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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망각의 틀을 깨는 석공의 시로(詩路)
한 기 홍
(시인. 국제펜인천지역회장)
오늘은 또 내 생의
어떤 부분을 다듬어 볼까
시를 쓴다는 것은
여태껏 살아온 자아를 다듬는
일은 아닌지
낙산사의 거대한 해수 관음을 보며
커다란 바위 속에 갇힌 석불 구제한
석공의 구도(求道)는 무엇이었는지
아마도 그가 저 자혜로운
관음은 아니었는지
나는 평생 나를
구제할 수는 있을는지
낙산사 거대한 해수 관음 석불에서
석공 같은 작은 나를 엿본다
<망각의 틀 깨는 석공> 전문
청산(淸山) 이영균 시인은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했다. 50년대생들 태반이 그러하듯이 시인도 젊은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며, 인천에 정착했다. 어느덧 고희를 목전에 둔 그는 자타공인 인천사람이다. 인천에 터를 잡고 활동하면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인으로서도 그의 일상은 늘 분주하였지만, 어릴 적부터 품어온 문학에의 열망을 만년에 이르기까지 열정적으로 발산시키고 있다. 그의 성실함과 순수한 열정은 문단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다. 우직한 표정과 늘 팽팽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투박한 진심이 그의 기도(氣度)를 감싸고 있다.
필자와의 첫 인연은 아마도 2006년경이었던 것 같다. 당시 갯벌문학회 주간으로 있던 필자와 장현기 명예회장, 심종은 회장, 이준규 수필가와 같이 하인천 차이나타운 중화요리집에서 수인사를 나눈 기억이다. 이후 문단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시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시인은 항상 올곧으며 불굴의 시혼(詩魂)을 사르는 강직한 인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근 이십여 년 동안 왕성한 필력과 도도한 서정으로 십여 권의 시집과 산문집 등을 집필한 시인의 그칠 줄 모르는 창작열은 그야말로 ‘문단 훈장감’이다.
혹자는 다작달필(多作達筆)을 은근히 경계하는 지적도 있으나, 그것은 태작(怠作)의 변명일 뿐이다. 일찍이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歐陽脩 1007~1072)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삼다(三多)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않은가. 그렇다고 휴필없는 끈끈한 시인의 작품이 평상화 된 작품들일까. 본 시집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부드럽고 섬세하며 메타포(metaphor)의 달인인지 드러난다.
그의 작품 전편에 흐르고 있는 시에 대한 갈망과 애착은 가히 독자로 하여금, 찬탄과 경의를 품게 만든다. 위 <망각의 틀 깨는 석공>에서 볼수 있듯이 마치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으로 시인은 오늘도 서 있다.“시를 쓴다는 것은/ 여태껏 살아온 자아를 다듬는/ 일은 아닌지” 라며 시작업의 신성하고, 순수하며 수고로운 행위에 자신이 걸어야 할 삶의 진척을 진지하게 투영하고 있다. 그것은 중소규모 회사를 운영하며 필연적으로 겪는 자본주의와 물신주의의 그늘과 상반되는 맑고 순구한 서정의 세계, 즉 문학을 통한 자아실현의 창구로서 자신을 갈고 닦는 지혜로운 시인의 길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 나를/ 구제할 수는 있을는지/ 낙산사 거대한 해수 관음 석불에서/ 석공 같은 작은 나를 엿본다” 라는 짙은 성찰과 다짐으로서, 시인의 구도자로서의 시세계를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시집 서문으로 “오늘 당장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그대를 위해/ 한 알의 선한/ 사랑을 심으리다”라고 시적인 운율로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휴머니즘을 함유하고 있는 진정한 시인의 모습으로 임하고 있다. 현금 세상을 보라. 물욕과 허영, 끝간데 없는 권위에의 추종, 온갖 권모술수로 이룩되는 회색빛 장벽과 바벨탑들. 이 삭막하고 황량한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망각의 틀을 깨는 석공’으로서 시인은 고독하게 시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체험의 시 작법과 조응하는 전경화(前景化) 시도
전경화(前景化)의 사전적 풀이는 이렇다. “언어를 비일상적으로 사용하여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일. 상투적인 표현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느낌이나 지각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으로 프라하학파가 언어학과 시학에서 쓴 용어이다.” 즉 전경화는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 개념에서 유리티냐노프가 사용하면서, 이를 체코 프라그학파의 무카로브스키가 발전시킨 것이다. 전경화는 음운, 어휘, 통사 등의 층위에서 시의 여러 요소 중에서 일군의 요소가 전경화되고 나머지는 배경화(back-grounding 후경화)된다.
시인의 시편에는 이 전경화의 사례가 다수 목격된다. 시인의 시에 대한 고구(考究)의 심도가 웅숭깊은 골짜기처럼 늠연하게 빛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삶의 이런저런 순간들과 희노애락의 세상사에 흐르는 물처럼 유영하며, 조응해나가는 시적 지혜 또한 튼튼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록 인생의 신산한 단면에서 토로되는 시인의 독백일지라도, 시적자아의 울림이란 면에서 진폭이 크다.
행시에 떨어져 풀 죽은 채
고시원을 나와
시름에 겨운 몸 이끌고 산책길에 나서는데
햇살이 노곤히 몸 뉘라 감싸와
쓰러지듯 풀숲에 몸 뉘어 지그시 눈 감았을 때
나른한 내 귓속에 속삭이는 누군가 있어
실눈 뜨고 귓속말 쫓아 돌아보니
벼려진 듯 다소곳한 들꽃들
마치 고시촌 쪽방에
빛 한 알 두 알 세던 그들만 같아
가만히 들여다보니 중하다
자세히 보니 귀하였다
순간 우린 그 풀꽃이었구나
불현듯 빛 하나
소스라쳤다
<알량한 그릇 (부제)아! 그대들이여> 전문
시집 표제시이기도 한 작품이다. 여기에서 전경화는 당연히 결미 부분이다. “불현듯 빛 하나/ 소스라쳤다”. 시인의 젊은 날 청운의 꿈 실현 시기의 아픈 좌절을 그렸다. 행정고시를 목표로 ‘열공’하는 벌집같은 고시촌의 정경이 펼쳐지고, 연이은 낙방에 의기소침해져 풀밭에 누워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무언가 심안을 헤집는 채찍같은 질타의 소리가 들린다. 지천에 깔린 풀꽃이었지만, 낙방자의 눈에는 새로운 각성의 상징으로 눈에 들어온다. 현재의 아픔과 시련이 물거품 같은 세월의 유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각오의 전환, 어쩌면 그 젊은 청운의 시절에 시인은 해탈의 강물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 해탈의 상징은 풀꽃이었다. 마치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연상되는 “가만히 들여다보니 중하다/ 자세히 보니 귀하였다/ 순간 우린 그 풀꽃이었구나” 시구에서 보듯이 ‘단애(斷崖)에 달린 석청’처럼 우러러 보던 목표(행정고시)도 결국 하나의 욕망이었을 뿐임을 탄식한다.
짙은 회한과 고시촌 골방의 땀 냄새를 훍어 내리며 지나온 역정이 부질없었음을 뇌까리고 있을 때, 찰나의 어떤 깨우침이 선가(禪家)의 화두처럼 뇌리를 강타한다. 지나온 길은 ‘알량한 그릇’임을 깨달으며, 시인은 외친다. 아! 그대들이여…. 그래서 “불현듯 빛 하나/ 소스라쳤다” 라는 심득(心得)의 절구가 전경화로 귀착되는 것이다.
어두울 날이 가까웠음을
침침해지는 눈을 가까스로 뻗어
널 더듬거리면
자판조차도 희미해서
아, 인지 어 인지
눈 부라려도 강기슭 물 안갯속
아직도 생 써내려야 할 공 페이지
깎아 절벽 채석장 무수한
백석 병풍만 같은데
말간 내 속 백지려니
퇴색한 낙엽만 수북이
그래도 희미한 호롱 밑인 듯
오타일망정 기필코 백서 채워보는
점자 가득한 채석장
늙은 반딧불
* 폐채석장 포천아트밸리에서
<유추(類推)> 전문
이 시에서도 결어(結語)의 시맛이 상큼하다. “늙은 반딧불”은 시인의 자화상이다. 시력의 저하로 노안이 된 시인의 처지는 내면의 소리조차 더듬거리고, “말간 내 속 백지려니”와 “점자 가득한 채석장”으로 웅변된다. 포천의 폐채석장이 자못 음울한 시인의 자화상으로 의인화되고 있다. 시인은 눈에 보이는 온갖 사물과 행동양식을 통해 항상 성찰의 마음을 시로서 승화시키고 있다. 단순히 한편의 시를 탈고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자기성찰의 일기로 쓰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오타일망정 기필코 백서 채워보는” 부분에서 일상화된 시에의 집념과 경건한 작가의 자세가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태도는 문사들의 표상이요, 귀감이라 할만하다. 전경화를 이루는 “늙은 반딧불”은 시적배열과 이미지의 착상에도 성공하고 있다.
세상의 마지막을 벗듯
사자(死者)의 팬티가
갈아 입혀졌다
단 한 번도 남의 손
빌려 본 적 없는
숨김
살아생전
그의 행적 숨겨진 듯
고요하다
하지만, 그 뒷말은
<사자(死者)의 팬티> 전문
<사자의 팬티>는 축약된 시어와 더불어 시인의 산문형식의 시작 태도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독특한 시형식이다. 행과 연을 의식치 않는 산문조의 시풍을 벗어나 어쩌면 일본의 하이꾸(俳句)를 여러 편 겹쳐놓은 듯한 입체감이 농밀한 시다. 필자는 이 시에서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는 전경화의 정수를 보게 되었다. 시의 4개 연마다 팽팽한 긴장(tension)이 어우러지고 있는데, 한껏 불려진 풍선처럼 우려스런 만복(滿腹)을 조심스레 지켜보다가, 마무리 연의 “하지만, 그 뒷말은”에서 팽팽한 긴장의 가죽끈이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창공으로 훨훨 비상하는 카타르시스를 뿌려주었기 때문이다.
영안실에서 사자의 시신을 염습하는 장면을 관찰했던가. 시인의 눈은 삼라만상과 길흉화복의 어느 지점에서도 매의 눈으로 빛나고 있음을 확인한다. “세상의 마지막을 벗듯/ 사자(死者)의 팬티가/ 갈아 입혀졌다”는 불가변의 진리. 사람들은 저마다 ‘운명적인 인생’을 살면서 온갖 영광과 오욕을 거쳐 마침내 때가 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개체로서의 자존감으로 자신의 신체에 대한 타인의 손길을 엄히 다스린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도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손에 의해 처리된다. “세상의 마지막을 벗듯” 이미 나를 상실한 세계는 무의미한 태초의 혼돈 공간일 뿐이다. 시인이 착시(着視)된 곳은 망자의 팬티이다. 팬티야말로 사람 모두에게 가장 은밀하고, 부끄러우며 성적 보호망의 최전선에 위치한 방어막이다. 시재(詩材)로도 얼굴을 붉히게 되는 과감한 영역이다. <사자의 팬티>는 이런 낮선 이미지를 공개된 마당으로 끌어내는 훌륭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다.
둘째 연 “단 한 번도 남의 손/ 빌려 본 적 없는/ 숨김”과 셋째 연 “살아생전/ 그의 행적 숨겨진 듯/ 고요하다”에서는 모든 인간의 생전의 모습, ‘동물로서의 인간, 본능으로서의 인간, 예절과 격식으로 치장한 인간, 포효하며 세상을 좌시한 인간, 내밀한 그리움과 포한을 간직했던 인간’ 등의 다양한 군상의 이미지 유추와 더불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적 세계관 마저 보이고 있는데, 짧게 함축된 시어 속에 깃든 팬티의 만화경을 보는 듯 하다. 그렇다. 사자의 육신과 교체되는 팬티에게 무슨 변명이나 웅변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망자의 생전 일생의 역정은 누군가 객관적으로 피력해보아야 할 뿐이다. 그런데 시인의 예리한 시안(詩眼)은 영안실 염습공간에서 시공을 초월한 그 이면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로 하여금 찬탄케 했던 마지막 연 “하지만, 그 뒷말은”은 전경화의 오의(奧義)를 꽤뚫은 절구라고 평한다. 앞서 분석한 후경화(背景化)의 일반적 전경화 전환의 선을 뛰어넘는 탁월한 시어 배치다. 시에서의 ‘낮설게 하기’와 간결미를 차치하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뒷말(결과)에 대한 폭발적인 궁금증을 유발시킨다는 점, 다소 투박하면서도 직설적인 진행형 결미어, 그리고 마치 퇴고(推敲)의 텍스트 장면으로 회자되는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와 가도(賈島)의 ‘노상 시문답(路上 詩問答)’ 고사가 연상되는 것이다. 고사의 내용은 가도가 짓던 시의 마지막 구절 “僧敲月下門(승고월화문-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을 ‘밀거나(推)로 할까, 두드리는(敲) 걸로 할까’ 망설이다가 한유에게 물으니, 두드리는 것이 낫겠다는 조언을 받아들인 다. 문을 민다는 것은 자연스레 들어간다는 의미로 평범한 결과가 유추되지만, 두드린다는 것은 향후의 반응과 변화가 무쌍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 것으로서 관심과 호기심의 긴장성을 유발시킨다. 과연 두드림 끝에 누가 나와서 반길까? 냉혹한 축객령의 고함이 흘러나올까? 아니면 걸어나오는 농염한 여인의 모습이 문틈으로 보일까? 실로 한 편의 시는 무한대의 상상력으로 영원히 진행형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뒷말은”은 가히 퇴고의 미래지향적 시어를 연상시키는 성장형 결미로서 시맛을 한껏 충족시킨다. 여운의 맛과 팽팽한 긴장미를 숙성하는 <사자의 팬티>는 인간의 치부와 허영, 흉터, 애환까지도 섭렵되는, 탁월한 시경(詩境)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문학 시류를 풍미하는 ‘낮설게 하기’는 아직도 텍스트를 이루는 작법이다.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들은 모름지기 시적 긴장감을 줄 수 있도록 전경화 장치를 통해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행간 사이에 감추어놓은 시인의 뜻을 찾아내 시의 묘미와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의 동반과 순응, 그리고 섭리에의 눌함(吶喊)
① 자연을 매개로 한 성찰의 시안(詩眼)
옥빛 제각각이던 이슬들
하나이기로 호에 담긴 옥수
미풍에도 어디서부터랄 것 없이
일제히 파랑에 든다
(중략)
하나의 빛으로 길 밝히기 위해
하나이기로 모여들어
합을 이루어 그 빛 찬연함
온전히 작은 이슬이었을
저들의 응집임을
<윤슬> 부분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말한다. 아름다운 말로서 시어로 자주 채택되는 단어다. 시인은 윤슬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영롱하게 전해져” “보람으로 살아난다”로 명징하게 지칭하고는, “하나의 빛으로 길 밝히기 위해/ (중략) 저들의 응집임을”이라며 윤슬의 압축된 수고와 노고를 빌어, 자연의 밝은 면들이 그저 당연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설파하고 있다. 자연 순응의 섭리가 유무형의 치열한 조응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을 토로한 것인데, 시인의 보편타당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로서의 굳은 심지와 정방향 직립보행을 밝히는 서사가 돋보인다.
<나목 밑에서 길을 찾다>에서는 한단계 더 완숙해진 자연과의 조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면에 켜켜이 쌓인 고뇌의 조각들을 벌거벗은 나무로 치환하여 성장시(成長詩)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늘 무성한 나무가
더워하는 이들 불러들이는 법
호기 다 잃고 뙤약볕과 씨름 중인 저 나목
안타깝다. 누군가의 시원한 그늘이길 꿈꾸었을
어떡하면 다시 그늘 드리울 수 있을까
져버린 관심 되살릴 수 있을까
이제라도 모두 내려놓는 게 사는 것
<나목 밑에서 길을 찾다> 부분
“이제라도 모두 내려놓는 게 사는 것/ 그늘 무성한 나무가/ 더워하는 이들 불러들이는 법”. 나목의 상징성은 해탈과 같다.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는 벌거벗은 육신의 창피함도 없고, 몰래 숨기고 있던 치부의 창피함도 없다. 그저 생사필멸의 섭리에 의한 윤회적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자연의 섭리에 “이제라도 모두 내려놓는 게 사는 것”이라는 생명의 역동성을 부여해 무위자연적 세계관에서 유위자연적 세계관으로의 역설(逆說, paradox)로 맺고 있다. “내려놓음”과 “사는 것”의 모순치를 순치하는 시적 기교다. 이점은 미국의 비평가 부룩스(Cleanth Brooks, 1906-1994)가 말한 “시인이 말하는 진리는 역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지적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제나저제나 그렇게 40년을
기다렸다. 아니, 몰랐다
무엇을 기다렸는지
왜 그렇게 종종거렸는지
(중략)
그래도 문득
밑동이 굵어졌다는 걸
이제 조금 안다
거울 앞에 선 그 나무
나이테가 깊다
<나무> 부분
당신은 언제부터 나의 일부였나요
혹한보다 더 무서운 벌목꾼들이 지나갑니다
전쟁 내내 군수 물목이 될까 떨었지요
나를 살찌우던 그 빽빽하던 여송(女松)들 하나둘
뿌리가 잘려 적송(赤松)이 되어 군수물자로 끌려갔지요
(중략)
성난 불길이 노도처럼 번지기 시작하였지요
나를 에워싸고 있던 소방관들이 물대포를 쏘자
여송(女松)들이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지요
(중략)
불타버린 내 몸뚱이에서 나의 일부가 쑥쑥 자라나
헐벗은 나를 위로하며 다시는 산불 없으리라
오래전 울창했던 소나무 숲으로 나의 기억 끌어갑니다
온화하고 싱그러운 여송(女松)의 숲, 숨결 깃든
백두대간 그때로
<금강송 아직도 울창하지요> 부분
시인의 작품 중에는 나무를 시제로 한 시가 눈에 띈다. 작가들의 시 짓기의 대상은 만물을 아우른다. 특별히 나무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이채로울 건 없다. 하지만 시인의 인식 속에 위치한 나무의 상징성은 깊은 애환적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나무야말로 인간이 겪는 세파와 같은 혹독한 사계절의 순기(順氣)를 고스란이 웅변하는 생명체다. <나무>에서 “그래도 문득/ 밑동이 굵어졌다는 걸/ 이제 조금 안다/ 거울 앞에 선 그 나무/ 나이테가 깊다”는 시인의 말은 나무와 시인을 동일시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방편으로서 울림이 크다. 숱한 도전과 갈등의 연속, 잦은 좌절과 성에 차지 않는 성취를 경험하면서, 인간은 나무와 같이 나이테를 늘려가지만, 종국에는 허무와 탄식 뿐인 ~ 어쩌면 소수의 성공한 사례를 빼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인생역정인 ~ 상처뿐인 영광처럼 “밑동이 굵어진” 탄식을 뱉고 있다.
<금강송 아직도 울창하지요>에서는 금강송을 시인으로 의인화하면서도, 수년 전 동해안 울진 삼척지구 대형산불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당시 타버린 금강송 소나무 여송(女松)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금강소나무는 나무줄기가 붉어서‘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타버린 내 몸뚱이에서 나의 일부가 쑥쑥 자라나/ 헐벗은 나를 위로하며 다시는 산불 없으리라” 는 시인의 외침은 자연사랑과 내면의 자아성취가 굳건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희구의 시선이 아닐 수 없다.
② 지극한 서정과 어우러지는 공감각적(共感覺的) 시선
그대가 떠났다고 생각했을 때 내겐
한없는 형형색색 뒤엉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무형으로 그대 피어나
아무 곳에든 없는 듯 아련하게 되살아오는
애잔함이 늠실늠실 밀려드는 윤슬이 그러했소.
그 섬 이어 잡고 오라 손짓하던 사고
고스란한 둑길 그대인 듯
찰방찰방 노을 속으로 사라져가도
내 안에서는 놓아주지 않아
썰물에 씻긴 듯 밀물에 깎긴 듯
먼 연락선의 기적처럼 점점 또렷해져만 와
바람 가르며 선창으로 달려가
물결에 드리운 불빛 되어
그대인 듯 철퍼덕 뱃전 쓸어안소.
그러면 곧 어둠에 묻혀버린 윤슬 새듯
별들 밤바다에 쏟아부어
선창가에 온통 불꽃 나무를 심소
화려한 듯 번민만 더 깊어
까무룩 그 끝 외딴 섬에
*선재도에서도 길이 사라진 목섬 바라보며
<외딴 사랑> 전문
<외딴 사랑>은 본 시집의 작품 중에서도 수작으로 뽑아본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 앞바다 선재도 옆의 작으마한 섬 ‘목섬’이 밀물로 갯벌이 잠기면서, 통행로가 일시간 사라지는 조수(潮水) 현상에서 ~ 시인의 착안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대개의 시편들이 바탕에 애잔함을 깔아 훼이드 아웃(Fade Out)처럼 점차 슬픈 정조를 띄어가는 중에도, 이 시에서는 애잔함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서정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고도(孤島)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과 내면에 흘러내리는 쓸쓸한 의식의 흐름이 “늠실늠실” “찰방찰방” “철퍼덕” “까무룩” 같은 의성어(擬聲語)나 의태어(擬態語)를 동원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감각적인 감흥을 선사하는 점도 참신하게 다가오고, 펼쳐진 정경에 대한 서정적 묘사와 인간의 고독한 양태를 내밀히 토로하고 있는바에 현실감 있는 시의 맛을 획득할 수 있다.
“썰물에 씻긴 듯 밀물에 깎긴 듯/ 먼 연락선의 기적처럼 점점 또렷해져만 와/ 바람 가르며 선창으로 달려가/ 물결에 드리운 불빛 되어/ 그대인 듯 철퍼덕 뱃전 쓸어안소.”. 누군들 회한에 젖은 사랑 하나쯤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아마도 섬의 고독한 절규가 가이없는 그리움과 일편단심이었던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는, ‘시인 심안에 아로새겨진’ 필생의 ‘간직된 연민’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목섬은 바로 시인 자신이요, 애타게 찾아 헤메던 구원(久遠)의 해원(解冤)일 터이다. 그러나 심안에 각인된 애상은 쉽사리 해원되지 않는 법이다.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혹은 까도 까도 벗겨지기만 하는 양파처럼, 아로새겨진 애상과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은 멍에처럼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결미에서 전경화된 절구를 토해 놓는다. “까무룩 그 끝 외딴 섬에”.
‘까무룩’은 의식이나 기억이 순간적으로 흐려지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로써, “선창가에 온통 불꽃 나무를 심는” 포구의 을씨년스런 불빛을 유인한다. 그래서 쓸쓸한 시인의 내면에 흘러내리는 고도(孤島)의 심경을 여과없이 수식한 시어로서 이 작품에서의 존재가 탁월하다. “그러했소” “쓸어안소” “심소” 등 봉건적 리듬 채용도 그리 진부하지 않게 의식의 흐름과 서정이 압도하고 있다. 작가는 모름지기 머릿속에 떠오른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이미지를 생성해야 한다.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 畵中有詩) ~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곧 시가 그림이고 그림이 시다.
울타리에 자글자글 산수유
짝 잃고 고국 그리는 공주만 같은데
그녀의 아기 같은 개나리 차례 지켜 피워도
천진난만 철부지라 여겨만 지고
목련 널브러져 넉넉한 듯
뚝뚝 질 때는 왜 그리 처량하던지
대문 굳게 닫힌 과수댁 청상과부만 같다
벚꽃은 또 어떻고 꽃잎 흐드러져 꽃보라 칠 때는
꽃비 황홀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한 것인데
비바람이라도 곁들이는 날에는
처량도 그런 처량함이 없어
발아래 흐느낌만 흥건한 것이네
<꽃잎 흐드러진 나 하나의 봄날> 부분
봄날은 꽃의 세상이다. 만물도 사람도 꽃처럼 활짝피어 생명의 찬가를 합창한다. 이 흐드러진 봄날의 가운데에서 시인은 숨막히는 상춘곡을 부르고 있다. 찬사를 이루는 시어들의 도도함도 봄빛에 허덕인다. “자글자글 산수유” “목련 널브러져 넉넉한 듯” “발아래 흐느낌만 홍건한~”의 경탄이 독자의 숨결마저 가쁘게 한다. 공감각적 시어채용은 현장감을 고양시키고 몰입하게 만드는 시의 촉진제다. 자글자글한 꽃들의 행복한 비명이 온천지에 널브러져 홍건히 젖는 봄날의 합창이 활자를 떠나 찬란한 대기 속을 헤엄치는 영상을 연출한다. 시인의 짙은 비유는 ‘매화를 선비라 칭송’하며, “홍매를 봐야 설중매가 연상되고”, “진달래는 심성 여린 누이” 라 하며, “철쭉은 진달래의 오라비” “산수유는 짝 잃고 고국 그리는 공주” “목련은 과수댁 청상과부”라 명명하는 비유법의 총화를 보여준다. 실로 봄날의 불길처럼, 심사마저 화르륵 태워버리는 공감적 시어의 흡인력이 낭창낭창하다.
비에 다 씻긴다
빗방울에 투명한 비닐우산의 얼룩 다 씻긴다
땀범벅이던 소년의 얼굴에 흘러내리던 땟국물
우산 없이 젖은 어깨 위 빗물
말라가며 풍기던 갈증
빗물에 젖어 해진 운동화 비집는
발가락 끝 흙탕에 질퍽하던
그 가난한 흔적들 이젠 일부러 젖고 싶다
일부러 처마 끝에 서서 적신다
낙수에 신발을 바짓가랑이를 손바닥을
그러던 그 옛적 아버지의 푸념들
생이 다 눅눅하구나
한평생을 오늘 다 쏟는구나
오늘 다 젖는구나
후련하게 깨끗하게 짤막하게
2만여 일이 하루에 다
<생이 다 젖을 때> 전문
이영균 시인의 시편들을 접하면 약간은 거친 듯하면서도, 싱그러운 초고(草稿)의 원초적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수없이 갈고 닦아 내놓은 절차탁마의 매끈한 문장보다는, 이제 막 잡은 싱싱한 생선을 수족관에 넣기 전의 파닥이는 긴장감과 투박스런 ~ 초벌 인쇄의 잉크냄새 같은~ 육필 원고지 향이 맡아진다. 거개의 시들이 산문형식의 작법상 더욱 도드라진다. <생이 다 젖을 때>는 그런 투박한 향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 작품이다. 결미에 “2만여 일이 하루에 다” 젖을 만큼, 절실한 빗물(찰나간에 깨닫는 삶의 노정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흠뻑 뒤집어 쓴 시인의 고뇌가 마치 눈앞에 서 있는 듯 생생하다. 이러한 감흥은 독자로 하여금 공감각적 표현의 정수를 맛보게 한다.
시인의 어깨에 짊어지고 심안에 늘 붙어있는 ‘삶의 신산한 고뇌들’을 빗물로서나마 정화 시키려는 시심이 자못 비장하다. “한평생을 오늘 다 쏟는구나/ 오늘 다 젖는구나/ 후련하게 깨끗하게 짤막하게/ 2만여 일이 하루에 다”. 열거법(列擧法)을 활용한 시어배치도 적절히 조화를 이룬다. 현대인에게 앙금과 질곡들을 몽땅 비워버리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법. 이 갈증의 해법을 후련한 시어로 치환하여 한바탕 시원한 방뇨라도 한 듯한 기분을 선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시인의 절묘한 시적기교가 아닐까.
③ 시대(時代)에 반응하는 시인의 촉각과 의식(意識)
작은 실수가 온 산을 태워
점점 큰불로 불길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인데
작은 섬 이레씩이나 불 질러댔으니 무엇이 남아났겠소만
끝까지 악에 받쳐 살아남았을 저 가시나무 한 그루
(중략)
그날의 화마 씻은 듯 잊고서
피멍의 그 4월이 55년이나 지나서야 규명에 들어갔으나
그때도 불씨 흉하게 곳곳에 남아있어
이데올로기니, 연좌제니, 분란 여전하였네
차라리 그것을 천명이라 여겨서
잡초 무성하게 버려진 마을이 되고 싶었을지도
이쯤에서 그때로 돌아가 본들 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아직도 살짝 재티만 걷어내도 되살아나는 산불
퍼렇게 질려서 될성부른 떡잎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듯
곳곳에 살아오는 사월의 절규여서
가슴을 열고 그 숲 안아보면 푸르름 그만한데
조심스러운 발끝에는 아직도 불씨가 밟히오
(중략)
잿더미가 되어버린 심상 되돌릴 수 없어
주상절리인 듯 회복 까마득한 절벽이고
고립무원의 섬 혹자들에겐 이미 잊힌 사건인데
잊혔다고 그 섬 산불의 아린 상처 가셨으리오
올바른 진상 규명 뒤에야 반석에 다시 설 것인데
<산불 - 제주 4.3 사건 -> 부분
시인의 시안은 시사(時事)를 거르거나 지나치지 않는다. 사회 곳곳의 부조리한 구석과 정치상황의 변화와 몰상식의 현장을 해부하여 통렬한 펀치를 날리기도 한다. 4.3사건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큰 오점으로 비극적 종결에 대한 작금의 해석과 처우가 아직도 분분한 현안사항이다. 시인의 눈길은 부질없이 희생되어 간 민초들의 원혼을 보듬고 있다. “대부분 멋모른 채 불길에 휩싸였을”이라던가, “이쯤에서 그때로 돌아가 본들 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으로 운명적 희생을 위령하면서도, “잊혔다고 그 섬 산불의 아린 상처 가셨으리오/ 올바른 진상 규명 뒤에야 반석에 다시 설 것인데”라며 치유와 회복의 노력을 당부하고 있다.
그때도 나의 애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세상이 붉은 노을이 되어 갈 때 나는
어둠 속에서 겨우 그의 발등을 밟았다
사력을 다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꼬부라져 갔고 그는
그때도 건재하였다.
나는 일당 십만 원짜리 개 잡부
<염세주의자의 조국> 부분
<염세주의자의 조국>에서는 추구하던 정파의 이율배반적 변화와 상황에 낙담한 “일당 십만원 짜리 개잡부”의 독백과 낙백(落魄)한 자의 처지를 통렬히 대변하고 있다. 보혁논쟁을 떠나서 실제의 삶에 얼마나 유용한 세상의 정치 논리인가를 아프게 질타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만약에 5.18 그날>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목하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동방의 작은 영토인 우리네 삶에 미치는 영향도 커지고 있다. 대다수 문인들은 정치나 경제에 초연하려 하고, 좌우 이념대결이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하여 도외시하는 풍조가 있다. 군자연(君子然)한다는 말이다. 물론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치성향이나, 경제활동상의 영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작가군도 있다. 현재 국내의 정치상황과 정파간 이전투구의 양상은 과거 조선시대의 당쟁과 파벌싸움과 다를 게 무언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 보혁논쟁(保革論爭)은 기실 어느 나라, 민족이나 모두 겪고 있는 유장한 시대의 흐름들이다. 신파와 구파, 존재론과 인식론, 성장과 분배의 이데올르기, 종교적 추구 방향성 등 실로 다양한 사상과 실천행동 들을 현시점의 현상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굳이 사마천(司馬遷)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거론치 않더라도 ‘바로 눈앞의 현상’에 대한 확증 편향적 판단은 섣부른 처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수 군자연하며 헛기침으로 언급과 집필을 꺼리는 문사들보다, 현실비판에 한 발짝 앞서 있다. 솔직담백한 성품 탓도 있지만,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지평을 넓혀가는 작가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사물시(事物詩)를 통한 성찰의 언어, 간구(懇求)의 시세계로
이영균 시인의 시선(視線)은 주변에 보이는 평범한 사물들과 사건, 무형물이지만 허공 중에라도 답답하게 유영하는 사유에 대하여 세밀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자기성찰의 거울로 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시인의 시선에 든 사물이 독특한 구조로 이미지화하여 마침내 한편의 사물시로 창출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앞서 인용된 여러 시편들도 거의 사물시의 형태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신비평가 랜섬(J.C.Ransom)의 분류에 의하면, 말하려는 시는 관념시(platonic poetry), 그리려는 시는 즉물시(physical poetry)에 해당한다. <그리는 시>는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인의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그리려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내부에서 일렁이는 정서, 무의식, 상상의 결과 등을 그리려는 유형이다. 그리고, 무엇을 그리려 하느냐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달라진다. 이영균이 그리는 시세계는 즉물적 외부의 상관물에 대한 천착이 활발하다.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사물이나 사건은 자아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독특한 시감(詩感)을 통해, 특유의 이미지를 생성해내며 은유의 나래를 편다. <유추>의 폐채석장이 그렇고, <망각을 틀 깨는 석공>의 석수장이, <사자의 팬티>에서는 망자의 팬티, <나목>과 <나무> <금강송~> 등 많은 시편들이 그렇다. 아래 <기억의 방>에서는 시인의 내부에서 일렁이는 정서를 특유의 단계적 접근(천착(穿鑿))을 통하여 확연히 그 전형을 펼쳐보인다.
기억의 방들을 돌아본다
오래전 봉인 아닌 봉인을 한 방들
제일 높은 곳 볕도 들지 않는 천장 근처의 방
그다음 낮은 곳 볕에 늘 열린 듯한 방
눈높이에 있어 늘 대할 수 있는 방
그리고 영아로 잠든 구석진 방
저 아득하여 문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는
먼 친구들과 지인들의 방이 있다
산 자들은 아직 방이 없이 시간 사이 끼어 떠돈다
(중략)
지워진 기억들 볕을 비추어 봐도 재생할 수 없어
그들의 기억에 나를 그려 넣지만
이내 희색이 되고 만다
문에 먼지를 털고 문고리를 다시 달아도
그 방들은 문 아닌 문이 또 있어
기억의 방에 갇혀 회색의 화석이 되어 간다
<기억의 방 –치매>
외부의 사물이 아닌 시인의 내부에서 치솟는 치매에 대한 안타까움의 열망을 장시로 펼쳐놓았다. 심안에 형성된 ‘무형적 사물 – 치매’에 대한 시안이 남다르다. 그런데 불행한 천형의 치매의 방들을 이렇게 다채롭고 상징적으로 열거하는 시인의 필력이 놀랍다. “기억의 방들을 돌아본다/ 오래전 봉인 아닌 봉인을 한 방들/ 제일 높은 곳 볕도 들지 않는 천장 근처의 방/ 그다음 낮은 곳 볕에 늘 열린 듯한 방/ 눈높이에 있어 늘 대할 수 있는 방/ 그리고 영아로 잠든 구석진 방/ 저 아득하여 문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는/ 먼 친구들과 지인들의 방이 있다/ 산 자들은 아직 방이 없이 시간 사이 끼어 떠돈다”. 마치 한편의 영화 속의 장면같은 방들이 열거되어 있다. 이미지와 순수한 시인의 감정이 조응하는 찰진 상상력이다. 불우한 치매환자의 그 소실되어버린, 망각된 기억의 저편을 탐색하는 인간정신의 발로도 신선하다. 그러나 연민의 정 이상을 주지 못하는 시인의 애틋한 심사는 “ 지워진 기억들 볕을 비추어 봐도 재생할 수 없어/ 그들의 기억에 나를 그려 넣지만/ 이내 희색이 되고 만다”로 귀결된다.
마치 경험한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발하는 묘사와 치매환자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 없으면 적어낼 수 없는 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빙의(憑依)적 집필태도는 진정한 시인의 마음이다.
어쩌다 시 한 편 쓰길 혼신의 힘 다한
시의 몇십 배 사투 끝에 탄생한 웹툰 결정판이
강하게 나를 후려갈긴다
딱딱한 길바닥 덜 눌린 틈 비집는
질경이의 생명력이 발밑에서
강하게 나를 붙잡는다
한낮 땡볕에 그은 얼굴로 도라지 한 사발 팔려고
안간힘 다하는 노상(路上) 할머니가
강하게 나를 멈춘다
온종일 폐지를 수거해도 한 시간 시급도 못 되는 수익,
그것으로 손주와 생계를 이어가는 할아버지가
강하게 나를 돌이킨다
나는 한량이다
저들같이 필사적인 투쟁도 없는 나의 시는
한량의 넋두리도 못 된다
치열하지 못한 시인은 시인이 아니어서
빛이 없다
<치열함에 기대어> 전문
이영균 시인의 창작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치열함’이다. 현대사회의 모든 방면에서 치열함은 생존경쟁이나 적자생존, 안분지족을 위한 선행여건으로서 ‘식사 도구인 수저 젓가락’과 같은 필수 도구다. 어찌보면 보편적 자세 같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거개의 문인들이 치열함을 상실한 채, 태필(怠筆), 휴필(休筆), 절필(絶筆) 상태인 경우를 쉽사리 목도한다. 필자 자신도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다. 그러나 이영균 시인의 경우, 마치 일기를 쓰듯이 경건한 시작업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치열함이란 이전투구의 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함에 기대어>는 시인의 창작에 대한 치열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복어법(反復語法)으로 나열되는 치열함의 수식에 대하여 임의로 연을 나누어 본다면
①연 “강하게 나를 후려갈긴다” ~ 웹툰 결정판이
②연 “강하게 나를 붙잡는다” ~ 질경이의 생명력이
③연 “강하게 나를 멈춘다” ~ 노점상 할머니가
④연 “강하게 나를 돌이킨다” ~ 폐지수거 할아버지가
⑤연 “나는 한량이다” ~ 치열하지 못한 시인이니까
반복적인 성찰의 시어가 주는 운률의 효과도 내재적 공감각을 유발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부조리와 불균형, 소외와 불평등에 대한 해소를 간구(懇求)하는 시인의 심경이 빛나고 있다. 디테일한 현상묘사도 일품이다. 이런 열거법을 통한 천착시는 다소 교훈적일지 몰라도, 독자에게 주는 공감력은 크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만이 토로할 수 있는 작품의 진경(眞境)이요, 세상에 대한 겸손과 작가의 성찰이 빛나고 있다.
이영균 시인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정립시키는 작가다. 다양한 인생역정을 거친 그에게 경험과 단련된 의식의 흐름은 창조적 시세계로 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알량한 그릇들> 시집에 수록된 다수의 작품들이 정적(靜的)인 관념세계를 떠나, 동적(動的)인 사물의 인식체계로 진군하는 양태로서 시적 성취도가 두드러진다. 시인의 치열한 창작태도와 휴머니즘의 구현, 소외되고 불편부당한 현실에 대한 간절한 회복의 목소리도 울림이 크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상재되는 시편들은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이는, 매끄럽게 치장하지 않은 싱싱한 원어를 디테일하게 내놓은 바에 시선이 간다. 독자들은 시인의 시를 감상하며, 원석을 다듬는 보석 세공인의 손맛을 느낄 것이다. 시인의 중후한 문단역량 만큼이나 앞으로 펼쳐질 시세계에 자못 기대가 크다.
[2022년 11월, 도원재(桃源齋)에서 한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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