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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암과 천마봉에서 메아리를 주고받으며
교사 구본황
네 번째 우리산악회 가족 여행을 다녀와서
우리산악회는 거의 10년 동안 주말이나 휴일에는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인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을 비롯하여, 설악산, 지리산 등을 찾는 山行을 하여 삶의 활력을 되살리고, 여름, 겨울 방학에는 歷史文化 遺跡踏査 旅行을 떠나 수학여행 보다 알찬 살아 숨 쉬는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4년부터는 家族 旅行을 시작하여 산악회원들과 가족 간의 情까지 더욱 돈독히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4차례에 걸쳐서 뜻 깊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1차 동해안 가족 여행의 추억
2004년 여름 방학 중인 8월 14일~15일에 1박 2일로 이루어졌다.
임경유(송파공고, 등산대장) 선생님, 이규영(방산고) 선생님, 기우현(동작고) 선생님 부부, 차영훈 선생님, 구본황(개포고)부부 등 7분이 참석하였다.
차 선생님이 9인승 STAREX 승용차를 몰고 수고하였고, 대장님이 길 안내와 식사 마련에 힘써 주셨으며, 기 선생님이 회계 일을 맡아 애써 주었다.
먼저 포항시에 있는 보경사를 찾고 內延山 등산을 하였는데, 이 선생님과 종주산행을 마친 후 하산하는 도중에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벼락 치듯 쏟아지는 소낙비 속에서 폭포와 암벽 사이를 헤매다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놀란 가슴을 백암온천에서 달래고, 다음 날 울진군 월송정 인근에 있는 해수욕장을 뜻밖에 가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차 선생님, 기 사모님, 아내와 함께 동해의 해맑으면서도 보드라운 품에 안겨 물장난을 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류굴을 돌아본 뒤에 강원도로 올라와서 삼척시에 들러 봉평신라비에 대하여 공부하고, 태백시에서는 석탄박물관과 장시, 황지연못을 두루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영월군에 들러 端宗哀史의 역사 향기를 좇아 청령포를 답사한 다음, 선돌 전망대에서 본고장 강원도 감자떡과 옥수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1차 여행을 마감하였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東海의 싱그러운 물살에 몸과 마음을 싣고>에 담겨져 있다.
2차 南道 가족 여행의 추억
2005년 겨울 방학 중인 1월 4일~6일에 2박 3일로 이루어졌다.
한영수 선생님, 차영훈 선생님, 구본황(개포고) 부부, 임경유(송파공고, 등산대장)선생님, 이규영(방산고) 선생님, 기우현(동작고) 선생님 부부 등 8분이 참석하였다.
이번에도 차 선생님이 모는 STAREX가 든든한 적토마 역할을 하였고, 대장님이 여행 일정 안내와 식사를 주관하셨으며, 내가 회계와 길 안내를 담당하였다.
추운 날씨 속에서 목포시에 들러 해양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고,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을 찾아 충무공과 삼별초에 대하여 공부한 다음, 땅끝 마을에서 서해와 남해 바다의 일몰을 바라본 뒤에, 어둠 속을 달려 완도에 도착하여서야 비로소 첫날의 고된 일정을 마감할 수 있었다.
둘 째 날은 완도의 상황봉을 오르는 일정으로 시작하였다.
거대한 야외 식물원 같은 남국의 난대림 숲 속을 거니는 기쁨과 天佑神助하여야 볼 수 있다는 漢拏山을 대면하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청해진이 있었다는 장도를 돌아보고, 강진군에 들러 만덕산 아래에 있는 두 개혁의 산실-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찾아 알찬 역사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적토마를 몰아 여수시 돌산도 끝자락에 있는 펜션에 도착하니, 이미 어둠이 짙은 한밤중이라 운전에 지친 차 선생님은 거의 탈진하고 말았다.
수학여행 보다 몇 배나 알찬 가족 답사 여행을 하다 보니 이렇듯 운전하는 선생님의 노고가 가중되어, 세 째 날은 향일암을 둘러본 다음에 경북 고령군에 있는 대가야 왕릉 전시관에 들러 가야 역사를 공부하는 것으로 2차 여행을 마무리하였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상황봉에서 선구자의 웅지를 탄식하며>에 실려 있다.
3차 南道 가족 여행의 추억
2006년 겨울 방학 중인 2월 9일~2월 11일에 2박 3일로 이루어졌다.
장일원 선생님(퇴임 교장 선생님), 한영수 선생님 부부, 임경유(송파공고, 등산대장) 선생님, 기우현(동작고) 선생님, 차영훈 선생님, 구본황(개포고) 등 7분이 참석하였다.
이번 가족 여행부터는 대장님이 11인승 GRAND CARNIVAL을 몰고 운전하시며 일정 안내와 식사까지 주관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셨고, 내가 길 안내와 회계를 담당하며 새로 참여하신 장 교장 선생님과 함께 식당, 숙소 등을 찾아다녔다.
교장 선생님은 73세의 노인인데도, 어린 소녀와 같이 밝은 얼굴로 재미있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간식을 챙겨주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일행의 힘을 북돋워주셨다.
첫째 날은 전남 담양군에 들러 죽림원, 면앙정, 소쇄원 등을 찾아 조선 중기 역사 공부를 한 다음에, 인접한 화순군으로 이동하여 운주사에 들러 민간 신앙과 연관이 있다는 수많은 석불과 석탑을 눈길을 걸으며 살펴보았는데, 조상들의 숨결이 느껴져서인지 저절로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화순읍에서 1박한 다음 표충사에 들러 조광조 선생의 충절을 되새겨보고, 고인돌 유적지를 거닐며 청동기 시대 공부도 하였다.
적토마를 동쪽으로 몰아 순천시에 있는 우리나라 삼보 사찰의 하나인 송광사와 우리나라 3대 읍성의 하나인 낙안읍성을 둘러본 다음에 다시 여수시로 내려가 오동도를 찾았는데, 운전에 지친 대장님은 차 속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주무시는 것이었다.
둘 째 날도 지난 번 2차 가족 여행 때와 같은 펜션 집에서 마무리되었다.
세 째 날은 처음 참여하신 교장 선생님과 한 사모님께 일출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향일암부터 찾았으나, 역시 2차 여행 때와 같이 흐린 날씨 때문에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하였다.
대장님은 안타까우셨는지 피곤을 무릅쓰고 경남 남해군에 있는 또 하나의 관음성지 보리암까지 적토마를 달리셔서 한 편으로 걱정도 되고, 한 편으로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상한 대장님은 두 분을 위하여 좀처럼 가기 어려운 산청군 산자락에 있는 구형왕릉을 찾아 <남한의 장군총>을 보여드리고 나서야 3차 여행의 막을 내릴 수 있었는데, 그 자세한 내용을 끝내 글로 적지 못하여 지금도 안타깝기 짝이 없다.
“4차 南道 가족 여행에 나선 주인공들을 만나볼까요?”
2009년 1월 19일(월요일)은 여러 해 전부터 우리 산악회가 별렀던 2박 3일의 4차 南道 家族 旅行을 떠나는 날이라 무척 기다려졌었는데, 아내는 목, 어깨 관절 통증으로, 산악회 회장님이신 한영수 선생님은 성당 장례 준비로, 중국어 공부에 열중이신 정상수 선생님은 중국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각각 참석하지 못하여서 아쉬웠다.
결국 가족은 기우현 선생님 내외만 참석하게 되어, 아내가 무척 미안해하였으며,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차 선생님의 STAREX는 출동하지 않고, 대장님의 애마 赤兎馬만 남도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에는 기우현(당곡고) 선생님 부부와 장일원(퇴임)교장 선생님, 임경유, 이규영(이상 송파공고), 구본황(당곡고), 차영훈(개포중) 선생님이 참석하여 지난 가족 여행 때처럼 7분이나 북적거리며 어울리다 보니, 시종일관 화제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가족 여행의 정다운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특히 76세의 장 교장 선생님은, 어린 소녀와 같이 항상 밝은 얼굴로 간식을 챙겨주시고, 끊임없이 우리 일행을 격려하여 주셔서, 절로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도 대장님이 운전과 여행 인도를 도맡아 수고해주셨고, 내가 대장님 옆 자리에서 길 안내와 회계 일을 하였다.
강촌 마을의 추억이 깃든 금강을 지나
이른 아침 5시에 일원역 4거리에서 아내가 정성껏 챙겨준 간식 꾸러미가 가득 든 배낭을 메고 대장님의 차에 오른 다음, 포이동에 들러 이 선생님과 차 선생님을 모시고는, 대장님 댁이 있는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 단지에 들러 기 선생님 차를 단지 안에 주차시키고 기 선생님 부부를 뵙게 되니, 새삼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기 사모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렸다.
기 사모님은 아내가 참석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아내와 통화가 이루어져 알게 되었다며 서운해 하시는 것이었다.
고속터미널 근처에 있는 교장 선생님 댁에 들러 오랜만에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경부고속도로를 씽씽 달려 내려가는데, 대장님은 은근히 안개 길을 내닫는 것이 두려운 듯,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타는 것을 꺼려하셨다.
그러자 기 선생님과 차 선생님이 뒤에서 대장님을 격려하여, 안성IC에서 안성 ․ 평택간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었는데, 겨울 철인데도 따스한 날씨 때문인지 안개가 군데군데 끼어 조심스러웠다.
2005년 1월에 남도 답사 여행을 할 때는, 시속 150km를 사양하지 않는 차 선생님이 운전대의 대권을 잡고 있어서, 대천 휴게소에서 처음 휴식을 취했었는데, 이번에는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대장님이 적토마를 몰아서인지, 대천휴게소 보다 훨씬 서울 쪽에 위치한 홍성휴게소에서, 차령산맥을 넘어오는 日出을 보며 상큼한 서해의 공기를 가슴 가득 담을 수 있었다.
금강 하구가 멀지 않은 서천 휴게소에서, 각자 입맛에 맞는 메뉴를 주문하여 아침 식사를 한 일행이 금강대교를 지나가니, 어린 시절 군산에서 자란 기 선생님이 군산에서의 추억을 슬며시 꺼내는 것이었다.
금강 가 江村 마을에서 자란 나도 이 강변에서 수많은 추억을 만들었고, 그 기억들이 지금도 내 정서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언 손을 호호 불며 산을 오르내리고,
주지 스님과 팔씨름도 하고……
우리 일행은 먼저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한 開巖寺를 찾기로 하였다.
내소사나 채석강 등 해안 지역은 모두 가본 곳이라 낯선 곳을 찾아가기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만 이곳을 다녀갔었다)
부안IC에서 국도로 진입하여 고창 쪽 이정표를 보며 달리다가, 멀리서도 뚜렷이 보이는 부처님 얼굴 모양의 바위를 향해 산길을 접어드니, 인적이 끊긴 산골에 조촐한 대웅전이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러나 이곳을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시골 아낙 같은 첫 인상과는 달리, 보물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 중기 사찰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우수한 목조건축물이다.
개암사는 원래 백제 시대에 창건된 고찰이었고, 뒷산인 능가산을 백제 부흥운동의 치열한 함성이 메아리쳤던 우금산성(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이 부흥운동의 중심지이었던 주류성이라고 한다)이 무려 3,960m에 걸쳐 감싸고 있으니, 百濟의 魂이 깃든 유서 깊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지난 날 산성을 연구하는 김성호 선생님을 도와 처남과 함께 언 손을 호호 불며 산을 오르내리며 實測하였고, 밤에는 바로 이 개암사에서 주지 스님과 팔씨름도 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 자료를 검토하던 아련한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우금산성과 개암사에 숨 쉬고 있을 백제의 혼령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위로해주는 울금바위를 이 고장 사람들이 부처님 바위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터인데, 기 선생님이 코끼리 같다고 하니까 대장님은 한술 더 떠서 인도네시아 코모도 섬에 살고 있는 도마뱀 모양이라고 하셔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개암사의 얼음길을 내려오면서 우리나라 최대의 갯벌 간척 사업인 새만금 방조제를 가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우리가 향하는 남도 쪽과는 역방향이어서, 남도 여행 제1일의 주요 목적지인 고창군으로 바로 내려가게 되었다.
기와 담장에 얼굴을 살짝 감춘 선운사를 찾아서
고창군에서는 禪雲山 도립공원을 먼저 찾아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개암사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다녀왔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갓집 식구들의 남도 여행 때 선운산 입구에서 풍천 장어만 먹고 아쉽게 돌아간 기억이 있어서, 마음이 설레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 호남 지방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날씨가 따뜻한 이날도 응달에는 아직 많은 눈이 쌓여 있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매표소에서 진입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천연기념물 제367호로 지정된 선운산 송악을 맨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송악은 드릅나무과에 속하는 사계절 푸른 덩쿨 식물인데, 바위 절벽에 푸른 밀림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에서 남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 밭을 눈에 담으며 걸어가니, 여러 전각의 지붕들이 기와 담장에 얼굴을 살짝 감추고 반가이 맞아주는 것이었다.
禪雲寺는 개암사와 마찬가지로 백제 시대부터 창건된 사찰이라고 하는데, 큰 규모에 걸맞게 많은 문화유산을 안고 있는 호남지방의 중심 사찰이었다.
(전라북도에서 금산사와 함께 조계종의 양대 本寺이다.)
먼저 대웅전을 소개하면 개암사 대웅전과 마찬 가지로 조선 중기 사찰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이어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보물 제290호), 개암사 대웅전이 보다 화려한 팔작지붕 형태를 띠고 있는데 반해, 이 건물은 규모는 보다 크나 간소한 맞배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금동보살좌상이 조선 시대의 불상을 대표하는 문화재이고 (보물 제279호), 참당암 대웅전이 조선 후기 사찰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 보물 제803호)
그러나 선운산 등산과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도솔암 가는 일정이 바빠서, 선운사 뒷산에 수령 500여년의 동백나무 3,000여주가 5,000여평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의 壯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쉬웠다.
상사화의 전설이 깃든 꽃무릇과
호걸의 기상을 뽐내는 장사송의 환영을 받으며
도솔암은 선운사에 딸린 암자인데도 4km 가량이나 떨어져 있고, 선운산 등산까지 하다보면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것 같아, 우리 일행은 등산 팀과 도솔암 팀으로 나누어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나는 대장님, 이 선생님, 기 선생님과 등산 팀이 되었고, 등산을 오랫동안 쉰 차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기 사모님을 모시고 천천히 도솔암까지만 오르기로 하였다.
산속으로 갈수록 눈이 더욱 두껍게 쌓여 조심스러운데, 역시 남도라 도솔천 건너 눈 녹은 녹차 밭에 찻잎이 푸르게 보이는 것이 신기하였고, 산기슭이나 길섶 여기저기에는 꽃무릇이 벌써 푸른 이파리를 자랑하며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었다.
꽃무릇은 수선화과 식물인데, 꽃은 수선화와 달리 잎이 시든 9월에야 붉은 색으로 피어,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하여 <相思花>라고 불리는데, 바로 선운사 주변이 우리나라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인 것이다.
도솔암에 가까운 길가에는 선운사 長沙松(천연기념물 제367호)이 落落長松의 진면목을 자랑하며 豪傑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장사송이란 명칭은 장사현이 이 고장의 옛 지명인 데에서 유래한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약 600년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높이가 무려 28m나 되고 나무둘레도 3m에 이른다고 하는데, 나연이(둘째 딸 이름) 생일 때 경상북도 雲門寺에 가서 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가 저절로 눈앞에 떠올랐다.
운문사 소나무는 높이가 6m에 불과하나, 가지가 밑으로 자라는 희귀한 수종으로 가지 퍼짐이 특징이라, 남북으로 소나무 가지가 무려 20m 이상 퍼져 있고 동서로도 17m 이상 대지를 덮고 있어서, 역시 壯快한 호걸의 기상을 보여준다. (매년 12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소나무이기도 하다)
장사송 뒤에는 신라 진흥왕이 수도하였다는 진흥굴(일명 좌변굴)이 있으나 당시 역사적 상황이나 지리적 위치면에서 信憑性이 없어 보였다.
마침내 兜率庵에 도착하여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禪雲寺兜率庵磨崖佛(보물 제1200호)을 親見할 수 있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부처님을 뵙는 기쁨
선운사 도솔암 마애부처님은 고려 초기 호족 문화와 관계가 깊다.
2007년 여름 대장님과 더위와 목마름의 고통을 이겨내고 찾아뵈었던, 월출산 마애여래불상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불상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조선 후기의 예언사상과 관련이 깊다.
세도정치의 桎梏과 이양선의 왕래 속에 불안해진 국민들은, 彌勒信仰에 귀의하여 나라 안팎에서 밀려드는 민족적 위기의 칼날을 피해가고자 하였고, 선운산 미륵부처님이 바로 구세주로 신앙의 중심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도솔암마애불의 배꼽에 숨겨져 있는 비결서가 세상에 나오면, 조선이 망하고 새 세상이 열려 위기가 걷히고 태평성대가 열린다고 믿게 되었고, 이러한 신앙은 마침내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키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미륵신앙의 중심 대상인 마애불을 작별하고, 마애불 뒤편 바위 뒤에 숨겨진 계단을 올라 지장보살신앙의 중심 건물인 內院宮을 찾았다.
내원궁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우뚝 솟아 壓倒的인 氣風을 뿜어내고 있는 천마봉과, 주위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보물, 선운사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이 모셔져 있었다.
선운사금동보살좌상이 조선 시대 금동불상을 대표한다면, 내원궁의 불상은 고려 시대 금동불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솔암과 천마봉에서 메아리를 주고받으며
그런데 어느새 오후 1시가 가까워오지 않는가!
등산 팀은 서둘러,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하늘을 멘 아틀라스(Atlas)처럼 우뚝 솟은 천마봉을 오르려 하였는데, 이 선생님이 아이젠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등산을 사양하는 것이었다.
대장님이 간곡히 설득하여 같이 오르게 되었는데, 천마봉에 오르니 1시가 이미 훌쩍 지나고 말았다.
결국 점심 식사 시간이 늦어지는 것을 두려워한 대장님은, 도솔암 팀이 먼저 식사하라는 연락을 부탁하시는 것이었다.
차 선생님에게 연락하면서 선운사 쪽을 내려다보니, 차 선생님을 비롯한 도솔암 팀이 벌써 도솔암을 오르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일행에게 알리고 차 선생님에게 우리 위치를 가르쳐드린 다음, 양 팀이 서로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도솔암과 선운산에 오른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데, 글을 쓰는 지금도 그때 모습이 눈앞에 또렷이 떠올라 미소를 짓게 된다.
도솔암 팀이 도솔암 부처님, 보살님들을 참배할 동안, 등산 팀은 얼른 산행을 마무리하여야 하는 입장이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낙조대(해발 390m)와 배맨바위로 가는 우두머리 봉우리에서 서해 바다의 시원한 정경을 조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건너편 도솔암과 선운사 쪽으로 길게 이어진-수많은 부처님들이 열을 지어 배웅하는 듯 바위 능선이 수려한-선운산의 주능선은 눈으로만 돌아보면서, 드라마 대장금 촬영 장소이었던 용문굴을 거쳐 하산 길을 재촉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기 선생님은 선운산 정기를 받아서인지 기운이 난다며 나는 듯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선운사 천왕문 앞에서 등산 팀을 마중하는 도솔암 팀도 훌륭한 부처님과 보살님을 뵌 기쁨에 배고픈 것도 잊고 환한 미소로 맞아주는 것이었다.
선운산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들의 높이는 해발 300~400m대로 나지막하나 수려하고, 이어진 산줄기가 제각각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본래 도솔산(兜率山)이었으나 백제 때 창건한 선운사(禪雲寺)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선운>의 뜻은 구름 속의 신선이 누워 참선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계곡미가 빼어나고 숲이 울창한데, 주요 경승지는, 도솔암과 선운산의 멋진 부처님 바위들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천마봉, 서해 일몰의 아름다음이 돋보이는 낙조대(落照臺), 신선이 학을 타고 내려와 노닐었다는 선학암(仙鶴岩) 등이 꼽힌다.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씨가 담긴 산채 비빔밥을 먹으며,
선운산 등산의 멋진 체험을 마무리하고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 쪽으로 나오니 어느덧 오후 2시가 넘어, 서둘러 점심 식사를 하여야 하였다.
이곳은 풍천 장어가 유명하지만, 빠듯한 회비나 시간 관계로 도저히 교장 선생님이 추천한 풍천장어 집을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관리사무소 근처에 있는 전문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은, 대장님 회갑연을 차려드리지 못하여 풍천장어로 대신하려고 하였는데 그마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당연히 이 점심 값은 내가 내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선배 선생님의 속 깊은 마음가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고인돌 유적과 고창 읍성에서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듬뿍 담아 맛있게 식사를 한 일행은, 다음 일정을 잡기에 잠시 고심을 하였다.
고창이 배출한 인물들의 생가를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분들이 김성수 ․ 서정주 선생과 전봉준 장군인데, 가족 여행 제2일의 주요 목적지인 전라남도 해남군까지 저녁 시간 때까지는 도착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덧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어가는 3시가 지나는 시간이라, 결국 생가 돌아보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고인돌 유적과 고창읍성을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감하기로 하였다.
좁은 19번 군도를 달려 세계문화유산(C-977호)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산면 일대의 고인돌 유적을 차창 너머로 살펴보다가 고인돌 박물관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고창고인돌 유적은 동서로 약 2.5km 범위에 447기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고, 군내 전역 85개소에 2천여기 이상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되어 세계최대의 고인돌 조밀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時間 福이 없어서 오늘이 하필 박물관 휴관일인 월요일이라 어렵게 찾아간 보람을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제는 마지막 탐방 장소인 고창읍성을 둘러보면 되는데, 마침 판소리 박물관과 신재효 생가가 바로 이웃에 위치하여 같이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창읍성은 고창읍 인근에 있어서 고창읍을 지나야 하였는데, 시내인데도 좁은 일방통행 도로를 지나야 하고, 넓은 차도가 나오면 어김없이 불법 주정차 차량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후진적인 우리나라 교통문화의 현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창읍성은 국방관련 문화재(사적 제145호)로 둘레가 1,684m나 된다.(높이는 4~6m)
백제 때 이곳이 모양부리이어서 모양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충청남도의 해미읍성, 전라남도의 낙안읍성과 함께 우리나라 읍성을 대표하는데, 축조 연대는 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만 성벽에 새겨져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성벽의 형태로 보아 대략 1573년, 임진왜란을 얼마 앞둔 시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 ․ 서 ․ 북의 3문과 적의 접근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협력 수비가 가능하도록 고안된 치(雉) ․ 옹성(甕城) 등 전통성곽의 특징이 담긴 방어 시설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북문으로 들어가서 성벽 길을 따라 고창 읍내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老松과 대나무 숲으로 잘 조경된 길을 따라 관청, 객사, 동헌, 풍화루(잔치를 하던 곳) 등 행정 시설들을 살펴보면서, <실제 전쟁 시기에는 많은 백성들을 어떤 시설을 갖추고 보호했을까>에 대한 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옹성이 우아하게 감싸고 있는 북문을 나오면 성 밖에 바로 판소리박물관과 신재효 고택이 있다.
역시 월요일이라 휴관하는 바람에 전시물만 간략히 돌아볼 수밖에 없어서 아쉬웠는데, 신재효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대원군 시대 사람으로 원래는 중인 출신이었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대원군의 힘과 기근이 닥쳤을 때 인근 주민을 널리 구제한 공으로, 나중에는 호조참판까지 벼슬을 하여 당당한 양반이 된 인물인데,
판소리 사설을 모든 계층이 사랑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불우한 명창들을 후원하여 전통 문화를 발전시킨 업적을 쌓은 분이다.
공동묘지 같은 관광단지와 인정이 넘치는 대산장 여관
고창읍성까지 둘러보니 5시가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내일 아침 일정이 海南郡에 있는 세계 최대의 공룡 화석 유적을 탐방하는 것인데, 땅끝 마을이 있는 머나먼 전라남도 남쪽 동네를 찾아가려면 리아스식 해안(rias coast)의 힘들고 긴 해안 길을 깜깜한 밤중에 달려가야 할 터인데, 앞으로 닥칠 대장님의 노고가 걱정이 되었다.
경제적 낭비를 싫어하는 대장님은 적토마를 수동식(스틱식)으로 주문하였고, 편리한 길 안내 장치인 네비게이션(navigation)도 달리 않으셨는데, 환한 대낮에는 옆에 앉은 내가, 이정표의 글씨나 지도의 그림이 잘 보이지 않는 대장님을 대신하여, 미리미리 알려드리면서 도움을 드릴 수 있었으나, 밤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서둘러 고창IC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로 진입한 다음, 씽씽 내달려 일로IC에서 좁은 지방도로로 나온 다음부터가 문제가 되었다.
이미 땅거미는 지고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는데, 길은 거미줄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뻗어 있어서, 어둠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대장님 차에 있는 구닥다리 지도나, 전조등 불빛을 통하여 바로 앞에서 밖에 알려드릴 수밖에 없는 이정표가, 점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주로 대장님의 경험에 의존하고 해남 방향이라는 것만 머릿속에 담아 길 안내를 하면서, 겨우 목포시를 통과하고, 영산호하구언 ․ 대불방조제 ․ 영암방조제를 지났으나, 그 다음 關門 통과에는 실패하여 해남읍 쪽 방향으로 길을 안내하여 신이면을 신나게 달리다 보니, 대장님이 고개를 가로저으시는 것이었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서 珍島 방향으로 길을 바꾼 다음, 금호방조제를 건너니 바로 2005년 1월 南道 踏査 旅行 때 찾았던 화원반도가 아닌가!
그런데 새로 닥친 문제는 숙소를 잡는 일이었다.
읍 단위 도시 조차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변변한 숙소를 구한단 말인가?
내일 일정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공룡유적지 근처로 일행을 인도하여 왔던 대장님도 적이 난감해하시는 것이었다.
마음을 졸이는 순간 차 불빛에 해남화원관광단지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가!
우리 일행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신나게 적토마를 몰았다.
그러나 마을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산길을 아무리 헤쳐 나가도 도무지 관광 숙박 시설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니, 큰 고개를 넘어서니, 인적도 없는 웬 골프장이 共同墓地처럼 음산하게 우리 일행을 마중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에 우리 일행은 할 말을 잊고 한 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다음 순간 안내판 하나 똑바로 세워놓지 않은 것은 물론, 사람도 찾지 않는 이런 골프장을 위해 널찍한 포장도로와 가로등까지 설치한, 무책임한 지방 실력자들에게 마음껏 욕설을 퍼부어댔다.
하는 수없이 온 길을 되돌아가 청룡리 면소재지에 오니, 유일하게 눈에 띄는 4층 건물에 숙박소 표시가 붙어 있었다.
말주변이 좋은, 교장 선생님과 내가 대표로 가서 알아보니, 시아버지로부터 며느리까지 2대가 각각 한 층씩 맡아 서비스업을 하는 재미있는 집이었다.
다행히 소녀 같은 분위기의 마음씨 좋은 며느리가 맡은 4층 대산장 여관으로 싼 값에 숙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시골 아줌마 같은 시어머니가 담당하는 2층 대산 식당에서 늦은 시간 맛깔스러운 시골 고기반찬으로 흡족하게 입맛을 돋울 수 있었다. (1층 대산슈퍼는 시아버지 담당, 3층 당구장은 남편이 운영)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임 선생 회갑연에 축하주가 빠져서는 안 되지.”
하시며 맥주를 시키셔서, 지난 해 12월 11일 우리산악회가 함께 즐거워했던 축하연처럼, 한 동안 술잔을 서로 부딪히며 웃음소리와 축하 인사가 메아리쳤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면서 2층 대산식당의 주인인 시어머니에게 아침 8시에 아침 식사를 주문한 덕택에, 느긋하게 7시 30분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2층 식당으로 내려가서 맛난 전라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니, 어제의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와 같이 넓은 호숫가에 조성되어 있는 우항리 공룡 화석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적토마는 진도로 가는 77번 국도 위에 발길을 내딛는가 했더니, 울돌목 바로 앞에서 18번 국도로 갈아탄 다음, 동쪽으로 화원반도를 신나게 달렸다.
황산면사무소가 있는 연당리에서 황산초등학교 옆길로 들어가니, 거대한 공룡 마스코트가 우리 일행을 반겨주어, 이곳이 공룡 연구 ․ 관광의 중심지임이 느껴졌다.
방조제로 조성된 바다와 같이 넓디넓은 금호호 갈대 밭 옆에, 무려 332,610㎡ 규모로 조성되어 있는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 ․ 익룡 ․ 새발자국 화석지는, 천연기념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단순히 발자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룡박물관, 보호각, 수장고, 기반시설 등이 있어서, 상상을 초월한 규모 뿐 아니라 풍부한 시설에도 놀라게 된다.
익룡 ․ 공룡 ․ 새 발자국이 한 지역에서 발견된 것도, 별마크 달린 대형 초식공룡 발자국이 발견된 것도, 퇴적층에서 나타나는 뜯어내림 암편이 발견된 것도 모두 세계 최초이며, 익룡 발자국 크기(20~35㎝) 및 규모가 세계 최대이고, 화산 활동이 활발하던 중생대 백악기인 약 8,300만 년 전에 생성된 물갈퀴 발자국 화석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해남군은 이런 보호할 자격이 충분한 우항리 화석지가 세계 자연 유산이 될 수 있도록 등록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등록이 확정된 세계 자연 유산이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1건 밖에 없는데, 상대적으로 많은 세계 문화 유산<7건> ․ 세계 기록 유산<6건>과 큰 차이가 있다.)
공룡박물관은 우항리실, 공룡과학실, 공룡실, 중생대재현실, 해양파충류실, 익룡실, 새의 출현실, 거대공룡실, 지구과학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종 조형물 ․ 화석모형 ․ 그림 ․ 사진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고,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전에 여러 번 다녀가서 쉬고 있겠다고 말씀한 대장님을 제외하고,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본 뒤에 밖으로 나와 발자국 화석이 있는 곳을 찾았으나, 조경이 잘되었으나 넓디넓은, 화석지 어디에도 안내 표시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대장님은 혼자 차 속에서 벌써 1시간 반이나 기다리고 계실 터인데, 빨리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일행을 모시고,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하고는, 갈대 숲 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다행히 입구로 나가는 방향에 있는 갈대 숲가에는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었고, 공룡 ․ 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반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것이 야외학습장이었다.)
우리 일행은 보물찾기 놀이에 나선 아이들처럼 신이 나서 둘러본 다음에 탐방로 옆에 건물로 마련한 공룡화석 보호각으로 들어갔다.
보호각은 조각류 공룡관, 익룡 ․ 조류관, 대형 초식공룡 발자국 보호각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너무나 정교하게 퇴적암과 공룡 발자국이 전시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이것이 외부에서 운반하여 꿰맞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었다.
보호각을 나오니 다시 야외학습장이 이어져 있고, 무려 5㎞에 걸쳐 펼쳐져 있다는 우항리 퇴적층과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물갈퀴 새발자국,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절지동물과 갑각류의 보행흔적 화석을 죽 둘러본 다음에, 비로소 정문에 다시 돌아오니 벌써 11시가 가까워 와서, 화석지를 잘 다녀왔다는 기쁨과 함께 대장님께 죄송하다는 마음을 같이 느껴야 했다.
대둔산과 두륜산의 환영을 받으며 달마산으로
시간이 어느덧 점심시간에 가까워오니 서둘러 다음 목적지인 달마산과 미황사로 달려가야 했다.
18번 국도로 달리다가 해남읍 부근에서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완도 방향으로 달리니, 들판 너머 남쪽으로 의좋은 두 형제처럼 대둔산(해발 672m)과 두륜산(해발 700m)이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달마산은 저 산줄기가 땅끝을 향해 내달리다가 마지막으로 용틀임하며 솟아올라 형성되었으며, 그 끝이 땅끝 전망대가 있는 사자봉이다.
월송리에서 지방 도로로 길을 바꾼 다음 다시 서정초등학교에서 비포장도로로 키를 돌려 찾아갔는데, 이 부근은 땅끝 전망대가 유명하여 어느 길을 가더라도 이정표에 땅끝 표시가 되어 있었다.
달마산 등산은 미황사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도 우리 일행은 등산 팀과 미황사 팀으로 나누기로 하였고, 등산 팀은 선운산 등반 때와 같았다.
시간은 벌써 11시 30분이나 되어 간식이 필요할 것 같아 아내가 정성껏 마련해준 떡과 귤을 배낭에 넣고 대장님을 따라 나섰다.
달마산에 올라 남도 여행의 추억을 더듬고
達磨山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과 북평면에 걸쳐 있는데, 정상의 높이는 해발 489m로 선운산처럼 나지막하나, <南道의 金剛山>이라 일컬을 정도로 공룡의 등줄기 같은 기기묘묘한 바위 봉우리들을 자랑하고 있어서 종주 산행의 묘미를 보여주는 산이다.
산 전체가 규암으로 되어 있어서인데, 마치 거대한 비석을 세워놓은 듯 봉우리들이 뚝뚝 단절되어 있어서, 혼자 등반할 때에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미황사에서 봉수대가 있는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해발 417m)에 이르는 종주코스가 권장되는데 거리는 8㎞이고 산행 시간은 3시간 정도이다.
만일 땅끝 전망대가 있는 사자봉(해발 110m)까지 간다면 각각 17.8㎞, 5시간 30분이 필요하다.
아열대 식물인 상록수들이 반기는, 미황사 뒤편으로 난 산길로 올라가니, 안내판이 나오는데, 정상까지 40분 거리로 적혀 있었다.
등산 팀은 내가 준비해온 떡과 과일로 허기져가는 배를 달랜 다음 가파른 암릉을 쉬며쉬며 힘겹게 올라갔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일행이 달려온 해남 일대는 물론이고 서해 바다 건너 진도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날씨는 어제 선운산에 올랐을 때처럼 한껏 청명하여 날씨 福을 마음껏 누리게 되니 저절로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상과 문바위재가 나뉘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바로 정상인 불썬봉(달마봉)이다.
봉수대가 있는데, 조선 시대에는 완도 숙승봉과 땅끝 건너에 있는 흑일도 백일도에서 올라오는 통신 내용을 서울로 전달하는 중요한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정상에 서니 눈부신 햇살 아래 바다는 푸른 보석같이 빛나는데, 서해 저편에는 멀리 2005년에 답사하였던 珍島가 손짓하고 있고, 손을 뻗으면 잡을 듯 가까운 남해 바닷가에는 象皇峰의 추억이 숨어 있는 莞島가 장보고 장군처럼 의젓하게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이곳 달마봉에서도 天佑神助하면 漢拏山을 親見할 수 있다고 하는데, 거기까지는 過度한 慾心을 부리지마라는 신의 게시인 듯 노화도와 청산도를 지난 아득한 수평선 너머는 엷은 烟霧가 가로막고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대둔산과 두륜산이 빨리 달려오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멀리 도암만의 좁은 바다 너머로는 천관산(해발 723m)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들 산들은 우리산악회가 언젠가 꼭 그 정상에 안기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남해 바닷가 여행에서 항상 마주 대하게 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아득히는 月出山으로부터 가까이는 완도의 백운봉까지, 우리산악회의 멋진 추억을 되살려주는 그리운 산들과 인사할 수 있는, 달마산을 하산하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대장님도 도솔봉까지 종주하여야 하는데 안타깝다면서, 문바위재까지만 약식 종주를 하고 내려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길 좋아하는 대장님은, 거대한 비석 같은 거인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는 바윗길로 가자고 하셨으나, 나머지 등산 팀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꼬마들처럼 반기는 山竹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흙길로 바위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느 때는 밧줄에 매달리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바위틈을 빠져나오기도 하다 보니, 어느 사이 갈림 길에 도착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1시간 40분의 등산을 마무리하고 나서 등산 팀은 미황사를 탐방하였다.
돌배의 전설이 숨어 있는 미황사
美黃寺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조계종에 소속되어 있으며, 두륜산 기슭에 있는 대흥사에 딸린 절이다.
신라 전성기인 경덕왕 때 의조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사적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황금 색 옷을 입은 사람이 인도에서 돌배를 타고 가져온 불상과 경전을 금강산에 모시려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절이 조성되어 있어 되돌아가던 중, 이곳이 인연의 땅임을 알고, 의조 스님에게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따라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가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는데, <미황>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美)>자를, 황금 색 옷을 입은 사람을 기려 <황(黃)>자를 쓴 것이라고 한다.
뜻밖에 찾게 된 <맛 기행> 길
미황사는 내일 가기로 예정되어 있는 文殊庵과 함께 교장 선생님께서 몹시 가보고 싶어 하셨던 절인데, 멋진 남성미의 바위 근육을 자랑하는, 달마산과 푸른 숲이 아름다운 배경을 이루고 있고, 막돌로 쌓은 축대와 소박한 건물들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대웅전(보물 제947호)과 응진당(보물 제1183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내일(남도 가족 여행 제3일)의 주요 목적지가 해남에서 워낙 멀리 떨어진 경상남도 고성군이라 우리 일행은 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토마를 채찍질하여 바삐 해남군을 빠져나간 다음 55번 지방도로를 달려 강진군을 지나다보니, 지난 날 남도 여행의 추억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데, 가장 시급한 일은 1시가 훨씬 지난 시간이라 배를 채우는 문제이었다.
대장님이 길가 시골 식당은 밥을 시키면 그때부터 준비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니 강진 읍내에 들어가서 식사하자고 하자, 평소 가족 여행을 많이 한 이 선생님이 병영면에 있는 설성식당을 찾아가자고 느닷없이 제안하지 않는가!
결국 이 선생님의 주장에 따라 뜻밖에 <맛 기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 선생님도 방향을 잘 알지 못하여 강진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찾아가다 보니, 어느덧 2시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강진읍을 가로질러 달린 다음 2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인적이 사라진 고개(검예재)가 나오고, 웅장한 서양 중세시대의 성벽처럼 시야를 압도하는, 월출산이 <왜 영암군까지 왔느냐>고 호통하는 듯,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제처럼 점심시간을 넘기게 되니 일행 모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는데, 다행히 월출산 바로 아래에 이르니 동쪽으로 병영면 이정표가 보여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곳이 조선 시대에, 호남 일대 군사령부가 있었던 군사 중심지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사실을 입증해주는 산성과 봉수대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병영초등학교가 있는 면소재지에서 길을 물어 설성식당을 찾아갈 수 있었다.
이곳은 전국의 식도락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식당이어서인지, 상 단위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4사람 분 1상이 2만원이었다.)
반찬 가짓수가 20가지가 넘고 모두 정갈한 느낌을 주었는데, 특히 돼지고기가 느끼하지 않게 잘 요리되어 있어서 일행들이 너도나도 칭찬을 하였다.
숙소를 찾아 떠나는 머나먼 여행 길
설성식당을 나오니 3시가 훨씬 넘어 역시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강진군 ․ 장흥군 ․ 보성군 ․ 순천시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로 지르면서, 길고 긴 남해안을 2번 국도로 내달린 다음, 순천 IC에서 비로소 남해고속도로에 진입하였는데, 대장님은 이 고속도로가 사고를 일으키기 쉽게 엉터리로 설계되었다고 분개해하시는 것이었다.(원심력을 감안하지 않게 설계되어 커브를 돌 때 사고 위험이 큼)
대장님의 노고에 힘입어, 진주IC에서 대전 ․ 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이젠 방향을 바꾸어 동남쪽 방향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고성IC에서 서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어 14번 국도로 진입하니, 고성군은 온통 3월부터 시작되는 <공룡 엑스포(EXPO)> 준비로 들떠 있는 분위기이고, 그것을 반영하듯 고성읍내에서는 우리 일행이 모두 묵을 수 있는 숙소도 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도로 나와 반대 방향인 동쪽, 마산 방면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달려야 하였다.
얼마를 가니 오른 쪽 산골짜기에 번쩍이는 숙소 표시가 보이고, <에로스>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번에도 교장 선생님과 내가 대표로 나가 알아보게 되었는데, 웬걸 숙소로 들어가는 출입구도 보이지 않고 인기척도 없이, 음산한 분위기가 가득하지 않은가?
사나운 개 소리에 쫓기면서 서둘러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륜 남녀들이 데이트하는 회원제 모텔이란 결론을 내렸다.
결국 당항포 국민 관광지가 가까운 배둔리까지 동쪽으로 달려가서 겨우 숙소를 구할 수 있었고, 시골인데다 늦은 시간이라 마땅한 식당을 찾을 수 없어서 김밥 집에서 간소하게 식사를 하고 나서, 지친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 여행 마지막 날인, 내일 날씨가 은근히 걱정이 되어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일기예보로는 내일 남부 지방에는 비가 내린다고 하였는데, 대장님 말씀대로 문수암 일출 보기가 가능할까? 연화산 등산이 가능할까? 생각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문수암에 아쉬움을 묻고
文殊庵은 아내와 처남이 그 아름다음을 극구 칭찬한 곳이어서 日出登山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이것은 교장 선생님이나 일행 모두 같아서 서둘러 6시쯤 일어나서 얼굴을 씻고 숙소를 빠져나갔다.
다시 서쪽으로 달려 고성읍내로 진입한 다음, 33번 국도로 사천시 방향인 북서쪽으로 달리다 보니, 날은 이미 밝아왔는데 잔뜩 찌푸린 날씨라 일출등산이 불가능함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왼쪽 산길 방향으로 표시된 문수암 이정표를 따라 달리는데, 문수암은 남해 바다가 코앞에 보이는 해발 548m의 무이산 정상 부근에 위치하여, 속리산을 찾아갈 때 지나가는 말치고개처럼 급경사의 차도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서, 대장님이 적토마를 모는 데 어려움을 겪으셨다.
쌍계사에 딸린 절인 문수암은 신라 전성기인 성덕왕 때 의상 대사가 거지로 변한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조성하였다고 전해지며,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오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사량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와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잔뜩 찌푸린 날씨라 하늘과 바다가 회색 빛 배경을 띠고 있는데다가, 얼마 전에 완공된, 보현사 약사전과 거대한 약사여래상이 앞에서 시야를 가로막고 있고, 왼쪽 아래 자은리 쪽 산줄기에는 대단위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어서 눈살이 찌푸려졌다.
연화산으로 가는 길
篤實한 불교신자인 교장 선생님과 기 사모님의 참배가 끝나길 기다려서 우리 일행은 마지막 목적지인 연화산 도립공원으로 향하였다.
뜻 깊은 가족 여행의 3일 연속 등산, 3일 연속 사찰 탐방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었다.
다시 33번 국도로 되돌아간 다음, 북쪽으로 달려 영현면사무소를 지나는 1009번 지방도로까지는 잘 찾아갔으나, 이정표에 헷갈려서(찾기 어려운 탐방로로 가도록 표시해놓고 있었다) 도립공원내 산골 마을을 헤매다가 높은 고개를 내려오니, 그만 한 바퀴 빙 돌며 방황한 셈이라, 이미 아침 식사 시간을 헛되이 보낸, 일행 모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만한 일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장님과 나는 재차 1009번 지방도로로 진입한 다음, 이정표를 무시하고 산골마을 길을 지나쳐서 죽 앞으로 달려가서, 영오면사무소 소재지에 위치한 식당에서 쇠고기 국밥을 먹으며,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곳 갈림길에서 1002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우리가 어제 숙박한 배둔리에 이르게 된다.
적토마는 배둔리 이정표를 보며 신나게 달리다가, 개천면사무소 소재지에서 玉泉寺 이정표를 보고 산길로 방향을 돌려 蓮花山을 찾았다.
오르막 내리막이 가파른 연꽃 모양의 연화산
연화산은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에 있는 산으로 정상의 높이는 해발 528m이다.
고성읍에서 북서쪽으로 12㎞ 떨어진 곳에 솟아 있으며, 산세가 연꽃과 닮았다 하여 연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래 이름은 비슬산(琵瑟山)이었으나 조선 인조(仁祖) 때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고, 그리 높지는 않지만 울창한 숲과 깊은 계곡 등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1983년 9월 29일 고성군 일대 연화산 지역 28.72㎢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우리 일행은 역시 등산 팀과 옥천사 팀으로 나누었고, 구성 인원은 가족 여행 제1일 ․ 제2일 때와 똑같았다.
등산 팀은 옥천사 앞을 지나쳐서 청련암 안내판을 보고 걷다가, 찻길을 버리고 급경사로 이어진 산길로 오르자, 연일 이어진 등반에 체력이 약한 기 선생님이 몹시 힘들어하여 안타까웠다.
연화산은 흙산이지만, 연꽃 모양처럼 봉우리들이 제각기 독립봉 모양으로 오르내림이 심하여서, 2봉우리를 오르내리고 3번째 봉우리인 남산(해발 427m)을 오르게 되자, 모두 지쳐서 음료수를 마시며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봉우리에서 바라보니 남해 바다 너머 아득히 거제도가 보여, 새로운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산에 오르니 비로소 정상인 연화산이 높다랗게 시야에 들어와서, 건너 편 옥천사 뒤에 있는 연화봉(해발 477m)이 정상인 줄 알았던 일행은, 안심이 되었다.
4번째 오르막이 비록 만만하지 않았으나, 해발 528m의 정상에 우뚝 서니, 목표 성취의 보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장님은 널찍하고 완만한 하산 길을 마다하고, 급경사로 내리닫는 희미한 하산 길을 택하여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끄러운 낙엽과 돌멩이를 피하여, 어렵사리 나무 가지를 잡은 손에 몸을 의지해가며 위태롭게 내려오다 보니, 지난 날 길도 없는 너덜지대를 위태롭게 내려와야 했던, 가야산(충청남도 덕산도립공원에 위치한) 하산 길이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2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힘든 연화산 등반을 마무리하고 옥천사로 내려오니, 한가롭게 약수 물을 긷는 기 사모님이 반가워하셔서, 비로소 산행이 마무리되었음이 실감이 나고 마음이 놓였다.
건물 배치가 특이한 호국사찰, 옥천사
玉泉寺는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蓮花山)에 있는 절이다.
문수암처럼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에 딸려 있는 절로, 역시 신라 전성기인 문무왕 때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뒤에 맑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 약수 물은 위장병에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대웅전(경남 유형문화재 제132호), 자방루(滋芳樓, 경남 유형문화재 제53호), 심검당(尋劍堂), 적묵당(寂默堂), 명부전(경남 문화재자료 제146호) 등 건물들이 모두 큼직하고, 가람의 지붕이 마치 연꽃무늬처럼 배열되어 있어서, 외형적인 규모로는 본사인 쌍계사를 능가한다.
옥천사는 건물 배치가 특이한데, 맨 앞에 자방루가 버티고 있고, 대웅전은 뒤편에 감추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이 절이 호국사찰이라 담장으로 가려져 있는 이 자방루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군사회의도 열고 병사를 조련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장 귀중한 문화재는 보장각에 보존되어 있는 옥천사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보물 제495호)인데, 고려 1252년(고종 39)에 구리로 만든 타악기로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나 급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사용되었다고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심원이 있고, 둘레에 연꽃 열매와 연꽃 이파리, 덩굴 식물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가족 여행 3일 동안 꼬박꼬박 등산하고, 유명 사찰을 탐방하고 나니, 등산을 좋아하는 선생님들이나 사찰 순례를 원하셨던 교장 선생님, 기 사모님 모두 만족하셔서, 南道의 훈훈한 기운을 가슴에 가득 담고 즐거운 정담을 나누면서, 신나게 상경 길을 재촉할 수 있었다.
멋진 마무리를 위해 찾아가게 된 보탑사
대전을 지난 죽암 휴게소에서 늦은 시간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대장님은
남도 여행의 멋진 마무리를 하고 싶으신지, 우리 일행에게 진천에 있는 寶塔寺를 다녀오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지난 날 일행 대다수가 그 절에 가서 즐거운 추억을 나누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때 맛보았던 감격을 되살리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천안 코앞인 목천IC에서 21번 국도로 갈아타고 진천 방향으로 달리면, 독립기념관 안내판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3 ․ 1 운동의 성지인 아우내장터를 지나게 된다.
이 길이 지나는 지역이 범상한 고장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충청북도 진천군에 들어서서 연곡리 이정표를 보고 왼쪽으로 난 좁은 시골 길로 들어서면,
삼국 통일의 영웅인 김유신 장군 탄생지가 나와 <生居鎭川>이 허명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더 나아가서 연곡 저수지를 지나면 마치 어머니 품 같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寶蓮山 자락이 보이고, 바로 그 품 안에 보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붉은 노을 속에 새로운 소망을 가슴에 새기고
저물어간 가족 여행
寶塔寺는 큰 절터로만 전해오던 연곡리에,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고, 전통 목조건축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1991년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한 후, 당대 최고의 대목장이라 할 수 있는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독아래 우수한 건축 기술자와 최고의 금강송들이 망라되어, 대못을 쓰지 않는 전통 기법으로 황룡사 목탑을 재현하는 눈물겨운 작업을 펼친 끝에, 1992년 5월에 착공하여 1996년 완성하였는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내부 통로를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웅장한 목탑으로 대웅전을 대신하고 있다.
1층은 금당(대웅전)인데 사방불을 모시고 있고, 2층은 법보전으로 돌로새긴 8만 대장경을 모셨으며,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3존불을 모시고 있었고, 층 사이에는 따로 공간을 두어 세계의 우수 불교 건축물을 소개하고 있어서, 불교문화 공부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보탑사는 친절한 능현 스님이 관리하는 비구니 사찰인데, 탑 높이 54m(목탑 33.3m, 상륜부 20.8m)의 <20세기에 만들어진 국보>라는 별명이 붙은 목탑(호국대탑) 외에도, 경내에는 보물 404호인 백비와 연곡사지 3층 석탑을 보존하고 있고, 예술 작품으로도 손색없는 臥佛을 모신 적조전, 바람개비가 인상적인 찻집 같은 삼소실, 너와 집 모양의 산신전, 천왕문 대신 의좋은 형제같이 목탑을 지켜주는 범종각 ․ 법고각 등 친근한 정이 느껴지는 건축물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탐방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3층 목탑을 오르며, 바람직한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우리산악회원들이 늘 건강하면서 所望을 갖고 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는데, 다보 부처님 세계처럼 조경이 빼어난 境內로 나와 보니, 어느새 붉은 빛 노을이, 일행 하나하나를 어루만져주는 듯, 아름답게 비춰주고 있었다.
( 2009년 2월 26일 적음 )
첫댓글 2004년 제가 빠진 겨울 여행을 제외하고 우리 산악회가 답사 여행한 코스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군요. 이 글은 한 번 읽어 가지고는 다 파악할 수 없어요. 그만큼 내용이 충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록을 상세히 하신 것도 대단하지만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까지 자세히 조사해 기록한 점이 역시 역사 선생님다우십니다. 여러 번 음미해야겠어요.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 여기 적힌 여행기는 가족과 함께 한 기록입니다. 이 밖에도 우리 산악회원끼리 경상남북도, 경기도, 충청도 등에 있는 많은 유적을 답사하며 추억을 담았었지요.^^*
선생님 이렇게 여행을 많이 하시고 글도 남겨두었다니 대단하십니다. 시간나는대로 차분히 읽어보겠습니다.
과분한 칭찬,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사합니다.^^* 산행, 여행하면서 몇 편을 적어놓은 것 뿐인데, 나중에 읽어보면 그 시절을 혼선을 겪지 않고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여기에 출연하신 분들은 방문하신 땅의 축복을 제일 많이 받으실 겁니다. 요모조모 훌륭한 칭찬을 받은 땅들이 큰 복을 내리지 않겠어요? 이 글을 보는 저도 덩달아 기분이 흐뭇해집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서로 통하는 분들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저한테 주어졌던 것이 행운인 것 같습니다. 멋들어진 남도의 자연과 보탑사의 정경이 지금도 눈에 삼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