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과 중공군의 진지가 되어버린 압구정리
1995.10.01 압구정 마을의 역사 글 / 임 시 현
현재 60세를 넘은 세대들은 근대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중에 가장 험난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으로 보고 싶다. 일본 식민지하에서 태어나 가난과 압박으로 살았고 태평양 전쟁에서 광복을
맞자 좌우 사상운동에 시달렸고 다시 6.25남북전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며 살아온
세대이며 나도 광복이 되면서 중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6월25일 일요일 6.25남북전쟁이 시작 되었다.
이때 압구정리에도 건전지 라디오를 가진 집이 있어 전란에 뉴스는 즉시 알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압구정리 사람들은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마 하는 마음에서 들에 나가 일을 했다.
26일 학교에 들어갔으나 휴교령이 발표되어 학생들이 돌아가고 거리가 심상치 않았다.
27일 방송에서는 국군이 인민군을 무리치고 북진하고 있다면서 계속 방송을 하지만 비가내리는
북쪽하늘에서는 천둥 번개 치는 소리가 연속 나며 시내에서는 피난민들이 강을 건너 몰려왔다.
압구정리 사람들도 일손을 놓고 갈팡질팡 비를 맞으며 이집 저집 다니며 소식듣기에 바빳다.
밤이 되고 비는 오는데 피난민들이 강을 건너 몰려오면서 인민군이 미아리까지 왔다고 한다.
압구정리 사람들도 공포의 밤을 새우며 피난 갈 준비를 서둘렀다. 28일 새벽 3시 한강다리
폭파하는 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불안했고 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포탄은 압구정리
상공을 넘어가고 아침부터 집집마다 노인들은 남아서 집을 지키고 방향도 없이 보따리 하나씩을
지고 우선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우왕좌왕 하다 남들이 나서니까 나도 따라 나선 것이니 우선 목표는 십리 밖의 촌마을
친척을 찾아가는 것이다. 친척집에 가도 반가울 때가 아니다. 일주일을 다녀도 광주군내였다.
인민군이 오산을 지나 대전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피난민들의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에 피난이라는 것은 자기 집을 나와 남의 집으로 서로 옮겨가는 것이 곧 피난이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무명 심이었다.
인민군이 승리하며 남쪽을 점령하니 공산주의 통치하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식량난과 강제
의용군 모집을 피해 다니는 것이며 압구정리에서도 의용군에 간 사람이 있다. 9월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시작하고 18일에는 압구정리에 유엔군이 들어와서 서울을 공격하기 위하여 탱크
약50여대를 번말에서 구렁박 언뎅이 까지 배치하고 밤이면 서울을 향하여 기관포와 장거리포를
쏘아 구경이 볼만했다.
9월23일 유엔군은 한강을 건너기 시작하여 28일 서울에 입성하고 압구정리는 평온한 옛 마을로
가을농사에 힘을 모았다. 겨울이 되고 눈이 쌓였는데 전선에서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한다고 한다. 민심은 다시 불안하기 시작했고 압구정리에서도 국군에 징병되고 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민방위군이라고 제이 국민병에 해당되는
만17세부터40세까지 남자를 집단 후송시키기 위하여 동리단위로 중대를 편성 방위장교 중대장 인솔
하에1951년1월4일 집을 떠나 남하했다.
동리마다 행군하는 길이 다르고 잠자는 마을이 달랐다. 그러나 피난민들이 서울 경기 충청등에서
일시에 남하하는 것이라 가는 곳 마다 인산인해요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질서가 있을 수 없다.
압구정리 중대는 고향을 떠나 경안 장호원 문경새재를 넘어 삼랑진까지 걸어서 7일간 죽음의 고비를
넘어 이미 마련된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신체검사를 하고 군에 입대한 사람보다 대부분
불합격으로 수용소를 나와 먹을 것도 없이 거리를 방황하다 병들고 굶어죽었다. 이 현황을 우리나라
국사에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라고 크게 기록을 남겼다.
1951년1월4일 국민방위군의 집단 후송을 위하여 국고 24억환 양곡 5만2천석을 배정 했으나 군
고위층에서 착복하고 현지에서는 민폐를 끼치는데 한계가 벅차서 무수한 병자를 내고 수천 명이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 뒤늦게 안 국회에서는 5월12일 국민방위군을 해산과 동시에 책임자
방위군사령관 육군소장 김윤근등 간부4명을 사형했다.
압구정리 사람들은 각각 헤어져서 방황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도 많았고, 도중에 현지에서 군에
자원입대한 사람도 있다. 나도 대구에 와서 공군에 자원입대 했다. 전투는1951년3월2일 서울 한강을
도강하기 약 일주일 전에 유엔군은 압구정리에 다시 와서 서울 공격을 위해 진을 치고 작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작전은 간단하지 않았다. 유엔군은 주간에는 압구정리 야산에 진을 치고 공격하다 야간에는
십리 밖으로 후퇴하고 중공군은 야간에 강을 건너와서 민가에서 주둔했다.
이렇게 매일 압구정리는 주간에는 유엔군, 야간에는 중공군진지로 바뀌다 보니 유엔군은 압구정리
주민 때문에 작전을 할 수 없어 유엔군은 압구정리 사람들을 청계산 밑으로 피신 시켜놓고 압구정리
마을 집들을 전부 불태워 버렸다. 소문에 의하면 이 마을이 3일간 불에 탔다고 한다.
중공군은 나타나지 못했고 유엔군은 작전을 쉽게 끝냈다. 그러나 압구정리 사람들은 6.25전쟁 때문에
재산도 잃고 사람도 잃은 집이 많다.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압구정리 사람들은 재가 된
집터에 움막을 짓고 때는 봄이어서 다시 들로 나가 농사를 시작했다. 보상받지 못한 압구정리 마을
사람들의 한은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나는 이때부터 압구정리를 떠나 살았기 때문에 이후의
압구정리 동정은 잘 알 수가 없어 이11회로 압구정마을의 역사는 끝을 맺는다. 지금까지 미숙한 저의
글을 읽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지면이 허락되면 다른 글로 독자를 대할까 합니다.