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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국학상 수상자의 말
우선 제 5회 지훈 국학상의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그리고 지훈상을 마련하여 묵묵히 한국학 연구에 정진하는 학자들을 격려해 주시는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저의 이번 수상은 2003년에 출간된 졸저 《국어방언문법》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사용되는 여러 방언의 문법적 특징들을 한데 모아 체계화한 작업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1994년 무렵에 대우학술재단의 연구비 보조를 받고 시작된 작업이므로, 책의 출간까지는 1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 것이었습니다. 마침 2001년부터 2년 동안 안식년 휴가를 얻을 수 있어 비교적 차분하게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저로서는 꽤 공을 들인 작업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작업의 결과가 지훈상이라는 커다란 영예를 얻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방언 연구는 국어학적으로 상당한 의의를 갖는 분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방언이란 표준어에 대립되는 말로서 민중들이 실제로 말하고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킵니다. 표준어가 시간과 공간, 계층적으로 제약을 가해 만들어진 인위적이고 교육적인 언어라면, 방언은 이러한 인위적 가공이 전혀 섞이지 않은, 그래서 오히려 우리말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언어인 것입니다.
방언학적 관점에서 태초의 우리말은 방언적 분화가 없는 단일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가정합니다. 그러던 것이 지역에 따라 언어 변화의 속도나 양상이 달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방언의 분화가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런 방언 자료들을 한데 모아 서로 비교해 보면 방언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원 모습을 되찾을 가능성도 많을 것입니다. 문헌에 반영되기 이전, 이른바 언어적 선사시대의 우리말의 복원이란 바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후손들의 얼굴을 비교해서 돌아가신 선조의 모습을 추정하는 작업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방언 연구는 국어의 역사를 되찾는 데에 일차적 의의가 있는 학문 분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인 의의뿐 아니라 공시적인 측면에서도 방언 연구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라도 방언은 전라도 방언대로, 경상도 방언은 경상도 방언대로 독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방언과의 비교를 생각하지 않고 해당 방언의 체계만을 따로 연구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학문적으로 의의가 큰 분야입니다만 그러나 실제로 방언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국어학에서 방언학은 주변 학문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고, 방언학은 지방의 학자들이나 연구하는 분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국어학 연구는 대체로 표준어 중심의 연구, 그리고 문어 중심의 연구가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류적 경향에 비추어 보면 지방의 언어이고 구어 중심의 방언 연구가 주변에 머무르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사실 지방 학자들이 방언 연구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것은 사실입니다. 늘 방언에 노출되어 있는 데다가 특별한 수고를 들이지 않더라도 손쉽게 조사를 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방의 학자일수록 학계의 주류를 추종하려는 심리도 있기 때문에, 지방에서조차 방언학자를 양성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방언 연구는 이래저래 어려운 처지에 처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전국이 하나의 의사소통 체계 안으로 흡수되면서 방언은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국어학을 공부하던 초기 시절부터 구어, 즉 입말이 언어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비록 발화 상황에 따른 여러 가지 조건 때문에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면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 행위란 이런 입말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이야말로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춘, 언어의 이상,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방언학자는 자신의 토박이 방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훤히 알고 있기에 대부분 연구의 대상을 자신의 방언에 한정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 역시 고향 방언인 전라도 방언에 대한 조사와 연구만을 고집해 왔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방언들이란 결국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므로, 한 방언의 진정한 규명은 다른 방언과의 비교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연구 영역을 한반도, 더 나아가서는 한국인이 사용하는 방언 전체로 확대시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문법 체계 전체를 망라하여, 총체적으로 기술하려는 일, 이것이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욕심내는 작업의 내용입니다. 오늘의 수상작인 《국어방언문법》은 이러한 제 욕심의 작은 결과일 뿐입니다.
이제 뜻하지 않은 지훈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동안의 제 작업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위로를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수상의 격려에 힘입어, 《국어방언문법》의 내용을 계속 보완하면서, 우리말의 총체적인 문법 체계를 드러내는 일에 더욱 힘을 쏟을 것을 다짐해 봅니다.
지훈국학상 심사보고
지훈상이 벌써 5회째 되었다. 그동안 국학의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선정해 시상한 성과를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훌륭한 수상작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심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두드러진 업적이 선뜻 나타나지 않아 국학 연구가 침체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특히 중점을 두고 살핀 분야가 문학과 민속 쪽인데, 해당작을 찾을 수 없었다.
출판된 책은 적지 않으나 밀도가 문제이다. 서로 다른 관련된 논문을 모아 책을 내기나 하고 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룬 전작저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회지에 내는 논문 위주로 업적을 평가하는 제도가 연구의 단편화를 촉진한다. 인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푸대접이 부진의 이유일 수 있고, 대학 구조조정을 앞둔 분위기 악화가 또한 학문하는 의욕을 감퇴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어학에서 좋은 업적을 발견하게 되어 기쁘다. 지금까지 지훈상 수상작을 낸 분야를 보면, 제1회 문학, 제2회 사학, 제3회 미술사, 제4회 사상이었다. 어학이 국학의 기본 분야의 하나인데 빠져 있었다. 반드시 안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학 분야를 살펴보아야 했다. 심사위원 가운데 어학 전공자가 없어 그쪽의 자문을 구해야 했다. 고영근 교수가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크게 고맙게 생각한다.
연구 동향을 대강 살피면 어학 쪽도 침체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연구를 어지간히 해서 새로운 자료나 주제가 없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방언학 분야는 계속 활기를 띠고 있다. 현지조사를 열심히 하고 그 결과를 정리해 고찰한 논저가 이어서 출간되고 있다. 김차균, 최명옥 등 대가급의 연구업적부터 들어야 하지만, 2년 이내에 출간된 업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맞지 않았다. 중견 이하 세대의 학자에게 상을 수여하고 격려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기갑 교수의 《국어방언문법》(태학사, 2003)은 중견 학자의 뛰어난 업적이고, 지난 2년 이내에 출간되어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목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기갑 교수는 전라방언(서남방언) 조사 연구에 생애를 바치고 오랫동안 애쓴 결과 《전라남도의 언어지리》(1986), 《전남방언사전》(공편, 1998)을 비롯한 많은 논저를 이미 발표했다. 수상작 《국어방언문법》은 그동안 전라방언을 조사하고 연구한 성과를 전국 규모로 확대해,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까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중앙아시아 고려인 등 해외 동포가 쓰는 말까지 넣어 우리 국어 방언의 문법을 총괄해서 논한 업적이다.
서두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이 비슷한 작업을 북한에서는 몇 번 한 적 있으나 남한에서는 계속 미루어 두면서 개별 지역의 조사와 연구에 몰두해왔다. 그러다가 이번에 북한에서 낸 성과까지 포괄해서 더 큰 규모의 작업을 한층 진전된 방법으로 이룩했다. 어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망라해서 정리하고, 《한국구비문학대계》등에 수록된 자료도 적극 활용했다. 이 저서에 의해 전 지역의 방언의 다양한 면모가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내용을 보면 문법 기술의 통상적인 순서에 따라 무리하게 체계화를 하지는 않았다. 특히 긴요한 의의를 가진 문법 범주인 조사, 마침씨끝, 이음씨끝, 시제·상·양태, 부정법, 인용법, 사동과 피동 접미사 등을 집중해서 다루었다. 그 가운데 마침씨끝과 상대높임법은 표준어, 중부방언, 서남방언, 동남방언, 서북방언, 동북방언, 육진방언, 제주방언에서 각기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정리했다. 다른 항목에서는 문법 범주별 비교 고찰을 했다. 전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서 세부를 또한 중요하게 여겨 내밀한 과제에 대한 심오한 논의를 축적했다.
이 업적은 방언학이나 어학을 넘어서서 국학 전반, 학문 일반을 위해 좋은 지침이 된다. 무엇을 말해주는지 간추려보자. 한 주제를 오랜 기간에 걸쳐 일관되게 다루어 전작저서를 써야 한다. 새롭게 얻는 자료가 중요하다. 지방대학에 재직하면서 그 지방에 대한 연구를 착실하게 이룩하고 그 성과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커다란 구상을 미세한 작업까지 충실하게 하면서 구체화해야 한다.
제5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신용하(前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심사위원 조동일(前 서울대 국문과 교수)·김흥규(고려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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