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답사 자료집(2014. 05. 10)
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115호)
소재지 : 두우키길 420(이천동 산 2)
이 불상은 원래 연미사(燕尾寺)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위치하며 근래에 제비원이라는 암자가 새로 들어서 일명 ′제비원 석불′이라고도 불리는 마애석불이다. 서쪽을 향한 높은 암벽에 조각된 불신(佛身)위에 불두(佛頭)를 따로 제작하여 올린 특이한 형태의 마애불로 머리 뒷부분이 일부 손상된 것 이외에는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佛頭는 큼직한 육계가 표현된 소발(素髮)의 머리와 얼굴을 각각 다른 돌에 새겨서 조립하였는데 미끈한 얼굴의 질감과는 달리 거칠게 표면 처리한 머리를 이마 위에 얹어 놓아 멀리서 보더라도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풍만한 얼굴의 미간(眉間)에는 白毫(백호)를 큼직하게 돋을 새김하고, 수평으로 길게 뜬 눈 위에는 초승달 모양으로 깊게 파인 눈썹이 날카롭게 우뚝 솟은 코의 윤곽선에 이어져 있다. 붉게 채색된 도톰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 강한 윤곽으로 표현된 얼굴과 함께 장중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삼도(三道)가 뚜렷한 목에는 특이하게 연주문(連珠紋)을 돋을 새김한 장식이 표현되었으며, 강한 각선으로 조각된 환조의 머리와는 달리 장대한 신체는 선각으로 처리하여 다소 이질감이 느껴진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왼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흘러내린 옷 주름이 오른쪽에서 수직으로 드리워진 법의 자락과 교차되어 접히고, 넓게 트인 가슴 밑으로 내의(內衣)의 띠가 수평으로 표현되었다.수인(手印)은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손등이 보이도록 가슴 위로 올려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취하고 있으며, 불상의 발밑에는 큼직한 단판연화문을 음각하여 대좌로 삼고 있다.불두를 따로 제작하여 불신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하는 형식이며, 얼굴의 강한 윤곽이나 세부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11세기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설명 : 안동시내에서 영주방면 5번 국도를 따라 6km지점.
봉정사
소재지 :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 그 뒤 더욱 수행을 하던 능인스님이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리니 이곳에 와서 머물러 산문을 개산하고, 봉황이 머물렀다하여 봉황새 봉(鳳)자에 머무를 정(停)자를 따서 봉정사라 명명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국보 제 311호인 대웅전, 보물 제 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덕휘루, 무량해회, 삼성각 및 삼층석탑과 부속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다. 특히, 고려태조와 공민왕, 최근에는 영국의 여왕이 다녀가기도 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템플스테이 가능
위치설명
안동시내에서 예천방면 34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송야 사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서후면 소재지 방향으로 이동하면 된다. (16km. 자가용으로 30분소요)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 고려시대이 건물은 682년(神文王 2) 의상국사(義湘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봉정사 극락전이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과 고려 말 조선 초에 건립된 대웅전, 조선초에 만들어진 화엄강당 등이 있다. 1972년에 실시한 보수공사 때에 밝혀진 내용에 의하면 건립후 첫 수리는 1363년(恭愍王 12)에 2차에 걸친 수리가 있었고 그 후 1635년(仁祖 3)에 중수하였다.원래는 대장전이라 불렀으나 뒤에 극락전이라 개칭한 것 같은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 최고의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전대인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잡석의 낮은 기단위에 세워졌으며 부드러운 배흘림을 가진 기둥머리에 창방을 기둥 위에는 1출목의 공포를 올렸다. 공포에서 제공의 모양은 첨차와 같은 형태인데 초기형태로 생각되어질 만하다. 가구는 대들보 위에는 앞뒤에 일종의 복화반을 두고 그 뒤에 놓인 포작으로 중종보를 받는 이중량구조로서 중종보는 복화반형의 포대공위에서 중도리를 받는다. 중종보 중앙에는 키가 낮은 복화반형의 포대공이 있어 마루도리를 지탱하고 마루도리는 그 앞뒤에서 소슬합장이 이를 지탱한다. 이 소슬합장은 타 건물에서와 같이 짧은 것이 아니고 마루도리와 중도리 상에서 직선재로 되나 그 밑으로 내려오면 점차 내반되어 차례로 도리목을 받쳐 내려가는 특수한 양식이다.
불당의 내부는 중앙 후편에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단 벽을 만들고 그 앞에 불단을 마련하였으며 불단 위에는 높은 우주를 가진 다포집모양의 보개를 설치하였다.공포 특히 주두와 소로의 굽이 형태와 덧 보나 마루도리를 받치는 일종의 복화반형으로 된 대공형태 등은 주목할 만하다. 즉 주두나 소로의 굽은 그 단면이 내반된 곡선으로 되었고 굽받침이 없는 점이며 이 형태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며 복화반형으로 된 대공도 주심포집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으로 삼국시대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인자형 소슬대공의 변화형으로서 고식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이 건물은 그 양식이 주심포집이라 하나 통일신라시기의 건축양식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 새롭게 중창된 건축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봉정사 화엄강당(華嚴講堂) 보물 제448호
화엄강당(華嚴講堂)은 스님들이 불교학을 공부하는 장소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온돌방 구조를 갖춘 강당 건물이다.이 건물의 연혁은 봉정사와 관련된 사적기록을 살펴보아야 알 수 있다.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은 『양법당중수기』 등에 따르면 17C에 중수되었다. 이런 중요건물의 중수가 있을 때 스님들의 강학공간인 화엄강당도 함께 중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나 1930년대에 『동양미술』에 발표된 『천등산봉정사』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 건물이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의 마루가 깔려 있으며 부엌이 지금보다 넓게 자리 잡고 있다. 평면 구성이 언제 오늘날처럼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려우며 1930년대 이후로만 짐작될 뿐이다.
칠계재고택(七戒齋古宅)
이 건물은 칠계재 장세규공의 고택으로 현재는 7대 주손 장영찬씨가 살고 있다.공과 관련된 사적은 1993년 8월 15일 족손 장상섭씨가 찬한 ‘칠계재사적비’에 소상하게 드러나 있다. 칠계재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5대손으로 오늘날의 경당 선생이 있기까지 기념사업을 가장 본격적으로 시행한 분이다. 장영찬씨는 경당 장흥효 선생의 12대손이다.
소 유 자 : 장 영 찬
구 조 : 목조와가
건립년대 : 조선후기
관련인물 : 장세규(張世奎:정조7, 1783-고종5, 1868, )
광풍정(光風亭)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22호
서후면 금계리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요 김성일ㆍ류성룡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아 영남학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바 있는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1564∼1633)선생이 1630년대에 이 위치에 초당으로 건립한 누각이다. 1838년(헌종 4)에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개축되었다. 금계리는 고려초기 이래 삼태사의 한 사람인 장정필(張貞弼)의 후예들인 안동장씨의 집성촌이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와가로 우측 협칸을 통간 마루로 놓아 건물밖의 협문을 들어서서 우측 마루위의 판문을 열고 오르도록 되어있다.어칸의 온돌방 전면 1칸은 마루 칸으로 하여 우측 협칸의 통간 마루와 함께 어 칸의 1칸 온돌방을 애워싼 형태를 하고 있다. 좌측 협칸은 1칸 반을 온돌방으로 꾸미고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향을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루공간과 온돌방이 대각선으로 구성된 듯한 독특한 정자건축이다. 이는 하절기의 외부환경을 최대한 배려한 환경 친화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되며 주목할 부분이다.전면의 루하주는 막돌기단위에 큼직한 덤벙주초를 놓고 팔각주를 세웠으며 루상주는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나 나머지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5량가의 납도리집으로 대량위의 동자주는 판대공에 첨차ㆍ소로 놓고 중도리와 종량을 결구하고 그 위에 판대공 없이 첨차ㆍ소로 놓고 마루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다. 천장은 제고물반자로 치장하고 마루는 우물청판을 깔았다. 주두에 결구된 평방위에는 소로를 얹어 주심도리와 장혀를 받치게 하고 있다.
위치 설명 : 안동시내(예천 방향, 34번 국도) - 봉정사 방향(924번 지방도로)- 3km – 광풍정
의성김씨 학봉종택 (義城金氏 鶴峰宗宅)
경상북도기념물 112호(1995년 12월 1일)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전적 : 보물 제 905호
소재지 :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금계리 856)
조선 선조 때의 명신이며 학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곳인 운장각은 선생께서 남기신 서적·물품·친필기록 제초고 및 선조전래의 전적·문서와 후손들의 유품 등 500여점의 보물을 영구히 보존코자 건립하였다.규모 수량 : 5동 (3,458㎡) 시대구분 : 조선시대 (학봉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며 학봉의 8세손 광찬(光燦)이 1762년(영조 38)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나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 형태/방법/업적 : 학봉은 류성룡(柳成龍)과 더불어 퇴계의 고제(高弟)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27세에 사마시, 1568년(선조 1) 중광문과 병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577년(선조 10)에는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1590년(선조 23)에는 통신부사로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임란때에 왜적과의 전투를 독려하다가 병사하였다. 위치 설명 : 안동에서 예천방향으로 가다가 송야교에서 봉정사방향으로 5km거리(안동 → 송현동 → 송야교 → 서후면소재지 못 미침)
운장각
소재지 :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금계리 856번지)
학봉종택 내에 위치한 운장각은 유물을 보관․전시한 유물관이다. 운장이란 말은 ‘저 넓디 넓은 은하수,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운장각에서 보존하고 있는 문서는 보물 905호와 90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중 보물 제 905호는 학봉김성일종손가소장전적(鶴峰金誠一宗孫家所藏典籍)으로 56종 261책이 지정되어 있다.
지정된 전적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국조오례의』, 『삼강행실도』등 28종 156책이 지정되었고, 필사본 중에서는 『퇴계사전초』, 『북정일기』등 27종 85책이 지정되었다.
이 전적류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체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각종 고문서 중에서 보물 제 906호로 지정된 학봉김성일종가소장고문서는 17종 242점이 일괄 지정되어 있다. 종손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교지, 교서, 유서, 재산분배기록인 분재기 등 10,000여 점이나 되지만, 그 가운데 서간문과 제사에 쓰인 제문은 제외되었다. 지정된 문서를 보면 교서 1점, 교지 및 첩지 59점, 첩 4점, 시권 7점 등이다.
문의전화 : 852-2087
학봉 김성일 종손가 소장 전적(鶴峯 金誠一 宗孫家 所藏 典籍)
이 전적(典籍)은 조선의 문신·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일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으로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에서 병과(丙科) 23人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서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이어서 이·병조(吏·兵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고 1576년(선조 9)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다음해에 명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홍문관(臺諫·弘文館)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적정을 살피고 다음해에 돌아 왔다. 이 때 민심의 동요를 안정시키기 위해 적의 침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어 의병을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임란의 타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晋州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후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해원사록(海援 錄)"·"북정록(北征錄)"·"학봉집(鶴峯集)"등이 있다.
이 전적은 56種 261冊으로 먼저 간본(刊本)은 1418년(태종 18) 계미자(癸未字)의 복각자(覆刻字)로 간행된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2책, 1425년(세종 7)에 인쇄된 경자자판(庚子字版)의 "사기(史記)" 14책을 비롯하여 김성일이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등의 내사본(內賜本) 등이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것들로서 28종 156책에 달한다.
그리고 필사본은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인 "호당삭제(湖堂朔製)"·"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해원사록(海援錄)"·"조천록(朝天錄)"·"북정록(北征錄)"등을 비롯하여 각종 서간(書簡)을 첩(帖)으로 만든 "선현유묵(先賢遺墨)"·"용사사적(龍蛇事蹟)"등 28종 85책이다. 이들은 매우 방대하고 우수한 것들이며, 그 중에는 희귀본이 상당히 많아 역사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곧 이들을 통해 조선 전기의 여러 가지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들의 간행에 사용된 활자가 계미자복각(癸未字覆刻)·경자자(庚子字)·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갑인자복각(甲寅字覆刻)·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을해자(乙亥字), 그리고 각종 목판본 등이 있어 당시의 인쇄술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는 동시에 이들을 통해 다른 전적들의 간행 연대도 파악할 수 있다.
또 필사본의 경우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이 11종에 달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김성일이 사환(仕宦)중에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정치·외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운장각유물전시관인 운장각 내에 전시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 고문서(鶴峯 金誠一 宗孫家 古文書)
이 문서는 조선의 문신·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 관한 것으로 17종 242점에 달하는데, 대부분이 김성일 및 그의 후예들에 관련된 각종 고문서(古文書)들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서·유서(敎書·諭書) 각 1점 : 1592년(선조 25) 김성일이 경상도(慶尙道)에서 재직하면서 받은 것
2. 유지(有旨) 3점 : 1578년(선조 11), 1592년 김성일이 받은 것 및 1834년(순조 34) 아산현감 김진(牙山縣監 金鎭華)화가 받은 것
3. 교첩(敎牒) 및 교지(敎旨) 59점 : 김성일과 그의 후손들이 받은 각종 임명장
4. 차정첩(差定帖) 4점 : 1630년(인조 8) 이후 김성일의 후손들이 받은 임명장
5. 시권(試券) 7점 : 김성일과 그의 증손(曾孫)의 각종 시험(試驗) 답안지
6. 시호서경(諡號暑經) 2점 : 1691년(숙종 17) 김성일의 시호(諡號)와 관련 서경문서(暑經文書)
7. 품정절목(稟定節目) 1점 : 1622년(광해군 14) 안동 여강(廬江)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운영에 관한 절목(節目)
8. 입안(立案) 5점 : 16세기 후반 이래의 가옥·노비·전답(家屋·奴婢·田畓) 등에 관한 안동부(安東府)의 입안(立案)
그 외 등장(等狀) 6점, 호구단자(戶口單子) 50점, 분재기(分財記) 6점, 명문(明文) 34점, 완의(完議) 3점, 通文 34점, 致祭文 1점, 設計圖 3점 등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조선 후기의 簡札·祭文 등을 위시한 각종 고문서가 85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운장각학봉종택 내 유물전시관인 운장각에 전적과 함께 전시 되어 있다.
학봉 김성일 종손가 소장 전적(鶴峯 金誠一 宗孫家 所藏 典籍)
이 전적(典籍)은 조선의 문신·학자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1538∼1593)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김성일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으로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명종 1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에서 병과(丙科) 23人으로 급제하여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서 사관(史官)을 겸하였다.
이어서 이·병조(吏·兵曹)의 낭관(郎官)을 역임하고 1576년(선조 9)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다음해에 명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홍문관(臺諫·弘文館)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1590년(선조 23)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적정을 살피고 다음해에 돌아 왔다. 이 때 민심의 동요를 안정시키기 위해 적의 침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다음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경상도 지역에 파견되어 의병을 궐기를 촉구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경상감사(慶尙監司)로서 임란의 타개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다가 晋州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후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해원사록(海援 錄)"·"북정록(北征錄)"·"학봉집(鶴峯集)"등이 있다. 이 전적은 56種 261冊으로 먼저 간본(刊本)은 1418년(태종 18) 계미자(癸未字)의 복각자(覆刻字)로 간행된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2책, 1425년(세종 7)에 인쇄된 경자자판(庚子字版)의 "사기(史記)" 14책을 비롯하여 김성일이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등의 내사본(內賜本) 등이 있다.
이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것들로서 28종 156책에 달한다.
그리고 필사본은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인 "호당삭제(湖堂朔製)"·"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해원사록(海援錄)"·"조천록(朝天錄)"·"북정록(北征錄)"등을 비롯하여 각종 서간(書簡)을 첩(帖)으로 만든 "선현유묵(先賢遺墨)"·"용사사적(龍蛇事蹟)"등 28종 85책이다. 이들은 매우 방대하고 우수한 것들이며, 그 중에는 희귀본이 상당히 많아 역사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 크게 주목되고 있다. 곧 이들을 통해 조선 전기의 여러 가지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들의 간행에 사용된 활자가 계미자복각(癸未字覆刻)·경자자(庚子字)·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갑인자복각(甲寅字覆刻)·재주갑인자(再鑄甲寅字)·을해자(乙亥字), 그리고 각종 목판본 등이 있어 당시의 인쇄술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는 동시에 이들을 통해 다른 전적들의 간행 연대도 파악할 수 있다.
또 필사본의 경우 김성일의 자필초고본(自筆草稿本)이 11종에 달하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김성일이 사환(仕宦)중에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의 정치·외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운장각유물전시관인 운장각 내에 전시되어 있다.
하회마을
1.마을의 특징
낙동강이 큰 S자 모양으로 마을 주변을 휘돌아 간다. 그래서 하회(河回)라고 했다. 오른편 안동시에서 흘러 나와 왼 편으로 흘러간다.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을 주민 및 가옥
하회마을은 현재에도 주민이 살고 있는 자연마을이다. 한말까지 350여 호가 살았으나 현재는 150여 호가 살아가고 있다. 마을 내에는 총127가옥이 있으며 437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27개 가옥 중 12개 가옥이 보물 및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태백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과 북애(北厓)를 이루고, 일월산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芙蓉臺)를 이루어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이 S자형으로 감싸 돌아가므로, 하회마을을「山太極 水太極 - 산과 물이 태극 모양」또는「蓮花浮水形-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 부른다. 풍수지리에 따른 마을의 주산(主山)을 화산(花山)이라 부르고, 부용대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화천(花川)이라 함은 연화(蓮花)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한다.
세거(世居)한 성씨(姓氏)들
하회마을의 풍산류씨의 세거 이전에는 허씨(許氏)와 안씨(安氏)가 먼저 세거하였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래되고 있으며, 하회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었다는 구전(口傳) 및 강 건너 광덕동의 건짓골에 허정승(許政丞)의 묘가 있어 지금도 해마다 류씨들이 벌초를 하고 있으며, 숭정(崇禎)15년(1642)의 동원록(洞員錄)에는 류씨 이외에도 극히 적은 가구의 허씨와 안씨(安氏)가 함께 기재되어 있다.
풍산류씨(豊山柳氏)의 입향(入鄕)에 관한 전설(傳說)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하회마을의 전래 놀이
-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을 위한 놀이와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병존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 ⇒ 굿을 겸한 탈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선유줄불놀이 ⇒ 시회(詩會)를 겸한 선유(船遊) 놀이
병산서원(屛山書院 :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은 고려말부터 이어져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前身)이다. 선조 5년(1572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諡號 文忠公 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1607년 서애선생이 타계하자 광해군 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儒林)과 뜻을 모아 사당(祠堂)인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광해군12년(1620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인조9년(162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복례란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는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고도 한다.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건물로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입교당의 석축과 아궁이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2단으로 석축을 쌓았으며,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높은 쪽은 건물의 기단으로, 낮은 쪽은 사람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궁이는 1.8m의 기단 양끝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데, 건물의 전면에 있는 것이 다른 건물에서는 찾기 힘들다.
장판각(藏板閣)
목판 및 유물을 보관하던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습기를 줄이기 위해 정면 3칸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사진에서와 같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신문(神門)
서원에 내3문(內三門)에 해당하며, 향사(享祀) 때에 제관(祭官)들이 출입하였다. 정면 3칸으로, 솟을 3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사당의 출입문답게 붉은 색칠을 하여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고 있다.
존덕사(尊德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위패와 수암(修巖) 류진(柳袗)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祠堂)이다. 가공(加工)된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변형된 翼工形(익공형)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되어있고, 전면 좌우에 계단을 두고 있다.
정료대(庭燎臺)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로서, 마당 좌우에 1쌍이 있는데, 사발 형태의 돌 위에 관솔(-소나무의 송진이 많이 엉긴 부분) 가지나 기름 등을 태워 불을 밝혔다. 팔각형의 기둥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의미하고 있다.
관세대(官洗臺)
제향(祭享)시 제관(祭官)이 손을 씻는 세수 대야를 올려놓는 석조물로서 네모난 형태의 역사다리 모양을 취하고 있다. 위가 넓은 것은 대야를 올려놓기 안정되게 하고. 아래가 위 보다 조금 비스듬히 들어간 것은 가까이 가서 씻기 수월하게 하기 위한 설계로 생각된다.
병풍을 펼친 듯한 병산
서원 앞에는 노송들과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병풍(屛風)을 펼쳐놓은 듯한 병산(屛山)이 있다.
화천서원(花川書院 : 경상북도기념물 163호)
화천서원은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諡號 文敬公 1539-1601년) 선생의 학덕(學德)을 흠모한 유림(儒林)들이, 정조10년(1786년) 9월에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봉안하였고, 그 18년 뒤인 순조 3년(1803년)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선생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을 종향(從享)했는데, 두 분 모두는 사승 관계에 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춘추로 향사해오다 고종 5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
그 후,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여러 건물을 복원 1996년 서원을 완성하고 복설고유를 올렸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경덕사
서당인 경덕사에는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선생을 배향하였으며, 그 후 제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공과 종손자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공을 배향하였다.
숭교당
강당인 숭교당 정면에는 화천서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고종 5년 화천서원의 훼철시에 주소와 함께 남은 건물이다. 좌우로 방이 있는데 좌측은 입교재(立敎齋)라 하고, 우측은 사성재(思誠齋)라 한다.
영모각(永慕閣 : 박물관)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물을 보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충효당 사랑채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6월에 개관하였으며 1977년 6월에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명칭은 서애 선생이 쓴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왔다. 풍산류씨 세계(世系)를 집록한 책으로, ‘영모’는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린다는 뜻이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국보132호-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보물160호-류성룡종손가문적(柳成龍宗孫家文籍) 11종 22점과 보물460호-류성룡종손가유물(柳成龍宗孫家遺物) 가운데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보물160호는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군무를 총괄하던 서애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기록과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문건과 자료들이 일괄 지정된 것이다. 보물460호는 류성룡 선생이 직접 쓴 것과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양진당(養眞堂 : 보물 제306호)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 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이조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이조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충효당(忠孝堂 : 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다.
화경당(和敬堂 : 중요민속자료 제84호)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화경당은 마을북쪽 99칸 집으로 불러졌으며,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다.
북촌댁은 하회마을에 있다. 당호는 화경당(和敬堂)이다.
하회는 풍산 류씨 동족마을로 빼어난 자연환경과 오랜 삶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는 명문의 동성마을이다.
하회에서도 북촌의 중심에 자리 잡은 북촌댁은 단순히 72간의 집이 커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1797(정조 21)에 처음 건물이 세워진 뒤 1862(철종 13)에 제 모습을 갖추게 된 북촌댁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흐트러짐 없이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 강건하고 온화한 모습으로 북촌을 지키며 하회의 긍지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북촌댁의 역사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으며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이다.
북촌댁은 석호 류도성 공의 별호(別號)인 수신와(須愼窩 : 모름지기 수, 삼갈 신, 움막 와 : 어려운 이웃을 의식해 언제나 삼가면서 겸손하라는 뜻)정신을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작천고택(鵲泉 古宅) (중요민속자료 제87호)
류시주가옥은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것이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공의 호를 따「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건축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염행당(念行堂) (중요민속자료 제90호)
충효당과 더불어 하회의 남쪽을 대표하는 남촌댁(당호 염행당)은 정종21년 지은 99칸의 건물로서 하회마을 남쪽 사대부의 가옥을 대표하였으나, 1954년 화재로 안채와 사랑채가 소실되고, 현재는 대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다. 많은 도서와 진귀한 골동품들이 그 때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은 문간채는 솟을 대문을 두었으며, 안채와 사랑채의 구들연기를 하나의 큰 굴뚝으로 뽑아낼 정도로 사대부집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건물이었다. 별당채는 별도로 일곽을 둘러 조성하여 후원 별당의 아취가 느껴진다. 벽체의 화방담은 화경당(북촌)의 화방담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가식이나 과장 없이 천연덕스럽게 장식하였는데, 기와쪽을 이용하여 석쇠 무늬를 바탕으로 희(囍)자와 수(壽)자를 만들었다.
양오당(養吾堂 : 중요민속자료 제91호)
이 집의 당호는 양오당(養吾堂) 이고 주일재(主一齎)는 류후장(柳後章 1650~1706)의 아호이다. 이 집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증손인 류만하공이 충효당에서 분가할 때 지은 집으로 그의 아들인 류후장공이 증축하였다. 마당에 들어서면 사랑채가 정면에 보이고, 좌측에는 작은 담을 쌓아 놓았는데, 이것을 내외담이라 하며, 안채로 통하는 문 앞에 내외담을 쌓아둠으로써 문을 열어도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주일재는 사랑채, 안채, 사당, 광(곡식 등을 넣어 두는 곳)채가 있다.
하동고택(河東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 부른다. 건축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공이 조선 헌종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집이다.
특이한 점은 대문채는 초가집이지만 사랑채와 안채 등은 기와집인데, 이 집의 창건자가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하나는 안채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 가사를 담당하는 부녀자들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원지정사(遠志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5호)
서애 선생이 선조 9년 (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빈연정사(賓淵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6호)
이 건물은 민속놀이 마당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어서 화천을 사이에 두고 부용대와 겸암정사가 바로 건너다보인다. 겸암 선생은 선조16년(1583년)에 진보현감으로 계셨는데, 모친의 병환으로 사퇴한 후 이곳을 서재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크지 않은데도 방보다 대청을 더 중요시하여 온돌방 칸살은 좁게 하고 대청 칸살은 넓게 한 것이다. ‘빈연(賓淵)’은 정사 정면에 위치한 부용대 아래의 깊고 맑게 흐르고 있는 못을 말한다.
옥연정사(玉淵精舍 :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노후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승려 탄홍(誕弘)이 스스로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19년(1586)에 완성한 우정의 산물로 선생의 덕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다.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건물의 특징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터가 넓고 평탄한 것과, 사랑채와 별당채는 남향으로 , 안채와 행랑채는 동향으로 지은 것이다.
겸암정사 謙巖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9호)
겸암정사는 겸암(謙巖) 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우고 후에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의 서쪽 강의 흐름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 화천 상류에 남향으로 자리 잡아 세워진 집으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의 하나이다. 터가 우묵하니 좁고 정사 앞 큰 나무들에 가려져 마을 쪽에서는 낙엽 진 겨울 한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정사 쪽에서 보면 맞은 편 백사장과 만송정의 솔숲, 마을의 여러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풍광을 [겸암정사기]를 쓴 대산 이상정은 "무릇 흰 모래사장과 옥 같은 자갈의 벌이 넓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백 길 푸른 절벽이 우뚝한 밑으로 푸른 강물이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데, 운연은 아득히 수림 사이에 엉키어 흐릿하게 보여 아침과 저녁으로 변화하는 이취의 장면을 모두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아늑한 집안의 뜰을 조심스레 거니는 사이에 그 소유한 바가 이미 넉넉하고 많지는 않지만, 정자가 위치한 곳은 두 암반 사이에 서 있어 골짜기가 넓고 깊으나 집은 그윽한 곳에 있고 지세는 높아 강기슭을 따라 지나가면서 옆으로 비껴 보면 벼루의 암벽과 칡넝쿨 사이로 은은하게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하여 왕왕 정자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대저 있어도 없는 것 같고, 안으로는 부유하면서도 밖으로는 검소해 보이는 것은 모두 '겸(謙)'에 가까운 뜻이다."라고 하였다.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홑집으로 'ㄱ'자형이며 사랑채인 정사는 겹집 형태의 일(一)자형으로 앞 퇴를 다락집형으로 한 것이 특색이다. 겸암정사에 게시된 현판 중에 겸암정(謙巖亭)은 스승인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의 친필이다.
만송정숲(萬松亭 : 천연기념물 제473호)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 숲이다.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은 76년 전(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는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장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뱃놀이와 함께 펼쳐졌다고 하니 그 풍류를 짐작할 수 있겠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줄불놀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수십 년간 중단되다가 최근 다시 이어지는 전통놀이이다.
중요민속마을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그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그리고 맞은편의 부용대와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마을 숲으로 그 역사적ㆍ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부용대
소재지 :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소나무 숲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하회마을 관광 백미 중의 하나로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처음에는 북애(北厓)라 했는데, 이는 하회의 북쪽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나룻배 이용⇒요금 : 왕복 3,000원 문의: 강영구(011-502-4193), 류희중(010-4154-1315)
안동답사자료집-20140409.hwp
첫댓글 답사 자료를 잘 봤습니다. 안동 서부 지역 답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