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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지, 안동의 가장 오래된 종합 인문지리지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임세권
1. 영가지를 주목하는 이유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는 신라 33대 성덕왕 23년 724년에 세워진 절이다.
이 절에 있는 신라시대 유물로는 국보제3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의 동종이 있다.
이 종은 경주의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신라 범종을 대표하고 있다.
종의 윗부분에 덮인 둥근 부분을 천판이라 하는데 이 곳에는 종을 만든 연대가 개원 13년이라는주조연대와
휴도리休道里라고 부르는 귀부인의 이름이 나오는 종명이 있다.
개원 13년은 성덕왕 24년 725년으로 상원사가 창건된 이듬해다.
이 해는또 성덕대왕 신종보다 46년 앞서는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랜 범종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조 연대 만으로 보면 이 종은 상원사의 창건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종은 본래 상원사에 있던 것이 아니다.
종은 본래 안동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남문 위에달려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의 기록 때문이다. 안동에 있던 종이 상원사로옮겨간 것이다.
1469년은 예종 원년이다. 예종은 그의 아버지 세조가 죽고 임금의 자리를이어받자마자 세조가 왕실의
원찰로 정한 상원사에 전국에서 가장 좋은종을 골라 보냈다는 것이다.
죽령을 넘어갈 때 종이 움직이지 않아 종유를 떼어내서 안동으로 보낸 후에야 종이 움직였다고 하는
『영가지』의 기록은 당시 안동사람들이 안동의 상징적 존재인 종을 국가 권력으로 빼앗아가는 데
대한 저항이 심했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가지』로 인해 새롭게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은 이 뿐 만이 아니다.
제비원 석불이 석굴사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미술사학자들의 연구로 알려진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석불이 어떤 형태의 법당 건물에 모셔졌는지는 『영가지』 기사로서 알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법흥사지7층전탑과 동부동5층전탑의 원래 모습과 상륜부의 훼손 과정 등을 비롯한 역사유적의
원상을 알수 있으며 많은 구비설화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영가지』의 편찬 과정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함께 보존되고 있어서한국의 지방지 편찬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준다.
그러면 이러한 중요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영가지란 책은 어떤 책인가?
영가지, 안동의 가장 오래된 종합 인문지리지 l 029
2. 임란 후 지방에 대한 관심과 영가지 편찬
『영가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류성룡의 지방지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고향 하회로 내려와 있던 류성룡은 안동 지역의 형편을 이것 저것 살펴본 후 조선 각지에서 편찬되기 시작한 지방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에는 이미 각 지방마다지방지들이 편찬되어 있어서 각 지역의 지리 산물 인물 등 세세한 정보가정리되어 중앙에서는 지방에 대한 파악이 체계적으로 지방을 파악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해당 주민들에게도 자신들이 사는 고장에 대한 애향심이 고취되었다. 이는 자연히 지역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러한 중국 지방지의 영향을 받아 지역별로 지방지가편찬되기 시작했고 평양에서는 이미 10여년 전 1590년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윤두수에 의해서 『평양지』가 편찬되어 있었다.
안동이 평양에비해 역사적 문화적으로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류성룡으로서는 안동에 제대로 된 지방지가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실제안동은 경상도에서도 가장 큰 도읍이면서 오랜 역사의 고장이기도 했다.
류성룡은 하회로 내려온 후 자신에게 자주 찾아와 학문을 배운 바 있는 권기를 불렀다. 그는 권기에게 중국의 지방지에 대한 이야기와 조선에서도 이미 지방지가 편찬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권기에게 안동지방지를 편찬해 볼 것을 권했다.
용만 권기는 여러 차례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후에국가에서 관료로 발탁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향리의 학자로서 제자들을 가르치거나 지역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었다. 또한 많은 시문을 지었으나 현재 남은 것은 많지 않다. 권기가 『영가지』 편찬작업을하기 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작업은 안동권씨 족보 편찬이었는데 그 일에 8년이란 시간을 보냈다고 전한다. 아마도 당시 안동에 거주하고 있던 선비들 중에서는 학문적으로나 서책의 저술 편찬 등에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권기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 류성룡이 권기에게 『영가지』 편찬을 권유한 것은 권기가 그에게 몇차례의 학문적 배움의 기회를 가졌던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안동지역을 대표할 만한 학자로서 꼽히고 있던 데도 기인하였다고 볼 수있을 것이다.
권기는 서애로부터 부름을 받아 『영가지』 편찬을 하게 됨을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가지』 편찬이 있던 1602년 권기는 8년이나걸린 안동권씨 족보 제작을 막 마치려던 참이었다. 족보의 편찬은 문중내의 여러 지파와 각 파에 따른 이해관계가 부딪치는 일이 많고 따라서8년이란 오랜 기간의 족보 편찬은 권기의 심신을 피로케 하였을 것이다.
류성룡이 제자 권종윤權終允을 권기에게 보내 『영가지』 편찬을 권유한 시기는 권기에게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하겠다.류성룡은 권종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안동은 한 도의 가장 큰 고장이다. 또 고려 태조도 이곳에서 견甄훤萱을 토벌하였고,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일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길 만한데 지금까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기에 뜻을 두 고기록을 남긴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 안동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나는 자네들이뜻을 가지고 이 일을 해주기를 원한다네권종윤은 권기에게 찾아 와서 류성룡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권기는선뜻 응하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의 학문이 류성룡이 기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류성룡은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서 뜻을 전했고 드디어 권기는 류성룡과 만나게 되었다. 류성룡은 “자네는 사양하지 말게나. 중국의 선비들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곳에 관한 지志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 안동에서 지를 편찬하는 것이 분수에 넘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직접 써놓은 책의 목록을 보여 주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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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때의 중국은 지방지의 편찬이 크게 번창하고 있었다. 중국의 지방지는 역사가 매우 오래지만 이민족의 통치에서 벗어난 명나라 왕조는 중국 각지의 지리와 역사의 편찬을 새롭게 하고 그를 바탕으로 중국 전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류성룡은 27세이던 1569년 명나라를 다녀온 경험이 있어 중국의 지방지 편찬과 그것이 나라를 통치하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에 접어들면 조선에서도 실학이 일어나고 지역에 대한 중요성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각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안동에 내려와서 지방지의 편찬에 관심을 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권기는 류성룡의 권유를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그의 스승 권호문權好文(1532~1587)의 집으로 가서 권호문의 아들이자오랜 친구인 권행가權行可(1553~1623)를 만났다. 권행가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존경하는 스승의 아들이기도 하니 인간적인 면이나 학문적인 면에서 신뢰가 큰 사람이었다. 그는 권행가에게 류성룡과 만났던 일과 안동의 지를 편찬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책의편집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 자리에서 먼저 책 이름에 대해 의논하였다. 권기는 자신이 생각하였던 두 가지 책 이름을 제시했다. 모두 안동의 옛 이름에서 택한 것인데하나는 화산花山, 또 하나는 영가永嘉였다. 권행가는 잠시 생각한 후 “자네‘영가’의 뜻을 아는가? ‘영永’자는 안동으로 흘러 들어오는 두 강물을 뜻하는 이수二水를 말하는 것이네. ‘이二’자와 ‘수水’자를 합치면 ‘영永’자가 되지. 이수 즉 두 강물은 낙동강과 반변천인데 안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있는 낙동강의 포항浦項과 반변천의 여울 와부탄瓦釜灘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영가라고 한 것이지. 구태여 멀리 있는 화산을택할 이유가 있겠나?”라고 하고 영가를 책이름으로 권하였다.
화산은 풍천면 하회 마을 뒷 산이니 안동부에서는 제법 먼 곳이라 할수 있었다. 포항은 우리말로 개목이라고도 했다. ‘개’는 고운 뻘흙이 강또는 바닷가에 쌓여 있는 것을 말하는데 한자로 포浦라고 표현하고 ‘목’은 길이나 강물이 갑자기 좁아지는 곳을 말하며 한자로 ‘항項’이라고 표현하여 포항이라는 한자 지명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법흥동의고택 임청각 앞의 강을 말한다. 와부탄은 오늘날 용상동 동쪽의 반변천에 있던 여울이다.
권기는 “그렇군, 옛날 시에 ‘두 강물이 흘러가고, 풍류가 있는 곳 바로영가로다’(二水中流地, 風流是永嘉)라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군. 이것으로 정하세”라 하고 책이름을 영가지永嘉誌로 정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중앙 정부에서 각지의 읍지들을 모아 집대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覺』과 『영가지』에 앞서 편찬된 『함주지咸州誌』의 편목과 편찬 규정 등을 조사하여 편찬계획을 세워 류성룡에게 보여주고 최종
확정을 받았다.
지방지의 편찬이란 산이나 강, 토질, 경지면적, 인구, 지역 출신의 유명한 인물, 농업과 수산업 등의 생산물, 공업과 상업의 현황, 지역의 특산품, 교통이나 군사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 등 매우 광범위한 사항들을 다루어야 한다. 또 기록이 없는 부분은 안동부의 넓은 지역을 일일이 현장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특정한 한 두 사람으로는 편찬이 불가능 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영가지』의 편찬을 위하여 안동부 내의 여러 지방의 선비들을 선발하고 미리 만들어둔 항목을 주어 각자 자신이 사는 지역에 대해자세히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편찬 업무에 동원된 선비들은 개인이 조사하고 기록할 내용은 자신들의 사는 곳에 제한되므로 그리 오래되지 않아 조사와 기록을 완성하고 권기와 권행가에게 결과를 보냈다. 그러나 여러 지역의 기록이 모여드니 결과물들은 두 사람이감 당하지 못할정도로 분량이 많았다. 또 어떤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작성된 반면 어떤기록은 너무나 허술하게 작성되기도 했다. 그런 것은 재조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가지, 안동의 가장 오래된 종합 인문지리지 l 033
조사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과 현장을 찾아서역사 유적의 현상과 유래 등을 자세히 기록하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되었는데 어떤 경우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든 산 속에 있기도 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도 조사작업 자체가 엄청 힘든 일이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각 지역의 선비들이 조사하여 기록한 것들을 분류 정리하여 모두 여덟권의 일차 편집이 끝난 것이 1607년이다. 류성룡으로부터 안동의 지방지편찬에 대한 권유를 받고 권행가와 함께 일을 시작한 것이 1602년이니여기 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차 편집이 끝나고 원고를 완성시키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일을 제안하고 지도해온 류성룡이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권기와 권행가는 스승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영가지』의 원고를 완성시키지못한 채 일단 원고작업을 중단할수 밖에 없었다.
3. 초고의 완성에서 간행까지류성룡이 세상을 뜬 해에 안동부에는 새로운 부사로 당시 조선의 대학자인 정구鄭逑(1543~1620)가 부임하였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한 박학다식한 사람이었으며특히 지방지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여러 지방에 지방관으로 옮겨 다니면서 부임한 지방마다 지방지 편찬을 하였다. 그가 편찬한 지방지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580년 편찬된 『창산지昌山誌』(현재 경남 창녕군)를 들 수있고 그 이후 『동복지同福志』(현재 전남 화순군) 『관동지關東志』(현재 강원도 강릉시와 주변지역) 『함주지咸州志』(현재 경남 함안군) 『평양지平壤誌』 등을 편찬했다고 전하지만현재는 『함주지』 하나만 남아 있다.
정구가 이처럼 지방지 편찬에 공을 들인 이유는 당시 많은 서적과 자료들이 산실되어 과거의 역사를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자료를 모두 모으고 가능한대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정리하지 않으면 뒤에 해당 지역을 다스리는 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지역의 지방관으로 각지를 통치한 경험상 지방지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정구가 각지의 지방지들을 편찬하기 이전에 조선에 지방지가 없었던것은 아니다. 조선에는 이미 건국 초기에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등이 편찬된 바 있고 또 세종실록에도 지리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15세기 말인 1481년에는 50권으로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완성되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은 명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영향을 받아 편찬된 것으로 조정에서 전국의 각 읍에 읍의 지리 인구경제 등에 관한 세부항목을 내려주고 자료를 수집 기록하여 제출하도록시달하여 편집 간행된 방대한 전국 지리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지들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지방을 통제하고 세금을 효과적으로 걷기 위한 목적이 강한 간행물들이었다.
이에 비해서 정구가 편찬한 개별 지방지들은 위와 같은 지방통제의 목적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각 지역의 주민들이 스스로 참여하여편찬하도록 하여 자기들의 향토에 대한 애정과 출신 인물이나 과거 역사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이 많이 반영되게 되었다. 정부에서 간행된 지방지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편찬한 지방지를 사찬지방지 또는사찬읍지私撰邑誌라고 한다. 이 사찬지방지들이 임진왜란과 함께 조선이 크게 변화하는 시점에서 활발하게 편찬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들어서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기들이살고 있는 곳을 세계와 역사의 중심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과 관계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안동에서 류성룡이 사망한 후 『영가지』의 일차 편집 완료 후 후속 작업이 중단된 시점에서 정구가 부사로 부임한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정구는 안동에 부임한 후 『영가지』의 편찬에 관해 듣게 되었다. 정구는 권기를 불러 『영가지』 초고의 상태를 확인했다.
모든 책이 마찬가지지만 지방지를 편찬하는 것은 인쇄가 완료되어야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초고를 인쇄용으로 만드는 것은 초고작성 때까지의 노력보다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고 또 비용도 많이 드는 큰 사업이다.
먼저 완성된 원고를 목판에 새겨야 하는데 원고를 목판의 체제에 맞게 새로 편집해야하고 또 목판으로 새길 수 있게 깨끗한 글자로 정서해야 한다. 그런 후 목판을 제작해야 하고 또 종이에 인쇄하여 제본을 해야한다. 목판 제작에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필요하고 인쇄에도 종이가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많은 부수를 찍으려면 상당한 비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는 관청의 예산이 투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모든과정을 마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정구는 먼저 판본 간행을위한 편찬위원을 구성하도록 했다. 권기는 안동에서 유능한 선비 열 사람을 모아 위원회를 구성했다. 참석한 사람들은 대체로 성이 다르고 같은 성이라도 본관이 다른 것으로 미루어 안동에 거주하는 성씨나 지역의대표성이 감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권기의 지도 아래 초고를재정리하고 원고 작업을 불과 열흘 만에 완성시켰다. 정구의 열성과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권기와 열 사람의 편집진도 『영가지』의 완성에 얼마나큰 열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때 완성된 원고에는 안동의 지도가 추가되었다. 지리지는 전국을종합하여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이나 각 읍별로 편찬된 읍지들 모두 맨 앞에 그 지역의 지도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 체제다.
그러나 그 지도들은 너무 간략하여 구체적 지리 형세를 파악하기는 어려움이 많다. 『영가지』의 지도는 맨앞에 본부도本府圖를 두쪽에 나누어 실었다. 본부도는 중심에 안동부의 성곽과 사대문 그리고 동쪽으로 임하, 서쪽으로 풍산‧예천‧영천(榮川:오늘의 영주), 남쪽으로 일직, 북쪽으로 예안 등과 경계선을 표기하였다. 경계선 안쪽으로는 강과 산 그리고 그 사이에 분포된 마을들을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본부도 다음으로 길안현도, 임하현도, 내성현도, 감천현도, 풍산현도, 일직현도, 춘양현도, 개단부곡도, 재산현도, 소천부곡도 등 8개 현과 2개 부곡의 지도가 한 쪽씩 이어졌다. 8개 현 가운데내성현, 감천현, 춘양현, 재산현 등 4개현은 오늘날 봉화군에 속한 곳이며개단부곡, 소천부곡 등 2개 부곡도 역시 봉화에 속한 지역이다.
당시까지 안동의 구체적 지도가 작성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권기와 열명의 편집진은 지도를 작성하는 데 어려움이 매우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도 제작은 일일이 현장을 답사하여야 하므로 길도 없는 산과 들을헤매야 하는 노고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도 제작의 어려움을 권기는 『영가지』의 서문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로 표현하고 있다.
안동 부府는 산수향山水鄕이라는 칭호가 있는데도 예부터 지도가 없었으니 어찌흠될 일이 아닌가. 하루는 비는 내리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마루는 한적한데 가만히 앉아 헤아려 보니 산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내려왔고 물은 황지潢池로부터 흘러 온 것을 환하게 알 수 있어서 이에 종이를 펼치고서 지도를 그렸는데, 비록 다소 부족한 점은 있지만 거의 비슷하였다. 이에 다시 이 지역을 두루 다닌 사람에게 물어서 그 사이에다 마을을 배열하게 하고서 벽에다 걸어두고 살펴본즉 아직도 잘못됨이 있어 드디어 동지와 함께 지역마다 찾아가며 바로 잡으니 지도가 비로소 완전하였다.
권기가 편찬한 『영가지』는 한 책에 두 권씩 편성하여 모두4 책 8권으로 구성되었다. 권기가 직접 쓴 원본은 청성서원에 있고 또 두 벌을 베껴서 한 부는 안동부에 두고 또 한 부는 권기의 후손 집에 두었다.
뒤에 정식(1601~1663)과 권덕수(1672~1760) 두 사람이 청성서원 본의 잘못된 곳을 고쳤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나이가 72년이나 차이가 있고 또 권덕수는 정식이 죽은 뒤 9년 후 태어났으니 『영가지』의 수정이 이루어진 것은 적어도 6~70년 정도의 간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영가지』 원본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열람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에 따라 책도 많은 부분 손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동부에 보관 중이던 『영가지』 초고본은1 700년 경 중앙정부의 역사편찬기관인 찬수청纂修廳에서 가져가 안동에는 초고본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그간 안동지역의 역사나 지리 또는 여러 가지 참고할 것이 있을 때마다 『영가지』에 의존하였는데 『영가지』 마져 없으니 안동의 행정을 담당하던 관료들이나 또는 선비들은 자료가 없어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1762년 서울로 올라가서 찬수청의 초고본을 베껴 와서 다시 안동부에비치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정황은 1784년 안동부 보관의 『영가지』를다시 장정하면서 남긴 안동부 호장 권창실의 후지後識에 기록되어 있다.정식 권덕수 두 사람이 수정을 하고 상자에 넣어둔 책이 세월이 오래되어 내용이 모호해지고 책장도 찢어져 원 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재 전하는 원고본의 상태가 첫 부분이 여러 장 떨어져 나가고 안쪽에도 손상된 부분이 있는 것은 그런저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것이라할 수 있다.
『영가지』가 보존된 청성서원은1791년 김굉(1739~1816)이 원장을 맡게 되었다. 김굉은 영남의 대학자로 추앙받는 이상정의 제자로 예조참판을 지낸 후 안동으로 내려온 안동출신으로는 성공한 학자이며 고위관료였다. 김굉은 시간이지날수록 훼손되어가는 『영가지』를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었다.
더구나 청성서원은 16세기 안동의 대학자 권호문을 배향한 서원이다. 권호문은 『영가지』의 편찬자 권기의 스승이며 동시에 권기의 편찬작업을 함께 도운 권행가의 아버지이니 김굉이 『영가지』를 제대로 만들어발간하고자 하는 생각은 매우 간절했을 것이다.
김굉은 안동의 선비들을 모아 『영가지』 간행사업에 대해 의논하고 곧실행에 옮겼다. 책은 이미 완성된 형태로 있고 또 정식 권덕수 두 사람이교정을 본 내용이 원본에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크게 시간이 걸릴 일은아니었다. 당시 교정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56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작업을 한 사람은 35명이었다고 한다. 교정작업은 1791년 10월 7일부터 11월 23일까지 17일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들은 약 7~8일에 걸쳐복잡한 부분을 간략하게 하고 잘못된 부분을 삭제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이나 여타의 지리지를 참고하여 없어진 내용도 보충하여 교정 작업을완료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식 목판 제작을 위한 최종 원고본을 정서하는 데 든 기간이었던 듯하다.
찬수청에서 베껴온 영가지 등본(1762)의 권창실발문간행을 위한 원고본으로 만들어진 『영가지』의 내용은 초고에 비하면분량이 매우 많이 줄어들고 8권의 총담은 아예 삭제되었다. 이는 정식, 권덕수 두 사람의 수정 부분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고 또 교정작업에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실제 처음 『영가지』가 편찬된 후 약 200년이나 지났으니 그 동안 변화된 내용을 추가하자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끝내 추가 작업은 하지 못하고 말았다.
원고본의 뒤에 붙어 있는 김도행金道行이 쓴 발문에는특히 한스러운 것은 용만공께서 세상을 버린지가 거의 이백여년이나 되었음에도 이 영가지를 속續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니, 문헌文獻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이 일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모임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보태어 넣자는 의논이 있었지만 끝내는 신중함으로 인해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이 뒤를 이어 이 같은 논의를 통해 견문을 망라하고 편집하여 속지續誌를 만든다면 어찌 우리 고을에게만 관계되는 일이겠는가. 세상을 교화하는데에 있어서도 도움이 있을 것이다.
I 1791년 김굉이 영가지 간행 작업을 했던 청성서원을 권호문의 묘소에서 내려다 본 모습 I라고 되어 있는데 추가 내용을 넣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이 짙게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내용의 추가 작업이 실패한 것을 김도행은 발문에서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중함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문중이나 학맥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또 17세기 중엽 이후 영남전역에서 영남유림들이 첨예하게 분파 대립된 병호시비屛虎是非 사건이 심
각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 내의 정황들은 『영가지』의 원고에새로운 인물이나 사건 등을 더 추가하는 일이 왜 불가했는지를 추정하게 해준다. 1899년 간행본의 류도헌이 쓴 발문에는 1870년에 간행하고자
했으나 의논이 엇갈려 못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간행까지는 많은 논란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문에는 후세에라도 자료를 보강하여 속지를 만들어야 한다
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당시 안동지식인들에게 안동사람들이 주체적 참여로 작성하는 지리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원고본은인쇄를 위한 목판제작을 위해 정흉년으로 인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간행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영가지』의 간행은 1899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때 간행된 『영가지』는 1791년 작성된 원고본과일치한다.
I 영가지교정시회첩 I
I 영가지 판본(1899) 권1 부분 I
영가지, 안동의 가장 오래된 종합 인문지리지 l 041
4. 영가지의 내용
지방지는 『영가지』와 같은 사찬 지방지가 나오기 전에는 중앙 정부에서 각 지방에 내려준 편목에 의해 편찬된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중앙정부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정보 제공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된다. 16세기 말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사찬 읍지들은 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것이므로 편목 또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짤 수있었다. 그러나 지방지가 가지고 있는 오랜 형식이 있으므로 완전히 이전의 형식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영가지』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 말한대로 영가지는 8권 4책으로 구성되었다. 편목의 분류는 무척자세하게 되어 있지만 1권에서 4권까지는 역사, 지리, 행정 등을 서술하였고 5권에서 8권까지는 역사 인물 그리고 인물과 관련된 분묘자료, 설화등을 서술하였다. 이중 분묘에는 분묘의 위치와 묘비문 등이 기록되어 있어 안동의 인물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집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관련 부분이 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지역에서 지역민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된 사찬 지리지들의 편찬목적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물관련 기록은조선 후기 지역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던 문중간의 분쟁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영가지』가 간행되는 데 많은 장애가 되었을 것임은 쉽게 추측된다.
『영가지』의 내용 중 권1의 연혁조와 권6의 고적, 불우佛宇, 고탑古塔조에서 주목되는 것 몇 가지를 추려 소개한다.
첫째, 권1의 연혁조에는 안동이 본래 신라의 고타야군古陀耶郡이며 통일후 경덕왕때 고창군古昌郡으로 바뀌었으며 처음 기원전 57년에 창녕국을세웠고 신라에 들어와서 고타야군古陀耶郡이 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때 고창군古昌郡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57년은 신라의 전신 사로국이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된 해와 같은 해이다. 이는 당시 경상도 지역의 여러 소국들 중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경우 신라와 함께 건국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 안동지역의 최초국가로 등장했던 창녕국도 사로국과 함께 같은 해에 건국했다고 주장할정도로 세력이 있던 소국이었다고 보인다.
둘째 안동부에 속한 각 현 가운데 임하현은 고구려에 속한 굴화군이었다. 임하현은 안동의 본부 즉 지금의 안동시 중심의 동쪽에 매우 가깝게인접해 있는 곳이다. 임하현 중 고라촌(高羅村: 임하현에서 동쪽으로 40리)의 설명에
“고구려와 신라가 여기에서 싸웠다”는 설명이 있는 것으로 모아 임하현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하현의 현치소 즉 현의 행정중심지는 현재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이다.
셋째 『영가지』 권6의 기록을 통해서 현재 안동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의 본래 형태를 확인할 수 있고 일부 유적은 한국 미술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그 중 몇 사례를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태사묘 유물: 공민왕이 직접 쓴 교지와 공민왕이 안동에 머물고 있을때 내려준 물건들의 목록과 권태사가 남긴 유물의 목록이 실려 있다. 이유물들의 일부가 현재 안동시의 태사묘에 보관되어 있으며 『영가지』의목록은 태사묘 보관 유물을 공민왕 유물과 권태사 유물로 분류하는 데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영가지에 삼태사 유물로 기록된 붉은색 칠기나무잔영가지에 공민왕 하사품으로 기록된 옥관자와서각장식
동부동5층전탑 옆 당간지주: 영가지에는 ‘남문 밖 쇠기둥’이라는 명칭으로 길이 30여척, 굵기는 한 아름 정도, 재료는 수철水鐵, 형태는 대나무와같고 마디는 17개이며, 표면은 놋쇠 처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당간은 없고 당간을 받치고 있던 돌기둥 두 개만 남아 있는데 없어진당간의 형태가 이 설명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즉 영가지가 편찬되던1602년 당시 당간의 형태는 모두 17개의 마디를 가진 철제 당간이었음이확인된다. 마디가 17개였다는 것은 18개의 철제 원통을 기둥모양으로 쌓아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1492년 바람에 의해 위 세 마디가 부러져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이보다 훨씬 더 높았으나윗 부분이 훼손되어 없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철당간은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과 공주 갑사 철당간이 전하고 있는데 용두사지 철당간은 현재20개의 철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30개였다고 전하며 공주 갑사의 것은 현재 24개의 철통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 말기에 4개의 철통이 부러져현재처럼 되었다고 하니 본래는 적어도 27개 이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동부동 당간도 이와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상원사동종: 이 글의 맨 앞에 소개한 대로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은 이 종은 현재 전하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동종이며 경주의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한국 범종의 조형이라 할 수 있는 종이다.
이 종이 본래안동에 있던 것이고 그것이 예종때 예종의 아버지인 세조의 원찰인 상원사I 공민왕 하사품 꽃무늬 자수 비단 I I 공민왕 하사품 은제 뚜껑달린 합 I사로 옮겨졌다는 것이 『영가지』로인해 알려지게 되었다.
넷째 권6 고탑조에는 안동의 전탑으로 법흥사전탑, 법림사전탑,임하사전탑, 월천전탑 등 4기의 전탑이 나온다. 각각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자.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은 “부성 동쪽 5리에 있고 7층이다. 1487년에수리했다. 탑 꼭대기에 금동 장식이 있었다. 이고李股가 철거하여 녹여 객사客舍에 사용하는 집기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 탑은 현재 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법흥사지 7층 전탑이다.
현재이 탑은 고성이씨 탑동 종택 옆에 위치하고 있어 법흥사라는 절터가 있던 곳에 고성이씨 종택 건물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꼭대기에 금동 장식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까지 금동 상륜부가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가지』 권6 고적조에 “지금은 단지 세 칸만남아 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영가지』 편찬 당시인16 02년 무렵에는 아직 법흥사라는 절이 조그맣게 있었음도 알 수 있다.
법림사전탑法林寺塼塔은 “부성 남문 밖에 있으며 7층이다. 탑 꼭대기에 법흥사탑과 같은 장식이 있다. 1598년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인들이 철거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탑은 현재의 운흥동5층전탑이다.
이 탑은당간지주와 함께 있으며, 당간지주는 앞에 설명한대로 “남문밖쇠기둥“이라는 명칭으로 탑과는 별개로 『영가지』에 실려 있다. 문화재 명칭대로 이탑은 현재 5층으로 되어 있으나 『영가지』 기록에 의해 본래7 층이었음이
1914년 촬영된 동부동 5층전탑과 당간지주. 이돌기둥 사이에 17개의 마디를 가진 철제 당간이세워져 있었다.
임하사전탑臨河寺塼塔은 “부 서쪽8리쯤에 있고 7층이다. 1487년 중수했다. 1576년 안동 부사府使가 훼손하여 벽돌을 객사 대청에 깔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하사전탑은 현재 남아 있지 않은데 1576년훼손 당시 벽돌을 모두 객사에 깔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전탑을 다시 쌓을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할수 있다. 이 탑에 대해서는 실제위치의 확인이 되지 못한채 1980년대까지 내려왔다. 탑의 위치를 찾지 못한 것은 임하사가 임하면에있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하사의 ‘임하’가 ‘하임하下臨河’라고 하는 것이 1980년대 중반에 현재 ‘하이마’라고 부르는 안동시 서남쪽 낙동강변에 전탑지로 보이는 유적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하이마’라는 지명이 ‘하임하下臨河’에서 온 것임도 알게 되었다. 이에 임하사전탑이 안동부의 서쪽 8리에있다는 『영가지』 기록의 임하사의‘임하’가 하이마 즉 하임하의 ‘임’임이 확인되게 된 것이다. 따라동부동 5층전탑과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철도부설로 인해 탑의 남쪽인 원자리에서 지금 위치로옮겨졌다. 영가지 기록으로 본래 법림사 전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사지 7층전탑. 기와지붕이 보이는 곳에 법흥사가 있었을 것이다.
하이마에 있는 전탑지가 바로 『영가지』의 임하사전탑이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임하사전탑지는 발굴되어 탑이 서있던 지하에서 사리함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리관련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하이마의 전탑지는 『영가지』의 임하사전탑 기록이 아니었으면 조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월천전탑月川塼塔은 “옹천역 남쪽에 있는 옥산玉山의 북쪽에 있고 5층으로 안에 석불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옹천 남쪽 산 위에 옥산사가 있고 경북 북부지역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통일신라시대 마애불과함께 전탑의 기단부가 남아 있다. 이 전탑 기단부가 바로 월천전탑의 것이다.
일직삼탑一直三塔은 “일직현의 서쪽 2리 지점에 있고 작은 석탑이 둘 큰전탑이 하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큰 전탑은 현재의 조탑동5층전탑을 가리키는 것이다.
안동의 역사 유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탑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의 전탑은 현재 대부분이 안동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탑은 한국 불탑 중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로 왜 안동에 전탑이 집중되어 있는가는 미술사 뿐 아니라 불교사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아직 명쾌한 해답이I 임하사 전탑지에서 출토된 사리함 유물들. 외함(왼쪽), 내함(중간), 사리병(오른쪽) I영가지, 안동의 가장 오래된 종합 인문지리지 l 047나오지 않고 있다.
『영가지』에도 고탑조의 첫머리에 법흥사전탑, 법림사전탑, 임하사전탑이 긴 설명과 함께 등장하고 또 이어서 월천전탑(옥산사 전탑지)과 일직전탑(조탑동 5층전탑)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가지』 편찬 당시에도 전탑은
안동을 대표하는 불교유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오늘의 영가지를 기대하며
1984년 안동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안동문화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든 바 있다. 이때 『영가지』의 편찬자 권기의 후손으로초등학교 교사인 권오기도 당시 연구회원으로 참여하였다. 권오기의 집에는 1602년에서 1608년까지 권기에 의해 편찬된 『영가지』의 초고와 1791년 청성서원장 김굉이 주도한 간행 작업시 만들어진 간행원고본, 또 간행작업에 참여한 인원 명부가 실린 「영가지교정시시도」와 「교정시회첩」 및일기, 1762년 서울(한성)의 찬수청에서 베껴온 복사본 등이 있었다. 이 책들이 어떻게 한꺼번에 모여 권기의 집안에서 보존되어 왔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보존된 결과 『영가지』 편찬이 시작된16 02년에서목판본 간행이 이루어진 1899년까지 297년간의 『영가지』의 편찬과정을모두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지방지 뿐 아니라 하나의 책이 어떻게 계획되고 편찬작업이 이루어져서 간행되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귀중한 자료다. 더구나 그 과정이 297년이라는 긴 세월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사례라 할 것이다.
1985년 경 권오기는 이 책을 당시 안동문화연구회를 주관하던 나에게가져와 연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늘날 『영가지』 자료들이 세상에 햇볕을 보게 된 것은 권오기의 이러한 마음씀 때문이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밝히며 감사를 표한다.
『영가지』가 한국의 사찬 지방지 편찬의 선두를 장식하였다는 것이나또 충실한 내용으로 당시 지역 지식인들의 향토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나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등 『영가지』에 대해서는 많은 찬사가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도 『영가지』가 안동의 지리지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영가지』가 편찬된 지 이미 400년이 넘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시대 안동 자료를 보려면 『영가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영가지』 편찬 이후 조정의 명령으로 안동읍지가 편찬되기도 했지만 『영가지』만큼 자세한 지역정보를 담아내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또한 일제침략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낸 종합 지리지는 제대로 편찬된 일이 없었다는 점도 우리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이제 오늘의 ‘영가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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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크랩해서가져가시면고맙다는댓글정도는남기고가시면좋을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