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산헤립-앗수르의 왕. 이스라엘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
여호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지않고 이방신을 섬기거나
등을 돌려 주의 법을 떠날 때마다 이방인을 도구(앗수르왕 산혜립, 바벨론왕
느브갓넷살, 바사왕 고레스 등)로 삼아 징계하시고 또 회개하면 다시 회복
시켜주시었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13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지라 (열왕기하 18:11-14)
산헤립 왕이 티그리스 강변에 건설한 앗수르의 니네베(니느웨) 궁전
그림참조 (Sennacherib) 앗수리어의 Sin ah˘e erba
「신(神)은 형제를 증가함」의 뜻.
산헤립(센나케리브. 재위 B.C 704-680). 사르곤의 아들이다. BC 705- 681년에 있어서의 앗수르(앗시리아/아시리아)의 왕이다. 그의 부친이 BC 705년 아브월(제 5월) 12일에 살해되자 앗수르의 왕위를 이었다. 그는 군인이었으나 능력은 사르곤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교만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으나, 피정복자들을 자기 사람으로 하여 정복을 영속시킬만한 지혜가 없었다.
그가 즉위했을 때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의 멍에를 벗어 던지려 했다. 산헤립은 므로닥발라단과 그의 동맹자로 엘람 왕을 격파하고, 벨이브니(Bel ibni)를 바벨론의 왕위에 오르게 하고, 포로나 약탈품을 싣고 기고만장하여 니느웨로 개선했다. 산헤립은 콧세아 사람과 엘리피(Ellipi)의 백성을 격파했다. 서쪽의 사르곤에 복종하고 있던 사람들 중에 불만과 반항이 일어났다.
당시 유다 왕 히스기야, 블레셋의 아스글론, 에그론의 여러성읍은 지중해 동안의 대부분의 민족과 함께 그들의 주권자인 앗수르 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산헤립은 BC 701년에 베니게에 나타나 대˙소 시돈, 사르밧˙악십˙악고를 점령했으나 두로는 끝까지 버틴 모양이다. 주변 산헤립의 육각 프리즘X산헤립의 서방 원정 기록으로 팔레스틴과 예루살렘 공격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나라들은 재빨리 복종을 성명했다. 그는 블레셋의 나라에 가서 아스글론˙벧다곤˙욥바를 점령했다. 다음에 그는 라기스를 포위하여 그것을 점령하고, 분견대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여 폐위된 에그론 왕을 예루살렘에서 해방하였으며, 엘드게(팔레스틴이나 탐험협회에 의하면 유다의 서남단에 위치하는 성읍)의 회전에서 애굽과 에디오피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에그론을 정복지에 합쳤다.
이 싸움에서 그는 라기스와 엘드게 및 유다의 견고한 46성읍을 점령하고 200,150명을 사로잡아 갔고, 말˙나귀˙노새˙낙타˙양 등을 많이 잡아 갔다. 그런데 산헤립이 라기스까지 진군했을 때, 유다의 히스기야(왕하 18:14-16에 의하면)는 자기의 반역을 자백하고 배상을 맹세한 결과 그에게 은 300 달란트와 금 30 달란트를 부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산헤립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탐욕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그는 사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 수도를 명도(明渡)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건의 연대순은 분명치 않으나, 아마 그와 동시에 군대가 유다에 침입하여 상기 성읍과 포로, 그리고 가축을 노략했을 것이다. 라기스의 성읍은 예루살렘에서 사자가 돌아올 때까지 앗수르군의 공성추에 의해 파괴되어었다. 그들의 공격 제 2 목표는 립나였다(왕하 19:8에 의하면). 에그론을 포위하고 있을 동안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애굽인 동맹자인 에디오피아 왕 디르하가 대군을 거느리고 내습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다시 예루살렘 양도의 요구를 휴대시킨 사자를 급하하고, 에그론의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육박해오는 애굽군에 대비하기 위해 전군을 집결시킨 듯하다. 양 군은 엘드게에서 회전했다. 산헤립은 승리를 선포했으나, 결정적 승리를 얻었으면 그가 해야했던 애굽의 침략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의심스럽다. 에그론은 다시 포위되고 예루살렘에 유폐(幽閉) 중인 파디(Padi)는 왕위가 회복되었다.
산헤립의 이 원정 결과는 분명치 않은 채 영영사라지고 말았다. 에그론을 점령하고 그 반역자들을 벌하고, 위를 박탈당하고 있던 왕을 복위시켰으나, 그 후의 일은 분명치 않다. 그의 연대기에는 이 때에 히스기야를 벌하고, 유다의 국토를 침략하고, 여러 성읍을 처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그가 기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어떤 일을 숨기려는 흑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열왕기하 18:14에 의하면, 히스기야의 공물은 원정의 초기에는 있었지만, 산헤립의 연대기에는 원정 후에 니느웨에서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는 히스기야에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히스기야에 관해서는 내가 그 왕도(王都) 예루살렘에서 조롱(鳥籠)의 새처럼 그를 유폐하였다. 나는 그에 대하여 보루(堡壘)를 급조하여도 성문을 나오는 자는 전부 쫓아 버렸다. 여기에 이어 특별한 사자에 의해 지참되었다는 공물의 긴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산헤립은 그 후 20년간 앗수르를 통치했으나, 서쪽으로 다시 원정할 것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의 정복 사업은 질병의 발생으로 중단되었다. 군대는 질병으로 쓰러지고 그는 니느웨로 부득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그의 비문 중에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대하 32:22).
희랍인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애굽의 제사장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에 의하면 산헤립은 애굽으로 진군하여 펠슘에 도착했으나 무수한 들쥐들에게 앗수르군의 활 시위가 씹혀 끊기어 이튿날 아침 그들은 도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X산헤립과 히스기야가 서로 적수로 나타나는 역사적인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하여서는 히스기야 항 참조〉 그의 예루살렘 공격의 실패는 BC 701년의 일이었다. 그동안 산헤립에게 새로운 동란이 바벨론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BC 700년 베리브니의 제 3년에 앗수르 왕은 남으로 진격하여 베리브니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 앗수르 나진 슘(Ashur na din shum)을 즉위시켰다.
남방에 대한 관계로부터 해방되자 산헤립은 다음 관심을 북서로 돌려 길리기아를 앗수르의 지배하에 넣었다. 694년 그는 배로 새로운 원정을 하여 므로닥발라단의 추종자들을 그들의 최후 피난처인 우라이 하구에서 근절시키려 하였다. 이 싸움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엘람 사람은 바벨론을 쳐서 앗수르 나진 슘을 사로잡아 바벨론 왕을 즉위시켰다. 그는 일 년 반 동안 나라를 지켰다. 산헤립은 에렉을 점령하고 바벨론 왕을 사로잡아 엘람을 유린했으나, 다른 바벨론 왕이 즉위하여 앗수르는 BC 689년까지는 최후적으로 바벨론을 정복할 수 없었다.
BC 689년에 산헤립은 바벨론에 진격하여 성읍을 약탈하고, 주민을 살육하고, 건물을 소각하고, 성벽이나 신전을 파괴하고, 폐허를 유브라데 강과 그 운하의 물로 침수시켰다. 그는 얼마 전에 니느웨를 주위 12.8km의 성벽으로 둘렀다. BC 695년 경 니느웨의 서쪽에 그가 세운 대 궁전의 공사를 완료했다. 궁전의 규모는 길이 457m, 폭 213m인데, 큰 정원과 홀과 방이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궁전을 수리하고, 성읍에 식수를 공급하는 수로를 시설하였다. 이렇게 제국의 수도로써 그 도성의 지위는 더욱 빛났다( 왕하 19:37,대하 32:21) 비문 중에는 이들 어느 이름과도 같은 것이 없고, 거기서 발견되는 산헤립의 암살자의 네 인용에서도 볼 수 없다. 바벨론의 연대사는 한 사람의 자객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5개월 이내에 에살핫돈은 부왕의 후계자로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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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헤립=센나케리브 [Sennacherib, ?~BC 681]
아시리아의 왕(재위 BC 705~BC 681). 바빌로니아와 페니키아의 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원정으로 시종했다. 청동 주조법 발명, 은환화폐 제작 등에 힘을 쏟고 니네베에 수도(水道)를 부설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별칭 산헤립
국적 아시리아
활동분야 정치
사르곤 2세의 아들. 왕의 치세에는 바빌로니아와 페니키아의 제(諸)도시가 이집트의 지원 아래 끊임없이 아시리아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반란을 기도하여, 그의 일생은 반란 진압을 위한 원정으로 시종하였다. 예컨대, 바빌로니아와 엘람의 동맹군이 봉기하면 이들과 싸웠고, BC 689년에는 바빌론으로 쳐들어가 이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 또 이집트 침공도 기도하였으나, <원정 중에 역병(疫病)이 유행하여 실패>로 끝났다. 한편, 문화면에서는 청동 주조법의 발명, 은환화폐(銀環貨幣)의 제작 등에 힘을 쏟고, 후기에는 니네베를 아시리아의 새 서울로 삼아 궁전을 조영하고, 수도(水道)를 부설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센나케리브는 《구약성서》에 ‘산헤립’으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원정 중에 역병(疫病)이 유행하여 실패> 관련 성경의 기록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
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9:32-37)
*출처:인테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