(宿狗地, 오늘날의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화호마을) 공사를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숙구지 공사’가 무엇인가. 1908년 어느 날 증산 상제님은 개의 창자를 빼낸 후 그 가죽을 둘러쓰고 느닷없이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크게 놀라 줄행랑을 쳤다. 며칠 뒤 증산 상제님은 문공신 성도에게 “잠자던 개가 일어나면 산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나니 태인 숙구지 공사로 일을 돌리리라”(6:75)고 말했다. 1909년 봄에도 증산 상제님은 문공신 성도를 주인으로 ‘후천 대개벽 구원의 의통 집행 공사: 숙구지 도수’(6:111)를 집행하였다. 숙구지는 문자 그대로 ‘개가 잠자고 있는 형상’의 땅이다. 이 공사에서 증산 상제님은 숙구지혈, 다시 말하면 잠자고 있는 개의 기운을 끌어와 후천 대개벽 구원의 숙구지 도수를 붙였다.
그렇다면 숙구지 공사에서 ‘잠자는 개’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 도운의 참 일꾼 추수자(대두목), 증산 상제님의 광구창생의 대업을 실현하는 참주인 되는 대사부가 바로 그 사람이다. 결국 숙구지 도수는 후천 대개벽을 앞두고 증산 상제님의 대행자에게 붙인, (증산 상제님의) 천지대업을 실현하는 최종 결론 도수가 된다.
9월이다. 고수부님은 “이제 때가 멀지 않으니 자는 개를 깨워야겠다”고 말하며 성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섰다.
고수부님이 공사 진행에 앞서 터트린 일성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때가 멀지 않았다’는 말씀에서 ‘때’는 무엇인가. 두 말할 나위 없이 후천 가을개벽의 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자는 개를 깨워야겠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증산 상제님의 숙구지 공사와 병행하여 읽어야 한다. 증산 상제님이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숙구지에서) ‘잠자는 개’ 도수를 정해 놓았고, 고수부님은 지금 그 ‘잠자는 개’를 깨우는 공사를 집행하고 있다. ‘숙구지 도수’가 후천 대개벽 구원의 도수라고 할 때 후천 가을개벽이 그만큼 임박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고수부님이 도착한 곳은 물론 태인 숙구지. 공사내용은 그러하였다. 먼저 마포로 일꾼들 옷 30벌을 지어 동네 머슴들에게 입힌 뒤 통 하나에 고깃국을 담고 밥을 잘 말아 뜰 앞에 놓으며 동네 머슴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고수부님은 그들에게 “많이 먹으라”하고 따뜻하게 말했다.
공사를 마친 뒤에 고수부님은 “이제 잠든 개를 깨웠으니 염려는 없다”고 하였다. 후천 가을개벽의 순조로운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공사를 진행한 뒤 고수부님은 비로소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사로서 후천 가을개벽을 앞두고 증산 상제님의 대행자 대사부가 출세하게 될 것이다.
며칠 뒤 고수부님은 갑가지 웃옷을 벗어 속곳 차림으로 젖가슴을 늘어뜨린 채 “윷판 가져오너라”고 하였다. 고수부님이 평소 윷놀이를 좋아하였으므로 윷판을 가져오라고 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옷을 벗어 젖가슴까지 늘어뜨리는 모습을 보면 무슨 큰 공사를 보는 것이 분명하다. 한 성도가 윷판을 대령하였다. 고수부님은 앞에 놓인 윷판의 출구를 항문 쪽으로 돌려놓았다.
“들어가기는 어느 구멍으로나 다 들어가 서로 잡아먹다가 나올 적에는 한 구멍밖에는 나오는 데가 없으니 꼭 그리 알라. 윷놀이는 천지놀음이니라.”
고수부님은 또 “나는 바닥에 일(一) 붙은 줄 알고 빼려 드니 누구든지 일 자, 삼 자를 잡아야만 임자네”하고, 다시 “같은 끗수면 말수가 먹느니라”하고 결론을 지었다.
이 공사는 증산 상제님의 1908년 문공신 성도를 주인으로 하여 보았던 ‘신천지의 참주인 진주(眞主)노름의 독조사 도수’(5:226), 1909년에 보았던 ‘도운을 추수하는 매듭 일꾼’(5:357) 도수와 연장선상에 있는 도운공사다.
1908년 공사에서 증산 상제님은 문공신 성도에게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고 했고, 1909년 공사에서 “현하대세가 가구(假九)판 노름과 같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고 말했다.
이 공사에서 ‘진주’는 증산 상제님의 참일꾼 추수자로서 (증산 상제님의) 광구창생의 대업을 실현하는 ‘참 주인’을 일컫는다. ‘독조사’란 오직 제 것으로 사람을 살리고 증산 상제님의 도판을 개척해서 인재를 기르는 지도자의 길을 가리킨다. 자자손손 자신의 청춘, 재산, 정성을 모두 바쳐 무에서 유를 개척하여 창업을 실현하는 것이 진주의 사명이요 독조사의 사명이다.
고수부님 공사 말씀을 주목하자. 윷판에서 ‘들어가기는 어느 구멍으로나 다 들어가 서로 잡아먹다가 나올 적에는 한 구멍밖에는 나오는 데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1928년 현재 증산 도판에서 보천교를 비롯한 각종 난법 단체가 활개를 치고 있으나 결국 서로 잡아먹다가 끝날 때는 한 구멍, 증산 상제님과 고수부님의 대행인 정통 지도자 휘하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공사의 재료가 된 윷판을 주목하자. 굳이 공사뿐만 아니라 고수부님은 자주 윷판을 공사재료로 활용하였다. 윷판의 바깥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고 안의 모진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 가운데 점은 북극성을, 옆의 스물여덟 점은 28수(宿)를 본뜬 것이다. 말이 윷판을 돌아서 빠져나가는 길고 짧고 중간이 되는 4행로는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의 4계절을 비유한다. 이는 천체도를 축소시킨 것이다(김문표, 〈사도설〉). 고수부님이 윷놀이는 천지놀음이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 고수부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이와 같은 우주적 거대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