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arkside.co.kr/03_heart/heart01.php?N_P_TYPE=Prev&page=3
파크뷰 두 번째 인물은 ‘친절택시’ 정태성 기사입니다. 삭막하고 딱딱한 택시문화에 소소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한파가 몰아친 어느 날, 파크사이드와의 만남이 기쁘다며 시작한 인터뷰는 동대구역 내 시끄럽고 작은 까페에서 딸기주스와 함께 진행됐습니다.
=======================================================================================
(박승근, 이하 ‘박’) 혹시 처음부터 택시기사를 꿈꿨는지 여쭤본다면 실례가 될까요?
(정태성, 이하 ‘정’) 아니요! 전혀요. 원래 제 어릴 적 꿈은 작가? 소설가? 아무튼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죠.
(박) 작가를 꿈꾸셨던 이유가 있으셨나요?
(정) 뭐랄까, 아름다운 세상? 바람직한 세상을 실제론 만들 수 없으니 글로나마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죠. 그래서 작가가 되고 싶었죠.
(박) 어린 마음이 아름다운 세상을 원했던 이유가 뭔가요?
(정) 초등학교 5학년 때,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차이’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알아차리게 되더라구요. 제가 어릴 때는 육성회비를 매월 600원 정도 내던 시절인데, 저는 한 번도 밀려서 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육성회비를 못 내던 친구들을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서 빨리 내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이상 했습니다. ‘나는 잘 내는데, 그 아이들은 왜 잘 안낼까? 왜 나랑 다르지? 그러고 보니 나도 돈을 안 벌고 친구도 돈을 안 버는데 이상하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결코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늘 읽던 책 속의 모습들과 비교하면서 모두가 즐겁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건 어떨까란 생각을 하게 됐죠. 아버지께선 군인이셨습니다.
당시가 70년대 세월인데다 영관급 장교의 가정이라 물질적 불편함도 없고 그런 아버지를 둔 저도 학교에선 관심을 많이 받았죠. 그래도 학교생활이 즐겁지만은 안더군요. 그 당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책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읽을 만한 동화 같은 책보다는 아버지의 책이 훨씬 많았죠. 게다가 내용보다 활자 자체가 좋았기 때문에 어려운 책이라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게 됐죠.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쌓이던 생각들이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글로 써서 만들어 보고 싶었고, 내가 배워야할 세상도 책에 있으니 당연히 작가를 원하게 되었죠.
(박) 세상에 눈을 뜬 시점이 평균보다 이른 듯한데, 본격적인 세상도 조금 이르게 접했나요?
(정) 중학교 2학년이 돼서 아버지의 권유로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삶의 근면한 자세를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셨죠. 그런데 그 즘에 제가 신문을 읽다가 가슴 아픈 사연을 보게 됐습니다. 저하고 같은 중학교 2학년 어느 아이가 어려운 생활고에 보탬이 되려고 신문배달을 하다가 버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내용이었죠.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이제 신문배달을 고려중인데, 그 친구는 벌써 하고 있었다니, 참 마음이 대단한 아이였구나. 내가 배우고 싶은 세상이 학교가 아니라 저 바깥세상인데 그 아이는 벌써 뭔가를 배우며 자라고 있었구나’라고 말이죠. 주저 없이 시작했습니다. 신문배달이라는 간단하게 보이는 일도, 제대로 하려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배우는데 오래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까지 짐작했던 세상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박) 책을 좋아하셨는데 기억나는 글귀가 있나요?
(정) 그 당시 집에 위인전이 20권정도 있었는데, 모두 대여섯 번 읽었습니다. 구체적인 글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역경을 이겨낸 위인전의 내용은 많이 기억납니다. 제가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그 내용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박) 책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정) 인생의 멘토이자. 나 자신을 찾아가는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고민을 풀 수 있는 Key라고 봅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책은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십일조 하는 마음으로 많이는 안 되지만, 수입의 10%는 책을 구입하는데 사용합니다. 부모가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물질이 있다면 ‘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
시작, 가장 힘든 일을 꿈꾸다
박) 그렇다면 본격적인 사회생활의 첫 모습은 어땠나요?
(정) 고등학교를 중퇴했었습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사회생활은 성년이 되고 시작되더군요. 80년대에 와서 아버지는 장군이 되셨어요. 그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말 그대로 ‘장군의 아들’인데 주변의 시선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버지 탓은 아니지만, 사회적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학교나 주변에서 장군의 아들로 주목받는 다는 것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을 겁니다. 저도 그렇더군요. 다행이 아버지에게 화살을 돌리는 바보는 아니라서 원망을 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었죠. 그저 내 스스로 세상을 헤쳐 나가보자는 마음이 워낙 컸었던 탓에 부모님은 뭘 하더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하지 않느냐며 말리셨지만 제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사실 학교를 그만두고 나니 제대로 할 일이 없더군요. 대신 공장이나 음식점 같은 곳은 미성년자라도 가능했었습니다. 공사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냈습니다. 힘든 일이면 저도 쉽게 포기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더군요. 그리고 대한민국 직업 중에 가장 힘들다는 농부, 광부, 선원, 택시기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꿈으로 확대됐죠. 그때 이런 소망을 어디서 말하면 놀림만 받았죠. 지금에서야 옛날 친구들과 만나면 친구들이 저한테 오래 전에 말 그대로 됐다며 꿈을 이뤘다는 인정 아닌 인정을 농담처럼 하기도 합니다.
(박) 택시기사라는 직업이 없었다면 지금 뭘 하고 계셨을까요?
(정) 원양어선 선원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택시를 선택했을 때는 결혼을 했었을 때라 오래 떨어져 지내야 된다는 사실이 조금 걸려서 확신은 못하겠네요. 농부도 있고 광부도 있으니 그 중에서 뭐라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왜 하필 힘든 직업을 택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제 대답도 같습니다. ‘세상을 많이 배우고 싶어서요. 그리고 제 능력과 자질이 남들이 힘들다 하는 그 일에서 재미를 찾을 것 같아서’라구요. 제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 택시를 하다가 환갑이 되면 본격적으로 글을 쓸 것 같습니다. 작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삶의 생생한 체험 아닐까요. 힘든 직업을 지내온 시간이 제 글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어머니, 형, 지인들은 이런 제 생각에 걱정부터 한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나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는 가족들은 제가 다른 사람과 달리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문제아’는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죠. 저도 그 마음을 알기에 더 열심히 해야 하거든요.
(박) 택시를 한지 14년이 됐습니다. 그 동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정) 어떤 할아버지를 모셨는데, 원하시는 곳에 내리고 보니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고령에 허리도 굽어져서 걸음이 느리시니 반도 건너지 못하고 빨간 불에 갇혀버리셨어요. 건너편의 목적지가 병원인 것 같아, 제가 차를 세우고 오가지도 못하는 할아버지를 직접 업고 건너드렸어요. 어떤 건물 상가의 병원까지 직접 모셔드리고 택시로 돌아 와보니 차안에 돈이 하나도 없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날 아이 유치원에 필요한 돈을 줘야 하는데 주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박) 기분 좋은 일은 어떤가요?
(정) 따뜻한 말 한마디 손님께 건 냈는데, 갑자기 감동하셔서 목적지는 상관없다며 드라이브 하자는 어르신도 계셨죠. 어떤 손님은 갑자기 차를 세우라고 하더니 커피를 뽑아 건네는 분도 계셨어요. 보잘 것 없는 제 말 한마디에 너무 과분한 응답이라 생각되어 그런 경우에 도리어 제가 미안해서 당황하게 됩니다.
(박)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으라면 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정) 오랫동안 택시를 하다 보니 당연히 많은 손님을 태웠습니다. 차림이나 얼굴,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수준과 인격도 짐작할 정돕니다. 얼굴이 명함인 유명인, 연예인도 제법 태웠습니다. 그런데 기억엔 별로 남지 않더군요. 오히려 새벽에 나오는 할머니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좀 더 일찍 나와야 하는 사람들이 늘 마음에 걸려 있습니다. 새벽에 나오는 할머니들, 정말 할 수 없이 택시를 타는 분들입니다. 시간을 맞추려니 버스나 지하철은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타시는데, 구청에서 생활지원을 받는 분들이 택시비가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가서 신호대기 중에는 제가 살짝 지불 버튼을 눌러 놓습니다. 그러면 4천원 거리가 3천2백원 정도 나옵니다. 그런데 막상 요금을 낼 때가 되면 4천원거리라며 제 미터기가 잘못 됐다며 원래 요금에 새벽부터 고생하니 커피 한 잔 하라며 잔돈을 더 놓고 가시는 겁니다.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놓고 가버리시니 그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립니다. 새벽을 여는 많은 할머니 손님이 항상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박) 승차거부를 해보신 적은 있나요?
(정)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서울에 승차거부가 많죠. 사실입니다. 그래서 승차거부를 안합니다. 그동안 수 백 번 승차거부를 당했을 수도 있으니 당연히 가드려야죠. 손님을 가린다면 택시가 아니라고 봅니다. 노약자와 장애인들을 우선 태우려는 택시기사들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승차거부가 많은 만큼 그렇지 않은 기사도 많다는 걸 꼭 말하고 싶습니다.
(박) 손님이 없거나 시간이 남으면 어떻게 보내시나요?
(정) 최대한 공부를 합니다. 제게 있어서 스트레스는 비오는 금요일 밤, 술에 취해 택시 안에 토하는 손님이 아닙니다. 마약이나 약물을 하고 환각상태에서 위협을 하고 운전 중에 목을 조르는 손님도 아닙니다. 동성애자의 찔러보는 식의 유혹도 아니구요. 가장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는 손님이 없는 순간, 그 자체입니다. 기다림...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나 스스로가 즐거워 질 수 없고 내가 즐겁지 않는데 어떤 친절이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 영향이 고스란히 손님에게 가니까요. 그래서 한 동안 손에서 놨던 책을 읽었습니다. 공부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뭐든지 읽고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은 공부하는 시간,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손님이 있을 때 필요할 지도 모르는 공부를 하자! 긍정적으로 바꿔보자! 제 스스로 그런 장치를 설정하고 나니 시간도 잘 쓰게 돼서 즐거워 졌습니다. 그리고 공부가 즐겁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수단이 된다고 믿어서 작가의 꿈에 한 발 더 다가갈 용기를 냈죠. 그게 사이버대학으로 문예창작과를 다니게 만들더군요. 다가올 2월에 졸업을 하면 대학원을 가게 됩니다.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제도권 학교에서 배울게 없어 세상으로 뛰쳐나온 놈이 다시 제도권으로 배울 것이 있어 돌아가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인데, 오히려 주변에서 ‘크게 봐서 과정’라 생각하라는 핑계거리를 주더군요.
(박) 대학원에서는 어떤 공부를 계획하고 계신가요?
(정) ‘서비스경영’을 전공할 예정입니다. 택시업을 의료서비스에 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택시를 포함한 교통서비스 역시 의료처럼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분야 아닙니까, 품격 높은 서비스와 보다 나은 품질을 위한 고민에 학문적인 연구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 지식의 한계 이상을 배워야 하는데 학교가 아니면 없으니까요.
(박) 음악은 좋아하세요? 차 안에서 자주 듣는 음악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정) 영화 라스트모히칸(The Last of the Mohicans, 1992) O.S.T중에서 메인테마곡을 정말 좋아 합니다. 듣고 있으면 애잔하면서 가슴 한쪽이 뭉클하게 시려 옵니다. 음악을 들으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나는데 뭐라고 표현이 잘 안되네요. 음악의 어느 부분도 격정적으로 몰아치지는 않지만 가슴이 시리면서 숨이 잡히질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박) 영화를 좋아하시나 보죠?
(정) 그럼요. 스트레스도 풀고 아내와 데이트도 할 겸해 해서 종종 갑니다. 그런데 우리 둘은 각자 노트를 하나씩 들고 갑니다. 기억에 남는 대사를 받아 적거나 장면을 메모하는 거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네는 뭐 적었나?’하면서 서로 비교 합니다. 그러면, ‘아! 이 사람은 이런 점을 감동 했구나’, ‘내게는 의미가 없던 말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의미가 있구나’하는 이해의 폭이 점점 넓어지더군요. 그렇게 기억된 대사나 장면을 손님에게 전해 줄때도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손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평소에 ‘쓸모가 있을까?’싶은 말이 꼭 들어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절이란, 인간적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박) 친절하다는 것이 당연해야 될 일인데, 주목받는 일이 돼버린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 음. 복합적으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운전을 하기 전에 그 직업을 알아야 하니까 일부러 택시를 타봤어요. 그리고 물었죠. “아저씨, 택시라는 직업이 어떻습니까?”라고. 그런데 단 한분도 추천을 하지 않더군요. 그때는 97년 1월, IMF전이라 손님이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택시라는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는 저를 모두 말렸어요. 권유? 한 사람도 없었어요. 어느 한분도 권유를 해준 사람이 없는데... 만약 이 직업이 그렇게 힘들고 싫다면서 왜 하는지 궁금해서 뻔한 질문 같지만 또 물어봤죠. 돌아온 답은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배운 게 운전뿐이라” 이런 답이 전부였죠. “이왕이면 다른 걸 하라”는 소리를 물어본 만큼 들었죠.
그런데 저는 어려서부터 해보고 싶었거든요. 가장 어렵다는 직업 중에 하나를 직접 겪으면서 ‘남자로 거듭나보자’, ‘내가 정말 못 견딜까’ 이런 오기가 반대만큼 생겼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 하니까 더하고 싶었죠. 그래서 시작을 했는데, 첫 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좋았죠. 가만히 생각해봤죠. 만약 돈에 욕심이 있다면 이 직업은 선택이 잘못 됐다. 그런데 나는 좋다. 택시라는 직업이 내게는 자유롭고 흥미롭다. 그렇다면, 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 호기심이 많은 성격과도 어울리고 짧은 시간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죠.
물론 제 성향이 친절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친절을 강조하진 않았죠. 택시를 해오면서 느껴보니 보통의 택시기사라는 직업은 하는 일에 비해서 많이 왜곡되어 비쳐지고 있는 거죠. 정말 순박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엄두를 못내는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불친절의 1순위를 꼽으라면 택시기사가 나오잖아요. 이런 선입견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내가 별 힘은 없고 주제넘은 생각인지 모르지만 뭐라도 할 수 없을까... 조금만 들여다보면 택시산업의 구조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하는 일에 비해서 정당한 보수를 못 받고, 하루를 벌어서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이 지금의 택시기사 아닙니까. 저도 거기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겠죠. 간신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생존’과 ‘친절’이 부딪히는 겁니다. 생존과 친절이 부딪히면 절대적으로 생존이 이깁니다. 점심을 굶는 기사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쌀을 사가야 하니까요. 거기에 친절이 개입될 여지가 있겠습니까?
조금 앞선 얘깁니다만, 정부에서 일반 대중교통에 지원하는 것만큼의 반이라도 택시산업에 지원 한다면 친절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도 해봤어요. 물론 지원을 바라기 전에 택시기사의 의식도 나아져야죠. 그러다 가장 어려울수록 시민한테 다가가야 된다고 결론을 내렸죠. 시민들이 택시에 대해 조금만 우호적이 되고 친근함을 느낀다면 자연히 자주 이용하게 되고 그 자체가 택시 산업이 바라는 많은 손님이잖아요. 이렇게 뻔한 생각을 고민 끝에 결국 책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됐죠. 일본 MK택시 창업자 유봉식 회장은 ‘어려울수록 시민에게 다가가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독서광인 유봉식 회장이 모택동 전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분은 정치적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돌파구로서 답을 찾은 것이죠.
구조적인 문제를 따지기보다, 사회적으로 인식이 올라가면 자연히 수익성도 개선되고 정부도 지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정치인은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인기와 지명도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인식이 좋은 분야를 지원 안할 리가 없는 거죠. 가장 좋은 예가 ‘119’에요. 이 분들은 처음부터 헌신적이었지만, 예전에는 그 만큼의 인지도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모든 국민이 미디어를 통해서 ‘힘들고 어렵지만 시민을 위해 목숨을 담보하고 일 한다’고 알잖아요. 정치인이 119에 지원한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현재 지금 이 상태에서 택시업계에 지원한다고 하면 ‘뭐 하러 지원 하나’, ‘요금 천원 오른다고 서비스가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라는 반발이 엄청난 거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택시가 조금씩 친절해지고 서비스가 개선되면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택시기사가 사회에 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많아요. 택시기사를 보면서 짜증나고 에너지가 꺾여서 내린다면, 그 인구가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서 저는 제 택시를 타시면 친절인 기본이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에너지를 퍼트릴 수 있기를 바라는 거죠.
유명한 일화에 보면, 돌을 다듬고 있는 세 명의 석공 앞으로 나그네가 지나면서 물었답니다. 첫 번째 석공에게 ‘자네는 무엇을 다듬고 있나?’고 물으니, ‘그냥 돌을 다듬고 있다’고 했어요. 두 번째 석공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더니, ‘저는 집을 만드는데 쓰일 자재를 만들고 있다’고 했죠. 세 번째 석공에게도 물었더니, ‘저는 신을 모실 공간을 만들고 있다’고 했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운전이라는 단순한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 효용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보람 있겠어요! 친절이란, 단순히 서비스 제공자와 수요자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섬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손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당연한 친절이 독특하거나 주목 받는 유별남이 되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점점 실종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의 수준은 점점 나아지지만 물질의 발전만큼 인간 본연의 심성이 상실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개인의 삶이 점점 각박해지기 때문에 친절이 독특한 것이 돼버린 건지도 모르죠.
“문제아가 아니라 문제의식을 가진 것”
(박)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나요?
(정) 대부분 그래요. ‘자네 때문에 같은 일을 하는 우리가 자랑스럽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구요. 주로 ‘택시 운전을 하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소리만 듣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택시문화라고 발전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서울의 현업 택시기사 중에 최고령이신 분의 연세가 87세입니다. 제가 40년 후면 그 정도 나이가 될 텐데 그때가 되면 평균수명이 늘어서 저는 더 일할지도 몰라요. 지금 어떻습니까, 초중고 대학 대학원, 박사학위 받고 20년 일하면 하고 싶어도 그만 둬야하는 세상입니다.
저는 앞으로 40년, 50년을 더 할지 모르는데, 제가 직업적으로 더 배우고자 투자하는 비용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에게 투자하는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금액이 큰 것도 아니더군요. 다만 택시기사가 연수를 가고 대학원을 다니고 하다 보니 커 보일 수는 있겠죠. 택시를 하면서 얼마나 여유가 있을까요. 아내도 함께 공부를 하는데 아내가 한 과정 끝내고 잠시 쉬면 제가 공부하고, 제가 쉬면 아내가 공부하는 식인데 학비는 온통 빚입니다. 그렇지만 빚을 내서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면 해야 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는 돈은 빚이지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박) 그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추구하는 택시기사로서 완성된 그림이 있나요?
(정) 그전까지 택시는 공간이동이 목적이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렇죠. 공간이동을 위해 탄생한 택시가 언제까지 그렇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택시기사의 완성은 본연의 기능인 공간이동을 충족시키면서 이동하는 시간동안 손님과 대화를 나누며 정서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카운슬링이라고 하면 거창할지 모르나 그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남은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택시기사 만큼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접하는 직종도 없잖아요. 깊은 지혜나 정보를 모두 갖출 수는 없겠지만,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은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합니다. 그런 장점을 의미 있게 활용하고 싶습니다.
저 역시 깊은 지혜는 없지만, 사회 전반적인 이야기를 많이 접하잖아요. 많은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소설책 한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들이죠. 거기에, 당장 택시기사한테는 쓸모없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얻는 정보를 효과적으로 나눌 수 있는 능력이 보태져서 손님에게 정보나 감동이 나눠져 모두의 하루가 좀 더 역동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박) 보통 하루에 얼마나 운행을 하세요?
(정) 보통 12시간 정도, 많을 땐 16시간까지 운행하기도 합니다. 거리로 보면 4~500km 정도 됩니다.
(박) 그런 시간이 15년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의 길 위의 인생이라 부를 만한데요, 아무리 운전을 좋아하지만 낭만적인가요?
(정) 하하! 물론 100%는 아니죠. 낭만으로 모두 채워져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짜증도 피곤도 적절하게 섞여 있습니다. 그 사이로 가끔씩 아름다운 장면이 눈앞에 나타나니 힘을 얻기도 하구요.
(박) 어떤 때, 어떤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나요?
(정) 세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은 비오는 날에 자주 찾아옵니다. 비 오는 한강 둔치 근처를 지날 때 차를 잠시 세우고 자판기 커피 한 잔과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경치가 참 아름다워요. 운전 자체를 좋아하니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마음껏 다니게 만들고 꼭 한강이 아니라도 보이는 풍경 중에 미운 모습은 잘 없기도 해요.
(박) 일단 다른 택시기사보다 말을 많이 하는 편 일 텐데 힘들지는 않나요?
(정) 한 손님과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몇 시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저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어떤 손님은 들어줘야 하는 경우가 있구요. 또 어떤 손님은 기사가 말을 해주길 바라는 경우도 있구요. 말 하고 듣는 경우가 반반정도 될까요. 택시라는 것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솔직해 질 수 있는 공간이에요. 택시기사랑 다시 만날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내리면 그만이고, 이름 걸고 말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겠죠. 고해성사 처럼요. 아내나 남편한테도 차마 못하는 이야기를 기사에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손님에게 제가 어떻게 아무 말이나 하겠습니까.
(박) 혹시 부인께선 남편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편입니까? 할 말도 다하는?
(정) 제가 특수한 경우인지 모르나, 제 생각에 100점 만점이면, 120점이 아닐까 합니다. 하하!! 그 이유가 둘이서 온갖 어려운 역경을 같이 극복하며 지내왔는데, 열심히 살아주는 남편이 부끄럽기야 하겠습니까. 어느 날인가, 아내가 그러더군요. “당신한테 자극 받아서 나도 매일을 새롭게 도전한다!”고 말이죠. 그 말을 듣고 제가 더 고마웠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아내 때문이라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함께 역경을 극복하면서 해왔던 모든 일을 아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사업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장사를 하다 망해서 잔뜩 빚만 지게 돼서 지하 음식점 주방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마음고생이 심할 아내 생각에 독한 마음으로 구석에서 자는 시간 빼고 일만 했는데 어느 순간 날짜를 보니 석 달이나 일층으로 나간 적이 없더군요. 아내는 그런 저를 더 마음 아파했죠.
(박) 그런 와중에 택시를 하기 위해 결심하게 된 건가요?
(정) 마음에 넣고 있던 택시를 진짜 해야겠다고 실행에 옮긴 계기가 된 건, 사실 첫 아이를 심장병으로 잃고 나서죠. 딸이었어요. 이런 아이를... 주변을 온통 빚쟁이로 만들고 전세를 월세로 돌려놓고 삶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죠. 아이를 잃고 하늘을 못 보고 다녔습니다. 땅 만 보고 다녔어요. 이래저래 힘든 인생, 포기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아픔 속에 아이가 남기고 간 희망이 자라더군요. 돈은 아무리 잃어도 상관없지만 아이를 잃었다는 죄책감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한없이 밀려드는 아픔과 상실감, 영원할 것 같았는데 ‘그래 지금이 바닥인데 힘들다는 택시, 해보자. 더 힘들어봐야 얼마나 힘들겠나. 어차피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아이가 남기고 간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이런 아픔을 어루만지면서 마음먹었죠. “다시 해보자, 우리 딸이 희망을 놓고 갔다면 꼭 잡고 말겠다!”
(박) 일주일의 시간이 있다면 어떻게 사용 하시겠어요?
(정)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아내가 제주도를 좋아해요.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도 풀고, 힘들다는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한 아내와의 시간을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면서 달래고 싶습니다. 손을 꼭 잡고!
(박) 혼자 떠나는 개인적인 시간이라면?
(정) 그렇다면, 책10권을 들고 어디 조용한 자연휴양림에 가서 깊숙하게 책에 빠지고 싶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없고, 해야 될 일도 없이 책만 읽다가 왔으면 좋겠어요.
(박) 택시기사로서 서울을 여행하고 싶은 이에게 어디를 추천 하실 건가요?
(정) 대학로, 홍대입구, 한강, 신촌!
(박) 서울의 베테랑 기사지만, 혹시 운행하기 꺼려지는 곳이 있나요?
(정) 있죠. 그런데 다른 이유는 없어요. 잘 모른 곳이라 꺼려지는 곳이죠. 제가 주로 운행하는 곳이 서울의 북동쪽을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서울의 주요한 도로는 다 알지만, 대각선으로 정반대인 남서부 쪽은 세세한 도로까지 다 알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혹시 실수를 할까봐 마음이 거북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있어도 급히 손님을 모실 때는 사람의 머리가 아는 길 보다는 느리거든요. 그 동네를 체험으로 아는 사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잖아요. 그런 감각이 자주 가지 않는 곳에서는 마비가 되니 손님께 폐를 끼칠까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죠. 그런 게 아니라면, 어둡고 후미진 길이나 공동묘지? 외딴 곳?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거죠. 뒤에서 목을 잡고 흔드는 경우도 겪었거든요.
(박) 세계 제일의 친절로 유명한 일본 MK택시에서 연수를 하셨는데, 일본과 한국의 택시문화에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요?
(정) 같은 사람 사는 동네인데 별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찾는다면, 택시기사의 입장정도랄까. 일본은 친절로 인해서 받을 수 있는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MK택시의 경우 친절해서 더욱 프로다워지면 택시종류를 승급할 수 있습니다. MK는 소형, 중형, 점보, 관광의 네 가지 택시가 있는데요. 처음엔 20~30만엔 정도의 급여를 받지만 점점 승급해서 관광택시를 하게 되면 50~60만엔의 급여도 가능 합니다. 그래서 까다롭고 힘들다는 서비스 교육을 극복해 내고 실제로 손님에게 활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 택시에는 그런 희망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바로 개인택시를 주는 것도 아니고, 요금체계와 택시기사의 수입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친절의 정도가 개선되기는 점점 길어진다고 봅니다.
(박) 한국의 택시가 개선해야 될 가장 시급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정) 청결이죠! 기사의 청결을 포함한 택시의 청결입니다. 물론 냄새도 포함 합니다. 긍정적으로 밝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위생상태가 결여된 택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손님이 택시를 타고 문을 닫는 순간 그 짧은 순간에 다 알아챕니다. 첫인상이 좋지 못한데 손님이 기분 좋을 수 있을까요? 청결, 단정하지 못하고 지저분한 기사의 외모도 결코 택시문화의 격을 높일 수 없습니다. 택시기사는 원하든 원치 안던지 간에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고된 직업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 인프라를 구성하는 역할이니까요.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직업관이 ‘할 것이 없어서 한다’는 의식에다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있다면 결코 서비스의 개선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중간과정으로써의 직업이라면 결코 나아지지 않습니다. 안정적인 직업군으로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박) 친절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받아들이는 손님도 있나요?
(정) 있습니다. 이렇게까지는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손님도 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친절의 수위는 받아들이는 입장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손님의 입장에서 편하다고 수용되는 정도가 가장 친절한 겁니다. 내 마음이 좋다고 과해지는 건 친절이 아닙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능하지 못해요. 혹시라도 피해를 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 경계심이 먼저 발동되는 경우가 많아요. 당연히 소극적이구요. 제가 먼저 말을 건 낼 때도 그런 성향의 정도를 먼저 파악할 수 없다면 실수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박) 손님과 대화를 할 때 주의하는 내용도 있나요?
(정) 네 가지 금칙이 있습니다. 정치, 종교, 지역, 음담패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도 끝이 좋은 경우가 잘 없습니다. 안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많잖아요. 사랑, 날씨, 우정, 행복, 추억... 무엇보다도 인사만 성의 있게 제대로 해도 감동을 손님은 감동을 받습니다. 거기에 기사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보다 손님 이야기에 맞장구 쳐주면 분위기는 더 부드러워 집니다. 조금의 수고로 손님이 즐겁고 편할 수 있다면 좋은 서비스라 생각합니다.
(박) 같은 일을 하는 동료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정) 제가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자칫 오해를 부를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직’을 내세우기보다 ‘업’을 내세우는 직업인이 되면 어떨까? 힘들더라도 개인의 목적보다 택시업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시각을 가지면 어떨지 제시하고 싶습니다. 택시기사도 존경받는 직업으로 존재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많은 돈을 벌지 못하지만 지금도 대부분은 친절하고 성실한 기사들이 더 많습니다. 나 혼자 친절한 것 보다 좋은 택시문화를 위해 모두가 노력했으면 합니다. 얼마 후에 택시 서비스평가 1위를 한 ‘블랙캡’을 배우기 위해서 영국으로 연수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택시기사는 직업의 진입장벽이 낮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도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랙캡기사는 면허를 취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프라이드도 대단합니다. 무엇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배우고 올 계획입니다.
(박) 10년 후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떨까요?
(정) 택시운전 중이죠! 서비스에는 백점짜리가 없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너무 일찍 잃어버린 딸, 지금 건강하게 자라는 아들과 아내에게 말로 하는 것 보다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공부를 잘 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들 부러워할 만 한 부를 축척하지는 못하겠지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큰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아들에게 모범적이고 당당할 수 있는 멋진 아빠가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중일 거라도 짐작 됩니다. 그 날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저도 참 궁금해요.
(박) 파크사이드에 오신 적은 있으신가요?
(정) 아쉽게도 아직 없습니다. 원장님도 통화는 몇 번 했지만 뵌 적도 없어서 아주 궁금합니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언제가 되든지 병원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택시기사 아닙니까, 불러만 주시면 기꺼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